장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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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재성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좌익 운동가이다. 1908년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 서석보통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를 연구했고, 일본 유학 중에도 항일 운동을 지속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청년 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좌익 활동으로 체포되어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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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성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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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장재성 |
출생일 | 1908년 11월 20일 |
출생지 | 대한제국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면 금계리 (現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동구 서남동) |
사망일 | 1950년 7월 5일 (만 41세)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독립운동가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2. 소년시절
張才性|장재성중국어은 1908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현 광주광역시)에서 아버지 장원용과 어머니 최예언 사이에서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원용은 광주면의 회계 공무원이었다. 장재성은 어렵지 않은 가정 형편 속에서 광주서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광주 기독청년회는 1920년부터 매년 광주 소년 야구대회를 개최했는데, 이 대회에는 누문동/북동팀, 양림팀, 남동팀, 대인팀, 형평사 팀(백정들의 모임)의 5개 팀이 출전했다. 장재성은 이 대회에서 남동팀의 주요 선수로 활약했다. 이 소년 야구대회의 우수 선수들을 중심으로 '광주대표팀'이 구성되었는데, 단장은 김철주, 투수는 김복실, 포수는 최인봉(후일 최인식으로 개명)이었고, 선수로는 장재성, 최동문, 김태봉, 문수명, 전길언, 서형남 등이 있었다.[1]
1908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에서 아버지 장원용(광주면 회계공무원)과 어머니 최예언 사이에서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어렵지 않은 가정형편으로 광주서석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광주 기독청년회는 1920년부터 매년 광주 소년 야구대회를 개최했는데, 장재성은 남동팀의 주요 선수였다. 이 소년야구대회 우수 선수들을 중심으로 '광주대표팀'이 구성되었고, 장재성도 선수로 참여했다.[1]
장재성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독립운동가이다. 1926년 11월 3일, 광주지역 학생들의 비밀 지하조직인 성진회(醒進會)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 15명으로 조직되었다. 성진회는 장재성, 왕재일, 박인생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으며, 조선공산당 전남지부 위원장 강석봉과 청년학생부 책임위원 지용수가 배후에 있었다. 성진회는 조선 민족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목표로, 우선 공산주의 이론을 연구했으며, 총무에 왕재일, 서기에 박인생, 회계에 장재성을 선출하고 매월 2회씩 사회주의를 연구했다.
3. 청년시절
1926년 11월 3일, 장재성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했다. 성진회는 "궁극적으로는 조선민족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우선 공산주의 이론을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성진회는 총무 왕재일, 서기 박인생, 회계 장재성으로 결정하고 매월 2회씩 만나 사회주의를 연구했다. 회원은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광주농업학교 학생을 비롯한 15명이었다.
1927년 3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장재성은 일본 도쿄에 있는 주오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유학 생활 중에도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활동을 지속했다.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 연구모임 중 하나인 신흥과학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신흥과학연구회는 1926년 11월 결성되어 기관지 <신흥과학>을 발행했으며, 1928년-1929년 당시 학생운동 이론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장재성과 함께 동경 경시청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사람들은 김태일(주오 대학), 최동문(메이지 대학), 최인식(법정대학), 김송우(와세다 대학), 김삼봉(와세다 대학), 김창모(동의東醫대), 김백원(법정대학), 김응복(전수專修대) 등이었다. 장재성은 유학 중에도 성진회원들과 연계를 맺고 있었고, 방학 때면 광주에 돌아와 일본에서 입수한 사회과학 서적들을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 항일운동
1927년 3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장재성은 일본 주오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유학 중에도 신흥과학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는데, 이 연구회는 1926년 11월 결성되어 기관지 <신흥과학>을 발행했으며, 1928-29년 당시 학생운동 이론에서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장재성은 김태일(주오대), 최동문(메이지대), 최인식(법정대) 등과 함께 동경 경시청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았다. 또한, 유학 중에도 성진회원들과 연계를 갖고 방학 때면 광주에 돌아와 후배들에게 사회과학 서적을 나누어 주었다.
4. 1.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지휘부
1929년 6월, 주오 대학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장재성은 광주 지역 내 각 학교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독서회를 통합하여 독서회 중앙부를 조직하고 책임비서로서 조직을 이끌었다.[1] 독서회 중앙부는 각 학교별 독서회 조직과 연락을 담당했으며, 중앙부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졌다.[1]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이 발생하자, 장재성은 광주청년동맹 간부들과 함께 전국적인 항일 운동을 계획했다.[1] 장재성은 광주 지역 각 학교의 시위 지도를 맡아 광주고등보통학교, 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학생들과 연락하여 시위를 조직했다.[1]
11월 12일, 학생들은 "식민지적 노예교육 철폐", "일본 제국주의 타도", "피압박민족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고, 장재성이 조직한 독서회원들이 유인물을 배포하며 시위를 주도했다.[1] 이 시위는 독서회 중앙부 책임비서였던 장재성이 총지휘했다.[1]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신간회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평가받는다.[1]
장재성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고, 대구복심법원(항소심)에서 4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1] 이는 학생운동 관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1]
4. 2. 신흥과학회사건
1934년 출소한 장재성은 부모의 권유로 중단했던 대학 학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주오 대학 상경과를 졸업했다. 이때 1929년 10월 결혼했던 부인 박옥희도 함께 일본에 가 일본에서 2년제 전문학교를 마쳤다. 일본에서의 생활 역시 계속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나 신흥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이 시기 신흥과학연구회 활동과 관련하여 1937년 다시 형무소에 구속되어 경남 왜관으로 이송되었으나, 기소되지 않은 채 미결 상태로 3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하다가 불기소 처분되어(일제시대에는 미결 구금일수의 제한이 없었음), 1940년에 출소하였다.[1]
광주서중(광주고보가 6년제로 바뀌면서 개칭)의 후배들이 독서회를 만들겠다며 선배인 장재성을 찾아와 독서회 명칭에 자문을 구하자 '''무등회'''로 명명해 주었다.[1] 이 무등회가 1943년의 제2차 광주학생사건을 일으키는 핵심조직이 된다.[1]
5. 해방 후의 활동
1948년 남한의 총선거를 반대하며 북한으로 건너가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대의원 명단에는 장재성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1949년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했으나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1]
6.25 전쟁 발발 직후, 경찰에 의해 좌익사범으로 분류되어 처형당했다.[1]
5. 1. 건국준비위원회와 청년 운동
1945년 8월 17일 전남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최흥종)가 결성된 이후 전남 건준은 신속하게 각 시군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8월 30일 광주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정되었다. 광주시 건준위원으로는 서우석(위원장), 박영종, 장재성(조직부장), 이덕우, 최한영 등 33명이 선출되었다.[1]1945년 11월 3일 광주서중 교정에서 해방 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첫 기념행사가 열렸다. 여기서 장재성은 연설을 하였다.[1]
장재성은 광주 건준 활동 이외에도 청년동맹 전남총연맹에서 활동했다. 그는 1945년 12월 2일 광주 청년동맹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청년동맹은 민주청년연맹으로 개편되었다.[1]
이와 함께 그는 1946년 2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 민주주의 민족전선>(약칭 민전) 결성대회에 전남대표 14명 중 한 명으로 참가하였다. 장재성은 민전 준비위원회에서 총무부 소속으로 활동했지만, 민전의 부서 책임자 선발에서는 배제되었다.[1]
5. 2. 좌익 활동과 최후
1948년 남한의 총선거를 반대하며 북한으로 건너가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9년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했으나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직후, 경찰에 의해 좌익사범으로 분류되어 처형당했다.[1]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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