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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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인식은 1908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조선일보 기자, 호남신문 편집국장, 조선중앙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에는 학생들을 지원하고 관련 내용을 보도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전남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참여하고, 호남신문 편집국장, 조선일보 정경부장 등을 거쳐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1960년 이후 언론계를 떠났다.
2. 생애
2. 1. 생애 초기 (1908년 ~ 1926년)
최인식은 1908년 전라남도 광주읍 마륵리에서 최기호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를 4학년 졸업한 후 1920년 4월 광주숭일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 재학 중 야구부에서 포수로 활동하면서 광주기독청년회(YMCA) 주최 '제1회 광주소년야구대회'에 북동팀의 포수로 출전하였고, 이때 장재성(후일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동자)은 광주 남동팀의 선수로 출전하여 두 사람은 소년 시절부터 친분을 가졌다.
1922년 4월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강매(후일 1931년 조선중앙일보 편집국장) 학감, 이중화, 김성호 선생 등으로부터 민족의식을 교육받고, 야구부와 축구부에서 이영민, 백기주 선수와 함께 활동했다. 여름방학 중에는 광주야구대표팀에 선발되어 김복실(투수), 최동문(후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건립기성회장), 장재성 등과 광주에서 함께 운동했다.
2. 2. 청년 시절 (1926년 ~ 1929년)
1926년 1월 4일 일본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 주최 갑자원(甲子園)구장에서 열린 제9회 전일본 중등학교축구선수권대회에 조선 중등팀으로는 최초로 참가한 배재고보팀의 선수로 출전하였다. 이 경기에서 제9회대회의 우승팀 미게사범(御影師範)팀에게 1회전에 대진되어 0:3으로 완패, 배재팀은 초반 탈락했다. 1927년 4월 연희전문 상과에 진학하였다. 연희전문에서도 야구부의 2루수로 백기주, 이영민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연희전문에서 수학시 유억겸, 백낙준(후일 연세대학교총장, 참의원의장), 조병옥(독립운동가, 후일 민주당대통령후보), 최현배(한글학자), 이순탁(후일 건국후 초대 기획처장)등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민족정신을 교양받았다.
1927년 10월 29일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자, 광주지역의 유지인 큰형 최당식이 참여하고, 2개월후 1927년 12월 11일 큰형 최당식이 신간회 광주지회 기금부장으로 선출된다. 1928년 4월 동경 법정(法政)대학 상과에 진학했다. 이 동경유학생활중 광주 동향인인 장재성(주오대학), 최동문(메이지대학), 김송우(와세다대학), 김삼봉(와세다대학), 김태일(주오대학), 김백원(법정대)등과 사회과학연구에 몰두하며 어울려다녀 동경 경시청의 요주의인물로 되었다. 1928년 7월 일본유학생 야구팀의 일원으로 최인식은 1루수/2번타자를 맡아 참석하여, 5전5승의 전승을 기록하였다. 이때 투수겸 3번타자는 백기주선수였다.
2. 3. 언론인 활동 및 항일운동 (1929년 ~ 1945년)
1929년 3월 조선일보 기자로 취업하여, 9월 조선일보 광주지국 기자로 부임하였다. 광주청년동맹 위원장 장석천이 최인식을 광주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임명하면서,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자 1930년 11월까지 발발 과정, 재판 과정, 옥중소요사건 등을 조선일보에 지속적으로 보도하였다. 광주학생사건 발생 후 1929년 11월 7일 서울에서 조선청년총동맹에서 부건, 조선학생회로부터 이한성, 조선학생과학연구회로부터 권유근, 박일이 조사차 광주에 오자, 이들과 강영석, 장석천과 함께 사건 진상 및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 후 1929년 11월 신간회 광주지회장 겸 조선일보 광주지국장 정수태로부터 시위자금 500원을 장석천(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과 함께 받았다. 제2차 시위(11월 12일)에 사용할 시위 구호와 삐라 구호를 결정하는 데 장석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9년 12월 3일 시위자금을 지원한 후 서울의 상황이 궁금했던 신간회 광주지회장 정수태와 기금부장 최당식(최인식의 큰형)은 서울에 올라왔다가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피검되었다. 형 최당식이 피검된 이후 서울 상황이 궁금해진 최인식은 12월 중순 강영석, 이항발과 함께 평소 이항발과 친분이 있던 고하 송진우의 집을 밤중에 방문, 3천 원을 시위자금으로 지원받았다. 그런데 송진우는 당시 최창학, 현상윤 등과 담소 중이었는데, 마치 이들이 들으라는 듯 "내게 그런 큰 돈은 없소. 저녁 식사나 하시오"라고 말하면서 봉투를 찔러주었고, 밖에 나와 세어보니 3천 원이었다.
1930년 11월 8일 장석천 등이 피검되어 광주청년동맹의 임원 보충이 필요해 이루어진 선거에서 최인식은 집행위원으로 재선임되고, 위원장 대리에는 서재익이 선출되었다. 1932년 1월 항일 비밀결사 전남노농협의회의 세포조직에 가입하였다. 1932년 2월 광주청년동맹의 집행 임원을 사임하였다. 그 후 1932년 6월 2일 전남노농협의회 사건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전 조직이 피검될 때 최인식도 피검되었다. 미결옥고를 치르다가 1933년 11월 18일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되었다.
다시 조선일보사의 입사 권유로 1935년 3월 조선일보에 재입사하고 전남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여름 안창호가 출옥한 후 광주 방문 시 광주 지역 항일 유력 인사들의 환영연을 조직하여, 이런 사유로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1940년 1월 폐간에 대비한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 이훈구 주필, 함상훈 편집국장, 각 도 특파 기자 6명이 참석한 대책회의에 참석하였다. 1940년 8월 조선일보 폐간으로 조선일보를 사임하였다.
2. 4. 해방 후 정치 및 언론 활동 (1945년 ~ 1960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1945년 8월 17일 전남 건국준비위원회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여 선전부장에 피선되었다. 중앙건준이 좌익과 중도인사들만의 조직이었지만 전남건준은 좌우익을 모두 망라한 통합된 건국준비조직이었다. 전남도지사 야기(八木)에게 행정권 인수를 협의하였으나, 야기지사가 중앙건준의 신임장을 가져오면 인수하겠다고 회피함에 따라, 1945년 8월 18일 전남건준 대표단 5명중 한명으로 서울에 갔다. 이때 광주에서 은신, 도피하고 있던 박헌영을 상경하는 트럭에 함께 태우고 서울로 왔다.
1945년 9월 20일 전남건국준비위원회가 전남인민위원회로 바뀌자, 최인식은 원래의 언론인의 자리로 돌아가 전남지역의 최대 신문이었던 호남신문(湖南新聞, 일제시 일인신문 전남신보의 시설과 사옥을 인수)의 편집국장이 되었다. 이때 호남신문의 사장은 이은상이었다. 호남신문은 한글전용 신문이었고, 한국 최초의 가로쓰기 신문으로 한국언론사에 획기적인 존재가 된다.
1946년 8월 18일 미국군정을 비판하는 기사로 호남신문이 2개월간 정간처분을 당하자, 지방지로서 언론자유의 한계를 느끼고, 1946년 10월 호남신문 편집국장을 사임하고, 조선일보 정경부장으로 재입사하게 되었다. 1948년 9월 8일 조선중앙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취임하였다. 조선중앙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기간중 담수회(淡水會, 현 관훈클럽의 전신)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9년 12월 정부가 언론통제를 강화하는 신문지법을 정부법률안으로 국회에 제출하자, 12월 17일 담수회, 신문기자협회, 언론협회와 공동으로 이승만대통령에게 신문지법의 철폐를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 1949년 좌익기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서울신문(일제하 매일신문이 개칭한 것)이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자, 담수회에서는 5월 5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재고를 요청하는 건의서를 발송하였다. 이 건의서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합동통신, 경향신문, 한국일보등 서울의 일간신문과 통신사들의 편집국장이 서명하였다.
1950년 5월 15일 조선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사임하고, 6.25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1년에는 부산 민주일보의 논설위원, 1952년 전반에 처가가 있던 전주에서 태백신문사의 객원 시사평론가로 활동했다. 1952년후반에 고향인 광주에 돌아와 호남신문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호남신문이 적산의 성격을 완전히 벗지 못해 경영권이 정부당국의 입김에 의해 좌우되었다.
1954년 2월 자유당 정부는 당시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이 당내 권력투쟁을 벌리고 있을 때였는데, 이은상은 이범석계열로 지목되어 호남신문의 경영권을 빼앗겼다. 사장이 바뀌면서 최인식도 호남신문 편집국장에서 물러나고, 1954년 2월 목포일보의 주간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하였다.
1955년 6월 조선대학교 총장겸 광주신보 사주이던 박철웅의 청빙을 받아, 광주신보 부사장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광주의 허백련이 이끌고 있던 연진회에 비화가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57년 3월 1일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57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1959년 8월 30여년간의 언론인생활을 정리하는 평론집 '민족의 당면과업'을 출간하였다. 1960년 6월 4.19 혁명의 여파로 광주신보가 폐간되자, 1960년 후반 호남신문 부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호남신문이 수년간의 적자로 폐간하였다. 이로써 언론계를 완전히 떠났다.
2. 5. 은퇴 이후 (1960년 ~ 1985년)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4. 외부 링크
5.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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