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앵글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잭 앵글린은 미국의 컨트리 음악가로, 1936년 조니 라이트와 함께 듀오 "자니 앤 잭"을 결성하여 가수로 데뷔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솔로 가수로 활동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자니 앤 잭"으로 활동하며 1952년 그랜드 올 오프리의 고정 멤버가 되었다. 1963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음악적 유산은 여러 TV 프로그램과 사운드트랙에 사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국의 컨트리 기타 연주자 - 쳇 앳킨스
미스터 기타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미국의 컨트리 음악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인 쳇 앳킨스는 독창적인 기타 연주 스타일과 수많은 히트곡 제작, 그래미상 14회 수상,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 등으로 컨트리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미국의 컨트리 기타 연주자 - 듀언 에디
독특한 "트왕" 사운드로 유명한 미국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듀언 에디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큰 인기를 얻고 아트 오브 노이즈와의 협업으로 재기하여 그래미상을 수상했으며, 2024년 사망 후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 전영택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전영택은 1919년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화수분〉, 〈소〉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개신교 관련 간행물 발행, 중앙신학교 및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 이곤 (1919년)
이곤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 이강의 아들인 조선 왕족으로, 토지 매각 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생활고를 고려받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말단직을 거쳐 국회 수위로 근무하다 홍릉 거주지 철거 과정에서 문화재 관리국과 갈등을 겪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미국의 작사가 - 마빈 게이
마빈 게이는 소울, R&B, 펑크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고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흑인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배우이다. - 미국의 작사가 - 니콜 키드먼
니콜 키드먼은 호주 영화로 데뷔하여 할리우드에서 성공을 거둔 호주계 미국인 배우이자 제작자로, 《디 아워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에미상과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하는 등 연기력과 영향력을 인정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잭 앵글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잭 앵글린 |
출생일 | 1916년 5월 13일 |
출생지 | 윌리엄슨 카운티, 미국 |
사망일 | 1963년 3월 8일 (향년 46세) |
사망지 | 매디슨, 미국 |
직업 | 가수 |
활동 기간 | 1938년 – 1963년 |
관련 그룹 | The Anglin Brothers (디 앵글린 브라더스) Johnnie & Jack (조니 & 잭) |
음악 스타일 | |
장르 | 컨트리 음악 |
2. 생애
1933년 1년 연하의 루이즈 웰스(Louise Wells)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3] 1936년 조니 라이트(Johnnie Wright)와 함께 컨트리 음악 듀오 "자니 앤 잭(Johnnie & Jack)"을 결성하여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로 가수 데뷔를 하였다.[3] 1937년에는 컨트리 음악 보컬 그룹 "앵글린 브라더스(The Anglin Brothers)"에서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고, 1938년 솔로 가수로 데뷔하였다.
1963년 3월 8일, 미국 테네시주 매디슨으로 가던 중 내슈빌에서 교통 사고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나이 향년 47세였다.[7]
2. 1. 초기 생애
잭 앵글린은 미국 테네시주 컬럼비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기타를 배웠다. 14세에 악보를 읽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노래하고 기타를 연주했다. 1930년, 음악가가 되기 위해 가족 농장을 떠나 테네시주 내슈빌로 이사했다. 잭과 그의 형제 밴, 짐은 앵글린 트윈스 앤드 레드라는 이름으로 공연했다. 이 트리오의 음악이 남부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자, 그룹은 앵글린 형제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 가족 밴드는 1939년에 해체되었다. 1933년 1년 연하의 루이즈 웰스(Louise Wells)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2. 2. 형제들과의 음악 활동 (1930년대)
1930년, 젊은 잭 앵글린은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좇아 가족 농장을 떠나 테네시주 내슈빌로 이사했다. 잭과 그의 형제 밴, 짐은 앵글린 트윈스 앤드 레드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이 트리오의 음악이 남부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자, 그룹은 앵글린 형제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 가족 밴드는 1939년에 해체되었다.[1]2. 3. 조니 라이트와의 만남과 듀오 결성 (1930년대 후반 ~ 1940년대)
1933년 1년 연하의 루이즈 웰스(Louise Wells)와 결혼하였으며, 1936년 조니 라이트(Johnnie Wright)와 함께 컨트리 음악 듀오 "자니 앤 잭(Johnnie & Jack)"을 결성하여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로 가수 데뷔를 하였다.[3] 형제 밴드가 해체될 무렵, 잭은 지역 양말 공장에서 일하며 미래의 아내 루이스와 그녀의 오빠 조니 라이트를 알게 되었다. 당시 라이트와 그의 아내 뮤리얼(키티 웰스) 그리고 루이스는 WSIX-AM에서 조니 라이트 앤 더 하모니 걸스로 활동하며 고정 출연진이었다. 잭은 "조니 라이트 앤 더 해피 로빙 카우보이즈, 잭 앵글린과 함께"라는 이름으로 라이트의 사이드 공연에 합류했다.라이트와 앵글린은 1936년 루이빌/내슈빌 홍수 피해자를 위한 자선 콘서트에서 하모니 걸스의 공연 후 "The Backwater Boys"라는 예명으로 듀엣으로 처음 함께 라이브 공연을 했다. 조니와 잭은 생일이 같다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유대감을 공유했다.
그 공연 이후, 라이트와 앵글린은 파트너십을 공식화하여 "조니 앤 잭" 음악 듀오를 결성했다.[3] 이 그룹은 침울한 가사, 가정적인 하모니, 그리고 진정한 남부 미국풍 비트의 조합으로 유명했다.[3] 앵글린은 리듬 기타와 테너 보컬을 맡았고, 라이트는 리드를 맡았다. 앵글린은 그들의 몇몇 노래에서 박을 악기로 사용하여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1년 동안 듀오는 RCA 빅터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으며, 마지막 계약은 데카 레코드와 체결했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0년대 초)
잭 앵글린은 내슈빌로 돌아가 로이 아큐프의 스모키 마운틴 보이즈 밴드의 일원으로 그랜드 올 오프리에서 공연을 시작했다.[5]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이 밴드에서 활동했으며, 잭은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4년 동안 유럽에서 복무한 후, 앵글린은 의무병 상사로 전역했다.[6]
2. 5. "조니 앤 잭"의 성공과 활동 (1940년대 후반 ~ 1963년)
1936년 조니 라이트(Johnnie Wright)와 함께 컨트리 음악 듀오 "자니 앤 잭(Johnnie & Jack)"의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로 가수 데뷔하였다.[4] 1940년까지 테네시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하다가 전국 투어를 하기로 결정했고,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존니 라이트는 목공 도구들을 팔아 기름값을 충당했다. 2년 후 이 그룹은 기름값 문제로 다투다가 해체되었다.[4] 잭 앵글린은 내슈빌로 돌아가 로이 아큐프의 스모키 마운틴 보이즈 밴드의 일원으로 그랜드 올 오프리에서 공연을 시작했다.[5]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이 밴드에서 활동했으며, 잭은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4년 동안 유럽에서 복무한 후, 앵글린은 의무병 상사로 전역했다. 제대 후 존니와 잭은 다시 함께 투어를 시작했다. 1947년에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 반 쇼를 창설했고, 1952년에 그랜드 올 오프리의 고정 멤버가 되었다. 오프리와 함께 투어를 시작한 존니와 잭은 5개국을 돌며 연간 약 160934.00km를 이동하고 100곡 이상의 노래를 작곡하며 3,000번 이상 함께 공연했다. "빠르고 재미있는" 공연으로 유명했던 이 듀엣은 "Poison Love", "Crying Heart Blues", "Ashes of Love", "Hummingbird"와 같은 "잘못된 사랑" 노래를 불렀다.[6]
2. 6. 비극적인 죽음 (1963년)
1963년 3월 8일, 잭 앵글린은 테네시주 매디슨의 뉴 듀 웨스트 애비뉴에서 벗어나 12피트 깊이의 도랑으로 굴러 떨어져 나무에 충돌했다.[7] 이 사고로 잭 앵글린은 두개골 골절로 즉사했다.잭 앵글린의 죽음은 컨트리 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주 초에 그랜드 올 오프리의 다른 멤버 4명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잭 앵글린은 사망한 날 아침, 카우보이 코파스와 랜디 휴즈의 합동 장례식에 참석한 후 호크쇼 호킨스의 추모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팻시 클라인의 추모식을 준비하기 위해 이발소로 향했는데, 이 때문에 늦어져 클라인의 장례식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서두르다가 과속으로 차량 통제력을 잃게 된 것이다.
잭 앵글린은 카우보이 코파스와 같은 묘지인 테네시주 굿렛츠빌에 묻혔다. 그는 어린 아들 테리와 아내 루이즈를 남겨두었다. 잭 앵글린과 조니 라이트는 죽기 2주 전에 곧 순회공연할 두 곡의 신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3년 자서전 ''By The Seat of my Pants''에서 음악가 버디 킬렌은 잭 앵글린이 장례식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며 사고로 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8] 그러나 버디와 조니 라이트 사이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조니는 장례식에서 버디에게 그만두라고 말했다.
잭 앵글린의 사망 후, 1983년 그의 가족은 올드 히코리 대로에 그의 음악 유산을 기리는 박물관을 열었다. 20세기 후반에 잭 앵글린의 노래 두 곡이 텔레비전 쇼 The Marty Stuart Show와 God's Bloody Acre- Kitty Wells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Fuller Up Dead Musician Directory
https://archive.toda[...]
2019-01-25
[2]
서적
Encyclopedia of Country Music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9-01-25
[3]
간행물
Rhumba In the Hills
https://www.newspape[...]
2019-01-25
[4]
간행물
Country Queen Kitty Wells Calls It a Career
https://www.newspape[...]
2019-01-25
[5]
간행물
Services Set for Foster: Classic Steel Gutairist
https://www.newspape[...]
2019-01-25
[6]
뉴스
Johnnie Wright Country Singe and Bandleader Dies at 97
https://www.nytimes.[...]
2019-01-25
[7]
간행물
Car Wreck Claims 5th Opry Member
https://www.newspape[...]
2019-01-25
[8]
서적
By the Seat of My Pants: My Life in Country Music
https://archive.org/[...]
Simon & Schuster
1993-06-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