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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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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봉은 오나라의 장군으로, 어려서부터 용감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손권, 손량, 손휴, 손호 시대를 섬기며 관동장군, 멸구장군, 안풍후, 대장군 등을 역임했다. 특히 손침 제거에 기여하여 대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촉한 멸망 당시 위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말년에는 손호의 미움을 사 가족이 임천으로 이주되었고, 27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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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청나라 시대 삽화에 묘사된 정봉
청나라 시대 삽화에 묘사된 정봉
이름정봉
로마자 표기Ding Feng
승연
로마자 표기Chengyuan
관직
우대사마 (우대사마)(시적과 함께)
임기 시작264년 9월
임기 종료271년
군주손호
후임육항
임기 시작264년 9월
임기 종료271년
군주손호
임기 시작258년
임기 종료264년 9월
군주손휴
임기258년
군주손량
생애
출생지허난성구시현
사망일271년
직업군사 장군, 정치인
가족 관계
형제정부 (丁封)
아들정온 (丁溫)
작위
작위안풍후 (安豐侯)

2. 생애

어려서부터 용감하여 소장(小將)이 되어 감녕, 육손, 반장 등에게 속했다. 수차례 정벌에 따라가 싸움마다 항상 군대의 으뜸이 되었으며, 매번 적 장수를 베고 적의 깃발을 뽑았고, 자신도 상처를 입었다. 점차 승진하여 편장군이 되었다.[3]

손량이 즉위한 후 관동장군(冠東將軍)이 되었다.[4] 252년 12월 위나라에서 대군을 일으켜 동흥을 공격해 오자, 제갈각을 따라 참전하여 위군 진영을 기습했다. 정봉은 다른 부장들과 달리 위군이 방심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고 단병기만 들게 하여 기습을 감행했다. 위군은 방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급습에 성공하여 한종이 이끄는 선봉부대를 무찌르고 한종을 베는 공을 세웠다. 이 패배로 기가 꺾인 위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했다.[7]

255년 관구검의 반란에 가담했던 문흠이 위군에게 패하여 오나라로 쫓겨 오자, 정봉은 호위장군으로 임명되어 손준을 따라 수춘(壽春)에 가 맞이하고, 적의 추격군과 고정(高亭)에서 싸웠다. 정봉은 말을 타고 긴 창(矛)을 들고 적의 진중에 돌입하여, 수백 명의 머리를 베고, 군기(軍器)를 노획했다. 안풍후(安豊侯)에 봉해졌다.[9] 257년 제갈탄이 수춘에서 반기를 들었을 때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좌장군이 되었다.[10]

손휴는 즉위하자, 전횡적인 행동이 심했던 손침을 타도하기 위해, 복심 장포와 계책을 꾸몄다. 장포는 "정봉은 사무적인 능력은 없지만, 교묘하게 계략을 펼치고, 실행력에 뛰어나다"고 하여, 정봉을 계획에 참여시키도록 추천했다. 손휴는 정봉을 불러, 손침 타도의 의향을 밝혔다. 정봉은 손침 일족의 힘을 경계하여, 제삿날에 여러 신하들이 모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손침을 붙잡아 참수하도록 진언했다. 손휴는 이 계획을 받아들여, 손침을 유인하여, 장포와 정봉에게 그 자리에서 좌우 사람에게 눈짓을 하게 하여, 손침을 베었다. 그 공적으로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좌우도호(左右都護중국어)를 더했다.[11]

260년에는 가절을 제수받아 서주에 임명되었다.

263년 위군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촉나라가 원병을 요청하자, 정봉은 명을 받고 촉한을 구원하기 위해 수춘부터 성도에 이르기까지 공격을 시작했으나 정봉의 부대가 성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촉나라가 멸망한 후였기 때문에 정봉은 회군했다.[13] 268년 11월에는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과 함께 합비를 공격했으나, 진나라의 여음왕(汝陰王) 사마준(司馬駿)에게 격파당했다.[14] 269년에는 곡양(穀陽)을,[16] 270년 1월에는 와구(渦口)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17] 정봉은 말년에 교만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정봉을 못마땅하게 여긴 손호는 그의 가족들을 임천(臨川)으로 이주시켰다.[20]

271년 12월, 세상을 떠났다.[18]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손권을 섬겼다.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소장(小將)으로 감녕, 육손, 반장 등의 휘하에서 복무하였다. 여러 정벌에 참여하여 항상 선봉에 섰으며, 적장을 베고 적의 깃발을 빼앗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용맹을 떨쳐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3]

2. 2. 손량 시대의 활약

손량이 즉위한 후 정봉은 관동장군(冠東將軍)이 되었다.[4] 252년 위나라동흥을 공격하자, 제갈각을 따라 참전하여 위군을 기습했다. 위군은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습은 성공했고, 선봉장 한종을 베는 큰 공을 세웠다. 이 패배로 위군은 후퇴했다.[7]

255년 관구검의 반란에 가담했던 문흠이 오나라로 망명하자, 정봉은 호위장군으로 임명되어 손준을 따라 수춘에서 문흠을 맞이했다. 정봉은 고정(高亭)에서 추격해 온 위나라 군대와 싸울 때, 긴 창을 들고 적진에 돌입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군기를 노획했다. 이 공으로 안풍후(安豊侯)에 봉해졌다.[9]

257년 제갈탄의 반란 때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정봉은 여장(黎漿)에 주둔하며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오나라 군대는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정봉은 높은 평가를 받아 좌장군(左將軍)으로 임명되었다.[10]

2. 3. 손휴 시대의 활약

258년, 손침은 오나라 2대 황제 손량을 폐위시키고 손휴를 옹립했다. 손휴는 손침이 국정을 장악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장포와 함께 손침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장포는 황제에게 정봉을 추천하며 "정봉은 민정을 다스리는 데 능숙하지 않을지라도, 뛰어난 전략가이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1] 손휴는 정봉을 불러 "손침이 국권을 찬탈하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 그를 제거하는 것을 도와주시오."라고 말했다. 정봉은 "상국(손침)과 그의 형제들은 많은 지지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정의 모든 사람이 우리 편이 아닙니다. 그들과 직접 대결할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 군사들에게 납일 축제 때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11] 손휴는 정봉의 계획에 따라 손침을 궁궐에 초대하여 납일 축제를 함께 즐기는 척했다. 손침이 들어서자 정봉과 장포는 황궁 경비병에게 신호를 보내 그를 살해했다. 정봉은 이 공로로 대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좌우도호(左右都護중국어)의 추가 임명을 받았다.[11]

259년, 정봉은 명목상 서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263년, 조위가 오나라 동맹국 촉한을 정복하기 위해 위의 촉 정벌을 시작했을 때, 정봉은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수춘(壽春, 현재의 안휘성 수현)을 공격하여 위나라의 관심을 촉으로 돌리려 했다. 그러나 촉나라 황제 유선이 이미 위나라에 항복하여 촉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너무 늦었다. 정봉은 촉나라 멸망 소식을 듣고 수춘에서 오나라 군대를 철수했다.[12]

2. 4. 손호 시대의 활약과 최후

263년 위나라가 촉한을 공격하여 곤경에 처하자, 정봉은 촉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수춘부터 성도까지 공격하며 위나라를 견제했다. 그러나 정봉의 부대가 성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촉나라가 멸망한 후여서 회군했다.[13] 268년 11월에는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과 함께 합비를 공격했으나, 서진의 사마준에게 격파당했다.[14] 269년에는 곡양(穀陽)을,[16] 270년 1월에는 와구(渦口)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17] 정봉은 말년에 교만한 모습을 보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손호는 그의 가족들을 임천(臨川)으로 이주시켰다.[20]

271년 12월, 정봉은 세상을 떠났다.[18]

3. 평가

정봉은 손권 때부터 손량, 손휴, 손호까지 4대에 걸쳐 오나라를 섬긴 장수였다. 용맹함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5] 특히 252년 동흥 전투에서는 제갈각을 따라 참전하여 위군 진영을 기습, 한종이 이끄는 선봉부대를 격파하고 한종을 베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7]

258년 손침 제거에 가담하여 손휴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워 대장군으로 승진했다.[11] 263년 위나라의 공격을 받은 촉한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이미 촉나라가 멸망한 후였기 때문에 회군했다.[12]

하지만 말년에 교만해져서 손호의 미움을 샀다.[20] 268년 제갈정과 함께 합비를 공격했으나 진나라 사마준에게 격파당했고,[13] 269년 곡양,[16] 270년 와구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13]

3. 1. 긍정적 평가

손권 때부터 손량, 손휴, 손호까지 4대에 걸쳐 오나라를 섬긴 뛰어난 장수였다. 정봉은 용맹함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오나라의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5] 특히 252년 동흥 전투에서 제갈각을 따라 참전하여 위군 진영을 기습, 한종이 이끄는 선봉부대를 격파하고 한종을 베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7] 이 승리는 오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258년에는 손침 제거에 가담하여 손휴를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 공로로 대장군으로 승진했다.[11] 263년에는 위나라의 공격을 받은 촉한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이미 촉나라가 멸망한 후였기 때문에 회군했다.[12]

3. 2. 부정적 평가

정봉은 말년에 교만해져서 손호(孫皓)의 미움을 샀다.[20] 268년 11월 제갈정(諸葛靚)과 함께 합비를 공격했으나 진나라의 사마준(司馬駿)에게 격파당했고,[13] 269년 곡양(穀陽)을,[16] 270년 1월 와구(渦口)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13]

4. 친족 관계

정봉(丁封)은 동오에서 장수로 복무했으며, 후장군(後將軍)까지 역임했다. 동생 정봉은 형보다 먼저 사망했다.[23]

5. 대중문화 속의 정봉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권이 오의 국주가 되었을 때 모인 장수 중 한 명으로 이름이 거론된다. 적벽 대전 때에는 주유의 부장으로서 서성과 함께 등장하여, 동남풍을 불게 하는 데 성공한 제갈량의 살해와 손부인과의 혼인을 위해 오를 방문한 유비의 포박을 명받지만, 모두 실패한다. 가 침공해 왔을 때에는 서성의 부장으로서 이를 맞아 싸워 장료를 사살하는 무공을 세운다. 손권 사후에는 오를 대표하는 장수 중 한 명으로서 활약한다.

나관중의 연의에서는 손권(孫權)이 손책(孫策)의 뒤를 이은 후 인재를 모을 때 등용된 것으로 나온다. 이후 적벽 대전, 합비 공격, 이릉 전투 등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조비(曹丕)가 공격해왔을 때 장료(張遼)를 화살로 쏴서 죽였다. 그 외에 동남풍을 부르던 제갈량(諸葛亮)이나 강동에서 형주로 빠져나가던 유비(劉備)를 뒤쫓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장료는 정봉에게 사살된 것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으며 정봉이 촉한의 마지막 순간에 촉한을 도와주러 왔다가 촉한이 멸망해서 회군한 것을 나관중(羅貫中)이 높게 평가했으므로 나관중은 그 보상으로 삼국지 연의에서 정봉이 장료를 사살한 것으로 묘사해줬다.[24]

민간 전설에서는 '''쇠구슬'''의 명수로 묘사된다. 제갈량이 정봉 등으로부터 도망갈 때, 허리에 차고 있던 자루에서 쇠구슬을 꺼내어 제갈량의 배 돛대에 조준하고 팔을 들어 올리자,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가 나며 검은 덩어리가 돛대 끝을 향해 날아가 돛을 당기는 활차에 명중, 돛이 떨어져 제갈량의 방을 덮었다. 조운은 당황하여 창으로 그 돛을 치워 제갈량을 구출하고,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올라 동남쪽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사당에 모셔진 정봉의 상에는 두 개의 쇠구슬이 쥐어져 있다.

참조

[1] 서적 Annotations to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Dingwen Printing
[2] 간행물 Sanguozhi
[3] 간행물 Sanguozhi
[4] 간행물 Sanguozhi
[5] 간행물 Sanguozhi
[6] 간행물 Sanguozhi
[7] 간행물 Sanguozhi
[8] 간행물 Sanguozhi
[9] 간행물 Sanguozhi
[10] 간행물 Sanguozhi
[11] 간행물 Sanguozhi
[12] 간행물 Sanguozhi
[13] 간행물 Sanguozhi
[14] 간행물 Zizhi Tongjian 268-12-21
[15] 간행물 Sanguozhi
[16] 간행물 Sanguozhi 269-02-19
[17] 간행물 Zizhi Tongjian 270-02-08
[18] 간행물 Sanguozhi
[19] 간행물 Jin Shu
[20] 간행물 Sanguozhi
[21] 웹사이트 南京考古发现"江表之虎臣"之一丁奉及其家族墓地 http://kaogu.cssn.cn[...] 2021-01-21
[22] 간행물 Song Shu
[23] 간행물 Sanguozhi
[24] 문서 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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