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2해군항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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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762해군항공대는 일본 제국 해군의 항공대로, 1944년 2월 신주에서 창설되었다. T 공격 부대를 운용하며 야간 및 악천후 공격을 통해 미군 항공모함에 타격을 주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대만 해전에서 전력을 소모했다. 이후 특공 작전에 투입되어 오키나와 전투에 참여했으며, 종전 후 해산되었다.
1944년 2월 15일, 일본 제국 해군은 제1항공함대 재건과 기지 항공대 강화를 위해 신주를 기지로 제762해군항공대(이하 762공)를 창설하고 제62항공전대에 편입시켰다. 초기에는 육군 비행 제98전대와 함께 뇌격 훈련을 실시했다.[1] 전황 악화에 따라 5월 5일 연합함대 직속으로, 6월 15일에는 제2항공함대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2. 연혁
아호 작전 실패 후 필리핀 전선 투입이 결정되면서, 7월 10일 제522, 제524, 제541 해군항공대가 762공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신형기인 은하와 혜성의 실전 배치는 지연되었다. 같은 시기, 미군과의 전력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해군 군령부의 겐다 미노루 중좌는 악천후나 야간을 이용한 기습 공격을 전문으로 하는 'T 공격 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1944년 7월 도상 훈련을 거쳐 공식화되었고, 762공은 이 부대의 핵심으로 지정되었다.[2][3][4] 9월 1일 구노 슈조 대좌가 762공 사령관 겸 T 공격 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6] 10월 10일에는 여러 부대에 분산되어 있던 관련 비행대들이 762공으로 통합되어 편제가 일원화되었다.[12]
T 공격 부대로 개편된 762공은 대만 해전(1944년 10월 12일~16일)에 주력으로 투입되었다. 야간 및 박모 공격을 시도했으나 레이더 고장, 촉접기 부재 등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00기 이상의 항공기를 잃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의 손실로 762공은 이후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항공 총공격에 참가하지 못했다.[15][16] 11월 19일 마닐라 만 공격에서도 실패한 후, 11월 24일 본토 철수 명령을 받고 미야자키로 귀환했다. 이 시점 이후 'T 공격 부대'라는 명칭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17]
1944년 12월 20일, 762공은 오카 특별공격대 부대인 제721해군항공대와 함께 제11항공전대를 편성했지만, 762공 자체는 주로 정규 폭격 부대로 운용되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를 앞두고 제5항공함대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정규 폭격 임무와 더불어 특공 작전에도 투입되기 시작했다. 3월 11일 제2차 단 작전(울시 환초 공격)에서는 '아즈사 특별공격대'로 명명된 은하 부대가 특공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후 기쿠스이 작전 등 오키나와 전투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정규 공격 및 특공 작전에 참가하며 큰 손실을 입었다.
1945년 6월 하순 이후, 본토 결전을 위한 전력 보존 방침에 따라 762공의 조직적인 작전 참여는 줄어들었다. 남은 비행대들은 공격 제501비행대로 통합되어 시마네현의 다이샤 기지로 이동했다. 8월 3일 결호 작전을 위해 제32항공전대에 편성되었으나, 패전으로 인해 해산되었다.
2. 1. T 공격 부대
1943년 중반 이후 제1항공함대 재건과 기지 항공대 강화를 위해 여러 해군 항공대가 창설되었고, 제762해군항공대(이하 762공)도 그중 하나였다. 1944년 2월 15일 신주를 기지로 창설되어 제62항공전대에 편입되었고, 육군 비행 제98전대가 합류하여 뇌격(어뢰 공격) 훈련을 받았다.[1] 전황이 악화되자 5월 5일 연합함대 직속으로 변경되었으나, 아호 작전에는 투입되지 않고 훈련을 계속했다. 6월 15일 제2항공함대 소속으로 변경되었고, 아호 작전 실패 후 필리핀 전선 투입을 위해 7월 10일 제522, 제524, 제541 해군항공대가 762공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들 부대가 운용하려던 신형 기체인 은하와 혜성은 장비 조달과 조종사 양성이 늦어져 실전 투입이 지연되었다. 또한 육군 비행 제7전대와 비행 제98전대도 762공의 작전 지휘 하에 들어왔다.
아호 작전 이후 미국과의 항공 전력 격차가 더욱 벌어지자, 일본 해군은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적의 허를 찌르는 특별한 대책을 모색해야 했다. 당시 일본 항공기는 미군 항공모함에 접근하기도 전에 레이더에 탐지되어 전투 지휘소(CIC)의 유도를 받은 미군 전투기에 요격당하기 일쑤였고, 설령 접근에 성공하더라도 VT 신관을 장착한 강력한 대공 포화에 격추되기 십상이었다. 항공기 생산 능력과 조종사 숙련도 부족으로 전투기 부대 증강의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군령부 작전과 항공부원이었던 겐다 미노루 중좌는 'T 공격 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작전이 예상되던 일본 본토, 대만, 필리핀, 류큐 열도 등이 태풍의 주요 경로이며, 미군의 예상 진격 시기 역시 과거 통계상 태풍이 잦은 시기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태풍으로 인한 악천후 속에서는 미군 전투기의 출격이 어렵고 대공 포화의 위력도 약해질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이를 이용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는 구상이었다. T 공격 부대의 'T'가 '태풍'(Typhoon)의 머리글자라는 설도 있었지만, 편성을 담당했던 군령부 참모 스즈키 에이지로는 주력 무기인 '어뢰'(Torpedo)의 머리글자라고 설명했다. 이 T 공격 부대는 야간이나 악천후 속에서 미군 기동함대를 공격하는 핵심 전력으로 기대를 모았다.[2]
군령부는 겐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야간 공격과 악천후 속 주간 공격을 T 공격 부대의 주요 임무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3]
# 숙련된 조종사를 중심으로 우수한 젊은 조종사들을 선발하여 편성할 것.
# 새로운 장비와 무기를 우선적으로 지급할 것.
# 특수 기상 관측팀을 편성할 것.
# 작전 시 각 항공함대에 배속시키되, 항공대 출신의 젊은 지휘관이 통합 지휘할 것.
1944년 7월 23일, 군령부는 도상 훈련을 통해 T 공격 부대 기획안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태풍을 이용한 공격을 기본으로 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야간 공격을 실시하며, 목표는 에식스급 항공모함 10척 격침으로 설정되었다. 부대 편제에는 비행대 외에 전속 기상반을 두도록 했으며, 8월 말까지 실전 운용이 가능하도록 훈련을 실시하고 자전 전투기의 전용 배치도 계획했다. 작전 수행을 위해 중앙 사령부와 각 항공함대, 기지 간 유선 통신망 구축 등 통신 시설 강화가 필수적이며, 기상반에는 기상 관측선, 무인 관측선, 뇌전(雷電) 측정기 등을 배치하기로 했다. 어뢰 신관(V두부)이나 로켓 폭탄(T금속) 같은 신무기 사용과 레이더 탑재 및 개량도 강조되었다.[4] 같은 도상 훈련에서 제2항공함대는 주간 공격, 황혼 공격, T 공격 부대에 의한 야간 공격을 조합하여 상황에 따라 적용하는 전술을 제시했는데, 이는 훗날 제6기지 항공부대의 기본 전술로 발전하게 된다.[5]
1944년 8월 21일,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 대장은 'T 공격 부대 편성 및 작전 요령'을 하달했고, 9월 1일부로 구노 슈조 대좌가 762공 사령관 겸 제2항공함대 참모로 임명되어 T 공격 부대 지휘관을 맡게 되었다.[6] T 공격 부대원을 위한 태풍 관련 교육 영화도 제작되었으며, 이는 태풍과 기압의 관계 등 조종사에게 필요한 지식 전달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7]
1944년 9월 초, 종합 훈련이 실시되었고, 이를 시찰한 겐다 미노루는 "야간 공격은 아직 개선의 여지가 크지만, 강풍 속 악천후 돌파 능력은 향상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최대 결점으로 레이더 관련 문제(진공관 부족, 운용 미숙)를 지적했다. 또한 공격 계획, 통신 능력, 조명탄 성능, 악천후 시 어뢰 사용 문제 등 여러 개선 필요 사항을 보고했다.[9][10] 그러나 제2항공함대 사령장관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T 공격 부대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악천후 공격은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주로 야간 공격에 투입할 의사를 밝혔다.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부대 운용을 후쿠도메에게 일임하며 무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11]
훈련 결과를 바탕으로 군령부는 T 공격 부대 소속 비행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여, 1944년 10월 10일 부로 여러 부대에 분산되어 있던 관련 비행대들을 762공으로 편입시켜 T 공격 부대의 편제를 일원화했다.[12] (자세한 부대 구성은 하위 섹션 참조)
T 공격 부대는 창설 이후 몇 차례 실전에 투입되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4년 10월 초 계획되었던 '단 작전'에서는 T 공격 부대 일부 정예 병력(공격 501비행대, 정찰 11비행대)이 차출되어 마셜 제도의 미군 기동 부대 기습을 준비했지만, 보급 문제와 목표 변경 등으로 작전은 연기되었고 결국 대만 해전과 비도 해전으로 T 공격 부대 전력이 소모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13][14]
대만 해전(1944년 10월 12일~16일)에서는 T 공격 부대가 주력으로 투입되었다. 후쿠도메 시게루 사령관은 10월 10일 나하 공습 이후 T 부대에 야간 공격을 명령했으나 실행하지 못했고, 12일부터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부대들이 박모 및 야간 공격을 감행했지만, 레이더 고장, 조명탄 사용의 어려움, 촉접기 부재 등으로 인해 공격 효율이 크게 떨어졌고 전과 확인도 어려웠다. 이 전투에서 T 공격 부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초기 공격에서만 100기 이상 손실), 당초 보고된 대전과는 이후 오인으로 판명되었다.[15][16]
결과적으로 대만 해전에서 T 공격 부대의 주력은 대부분 소모되었고, 이는 이후 첩호 작전(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군이 기대했던 T 공격 부대의 활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남은 병력으로 재편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레이테 만 해전의 항공 총공격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1944년 11월 19일, 마닐라 만의 미군 함선 공격에 14기를 투입했으나 10기를 잃고 전과 없이 실패한 후, 11월 24일 본토 철수 명령을 받고 미야자키로 귀환했다. 이후 'T 공격 부대'라는 명칭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17]
2. 1. 1. 주요 구성 (1944년 10월)
1944년 10월 10일, T 공격 부대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군령부는 기존에 여러 부대에 분산되어 있던 전력을 제762해군항공대로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정찰 제11비행대, 전투 제303비행대, 전투 제701비행대, 공격 262비행대, 공격 703비행대가 원 소속 부대에서 762공으로 편입되었다.[12]
이 시점에서의 제762해군항공대의 주요 구성은 다음과 같다.[12]
구분 | 부대명 | 주력 기종 |
---|---|---|
정찰대 | 정찰 제11비행대 | 채운 |
전투대 | 전투 제701비행대 | 자전 |
전투 제303비행대 | ||
함상 폭격/공격기대 | 공격 161비행대 | 혜성 |
공격 262비행대 | 천산 | |
육상 폭격/공격기대 | 제708비행대 | 일식 육상 공격기 |
공격 703비행대 | 일식 육상 공격기 | |
공격 제501비행대 | 은하 | |
육군 비행 제7전대 | 사식 중폭격기 "비룡" | |
육군 비행 제98전대 | 사식 중폭격기 "비룡" |
한편, 정찰 제301비행대(미즈시마 주체)는 제801해군항공대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나,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병력 배치에 따라 계속해서 762공 사령인 구노 슈조 대좌의 작전 지휘를 받았다.[12] 또한, 기존 762공 소속이었으나 T 공격 부대에 속하지 않은 공격 제3비행대, 공격 제405비행대, 공격 제406비행대는 제763해군항공대로 새로 편성되었다.[12]
2. 2. 특공 작전
1944년 12월 20일, 제762해군항공대는 오카 특별공격대(특공) 부대인 제721해군항공대와 함께 제11항공전대를 편성했으나, 제762해군항공대 자체는 주력 정규 폭격 부대로 운용되었다.1945년 오키나와 전투를 앞두고 제5항공함대로 소속이 변경된 이후, 정규 폭격 임무와 더불어 특공 작전에도 투입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3월 11일 울시 환초를 목표로 한 제2차 단 작전에서는 '아즈사 특별공격대'로 명명된 은하 폭격기 부대가 특공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4월 3일에는 공격 제262비행대 소속기 중 일부가 특공으로 출격했으며, 5월 12일에는 제3차 단 작전에 참가했으나 미군의 요격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 외에도 오키나와 전투 기간 동안 벌어진 기쿠스이 작전에도 산발적으로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작전 중 손실 누적과 본토 결전을 위한 전력 보존 방침에 따라, 6월 하순 이후 제762해군항공대의 조직적인 특공 작전 참여는 점차 줄어들었다.
2. 2. 1. 오키나와 전투 (1945년)
1945년 2월 상순부터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대비가 시작되었다. 제762해군항공대(이하 762공)는 2월 11일부로 제5항공함대로 소속이 변경되어 정규 폭격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격 제406비행대가 새롭게 762공에 편입되었다.3월 1일, 762공은 남규슈 지역에 다음과 같이 전력을 전개했다.
기지 | 배치 부대 및 항공기 |
---|---|
가노야 | 정찰 제11비행대 (사이운 14기), 공격 제501비행대 (은하 9기) |
이즈미 | 공격 제406비행대 (1식 육상공격기 10기, 은하 28기) |
미야자키 | 공격 제262비행대 (은하 7기), 육군 제7비행전대 (4식 중폭격기 비룡 27기) |
축성 | 공격 제262비행대 (은하 16기) |
다토아라이 | 육군 제7비행전대 (4식 중폭격기 비룡 10기), 육군 제98비행전대 (4식 중폭격기 비룡 13기) |
가고시마 | 육군 제98비행전대 (4식 중폭격기 비룡 13기) |
3월 11일, 제2차 단 작전(울시 환초 공격)이 특별공격대 작전으로 실행되었다. "아즈사 특별공격대"로 명명된 이 작전에는 762공 소속 은하 24기가 참가했다. 이 중 15기가 울시 환초에 정박 중이던 미국 해군 함대에 돌입했다는 무선 보고를 보냈으나, 실제 전과는 미국 해군 항공모함 랜돌프 1척을 기체 충돌로 중파시킨 것에 불과했다. 돌입을 포기하고 얍 섬에 불시착한 3기 중 1기만이 탑승원 전원을 태우고 3월 14일 가노야 기지로 귀환했다.
3월 18일부터는 규슈 해역으로 접근하는 미군 기동부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18일에는 육군 제7비행전대, 제98비행전대, 공격 제501비행대가 출격하여 7기의 손실을 입었다. 19일에는 이즈미 기지에서 출격한 공격 제406비행대 소속기 1기가 급강하 폭격으로 미국 해군 항공모함 프랭클린을 대파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후에도 손실은 계속되어 20일에는 4기, 21일에는 12기를 잃었다.
3월 26일, 천호 작전이 발동되자 공격 제501비행대, 육군 제7비행전대, 제98비행전대가 출격했다.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전투의 지상전이 시작되면서 762공은 본격적으로 대함 공격과 특공 작전에 투입되었다. 4월 3일에는 공격 제262비행대 소속기 8기 중 3기가 특공으로 출격했으며, 4월 11일(33기), 12일(30기), 14일(18기)에도 연이어 대규모 대함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남규슈의 일본군 항공 기지에 대한 미군의 공습이 격화되었다. 특히 육군 다치아라이 비행장이 주요 목표가 되면서,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제7비행전대와 제98비행전대의 조직적인 공격 능력은 급격히 약화되어 산발적인 출격만 가능하게 되었다.
5월 12일에는 제3차 단 작전이 시도되어 은하 12기가 참가했으나, 출격 직후 미군의 요격을 받아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762공은 10차례에 걸쳐 진행된 기쿠스이 작전에도 산발적으로 참가했지만, 6월 21일의 공격을 마지막으로 본토 결전을 위해 전력 보존책이 강구되었다. 이에 따라 762공 지휘 하의 비행대들은 공격 제501비행대로 통합되었고, 주력 부대는 시마네현 히카와정에 비밀리에 조성된 다이샤 기지로 이동하여 재배치되었다.
제5항공함대는 762공을 결호 작전에서 야간 뇌격 부대로 활용할 계획으로, 8월 3일에 제634해군항공대, 제931해군항공대와 함께 제32항공전대를 편성했다. 하지만 패전과 함께 해산되었다.
3. 주요 사용 기종
4. 역대 사령관
이름 | 계급 | 재임 기간 |
---|---|---|
시바타 분조 | 대좌 | 1944년 2월 15일 ~ 1944년 7월 10일 |
다나카 요시오 | 1944년 7월 10일 ~ 1944년 9월 15일 | |
구노 슈조 | 1944년 9월 15일 ~ 종전 후 해산 |
참조
[1]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2]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3]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4]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4]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5]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6]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6]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7]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8]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9]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10]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11]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12]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13]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14]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15]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16]
서적
戦史叢書45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16]
서적
完本・太平洋戦争〈下〉
[17]
서적
戦史叢書37海軍捷号作戦(1)台湾沖航空戦ま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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