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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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갈경은 촉한의 장수 제갈첨의 아들이자 제갈량의 손자이다. 263년 촉한 멸망 후 하동군으로 이주했다가, 진나라에서 관리로 등용되어 미현 현령, 강주 자사를 역임했다. 사마염의 추천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으며, 상서 복야 산도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동궁 사인으로 추천받기도 했다. 1992년 발견된 족보에 따르면 제갈충과 제갈우를 아들로 두었으며, 사망 시기는 291년 이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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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한 사람 - 황부인
황부인은 삼국시대 촉한 승상 제갈량의 아내로, 용모는 아름답지 않았으나 뛰어난 재능으로 제갈량에게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준 인물로 기록 및 묘사된다. - 촉한 사람 - 동화 (후한)
동화는 후한 말부터 촉한 시대의 관료로, 유장 휘하에서 요직을 거쳐 유비와 제갈량을 보좌하며 국정 운영에 참여했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 태도로 제갈량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 낭야 제갈씨 - 제갈량
제갈량은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유비의 삼고초려로 촉한에 합류하여 승상이 되었고, 섭정으로서 남정을 통해 촉한의 기반을 다졌으며, 북벌을 통해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으며, 법치주의와 인재 등용을 중시하고 경제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다. - 낭야 제갈씨 - 제갈첨
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자 촉한의 장군 겸 정치가로, 무향후 작위를 계승하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263년 위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충신으로 칭송받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제갈경 | |
---|---|
기본 정보 | |
이름 | 제갈경 |
원어 이름 | 諸葛京 |
로마자 표기 | Zhūgě Jīng |
자 | 행종 |
출생 | 생년 미상 |
출신지 | 서주낭야군 양도현 |
사망 | 생년 미상 |
국적 | 서진 |
관직 | |
주요 관직 | 강주자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제갈첨 |
생애 | |
주요 활동 | 사마염과 사마충을 섬김 |
2. 생애
위나라 경원 4년(263년), 촉한에서 종사하던 아버지 제갈첨과 형 제갈상이 촉한의 멸망과 함께 전사했다. 함희 원년(264년), 제갈경은 동족 제갈현과 함께 촉에서 하동군으로 옮겨졌다.[1]
사마염이 위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나라 황제로 즉위한 후인 태시 4년(268년) 3월, 전 촉나라 장수 라헌은 질문을 받고 촉의 인재를 추천했는데, 그 안에 제갈경도 포함되어 있었다.[1] 태시 5년(269년) 2월, 제갈경은 재능을 평가받아 관리로 등용되었다.[2] 미현 현령으로 승진한 후, 상서 복야 산도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관위는 강주 자사에까지 올랐다. 몰년은 불분명하지만, 강주의 설치가 원강 원년(291년) 7월[3]이므로, 그 이후로 추측된다.
후대에 중화인민공화국의 난시 시에서는 제갈량의 자손이라고 칭하는 일족이 '제갈팔괘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마을에서 1992년에 발견된 족보에 따르면 제갈경에게는 제갈충·제갈우라는 아들이 있으며, 그들은 그 자손이라고 한다. 제갈진 (저장성)도 참조.
2. 1. 촉한 멸망과 이후 행적
263년, 아버지 제갈첨과 형 제갈상이 촉한 멸망 중에 전사했다.[1] 264년, 제갈경은 동족인 제갈현과 함께 촉에서 하동군으로 이주했다.사마염이 위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의 황제로 즉위한 후인 268년, 전 촉 장수 라헌은 질문을 받고 촉의 인재를 추천했는데, 그 안에 제갈경도 포함되어 있었다.[1] 269년, 재능을 평가받아 관리로 등용되었다.[2]
2. 2. 진(晉)나라 관리 생활
諸葛京|제갈경중국어은 미현 현령으로 승진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상서 복야 산도는 제갈경을 동궁 사인으로 추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조부 제갈량은 후한 말의 동란에 중원으로부터 격리되었고, 부자 모두 촉에 거주했습니다. 천명을 분별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자신의 주군에 대해 마음을 다하는 데 힘썼습니다. 제갈경도 미현을 다스려 평판을 올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를 동궁 사인으로 임명하여, 사람을 섬기는 경우의 도리를 밝히고, 양주·익주의 여론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
제갈경은 강주 자사까지 올랐다. 사망년도는 불분명하지만, 강주 설치가 원강 원년(291년) 7월[3]이므로, 그 이후로 추정된다.
3. 가계
분류:제갈량 가문
3. 1. 친족 관계
4. 평가 및 의의
제갈경은 촉한 멸망이라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가문을 보전하고 새로운 왕조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제갈량의 후손이라는 점은 그에게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난시 시에는 제갈량의 자손이라 칭하는 일족이 '제갈팔괘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1992년 발견된 족보에는 제갈경의 아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는 제갈량 가문의 후손 전승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갈경의 삶은 난세 속 개인의 생존과 적응, 그리고 가문의 명맥을 잇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1][2]
참조
[1]
서적
三国志 霍峻伝注 襄陽記
[2]
서적
晋書 武帝紀
[3]
서적
晋書 孝恵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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