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갈탄은 서진 시대의 인물로, 위나라에서 장군을 역임했으며, 제갈근, 제갈량의 사촌이다. 그는 명성을 얻었으나, 사마씨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삼족이 멸망했다. 초기에는 관료로 시작하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하후현 등 명사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얻었다. 이후 동흥 전투에서 패배하고 관구검·문흠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으나, 사마씨의 권력 장악에 불안감을 느껴 반란을 일으켰다. 제갈탄은 오나라의 지원을 받았지만, 결국 사마소에게 진압당하고 처형되었다. 그는 엄격하고 강인한 성품으로 평가받았지만, 반란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58년 사망 - 교황 식스토 2세
교황 식스토 2세는 257년부터 258년까지 로마 교황으로 재임했으며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했고, 아프리카 및 동방 교회와의 관계 회복에 기여했으며, 저술 활동의 진위 여부는 논란이 있다. - 258년 사망 - 진지 (촉한)
진지는 촉한의 관료로 유선의 총애를 받아 중용되었으나 황호와 결탁하여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평가를 받으며, 동윤 사후 권력을 장악했으나 그의 사후 황호가 득세하여 촉한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낭야 제갈씨 - 제갈량
제갈량은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유비의 삼고초려로 촉한에 합류하여 승상이 되었고, 섭정으로서 남정을 통해 촉한의 기반을 다졌으며, 북벌을 통해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으며, 법치주의와 인재 등용을 중시하고 경제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다. - 낭야 제갈씨 - 제갈첨
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자 촉한의 장군 겸 정치가로, 무향후 작위를 계승하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263년 위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충신으로 칭송받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 조위의 사공 - 왕기 (백여)
왕기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청렴하고 공정한 관료이자 장군으로, 왕릉의 치적에 기여하고 조예에게 간언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촉구했으며, 형주자사로서 오나라를 방비하고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사후 사공으로 추증되고 서진 시대에도 청렴함을 인정받았다. - 조위의 사공 - 왕랑
왕랑은 후한 말부터 서진 시대까지 활동하며 하진, 조조 등을 섬기고 조비의 황제 즉위를 도왔으며 조예 대에 사도에 이르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제갈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제갈탄 |
한자 표기 | 諸葛誕 |
로마자 표기 | Zhuge Dan |
자 | 공휴 (公休) |
출생 | 미상 |
출생지 | 산둥성이난현 |
사망일 | 258년 4월 10일 |
사망지 | 안후이성수현 |
작위 | 수춘후 (壽春侯) |
친척 | 제갈근 (사촌) 제갈량 (사촌) 제갈선 (친척) |
자녀 | 제갈정 사마주의 아내 왕광의 아내 |
직업 | 장군, 정치인 |
관직 | |
표기장군 (驃騎將軍) | 257년 - 258년 |
정동대장군 (征東大將軍) | 255년 8월 또는 9월 - 257년 |
진동대장군 (鎮東大將軍) | 255년 2월 또는 3월 - 255년 8월 또는 9월 |
섬긴 군주 | |
위나라 | 조비 조예 조방 조모 |
오나라 | 손량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제갈탄은 제갈량과 제갈근의 사촌으로, 삼국 시대 위(魏)의 관료였다. 상서랑(尙書郞)으로 시작하여 형양현령을 역임했다.[3] 이후 중앙으로 들어가 이부(吏部) 낭(郎)을 거쳐 어사중승상서(御史中丞尙書)로 승진했다. 조방 즉위 후 정시 연간 초, 하후현 등이 정치를 맡게 되자 어사중승, 상서로 복직했다. 정시 4년 (243년)에는 양주 자사, 소무장군으로 전임되었다.[58]
2. 1. 두기와의 일화
두기와 함께 황제가 탈 배를 시운전하다가 바람을 만나 둘 다 물에 빠졌다. 호분이 제갈탄을 구조하려 하자, 제갈탄은 "먼저 두후(두기)를 구하여라!"라고 소리쳤다. 제갈탄은 물가까지 표류하여 정신을 잃었으나 살아났으며, 두기는 결국 익사했다.[4]2. 2. 명사들과의 교류와 면직
하후현, 등양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조정에서 명성이 높아 서울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하후현 등 4명을 사총, 제갈탄 등 8명을 팔달이라 칭했다.[3][7] 그러나 명제는 제갈탄 등이 헛된 명성에 부화뇌동하며 경박한 평가를 내리는 풍조를 싫어하여, 이들을 모두 면직시켜 관직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8] 이때 조칙에 "관리를 선발할 때 명성이 있는 자를 취해서는 안 된다. 명성은 땅에 그린 떡과 같아 먹을 수 없다"[57]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고사성어 '그림의 떡'의 유래가 되었다.3. 위나라의 장군
제갈탄은 조비 시대에 상서랑(尙書郞)으로 관직을 시작했다.[3] 형양령(滎陽令)을 거쳐 이부랑(吏部郞)으로 승진했다. 동료들이 사람을 추천하면 그들이 사적으로 말한 내용을 공개적으로 밝힌 후 직책을 부여하는 등, 관료들의 수행 평가에 신중을 기했다.[6] 이후 어사중승상서(御史中丞尙書)로 임명되었으며, 하후현, 등양과 친분을 쌓으며 조정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조예는 제갈탄과 그의 친구들이 명예를 추구하는 행동을 한다고 여겨 그를 면직시켰다.[8]
239년 조예 사후 조방이 즉위하면서 제갈탄은 어사중승상서로 복직되었고, 이후 양주자사(揚州刺史) 겸 소무장군(昭武將軍)으로 승진했다.[9] 251년, 왕릉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임명되고 황실의 권위를 부여받았으며, 양주 군사 업무를 담당하고 산양정후(山陽亭侯)에 봉해졌다.[10][11]
252년, 동흥 전투에 참전했으나 정봉에게 패배하고, 관구검과 관직이 바뀌어 진남장군(鎭南將軍)·도독 예주제군사가 되었다.[16] 255년, 관구검·문흠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워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동삼사에 임명되었고,[65] 이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고평후(高平侯)로 승진하여 3,500호를 식읍으로 받았다.[21]
3. 1. 동흥 전투
252년 10월, 오나라 태부 제갈각이 동흥(東興)에 성을 쌓았다.[14] 12월, 위나라의 실권자 사마사는 오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왕창에게 남군을, 관구검에게 무창을 공격하게 했고, 제갈탄에게는 호준 등과 함께 오나라가 두 달 전에 세운 동흥을 공격하게 했다.[14] 오나라에서는 제갈각을 내세워 이를 막게 했다.[15] 그러나 23일, 위나라 군대는 한겨울 춥고 눈이 내리는 중에 방심하여 술을 마시며 잔치를 즐기다가 오나라 장수 정봉의 공격을 받아 선두 부대가 격파당했다. 오나라 장수 여거 등도 도착하여 위의 부마이자 장군, 낙안태수 환가(桓嘉), 선봉장인 한종(韓綜)을 잃는 등 크게 졌다.[61] 제갈탄이 패배했다는 말을 듣고 왕창과 관구검은 영채를 불태우고 도주하여, 오나라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16] 제갈탄은 이 패배로 인해 관구검과 관직이 맞바뀌어 진남장군·도독예주제군사가 되었다.[16]3. 2. 관구검·문흠의 난 진압
255년 초, 위나라 장군 관구검과 문흠이 위나라 정부에 대한 사마씨의 통제에 불만을 품고 수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7] 사마사는 직접 위나라 황실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처리하려 했고, 제갈탄에게 예주에서 군대를 이끌고 안풍진을 거쳐 수춘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19] 사마사가 반란을 진압한 후, 제갈탄과 그의 군대가 가장 먼저 수춘에 진입했다.위나라 황실 조정은 제갈탄을 삼공에 버금가는 명예를 지닌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으로 임명하고 양주의 군사 문제를 감독하도록 했다. 관구검과 문흠의 반란 소식이 동오에 전해지자, 오나라 섭정 손준은 여거, 유찬 등과 함께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수춘으로 향했다. 그러나 위나라 군대가 이미 수춘을 탈환한 상태였고, 이에 오나라 군대는 퇴각했다. 제갈탄은 그의 부하 장반을 보내 퇴각하는 오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했고, 장반은 이어진 전투에서 유찬을 죽이고 그의 관인을 얻었다.[21] 이 공로로 제갈탄은 고평후(高平侯)로 승진했으며 3,500호의 조세 가구를 하사받아 그의 식읍을 형성했다. 위나라 정부는 또한 그의 임명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변경했다.[21]
4. 제갈탄의 난
제갈탄은 사마씨 정권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품고 있었다. 사마소는 제갈탄을 중앙으로 소환하려 했으나, 제갈탄은 이를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다.[67]
감로 2년(257년) 4월 24일, 조정은 제갈탄을 사공으로 임명하고 소환했다. 제갈탄은 자신이 왕창 다음으로 삼공이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갑작스러운 사공 임명에 의아함을 느꼈다. 결국 5월 2일, 제갈탄은 거병하여 양주 자사 악침을 살해하고, 10만여 명의 관리와 병사, 1년 치 식량을 확보하여 수춘성을 거점으로 방어 태세를 갖췄다.[67] 또한 오나라에 아들 제갈정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오나라는 제갈탄을 대사도, 표기장군, 청주 목, 수춘후로 임명하며 3만 명의 병사를 파견했다.[67] 당자와 문흠 등 오나라의 지원군이 위나라의 포위가 완성되기 전에 수춘성에 입성했다.
6월, 위나라의 사마소는 황제 조모를 받들고 26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수춘을 포위했다. 안에서는 문흠, 밖에서는 오나라의 주이가 포위 돌파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격퇴당했다.[68] 제갈탄 휘하의 장반과 초이는 농성을 포기하고 강행 돌파를 주장했으나, 제갈탄과 문흠은 이를 거부하고 장반을 살해하려 했다. 이에 장반과 초이는 위나라에 투항했고, 오나라의 전휘, 전의 형제도 일족 간의 다툼으로 위나라에 투항했다. 종회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전익 등에게 거짓 문서를 보내 동요시켰고, 결국 전익 등도 항복하면서 수춘성 안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68]
감로 3년(258년) 정월, 제갈탄 등은 대규모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성 안의 식량은 바닥나고 항복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문흠은 북방 출신 병사들을 내보내 식량을 절약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제갈탄은 거부했다. 이로 인해 제갈탄과 문흠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결국 제갈탄은 문흠을 살해했다. 문흠의 아들 문앙과 문호는 위나라에 투항하여 항복을 권유했고, 수춘성 안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같은 해 2월 20일, 사마소는 총공격을 감행하여 수춘성을 함락시켰다. 제갈탄은 도주 중 호분에게 참수당하고 삼족이 몰살당했다. 제갈탄의 측근 병사 수백 명은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69]
4. 1. 반란의 배경과 준비
제갈탄은 하후현 및 등양(鄧颺중국어)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들은 모두 조상의 측근이었다. 또한 사마씨에게 반기를 든 왕릉과 관구검이 모두 3족이 멸해지는 것을 목격했기에, 사마씨에게 숙청될까 매우 불안해했다.[22] 그리하여 수춘(壽春; 현재의 수현, 안후이성)에 주둔하면서, 회하 지역 백성들에게 호의를 얻고자 매우 관대하게 대했다. 그는 또한 사재를 털어 부하들을 매수하고 수천 명의 용병을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했다.[22] 그는 심지어 사형수를 사면하기도 했다.[23]256년 겨울, 제갈탄은 수춘에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고 방어 태세를 구축할 구실을 찾았다. 그는 위나라 조정에 편지를 보내, 동오 군대가 회하 지역을 공격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주장하며, 10만 명의 병력과 해당 지역에 더 많은 방어 시설을 건설할 수 있는 권한을 요청했다.[24] 255년 사마사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사마소가 위나라의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가충은 사마소에게 위나라 전역의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는 장군들을 감시하여 충성심을 평가할 것을 제안했다. 사마소는 그의 제안에 따라 제갈탄을 만나기 위해 가충을 수춘으로 보냈다. 가충은 제갈탄에게 "낙양의 많은 현명한 이들이 황제가 더 나은 통치자에게 양위하기를 바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떠보았다. 제갈탄은 "당신은 가규의 아들이 아닌가? 국가는 오랫동안 당신의 가문을 후하게 대했습니다. 어찌 국가를 배신하고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게 할 수 있겠소? 나는 참을 수 없소. 만약 낙양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국가를 위해 죽을 것이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충은 침묵했다.[25] 낙양으로 돌아온 가충은 사마소에게 "제갈탄은 양주에서 높은 명성과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를 이곳으로 소환했는데 따르지 않으면 작은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를 소환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57년 초여름, 사마소는 조정의 이름으로 제갈탄에게 낙양으로 돌아와 사공(司空중국어)을 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26][27] 이 명령은 표면적으로는 제갈탄을 권위 있는 장관직(실제로는 삼공 중 하나)으로 승진시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를 수춘에서 권력을 제거하고 낙양에서 사마소의 통제하에 두려는 조치였다.
제갈탄은 장사(長史) 오강에게 아들 제갈정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4. 2. 반란의 전개와 진압
감로 2년(257년), 제갈탄에게 사공으로 임명한다는 문서가 도착했지만, 제갈탄은 이에 응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양주자사 악침(樂綝)을 죽였다.[28] 《위진세어》에 따르면, 사마소(司馬昭)가 집권한 후 가충(賈充)은 사마소에게 4정장군을 위로하도록 권했고, 가충 자신은 제갈탄에게 갔다. 돌아온 후 제갈탄이 민심을 얻고 있으므로 내버려두면 재난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제갈탄을 분노하게 하여 속히 행동하게 하도록 권했다. 그래서 제갈탄은 사공으로 임명되었다. 제갈탄은 자신이 왕창보다 먼저 삼공에 오른 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며, 악침이 병사를 받게 되었으므로 좌우의 수백 명만 거느리고 바로 양주로 가 악침을 죽였다.[29] 《위말전》에 따르면, 가충은 제갈탄과 만나 담론하다가, 당시 선양의 여론이 있는데 어떻게 여기냐며 제갈탄을 떠 보았다. 제갈탄은 가충을 매도하며 자신은 마땅히 위 황실을 위해 죽겠다고 답했다.[30]제갈탄은 회남, 회북의 둔전병 10여 만 명과 양주의 신병 4, 5만 명을 모으고, 1년분 식량을 준비하여 성문을 걸어닫고 지켰다.[31] 장사(長史) 오강(吳綱)에게 아들 제갈정(諸葛靚)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32] 위나라의 진남장군 왕기는 수춘성을 포위했다.
257년 6월, 황제는 친히 항성에 이르렀고, 사마소는 직접 중외 26만 명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서 회수에 이르렀다. 사마소는 구두에 주둔하고, 왕기와 진건 등은 수춘성을 포위하게 하고, 감군 석포와 연주자사 주태(州泰) 등은 유군으로 삼아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 수춘은 당초 매해 비가 내려 회수가 넘쳐 항상 성이 물에 잠겼으므로, 제갈탄은 사마소가 포위망을 쌓는 것을 비웃었다.[35]
당시 오나라 제2대 황제 회계왕(會稽王) 손량(孫亮)과 실권자 손침(孫綝)은 제갈탄을 좌도호·가절·대사도·표기장군·청주목·수춘후로 임명하고,[33] 문흠·문앙(文鴦) 부자와 당자(唐咨), 전역(全懌), 전단 등에게 3만의 원군을 딸려 보냈다. 이 군대는 왕기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성에 들어갔다.[34] 또 주이에게 여러 차례 군사를 주어 바깥에서 돕게 했다. 그러나 주이는 주태, 석포, 호열 등에게 여러 번 지고, 손침에게 이유 없이 죽었다.[36] 문흠 등은 여러 차례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장반과 초이는 곧 손침은 돌아갈 것이므로 아직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을 지금 죽을 각오로 공격하기를 권했으나, 문흠은 버틸 것을 주장하였다.[37][38] 장반과 초이가 완강하게 권하여 문흠은 화를 내고 제갈탄은 장반 등을 죽이려 했다. 257년 11월, 두 사람은 투항했다.[39][40]
257년 12월, 사마소가 종회(鍾會)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역의 조카로 과거 위나라에 항복한 전휘(全輝)와 전의(全儀)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 오나라가 전역을 죽이려 한다고 전하자 전역, 전단 등 전씨 일족은 모조리 위나라에 항복했다.[41]
258년 정월, 문흠은 전씨 일족들이 모두 투항했으므로 적이 방비가 굳세지 않을 이때 싸울 만하다고 했다. 궁지에 몰린 제갈탄, 당자 등은 그렇게 여겨, 문흠과 함께 수춘성 남쪽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실패했고,[42][43]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식량이 떨어져 수만 명이 성문을 나와 투항했다.[44]
문흠이 북방 사람들을 내보내 식량을 아껴 오나라 사람들과 함께 성을 지키고자 했으나, 제갈탄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래 제갈탄은 문흠과 사이가 나빴는데, 사태가 위급해지자 둘은 더욱 서로 의심을 품어 제갈탄은 문흠을 죽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접한 문앙은 동생 문호(文虎)와 함께 성을 넘어 위나라의 실권자 사마소에게 투항했다. 사마소에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진 문앙은 문호와 함께 수춘성 주변을 돌며 항복을 권유했다. 문앙이 사마사의 병을 악화시켜 죽게 만든 인물임을 알고 있던 제갈탄의 병사들은 그가 벼슬을 받은 것을 보고 크게 동요했다.
사마소의 명령으로 정벌군이 일체의 공격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사기가 크게 꺾여 위나라에 항복하는 자가 늘어났다. 이를 본 사마소는 258년 2월 20일 총공격을 가해 수춘성은 함락됐다. 성이 함락되던 날 큰 비가 내려, 제갈탄이 무너지리라고 여긴 포위망은 비로소 무너졌다. 제갈탄은 도주하다 대장군 사마 호분의 부하에게 죽었으며, 제갈탄의 삼족은 멸해졌다. 제갈탄 수하에 있던 수백 명은 투항하지 않았으므로 죽었는데, 제갈탄을 위해 죽기를 피하지 않았다.
4. 3. 최후
사마소의 명령으로 정벌군이 일체의 공격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사기가 크게 꺾여 위나라에 항복하는 자가 늘어났다. 이를 본 사마소는 2월 20일 총공격을 가해 수춘성은 함락됐다.[47] 성이 함락되던 날 큰 비가 내려, 제갈탄이 무너지리라고 여긴 포위망은 비로소 무너졌다. 제갈탄은 도주하다 대장군 사마 호분(胡奮|호분중국어)의 부하에게 죽었으며, 제갈탄의 삼족은 멸해졌다.[47] 제갈탄 수하에 있던 수백 명은 투항하지 않았으므로 죽었는데, 제갈탄을 위해 죽기를 피하지 않았다.[47]5. 평가 및 영향
진수는 제갈탄을 "엄숙하고 강인하며 위엄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왕릉, 관구검, 종회와 함께 "큰 뜻을 품었으나 화란(禍亂)을 생각하지 않아 종족을 모두 죽게 했으니, 어찌 큰 잘못과 미혹됨이 아니겠는가!"라고 비판했다.[67]
제갈탄 휘하 병사 수백 명은 제갈탄을 위해 죽기를 각오했고, 참수될 때도 "제갈공을 위해 죽는 것이니 미련은 없다!"라고 외쳤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제갈탄의 충절을 전한 시대의 전횡에 비유하기도 했다.[70]
제갈탄의 난은 위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키고, 진(晉)나라의 건국을 앞당기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6. 가계
諸葛誕중국어은 서주 낭야군 양도현(陽都縣) 출신으로, 제갈풍의 후손이자 제갈근, 제갈량의 사촌이다.[3]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 | |
사촌 | 제갈근 | |
사촌 | 제갈량 | |
아들 | 제갈경 | 제갈탄의 반란 당시 동오에 인질로 보내졌다.[32] 진나라의 오나라 정복 이후 누이 집에 숨었으나 사마염의 설득으로 관직을 받지 않고 평민으로 생을 마감.[52] |
딸 | 왕광의 처 | 왕릉의 아들 왕광과 혼인.[50] |
딸 | 제갈태비(諸葛太妃중국어) | 사마의의 아들 사마주와 혼인.[51] 동진의 황제들과 혈연관계. |
손자 | 제갈이 | 원제의 총애를 받음.[53] |
손자 | 제갈휘 | 상서령 역임.[54] 진서 (77권)에 열전. |
6. 1. 가계도
제갈탄은 적어도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 제갈탄의 딸 중 한 명은 왕광(왕릉의 아들)과 결혼하였고, 다른 딸은 사마주(사마의의 여섯 번째 아들)와 결혼하여 진나라 시대에 공작이 되었다. 그녀는 제갈태비(諸葛太妃중국어)로 알려졌으며, 사마예는 동진의 창건 황제가 되어 제갈탄은 동진의 황제들과 연관되어 있다.[51]제갈탄의 아들 제갈경은 257년에 아버지의 반란에 대한 오나라 군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동오에 인질로 보내졌다.[32] 280년, 진나라가 오나라를 정복한 후, 제갈경은 누이(사마주와 결혼한 사람)의 집에 숨었다. 진나라 황제 사마염(무제)는 제갈경을 자신의 친척으로 여기고 그를 만나기를 고집하여, 제갈경은 눈물을 흘리며 "폐하를 다시 뵙기 전에 제 몸에 옻칠을 하고 얼굴의 가죽을 벗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제는 그를 시중(侍中중국어)으로 임명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민으로 생을 마쳤다.[52] 제갈경은 두 아들 제갈이(諸葛頤중국어)와 제갈휘(諸葛恢중국어)를 두었다. 제갈이는 진나라 시대에 태상(太常중국어)을 역임했으며 원제의 총애를 받았다.[53] 제갈휘는 상서령(尚書令중국어)[54]을 역임했으며, ''진서'' (77권)에 열전이 실려 있다.
7. 대중문화 속 제갈탄
코에이의 게임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 제갈탄은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4]
참조
[1]
서적
Book of Jin
Jin Shu
258-04-10
[2]
서적
Sanguozhi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Wu Shu
[4]
서적
Sanguozhi
Wei Shi Chunqiu
[5]
서적
Sanguozhi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Shiyu
[8]
서적
Sanguozhi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Sanguozhi
[11]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2]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4]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5]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6]
서적
Sanguozhi
Sanguozhi
[17]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8]
서적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19]
서적
Sanguozhi
Sanguozhi
[20]
서적
Sanguozhi
Sanguozhi
[21]
서적
Sanguozhi
Sanguozhi
[22]
서적
Sanguozhi
Sanguozhi
[23]
서적
Sanguozhi
Wei Shu
[24]
서적
Sanguozhi
Sanguozhi
[25]
서적
Sanguozhi
Wei Mo Zhuan
[26]
서적
Sanguozhi
Shiyu
[27]
서적
Sanguozhi
Sanguozhi
[28]
서적
Sanguozhi
Shiyu
[29]
서적
Sanguozhi
Wei Mo Zhuan
[30]
서적
Sanguozhi
Sanguozhi
[31]
서적
Sanguozhi
Sanguozhi
[32]
서적
Sanguozhi
Sanguozhi
[33]
서적
Sanguozhi
Sanguozhi
[34]
서적
Sanguozhi
Sanguozhi
[35]
서적
Sanguozhi
Sanguozhi
[36]
서적
Sanguozhi
[37]
서적
Han Jin Chunqiu
[38]
서적
Han Jin Chunqiu
[39]
서적
Han Jin Chunqiu
[40]
서적
Sanguozhi
[41]
서적
Sanguozhi
[42]
서적
Sanguozhi
[43]
서적
Han Jin Chunqiu
[44]
서적
Sanguozhi
[45]
서적
Sanguozhi
[46]
서적
Sanguozhi
[47]
서적
Sanguozhi
[48]
서적
Jin Ji
[49]
서적
Sanguozhi
[50]
서적
Shiyu
[51]
서적
Jin Shu
[52]
서적
Jin Shu
[53]
서적
Jin Shu
[54]
서적
Jin Ji
[55]
서적
三国志
[56]
서적
三国志
[57]
서적
三国志
[58]
서적
魏方鎮年表
[59]
서적
三国志
[60]
서적
三国志
[61]
서적
三国志
[62]
서적
三国志
[63]
서적
三国志
[64]
서적
三国志
[65]
서적
三国志
[66]
서적
三国志
[67]
문서
時系列は高貴郷公紀に基づく
[68]
서적
三国志
[69]
서적
晋書
[70]
문서
秦末期の人物。その死を聞いた食客500人がことごとく殉死した
[71]
서적
歴代神仙通鑑
[72]
서적
諸葛忠武侯文集
[73]
서적
三国志 呉書 諸葛瑾伝注『呉書』
[74]
서적
晋書 諸葛恢伝
[75]
서적
世説新語
https://zh.wikisourc[...]
[76]
서적
晋書 琅邪王伷伝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