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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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물포 해전은 1904년 2월 9일,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간에 벌어진 해전으로, 러일 전쟁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다. 일본 해군은 제물포에 주둔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러시아 측은 순양함 바랴크와 포함 코레에츠를 잃고 31명이 사망했으며, 일본 측은 피해가 거의 없었다. 전투 이후 일본군은 한반도를 장악하고,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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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 2월 - 여순항 해전
여순항 해전은 1904년 러일 전쟁의 시작을 알린 해전으로, 일본이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견제하며 여순항을 공격했으나 초기 공격 실패와 기뢰전 등으로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1907년 헤이그 평화 회의에서 선전 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 1904년 2월 - 한일의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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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 포위전은 1904년 러일 전쟁 중 일본군이 러시아의 여순항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이 승리하였으나 막대한 사상자를 냈으며,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물포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제물포 해전 |
분쟁 | 러일 전쟁 |
![]() | |
날짜 | 1904년 2월 9일 |
장소 | 인천 앞바다 황해 |
결과 | 일본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러시아 제국 |
교전국 2 | 일본 제국 |
지휘관 | |
러시아 제국 | 프세볼로트 루드네프 대령 |
일본 제국 | 우류 소토키치 소장 |
병력 규모 | |
러시아 제국 | 방호순양함 1척, 포함 1척 |
일본 제국 | 장갑순양함 1척, 순양함 5척, 통보함 1척, 수뢰정 8척 |
사상자 및 손실 | |
러시아 제국 | 33명 사망, 97명 부상, 함선 2척 자침 |
일본 제국 | 사상자 없음 (러시아 측 기록에 따르면 수뢰정 1척 침몰, 약 30명 사상) |
2. 배경
19세기 말,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물포, 여순항에 이르기까지 제1태평양 함대를 주둔시켜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일본 연합함대 제독 우류 소토키치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명령을 받아 6척의 순양함과 2,500명의 병력으로 제물포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특히 일본 방호순양함 지요다는 10개월 동안 제물포에 주둔하며 러시아 장갑순양함 바랴크와 포함 코리에츠를 감시했다.[3]
1904년 2월 7일, 일본 연합함대의 대규모 군함을 본 포함 코리에츠는 뤼순항에 지원을 요청했고, 2월 8일 이른 아침 코리에츠함이 일본 순양함 지요다를 발견하고 포를 쐈으나 지요다는 어뢰로 대응해 양측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코리에츠는 항구에서 퇴각했고 지요다는 우류 소토키치 제독의 소대와 접선했다. 영국의 HMS 탈봇, 프랑스의 파스칼, 이탈리아의 엘바, 미국 군함 빅스버그 등 정박한 중립국 항구에서는 일본군에게 항의했으나 오히려 위협을 받아 피신했다.
제물포는 대한제국서울의 주요 항구이자 1894년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주요 침략로였기 때문에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 그러나 제물포는 넓은 조수 간만과 광활한 갯벌, 좁고 구불구불한 수로로 인해 공격자와 방어자 모두에게 많은 전술적 어려움을 안겨주었다.[3]
2. 1.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관계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협력하여 일본 제국의 침략을 막으려 했으나,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기 어려웠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차관을 제공하고 군사 고문을 파견하는 등 영향력을 확대했지만, 제물포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2] 러일 전쟁의 시작은 일본 제국 해군이 뤼순, 블라디보스토크, 제물포만(현재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 분산되어 있던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 대한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2. 2.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준비
일본은 1904년 2월 4일 어전 회의에서 러시아와의 단교 및 개전을 결정하고, 2월 6일 러시아에 국교 단교를 통보했다.[3] 같은 날 사세보에서 연합함대가 출격하여 뤼순과 인천의 러시아 함정을 격멸하러 향했다. 인천의 러시아 함정 공격에는 구리우 소토키치 소장이 이끄는 제4전대( 나니와(기함), 다카치호, 아카시, 니이타카, 아사마)와 제9정대 및 제14정대의 수뢰정 8척이 투입되었다. 또한 다롄마루, 오타루마루, 평양마루에 탑승한 육군 군부대 약 2,200명의 인천 상륙 지원도 이 함대의 임무였다.제물포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대한제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한반도를 병참 기지로 활용했다.
3. 전투 과정
1904년 2월 8일 오후,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구리우 소토키치 소장이 이끄는 함대가 제물포에 접근했다. 이 함대는 순양함 나니와 (기함), 다카치호, 아카시, 니이타카, 아사마와 수뢰정 8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육군 군부대 약 2,200명의 상륙 지원 임무도 맡고 있었다.
제물포에는 러시아의 방호순양함 바랴크와 포함 코레에츠 외에, 일본의 방호순양함 지요다, 영국 군함 탈봇, 프랑스 군함 파스칼, 이탈리아 군함 엘바, 미국 군함 빅스버그, 대한제국 군함 양무, 러시아 상선 숭가리 등이 정박해 있었다. 지요다는 2월 7일 밤에 제물포를 출항하여 구리우 함대에 합류했다.
제물포에 접근한 구리우 함대는 출항해 오던 코레에츠와 조우했고, 일본 수뢰정이 어뢰 3발을 발사했다. 코레에츠도 발포했지만 양측 모두 피해는 없었다. 어느 쪽이 먼저 공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일본군은 육군 한 개 여단을 상륙시켰다.
같은 날, 구리우 소장은 브세볼로트 루드네프 대령에게 2월 9일 정오까지 제물포를 떠날 것을 요구하고, 불응 시 공격하겠다고 통고했다. 또한 중립국 함선들에게는 러시아 측에 통고했다는 사실과 전투에 휘말리지 않도록 피난할 것을 권고했다.
2월 9일 11시 55분, 러시아 함대는 닻을 올리고 바랴크, 코레에츠 순으로 항구 밖으로 향했다. 12시 10분, 아사마가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12시 20분에 포격을 시작했다. 지요다, 나니와, 니이타카도 포격을 시작했고, 러시아 함정들도 발포했다.
바랴크는 피탄으로 인해 피해가 커지고, 침수로 기울어져 화염에 휩싸이며 항내로 돌아갔다. 코레에츠도 바랴크를 뒤따랐으며, 1발 피탄되었다. 러시아 측에서는 31명이 전사했다.
3. 1. 전투 결과
제물포 해전은 일본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 함대는 피해가 전혀 없었다. 반면 러시아 측은 31명이 전사하고, 바랴크와 코레에츠를 잃었다.[7]전투 후, 바랴크는 자침되었고, 코레에츠는 폭파되었다.[7] 바랴크가 폭파되지 않은 이유는 다른 함정에 피해를 줄 우려가 있다는 영국 함장의 요청 때문이었다.[7] 또한, 러시아 상선 숭가리도 일본군에 나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침되었다.[7] 바랴크는 훗날 일본에 의해 인양되어 소야라는 이름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다시 러시아 군함으로 돌아갔다.[7]
자침한 러시아 함정의 승무원들은 중립국 함선(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의해 상하이 이남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다른 배를 통해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들은 전쟁 중 상하이 이북으로 오지 않고, 전쟁에 다시 종사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7]
한편, 소련 측 자료에는 일본 순양함 2~3척에 큰 피해를 입히고, 수뢰정 1척을 침몰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일본 측 자료와는 상반된다.[7]
4. 결과 및 영향
2월 9일 일본 함대의 제물포 해전 승리로 일본군은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장악했고, 대한제국은 러시아와의 국교가 단절되었다.[9]
일본군은 침몰한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를 인양하여 소야로 개명하고 훈련함으로 활용했다.[7]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다시 러시아 군함으로 돌아갔다.
4. 1. 대한제국의 피해
2월 9일 일본 함대는 제물포 항구에 5만 명의 병력을 상륙시켰고,[8] 선제공격을 통해 군사적으로 승리한 일본군은 한반도를 쉽게 장악하였다. 2월 12일 러시아 공사가 철수하면서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국교가 단절되었고,[9] 침몰한 러시아 함정은 이후 일본군에게 인양되어 일본군 함정으로 개조되었다.4. 2. 국제 사회의 반응
1904년 2월 8일 제물포 해전 당시 제물포에는 러시아 군함 외에도 영국 군함 탈보트, 프랑스 군함 파스칼, 이탈리아 군함 엘바, 미국 군함 빅스버그 등 여러 중립국 함선들이 정박해 있었다.[1] 그러나 이들 중립국 함선들은 일본 해군의 기습 공격을 막지 못했다.[1]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함선들은 자국 함선의 안전을 우려하여 일본 측에 러시아 함선의 폭파 처리를 하지 말 것을 요청했고, 일본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군함 바랴크는 폭파되지 않고 자침했다.[1] 자침한 러시아 함정의 승무원들은 중립국 함선들에 의해 상하이 이남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들은 전쟁 중 상하이 이북으로 오지 않고, 전쟁에 다시 종사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1]
5. 평가 및 논란
러일 전쟁의 시작을 알린 제물포 해전은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는 당시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3] 일본은 중립 항구였던 제물포에서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함대는 일본 함대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고, 중립국 함장들의 항복 권고에도 불구하고 공해로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6] 이러한 러시아 함대의 소극적인 대응은 전투 패배의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제물포 해전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제물포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는 주권 국가에 대한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소련 측 해전사에서는 일본 순양함 2~3척에 큰 피해를 입히고 수뢰정 1척을 침몰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 함대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6]
6. 추모 및 기념
인천광역시에는 제물포 해전에서 침몰한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를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7] 매년 제물포 해전 추모 행사가 열려 희생자들을 기리고 한러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 있다.
참조
[1]
간행물
Крейсер «Варяг»
Morskaya Kollektsya
[2]
서적
Rising Sun and Tumbling Bear: Russia's War with Japan
Cassell
[3]
서적
The Russo-Japanese War 1904-1905
https://archive.org/[...]
Osprey
[4]
서적
The Japan Russia War
https://archive.org/[...]
PW Ziegler
[5]
간행물
Papers Relating to th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Item Notes, 1904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D.C.
1904-05-11
[6]
간행물
Russia and Japan, and a complete history of the War in the Far East
[7]
서적
Maritime Operations in the Russo-Japanese War 1904–1905
Naval Institute Press
[8]
서적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2008
[9]
뉴스
1904년 러일전쟁 서막 연 제물포해전
신동아
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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