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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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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브라운은 "소울의 대부"로 불리는 미국의 가수, 댄서, 밴드 리더이자 작곡가이다. 1933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그는 가스펠에서 영감을 받은 강렬한 샤우트 창법과 펑크 음악을 개척하며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페이머스 플레임스(The Famous Flames)를 이끌며 〈Please, Please, Please〉, 〈Try Me〉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고, 이후 솔로 활동과 제이비스(The J.B.'s)를 결성하여 펑크 음악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브라운은 3번의 그래미상 수상,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롤링 스톤지 선정 역대 최고의 아티스트 7위에 오르는 등 음악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으며, 교육 및 인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6년 사망 이후에도 그의 음악과 유산은 힙합, 펑크, 소울 등 다양한 장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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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브라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3년의 브라운
본명제임스 조지프 브라운
출생일1933년 5월 3일
출생지사우스캐롤라이나주 반웰
사망일2006년 12월 25일
사망지조지아주 애틀랜타
활동 기간1954–2006
다른 이름
음악 활동
직업가수
댄서
음악가
레코드 프로듀서
밴드 리더
장르소울
R&B
펑크
악기보컬
건반
드럼
하모니카
기타
레이블페더럴

스매시
피플
폴리도르
TK
스코티 브라더스
머큐리
리퍼블릭
UMe
A&M
관련 그룹더 페이머스 플레임스
더 J.B.'s
더 댑스
웹사이트제임스 브라운 공식 웹사이트
개인 생활
배우자벨마 워렌 (1953–1969, 이혼)
디드레 젠킨스 (1970–1981, 이혼)
애드리엔 로드리게스 (1984–1996, 사망)
파트너토미 래 하이니 (1997–2006)
자녀9–13
추가 정보
출신지조지아주 토코아

2. 생애

제임스 조셉 브라운(James Joseph Brown)은 1933년 5월 3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번웰에서 태어났다.[13] 어린 시절 조지아주 오거스타로 이주하여 성장했으며, 1944년 지역 음악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며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16세 때 절도 혐의로 소년원에 수감되었으나, 1952년 가석방되었다.

가석방 후 가스펠 그룹 에버-레디 가스펠 싱어스(Ever-Ready Gospel Singers)와 R&B 그룹 에이번스(Avons)를 거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에이번스는 이후 페이머스 플레임스(The Famous Flames)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6년, 제임스 브라운은 '제임스 브라운 위드 더 페이머스 플레임스(James Brown with the Famous Flames)'라는 이름으로 첫 싱글 〈Please, Please, Please〉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206] 그룹은 〈Try Me〉, 〈Think〉 등의 히트곡으로 이름을 알렸다. 1960년대 들어 브라운은 점차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1960년대 중반부터 〈Papa's Got a Brand New Bag〉, 〈I Got You (I Feel Good)〉, 〈Cold Sweat〉 등을 통해 펑크 장르를 개척하며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206]

1968년 페이머스 플레임스가 해체된 후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을 이어갔으며, 1970년대에는 새로운 백 밴드인 제이비스(The J.B.'s)를 결성했다. 제이비스와 함께 〈Get Up (I Feel Like Being a) Sex Machine〉, 〈Get On The Good Foot〉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206]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디스코 열풍 속에서 점차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폭행, 불법 약물 및 무기 소지 등의 문제로 여러 차례 법적 문제에 휘말리고 수감되기도 했다.[206]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슬럼프를 극복하고 무대에 복귀하여 활동을 재개했으며, 1992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소울의 대부'로서의 입지를 재확인했다.[203]

2006년 12월 24일, 폐렴 증세가 악화되어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모리 크로포드 롱 병원에 입원했다. 다음 날인 12월 25일 새벽 1시 45분,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매니저 프랭크 코프시다스는 브라운의 오랜 친구인 찰스 보비가 임종을 지켜봤다고 밝혔으며, 정확한 사망 원인은 공식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04][205]

2. 1. 초기 생애 (1933년 ~ 1953년)

제임스 조셉 브라운 주니어(James Joseph Brown Jr.)는 1933년 5월 3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번웰(Barnwell)의 작은 나무 오두막에서 태어났다.[13] 그의 부모는 당시 16세였던 수지 벨링(Susie Behling)과 21세였던 조셉 가드너 브라운(Joseph Gardner Brown)이었다.[13] 원래 이름은 조셉 제임스 브라운 주니어(Joseph James Brown Jr.)였어야 했지만, 출생 증명서에 이름이 제임스 조셉 브라운(James Joseph Brown)으로 잘못 기재되었고, 성인이 된 후 이 이름을 사용했다.[14][15] 브라운 자신과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흑인 외에 다른 인종의 혈통도 가지고 있었다.[188]

브라운 가족은 당시 빈곤했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엘코(Elko)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며,[16] 제임스가 4~5살 무렵 조지아주 오거스타(Augusta)로 이주했다. 가족은 처음에는 이모가 운영하는 매음굴에 정착했다가 나중에 다른 이모 집에서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정 불화와 폭력적인 결혼 생활 끝에 가족을 떠나 뉴욕으로 갔다. 어린 시절 브라운은 목화 따기, 구두닦이 등으로 생계를 도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역 장기자랑 대회에서 노래 실력을 선보였고, 1944년 오거스타의 레녹스 극장(Lenox Theater)에서 열린 경연 대회에서 발라드 곡 "So Long"을 불러 우승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이모 집 근처 캠프 고든(Camp Gordon)을 지나던 군인들 앞에서 돈을 받고 벅 댄스를 추기도 했다. 이 시기에 피아노, 기타, 하모니카 연주법을 익혔으며, 루이 조던(Louis Jordan)과 그의 밴드 타임패니 파이브(Tympany Five)의 "칼도니아(Caldonia)"를 듣고 연예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18] 십대 시절 잠시 권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6세 때 자동차 절도 혐의(다른 기록에는 강도죄[189])로 유죄 판결을 받고 조지아주 토코아(Toccoa)의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당시 흑인이라는 이유로 반성 여부에 따라 8년 또는 16년이라는 차별적인 선고를 받았다고도 한다. 소년원에서 그는 조니 테리(Johnny Terry) 등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가스펠 4중창단을 결성했다. 수감 중 외부 야구 경기에서 가수 바비 버드(Bobby Byrd)를 만났는데,[189] 버드는 브라운의 노래 실력을 알아보고 그의 별명이 '뮤직 박스(Music Box)'임을 듣게 되었다.

버드와 그의 가족은 브라운의 조기 가석방을 도왔고, 브라운은 법정에서 '주님을 위해 노래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토코아의 사업가 S. C. 로슨(S. C. Lawson)이 브라운의 성실함에 감명받아 일자리를 보증하며 가석방을 도왔다. 브라운은 1952년 6월 14일에 가석방되었고, 로슨 밑에서 일하며 그의 가족과 교류를 이어갔다. 가석방 직후에는 바비 버드의 여동생 사라(Sarah)가 속한 가스펠 그룹 에버-레디 가스펠 싱어스(Ever-Ready Gospel Singers)에 합류하여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다리 부상으로 인해 잠시 했던 권투 선수와 야구 투수 활동은 그만두게 되었다.

2. 2. 페이머스 플레임스 (1954년 ~ 1968년)

1954년 제임스 브라운은 바비 버드의 그룹에 합류했다.[19] 이 그룹은 아카펠라 가스펠 그룹인 가스펠 스타라이터스(Gospel Starlighters)에서 시작하여 에이번스(Avons)라는 R&B 그룹으로 발전했다.[19] 브라운은 멤버 트로이 콜린스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후 밴드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19] 초기 멤버는 브라운과 버드를 포함해 실베스터 킬스, 도일 오글즈비, 프레드 풀리엄, 내시 녹스, 네플로이드 스콧 등이었다. 행크 발라드와 미드나이터스, 오리올스, 빌리 워드 앤드 히스 도미노스와 같은 R&B 그룹의 영향을 받아 그룹 이름을 토코아 밴드(Toccoa Band), 그리고 플레임스(Flames)로 변경했다.[19] 이후 네플로이드의 형제 바로이가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며 합류했고, 조니 테리도 나중에 합류했다.[24]

베리 트리미어는 그룹의 첫 매니저가 되어 조지아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대학 캠퍼스 근처에서 공연을 주선했다.[19] 그룹은 라이브 공연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페이머스 플레임스(The Famous Flames)로 이름을 바꾸었다.[21] 1955년, 매콘에서 공연 중 리틀 리처드를 만났고[20], 그의 조언으로 당시 매니저였던 클린트 브랜틀리와 계약했다.[22][25] 브랜틀리는 그룹을 지역 라디오 방송국으로 보내 데모 녹음을 하게 했고, 이때 자작곡 "Please, Please, Please"를 녹음했다. 이 곡은 리틀 리처드가 냅킨에 적어준 제목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21][22][25]

페이머스 플레임스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킹 레코드 산하 페더럴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1956년 3월 "Please, Please, Please"를 정식 발매했다.[191] 이 싱글은 "제임스 브라운 위드 더 페이머스 플레임스(James Brown with the Famous Flames)"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어 R&B 차트 5위를 기록하고 1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성공을 거두었다.[23] 하지만 후속 싱글 9장이 연달아 실패하면서 킹 레코드는 계약 해지를 고려하기도 했다. 킹 레코드 사장 시드 네이선은 "Please, Please, Please"를 처음 들었을 때 "음악도 아니고 쓰레기"라며 혹평했지만, 브라운의 설득 끝에 발매될 수 있었다.

1957년 브라운은 클린트 브랜틀리 대신 유니버설 어트랙션스 에이전시의 벤 바트를 새로운 매니저로 고용했다. 바트는 그룹 이름을 "제임스 브라운 앤드 히스 페이머스 플레임스(James Brown and His Famous Flames)"로 바꾸었고, 이 과정에서 원래 멤버들이 잠시 해체되기도 했다.[29] 1958년 10월 발표한 발라드 "Try Me"가 1959년 초 R&B 차트 1위에 오르면서[24] 그룹은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는 브라운의 17개 R&B 차트 1위 곡 중 첫 번째였다.[24] 이후 브라운은 J. C. 데이비스가 이끄는 밴드를 구성하고, 바비 버드, 유진 "베이비" 로이드 스톨워스, 바비 베넷으로 재구성된 페이머스 플레임스와 함께 활동했다. 조니 테리도 때때로 참여했다. 1959년 4월 24일, 이들은 아폴로 극장에서 리틀 윌리 존의 오프닝 공연을 맡았다.[19][33]

1960년부터 브라운은 보컬 그룹인 페이머스 플레임스와 별도로 자신의 밴드(제임스 브라운 오케스트라 또는 제임스 브라운 밴드로 불림)를 운영하며 녹음 활동을 병행했다. 같은 해, 밴드는 레이블 문제로 "냇 켄드릭 앤드 더 스완스(Nat Kendrick & the Swans)"라는 가명으로 "(Do the) Mashed Potatoes"를 발표하여 R&B 차트 10위권 히트를 기록했다.[25] 이 성공으로 시드 네이선은 브라운의 계약을 페더럴에서 모회사인 킹 레코드로 이전시켰다. 킹 레코드 소속으로 브라운은 페이머스 플레임스와 함께 히트곡 모음 앨범 '''Think!'''를 발매했고, 1961년에는 제임스 브라운 밴드와 함께 두 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 시기 페이머스 플레임스와 함께 "Bewildered", "I'll Go Crazy", "Think" 등의 히트곡을 내며 점차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갔다.[19]

1962년에는 연주곡 "Night Train" 커버 버전이 R&B 차트 5위 안에 들었고, 발라드 "Lost Someone"과 조 텍스(Joe Tex) 작곡의 "Baby, You're Right" 등이 레퍼토리에 추가되며 R&B 팬들 사이에서 입지를 다졌다. 1962년 10월 24일, 브라운은 자신의 비용으로 아폴로 극장 공연 실황을 녹음했다. 라이브 앨범은 잘 팔리지 않는다는 시드 네이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은 그를 설득하여 앨범 발매를 성사시켰다.

브라운(중앙)과 페이머스 플레임스(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비 베넷, 로이드 스톨워스, 그리고 보비 버드), 1964년 뉴욕시 아폴로 극장에서 라이브 공연


1963년 6월 발매된 Live at the Apollo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며 빌보드 톱 LP 차트 2위에 올랐고, 1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14개월 동안 차트에 머물렀다.[26] 같은 해, 스탠더드 곡 "Prisoner of Love"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해석하여 처음으로 팝 차트 20위권에 진입했다. 또한 자신의 첫 레이블인 트라이 미 레코드를 설립하여 태미 테렐(당시 태미 몽고메리), 조니 & 빌(페이머스 플레임스 멤버 조니 테리와 빌 홀링스), 포에츠(브라운의 백킹 밴드) 등의 음반을 제작했다.[19] 이 시기 브라운은 17세의 태미 테렐과 2년간의 관계를 가졌으나, 그의 학대적인 행동으로 인해 관계는 파탄났다.[27]

1964년, 더 큰 상업적 성공을 위해 브라운과 바비 버드는 머큐리 레코드 산하 스매시 레코드와 연계된 제작사 페어 딜(Fair Deal)을 설립했다.[19][28] 이에 킹 레코드는 브라운이 다른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하지 못하도록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가처분 결정 전, 브라운은 블루스 성향의 히트곡 "Out of Sight"를 포함한 싱글들을 스매시 레코드에서 발매했는데, 이 곡들은 그의 음악적 방향성을 예고했다.[29] 같은 해, 브라운과 페이머스 플레임스는 라이브 콘서트 영화 "The T.A.M.I. Show"에서 압도적인 공연을 선보이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들의 역동적인 보컬, 세련된 안무, 그리고 브라운의 에너지 넘치는 춤과 노래는 예정된 마지막 공연자였던 롤링 스톤스를 능가하는 인상을 남겼다.

킹 레코드와 새로운 계약을 맺은 브라운은 1965년 "Papa's Got a Brand New Bag"을 발표했다. 이 곡은 그의 첫 팝 차트 10위권 히트곡이 되었고 첫 그래미상을 안겨주었다.[38] 또한 로마 레코드와 제작 계약을 맺었다.[30] 1965년 말에는 "I Got You (I Feel Good)"을 발표하여 R&B 차트 1위와 팝 차트 10위권에 연속으로 진입했다. 이어 1966년 발라드 "It's a Man's Man's Man's World" 역시 팝 차트 10위권(R&B 1위)에 오르며 브라운은 명실상부한 최고 스타로 자리매김했다.[38] 이 시기 그의 음악은 점차 펑크 (Funk) 스타일로 발전했으며, 이는 이후 P-펑크, 슬라이 스톤, 프린스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92]

1968년, 페이머스 플레임스는 해체되었고, 브라운은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206]

2. 3. 솔로 활동 및 제이비스 (1969년 ~ 2006년)

1968년 페이머스 플레임스가 해체된 후, 제임스 브라운은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이미 1967년부터 그의 음악은 점차 펑크(Funk)로 정의되기 시작했으며, 그해 발표된 〈Cold Sweat〉는 일부 비평가들에게 최초의 진정한 펑크 곡으로 평가받으며 R&B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 곡은 드럼 브레이크를 포함하고 단일 코드로 단순화된 화성을 선보인 초기 사례 중 하나였다.[31][32]

1969년 공연 중인 브라운


1960년대 후반 브라운의 음악 스타일은 더욱 발전하여, 〈Give It Up or Turnit a Loose〉(1968), 〈Licking Stick-Licking Stick〉(1968), 〈Funky Drummer〉(1969) 같은 곡들에서는 호른 섹션, 기타, 베이스, 드럼이 서로 맞물리는 복잡한 리듬 패턴을 만들어냈다. 브라운의 보컬 역시 점차 노래와 말의 중간 형태인 리듬 중심의 선창(chant) 형태로 변해갔는데, 이는 훗날 힙합 음악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펑크 스타일은 상호 연동되는 당김음(syncopation) 파트, 강력한 베이스 라인, 독특한 드럼 패턴, 그리고 상징적인 타악기 스타일의 기타 리프를 특징으로 했다.[33] 특히 〈Ain't It Funky〉(1969)와 〈Give It Up or Turnit a Loose〉는 뉴올리언스 펑크를 단순화하여 리듬의 본질을 강조한 예시로 꼽힌다.[34] 이러한 곡들은 후대 힙합 아티스트들에게 끊임없이 샘플링되었고, 제임스 브라운은 역사상 가장 많이 샘플링된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음악은 하우스 음악, 정글 음악, 드럼 앤 베이스 등 현대 댄스 음악 장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브라운은 "소울 브라더 넘버 원 (Soul Brother No. 1)"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6] 그의 음악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펑카델릭, 찰스 라이트 앤 더 왓츠 103번가 리듬 밴드, 부커 T. 앤 더 M.G.'s 같은 그룹뿐 아니라 에드윈 스타, 데이비드 러핀, 데니스 에드워즈 같은 보컬리스트, 그리고 마이클 잭슨 등 수많은 음악가에게 영향을 미쳤다.[37]

브라운의 밴드에는 재즈 경험이 풍부한 음악가들이 많았다. 트럼펫 연주자 루이스 햄린과 색소폰/키보디스트 알프레드 "피 위" 엘리스가 밴드를 이끌었고, 기타리스트 지미 놀렌의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리프와 마시오 파커의 색소폰 솔로는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바비 버드, 트롬본 연주자 프레드 웨슬리, 드러머 존 "자보" 스타크스와 클라이드 스터블필드, 색소폰 연주자 세인트 클레어 핀크니, 베이시스트 버나드 오덤 등이 주요 멤버로 활동했다.

솔로 활동 기간 동안 브라운은 ''Live at the Garden'' (1967), ''Live at the Apollo, Volume II'' (1968) 같은 성공적인 라이브 앨범과 TV 스페셜 ''James Brown: Man to Man'' (1968)을 발표했다. 또한 음악 사업에도 진출하여, 자신의 고향인 오거스타의 라디오 방송국 WRDW를 비롯해[38] 1967년 11월에는 테네시주 녹스빌의 WGYW를 약 7.5만달러에 인수하여 자신의 이니셜을 딴 WJBE로 바꾸고 R&B 방송을 시작했다. 1970년에는 볼티모어의 WEBB도 인수했다.

그는 자신의 밴드 외 다른 음악가들과도 협업했다. 성인 컨템포러리 팬층을 겨냥하여 디 펠리체 트리오, 루이 벨슨 오케스트라와 함께 발라드와 재즈 스탠더드 곡 위주의 앨범 ''Gettin' Down To It'' (1969)과 ''Soul on Top'' (1970)을 녹음했다. 1968년에는 백인 밴드 더 댑스와 함께 〈I Can't Stand Myself〉를 포함한 여러 펑크 트랙을 녹음하기도 했다. 또한 세 장의 크리스마스 음악 앨범도 발매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브라운은 새로운 밴드 제이비스(The J.B.'s)를 결성했다. 1970년 3월, 기존 밴드 멤버 대부분이 급여 문제로 탈퇴하자[194], 베이시스트 부치 콜린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밴드를 구성했다. 제이비스는 독자적인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으며, 브라운과 함께 〈Get Up (I Feel Like Being a) Sex Machine〉, 〈Get On The Good Foot〉(1972), 〈The Payback〉(1973), 〈Funky President (People It's Bad)〉(1974) 등의 히트곡을 만들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206]

기간주요 멤버악기
1970–1971년경클라이드 스터블필드드럼
존 "자보" 스타크스드럼
로버트 맥컬로[195]테너 색소폰
프레드 웨슬리트롬본
세인트 클레어 핀크니테너 색소폰
펠프스 캣피시 콜린스기타
하론 치즈 마틴기타
윌리엄 부치 콜린스베이스
조니 그릭스콩가, 퍼커션
비키 앤더슨 (마이라 번즈)보컬
대니 레이MC
바비 버드보컬, 오르간
1972–1974년경프레드 토마스베이스
프레드 웨슬리트롬본, 음악 감독
존 "자보" 스타크스드럼
마시오 파커 (1973년경 재합류)알토 색소폰
세인트 클레어 핀크니테너 색소폰
스윗 찰스 셰럴베이스, 키보드
지미 놀렌 (1972년경 재합류)기타
하론 치즈 마틴기타
조니 그릭스콩가, 퍼커션
마사 하이 (마사 하빈)백킹 보컬
대니 레이MC
린 콜린스보컬



1974년, 브라운은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에서 열린 모하메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권투 경기에 맞춰 개최된 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이 모습은 다큐멘터리 영화 《소울 파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디스코 음악이 유행하면서 브라운의 인기는 점차 하락했다. 그의 음악이 디스코의 원형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디스코 붐 속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206] 〈Get Up Offa That Thing〉(1976), 〈Bodyheat〉(1977) 같은 곡들이 일부 히트했지만, 전반적으로 판매량은 저조했다. 다만 1979년 발표한 앨범 《The Original Disco Man》과 수록곡 〈It's Too Funky in Here〉는 후에 재평가받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브라운은 폭행, 불법 약물 및 무기 소지, 과속 운전 등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수차례 수감되었다.[206] 특히 세 번째 아내 아드리엔느 로드리게스 폭행 혐의로 복역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슬럼프를 극복하고 무대에 복귀했으며, 1992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소울의 대부'로서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203]

2006년 12월 24일, 브라운은 폐렴 증세 악화로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모리 크로포드 롱 병원에 입원했다. 다음 날인 12월 25일 새벽 1시 45분, 그는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오랜 친구 찰스 보비가 임종을 지켰으며, 정확한 사망 원인은 공식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04][205]

3. 음악 스타일 및 영향

1977년 제임스 브라운


제임스 브라운은 소울과 펑크 장르를 대중화시킨 핵심 인물로, '갓파더 오브 소울(Godfather of Soul)'이라는 상징적인 칭호를 얻었다.[206] 또한 지칠 줄 모르는 공연 활동으로 '쇼 비즈니스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The Hardest Working Man In Show Business)'이라는 별명으로도 널리 알려졌다.[206]

그의 혁신적인 음악 스타일과 에너 넘치는 무대 퍼포먼스는 믹 재거, 마이클 잭슨, 프린스를 비롯한 수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205][37] 특히 그의 독특한 리듬과 사운드는 힙합 음악샘플링 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샘플링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남아있다.[206][34] 그의 격렬한 춤 동작은 스트리트 댄스, 특히 비보잉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206]

음악사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총 세 차례 그래미상을 수상했으며(1965년 최우수 R&B 음반, 1987년 최우수 R&B 보컬 남자 부문, 1992년 평생공로상),[205] 1986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첫 헌액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205] 2000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206]

3. 1. 펑크(Funk)의 개척자



1967년,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새롭게 등장한 펑크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그 해 발표한 "콜드 스웨트 (Cold Sweat)"는 일부 비평가들에게 최초의 진정한 펑크 곡으로 평가받으며 R&B 차트 1위, 팝 차트 톱 10에 올랐다. 이 곡은 드럼 브레이크를 포함하고 단일 코드로 단순화된 하모니를 선보인 초기 사례 중 하나였다.[31][32] (참고: 1961년 녹음, 1962년 발매된 클레이턴 필리아우 연주의 "아이브 갓 머니 (I've Got Money)"는 펑크의 기초 중 하나로 언급된다.)

1968년의 "기브 잇 업 오어 턴잇 어 루스 (Give It Up or Turnit a Loose)"와 "리킹 스틱-리킹 스틱 (Licking Stick-Licking Stick)", 1969년의 "펑키 드러머 (Funky Drummer)" 같은 곡들은 1960년대 중반 브라운의 스타일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 곡들에서는 호른 섹션, 기타, 베이스, 드럼이 여러 개의 상호 연동되는 리프를 기반으로 복잡한 리듬 패턴을 만들어냈다.

"콜드 스웨트"에서 시작된 스타일 변화는 "아이 갓 더 필린 (I Got the Feelin')"(1968), "마더 팝콘 (Mother Popcorn)"(1969) 등 후기 히트곡의 음악적 토대가 되었다. 이 시기 브라운의 보컬은 노래와 말의 중간 형태인 리듬적인 선창에 가까웠으며, 간헐적으로 피치나 멜로디의 흔적을 보였다. 이는 훗날 힙합 음악과 함께 발전할 기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후반 브라운 펑크 스타일의 핵심은 상호 연동되는 싱코페이션 파트, 즉 강력한 베이스 라인, 싱코페이션된 드럼 패턴, 그리고 상징적인 타악기 같은 기타 리프였다.[33]

1969년 곡 "에인트 잇 펑키 (Ain't It Funky)"와 "기브 잇 업 오어 턴잇 어 루스 (Give It Up or Turnit a Loose)"의 주요 기타 오스티나토는 브라운이 뉴올리언스 펑크를 정제하여 리듬의 본질만 남긴 예시이다. 두 곡 모두 음조 구조는 단순하며, 기타는 마치 아프리카 드럼처럼 음높이보다는 리듬 패턴을 강조한다. 알렉산더 스튜어트는 이러한 느낌이 "뉴올리언스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을 통해 1970년대 대중 음악으로 전해졌다"고 평가했다.[34] 이 곡들은 1970년대 이후 수많은 힙합 음악가들에게 샘플링되었고, 그 결과 제임스 브라운은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샘플링된 음악가로 남아 있다. 그가 작곡한 두 곡은 현대 무용 음악, 특히 하우스 음악, 정글 음악, 드럼 앤 베이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후자 두 장르에서는 곡의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브링 잇 업 (Bring it Up)"은 아프로 쿠바 리듬인 구아헤오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세 개의 기타 리프 모두 온비트/오프비트 구조를 기반으로 하며, 스튜어트는 이를 "타임 라인(클라베, 트레시요 등)과는 다른, 느슨한 조직 원리에 가깝다"고 설명했다.[35]

이 시기 브라운은 "소울 브라더 넘버 원 (Soul Brother No. 1)"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2년 전 시카고 공연에서 솔로몬 버크에게 "소울의 왕" 칭호를 빼앗기지 못한 일화와 관련이 있다.[36] 그의 음악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펑카델릭, 찰스 라이트 앤 더 왓츠 103번가 리듬 밴드, 부커 T. 앤 더 M.G.'s 같은 그룹과 더 템테이션스의 에드윈 스타, 데이비드 러핀, 데니스 에드워즈 같은 보컬리스트, 그리고 평생 브라운을 우상으로 꼽은 마이클 잭슨 등 동시대 및 후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37]

브라운의 밴드에는 재즈 경험이 풍부한 음악가와 편곡가들이 합류했다. 그는 R&B의 단순함과 역동성을 재즈의 리듬 복잡성 및 정확성과 결합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트럼펫 연주자 루이스 햄린과 색소폰/키보디스트 알프레드 "피 위" 엘리스가 밴드를 이끌었고, 기타리스트 지미 놀렌은 타악기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리프를 제공했으며, 마시오 파커의 색소폰 솔로는 많은 곡의 중심이 되었다. 밴드의 다른 주요 멤버는 다음과 같다.

이름포지션
바비 버드보컬 (더 페이머스 플레임스)
프레드 웨슬리트롬본
존 "자보" 스타크스드럼
클라이드 스터블필드드럼
멜빈 파커드럼
세인트 클레어 핀크니색소폰
알폰소 "컨트리" 켈럼기타
버나드 오덤베이스



이 시기 브라운은 ''라이브 앳 더 가든''(1967), ''라이브 앳 더 아폴로, 볼륨 II''(1968) 등 성공적인 라이브 앨범과 1968년 TV 스페셜 ''제임스 브라운: 맨 투 맨''을 발표했다. 그의 음악적 영향력과 함께 사업적 제국도 확장되었다. 재정적, 예술적 독립을 추구하며 1960년대 후반에는 라디오 방송국을 인수했는데, 여기에는 고향 오거스타의 WRDW와 테네시주 녹스빌의 WGYW(약 7.5만달러에 인수하여 자신의 이니셜을 딴 WJBE로 변경) 등이 포함되었다.[38] WJBE는 1968년 1월 15일 "WJBE 1430 로우 소울 (Raw Soul)"이라는 슬로건으로 리듬 앤 블루스 방송을 시작했다. 1970년에는 볼티모어의 WEBB도 인수했다.

브라운은 자신의 밴드 외 음악가들과도 협업했다. 나이 많고 부유한 백인 성인 컨템포러리 청중을 공략하기 위해 디 펠리체 트리오, 루이 벨슨 오케스트라와 함께 로맨틱 발라드, 재즈 스탠더드 위주의 앨범 ''겟팅 다운 투 잇 (Gettin' Down To It)''(1969)과 ''소울 온 탑''(1970)을 녹음했다. 1968년에는 백인 밴드 더 댑스와 함께 히트곡 "아이 캔트 스탠드 마이셀프"를 포함한 펑크 트랙들을 녹음했으며, 자신의 밴드와는 세 장의 크리스마스 음악 앨범을 발매했다.

=== 제이비즈(The J.B.'s) 시대 ===

1970년 3월, 재정 문제로 인해 1960년대 중후반 로드 밴드 멤버 대부분이 브라운을 떠났다. 이는 2년 전 보컬 그룹 더 페이머스 플레임스가 같은 이유로 해체된 것과 유사했다. 브라운과 전 페이머스 플레임스 멤버 바비 버드는 밴드에 남아 공동 프런트맨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신시내티 출신 밴드 페이스메이커스의 멤버였던 베이시스트 부치 콜린스와 기타리스트 캣피시 콜린스 등을 영입했다. 이들과 기존 밴드 잔류 멤버(프레드 웨슬리는 1970년 12월 복귀) 및 새로운 연주자들이 합쳐져 브라운의 새로운 백킹 밴드인 제이비즈의 핵심을 이루었다.[39]

제이비즈 결성 직후 녹음한 "섹스머신 (Get Up (I Feel Like Being a) Sex Machine)"은 브라운이 "더 원(The One)"이라 부른 정박 비트에서 벗어난 연주[39]를 특징으로 하며, 펑크 장르에서 브라운의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러나 1971년 3월 유럽 투어(러브 파워 피스 앨범에 기록됨) 이후 금전 문제와 부치 콜린스의 LSD 사용 문제로 이 라인업은 해체되었고, 웨슬리, 세인트 클레어 핀크니, 드러머 존 스타크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제이비즈가 결성되었다.

1972년 탬파 공연 후 디스크 자키와 함께 있는 브라운


1971년 브라운은 폴리도르 레코드와 계약했다. 그는 자신의 레이블인 피플 레코드를 통해 프레드 웨슬리 & 더 제이비즈, 바비 버드, 린 콜린스, 비키 앤더슨, 행크 발라드 등 자신의 세션 뮤지션과 지원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발매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브라운은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 대신 공화당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 재선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40] 이 결정으로 그의 공연이 보이콧을 당했고, 브라운 자신에 따르면 상당수의 흑인 관객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1973년 그의 음반 판매량과 미국 내 콘서트 인기는 주춤했고, 그 해 R&B 차트 1위 싱글을 내지 못했다. 또한 미납 세금 문제로 IRS과 갈등을 겪었는데, IRS는 그가 450만달러 이상을 체납했다고 주장했다. 5년 전에도 IRS는 그가 거의 200만달러를 체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107]

1973년 공연 중인 브라운


1973년 브라운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 ''블랙 시저''의 음악을 맡았다. 1974년에는 "페이백"으로 R&B 차트 1위에 복귀했으며, 동명 앨범도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마이 땡"과 "파파 돈 테이크 노 메스"로 두 번 더 R&B 차트 1위를 기록했다.

"파파 돈 테이크 노 메스"는 그의 마지막 R&B 차트 1위 곡이 되었다. 이후 "펑키 프레지던트"(R&B 4위)와 "겟 업 오파 댓 띵"(R&B 4위) 등이 R&B 톱 10에 진입했다.

데이비드 맨쿠소, 프랜시스 그라소 같은 DJ들이 뉴욕 언더그라운드 디스코 씬에서 그의 음반을 플레이하며 디스코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지만, 브라운 자신은 1975년 앨범 ''섹스 머신 투데이'' 이전까지는 의식적으로 디스코 트렌드를 따르지 않았다. 1977년경 그는 더 이상 R&B 씬의 주도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겟 업 오파 댓 띵" 이후 폴리도르에서 발매된 1970년대 후반 녹음 중 13곡이 R&B 톱 10 진입에 실패했다. 1976년 "바디히트"와 1979년 디스코 풍의 "잇츠 투 펑키 인 히어"만이 R&B 톱 15에 들었고, 발라드 "키스 인 '77"은 톱 20에 진입했다.

1976년 "바디히트" 이후로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도 오르지 못했다. 콘서트 관객은 줄어들었고, IRS와의 분쟁으로 사업 제국은 붕괴했다. 프레드 웨슬리, 마시오 파커 등 오랜 밴드 동료들은 점차 파를러먼트-펑카델릭으로 이적했다. 디스코의 부상은 그의 거친 펑크 사운드를 밀어내고 더 세련되고 상업적인 스타일이 주류가 되면서 R&B 차트 성공을 가로막았다.

1979년 앨범 ''오리지널 디스코 맨'' 발매 당시 브라운은 작곡과 프로듀싱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프로듀서 브래드 샤피로에게 대부분을 맡겼다. 이 앨범의 싱글 "잇츠 투 펑키 인 히어"는 이 시기 그의 가장 성공적인 곡이 되었다. 이후 두 장의 앨범이 차트 진입에 실패하자 브라운은 1981년 폴리도르를 떠났다. 이 무렵 그는 밴드 이름을 제이비즈에서 솔 제너럴스(Soul Generals) 또는 솔 지스(Soul G's)로 변경했고, 이 이름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 1980년대 재기와 힙합과의 연결 ===

음반 판매는 부진했지만, 1982년 로스앤젤레스 레세다 컨트리 클럽에서의 연속 공연이 매진되며 경력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를 계기로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여 ''닥터 디트로이트''(1983), ''록키 4''(1985) 등에 출연했다. TV 시리즈 ''마이애미 바이스'' 에피소드 "미싱 아워스"(1987)에도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전에는 ''블루스 브라더스''(1980)에 다른 흑인 음악 거장들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1984년에는 랩 뮤지션 아프리카 밤바타와 협력하여 "유니티"를 발표했다. 1년 후 스코티 브라더스 레코드와 계약하고 1986년 앨범 ''그래비티''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그의 마지막 톱 10 팝 히트곡인 "리빙 인 아메리카"가 수록되었다. 이 곡은 1974년 이후 처음으로 팝 차트 톱 40에, 1968년 이후 처음으로 톱 10에 진입한 곡이었다. 댄 하트먼이 프로듀싱하고 작곡한 이 곡은 영화 ''록키 4''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브라운은 영화 속 아폴로 크리드의 마지막 경기 장면에서 이 노래를 직접 불렀다. 1986년에는 브루스 터커와 공동 집필한 자서전 ''재임스 브라운: 솔의 대부''가 출판되었고, 1987년에는 "리빙 인 아메리카"로 그래미 최우수 남성 R&B 보컬 퍼포먼스 상을 수상했다.

1988년 브라운은 프로덕션 팀 풀 포스와 함께 뉴 잭 스윙의 영향을 받은 앨범 ''아임 리얼''을 작업했다. 이 앨범은 그의 마지막 두 곡의 R&B 톱 10 히트곡인 "아임 리얼"과 "스태틱"을 만들어냈는데, 각각 R&B 차트 2위와 5위에 올랐다. 한편, 1969년 히트곡 "기브 잇 업 오어 턴잇 어 루스"의 두 번째 버전에서 나온 드럼 브레이크는 컴필레이션 앨범 ''인 더 정글 그루브''에 수록되어 1980년대 초 브레이크댄스를 위한 힙합 댄스 파티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힙합 선구자 커티스 블로우는 이를 "힙합의 국가"라고 불렀다.[41]

1998년 공연 중인 브라운


1980년대 후반 수감 생활 후 브라운은 래리 프리디와 토마스 하트를 만나 1992년 발표된 첫 전기 영화 ''재임스 브라운: 더 맨, 더 메시지, 더 뮤직'' 제작에 참여했다.[42] 1991년 앨범 ''러브 오버 듀''로 음악계에 복귀했으며, 싱글 "(소 타이어드 오브 스탠딩 스틸 위 갓 투) 무브 온"은 R&B 차트 48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폴리도르는 그의 경력을 총망라하는 4CD 박스 세트 ''스타 타임''을 발매했다. 그의 출소는 전 소속사들이 그의 앨범들을 추가 트랙과 해설을 담아 CD로 재발매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브라운은 래퍼 MC 해머의 "투 리짓 투 퀴트"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해머와 빅 대디 케인은 브라운의 독특한 무대 매너와 춤을 힙합 세대에게 알린 것으로 평가받으며, 둘 다 브라운을 우상으로 여겼다. 해머는 자신의 히트 앨범 ''플리즈 해머, 돈 허트 엠''의 "히어 컴스 더 해머"에서 "수퍼 배드"의 리듬을 샘플링했고, 빅 대디 케인 역시 여러 차례 그의 음악을 샘플링했다. 그 해 말, 브라운은 로스앤젤레스 윌턴 극장 공연 후 유료 시청 콘서트를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91년 6월 10일 윌턴 극장에서 열린 "재임스 브라운: 리빙 인 아메리카 – 라이브!" 공연에는 MC 해머, 벨 비브 데보, 헤비 디 & 더 보이스, 앤 보그, 씨앤씨 뮤직 팩토리, 퀸시 존스, 셔먼 헴슬리, 키넌 아이보리 웨이언스 등이 출연했으며, 아이스 티, 톤 로크, 쿨 모 디가 브라운에게 경의를 표하는 공연을 펼쳤다. 이는 그가 폭행 등 중범죄로 선고받은 6년형 중 2년 반을 복역하고 가석방된 후 가진 첫 공개 공연이었다.

브라운은 계속해서 음반 작업을 했다. 1993년 앨범 ''유니버설 제임스''를 발매했고, 싱글 "캔트 겟 에니 하더"는 미국 R&B 차트 76위, 영국 차트 59위를 기록하며 그의 마지막 빌보드 차트 진입 곡이 되었다. 영국에서의 성공은 데이케인이 피처링한 "아이 필 굿" 리믹스 버전의 영향도 있었다. 이후 싱글 "하우 롱", "조지아-리나"는 차트에 오르지 못했다. 1995년에는 아폴로 극장에서 ''라이브 앳 더 아폴로 1995''를 녹음했으며, 스튜디오 트랙 "리스펙트 미"를 싱글로 발매했으나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다.

2001년 NBA 올스타 게임 잼 세션 중인 브라운


그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아임 백''(1998)과 ''넥스트 스텝''(2002)이 발매되었다. ''아임 백''의 싱글 "펑크 온 어 롤"은 영국 차트 40위에 올랐으나 미국에서는 차트에 오르지 못했다. ''넥스트 스텝''에는 그의 마지막 싱글인 "킬링 이즈 아웃, 스쿨 이즈 인"이 수록되었다. 두 앨범 모두 데릭 몽크가 프로듀싱했다. 브라운은 고령에도 "쇼 비즈니스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활발한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 2003년에는 PBS ''아메리칸 마스터스'' 시리즈의 다큐멘터리 ''재임스 브라운: 솔 서바이버''에 참여했다.

브라운은 슈퍼볼 XXXI 하프타임 쇼(1997), 월드 챔피언십 레슬링의 슈퍼브롤 X 등 다양한 행사에 출연하며 그의 상징적인 지위를 확인시켰다. 영화에도 카메오로 출연했는데, 토니 스콧 감독의 단편 영화 ''더 하이어: 빗 더 데빌''(2001)에서는 클라이브 오언, 게리 올드먼, 대니 트레호, 마릴린 맨슨과 함께 출연했고, 성룡 주연의 영화 ''턱시도''(2002)와 코미디 영화 ''언더커버 브라더''(2002)에도 본인 역으로 등장했다.

2005년 6월 공연 중인 브라운


2004년에는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콘서트의 오프닝 무대에 섰다.[43] 2005년 초에는 마크 엘리엇과 공동 집필한 두 번째 자서전 ''아이 필 굿: 어 메모어 오브 어 라이프 오브 솔''을 출판했다. 같은 해 프레드 웨슬리, 피 위 엘리스 등 오랜 협력자들과 스튜디오 앨범 녹음 세션을 가졌으나, 브라운이 흥미를 잃어 앨범은 발매되지 않았다. 다만 세션 중 녹음된 "갓 버킷"은 2006년 ''MOJO'' 잡지의 컴필레이션 CD에 수록되었다.[44]

2005년 7월, 마지막 라이브 8 콘서트인 에든버러 5만 – 더 파이널 푸시에 출연하여 영국 팝스타 윌 영과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을 불렀다. 또한 블랙 아이드 피스의 앨범 ''몽키 비즈니스''의 곡 "데이 돈트 원트 뮤직"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영국 토크쇼 ''프라이데이 나이트 위드 조나단 로스''에서는 조스 스톤과 듀엣 공연을 펼쳤다. 2006년에는 "70년대 펑크 월드 투어"를 계속했다.

그의 마지막 주요 미국 공연은 2006년 8월 샌프란시스코 포트 메이슨에서 열린 골든 게이트 페스티벌(Foggfest) 헤드라이너 무대였다. 다음 날에는 캘리포니아주 아르카타의 훔볼트 주립대학교에서 공연했다. 아일랜드 옥시젠 2006 페스티벌에서는 8만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했으며, 2006년 10월 런던 라운드하우스에서 열린 BBC 일렉트릭 프롬즈 공연은 그의 마지막 주요 콘서트 중 하나였다.[45]

그의 마지막 TV 출연은 2006년 11월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식이었다. 사망 직전에는 가수 애니 레녹스와 함께 그녀의 2007년 앨범 ''비너스''에 수록될 듀엣곡 "벤전스"를 녹음할 예정이었다.

브라운의 가장 유명한 사회자는 30년 이상 그와 함께한 대니 레이(가운데)였다.


가수로서 브라운은 가스펠 음악에 뿌리를 둔 강렬한 샤우팅 스타일로 공연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와 역사 백과사전''(1996)은 "그의 리드미컬한 그르렁거림과 표현력 넘치는 비명은 링 샤우트, 노동요, 들판의 외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기술하며, "그는 리듬 앤 블루스가 재즈와 블루스에서 유래한 이후 록큰롤과 팝의 이중 압력 아래 점차 잃어버렸던 리듬의 복잡성을 되살렸다"고 평가했다.[46]

브라운의 투어 공연은 화려한 볼거리로 유명했다. 사망 당시 그의 밴드는 기타리스트 3명, 베이스 기타리스트 2명, 드러머 2명, 호른 연주자 3명, 타악기 연주자 1명으로 구성되었다.[47] 1

3. 2. 후대 음악에 미친 영향



제임스 브라운은 소울과 펑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여 '갓파더 오브 소울(Godfather of Soul)'이라는 칭호를 얻었다.[206] 그의 왕성한 음반 제작과 공연 활동 덕분에 '하디스트 워킹 맨 인 쇼 비즈니스(The Hardest Working Man In Show Business)'라는 별명도 붙었다.[206]

브라운의 음악적 혁신은 1967년 발표한 "콜드 스웨트 (Cold Sweat)"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이 곡은 일부 비평가들에게 최초의 진정한 펑크 곡으로 평가받으며 R&B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 곡은 드럼 브레이크를 포함하고 단일 코드로 하모니를 축소한 초기 사례 중 하나였다.[31][32] 이후 "기브 잇 업 오어 턴잇 어 루스 (Give It Up or Turnit a Loose)", "리킹 스틱-리킹 스틱 (Licking Stick-Licking Stick)" (1968), "펑키 드러머 (Funky Drummer)" (1969) 등에서는 호른 섹션, 기타, 베이스, 드럼이 여러 개의 상호 연동되는 리프를 기반으로 복잡한 리듬 패턴을 만들어내는 스타일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러한 상호 연동되는 싱코페이션 파트, 당당한 베이스 라인, 싱코페이션된 드럼 패턴, 타악기적인 기타 리프는 1960년대 후반 브라운 펑크 스타일의 핵심이 되었다.[33] 브라운의 보컬 역시 단순한 노래나 말이 아닌 리듬 선창(rhythmic declamation)의 형태를 띠며, 이는 훗날 힙합 음악 기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33]

그의 빠르고 독창적인 리듬과 음악 스타일은 믹 재거, 마이클 잭슨 등 수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205] 특히 마이클 잭슨은 평생 브라운을 자신의 최고 우상으로 꼽았으며,[37] 2003년 BET 어워드에서는 브라운에게 평생 공로상을 직접 수여하며 "여기에 있는 이 사람만큼 제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존경을 표했다. 데이비드 보위의 "Fame", 프린스의 "Kiss", 조지 클린턴의 "Atomic Dog" 등 많은 곡들이 브라운의 리듬과 노래를 기초로 만들어졌다.[205] 또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펑카델릭, 찰스 라이트 앤 더 왓츠 103번가 리듬 밴드, 부커 T. 앤 더 M.G.'s와 같은 그룹들과 더 템테이션스의 에드윈 스타, 데이비드 러핀, 데니스 에드워즈 같은 보컬리스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37]

특히 힙합 음악 발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의 곡들은 수많은 힙합 노래에 샘플링 기법으로 활용되었으며,[206] 제임스 브라운은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샘플링된 음악가로 남아 있다.[34] 1969년 곡 "기브 잇 업 오어 턴잇 어 루스 (Give It Up or Turnit a Loose)"의 드럼 브레이크는 1980년대 초반 브레이크댄스 파티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힙합 선구자 커티스 블로우는 이 곡을 "힙합의 국가(national anthem of hip hop)"라고 칭했다.[41] 1984년에는 힙합 아티스트 아프리카 밤바타와 함께 "유니티"를 발표하며 직접 힙합 씬과 교류하기도 했다.[41] MC 해머, 빅 대디 케인 등 후배 힙합 뮤지션들은 브라운을 "스승이자 아버지"로 존경하며 그의 음악을 샘플링하고 그의 무대 스타일을 자신들의 퍼포먼스에 접목했다.[41] 브라운의 음악은 하우스 음악, 정글 음악, 드럼 앤 베이스와 같은 현대 전자 댄스 음악 장르에도 영향을 미쳤다.[34]

무대 위에서 보여준 격렬한 스텝과 퍼포먼스는 이후 스트리트 댄스, 특히 비보잉에 직접적인 영감을 제공했다.[206] 그의 화려하고 에너지 넘치는 무대는 수많은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라이브 공연은 높은 수준의 규율과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57][58][59]

퍼블릭 에너미의 래퍼 척 D는 "브라운은 단연 최고의 연주를 보여줬다"며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브라운의 펑크를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203] 브라운 자신도 2003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디스코도 제임스 브라운, 힙합도 제임스 브라운, 랩도 제임스 브라운"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자부했다.[203]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세 차례 그래미상을 수상했으며(1965년 최우수 R&B 음반, 1987년 최우수 R&B 보컬 남자 부문, 1992년 평생공로상),[205] 1986년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등과 함께 로큰롤 명예의 전당 첫 헌액자로 선정되었다.[205] 또한 2000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206] 2006년에는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3년에는 케네디 센터 상을 수상했다.

4. 사회 운동

제임스 브라운은 교육과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행보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으나, 때로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브라운의 사회 참여는 정치 영역으로도 이어졌으나, 그의 정치적 행보는 때때로 논란을 낳았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허버트 험프리 후보를 지지했으나[62],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대와 흑인 활동가들을 비판하는 듯한 노래 "아메리카가 나의 고향이다"를 발표하며 일부로부터 엉클 톰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69년 리처드 닉슨 공화당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닉슨 지지로 돌아섰다.[63]

1972년 닉슨 재선 운동을 지지하면서 브라운은 상당한 반발에 부딪혔다. 여러 흑인 단체들이 그의 음반 불매 운동을 벌이고 콘서트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제임스 브라운: 닉슨의 광대"와 같은 피켓이 등장하는 등 그의 경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닉슨 지지로 인한 반발 때문에 1973년 닉슨 취임 기념 청소년 콘서트 참석을 결국 취소하기도 했다.[65] 이후 브라운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지자 닉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You Can Have Watergate (Just Gimme Some Bucks And I'll Be Straight)"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닉슨 사임 후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자 "Funky President (People It's Bad)"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브라운은 다시 민주당 지지로 선회하여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취임식 무도회에 참석했으며[65], 1984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대통령의 재선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66] 이처럼 양당의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력에도 불구하고 브라운 자신은 민주당원도 공화당원도 아니라고 밝혔다.[67] 1999년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는 20세기 영웅으로 존 F. 케네디와 함께, 과거 인종차별주의적 성향을 보였던 딕시크랫 출신의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을 꼽으며 "그는 나에게 할아버지와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68] 2003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국 공화당 상원 위원회 모금 행사에 참여하는 등[69] 말년까지도 특정 정파에 얽매이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한편으로 그는 1970년대부터 흑인 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를 지도하기도 했다.[71]

4. 1. 교육 운동

브라운의 주요 사회 운동은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경험과 7학년 때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를 중퇴해야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높은 중퇴율에 주목하여, 브라운은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노래 "Don't Be a Drop-Out"을 발표했다. 이 노래로 얻은 저작권료는 중퇴 예방을 위한 자선 단체에 기부되었다. 이러한 활동의 성공으로 브라운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백악관에서 만났다. 존슨 대통령은 브라운이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역할 모델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허버트 험프리 후보를 지지했다.[62] 이후 브라운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그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고충을 설명하기도 했다.[63]

브라운은 남은 생애 동안 꾸준히 학교를 찾아 공개 연설을 하며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2년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그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고 손주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기 위한 ''I Feel Good, Inc. Trust''를 설립하는 데 사용하도록 명시했다. 그의 마지막 싱글 "Killing Is Out, School Is In"은 거리에서 벌어지는 청소년 살인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브라운은 어린 시절 고향인 오거스타를 방문할 때마다 종종 아이들에게 돈과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사망하기 일주일 전, 심각한 병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틀랜타의 고아원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칠면조를 나눠주었는데, 이는 그가 수년 동안 여러 차례 해왔던 선행이었다.

4. 2. 인권 운동

1960년대 중반, 제임스 브라운은 시민권 운동 단체를 위한 자선 공연에 참여했지만, 주류 백인 대중의 반감을 살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노래 가사에 시민권 관련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담는 것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거세지던 1968년, 브라운은 형식을 선보이며 애국심을 강조하고 청중들에게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말고 일어나 싸우라"고 독려하는 내용의 노래 "아메리카가 나의 고향이다"를 발표했다. 이 노래가 나올 당시 그는 베트남에 주둔 중인 미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고 있었다.

1968년 4월 5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암살된 다음 날, 보스턴 시는 폭동 직전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브라운은 도시의 안정을 되찾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보스턴 가든에서 무료로 시 전역에 생중계되는 콘서트를 열었다. 이는 공연이 폭력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경찰서장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다.[38] 이 역사적인 공연은 훗날 ''보스턴 가든 라이브: 1968년 4월 5일''이라는 제목의 DVD로 출시되었다. 다큐멘터리 ''제임스 브라운이 보스턴을 구한 밤''에 따르면, 당시 케빈 화이트 보스턴 시장은 킹 목사 암살 이후 발생한 소규모 폭력 사태와 시위에 대해 경찰의 강경 대응을 자제시키는 한편, 종교 지도자 및 지역 사회 리더들과 협력하여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했다.[64]

화이트 시장은 브라운의 공연을 보스턴 공영 방송국 WGBH-TV를 통해 여러 차례 재방송하도록 조치했다. 이는 잠재적인 시위 참여자들이 거리에 나서는 대신 집에서 무료로 콘서트를 시청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64] 그러나 브라운은 자신의 공연이 무료로 방송되어 티켓 수입이 사라지게 되자, 시 당국에 "입장료" 명목으로 6만달러를 요구했다. 시가 이를 거절하자 브라운은 이 비밀 합의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는 화이트 시장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고 자칫 폭동을 유발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64] 결국 화이트 시장은 "금고(The Vault)"라 불리는 비밀 자금 조달 그룹을 통해 브라운의 요구액과 기타 사회 프로그램을 위한 자금 10만달러를 확보했고, 브라운은 시 당국으로부터 1.5만달러를 받았다. 또한 화이트 시장은 보스턴 가든 경영진을 설득하여 공연 수입의 일부를 포기하게 함으로써 부족한 금액을 충당했다.[64] 이 성공적인 공연 이후, 브라운은 린든 B.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킹 목사 암살 이후 폭동으로 피해를 입은 다른 도시들에게 폭력 대신 "냉정을 유지하고 다른 방법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H. 랩 브라운과 같은 흑인 운동가들의 압력과 도시 빈민가에서 발생하는 흑인 간 범죄 영상에 충격을 받은 브라운은 "크게 외쳐라 – 나는 흑인이고 자랑스럽다"의 가사를 썼고, 그의 밴드 리더였던 피위 엘리스가 곡을 만들었다. 그해 여름 발표된 이 노래는 강력한 가사 덕분에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브라운은 이 노래를 발표한 이후 산발적으로만 공연했으며, 훗날 이 노래를 녹음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1984년 그는 "이제 '크게 외쳐라 – 나는 흑인이고 자랑스럽다'는 다른 어떤 레코드보다 흑인 인종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왔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인종으로 누군가를 정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종을 가르치는 것은 분리주의를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 노래는 이제 쓸모없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부심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고, 나는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흑인이고 자랑스럽다"를 호전적이고 분노에 찬 것으로 여겼다 – 아마도 무릎을 꿇고 사는 대신 발로 죽는다는 구절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들어보면 어린이 노래처럼 들린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참여시켰고, 이 노래를 들은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노래 때문에 많은 교차 청중을 잃었다. 그 후 내 콘서트의 인종 구성은 대부분 흑인이었다. 하지만 오해를 받았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1969년 브라운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월드"와, 단순한 권리 요구가 아닌 평등한 기회와 자립을 강조하는 "나는 아무도 내게 아무것도 주기를 원치 않아"를 발표했다. 1970년에는 일부 흑인 지도자들로부터 사회 문제에 대해 충분히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일어나, 참여해, 관여해"와 "큰 소리로 말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를 녹음하며 이에 응답했다. 1971년에는 잠비아와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을 순회하며 공연했고, 라고스에서는 오바 아데인카 오예칸으로부터 "전 세계 흑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인정받아 "시민 명예 시민"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회사인 제임스 브라운 엔터프라이즈를 통해 지역 사회의 흑인 사업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1970년대에도 브라운은 사회 비판적인 노래들을 꾸준히 발표했는데, 1972년 마약 중독의 폐해를 다룬 "킹 헤로인"과 2부작 발라드 "공공의 적" 등이 대표적이다.

5. 유산

제임스 브라운은 소울과 펑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여 '갓파더 오브 소울(Godfather of Soul)'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음반 제작과 공연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펼쳐 '쇼 비즈니스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남자(The Hardest Working Man In Show Business)'라는 별명도 얻었다.[206] 그의 빠른 템포의 곡들은 믹 재거, 마이클 잭슨 등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데이비드 보위의 〈Fame〉, 프린스의 〈Kiss〉, 조지 클린턴의 〈Atomic Dog〉 등은 브라운의 리듬과 노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많은 음악 가수들이 샘플링 기법으로 그의 음악을 활용하면서 힙합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206][205] 퍼블릭 에너미의 래퍼 척 D는 "브라운은 단연 최고의 연주를 보여줬다"며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브라운의 펑크를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브라운 자신도 2003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디스코도 제임스 브라운, 힙합도 제임스 브라운, 랩도 제임스 브라운"이라며 "모든 래퍼들의 음악을 들어보라. 그 가운데 90%는 내 음악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03] 또한 무대에서 보여준 격렬한 스텝은 이후 스트리트 댄스, 특히 비보잉에 영감을 주었다.[206]

브라운은 생전과 사후에 걸쳐 많은 상과 영예를 안았다.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연도상/영예비고
1965그래미상 최우수 R&B 음반
1983조지아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
1986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등과 함께 최초 헌액자 중 한 명[205]
1987그래미상 최우수 R&B 보컬 남자 부문
1992그래미 평생공로상제34회 그래미상[205][160]
1993리듬 앤 블루스 재단 선구자상 평생공로상제4회[160]
1997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헌액[160]
2000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206][153]
2002BMI 어반 아이콘최초 수상자[153]
2003케네디 센터 영예 수상[160]
2003BET 어워드 평생공로상마이클 잭슨이 시상[157]
2004미국 업적 아카데미 골든 플레이트 상아레사 프랭클린이 시상[158][159]
2006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154]
2012더 페이머스 플레임스 로큰롤 명예의 전당 소급 헌액브라운과 함께 1986년 헌액 인정[151][152]
2013리듬 앤 블루스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웨이텐 강당
2023애틀랜틱 시티 명예의 거리 헌액미국 전국 R&B 음악 협회 주최[168][169][170]



198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첫 헌액 당시, 그의 원래 보컬 그룹 더 페이머스 플레임스의 멤버들(바비 버드, 조니 테리, 바비 베넷, 베이비 로이드 스톨워스)은 함께 헌액되지 못했다.[150] 그러나 2012년, 이들은 브라운과 함께 소급하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51][152]

조지아주 오거스타에 있는 제임스 브라운 동상


2015년 브라운을 기리기 위해 로비 피츠 벨라미가 그린 교통 상자 공공 예술


여러 지역에서 브라운을 기리는 기념물과 명칭이 생겨났다. 1993년 콜로라도주 스팀보트 스프링스 시의회는 주민 투표를 통해 얌파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이름을 "제임스 브라운 영혼의 중심 다리(James Brown Soul Center of the Universe Bridge)"로 명명했으며, 브라운이 직접 리본 커팅식에 참석했다.[148][149] 그의 고향인 조지아주 오거스타에서는 1993년 9번가 일부 구간을 "제임스 브라운대로"로 명명했고,[160] 2005년에는 브로드 스트리트에 실물 크기의 청동 제임스 브라운 동상을 세웠다.[160] 이 동상은 원래 1년 전에 헌정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브라운이 직면했던 가정 폭력 혐의 때문에 연기되었다.[161] 2006년에는 오거스타 시의 슬로건이 "위 필 굿(We Feel Good)"으로 변경되었고, 시의 시민 센터 이름도 제임스 브라운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브라운은 그해 10월 경기장 명명식에 참석했다.[160] 2015년에는 오거스타 시, 다운타운 개발청, 그레이터 오거스타 예술위원회의 협력 프로젝트 'ART THE BOX'를 통해 제임스 브라운대로와 브로드 스트리트 모퉁이의 신호등 제어 캐비닛에 지역 예술가 로비 피츠 벨라미가 그린 제임스 브라운 헌정 작품이 설치되었다.

''롤링 스톤''지는 2004년 브라운을 역대 최고의 아티스트 100인 목록에서 7위로 선정했고,[155] 2023년에는 역대 최고의 가수 200인 목록에서 44위로 선정했다.[167] 프로듀서 릭 루빈은 브라운에 대해 "그 자체로 장르"이며 "최고의 연주자들, 가장 펑키한 밴드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평가했다.[156]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토가우는 2010년 ''롤링 스톤'' 기사에서 브라운을 "록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고 칭했다.[157] 가수 톰 웨이츠는 1962년 브라운의 공연을 본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전구에 손가락을 넣는 것과 같았다"고 회상했다.[166]

2006년 12월 30일, 제임스 브라운 경기장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페인 대학교 총장 셜리 A. R. 루이스는 브라운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사후 수여했다. 이는 브라운이 어려운 시기에 학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한 것으로, 원래는 2007년 5월 졸업식에서 수여될 예정이었다.[162][163] 2007년 제49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는 전년도에 사망한 음악계 인사들을 기리는 순서 마지막에 브라운의 유명한 망토가 마이크에 걸쳐졌다. 이날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브라운의 "It's a Man's Man's Man's World"를 불렀고, 크리스 브라운은 그를 기리는 춤 공연을 선보였다.[164]

6. 음반 목록

주요 싱글 및 차트 성적
연도곡 제목R&B 차트미국 차트
1956년Please, Please, Please5위-
1959년Try Me1위48위
1960년Think7위33위
1961년'Baby, Youre Right''2위49위
Bewildered8위40위
'I Dont Mind''4위47위
1962년Lost Someone2위48위
Night Train5위35위
1963년Prisoner of Love6위18위
1965년'Papas Got a Brand New Bag'' - Part I1위8위
I Got You (I Feel Good)1위3위
1966년'Aint That a Groove'' Pts. 1 & 26위42위
'Dont Be a Drop-Out''4위50위
'Its a Mans Mans Man World1위8위
Sweet Little Baby Boy - Part 1-8위
1967년Cold Sweat - Part 11위7위
Let Yourself Go5위46위
1968년'I Cant Stand Myself (When You Touch Me)''4위28위
'I Got the Feelin''1위6위
Licking Stick - Licking Stick - Part 12위14위
'Say It Loud – Im Black and I Proud - Part 11위10위
There Was a Time3위36위
1969년'Aint It Funky Now''3위24위
Give It Up or Turnit a Loose1위15위
'I Dont Want Nobody to Give Me Nothing (Open Up the Door, Il Get It Myself)3위20위
Let a Man Come in and Do the Popcorn - Part One2위21위
Mother Popcorn (You Got to Have a Mother for Me) Part 11위11위
1970년Get Up (I Feel Like Being a) Sex Machine (Part 1)2위15위
Santa Claus is Definitely Here to Stay-7위
Super Bad - Part 1 & Part 21위13위
1971년Escape-ism - Part 16위35위
Get Up, Get Into It, Get Involved - Pt. 14위34위
Hot Pants (She Got to Use What She Got to Get What She Wants) – Part 11위15위
'Im a Greedy Man'' - Part I7위35위
Make It Funky - Part 11위22위
Soul Power - Pt. 13위29위
1972년Get on the Good Foot - Part 11위18위
King Heroin6위40위
'Talkin Loud and SayinNothing - Part I1위27위
1973년Down and out in New York City13위50위
I Got a Bag of My Own3위-
Sexy, Sexy, Sexy6위50위
1974년'Funky President (People Its Bad)''4위44위
My Thang1위29위
'Papa Dont Take No Mess'' - Part I1위31위
Stoned to The Bone - Part 14위58위
The Payback - Part I1위26위
1976년Get Up Offa That Thing4위45위
1985년Living in America10위4위
1987년How Do You Stop10위-
1988년'I Real2위-
Static, Pts. 1 & 2 (풀 포스와 함께)5위-



'''주요 컴필레이션 음반'''


  • ''제임스 브라운의 CD'' (영국인 클리프 화이트 편집)
  • ''제임스 브라운의 CD 2''
  • ''Star Time'' (1991)
  • ''20 All-Time Greatest Hits!'' (1991)

6. 1. 스튜디오 음반


  • Please Please Please (1958)
  • Try Me! (1959)
  • Think! (1960)
  • The Amazing James Brown (1961)
  • James Brown and His Famous Flames Tour the U.S.A. (1962)
  • Prisoner of Love (1963)
  • Showtime (1964)
  • Grits & Soul (1964)
  • Out of Sight (1964)
  • James Brown Plays James Brown Today & Yesterday (1965)
  • Mighty Instrumentals (1966)
  • James Brown Plays New Breed (The Boo-Ga-Loo) (1966)
  • James Brown Sings Christmas Songs (1966)
  • Handful of Soul (1966)
  • James Brown Sings Raw Soul (1967)
  • James Brown Plays the Real Thing (1967)
  • Cold Sweat (1967)
  • I Can't Stand Myself When You Touch Me (1968)
  • I Got the Feelin' (1968)
  • James Brown Plays Nothing But Soul (1968)
  • Thinking About Little Willie John and a Few Nice Things (1968)
  • A Soulful Christmas (1968)
  •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 (1969)
  • Gettin' Down to It (1969)
  • The Popcorn (1969)
  • It's a Mother (1969)
  • Ain't It Funky (1970)
  • Soul on Top (1970)
  • It's a New Day – Let a Man Come In (1970)
  • Hey America (1970)
  • Sho Is Funky Down Here (1971)
  • Hot Pants (1971)
  • There It Is (1972)
  • Get on the Good Foot (1972)
  • Black Caesar (1973)
  • Slaughter's Big Rip-Off (1973)
  • The Payback (1973)
  • Hell (1974)
  • Reality (1974)
  • Sex Machine Today (1975)
  • Everybody's Doin' the Hustle & Dead on the Double Bump (1975)
  • Hot (1976)
  • Get Up Offa That Thing (1976)
  • Bodyheat (1976)
  • Mutha's Nature (1977)
  • Jam 1980's (1978)
  • Take a Look at Those Cakes (1978)
  • The Original Disco Man (1979)
  • People (1980)
  • Soul Syndrome (1980)
  • Nonstop! (1981)
  • Bring It On! (1983)
  • Gravity (1986)
  • I'm Real (1988)
  • Love Over-Due (1991)
  • Universal James (1993)
  • I'm Back (1998)
  • The Merry Christmas Album (1999)
  • The Next Step (2002)

7. 출연 작품

제임스 브라운은 음악 활동 외에도 다수의 영화,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 직접 출연하거나 목소리 연기를 통해 참여했다. 콘서트 영화, 극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모습을 보였으며, 상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7. 1. 영화


  • T.A.M.I. 쇼 (1964) (콘서트 영화) – 본인 (페이머스 플레임스와 함께)
  • 스키 파티 (1965) – 본인 (페이머스 플레임스와 함께)
  • 제임스 브라운: 맨 투 맨 (1968) (콘서트 영화) – 본인
  • 핑크스 (1970) – 본인
  • 블랙 시저 (1973) (사운드트랙만)
  • 슬로터의 빅 립오프 (1973) (사운드트랙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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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더커버 브라더 (2002) –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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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하이어: 비트 더 데빌 (2002) (단편 영화) – 본인
  • 페이퍼 체이서스 (2003) (다큐멘터리) – 본인
  • 소울 서바이버 (2003) (다큐멘터리) – 본인
  • 시드 번스타인 프레젠츠 (2005) (다큐멘터리) – 본인
  • 글래스턴베리 (2006) (다큐멘터리) – 본인
  • 라이프 온 더 로드 위드 미스터 앤 미세스 브라운 (2007) (다큐멘터리) –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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