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네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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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젠네 모스크는 서아프리카 말리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축물로, 13세기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건설된 여러 모스크를 거쳐 1907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젠네는 사하라 사막과 니제르강을 잇는 무역 도시로 번성했으며, 모스크는 이슬람교의 중요한 교육 기관으로 기능했다. 젠네 모스크는 독특한 건축 양식과 유지 보수 축제로 유명하며,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도시화로 인해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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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네 모스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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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건물 이름 | 제네 대모스크 |
현지 이름 | الجامع الكبير في جينيه (알-자미 알-카비르 피 지니흐) |
![]() | |
위치 | 제네, 모프티, 말리 |
종교 | 이슬람 |
건축 양식 | 수단-사헬 양식 |
완공 연도 | 13~14세기; 1906년 재건 |
높이 | 16m |
미나레트 수 | 3 |
재료 | 어도비 |
건축 | |
유형 | 모스크 |
파사드 방향 | 알 수 없음 |
2. 역사
젠네는 2000년 이상 사람이 거주해 온 고대 도시로, 사하라 사막 북쪽에서 니제르강 수운을 통해 운반된 암염이나 직물과 남쪽 삼림 지대에서 온 금, 콜라 열매 등이 교환되는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다. 특히 말리 제국(13-14세기)과 송가이 제국(15세기 후반-16세기) 시대에 크게 번성했다.
젠네의 대모스크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지어졌지만, 일반적인 이슬람 건축 양식보다는 지역 고유의 수단-사헬 양식을 강하게 보여준다. 주재료가 진흙이기 때문에 흔히 "진흙 모스크"라고 불린다.
최초의 모스크는 13세기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의 건물은 1907년 프랑스 식민 정부가 다시 지은 것이다. 19세기 초, 풀베 성전을 통해 세워진 마시나 제국은 기존 모스크를 이교도의 유산으로 여겨 방치했으며, 이후 19세기 후반 투쿨로르 제국 시기에도 모스크는 계속 폐허 상태로 남아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프랑스 식민 정부가 재건을 결정했다.
재건 공사는 1년 만인 1907년 10월 1일에 완료되었다. 나이토 요스케는 이 재건 과정이 "무능한 아프리카인에 의해 방치되어 붕괴 직전이던 문화유산을 프랑스인의 선의와 기술로 부활시켰다"는 서사를 만들어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선전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35].
2. 1. 첫 번째 모스크 (13세기-19세기 초)

젠네에 첫 번째 모스크가 실제로 언제 건설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략 1200년에서 1330년 사이로 추정된다.[1] 이 모스크를 처음 언급한 기록은 압드 알사디(Abd al-Sadi)가 17세기 중반 이전의 구전 역사를 바탕으로 저술한 ''타리크 알수단''(Tarikh al-Sudan, 수단의 역사)이다. 이 책에 따르면, 술탄 쿤부루(Kunburu)가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자신의 궁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모스크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모스크 동쪽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2] 그의 직계 후계자는 모스크의 탑(미너렛)을 건설했으며, 그 다음 술탄은 주변 벽을 세웠다고 전해진다.[3]
프랑스의 탐험가 르네 카이예가 1828년 젠네를 방문했을 때 모스크는 이미 수년간 폐허 상태였다. 그는 서양인 최초로 이 모스크의 존재를 알렸으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젠네에는 흙으로 지은 모스크가 있는데, 두 개의 웅장하지만 높지 않은 탑이 얹혀져 있다. 매우 크지만 조잡하게 지어졌다. 수천 마리의 제비들이 둥지를 짓고 버려져 있다. 이로 인해 매우 불쾌한 냄새가 나고, 이를 피하기 위해 작은 바깥 뜰에서 기도를 드리는 관습이 흔해졌다."[4]
첫 번째 모스크는 19세기 전반, 풀베 성전으로 성립된 마시나 제국 시기에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9세기 후반 투쿨로르 제국이 젠네를 지배했을 때도 모스크는 계속 폐허 상태로 남아 있었다. 20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발행된 엽서에도 폐허가 된 모스크의 모습이 남아 있으며, 당시의 사진 기록도 존재한다.
2. 2. 세쿠 아마두의 모스크 (1834-1836)
르네 카이예가 방문하기 10년 전, 풀라니 지도자 세쿠 아마두는 지하드를 시작하여 젠네를 정복했다. 세쿠 아마두는 기존의 모스크를 못마땅하게 여겨 낡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모든 작은 지역 모스크들도 폐쇄했다. 르네 카이예가 본 것은 이렇게 방치된 원래 모스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834년에서 1836년 사이에 세쿠 아마두는 원래 모스크 동쪽의 옛 궁전 터에 새로운 모스크를 지었다. 이 새 모스크는 탑이나 장식이 없는 크고 낮은 건물이었다.[5]
1893년 4월, 루이 아르시나르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젠네를 점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저널리스트 펠릭스 뒤부아가 젠네를 방문하여 폐허가 된 원래 모스크에 대해 기록했다. 뒤부아가 방문했을 당시, 폐허가 된 원래 모스크 내부는 묘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2. 3. 현재의 모스크 (1907년 재건)

최초의 모스크는 13세기에 지어졌으나, 현재 우리가 보는 건물은 1907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19세기 초 마시나 제국은 이 모스크를 이교도의 유산으로 여겨 방치했으며, 이후 투쿨로르 제국 시기에도 폐허 상태로 남아있었다. 20세기에 들어 프랑스 식민 당국이 재건을 결정했다.
1906년, 프랑스 당국은 폐허가 된 모스크를 재건하고, 기존 세쿠 아마두의 모스크 자리에는 학교를 짓기로 결정했다. 재건 작업은 젠네의 석공 길드장이었던 이스마일라 트라오레의 지휘 아래 강제 노동을 동원하여[1] 1907년에 완료되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1], 외벽의 일부는 원래 모스크의 배치를 따랐지만, 지붕을 받치던 기둥의 위치까지 정확히 복원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재건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키블라 벽에 세워진 3개의 대칭적인 큰 탑이다[1].
재건된 모스크 디자인에 프랑스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 프랑스인 펠릭스 뒤부아는 1910년 젠네를 다시 방문했을 때 재건된 모스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 식민 행정부가 디자인을 주도했다고 믿었으며, 건물이 "고슴도치와 교회 오르간을 합쳐놓은 것 같다"거나 "좌약의 신에게 바쳐진 바로크 양식의 사원"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7]. 반면, 건축사학자 장 루이 부르주아는 내부 아치 디자인 외에는 프랑스의 영향이 거의 없으며,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아프리카적"이라고 주장했다[8]. 그는 사헬 전역에서 명성이 높았던 젠네 석공 길드장 이스마일라 트라오레가 실제 건축가였다고 강조했다[9].
프랑스 민족학자 미셸 르리는 1931년 기록에서 모스크가 유럽인들의 작품이며, 지역 주민들이 재건된 건물에 불만을 품고 청소를 거부하다가 투옥 위협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참여했다고 언급했다[10]. 그러나 장 루이 부르주아는 젠네의 전통적인 석공 길드가 전통 기술을 사용하여 건설했으며, 프랑스의 개입은 최소화되었다고 주장했다[11]. 그는 재건을 둘러싼 갈등이 세쿠 아마두 통치 하에 억압받았던 지역 엘리트들이 옛 모스크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복원하길 원했던 지역 정치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12]. 한편, 나이토 요스케는 이 재건 이야기가 "무능한 아프리카인에 의해 방치된 문화유산을 프랑스인의 선의와 기술로 부활시켰다"는 식으로 프랑스의 역할을 미화하고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선전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35].
모스크 동쪽 벽 앞 테라스에는 두 개의 무덤이 있다. 남쪽에 있는 더 큰 무덤은 18세기 중요한 이맘이었던 알마니 이스마일라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13]. 프랑스 식민 시대 초기, 모스크 동쪽에 있던 연못은 메워져 현재 주간 시장이 열리는 광장으로 사용되고 있다[14].
말리의 많은 모스크들이 현대화 과정에서 전기 설비나 수도 시설을 갖추게 되었고, 때로는 타일 등으로 외벽을 덮어 원래의 역사적인 모습을 훼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젠네의 대모스크는 확성기 시스템이 설치된 것을 제외하면, 지역 주민들이 건물의 역사적 가치와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현대적인 개조를 거부했다. 이러한 노력은 많은 역사 보존 전문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1990년대 이후 이러한 보존 노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 모스크는 2005년 영화 사하라에도 등장했다.
3. 건축 양식
젠네 모스크는 대표적인 수단-사헬 건축 양식의 건물로 꼽힌다. 주 재료는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ferey)과 모래 및 흙 기반의 모르타르이며, 표면은 진흙 미장으로 매끄럽게 마감되었다.[15] 벽에는 장식과 보수용 비계 역할을 동시에 하는 로디에 야자나무(Borassus aethiopum) 막대 묶음('toron')이 약 60cm 길이로 돌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15] 동쪽 키블라(qibla, 메카 방향 기도벽)에는 높이 약 16m의 중앙 탑을 포함한 세 개의 큰 탑이 있으며, 각 탑 꼭대기에는 타조 알로 장식된 원뿔형 첨탑이 있다.[18] 지붕에서는 도자기로 만든 반원통형 배수관이 빗물을 벽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15]
이슬람 건축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반적으로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전통적인 건축 기법과 미학이 반영된 독특한 수단-사헬 건축 양식으로 분류된다. 현재의 건물은 13세기에 처음 세워진 모스크가 19세기 마시나 제국 시기에 버려지고 이후 투쿨로르 제국 시기까지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907년 프랑스 식민 정부가 재건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이 재건 사업을 식민 통치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선전의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35]
3. 1. 구조


젠네 모스크는 시장 광장보다 3m 높게 조성된 약 75m x 75m 크기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 이 기단은 바니 강의 범람으로부터 모스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기단 위로는 6개의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으며, 각 계단 입구에는 첨탑이 장식되어 있다. 모스크의 주 출입구는 북쪽에 위치한다. 건물 외벽은 정확한 직사각형이 아니며 약간 비뚤어진 사다리꼴 형태를 띤다.[16][17]
벽은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ferey)로 쌓고, 모래와 흙을 섞은 모르타르를 사용했으며, 표면에는 진흙 반죽을 발라 매끄럽게 마감했다. 벽에는 약 60cm 길이의 로디에 야자나무(Borassus aethiopum) 기둥 묶음('toron')이 돌출되어 박혀 있는데, 이는 장식적인 역할과 함께 매년 이루어지는 벽 보수 작업을 위한 비계(발판)로도 활용된다.[15] 지붕 가장자리에는 도자기로 만든 반원통형 구조물이 돌출되어 있어 빗물이 벽면을 타고 흐르지 않고 멀리 떨어지도록 설계되었다.[15]
모스크의 키블라(qibla, 메카 방향 기도벽)는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도시 시장을 내려다본다. 키블라 벽에는 크고 네모난 상자 형태의 탑 세 개가 돌출되어 있는데, 중앙 탑의 높이는 약 16m이다. 각 탑 꼭대기의 원뿔형 첨탑에는 타조 알이 장식되어 있다.[18] 동쪽 벽은 두께가 약 1m이며, 18개의 버트레스(부축벽)로 보강되어 있다. 각 버트레스 위에도 작은 첨탑이 있다. 모서리는 직사각형 버트레스로 강화되었고, 이 역시 'toron'과 첨탑으로 장식되어 있다.[13]
기도실은 건물 동쪽 절반을 차지하며 크기는 약 26m x 50m이다. 진흙으로 덮인 야자나무 지붕은 아홉 개의 내부 벽으로 지지되며, 이 벽들에는 지붕까지 닿는 뾰족한 아치형 통로가 나 있다.[19] 이 구조 때문에 기도실 내부는 90개의 거대한 직사각형 기둥이 숲처럼 늘어선 모습이며, 시야가 상당히 제한된다. 북쪽과 남쪽 벽에는 작고 불규칙하게 창문이 나 있어 자연광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바닥은 모래 섞인 흙으로 되어 있다.[20]
키블라 벽의 세 탑 내부에는 각각 미흐라브(벽감)가 있다. 이맘(예배 인도자)은 중앙 탑의 미흐라브에서 기도를 인도한다. 중앙 미흐라브 천장에는 좁은 구멍이 있어 탑 위 작은 방과 연결되는데, 과거에는 전령이 이 방에서 이맘의 말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중앙 미흐라브 오른쪽에는 민바르(설교단)가 있어 금요 예배 설교가 이루어진다.[13]
기도실에서 지붕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은 키블라 벽 탑에는 없다. 대신 남서쪽 모서리와 북쪽 주 출입구 근처에 각각 계단이 있는 사각형 탑이 두 개 있으며, 이 계단들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다. 북쪽 계단은 모스크 외부에서만 접근 가능하다. 지붕에는 작은 환기구들이 있는데, 평소에는 구운 토기 그릇으로 덮어두었다가 필요시 열어서 내부의 더운 공기를 배출시켜 환기한다.
기도실 서쪽에는 20m x 46m 크기의 내부 안뜰이 있다. 안뜰은 삼면이 아치형 개구부가 있는 갤러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 갤러리는 여성 전용 공간이다.[21]
현재의 모스크는 1907년에 재건된 이후 정기적인 보수를 거치며 유지되고 있으며, 구조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초기에는 미흐라브 탑의 움푹 들어간 부분이 현재와 달랐고, 벽과 모서리 버트레스에 박힌 'toron'의 수도 훨씬 적었다.[22][23] 1990년대 초반 사진에서는 벽에 두 줄의 'toron'이 추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24] 건축 양식은 이슬람 건축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형적인 이슬람 양식보다는 지역적 특색이 강한 수단-사헬 건축 양식으로 분류된다.
3. 2. 디자인 논쟁
1906년, 젠네는 원래의 모스크를 재건하고 동시에 세쿠 아마두의 모스크 부지에 학교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재건은 1907년, 젠네 석공 길드의 수장 이스마일라 트라오레의 지휘 아래 강제 노동을 동원하여 완료되었다.[1] 당시 사진을 보면[1] 외부 벽 일부는 원래 모스크의 위치를 따랐지만, 지붕을 지지하는 기둥의 배치가 이전과 같은지는 불분명하다. 재건된 모스크에서 확실히 새로운 점은 ''키블라'' 벽에 있는 세 개의 큰 탑이 대칭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재건된 모스크 디자인에 프랑스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1] 하지만 프랑스 기술자들이 건물 건설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6]
1910년 젠네를 다시 방문한 뒤부아는 재건된 모스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 식민 행정부가 디자인을 주도했다고 믿었으며, 건물이 "고슴도치와 교회 오르간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비판했다. 또한 원뿔 모양 탑 때문에 건물이 "좌약의 신에게 바쳐진 바로크 양식의 사원"처럼 보인다고 혹평했다.[7] 반면, 장 루이 부르주아는 내부 아치를 제외하면 프랑스 영향은 거의 없으며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아프리카적"이라고 주장했다.[8] 그는 사헬 전역에서 명성이 높았던 젠네 석공 길드의 수장 이스마일라 트라오레가 젠네 모스크 재건축의 실제 건축가였다고 강조했다.[9]
프랑스 민족학자 미셸 르리는 1931년 말리 여행 기록에서 새로운 모스크가 실제로는 유럽인들의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지역 주민들이 재건된 건물에 너무 불만을 느껴 청소를 거부했으며, 감옥에 갇힐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청소했다고 기록했다.[10] 그러나 장 루이 부르주아는 재건된 모스크가 젠네의 전통적인 지역 석공 길드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이 길드는 전통적으로 마을의 원래 모스크와 젠네의 다른 건물들을 건설하고 유지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왔다고 반박했다. 그는 전통적인 기술이 사용되었고 프랑스의 관여는 최소화되었다고 주장했다.[11] 또한 이 문제는 젠네의 지역 정치와 관련이 있었는데, 세쿠 아마두에게 억압받고 옛 모스크 파괴로 굴욕감을 느꼈던 많은 도시 주민들, 특히 이슬람 엘리트들이 옛 모스크를 자신들의 방식대로 정확하게 재건하기를 원했던 배경이 있었다고 설명했다.[12]
나이토 요스케는 프랑스가 재건 사업을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데 이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능한 아프리카인에 의해 방치되어 붕괴 직전의 위기에 놓인 문화 유산이 프랑스인의 선의와 기술로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프랑스의 은혜를 강조하려 했다고 분석했다.[35] 이처럼 젠네 대모스크의 디자인 논쟁은 단순한 건축 양식의 문제를 넘어, 식민주의적 시각, 지역 정치, 문화적 정체성 등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4. 문화적 가치
젠네 모스크는 단순한 종교 건축물을 넘어, 지역 사회의 문화적 중심지이자 말리를 대표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특히, 매년 열리는 보수 축제는 젠네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여 모스크를 유지하는 독특한 문화적 전통을 보여준다. 이 축제는 단순한 보수 작업을 넘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사회적 행사로 기능한다.
역사적으로 이 모스크는 중세 시대 아프리카의 주요 이슬람 학습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수많은 학생이 코란을 배우기 위해 이곳의 마드라사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8년 젠네 역사 지구 전체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는 이 모스크를 "말리와 젠네를 상징하는 탁월한 상징물"로 평가했다.
현재의 모스크 건물은 13세기에 처음 세워진 것이 아니라, 19세기 마시나 제국과 투쿨로르 제국 시기를 거치며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07년 프랑스 식민 정부가 재건한 것이다. 일부 연구자(나이토 요스케)는 이 재건 과정이 프랑스 식민 통치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비판하기도 한다[35].
프랑스 남부 프레쥐스에는 1930년에 젠네 모스크를 모방하여 시멘트로 지은 미시리 모스크가 존재한다. 이는 당시 프랑스군 소속 서아프리카 식민지 군인들을 위해 지어진 것으로, 젠네 모스크의 건축 양식이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젠네 모스크는 말리 문장에도 등장할 정도로 말리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중요한 문화적 상징으로 여겨진다.
4. 1. 연례 보수 축제

젠네 전체 지역 사회는 매년 독특한 축제를 열어 모스크 유지 보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축제에는 음악과 음식이 함께하지만, 주된 목표는 지난 1년간 모스크가 입은 손상을 복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손상은 주로 연례 강우로 인한 침식이나 온도 및 습도 변화로 인한 균열 때문에 발생한다.
축제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사람들은 구덩이에 회반죽을 준비한다. 회반죽이 굳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저어주어야 하는데, 이 일은 주로 어린 소년들이 맡아 회반죽 속에서 놀면서 내용물을 휘젓는다. 여자들과 소녀들은 축제 며칠 전부터 회반죽을 만들 물과 축제 기간 동안 작업자들에게 줄 물을 길어 온다.
축제 당일이 되면 남자들은 모스크 벽에 박혀 있는 야자나무 기둥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모스크 표면에 회반죽을 바른다. 다른 남자들은 구덩이에서 작업자들에게 회반죽을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축제 초반에는 누가 가장 먼저 모스크에 회반죽을 전달하는지를 겨루는 경주가 열리기도 한다. 젠네의 석공 조합원들이 전체 작업을 지휘하며, 축제에 여러 번 참여했던 지역 사회의 노인들은 시장 광장의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작업 진행 상황을 지켜본다.
4. 2. 종교적 중요성
원래 모스크는 중세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학습 센터 중 하나를 관장하여, 수천 명의 학생들이 젠네의 마드라사에서 코란을 공부하기 위해 찾아왔다. 젠네의 역사적 지역은 대 모스크를 포함하여 198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모습보다 더 오래된 모스크가 많지만, 대 모스크는 젠네시와 말리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2006년 1월 20일, 아가 칸 문화 신탁의 자금 지원을 받는 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모스크 지붕을 점검하던 사람들이 주민들에게 오해를 사면서 마을에서 폭동이 촉발되었다.[25][26] 폭도들은 모스크의 환풍기를 뜯어내고 마을을 휩쓸며 문화 사절단, 시장의 집을 약탈하고 차량을 파괴하는 등 소란을 일으켰다. 이 소란으로 한 명이 사망했다.[27]
2009년 11월 5일 목요일, 75mm의 비가 24시간 동안 내린 후 ''키블라'' 벽의 남쪽 큰 탑 상단부가 무너졌다.[28] 아가 칸 문화 신탁은 탑 재건에 자금을 지원했다.[29]
이 모스크는 말리 문장에 등장한다.
4. 3. 세계유산
젠네의 역사 지구는 대 모스크를 포함하여 198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는 많은 유서 깊은 모스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리와 젠네를 상징하는 탁월한 상징물"이라는 이유를 들어 젠네 모스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원래 모스크는 중세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학습 센터 중 하나를 관장하여, 수천 명의 학생들이 젠네의 마드라사에서 코란을 공부하기 위해 찾아왔다.그러나 주변 지역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도 등재되었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서 "100년 후에는 볼 수 없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계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6년 1월 20일, 아가 칸 문화 신탁의 자금 지원을 받는 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일부 남성들이 모스크 지붕을 점검하던 중, 이를 훼손으로 오인한 주민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했다.[25][26] 이 소요 사태로 문화 사절단과 시장의 집이 약탈당하고 차량이 파손되었으며, 1명이 사망했다.[27]
2009년 11월 5일에는 75mm의 폭우로 인해 키블라 벽 남쪽 큰 탑의 상단부가 무너졌으나,[28] 아가 칸 문화 신탁의 자금 지원으로 재건되었다.[29]
현재의 모스크는 1907년 프랑스 식민 정부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나이토 요스케는 이를 두고 "무능한 아프리카인에 의해 방치되어 붕괴 직전의 위기에 놓인 문화 유산을 프랑스인의 선의와 기술로 부활했다는 스토리"를 만들어 프랑스의 은혜를 어필하기 위한 선전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35].
이 모스크는 말리 문장에도 등장할 정도로 말리를 대표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5. 현대의 젠네 모스크
현재의 젠네 모스크는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 정부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이는 19세기 동안 폐허 상태였던 모스크를 복원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선전 목적이 있었다는 비판도 받는다[35]. 현대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3D 스캔 기술을 이용한 보존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30][31][32]. 하지만 소실 위험이 높은 유산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모스크는 말리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지만, 내부 출입은 이슬람교 신자에게만 허용된다. 또한 말리 문장에 등장하고 여러 비디오 게임에도 불가사의로 구현되는 등 대중문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33].
5. 1. 보존 노력
최초의 모스크는 13세기에 세워졌으나, 19세기 전반 마시나 제국 시기에는 버려진 것으로 여겨졌다. 이후 투쿨로르 제국이 지배하던 19세기 후반에도 모스크는 폐허 상태로 남아 있었다.20세기에 들어 프랑스 식민지 정부가 모스크 재건을 결정했고, 1907년 10월 1일에 1년간의 공사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재건은 프랑스의 선의를 내세우기 위한 선전의 목적이 있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나이토 요스케는 "무능한 아프리카인에 의해 방치되어 붕괴 직전의 위기에 놓인 문화 유산을 프랑스인의 선의와 기술로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프랑스가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다고 지적했다[35].
현대에 들어서는 문화 유산 보존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5년에는 문화 유산 유적지를 3D로 기록하여 미래 세대에게 남기려는 자마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젠네 모스크에 대한 지상 레이저 스캔 작업이 수행되었다.[30][31][32]
5. 2. 관광
다양한 국가에서 온 관광객들이 젠네를 방문하지만, 말리의 수도 바마코에서는 버스로 10시간 이상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모스크 내부에는 이슬람교 신자만 출입이 허용된다.또한, 이 모스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서 "100년 후에는 볼 수 없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계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5. 3. 대중문화
이 모스크는 말리 문장에 등장한다.젠네 모스크는 역사 전략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5'',[3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II'', 그리고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IV''에서 불가사의 건물로 등장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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