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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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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명하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가로, 1928년 대만에서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사형당했다. 1905년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난 조명하는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 중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려 했다. 1928년 5월, 대만을 방문한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에게 독을 묻힌 단검을 던졌으나, 암살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의 의거는 대만 총독과 조선 총독의 사임에 영향을 미쳤다. 사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대만과 한국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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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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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하
기본 정보
한글조명하
한자趙明河
히라가나ちょう・めいか
가타카나チョ・ミョンハ
참고 자료
제목일본 왕족을 처단한 '유일한 독립운동가' 24살 조명하 의사가 사형장서 남긴 말
URL인사이트 기사
출판사인사이트 (언론)
날짜2019-04-08
접근 날짜2020-06-09
저자함철민
보관 URL보관된 인사이트 기사
보관 날짜2020-06-09

2. 생애

1905년 5월 11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조용우의 차남으로 태어나, 풍천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심신을 단련하며 성장했다.

1926년 신천군청의 신천읍 읍서기(행정공무원)으로 잠시 근무하였으며, 학문을 익히려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 하던 중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대만을 거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황해도 출신의 독립 운동가들인 안중근, 김구, 노백린과, 송학선의 금호문 사건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1926년 9월 일본오사카로 건너가 야간학교를 다니며 고학했다. 그해 말에는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도 일어났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기로 마음먹고 1927년 11월 중간 기착지로 타이완에 들렀다. 대만 타이중의 상점에서 일하다가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인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가 검열사로 대만에 온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

결혼 후, 처자를 고향에 남겨둔 채, 1926년 8월에 단신으로 오사카로 이주했다. 직공으로 일하면서, 오사카 상공학교나 오사카 시립 상공전수학교 등의 야간 학교에 다녔다. 생활고로 1927년 11월에 타이완으로 건너가, 미야기현센다이시 출신의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찻집에서 근무했다.

타이중에서 일하던 중, 1928년 5월 초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가 대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무차별 살인 후 자살을 계획했으나, 육군 특명검열사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이 타이완을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 계획을 변경했다.[2]

1928년 5월 14일, 조명하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에게 독을 묻힌 단검을 던져 암살을 시도했다. 단검은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쳤고,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 조명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같은 해 7월 7일, 일반 방청 금지의 특별 공판이 열렸고, 사형구형받았다. 같은 해 7월 18일 황족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2] 이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사형 집행 전 조명하는 "나는 그저 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내 남은 독립운동을 저 세상에 가서라도 계속하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 총독 가미야마 만노신과 조선 총독 야마나시 한조가 사임했다. 타이중 시청 앞 사거리에는 그의 거사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었고, 동상도 세워졌다.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는 사건 당시에는 부상을 입지 않았으나, 이듬해 1월 급성 내장 질환으로 사망했다.[2] 한국에서는 조명하를 독립운동가로 여기며, '조명하 의사 연구회'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단도에 묻은 독 때문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3] 2019년 5월, 타이베이의 한국 학교 교정에 조명하 의사 연구회 주도로 동상이 건립되었고,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 관계자가 제막식에 참석했다.[4]

2. 1.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의 뜻을 품다

조명하는 1905년 5월 11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나 풍천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심신을 단련하며 성장했다. 1926년 신천군청에서 잠시 근무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던 중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기로 결심했다. 안중근, 김구, 노백린 등 황해도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송학선의 금호문 사건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1926년 9월 일본 오사카에서 야간학교를 다니며 고학했고, 그해 말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이 일어났다. 1927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 타이완에 들렀다. 대만 타이중의 상점에서 일하던 중,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가 검열사로 대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

1928년 5월 14일, 조명하는 대만을 방문 중이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에게 독을 묻힌 단검을 던져 체포되었고, 1928년 7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조명하는 1928년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2] 그는 "나는 그저 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내 남은 독립운동을 저 세상에 가서라도 계속하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가미야마 만노신 대만 총독이 사임하고, 야마나시 한조 조선 총독의 사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거사를 안내하는 표지판과 동상이 타이중에 설치되었다.

2. 2. 일본 유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 시도

1905년 5월 11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조용우의 차남으로 태어나, 풍천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심신을 단련하며 성장했다.

1926년 신천군청의 신천읍 읍서기(행정공무원)으로 잠시 근무하였으며, 학문을 익히려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 하던 중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대만을 거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황해도 출신의 독립 운동가들인 안중근, 김구, 노백린과, 송학선의 금호문 사건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1926년 9월 일본오사카로 건너가 야간학교를 다니며 고학했다. 그해 말에는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도 일어났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기로 마음먹고 1927년 11월 중간 기착지로 타이완에 들렀다. 대만 타이중의 상점에서 일하다가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인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가 검열사로 대만에 온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

결혼 후, 처자를 고향에 남겨둔 채, 1926년 8월에 단신으로 오사카로 이주했다.[2] 직공으로 일하면서, 오사카 상공학교나 오사카 시립 상공전수학교 등의 야간 학교에 다녔다.[2] 생활고로 1927년 11월에 타이완으로 건너가, 미야기현센다이시 출신의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찻집에서 근무했다.[2]

2. 3. 타이중 의거

조명하는 1905년 5월 11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나 풍천마을에서 성장했다. 1926년 신천군청에서 근무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다. 안중근, 김구 등 황해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가기 위해 1927년 11월 타이완에 도착했다. 1926년에는 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이 있었다.

타이중에서 일하던 중, 1928년 5월 초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가 대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무차별 살인 후 자살을 계획했으나, 육군 특명검열사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이 타이완을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 계획을 변경했다.[2]

1928년 5월 14일, 조명하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에게 독을 묻힌 단검을 던져 암살을 시도했다. 단검은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쳤고,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 조명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같은 해 7월 18일 황족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2] 이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사형 집행 전 조명하는 "나는 그저 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내 남은 독립운동을 저 세상에 가서라도 계속하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 총독 가미야마 만노신과 조선 총독 야마나시 한조가 사임했다. 타이중 시청 앞 사거리에는 그의 거사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었고, 동상도 세워졌다.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는 사건 당시에는 부상을 입지 않았으나, 이듬해 1월 급성 내장 질환으로 사망했다.[2] 한국에서는 조명하를 독립운동가로 여기며, '조명하 의사 연구회'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단도에 묻은 독 때문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3] 2019년 5월, 타이베이의 한국 학교 교정에 조명하 의사 연구회 주도로 동상이 건립되었고,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 관계자가 제막식에 참석했다.[4]

2. 4. 재판과 순국

1928년 5월 14일 조명하는 대만을 방문 중이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에게 독을 묻힌 단검을 던져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치고 운전사의 등에 맞혔다. 조명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7월 7일 일반 방청 금지의 특별 공판이 열렸고, 사형구형받았다.[2] 7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2] "황족에게 위해를 가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위해를 가하려 한 자는 무기 징역에 처한다"라는 형법 75조의 규정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다.[2]

1928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형(총살형)이 집행되면서 순국하였다. 24세의 나이였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조명하는 "나는 그저 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내 남은 독립운동을 저 세상에 가서라도 계속하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편, 구니히코 왕은 사건으로 일절 부상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1월에 급성 내장 질환으로 훙거했다.[2]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대만 총독이었던 가미야마 만노신이 사임했으며, 조선 총독 야마나시 한조가 사임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거사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타이중시청 앞 사거리에 설치되었으며, 그의 동상도 타이중에 설치되었다.

3. 일본 측 기록과 관점

4. 영향

5. 학력


  • 황해도 송화군 풍천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 일본 오사카 상공업중학교 상업학부를 중퇴하였다.

6. 사후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1978년 타이베이시 한인학교(대만한교)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1988년 5월 14일 의거 60주년 기념으로 서울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7. 평가

8. 조명하를 연기한 배우

8. 1. 드라마

1989년 5월 13일 KBS에서 드라마 조명하가 방영되었고, 김영철이 주연을 맡았다. 5월 14일에는 재방송되었고, 1991년 8월 15일에는 앙코르 방송되었다. 이 드라마에는 최수종, 서영진, 신구, 장항선, 김복만, 곽경환 등이 출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日本王族を処断した「唯一の独立運動家」24歳趙明河義士(일본 왕족을 처단한 '유일한 독립운동가' 24살 조명하 의사가 사형장서 남긴 말) https://www.insight.[...] 인사이트 (언론) 2019-04-08
[2] 웹사이트 台中事件に関する軍部の立場の件 https://www.jacar.ar[...] 2020-09-22
[3] 웹사이트 “조선 독립투쟁 출발점 ‘조명하 義士 의거’ 세상에 알릴 것” http://www.munhwa.co[...] 2018-08-03
[4] 웹사이트 “타이완에서 `일왕 장인 처단` 조명하 의사 동상 제막” https://www.mk.co.kr[...] 2019-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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