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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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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영래는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인권 변호사, 민주화 운동가, 그리고 문필가이다. 그는 학생운동,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 참여,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 전태일 평전 집필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 변호사 활동을 하며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망원동 수해 사건 등 공익 소송을 담당했고, 1987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 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1990년 폐암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삶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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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영래
출생일1947년 3월 26일
출생지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사망일1990년 12월 12일 (43세)
사망지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
국적대한민국
직업변호사
부모아버지 조민제, 어머니 이남필
배우자이옥경
친척조카 조현철, 매드클라운

2. 유년기 및 청소년기

趙英來|조영래중국어는 1947년 대구에서 아버지 조민제와 어머니 이남필 사이의 일곱 자녀 중 넷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아버지가 화학공장을 경영하여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1]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서울로 이주하였다.

서울수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2]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지만 전형적인 모범생은 아니었고, 세상과 주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영자신문반, 룸비니 불교학생회, 영어 바이블스터디, 농촌활동반, 웅변반, 학예부 부장 등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했다. 1964년 고등학교 3학년 때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하여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3]

2. 1. 유년기

趙英來|조영래중국어는 1947년 대구에서 아버지 조민제와 어머니 이남필 사이의 일곱 자녀 중 넷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아버지가 화학공장을 경영하여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1]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서울로 이주하였다.

2. 2. 청소년기

서울수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2] 학교 공부와 성적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도 했지만, 공부를 잘했다. 전형적인 모범생은 아니었고, 세상과 주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영자신문반, 룸비니 불교학생회, 영어 바이블스터디, 농촌활동반, 웅변반, 학예부 부장 등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했다. 경기고등학교 시절 그를 아는 사람들은 조영래를 규범적인 우등생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기억한다. 1964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회 학술부장이었던 그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조직해 학생들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시청 앞을 돌아 나오는, 당시로서는 최초의 대규모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플래카드 문구는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드냐?'였다.[3]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하여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3. 대학 시절과 사법연수원 시절

조영래는 1965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으나, 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시위, 6.7 부정선거 항의, 유신헌법, 3선개헌 반대, 교련 반대, 공명선거를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대학 시절 학과 공부보다는 인문,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동서양 고전을 탐독했다.[4]

1970년 사법시험 준비 중 전태일 분신사건을 접하고 전태일 정신을 알리는 활동을 했다. 사법시험 준비 중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 수감생활을 했다. 1971년 11월 17일, 사법연수원생 80여 명은 조영래가 오랫동안 영장없는 불법구속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건의했다.[5] 1974년 출소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생활을 했다.

3. 1. 대학 시절

1965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였으나, 본인은 수석 입학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시위, 6.7 부정선거 항의, 유신헌법, 3선개헌 반대, 교련 반대, 공명선거를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대학 시절 학과 공부보다는 인문,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동서양 고전을 탐독했으며, 경제학보다는 법학에 더 관심이 있었다.[4]

3. 2. 사법연수원 시절

1970년 사법시험 준비 중 전태일 분신사건이 발생하자 전태일 정신을 알리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사법시험 준비 중 당시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된, 소위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 수감생활을 하였다. 1971년 11월 17일, 사법연수원생 80여 명은 11월 13일 내란예비음모죄로 구속된 연수원 동기생 조영래가 오랫동안 영장없는 불법구속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논의하고 그 대책을 대법원장 및 사법연수원장에게 건의했다.[5] 1974년 만기 출소하였고, 같은 해 4월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하였다.

4. 변호사 조영래

1981년 5월 수배가 해제되고 복권되어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 판사, 검사를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는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를 지망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6] 1982년 2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1983년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 및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개소하였다.

1984년 한국 사법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공익 집단 소송인 망원동 수해 사건 소송을 담당하였다.[7] 이 사건은 대한민국 민사소송에서 집단소송제도 도입을 검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당시 시국 형사사건 변론이라는 좁은 영역에 머물렀던 인권 변호 활동이 이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집단 민원의 성격을 갖는 민사 소송 분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10]

1986년에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소송,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변론을 맡았다.[7] 1987년 보도지침 변론, 상봉동 진폐증 사건, 기타 노동, 빈민, 공해 문제 관련 다양한 공익 소송을 담당했다.[7] 군사독재 치하 국내 최초의 <인권보고서>(대한변협 간행)를 집필하였다. 군부독재 시절 인권변호사들의 상설 모임인 정법회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과정에도 참여하였다.

1992년 출간된 《조영래변호사 변론 선집》에는 그가 변론했던 공익 소송의 실제 변론기록을 통해 인권 변호사로서의 발자취가 담겨있다.

4. 1. 변론 활동

1981년 5월 수배가 해제되고 복권되어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을 마치면 판사, 검사를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는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를 지망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6] 1982년 2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1983년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 및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개소하였다.

1984년 한국 사법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공익 집단 소송인 '망원동 수해 사건' 소송을 담당하였다.[7] 이 사건은 대한민국 민사소송에서 집단소송제도 도입을 검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당시 시국 형사사건 변론이라는 좁은 영역에 머물렀던 인권 변호 활동이 이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집단 민원의 성격을 갖는 민사 소송 분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10] 조영래 변호사는 망원동 수재가 ‘천재’가 아니라 ‘인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3년간 토목학, 수리역학, 수문학, 콘크리트 기술 등에 관한 엄청난 양의 서적을 독파하였다.[9]

1986년에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소송',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변론을 맡았다.[7] 박원순과 함께 나선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변호인의 고발장, 법정 안과 밖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한 여론 조성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6월 민주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검찰은 사실을 은폐하는 수사결과를 발표했고, 성고문 가해자 문귀동은 명예훼손이라며 맞고소했으며, 서울고등법원은 문귀동 불기소에 대한 변호인단의 이의신청을 기각했다. 언론은 ‘권인숙과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악용하고 있다“는 검찰 측 주장을 여론화시키고 있었다. 조 변호사는 검찰 발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성고문 형사에게 5년형의 처벌을 이끌어내고 마지막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위자료 청구소송을 승소시킬 때까지 4년간의 법정 투쟁을 주도했다. 권인숙의 구술을 토대로 고문의 실상을 공개한 고발장을 언론이 외면하자 30만 부를 복사해 배포할 때는 그 자신이 하나의 언론 기관이었다. ”권양 –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될 이 사람은 누구인가“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변론에서 조영래 변호사는 ”변론중에 자주 눈물 때문에 목이 메셨다“고 당시 피고석에 앉았던 권인숙은 회고했다.[8]

대한민국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벌어진 성차별 법적 논쟁이었던 ‘여성 조기정년제’(여성 결혼퇴직제) 사건의 여성 측 법률 대리인을 무보수로 맡은 조영래는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최종 변론에 버금가는 25쪽에 이르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11]

1987년 '보도지침 변론', '상봉동 진폐증 사건', 기타 노동, 빈민, 공해 문제 관련 다양한 공익 소송을 담당했다.[7] 군사독재 치하 국내 최초의 <인권보고서>(대한변협 간행)를 집필하였다. 군부독재 시절 인권변호사들의 상설 모임인 정법회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과정에도 참여하였다. 정법회를 중심으로 한 인권변호사들의 활동 가운데 조영래 변호사는 가장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는 시니어와 주니어의 신망을 동시에 받았고,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1세대 인권 변호사 그룹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인권변호사 활동 영역을 확대해 갔다.[7]

1992년 출간된 《조영래변호사 변론 선집》에는 그가 변론했던 공익 소송의 실제 변론기록을 통해 인권 변호사로서의 발자취가 담겨있다. (<변론선집>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 1부 망원동 수재사건, 제2부 부천서 성고문사건; 1. 성고문 고발사건, 2. 권인숙 형사사건, 3. 권인숙 위자료 청구사건, 제3부 여성 조기 정년제 사건, 제4부 상봉동 진폐증 사건, 제5부 노동사건; 1. 대우어패럴 사건, 2. 장미숙 사건, 제6부 시국형사사건; 1. 나준, 나미영 사건, 2. 한겨레 신문 압수 수색 취소청구사건, 3. 「이론과 실천사」, 「한울출판사」 사건, 4. 「보도지침」사건, 제7부 일반사건; 1. 위조어음 청구사건, 2. 공갈사건)

4. 2. 1987년 단일화 운동

조영래는 정치활동에 직접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1987년 ‘6.29 민주화선언’ 이후 민주화 운동의 승리가 6월 항쟁으로 귀결되고 정권 교체가 눈앞에 보이자 두 야당 지도자들은 서로 대통령 후보를 고집했다. 조영래는 당시 그러한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12] 김대중김영삼의 후보 단일화 운동에 나섰다. 그는 이미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하고서는 두 사람 모두 패배하리라는 사실과 그 반사이익으로 군부 출신이면서 권위주의 정권을 승계하고 있던 노태우 후보가 승리할 수 밖에 없음을, 그리고 더 나아가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적 우위가 상실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13] 후보단일화를 위한 기구를 만들어 홍성우 변호사 등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온 여러 선배들과 함께 단식 투쟁까지 하면서 단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영래 변호사의 판단은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주화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일화 운동에 온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몰입했다.[14]

4. 3. 민주화 이후

趙英來|조영래중국어는 1987년 이후 여러 매체에 글을 쓰면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객원 편집위원, 문화방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한겨레신문, 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집필하였다.[10]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동남아(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 러시아, 유럽, 미국 등지를 여행하였는데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큰 관심을 가졌다.[10] 1990년 1월에서 5월까지 미국 컬럼비아대 인권문제연구소 국제세미나 초청으로 5개월간 체류하였다.[10]

인권변호사, 민주화운동가, 문필가로서 불요불굴의 행동과 실천을 지속하던 그는 1990년 9월 초 폐암 진단을 받았고, 3개월 투병생활 후 1990년 12월 12일 영면하였다.[10]

5. 인간 조영래

전태일 평전》의 저자가 자신임을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그의 깊은 겸손 때문이다. 장기표는 “자신이 한 일들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성품은 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비화들이 대단히 많으나 전혀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라고 회고한다.[15] 조영래의 신조는 철저한 공수신퇴(功遂身退)였다. 김지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16] 그는 스스로 많은 기득권과 능력을 가졌으나, 그 기득권의 틀 안에서 싹틀 수 있는 보수성과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의 지배를 받지 않았으며, 도식적이고 교조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웠다.[17]

박원순은 조영래가 사망하기 전 "넓은 세계를 보라"라는 유언을 들었고, 이는 박원순이 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변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조준희 변호사는 1987년 한 인권단체의 초청으로 필리핀 여행 중 조영래가 현지 소외계층 사람들을 가까운 이웃 대하듯 정겹게 대했고, 그들의 고뇌를 자기 것처럼 아파했다고 전한다. 한편 그는 주로 비판적 운동가들을 상대로 폭력을 일삼던 극우 폭력집단 알사마사(ALSAMASA)의 본거지에 들어가 곳곳을 누비는 만용에 가까운 강심장이었다고 회고한다. 조준희 변호사는 “가족과 친지, 이웃, 심지어는 먼나라 사람들까지 차등 없이 끌어안고 함께 뒹구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 그의 모든 사회적 행동은 여기에서 출발했고, 그것이 유일한 가치 기준이었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 그 무엇과도 두려움 없이 맞서고 집요한 싸움을 사양치 않아온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이 출발점이요 목표였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치열함과 넉넉함, 격정과 부드러움을 함께 갖출 수 있는 참으로 큰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20]

조영래의 정신과 영혼, 그리고 그의 마음과 인간됨은 그가 남긴 여러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21] 다음은 조영래가 남긴 글의 일부이다.

이제 어느덧 조금씩 타성이 붙아가는 듯 하다. 묶여 온 사람들을 바라보는 전율도 이젠 점차로 각질화되어 일상의 무감동에 조금씩 조금씩 압도되어 간다.
나로서는 권력을 향유하는 최초의 체험이며.... 어쩌면 아마도 마지막 체험이 될지도. 그러므로 이처럼 기이하게 주어진 넉달의 기회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맑고 신선한 숨결로 부딪쳐 나아가 최선의 것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마음먹고는 있다... (검사시보 시절 일기. 1981. 12. 13.)



1990년 1월부터 4개월간 미국에 머무르던 시절, 그는 당시 열여섯살 큰아들 일평에게 엽서를 보낸다.[22]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1990. 1. 18. 밤. 아빠가)


6. 저서 및 관련 도서

趙英來중국어 변호사와 관련된 저서 및 도서는 다음과 같다.

6. 1. 저서

6. 2. 관련 도서


  •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변호사가 남긴 글 모음》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91)
  •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 그 인권변론의 발자취 (도서출판 까치, 1992)

7. 가족 관계


  • 동생: 조중래 (1951년~2022년 5월 22일)

8. 미디어에서

1995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문성근이 조영래 역을 맡았다.[23]

참조

[1] 뉴스 ‘톱’중의 ‘톱’ 서울대 수석합격한 조영래군 경향신문 1965-02-15
[2] 서적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창작과 비평사 1990
[3] 뉴스 발굴 현대사 인물: 조영래- 인권, 노동변호에 새 지평 열어 한겨레 1992-02-02
[4] 서적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창작과 비평사 1990
[5] 뉴스 사법연수원생들 구속 동료 대책 논의 경항신문 1971-11-17
[6] 간행물 조영래 여성동아 1986-04
[7] 간행물 창조적 인권 변호활동과 민주화 운동: 고 조영래 변호사 추모 좌담 법과 사회 1991
[8] 뉴스 발굴 현대사 인물: 조영래- 인권, 노동변호에 새 지평 열어 한겨레 1992-02-02
[9] 뉴스 발굴 현대사 인물: 조영래 - 인권, 노동변호에 새 지평 열어 한겨레 1992-02-02
[10] 서적 조영래 변호사 변론선집: 그 인권 변론의 발자취 까치 1992
[11] 뉴스 ‘성차별 논쟁’ 변호 맡은 조영래씨, 「결혼하면 퇴직」 판결은 헌법 정신 위배 경향신문 1985-06-27
[12] 간행물 조영래 변호사라면 어떻게 했을까 現代コリア 1991-07-14
[13] 서적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한국인권변론사-가시밭길을 선택한 변호사들 두레 2003
[14] 간행물 창조적 인권 변호활동과 민주화 운동: 고 조영래 변호사 추모 좌담 법과 사회 1991
[15] 서적 전태일 평전 돌베게 1991
[16] 뉴스 밤새 잠 못 이룬 새벽별 뜨는 시각 시사저널 1990-12-27
[17] 간행물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한 일생이었습니다 여성동아 1991-01
[18] 뉴스 긴조 9호 세대 비사 주간경향 2003-12-25
[19] 서적 조영래 변호사 변론선집: 그 인권변론의 발자취 까치 1991
[20] 서적 조영래 변호사 변론선집: 그 인권변론의 발자취 까치 1991
[21] 서적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조영래 변호사 남긴 글 모음 창작과비평사 1991
[22] 뉴스 발굴 현대사 인물: 조영래 - 인권, 노동변호에 새 지평 열어 한겨레 1992-02-02
[2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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