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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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인규는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몽골어 통역관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원나라와의 외교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1245년에 결혼하여 1252년 음서로 관직에 나섰으며, 딸을 고려 충선왕의 왕비로 들여보내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그는 원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노비 제도 중단, 다루가치와 둔전군 철수, 동녕부 및 제주도 반환 등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공로로 왕경 토토가순과 고려왕부 단사관에 임명되었으며,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충렬왕과 충선왕의 대립으로 좌천되기도 했지만, 이후 복권되어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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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은 원종과 순경태후 사이에서 태어나 쿠빌라이 칸의 딸과 혼인하여 몽골 제국의 부마가 되었으며, 원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영토를 회복하고 자치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몽골의 일본 원정 강제 동원, 외부 침입, 방탕한 생활 등으로 비판받은 고려의 제25대 국왕이다.
조인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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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 조인규 |
한자 | 趙仁規 |
로마자 표기 | Jo In-gyu |
관련 정보 | |
씨족 | 평양 趙氏 |
2. 생애
조인규는 젊어서 태자부 시위가 되었고, 1258년 대정 직위에 올랐다. 고려와 몽골과의 강화가 진행되면서 왕명으로 몽골어를 배웠다. 왕비 장목왕후를 위해 남경(현재 서울)에 수호(獺戶)를 조직, 궁부에 매년 수달 모피를 헌납하게 했다.[1] 충렬왕과 충선왕의 대립 등 왕가 내분으로 잠시 좌천되기도 했다.
2. 1. 출생과 가계
1245년에 11년 연상인 해주 최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며, 1252년 음서로써 몽골어 통역관으로 뽑혀 관직에 진출하였다. 훗날 자신의 딸을 충선왕의 왕비(조비)로 시집보냈고, 문하시중을 지냈다.아버지는 조영으로 중앙군의 중급 장교인 금오위별장 지위에 있었다. 출생지는 평양부 상원군이다.
2. 2. 관직 진출
1252년 음서로써 몽골어 통역관으로 뽑혀 관직에 진출하였다. 1269년 충렬왕이 원에 갈 때 수행했다. 1274년 왕이 즉위하자, 무공으로 후대받는 한편, 어사중승, 승선 등의 문관직도 받았다. 1281년 일본 원정 이후에는 재상으로 발탁되어, 후에 중찬까지 승진했다.뛰어난 협상 능력을 통해, 1275년에는 원에 의한 고려 노비 제도를 중단시켰고, 1278년에는 다루가치와 둔전군의 고려로부터 철수, 1290년에는 충렬왕의 정동행성 승상 취임과 동녕로의 반환, 1294년에는 제주도의 반환 등을 실현했다. 1292년에는 딸이 충선왕의 후비 중 한 명이 되면서 왕가의 외척이 되었고,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 최고 직위에 임명되었다.
2. 3. 원나라와의 외교 활동
1258년에 대정 직위에 올랐다. 고려와 몽골과의 강화가 진행되면서 왕명에 의해 발탁되어 몽골어를 배웠다.[1] 1269년 충렬왕(당시에는 황태자)이 원에 출사했을 때 수행했다.[1]뛰어난 협상 능력을 통해, 1275년에는 원에 의한 고려 노비 제도를 중단시켰고, 1278년에는 다루가치와 둔전군의 고려로부터 철수, 1290년에는 충렬왕의 정동행성 승상 취임과 동녕로의 반환, 1294년에는 제주도의 반환 등을 실현했다.[1] 이러한 공적으로,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조인규를 추천하여 왕경 토토가순(탈탈화손, 고려에 설정된 역참 관리관)과 고려왕부 단사관(고려왕이 몽골 왕후로서 유지한 오르도의 관리관)에 임명되었다.[1]
2. 4. 왕실과의 관계 및 말년
1292년 딸 조비가 충선왕의 후비 중 한 명이 되면서 왕가의 외척이 되었다.[1] 새로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 최고 직위에 임명되었다.[1] 충렬왕과 충선왕의 대립 등 왕가의 내분으로 인해 일시 좌천되었지만, 1307년 복권하여 충선왕에 의해 자의도첨의사사, 평양군에 임명되었고,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1]3. 전기 자료
참조
[1]
서적
고려사
1308-04-25
[2]
서적
고려사
[3]
서적
고려사
[4]
서적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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