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클레이턴 포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지 클레이턴 포크는 1856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아시아 전대에서 복무하며 일본어와 중국어를 독학했다. 그는 1883년 보빙사 통역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고, 주한 미국 해군 무관과 대리 공사를 역임하며 갑신정변 등 한반도 정세를 파악했다. 이후 일본에서 교사, 회사원 등으로 활동하다 1893년 사망했으며, 그의 정보 수집 능력은 CIA로부터 높이 평가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시샤 대학 교수 - 나카무라 아츠오
나카무라 아츠오는 1959년 배우로 데뷔하여 드라마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1998년 참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환경 문제와 교육 개혁 등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다 2004년 낙선 후 배우 복귀 및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 도시샤 대학 교수 - 노무라 다다히로
노무라 다다히로는 일본 유도 선수로서 올림픽 3연패를 최초로 달성, -60kg급에서 뛰어난 업어치기 기술을 선보였으며 은퇴 후 유도 보급, 후진 양성, 방송 활동, 강연 및 메이조 대학 약학부 특임 교수로 활동 중이다. - 미국 해군사관학교 동문 - 지미 카터
지미 카터는 해군 장교와 땅콩 농장 운영을 거쳐 조지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도덕적, 진보적 이미지로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퇴임 후 카터 센터 설립과 인도주의 활동으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 미국 해군사관학교 동문 - 존 매케인
존 매케인은 미국 해군 출신으로 베트남 전쟁 포로 경험이 있는 5선 애리조나주 상원의원,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로, 군사, 외교, 선거 자금 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논란에도 직면했고 다수의 훈장과 저서를 남긴 독립적인 성향의 정치인이다. - 1893년 사망 - 기 드 모파상
기 드 모파상은 19세기 프랑스 소설가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아 《여자의 일생》, 《벨아미》 등 장편소설과 300여 편의 단편을 발표하며 인간의 욕망과 사회 위선을 그려내 현대 단편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 1893년 사망 - 표트르 차이콥스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낭만주의 작곡가로, 서정적인 선율과 풍부한 감정, 화려한 관현악법으로 사랑받는 〈비창〉, 발레 음악, 오페라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후원과 연금을 받으며 창작에 전념하고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조지 클레이턴 포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2. 초기 생애
포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마리에타에서 태어나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876년 아시아 분함대 앨럿 호(Alert)를 타고 항해하며 중국어와 일본어를 독학했고, 1882년 귀국 후에는 조선어를 공부했다.[2]
2. 1. 출생 및 성장
조지 클레이턴 포크는 185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매리에타에서 클레이턴과 캐롤라인 포크의 아들로 태어났다.[1] 1872년 아나폴리스의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76년에 졸업하였다.[1][2] 1877년 소위로 임관되어 아시아 전대에서 6년간 복무했다. 증기선 ''알러트''호를 타고 아시아 여행을 떠나 뉴욕 항에서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양, 그리고 일본으로 향하는 항해를 했다. 이 항해 중에 일본어와 중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2] 1880년에는 고베와 요코하마 사이를 도보로 여행했다.[2]1882년 6월 3일, 벤저민 버킹엄 중위 및 월터 맥클린 소위와 함께 일본을 출발하여 조선의 부산항과 원산항, 시베리아, 유럽을 거쳐[2] 9월 8일에 미국에 도착했다. 귀국 후 해군본부 자료부의 도서계에 배속되었지만, 전출과 승진을 바라며 일본어에 더해 조선어 공부도 시작했다.[2]
2. 2. 해군 장교 임관
포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매리에타에서 태어났다.[1] 1872년 아나폴리스의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76년에 졸업하였다.[1][2] 졸업 후, 1876년 아시아 분함대 앨럿 호(Alert)를 타고 뉴욕 항에서 대서양, 지중해,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양, 일본으로 항해했다. 이 항해 도중 중국어와 일본어를 독학했다.[2] 1877년 소위로 임관하고 6년간 아시아 분함대에서 근무했다.[2]1882년 벤저민 버킹엄 중위, 월터 맥클린 소위와 함께 1882년 6월 3일부터 9월 8일까지 일본에서 출발하여 조선 부산항과 원산항, 시베리아,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2] 귀국 후 해군성 자료부에 배치받아 중국어, 일본어, 조선어를 공부했다.[2] 1880년에는 고베와 요코하마 사이를 도보로 여행했다.[2]
2. 3. 언어 능력
포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매리에타에서 태어나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876년 아시아 분함대 앨럿 호(Alert)를 타고 항해하며 중국어와 일본어를 독학했다. 1877년 소위로 임관한 후 6년간 아시아 분함대에서 근무했다.[2] 1882년 미국으로 돌아가 해군성 자료부에 배치되어 중국어, 일본어, 조선어를 공부했다.[2] 포크는 일본어와 조선어에 능통하여 1883년 한국 사절단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통역을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1]3. 조선과의 인연
1883년 민영익 등 보빙사 일행의 방미 당시 통역으로 선발되어 미국과 유럽 일정을 함께 한 포크는, 1884년 5월 체스터 아서 대통령에 의해 주한미국대사관 해군무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에 왔다.[3] 그러나 조선의 환경에 실망하고,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와 수구파의 견제, 본국의 지원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은 외국 선박과의 충돌 증가,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를 우려한 청나라의 압력이 강해지자,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모색했다. 조선은 미국 예외주의를 믿고 미국을 통해 러시아, 일본, 중국에 대한 세력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3]
포크는 조선 주재 기간 동안 가마를 타고 두 차례 조선 각지를 시찰했다. 첫 번째는 공주, 광주, 해인사, 부산, 대구, 문경 등을, 두 번째는 한성을 방문했는데, 이때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조선인들로부터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받기도 했다.[3]
3. 1. 보빙사 통역 및 방미 안내
1883년 9월 민영익 등 조선의 첫 방미(訪美)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이 방미하자 거의 유일한 통역 인원으로 포크 소위가 선발되어 미국 동부 일정에 동행했다. 민영익의 요청으로 안내자로 함께 유럽으로 갔다가 이듬해 5월 보빙사 일행이 귀국할 당시 체스터 아서 미 대통령에 의해 주한미대사관 해군무관으로 임명돼 함께 트렌튼 호(USS Trenton)를 타고 조선으로 왔다.[3] 보스턴에서 워싱턴 D.C.까지 미국 각지를 2개월에 걸쳐 안내했다.[3] 보빙사(報聘使) 장인 민영익은 귀국에 즈음하여 포크의 조선 주재를 미국 국무성에 타진했고, 해군 소속의 한 도서계를 함부로 외교직에 임명할 수 없는 국무성은 해군 본부와 협의하여, 조선에 해군은 없었지만, 미국 공사관 부속 "해군 주재 무관"이라는 전례 없는 직함을 부여하여 이를 허가했다.[3] 포크는 보빙사 일행과 함께 유럽을 경유하여 1884년 5월, USS Trenton (1876)영어로 조선에 입국했다.[3]3. 2. 주한미국대사관 무관 부임
1883년 9월 민영익 등 조선의 첫 방미(訪美)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이 방미하자 거의 유일한 통역 인원으로 포크 소위가 선발되어 미국 동부 일정에 동행하고 민영익의 요청으로 안내자로 함께 유럽으로 갔다가 이듬해 5월 보빙사 일행이 귀국할 당시 체스터 아서 미 대통령에 의해 주한미대사관 해군무관으로 임명돼 함께 트렌튼 호(USS Trenton)를 타고 조선으로 왔다.[3]조선에 도착하고는 현지 환경에 크게 실망한다. 더구나 가까운 조선인들이 모두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청과 수구파의 의심과 견제를 많이 당하고, 점점 조선에 흥미를 잃어가는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해 점차 좌절하고, 이후 몰려든 미국 선교사들 뒤치닥거리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조지 포크는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876년 배 ''얼러트''를 타고 아시아로 갔다. 그는 일본을 거쳐 427마일의 여정을 했고, 이후 육로를 통해 한국, 시베리아,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왔다. 포크는 일본어와 한국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1883년 한국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 워싱턴에서 두 나라 사이의 통역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한 미국 해군 무관으로 임명되었고, 그곳에 도착한 후 가마를 타고 한국 전역을 두 번 여행했다. 43일간 이어진 더 긴 여행에서 그의 방문에는 공주, 광주, 해인사, 부산, 대구, 문경이 포함되었다. 이 여행 후반부에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했고, 그를 일본 첩자로 여긴 사람들로부터 한국인들의 환대가 적대심으로 바뀌었다.[3]
조선에 내항하는 외국 선박과의 충돌이 증가함에 따라 조선 정부에 대한 종주국 청의 압력이 강해졌고,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두려워한 청 정부는 조선 정부에게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미국과의 접근을 지시했다. 조선 측도 미국 예외주의를 믿고, 대러시아, 대일본 뿐만 아니라 대중국 세력으로도 미국에 기대했다.[3]
3. 3. 조선 내 활동 및 관찰
1883년 9월, 민영익을 비롯한 조선의 첫 미국 방문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포크 소위는 거의 유일한 통역 담당으로 선발되어 미국 동부 일정을 함께했다. 민영익의 요청으로 유럽까지 동행한 후, 이듬해 5월 보빙사 일행이 귀국할 때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 의해 주한미국대사관 해군무관으로 임명되어 를 타고 조선에 왔다.조선에 도착한 포크는 현지 환경에 크게 실망했다. 게다가 가까운 조선인들이 모두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청나라와 수구파의 의심과 견제를 받았고, 조선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해 점차 좌절했다. 이후 몰려든 미국 선교사들의 뒤치다꺼리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포크는 지방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으며, 그가 입수하여 위스콘신주립대(밀워키) 도서관에 보관 중이던 대동여지도가 공개되기도 했다.
특히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가마를 타고 조선의 주요 지방들을 시찰하면서 수도권의 군사 요새와 지역 민심 등 한반도 정세를 상세하게 파악하여 해군장관 및 해군정보국에 보고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그 증거로 웹 사이트에 포크 공사가 직접 그린 서울과 강화도, 북한산성 등이 포함된 수도권 지도를 함께 게재했다.
또한 조선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들에게 제물포로 피신하도록 지시하고, 갑신정변 발생 배경과 원인을 심층 분석한 보고서는 당시 푸트 미 공사가 인용하고 국무부의 연례보고서에 게재될 정도로 정확한 정세 판단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나중에 창설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포크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Humint)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했으며, 미군 당국은 포크의 활동을 계기로 해외 공관에 무관 파견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8]
포크는 조선 주재 중 가마를 타고 조선 각지를 시찰했는데, 주요 시찰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43일 동안 공주, 광주, 해인사, 부산, 대구, 문경 등을 방문한 것이다. 두 번째는 한성을 방문했는데, 이때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이 쿠데타를 계기로 조선인들은 그를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하고 적대감을 드러냈다.
4. 주조선 미국 대리공사
1885년 1월 푸트 공사가 사임한 뒤, 포크 중위는 갑작스럽게 대리공사에 임명되었다. 외교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임 푸트 공사가 대사관 공금을 모두 갖고 가 운영 자금이 떨어진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정보망을 가동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다.[3]
그는 조선의 우표를 모아 뉴욕에 있는 가족들을 통해 우표수집가들에게 판매해 활동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포크는 1885년부터 188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왕국의 임시 전권 공사를 역임했다. 윌리엄 하워드 파커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파커가 알코올 중독을 앓는다는 보고가 워싱턴 D.C.에 전달되면서 다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여겨 해군 함대를 돌려 포크가 탑승한 여객선을 급히 요격하여 가능한 한 빨리 그를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몇 달 후, 중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휴 A. 딘스모어가 포크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중국은 포크가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시도에 불만을 품었다. 당시 조선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 외국 선박과의 충돌이 증가함에 따라 청의 압력이 강해졌고,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두려워한 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미국과의 접근을 지시했다. 조선 역시 미국 예외주의를 믿고, 대러시아, 대일본 뿐만 아니라 대중국 세력으로도 미국에 기대했다.[3]
4. 1. 대리공사 임명 및 활동
1885년 1월, 푸트 공사가 사임하면서 포크 중위는 갑작스럽게 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외교관 훈련을 받지 못했고, 전임 푸트 공사가 대사관 공금을 모두 가지고 떠나 운영 자금이 부족한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정보망을 활용하여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다. 조선의 우표를 모아 뉴욕의 가족을 통해 우표 수집가들에게 판매하여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8]포크 공사는 조선 주재 기간 동안 미국 정부로부터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1885년 10월 13일 부친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지시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셔먼호가 조선에 올 이유가 없었고 평양 주민들이 정당방위 차원에서 대응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1886년 2월 12일 서한에서는 셔먼호 사건에 대한 배상금 요구가 부당하다는 자신의 신념을 밝히며, 공직 생활의 중대 기로에 서 있다고 표현했다.[8]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미국 예외주의를 믿고 미국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3] 1883년 9월, 민영익을 비롯한 견미보빙사(遣美報聘使) 일행이 방미했을 때, 포크는 조선어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역관으로 기용되어 2개월간 미국 각지를 안내했다.[3] 민영익은 귀국 시 포크의 조선 주재를 미국 국무성에 요청했고, 미국 정부는 그를 "해군 주재 무관"이라는 전례 없는 직함으로 조선에 파견했다.[3] 포크는 1884년 5월, 보빙사 일행과 함께 트렌턴 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3]
포크는 조선 주재 중 가마를 타고 두 차례 주요 지방을 시찰했다. 첫 번째는 43일 동안 공주, 광주, 해인사, 부산, 대구, 문경 등을 방문했고, 두 번째는 한성을 방문했다. 특히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9월과 12월에는 수도권의 군사 요새와 지역 민심 등 한반도 정세를 상세히 파악하여 해군 장관 및 해군 정보국에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당시 푸트 공사가 인용하고 국무부 연례 보고서에 게재될 정도로 정확한 정세 판단력을 보여주었다.[8]
포크는 1885년부터 1886년까지, 그리고 1886년부터 1887년까지 두 차례 조선 왕국의 임시 전권 공사를 역임했다. 윌리엄 하워드 파커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파커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보고가 워싱턴 D.C.에 전달되면서 포크는 다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미국 정부는 상황을 심각하게 여겨 해군 함대를 동원해 포크가 탑승한 여객선을 요격하여 그를 한국으로 급히 돌려보냈다. 그러나 몇 달 후, 중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휴 A. 딘스모어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중국은 포크가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시도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결국 포크는 1887년 9월 일본으로 떠났다.[2]
4. 2. 제너럴 셔먼호 사건 관련 갈등
1885년, 푸트 공사의 사임으로 갑작스럽게 대리공사로 임명된 포크는 미 정부로부터 1866년에 발생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조선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라는 훈령을 받았다.[2]새뮤얼 홀리(Samuel Hawley)가 2008년에 펴낸 책에 수록된 서신에 따르면, 포크는 1885년 10월 13일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셔먼호 사건에 대한 배상금 요구는 조선이 응하지 않을 것이며, 셔먼호는 조선이 외국인 입국을 불허하던 때에 온 것이고, 평양 주민들은 셔먼호의 총격에 위협을 느껴 공격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1886년 2월 12일 편지에서는 "셔먼호 사건 관련 배상금 요구는 납득할 수 없으며, 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에 해결하지 않고 이제 와서 지시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나타냈다.[2]
4. 3. 대리공사직 사임
1885년 1월 푸트 공사가 사임한 뒤, 포크 중위는 갑작스럽게 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외교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전임 푸트 공사가 대사관 공금을 모두 가지고 돌아가 운영 자금이 부족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정보망을 활용하여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다.[2]포크는 조선의 우표를 수집하여 뉴욕의 가족을 통해 우표 수집가들에게 판매하여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포크는 조선 주재 중 미국 정부로부터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새뮤얼 홀리가 2008년 출간한 책에 따르면, 포크는 1885년 10월 13일 부친에게 보낸 서한에서 "셔먼호 사건에 대한 배상금 요구는 부당하며, 조선이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셔먼호가 조선의 입국 불허 정책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들어왔으며, 평양 주민들을 공격하여 사건을 유발했다고 지적했다.
1886년 2월 12일 서한에서도 포크는 셔먼호 사건 배상금 요구에 대한 불만을 표하며, "왜 조약 체결 당시 해결하지 않고 이제 와서 요구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결국 포크는 1887년 9월 대리공사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1885년부터 1887년까지 두 차례 조선의 임시 전권 공사를 역임했다. 윌리엄 하워드 파커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파커의 알코올 중독 문제로 인해 포크가 다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포크는 몇 달 후 소환되었고, 휴 A. 딘스모어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포크가 조선의 역량 강화를 시도한 것에 대한 중국 정부의 불만 때문이었다.
5. 일본에서의 활동과 사망
조지 클레이턴 포크는 1887년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 대학에서 교수로, 아메리칸 트레이딩 컴퍼니에서 근무했다.[1] 조선에서 편지를 주고받던 무라세 카네와 결혼했다.[1][4][5] 1893년 하코네에서 요양 중 등산하다 행방불명되었고, 다음 날 심부전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6][2] 그의 묘는 교토 도지샤 묘지에 있다.
5. 1. 일본에서의 삶
조지 클레이턴 포크는 1887년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1887년 9월 7일 대한민국에 있을 때부터 편지를 주고받던 일본인 무라세 카네와 결혼했다.[1]공사 퇴임 후, 포크는 도지샤 학원 강사로 취직했다.[1] 나가사키 출신의 무라세 카네(1858-1936, 미타 교회 회원)와 1887년 9월 7일에 결혼했다.[4][5] 1888년부터 1890년까지 요코하마의 아메리칸 트레이딩 컴퍼니에서 근무했고,[1] 1890년부터 1893년까지는 도지샤 학원에서 수학 교수로 일했다.[1]
조선을 떠난 후 건강이 나빠진 포크는 1893년 요양을 위해 아내와 하코네에 머물던 중 등산 중에 행방불명되었고, 다음 날 심부전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6][2] 그의 묘는 교토시 사쿄구 록가타니 와카오지야마 정에 있는 도지샤 묘지에 있다.
5. 2. 사망
1887년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부인과 결혼해 수출입 회사를 경영하고, 대학교수로 활동하다 1893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1] 그의 묘는 일본 교토에 있다.조지 포크는 도시샤 대학에서 교사가 되었고, 1887년 9월 7일, 대한민국에 있는 동안 서신을 주고받았던 일본인 무라세 카네와 결혼했다.[1][4][5] 1888년부터 1890년까지 요코하마의 아메리칸 트레이딩 컴퍼니에서 근무했고,[1] 1890년부터 1893년까지 도시샤 대학에서 수학 교수로 근무했다.[1]
조선을 떠난 시점부터 건강이 악화된 포크는 1893년 요양을 위해 아내와 하코네에 머무는 동안 등산 중에 행방불명되었고, 다음 날 심부전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6][2] 그는 교토시 사쿄구 묘각사 묘지에 합장되었다.
6. 평가 및 유산
조지 클레이턴 포크는 조선 주재 기간 동안 보여준 정보 수집 능력과 상세한 기록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CIA은 그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Humint)의 선구자'로 평가했으며,[8] 그의 활동은 미군 당국이 해외 공관에 무관 파견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8]
6. 1. 정보 수집 능력
조선 주재 기간 동안 지방을 여행하며 많은 사진을 찍었고, 그가 입수해 위스콘신 주립대학교(밀워키) 도서관에 보관 중이던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바 있다.특히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가마를 타고 조선의 주요 지방들을 시찰하면서 수도권의 군사 요새와 지역 민심 등 한반도 정세를 상세하게 파악해 해군 장관 및 해군정보국에 보고했다. CIA은 그 증거로 웹 사이트에 포크가 직접 그린 서울과 강화도, 북한산성 등이 포함된 수도권 지도를 함께 게재했다.
또한 조선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들에게 제물포로 피신하도록 지시하고, 갑신정변 발생 배경과 원인을 심층 분석한 보고서는 당시 푸트 미 공사가 인용하고, 국무부의 연례보고서에 게재될 정도로 정확한 정세 판단력을 과시했다.[8]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나중에 창설된 CIA이 포크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Humint)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하고, 미군 당국은 포크의 활동을 계기로 해외 공관에 무관 파견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된다.[8]
6. 2. 사진 및 기록
조선 주재 기간 동안 지방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고, 그가 입수해 위스콘신주립대(밀워키) 도서관에 보관 중이던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바 있다.[8]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9월과 12월, 포크는 두 차례에 걸쳐 가마를 타고 조선의 주요 지방들을 시찰하면서 수도권의 군사요새와 지역 민심 등 한반도 정세를 상세하게 파악해 해군장관 및 해군정보국에 보고했다. CIA는 그 증거로 웹 사이트에 포크가 직접 그린 서울, 강화도, 북한산성 등이 포함된 수도권 지도를 함께 게재했다.[8]
또한 조선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들에게 제물포로 피신하도록 지시하고, 갑신정변의 발생 배경과 원인을 심층 분석한 보고서는 당시 푸트 미 공사가 인용하고 국무부 연례보고서에 게재될 정도로 정확한 정세 판단력을 보여주었다.[8]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훗날 창설된 CIA은 포크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Humint)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했으며, 미군 당국은 포크의 활동을 계기로 해외 공관에 무관 파견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8]
참조
[1]
웹사이트
Guide to the George Clayton Foulk Papers, ca. 1876-1889
http://www.oac.cdlib[...]
University of California
2012-01-03
[2]
웹사이트
JOURNEY IN KOREA: THE 1884 TRAVEL DIARY OF GEORGE C. FOULK by SAMUEL HAWLEY
http://www.samuelhaw[...]
[3]
간행물
An Idealist's Journey: George Clayton Foulk andU.S.-Korea Relations, 1883-1887
http://scholarship.c[...]
Claremont McKenna College
2015
[4]
웹사이트
Kane Murase Foulk
https://www.findagra[...]
[5]
서적
キリスト敎新聞記事総覧, Volume 4
日本図書センター
1996
[6]
웹사이트
近代来韓(朝)西洋人名一覧
https://web.archive.[...]
2012-01-03
[7]
서적
개화와 수구의 갈등
국사편찬위원회
2017-11-29
[8]
웹인용
CIA
http://www.cia.gov/l[...]
2022-12-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