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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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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1920년대 멕시코에서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의 반성직자 조항 시행과 칼레스 법 제정에 반발하여 결성된 단체이다. 멕시코시티를 기반으로 국민 카톨릭당, 멕시코 카톨릭 여성 연합 등 다양한 가톨릭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초기에는 평화적 저항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교회가 정부와의 타협에 실패하자 무장 반란을 옹호하며 크리스테로 전쟁에 참여했다. 엔리케 고로스티에타 장군을 군사 지도자로 임명하여 반란을 이끌었으나, 멕시코 정부와 교회의 평화 협상에서 배제되었고, 교회의 지원 중단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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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
기본 정보
명칭종교 자유 수호 국민 동맹
로마자 표기Liga Nacional Defensora de la Libertad Religiosa
약칭LNDLR
별칭크리스테로스
LNDLR의 깃발
LNDLR의 깃발
개요
목적멕시코의 반성직자주의에 대한 반대
결성1925년 3월
본부멕시코
회원수36,000명
회원수 기준 연도1925년

2. 역사적 배경

크리스테로 반란의 배경에는 멕시코의 복잡한 정치, 사회적 상황이 있었다. 1910년 시작된 멕시코 혁명은 오랜 기간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 정치를 종식시켰지만, 이후에도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세력들은 가톨릭 교회와 대립각을 세웠는데, 이는 교회가 혁명 이전 기득권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시티에 기반을 둔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1]은 국민 카톨릭당의 전 구성원, 멕시코 가톨릭 여성 연합, 예수회가 이끄는 멕시코 청년 가톨릭 협회, 콜럼버스 기사단, 전국 학부모 협회, 전국 가톨릭 노동 연맹 등이 결성하였다. 이 연맹은 창립 첫해 6월까지 약 36,000명의 회원과 거의 모든 주에 지부를 두었다.[1]

LNDLR은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조직적인 구조와 군사적 지침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지만, 전쟁의 발발, 전개, 특징은 풀뿌리 상황과 그룹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1] 처음에는 반란이 격렬한 대중적 지지와 현지 그룹의 조직적 지원이 있었던 서부 6개 주에서만 억압을 견딜 수 있었고, 초기에 아나클레토 곤잘레스 플로레스가 이끌고, 할리스코와 미초아칸 전역에 세포가 흩어져 있던 비밀 조직인 대중 연합(UP)이 주도했다.[1]

1927년, LNDLR은 서부에서 반란을 재편성했고, 1928년 8월, 반란군에게 최초의 군사 지도자인 엔리케 고로스티에타 장군을 임명했다. 그는 전 멕시코 대통령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아래 연방군에서 싸운 경험이 많은 군인이었다.[1] 고로스티에타는 프리메이슨[2]이자 평생 반성직자로 불렸지만, 최근 그의 편지를 통해 역사가들은 그가 둘 다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3][4] 고로스티에타가 반군 지휘를 맡게 된 동기는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그의 열정적인 신념, 그가 제안받은 높은 봉급(한 달에 약 3,000페소, 즉 일반 육군 장군의 두 배), 그리고 그의 정치적 야망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전투에서 사망할 경우 그의 아내를 지원할 20000USD의 생명 보험 정책에 의해 더욱 동기 부여되었다.[1] 이후 크리스테로들은 대규모 군사 공격을 시작했다.[1]

LNDLR은 멕시코 정부와 교회의 평화 협상에서 어떠한 참여도 배제되었다. 그들은 멕시코 대주교 파스쿠알 디아스가 "크리스테로들은 적절한 군사 자원과 미국 정부의 외교적 지원, 이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부족하여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했다.[1] 멕시코 대주교와 가까운 알베르토 마리아 카레뇨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의 도덕성을 의심했다."라고 말했다.[1]

미국 대사 드와이트 W. 모로의 격렬하고 긴 협상 끝에, 칼레스와 가톨릭 지도부 모두에게 수용 가능한 합의(''Arreglos'')가 이루어졌고, 주교들은 LNDLR에게 군사 및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크리스테로들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명령했다.[1] 일부 크리스테로들은 "La Segunda", 즉 두 번째 크리스티아다로 불리는 전투를 계속했지만, 교회의 지원 없이 그렇게 했다.[1] LNDLR의 주교 계층이 Arreglos에 서명한 것에 대한 비판은 바티칸이 외교적 합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또한 Arreglos 이후 급진화된 가톨릭 단체를 제어하기 위해 지도부의 통제하에 있는 새로운 평신도 단체인 가톨릭 액션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무뎌졌다.[1]

2. 1. 멕시코 혁명과 1917년 헌법

멕시코 혁명 이후 제정된 1917년 멕시코 헌법은 반성직자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은 이 조항을 시행하고 칼레스 법을 제정하면서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이 생겨났다.[1]

2. 2. 칼레스 법 제정과 반발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이 1917년 멕시코 헌법의 반성직자 조항을 시행하고 칼레스 법을 제정하면서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이 생겨났다.[1]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은 칼레스 법에 대한 평화적 저항을 옹호하며, 세금 납부 거부, 불필수 상품 보이콧, 헌법 조항 폐지를 위한 청원 운동 등을 벌였다. 교회가 칼레스로부터 타협을 얻는 데 실패하자, 멕시코 지도부는 1926년 7월 31일 칼레스 법 발효와 동시에 사제들에게 파업을 명령했다.[1]

1926년 7월 31일 사제 파업 직후 산발적인 대중 봉기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9월부터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은 반란을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보이콧 정책을 유지했다.[1] 할리스코, 콜리마 등지에서 대중 봉기가 계속되자, 주교들의 공식적인 지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은 1927년 1월 1일 정권 전복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 헌법 제정을 위한 공개 반란을 옹호했다.[1]

3. LNDLR의 창립과 초기 활동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의 반(反)성직자 정책에 맞서 1926년에 창립되었다.[1] 이 단체는 칼레스 법에 대한 평화적 저항을 옹호하며 세금 납부 거부, 불필수 상품 보이콧, 헌법 조항 폐지를 위한 청원 운동 등을 벌였다. 그러나 교회가 칼레스로부터 타협을 얻는 데 실패하자, 멕시코 가톨릭 지도부는 1926년 7월 31일부터 사제들에게 파업을 명령했다.

사제 파업 직후, 산발적인 대중 봉기가 시작되었고, LNDLR은 1926년 9월부터 무장 반란을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보이콧 정책을 유지했다. 할리스코, 콜리마 등지에서 대중 봉기가 계속되자, LNDLR은 주교들의 공식적인 지원 없이도 1927년 1월 1일, 정권 전복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 제정을 목표로 하는 공개 반란을 옹호했다.

LNDLR은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조직적인 구조와 군사적 지침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아나클레토 곤잘레스 플로레스가 이끌고 할리스코와 미초아칸 전역에 세포가 흩어져 있던 비밀 조직인 대중 연합(UP)이 주도하여 서부 6개 주에서 반란이 격렬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1927년, LNDLR은 서부에서 반란을 재편성했고, 1928년 8월, 엔리케 고로스티에타 장군을 반란군 최고 지도자로 임명했다. 고로스티에타 장군은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대통령 시절 연방군에서 복무한 경험 많은 군인이었다.[2] 그는 프리메이슨이자 반성직자로 알려졌으나, 최근 그의 편지를 통해 역사가들은 그가 두 가지 모두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3][4] 고로스티에타가 반군 지휘를 맡게 된 동기는 높은 봉급(한 달에 약 3000페소, 일반 육군 장군의 두 배)과 정치적 야망 외에도,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그의 열정적인 신념 때문이었다.[1]

3. 1. 창립 배경 및 구성

크리스테로 반란 당시 멕시코시티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국민 카톨릭당(Partido Católico Nacional)의 이전 구성원들과 여러 가톨릭 단체들이 연합하여 결성되었다.[1] 여기에는 멕시코 가톨릭 여성 연합, 예수회가 이끌던 학생 단체인 멕시코 청년 가톨릭 협회(ACJM), 콜럼버스 기사단, 전국 학부모 협회, 전국 가톨릭 노동 연맹 등이 포함되었다.

이 단체는 창립 첫 해인 1926년 6월까지 약 36,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거의 모든 주에 지부를 둘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러한 급성장은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이 1917년 멕시코 헌법의 반성직자 조항을 시행하고, 이른바 칼레스 법을 제정하면서 촉발된 가톨릭 신자들의 위기감 때문이었다.

3. 2. 초기 조직과 목표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멕시코시티에 기반을 둔 단체로,[1] 국민 카톨릭당, 멕시코 카톨릭 여성 연합, 예수회가 이끄는 멕시코 청년 카톨릭 협회(ACJM), 콜럼버스 기사단, 전국 학부모 협회, 전국 카톨릭 노동 연맹 등 다양한 단체의 구성원들이 결성하였다. 창립 첫해 6월까지 약 36,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거의 모든 주에 지부를 두는 등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다.

이 단체는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이 1917년 멕시코 헌법의 반성직자 조항을 시행하고 칼레스 법을 제정하면서 생겨났다. LNDLR은 칼레스 법에 대한 평화적 저항을 옹호하며 세금 납부 거부, 불필수 상품 보이콧, 헌법 조항 폐지를 위한 청원 운동 등을 벌였다.

3. 3. 평화적 저항 운동

LNDLR은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의 칼레스 법에 대한 평화적 저항을 옹호하며, 세금 납부 거부, 불필수 상품 보이콧, 헌법 조항 폐지를 위한 청원 운동 등을 벌였다.[1] 교회가 칼레스로부터 타협을 얻는 데 실패하자, 멕시코 지도부는 칼레스 법이 발효되는 1926년 7월 31일부터 사제들에게 파업을 명령했다.[1]

4. 크리스테로 전쟁 참여

크리스테로 반란은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이 1917년 멕시코 헌법의 반성직자 조항을 시행하고 칼레스 법을 제정하면서 촉발되었다. 이에 국민 카톨릭당을 비롯한 여러 가톨릭 단체들이 연합하여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을 결성하고 저항 운동을 시작했다.[1]

LNDLR은 칼레스 법에 대한 평화적 저항으로 세금 납부 거부, 불필수 상품 보이콧, 헌법 조항 폐지를 위한 청원 운동 등을 벌였다. 교회가 칼레스로부터 타협을 얻는 데 실패하자, 멕시코 가톨릭 지도부는 1926년 7월 31일부터 사제들에게 파업을 명령했다. 이후 산발적인 대중 봉기가 일어났고, LNDLR은 반란을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보이콧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할리스코, 콜리마 등지에서 대중 봉기가 계속되자, 주교들의 공식적인 지원 없이도 1927년 1월 1일 정권 전복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공개 반란을 옹호했다.[1]

LNDLR은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조직적인 구조와 군사적 지침을 제공했지만, 전쟁의 발발과 전개는 지역 상황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1927년 LNDLR은 서부에서 반란을 재편성했고, 1928년 8월에는 엔리케 고로스티에타 장군을 반란군 군사 지도자로 임명했다. 크리스테로들은 대규모 군사 공격을 시작했지만, LNDLR은 멕시코 정부와 교회의 평화 협상에서 배제되었다.[1]

결국 드와이트 W. 모로 미국 대사의 중재로 칼레스와 가톨릭 지도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주교들은 LNDLR에게 군사 및 정치 활동 중단과 크리스테로들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명령했다. 일부 크리스테로들은 전투를 계속했지만, 교회의 지원은 없었다.[1]

4. 1. 사제 파업과 대중 봉기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이 1917년 멕시코 헌법의 반성직자 조항을 시행하고 칼레스 법을 제정하자, 이에 반발한 국민 카톨릭당을 비롯한 여러 가톨릭 단체들이 연합하여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을 결성했다.[1] LNDLR은 칼레스 정부에 대한 평화적 저항으로 세금 납부 거부, 불매 운동, 청원 운동 등을 펼쳤으나, 정부와의 타협에 실패했다. 이에 멕시코 가톨릭 지도부는 1926년 7월 31일부터 사제들에게 파업을 명령했다.[1]

사제 파업 직후, 할리스코, 콜리마 등지에서 산발적인 대중 봉기가 일어났다.[1] LNDLR은 초기에는 보이콧 정책을 유지하며 반란을 논의했지만, 주교들의 공식적인 지원 없이도 1927년 1월 1일 정권 전복과 종교 자유 보장을 위한 공개 반란을 선언했다.[1] LNDLR은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조직적인 구조와 군사적 지침을 제공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 전개, 특징은 풀뿌리 상황과 그룹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초기에는 서부 6개 주에서만 반란이 격렬한 대중적 지지와 현지 그룹의 조직적 지원이 있었고, 아나클레토 곤잘레스 플로레스가 이끌고 할리스코와 미초아칸 전역에 세포가 흩어져 있던 비밀 조직인 대중 연합(UP)이 주도했다.

4. 2. 무장 투쟁 결정

1926년 7월 31일 사제 파업 직후 산발적인 대중 봉기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9월부터 LNDLR은 반란을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보이콧 정책을 유지했다.[1] 할리스코, 콜리마 등지에서 대중 봉기가 계속되자, 주교들의 공식적인 지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LNDLR은 1927년 1월 1일 정권을 전복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공개 반란을 옹호했다.[1]

4. 3. LNDLR의 역할과 한계

LNDLR(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은 크리스테로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조직적인 구조와 군사적 지침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1] 그러나 전쟁의 발발, 전개, 그리고 그 특징은 풀뿌리 상황과 그룹에 더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1] 초기에는 반란이 격렬한 대중적 지지와 현지 그룹의 조직적 지원이 있었던 서부 6개 주에서만 억압을 견딜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아나클레토 곤잘레스 플로레스가 이끌고 할리스코와 미초아칸 전역에 세포 조직이 흩어져 있던 비밀 조직인 대중 연합(UP)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

1927년, LNDLR은 서부에서 반란을 재편성했고, 1928년 8월에는 반란군에게 최초의 군사 지도자인 엔리케 고로스티에타 장군을 임명했다. 그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멕시코 대통령 아래 연방군에서 싸운 경험이 많은 군인이었다.[1] 고로스티에타가 반군 지휘를 맡게 된 동기는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열정적인 신념, 높은 봉급(한 달에 약 3000페소, 일반 육군 장군의 두 배), 정치적 야망, 그리고 전투에서 사망할 경우 그의 아내를 지원할 20000USD의 생명 보험 정책 때문이었다.[1]

하지만 LNDLR은 멕시코 정부와 교회의 평화 협상에서 어떠한 참여도 배제되었다. 멕시코 대주교 파스쿠알 디아스는 "크리스테로들은 적절한 군사 자원과 미국 정부의 외교적 지원이 부족하여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주장했지만, LNDLR은 이를 거부했다.[1]

드와이트 W. 모로 미국 대사의 격렬하고 긴 협상 끝에 칼레스와 카톨릭 지도부 모두에게 수용 가능한 합의(''Arreglos'')가 이루어졌고, 주교들은 LNDLR에게 군사 및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크리스테로들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명령했다.[1] 일부 크리스테로들은 "La Segunda"(두 번째 크리스티아다)로 불리는 전투를 계속했지만, 교회의 지원 없이 진행되었다.[1]

5. 전쟁의 전개와 결말

크리스테로 반란 초기,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플루타르코 칼레스 대통령의 반성직자 정책에 맞서 평화적 저항을 주도했다.[1] 이들은 세금 납부 거부, 불매 운동, 청원 운동 등을 전개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가 칼레스와의 협상에 실패하자, 1926년 7월 31일부터 사제들은 파업에 돌입했다.[1]

사제 파업 직후, 멕시코 전역에서 산발적인 봉기가 일어났고, LNDLR은 1926년 9월부터 무장 반란을 논의하기 시작했다.[1] 할리스코와 콜리마 등지에서 봉기가 확산되자, LNDLR은 1927년 1월 1일, 정권 전복과 종교 자유 보장을 위한 공개 반란을 선언했다.[1]

LNDLR은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에게 조직적인 구조와 군사적 지침을 제공하려 했지만, 전쟁의 발발과 전개는 지역 풀뿌리 조직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1] 초기에는 서부 6개 주를 중심으로 반란이 거셌으며, 아나클레토 곤잘레스 플로레스가 이끄는 비밀 조직인 대중 연합(UP)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

5. 1. 엔리케 고로스티에타 장군

LNDLR은 1928년 8월, 반란군에게 최초의 군사 지도자인 엔리케 고로스티에타 장군을 임명했다.[1] 그는 전 멕시코 대통령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아래 연방군에서 싸운 경험이 많은 군인이었다.[1]

고로스티에타는 프리메이슨[2]이자 평생 반성직자로 불렸지만, 최근 그의 편지를 통해 역사가들은 그가 둘 다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3][4] 고로스티에타가 반군 지휘를 맡게 된 동기는 높은 봉급(한 달에 약 3000페소, 즉 일반 육군 장군의 두 배)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려는 그의 열정적인 신념 때문이었다.[1] 그는 또한 정치적 야망(전쟁 노력의 성공적인 리더십을 대통령직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 봄)과 전투에서 사망할 경우 그의 아내를 지원할 20000USD의 생명 보험 정책에 의해 더욱 동기 부여되었다.[1]

5. 2. 평화 협상과 LNDLR의 배제

멕시코 정부와 가톨릭 교회 사이의 평화 협상에서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은 어떠한 참여도 배제되었다.[1] 멕시코 대주교 파스쿠알 디아스는 "크리스테로들은 적절한 군사 자원과 미국 정부의 외교적 지원, 이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부족하여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주장했지만,[1] LNDLR은 이를 거부했다. 멕시코 대주교와 가까웠던 알베르토 마리아 카레뇨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의 도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1]

드와이트 W. 모로 미국 대사의 격렬하고 긴 협상 끝에, 플루타르코 칼레스와 가톨릭 지도부 모두에게 수용 가능한 합의(''Arreglos'')가 이루어졌고, 주교들은 LNDLR에게 군사 및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크리스테로들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명령했다.[1] 일부 크리스테로들은 "La Segunda", 즉 두 번째 크리스티아다로 불리는 전투를 계속했지만, 교회의 지원은 받지 못했다.[1] LNDLR 주교 계층의 Arreglos 서명에 대한 비판은 바티칸이 외교적 합의를 지지했고, Arreglos 이후 급진화된 가톨릭 단체를 제어하기 위해 지도부의 통제하에 있는 새로운 평신도 단체인 가톨릭 액션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무뎌졌다.[1]

5. 3. 전쟁의 종결과 영향

드와이트 W. 모로 미국 대사의 길고 집중적인 협상 끝에, 칼레스와 가톨릭 지도부 모두 만족할 만한 합의(''Arreglos'')가 이루어졌다. 주교들은 종교자유수호국민동맹(LNDLR)에 군사 및 정치 활동 중단과 크리스테로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명령했다.[1] 몇몇 크리스테로들은 "La Segunda" (두 번째 크리스티아다)로 불리는 전투를 계속했지만, 이는 교회의 지원 없이 이루어졌다.[1] LNDLR 주교단의 Arreglos 서명에 대한 비판은 바티칸이 외교적 합의를 지지했고, Arreglos 이후 급진화된 가톨릭 단체를 통제하기 위해 지도부의 통제하에 있는 새로운 평신도 단체인 가톨릭 액션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약화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The Anti-Clerical Who Led a Catholic Rebellion http://www.latinamer[...] Latin American Studies
[2] 서적 The Cristero Rebellion: The Mexican People between Church and State 1926-1929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3] 뉴스 Cartas inéditas de Gorostieta, el líder cristero - Proceso https://www.proceso.[...] 2012-05-11
[4] 서적 Cartas del General Enrique Gorostieta a Gertrudis Lasaga https://libros.uanl.[...] Libros UANL 2013-06-01
[5] 서적 Concise encyclopedia of Mexico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1
[6] 웹사이트 The Anti-clerical Who Led a Catholic Rebellion http://www.latinamer[...]
[7] 간행물 Cristero Rebellion Fitzroy Dearborn 1997
[8] 서적 Jesuit Student Groups, the Universidad Iberoamericana, and Political Resistance in Mexico, 1913-1979.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2014
[9] 서적 Concise encyclopedia of Mexico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1
[10] 서적 Concise encyclopedia of Mexico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1
[11] 서적 Concise encyclopedia of Mexico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1
[12] 문서 Cristero Rebellion
[13] 문서 Cristero Rebellion
[14] 서적 Concise encyclopedia of Mexico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1
[15] 서적 Concise encyclopedia of Mexico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1
[16] 웹사이트 The Anti-clerical Who Led a Catholic Rebellion http://www.latinamer[...]
[17] 서적 Concise encyclopedia of Mexico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1
[18] 서적 Concise encyclopedia of Mexico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01
[19] 문서 Jesuit Student Groups
[20] 문서 Jesuit Student Groups
[21] 문서 Cristero Rebellion
[22] 문서 Cristero Rebellion
[23] 문서 Jesuit Student Gro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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