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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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혜의 집은 9세기 아바스 왕조 칼리프 알 마문 시대에 바그다드에 설립된 학술 기관이다. 페르시아, 그리스, 인도 등의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했으며,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장려했다. 번역 운동을 통해 이슬람 세계에 고대 그리스의 학문이 전파되었고, 이슬람 학문은 유럽 르네상스에 영향을 미쳤다.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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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집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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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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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압바스 왕조 (현재 이라크) |
유형 | 도서관 |
설립 | 기원후 8세기경 |
해체 | 1258년 (몽골 정복) |
위치 | 바그다드 |
운영 | |
소장 자료 규모 | 알려지지 않음 |
관장 | 알려지지 않음 |
직원 수 | 알려지지 않음 |
역사 | |
설립 시기 | 대략 8세기 하룬 알 라시드 시대 (재위: 786–809) 또는 그의 이전 통치 기간(재위: 754–775) |
전성기 | 알 마문 통치 기간 (재위: 813–833) |
역할 | 번역 및 지식 보존의 중심지 |
파괴 |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침공으로 파괴 |
주요 활동 | |
번역 운동 | 그리스 사상의 아랍어 번역 |
학문 분야 | 수학 천문학 의학 연금술 지리학 철학 문학 |
주요 인물 | 이븐 무카파 알 콰리즈미 알 킨디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 사비트 이븐 쿠라 알-자흐즈 알 디나와리 |
영향 | |
영향 | 유럽 르네상스에 기여 |
2. 역사적 배경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제국을 통치하게 되면서, 762년 칼리프 알 만수르는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옮겼다.[66] 알 만수르는 사산 왕조의 문물을 받아들여 궁정 도서관을 설립하고, 다른 나라의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게 했다.
바르마크가는 페르시아 문화의 복원과 보호를 장려했으며, 바그다드에 최초의 제지 공장을 설립했다. 이는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중국인 기술자로부터 제지 기술을 얻어 가능했다. 종이는 파피루스나 양피지보다 강하고 저렴하여 책과 도서관이 급증하는 계기가 되었고, 도서를 장르와 카테고리에 따라 분류하는 도서목록 개념이 지혜의 집과 중세 이슬람 도서관에 도입되었다.
이슬람 과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세계 만물에 보편적인 질서가 있고,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다. 이슬람 학자들은 의학, 지구과학, 천문학, 수학, 논리학, 형이상학, 인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과학자 겸 철학자였다. 그들은 학문적 성과를 일상생활에 응용하여 과학, 공학 등 여러 분야에 실제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천문학은 예배 시간, 메카의 방향, 라마단[67]의 새로운 월출 시간 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 마문은 아버지 하룬 알 라시드가 시작한 지식인 후원을 이어받아 '지혜의 집'이라는 아카데미를 설립했다.[68] 지혜의 집에서는 이슬람의 수학, 과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된 철학, 과학 서적들을 번역하고 새 책들을 출판했다. 알 마문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후 최초의 대형 도서관을 세워 비잔티움에서 온 귀중한 책들을 보관하고,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선대의 지식을 발전시키도록 천문대를 설치했다. 알 마문의 통치 아래 이슬람 학문은 변천사를 겪으며 수학과 천문학에 주목하고, 페르시아 서적에서 그리스 서적으로 관심을 바꾸었다.[69]
알 마문은 지혜의 집과 학문 전반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크게 늘렸다. 아바스 왕조 사회는 지식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했으며, 상인들과 군부도 지원했다.[16] 학자와 번역가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쉬웠고, 학문적인 삶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냈다. 과학 지식은 매우 귀중하게 여겨져 전쟁 후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조건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요구하기도 했다.[23]
지혜의 집 전문가들은 바그다드에서 엔지니어, 건축가, 공무원, 의사, 자문가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16] 알 마문은 직접 학자들을 방문하고 활동에 대해 문의하며 학술 토론에 참여하고 중재했다.[16]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감을 받아 《칼람》 전문가들과 정기적인 토론회와 세미나를 개최하고, 기본적인 이슬람 신앙과 교리를 논의했다.[2] 또한, 세계 지도 제작, 《알마게스트》 데이터 확인, 지구 크기 측정 등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조직하고, 이집트학을 장려하며 기자 피라미드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25]
알 마문은 지혜의 집 학자들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자료를 수집하게 했다. 훈야인 이븐 이삭은 "번역가들의 셰이크"로서 칼리파의 번역 작업을 책임졌으며,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저서를 포함한 그리스 의학 서적 전체를 번역했다.[27] 사비안인 타비트 이븐 쿠라는 아폴로니우스,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의 작품을 번역했다. 이 시대의 번역은 이전보다 우수했으며, 새로운 아바스 왕조 과학 전통은 더 나은 번역을 요구했고, 번역되는 고대 작품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16][28]
9세기 후반, 알 마문의 지혜의 집은 세계 최대 서적 보관소이자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적 활동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2. 1. 이슬람의 시대적 상황
750년,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몰아내고 이슬람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762년 칼리프 알 만수르(재위 754년 ~ 775년)는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66] 알 만수르는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그 중에는 다른 나라의 서적도 있었다. 이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기 위해 알 만수르는 사산 왕조의 도서관을 본따 궁정 도서관을 설립했다.당시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던 바르마크가는 페르시아 문화의 복원과 보호를 장려했다. 그들은 바그다드에 첫 번째 제지 공장을 설립했다. 제지 공정 기술은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국인 기술자에 의해 전해졌다. 이전에는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사용했는데 종이보다 강도가 낮았고 비쌌다. 강하고 싼 종이의 전달은 책과 도서관의 급증을 불러왔다. 또한 도서를 장르와 카테고리에 따라서 분류하는 도서목록이라는 개념이 지혜의 집과 중세 이슬람 도서관에 소개되었다.
786년 9월 14일, 하룬 알 라시드가 아바스 왕조의 5번째 칼리프가 되었다. 하룬은 바그다드의 궁전에서 지중해부터 인도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이슬람 제국을 다스렸다. 그는 이슬람을 문화적으로 발달시키고, 당시 아라비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지식인 교육을 시키려고 하였다. 하룬 알 라시드는 두 아들, 알아민과 알마문이 있었다. 알마문은 바르마크가에서 페르시아식 교육을 받았다.[70] 아버지 사후 호라산 지방의 태수가 되었으나, 칼리프에 즉위한 이복형 아민과 대립하여 형을 살해하고 즉위, 819년 바그다드로 귀환하였다.
알 마문은 아버지가 시작했던 지식인들에 대한 후원을 계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지혜의 집’이라 불리는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이 '지혜의 집‘에서는 이슬람의 수학, 과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된 철학, 과학 서적들을 번역하고 새 책들을 출판하였다. 알 마문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후로 첫 번째 대형 도서관을 세워 비잔티움으로부터 온 귀중한 책들을 보관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선대의 지식을 발전시키도록 천문대들도 설치하였다. 알 마문의 통치 아래에서 이슬람의 학문적 초점은 변천사를 겪었는데, 그 중 하나가 수학과 천문학에 대해서 주목한 것이며, 또한 페르시아 서적에서 그리스 서적으로 관심을 바꾼 것이다.
지혜의 집은 압바스 왕조 시대에 일어난 주요 그레코-아랍 번역 운동(Graeco-Arabic translation movement)의 일부로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된 저술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혜의 집이 그러한 작업의 유일한 중심지였을 가능성은 적다.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서는 지혜의 집 설립 이전부터 이미 대규모 번역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9] 이러한 번역 운동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난 많은 독창적인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수학, 천문학, 철학, 의학에 대한 고급 연구의 발전은 아랍 과학(Arabic science)의 시작을 알렸고, 더욱 많고 최신의 번역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10]
지혜의 집은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의 지리적 위치 덕분에 아랍, 페르시아,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다른 학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면서 가능해졌다.[53] 8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바그다드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 알 자히즈, 알킨디, 알가잘리 등 수많은 학자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이들은 모두 바그다드의 활기찬 학문 공동체에 기여하여 공식적인 학원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수많은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53][9] 지혜의 집과 관련된 학자들이 기여한 분야는 철학, 수학, 의학, 천문학, 광학 등을 포함하지만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11][53] 도서관의 초기 명칭인 ''Khizanat al-Hikma''(직역하면 "지혜의 창고")는 희귀 서적과 시를 보존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지혜의 집이 파괴될 때까지 주요 기능이었다.[1] 지혜의 집 안에서는 필사가, 번역가, 저술가, 과학자, 서기 등이 매일 만나 번역, 집필, 대화, 독서, 토론을 했다.[12] 여러 과학적 개념과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수많은 서적과 문서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13]
2. 2. 이슬람 시대의 과학적 배경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몰아내고 이슬람 제국의 통치자가 된 후, 칼리프 알 만수르는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옮겼다. 알 만수르는 사산 왕조[66]의 문물을 받아들여 궁정 도서관을 설립하고 다른 나라의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게 했다.당시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던 바르마크가는 페르시아 문화 복원과 보호를 장려했고, 바그다드에 첫 번째 제지 공장을 설립했다. 이는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국인 기술자로부터 제지 공정 기술이 전해진 덕분이었다. 강하고 싼 종이의 등장은 책과 도서관의 급증을 불러왔고, 도서를 장르와 카테고리에 따라 분류하는 도서목록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슬람 과학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분석도 포함했다. 이슬람 과학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세계 만물에 보편적인 질서가 있고,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천문학에서 천체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면 별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슬람 학자들은 전 세계의 참된 성격을 이해하려 노력했기에 여러 학문 분야에 걸친 지식을 추구했다. 그들은 의학, 지구과학, 천문학, 수학, 논리학, 형이상학, 인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과학자 겸 철학자였다. 학문은 그 자체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었으나, 그 성과는 일상생활에 응용되어 과학, 공학 등 여러 분야에 실제적인 효과를 낳았다. 천문학은 예배 시간, 메카의 방향, 라마단[67]의 새로운 월출 시간 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혜의 집은 압바스 왕조 시대에 일어난 그레코-아랍 번역 운동(Graeco-Arabic translation movement)의 일부로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 저술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서도 이미 대규모 번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지혜의 집이 유일한 중심지는 아니었다.[9] 이러한 번역 운동은 이슬람 세계에서 독창적인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아랍 과학(Arabic science)의 시작을 알렸다.[10]
2. 3. 알 마문과 지혜의 집
알 마문은 그의 아버지가 시작했던 지식인들에 대한 후원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의 집’이라 불리는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68] 이 '지혜의 집‘에서는 이슬람의 수학, 과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된 철학, 과학 서적들을 번역하고 새 책들을 출판하였다. 알 마문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후로 첫 번째 대형 도서관을 세워 비잔티움으로부터 온 귀중한 책들을 보관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선대의 지식을 발전시키도록 천문대들도 설치하였다. 알 마문의 통치 아래에서 이슬람의 학문적 초점은 많은 변천사를 겪었는데, 그 중 하나가 수학과 천문학에 주목한 것이며, 페르시아 서적에서 그리스 서적으로 관심을 바꾼 것이다.[69] 그의 치세 중 타힐왕조와 두라프왕조가 자립하여 칼리프의 중앙집권이 다소 약화되었으나, 합리주의적인 무타질라파의 교의가 공인되는 등 이슬람 학술사상의 황금기를 이룩하였다.알 마문(재위 813~833) 칼리파의 후원 아래 지혜의 집과 학문 전반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크게 증가했다. 알 마문은 아버지인 하룬 알 라시드 칼리파의 지도 아래 궁정의 저명한 종교 학자들 앞에서 쿠란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했다. 알 마문이 실수하면 즉시 수정되었다. 이슬람 시인, 과학자, 작가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모스크 안에서 행해지던 공개 강연을 위해 원문을 암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었으며, 이러한 관행은 알 마문의 지적 능력에 깊이 배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2]
그의 과학에 대한 사랑은 매우 컸기에, 전리품으로 과학 서적을 더 선호했다고 전해진다.[2] 아바스 왕조 사회 자체가 지식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었고, 상인들과 군부로부터도 지원이 이어졌다.[16] 학자와 번역가들은 생계를 유지하기가 쉬웠고, 학문적인 삶은 사회적 지위가 높음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과학 지식은 매우 귀중하게 여겨져서 때로는 부유함보다 책과 고대 문서를 전리품으로 선호하기도 했다. 실제로, 아바스 왕조와 동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 후 알 마문은 평화 조건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요구했다.[23]
지혜의 집은 광범위한 사회로부터 격리된 학술 센터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 전문가들은 바그다드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했다. 바이트 알 히크마의 학자들은 주요 건설 프로젝트에서 엔지니어와 건축가를 겸임하고, 정확한 공식 달력을 관리하며,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들은 또한 종종 의사와 자문가 역할을 했다.[16]
알 마문은 지혜의 집의 일상생활에 직접 참여하여 정기적으로 학자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 문의했다. 그는 또한 학술 토론에 참여하고 중재하기도 했다.[16] 알 마문이 지식 추구를 사랑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한때 꾸었던 꿈 때문이라고 한다. 꿈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 무엇이 선인지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24]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감을 받은 알 마문은 《칼람》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토론회와 세미나를 개최했다. 《칼람》은 철학적 논쟁의 기술로, 알 마문은 그의 페르시아인 교사 자파르로부터 이를 이어받았다. 이러한 토론에서 학자들은 열린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본적인 이슬람 신앙과 교리를 논의했다.[2] 그는 종종 바이트 알 히크마의 현자들을 그룹으로 구성하여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조직했다. 예를 들어, 그는 세계 지도 제작, 《알마게스트》의 데이터 확인, 지구의 실제 크기 측정을 의뢰했다. 그는 또한 이집트학을 장려하고 기자 피라미드에서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25] 알 마문은 바그다드에 최초의 천문대를 건설했으며, 학자와 과학자 팀이 참여하는 주요 연구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고 진행 상황을 감독한 최초의 통치자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거대 과학"에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통치자였다.[26]
그의 전임자들을 따라 알 마문은 지혜의 집 학자들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자료를 수집했다. 실제로 지혜의 집 소장 중 한 명이 이 목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 이 기간 동안 페르시아 시인이자 점성가인 사흘 이븐 하룬은 바이트 알 히크마의 수석 사서였다. 훈야인 이븐 이삭(809~873)은 아랍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아랍인들을 위해 116편의 작품을 번역한 가장 생산적인 번역가였다. 그는 "번역가들의 셰이크"로서 칼리파에 의해 번역 작업을 책임지게 되었다. 훈야인 이븐 이삭은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유명한 저서를 포함하여 그리스 의학 서적 전체를 번역했다.[27] 사비안인 타비트 이븐 쿠라(826~901)는 아폴로니우스,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의 위대한 작품들도 번역했다. 이 시대의 번역은 이전 번역보다 우수했는데, 새로운 아바스 왕조 과학 전통은 더 나은 번역을 요구했고, 번역되는 고대 작품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합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16][28] 9세기 후반부까지 알 마문의 바이트 알 히크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서적 보관소였으며,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적 활동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 가장 뛰어난 아랍과 페르시아의 인재들을 끌어들였다. 지혜의 집은 결국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을 얻었지만, 현대적으로 알려진 대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지식은 어떠한 제도적 환경 없이 교사로부터 학생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9세기부터 마크탑이 도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1세기에 니잠 알 물크는 이라크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 중 하나인 바그다드 알 니자미야를 설립했다.
3. 설립
알 마문 칼리파(재위 813~833)의 후원으로 지혜의 집과 학문 전반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크게 증가했다.[22] 알 마문은 아버지 하룬 알 라시드 칼리파의 지도 아래 궁정 학자들 앞에서 쿠란을 암송했으며, 실수하면 즉시 수정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알 마문의 지적 능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22]
알 마문은 과학에 대한 큰 사랑으로 전쟁에서 이기고 얻는 전리품으로 과학 서적을 더 선호했다고 전해진다.[2] 아바스 왕조 사회 자체가 지식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었고, 상인들과 군부로부터도 지원이 이어졌다.[16] 학자와 번역가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쉬웠고, 학문적인 삶은 사회적 지위가 높음을 나타내는 지표였다.[16] 실제로, 아바스 왕조와 동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 후 알 마문은 평화 조건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요구했다.[23]
지혜의 집은 단순한 학술 센터를 넘어 바그다드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지혜의 집 학자들은 주요 건설 프로젝트에서 엔지니어와 건축가를 겸하고, 정확한 공식 달력을 관리하며,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들은 또한 종종 의사와 자문가 역할을 했다.[16]
알 마문은 지혜의 집 운영에 직접 참여하여 정기적으로 학자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 문의했다. 그는 또한 학술 토론에 참여하고 중재하기도 했다.[16] 알 마문이 지식 추구를 사랑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한때 꾸었던 꿈 때문이라고 한다. 꿈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 무엇이 선인지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24]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감을 받은 알 마문은 칼람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토론회와 세미나를 개최했다. 칼람은 철학적 논쟁의 기술로, 알 마문은 그의 페르시아인 교사 자파르로부터 이를 이어받았다. 이러한 토론에서 학자들은 열린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본적인 이슬람 신앙과 교리를 논의했다.[2]
그는 종종 바이트 알 히크마의 현자들을 그룹으로 구성하여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조직했다. 예를 들어, 그는 세계 지도 제작, 《알마게스트》의 데이터 확인, 지구의 실제 크기 측정을 의뢰했다. 그는 또한 이집트학을 장려하고 기자 피라미드에서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25] 알 마문은 바그다드에 최초의 천문대를 건설했으며, 학자와 과학자 팀이 참여하는 주요 연구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고 진행 상황을 감독한 최초의 통치자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거대 과학(big science)"에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통치자였다.[26]
알 마문을 따라 지혜의 집 학자들은 외국으로 자료를 수집하러 파견되었다. 실제로 지혜의 집 소장 중 한 명이 이 목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 이 기간 동안 페르시아 시인이자 점성가인 사흘 이븐 하룬은 바이트 알 히크마의 수석 사서였다.[27] 훈야인 이븐 이삭(809~873)은 아랍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아랍인들을 위해 116편의 작품을 번역한 가장 생산적인 번역가였다. 그는 "번역가들의 셰이크"로서 칼리파에 의해 번역 작업을 책임지게 되었다. 훈야인 이븐 이삭은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유명한 저서를 포함하여 그리스 의학 서적 전체를 번역했다.[27] 사비안인 타비트 이븐 쿠라(826~901)는 아폴로니우스,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의 위대한 작품들도 번역했다. 이 시대의 번역은 이전 번역보다 우수했는데, 새로운 아바스 왕조 과학 전통은 더 나은 번역을 요구했고, 번역되는 고대 작품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합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16][28]
3. 1. 설립 기원
아바스 제국 시기에 페르시아 등 외국의 문물들이 아랍어로 대대적으로 번역되었고, 큰 도서관이 건축되었으며, 비잔틴 제국의 학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알 마문은 어느 날 밤 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 이성과 종교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지혜의 집 창립을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아랍어로 된 학술 연구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고전 지혜의 전승 및 학습 중심지로는 니시비스 학파와 에데사 학파, 곤디샤푸르 의학 아카데미 등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콘스탄티노플 황실 도서관 외에도 메르브, 살로니카, 니샤푸르, 크테시폰 등에서 번역 및 학습이 이루어졌다.[14][15]
우마이야 칼리파국 시대에 무아위야 1세는 다마스쿠스에 책을 수집하여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로 불리는 도서관을 설립했다.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의학, 연금술, 물리학, 수학, 점성술 등의 책들이 수집되고 번역되었다.[16] 우마이야 왕조는 중국으로부터 제지 기술을 받아들여 기독교와 페르시아 학자들을 고용하여 아랍어로 저술을 번역하고 새로운 지식을 개발하도록 했다.[17][18]
750년,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를 대신하여 이슬람 제국의 통치 왕조가 되었고, 762년 칼리프 알 만수르는 바그다드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아바스 왕조는 페르시아 성향이 강했고,[19] 사산 왕조의 관행을 채택하여 외국 저술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알 만수르는 사산 왕조 황실 도서관을 본떠 궁전 도서관을 설립하고 지식인들에게 경제적,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다.[20]
번역 운동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통치 기간 동안 큰 추진력을 얻었다. 알 라시드의 도서관은 지혜의 집의 직접적인 전신이었으며,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 또는 키자나트 쿠투브 알 히크마(Khizanat Kutub al-Hikma, "지혜의 책 창고")로도 알려져 있다.[21]
알 마문 칼리파의 후원 아래 지혜의 집과 학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크게 증가했다. 알 마문은 과학에 대한 큰 사랑으로 전리품으로 과학 서적을 선호했다고 전해진다.[2] 아바스 왕조 사회 자체가 지식의 가치를 인정했고, 상인들과 군부로부터도 지원이 이어졌다.[16] 실제로, 아바스 왕조와 동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 후 알 마문은 평화 조건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요구했다.[23]
알 마문은 지혜의 집의 일상생활에 직접 참여하여 학자들을 방문하고 활동에 대해 문의했으며, 학술 토론에도 참여했다.[16] 알 마문은 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 무엇이 선인지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24]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감을 받은 알 마문은 《칼람》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기적인 토론회와 세미나를 개최했다.[2] 그는 바이트 알 히크마의 현자들을 구성하여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조직했다. 예를 들어, 세계 지도 제작, 《알마게스트》의 데이터 확인, 지구의 실제 크기 측정을 의뢰했다. 그는 또한 이집트학을 장려하고 기자 피라미드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25] 알 마문은 바그다드에 최초의 천문대를 건설하고 학자와 과학자 팀이 참여하는 주요 연구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26]
알 마문은 지혜의 집 학자들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자료를 수집했다. 페르시아 시인이자 점성가인 사흘 이븐 하룬은 바이트 알 히크마의 수석 사서였다.[27] 훈야인 이븐 이삭은 아랍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의사이자 과학자로, "번역가들의 셰이크"로서 칼리파에 의해 번역 작업을 책임지게 되었다. 훈야인 이븐 이삭은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저서를 포함하여 그리스 의학 서적 전체를 번역했다.[27] 사비안인 타비트 이븐 쿠라는 아폴로니우스,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의 위대한 작품들을 번역했다. 이 시대의 번역은 이전 번역보다 우수했는데, 새로운 아바스 왕조 과학 전통은 더 나은 번역을 요구했고, 번역되는 고대 작품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합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16][28] 9세기 후반부까지 알 마문의 바이트 알 히크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서적 보관소였으며,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적 활동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지혜의 집은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을 얻었지만, 현대적인 대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지식은 교사로부터 학생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9세기부터 마크탑이 도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1세기에 니잠 알 멀크는 이라크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 중 하나인 바그다드 알 니자미야를 설립했다.
지혜의 집은 알 마문의 계승자인 알 무타심과 그의 아들 알 와티크 치하에서 번영했지만, 알 무타와킬 치세에는 쇠퇴했다. 알 마문, 알 무타심, 알 와티크는 관용과 과학적 탐구를 지지했지만, 알 무타와킬은 꾸란과 하디스의 보다 문자적인 해석을 지지했다. 칼리프는 과학에 관심이 없었고 합리주의에서 멀어졌으며, 그리스 철학의 확산을 반이슬람적인 것으로 여겼다.[29]
3. 2. 설립 목적
지혜의 집은 중세 페르시아의 '도서관'을 의미하는 단어를 차용하여 'Bayt-al-Hikma'로 불렸다. 초기에는 중세 페르시아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보존하는 두 가지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고대 그리스의 다양한 분야 도서를 번역하는 것으로 범위를 넓혔다.알-마문 칼리파(재위 813~833)의 후원으로 지혜의 집과 학문 전반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크게 증가했다.[22] 아바스 왕조 사회 자체가 지식의 가치를 인정하고 상인들과 군부로부터 지원이 이어지면서 학자들과 번역가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쉬웠고, 학문적인 삶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표였다.[16] 과학 지식은 매우 귀중하게 여겨져 전쟁 후 평화 조건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요구할 정도였다.[23]
지혜의 집은 단순한 학술 센터를 넘어 바그다드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학자들은 건설 프로젝트에서 엔지니어와 건축가를 겸하고, 공식 달력을 관리하며, 공무원, 의사, 자문가로도 활동했다.[16]
알-마문은 지혜의 집 운영에 직접 참여하여 학자들을 방문하고 활동에 대해 문의했으며, 학술 토론에도 참여했다.[16] 그는 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 선에 대해 논의한 후, 칼람 전문가들과 정기적인 토론회를 개최했다.[2] 그는 또한 세계 지도 제작, 《알마게스트》 데이터 확인, 지구 크기 측정 등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조직하고 이집트학을 장려했으며, 기자 피라미드 발굴에도 직접 참여했다.[25] 알-마문은 바그다드에 최초의 천문대를 건설하고 학자 및 과학자 팀의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하여 "거대 과학(big science)"에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통치자였다.[26]
알-마문은 학자들을 외국에 파견하여 자료를 수집하게 했으며, 이 목적으로 지혜의 집 소장 중 한 명이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기도 했다. 사흘 이븐 하룬은 수석 사서였고, 훈야인 이븐 이삭은 116편의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들의 셰이크"였다.[27] 타비트 이븐 쿠라는 아폴로니우스,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의 작품을 번역했다. 이 시대의 번역은 이전보다 우수했는데, 새로운 아바스 왕조 과학 전통은 더 나은 번역과 고대 작품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합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16][28] 9세기 후반, 지혜의 집은 세계 최대 서적 보관소이자 중세 이슬람 세계의 주요 지적 활동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3. 3. 설립 연도 및 장소
아바스 왕조의 제7대 칼리프 알 마문(재위 813~833)의 통치 시기인 9세기 경, 지혜의 집은 이라크의 바그다드에 설립되었다.[68] 알 마문은 이복형 아민을 죽이고 칼리프 자리에 올랐다.[68] 그는 아버지 하룬 알 라시드가 시작한 지식인 후원을 이어받아 '지혜의 집'을 설립하고, 그리스어 철학 및 과학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새 책들을 출판하도록 지원했다.[70]알 마문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후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세워 비잔티움에서 가져온 귀중한 책들을 보관하고,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선대의 지식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천문대도 설치했다.[22] 그의 통치 아래 이슬람 학문은 큰 변화를 겪었으며, 특히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페르시아 서적에서 그리스 서적으로 관심이 이동했다.[2] 알 마문은 과학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지고 있어 전리품으로 과학 서적을 선호했다고 전해지며,[2]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후 평화 조건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요구하기도 했다.[23]
알 마문은 지혜의 집 운영에 직접 참여하여 학자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활동을 문의했으며, 학술 토론에도 참여했다.[16] 그는 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 선에 대해 논의한 후, 《칼람》 전문가들과 정기 토론회를 개최하고 이슬람 신앙과 교리를 논의했다.[24] 또한, 세계 지도 제작, 《알마게스트》 데이터 확인, 지구 크기 측정 등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조직하고, 이집트학을 장려하며 기자 피라미드 발굴에 참여했다.[25] 그는 바그다드에 최초의 천문대를 건설하고 "거대 과학"에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통치자였다.[26]
4. 역할 및 활동
지혜의 집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일어난 주요 그레코-아랍 번역 운동의 일부로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된 저술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9]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서는 지혜의 집 설립 이전부터 이미 대규모 번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9] 이러한 번역 운동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난 많은 독창적인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수학, 천문학, 철학, 의학에 대한 고급 연구의 발전은 아랍 과학의 시작을 알렸고, 더욱 많고 최신의 번역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10]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아랍어로 된 학술 연구는 새롭게 시작되거나 헬레니즘 시대에서 이어졌다. 고전적 지혜의 전승 및 학습의 중심지는 니시비스 학파와 후대의 에데사 학파와 같은 대학, 그리고 명성 높은 병원이자 의학 곤디샤푸르 의학 아카데미를 포함했다. 도서관으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콘스탄티노플 황실 도서관이 있었고, 다른 번역 및 학습의 중심지는 메르브, 살로니카, 니샤푸르, 그리고 후에 바그다드가 될 지역의 남쪽에 위치한 크테시폰에서 기능했다.[14][15]
우마이야 칼리파국 시대에 무아위야 1세는 다마스쿠스에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라는 도서관을 설립하고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의학, 연금술, 물리학, 수학, 점성술 등의 분야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책들도 그 당시 무슬림 학자들에 의해 수집되고 번역되었다.[16] 우마이야 왕조는 중국으로부터 제지 기술을 받아들여 통치하에 있던 많은 고대 지적 중심지를 통합하고, 아랍어로 저술을 번역하고 새로운 지식을 개발하기 위해 기독교와 페르시아 학자들을 고용했다.[17][18]
750년, 아바스 왕조는 알 만수르가 바그다드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바그다드의 위치와 다국적 인구는 안정적인 상업 및 지적 중심지에 완벽한 위치였다.[16] 알 만수르는 사산 왕조 황실 도서관을 본떠 궁전 도서관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지식인들에게 경제적,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다.[20] 그는 또한 인도와 다른 지역의 학자 대표단을 초청하여 수학 및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도록 했다.[16]
아바스 제국에서는 많은 외국 저술이 그리스어,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시리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하룬 알 라시드의 통치 기간 동안 번역 운동은 큰 추진력을 얻었다. 알 라시드의 도서관은 지혜의 집의 직접적인 전신이었으며,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 또는 키자나트 쿠투브 알 히크마(ar)로도 알려져 있다.[21]
지혜의 집에는 과학자와 학자들의 모임, 번역 부서, 그리고 아바스 왕조가 수세기 동안 축적한 지식을 보존한 도서관이 있었다.[16] 현대 화학의 기초가 된 연금술 연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천문 관측 및 기타 주요 실험적 노력과도 관련이 있었다. 알 마문(al-Ma'mun)에 의해 설립된 이 학원은 그리스 철학과 과학적 업적의 필사를 장려했다. 그는 비잔티움에서 이슬람 국가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중요한 원고들을 도서관으로 가져왔다.
지혜의 집은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서는 곳이었으며, 이와 관련된 학자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방대한 양의 독창적인 과학 및 철학적 업적이 생산되었다. 이를 통해 무슬림 학자들은 과거 학자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천문학 정보를 검증할 수 있었다.[2]
- -|]]|thumb|left|13세기 아랍어로 번역된 『본초(De Materia Medica)』의 한 페이지]]
번역 운동은 2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아랍 과학의 황금기 동안 과학 지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전 세계 여러 문화, 즉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의 사상과 지혜가 아랍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 화학, 철학, 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졌다. 번역이라는 영향력 있는 성과는 제국 학자들에게 근동과 그리스 전통의 방대한 초기 지식을 보여주었고, 철학과 학문을 넘어선 주요 학문의 탄생을 가져왔다. 예술과 과학의 융합은 지성의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이해 방식의 발전을 가져왔다.[35] 지혜의 집은 학문적 성장과 기여를 위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번역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36]
번역 운동은 지혜의 집에서 시작되어 2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1세기 반 이상, 주로 중동 출신의 시리아계 기독교 학자들이 지혜의 집에서 모든 과학 및 철학적 그리스 텍스트를 아랍어로 번역했다.[37][38] 지혜의 집에서의 번역 운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호학』 번역으로 시작되었다. 알 마문 시대가 되자 번역가들은 그리스 점성술 텍스트를 넘어섰고, 그리스 저술들은 이미 세 번째 번역 단계에 있었다.[1] 번역된 저자로는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유클리드, 플로티누스, 갈레누스, 수술타, 차라카, 아리아바타, 브라마굽타 등이 있다. 이 운동 기간 동안 약물 조성에 관한 책, 약물 혼합 및 단순 약물의 성질에 관한 책,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의 의학적 문제에 관한 책 등 많은 중요한 텍스트가 번역되었다. 이러한 많은 번역들은 의학, 농업, 금융, 공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국가 사업으로서 의학 서적, 천문학(점성술 포함), 수학 관련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등의 문헌부터 철학 관련 문헌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주석서 등 방대한 서적들이 대대적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사절단을 동로마 제국에 파견하여 문헌을 수집하기도 했다.
알 마문의 지도 아래 과학은 처음으로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연구 프로젝트를 보았다. 칼리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관측을 확인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최초의 천문대 건설을 명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제공한 데이터는 매우 능력 있는 지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그룹에 의해 세심하게 확인 및 수정되었다.[16] 알 마문은 또한 지구의 둘레에 대한 연구를 조직하고 당시 가장 상세한 세계 지도 중 하나를 만들어낼 지리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이슬람 세계 최초의 천문대 건설은 828년 바그다드에서 칼리프 알 마문에 의해 명령되었다. 건설은 지혜의 집 학자들인 수석 천문학자 야히야 이븐 아비 만수르와 사나드 이븐 알리 알-알야후디의 감독하에 이루어졌다.[48] 이 천문대는 알-샴미시야(al-Shammasiyya)에 위치했으며, 마움타한 천문대(Maumtahan Observatory)라고 불렸습니다. 태양, 달, 행성의 첫 관측이 끝난 후 다마스쿠스 근처 카시운 산에 두 번째 천문대가 건설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검증된 표"로 번역되는 알-지지 알-뭄타한이라는 저서에 수록되었다.[47][49]
4. 1. 지혜의 집의 역할
'''지혜의 집'''은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 '''번역'''과 지식 전파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건립 초기에는 페르시아어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데 주력했지만, 점차 '''고대 그리스어 문헌을 보관하고 번역'''하는 것으로 범위를 확장했다.[9] 종교나 전쟁으로 인해 갈 곳 없는 학자들에게는 국적을 불문하고 안식처를 제공했으며, 무슬림, 기독교, 유대교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협력하여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했다.[1]지혜의 집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활발했던 그레코-아랍 번역 운동(Graeco-Arabic translation movement)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 저술들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카이로와 다마스쿠스 등지에서도 이미 번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혜의 집이 유일한 중심지는 아니었다.[9] 이러한 번역 운동은 이슬람 세계에서 수학, 천문학, 철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독창적인 연구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아랍 과학(Arabic science)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10]
지혜의 집은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의 지리적 이점 덕분에 아랍, 페르시아,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다른 학자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었다.[53] 알 자히즈(al-Jahiz), 알킨디(al-Kindi), 알가잘리(al-Ghazali) 등 8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바그다드에서 활동한 수많은 학자들이 이를 증명한다.[53][9] 이들은 철학, 수학, 의학, 천문학, 광학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했다.[11][53] 초기 명칭인 ''Khizanat al-Hikma''(직역하면 "지혜의 창고")는 희귀 서적과 시를 보존하는 기능을 반영한 것이며, 이는 지혜의 집이 파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1] 지혜의 집에서는 필사가, 번역가, 저술가, 과학자, 서기 등이 매일 모여 번역, 집필, 대화, 독서, 토론을 통해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과 문서를 만들어냈다.[12][13]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아랍어로 된 학술 연구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이어지거나 새롭게 시작되었다. 니시비스 학파, 에데사 학파, 곤디샤푸르 의학 아카데미와 같은 대학과 병원이 고전 지혜의 전승 및 학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콘스탄티노플 황실 도서관 외에도 메르브, 살로니카, 니샤푸르, 크테시폰 등지에서 번역 및 학습이 이루어졌다.[14][15]
우마이야 칼리파국 시대에 무아위야 1세는 다마스쿠스에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라는 도서관을 설립하여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의학, 연금술, 물리학, 수학, 점성술 등의 분야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책들이 수집되고 번역되었다.[16] 우마이야 왕조는 중국으로부터 제지 기술을 받아들여 기독교와 페르시아 학자들을 고용하여 아랍어로 저술을 번역하고 새로운 지식을 개발했다.[17][18]
750년, 아바스 왕조는 바그다드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알 만수르는 사산 왕조 황실 도서관을 본떠 궁전 도서관을 설립하여 지식인들을 지원했다.[20] 그는 인도 등지에서 학자들을 초청하여 수학 및 천문학 지식을 공유하도록 했다.[16]
아바스 제국에서는 그리스어,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시리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된 저술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하룬 알 라시드 칼리프 시대에 번역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그의 도서관은 지혜의 집의 전신으로 여겨진다.[21]
4. 2. 지혜의 집의 연구
이슬람 학자들은 전 세계의 참된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여러 학문에 걸쳐 지식을 쌓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의학, 지구과학, 천문학, 수학, 논리학,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인문, 예술 분야에도 통달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다. 학자들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제국 곳곳에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67]학문은 그 자체로 고상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었지만, 그 성과는 일상생활에 응용되어 많은 실질적인 효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수학은 우주의 복잡한 문제를 푸는 데 사용될 수 있었고, 과학, 공학과 같은 일상 분야에도 응용되었다. 천문학은 종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예배 시간, 메카의 방향, 라마단[67]의 시작 등을 파악하는 데 활용되었다.
알 마문(al-Ma'mun) 시대에 설립된 지혜의 집은 인문학과 과학의 학술 중심지로 계획되었다. 수학, 천문학, 의학, 화학, 지구과학, 물리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유클리드, 플로티누스, 갈레노스, 수쉬루타 등 페르시아어, 인도어, 그리스어로 된 책들을 수집하여 학자들이 지식을 쌓도록 했다. 또한 학자들의 독자적인 연구를 장려하여 학문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발견을 이끌어냈다. 알콰리즈미는 지혜의 집이 배출한 유명한 학자 중 한 명으로, 현대 대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지혜의 집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일어난 주요 그레코-아랍 번역 운동의 일부로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된 저술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서는 지혜의 집 설립 이전부터 이미 대규모 번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9] 이러한 번역 운동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난 많은 독창적인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수학, 천문학, 철학, 의학에 대한 고급 연구의 발전은 아랍 과학의 시작을 알렸고, 더욱 많고 최신의 번역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10]
지혜의 집은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의 지리적 위치 덕분에 아랍, 페르시아,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다른 학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면서 가능해졌다.[53] 알 자히즈(al-Jahiz), 알킨디(al-Kindi), 알가잘리(al-Ghazali) 등 수많은 학자들이 바그다드에서 공부하며 활기찬 학문 공동체에 기여했다.[53][9] 이들은 철학, 수학, 의학, 천문학, 광학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했다.[11][53] 지혜의 집의 초기 명칭인 ''Khizanat al-Hikma''(ar 등이 매일 만나 번역, 집필, 대화, 독서, 토론을 했다.[12]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아랍어로 된 학술 연구는 새롭게 시작되거나 헬레니즘 시대에서 이어졌다. 니시비스 학파, 에데사 학파, 곤디샤푸르 의학 아카데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콘스탄티노플 황실 도서관 등이 고전적 지혜의 전승 및 학습의 중심지였다. 번역 및 학습의 중심지는 메르브, 살로니카, 니샤푸르, 크테시폰 등에서 기능했다.[14][15]
우마이야 칼리파국 시대에 무아위야 1세는 다마스쿠스에 책을 수집하고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로 불리는 도서관을 설립했다. 의학, 연금술, 물리학, 수학, 점성술 등의 분야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책들이 수집되고 번역되었다.[16] 우마이야 왕조는 중국으로부터 제지 기술을 받아들여 기독교와 페르시아 학자들을 고용하여 아랍어로 저술을 번역하고 새로운 지식을 개발했다.[17][18]
750년, 아바스 왕조는 알 만수르가 바그다드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바그다드의 위치와 다국적 인구는 안정적인 상업 및 지적 중심지에 완벽한 위치였다.[16] 알 만수르는 사산 왕조 황실 도서관을 본떠 궁전 도서관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지식인들에게 경제적,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다.[20] 그는 또한 인도와 다른 지역의 학자 대표단을 초청하여 수학 및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도록 했다.[16]
아바스 제국에서는 많은 외국 저술이 그리스어,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시리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하룬 알 라시드의 통치 기간 동안 번역 운동은 큰 추진력을 얻었다. 알 라시드의 도서관은 지혜의 집의 직접적인 전신이었으며,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 또는 키자나트 쿠투브 알 히크마(ar)로도 알려져 있다.[21]

1258년 바그다드 공방전 중 훌라구의 군대에 의해 지혜의 집이 파괴되었다.[30] 나시르 앗딘 앗투시는 포위 공격 전에 약 40만 권의 사본을 구출하여 마라가로 옮겼다.[33]
지혜의 집에는 과학자와 학자들의 모임, 번역 부서, 그리고 아바스 왕조가 수세기 동안 축적한 지식을 보존한 도서관이 있었다.[16] 현대 화학의 기초가 된 연금술 연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천문 관측 및 기타 주요 실험적 노력과도 관련이 있었다.
알 마문(al-Ma'mun)에 의해 설립된 이 학원은 그리스 철학과 과학적 업적의 필사를 장려했다. 또한 그는 비잔티움에서 이슬람 국가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중요한 원고들을 도서관으로 가져왔다.
지혜의 집은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서는 곳이었으며, 이와 관련된 학자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방대한 양의 독창적인 과학 및 철학적 업적이 생산되었다 (도서관 파괴로 인해 많은 것이 손실되었지만). 이를 통해 무슬림 학자들은 과거 학자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천문학 정보를 검증할 수 있었다.[2]

번역 운동은 2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아랍 과학의 황금기 동안 과학 지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전 세계 여러 문화, 즉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의 사상과 지혜가 아랍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 화학, 철학, 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졌다. 번역이라는 영향력 있는 성과는 제국 학자들에게 근동과 그리스 전통의 방대한 초기 지식을 보여주었고, 철학과 학문을 넘어선 주요 학문의 탄생을 가져왔다. 예술과 과학의 융합은 지성의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이해 방식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는 학문적 지식과 창의적인 연습을 통해 달성되었다.[35] 지혜의 집(House of Wisdom)은 학문적 성장과 기여를 위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번역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36]
번역 운동은 지혜의 집에서 시작되어 2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1세기 반 이상, 주로 중동 출신의 시리아계 기독교 학자들이 지혜의 집에서 모든 과학 및 철학적 그리스 텍스트를 아랍어로 번역했다.[37][38] 지혜의 집에서의 번역 운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호학』 번역으로 시작되었다. 알 마문 시대가 되자 번역가들은 그리스 점성술 텍스트를 넘어섰고, 그리스 저술들은 이미 세 번째 번역 단계에 있었다.[1] 번역된 저자로는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유클리드, 플로티누스, 갈레누스, 수술타, 차라카, 아리아바타, 브라마굽타 등이 있다. 이 운동 기간 동안 약물 조성에 관한 책, 약물 혼합 및 단순 약물의 성질에 관한 책,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의 의학적 문제에 관한 책 등 많은 중요한 텍스트가 번역되었다. 이러한 많은 번역들은 의학, 농업, 금융, 공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게다가 새로운 발견들은 개정된 번역과 주석을 유도하여 고대 저자들의 작품을 수정하거나 추가했다.[16] 대부분의 경우 이름과 용어가 변경되었다. 이것의 주요 예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의 제목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 제목인 “Megale Syntaxis”를 아랍어로 수정한 것이다.[16]


바그다드 지혜의 집 학자들은 이전 작품들의 번역과 주석 외에도 중요한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예를 들어, 저명한 수학자 알콰리즈미는 알마문의 지혜의 집에서 활동했으며 대수학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알킨디[39]는 암호 해독을 연구했지만 뛰어난 수학자이기도 했다. 알킨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아랍 세계에 처음 소개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이슬람 신학을 융합하여 400년 이상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논쟁할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 동료로는 아부 우스만 알자히즈가 있는데, 그는 기원후 776년경 바스라에서 태어났지만 생애 대부분을 바그다드에서 보냈다. 알마문은 알자히즈를 자신의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고용했지만, 알자히즈가 "눈이 튀어나온" 외모 때문에 해고해야 했다. 알자히즈는 생물학에 깊이 관심을 가진 몇 안 되는 무슬림 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동물들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논하는 ''동물의 책''을 저술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리학''과 유사하다.[40] 알자히즈는 자신의 책에서 개, 여우, 늑대와 같은 동물은 네 다리, 털, 꼬리 등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에 공통 조상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누 무사는 수학과 점성술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으로 기여했다. 813년에서 833년 사이에 세 형제는 과학, 공학, 후원 분야에서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다.[41] 아부 자파르, 무함마드 이븐 무사 이븐 샤키르(803년 이전 – 873년 2월), 아부 알카심, 아마드 이븐 무사 이븐 샤키르(사망 9세기) 및 알하산 이븐 무사 이븐 샤키르(사망 9세기)는 약 100개의 장치와 그 사용법을 설명하는 ''기발한 장치의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최초의 프로그램 가능한 기계의 예인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가 포함되어 있다.[42] 그리고 ''평면 및 구면 도형 측정에 관한 책''도 있다. 무함마드 무사와 그의 형제 아마드와 하산은 지혜의 집 연구 외에도 아바스 칼리프 알마문 치하에서 바그다드 천문대에 기여했다.[43] 이 형제들은 고대 그리스어를 아랍어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번역을 위해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사본을 구입하는 데 많은 돈을 지불했다.[44] 또한 천문학과 물리학에 많은 독창적인 기여를 했다. 무함마드 무사는 물리 법칙의 보편성을 처음으로 지적한 사람일 수도 있다.[2] 10세기에는 이븐 알하이삼(알하젠)이 주로 광학 분야에서 여러 가지 물리 실험을 수행했으며, 그 업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념되고 있다.[45]
의학 분야에서는 후나인이 안과학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저술했다. 다른 학자들은 천연두, 감염 및 외과 수술에 대해서도 저술했다. 이러한 저술들은 나중에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표준 의학 교과서가 되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46]
알마문의 지도 아래 과학은 처음으로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연구 프로젝트를 보았다. 칼리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관측을 확인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최초의 천문대 건설을 명령했다 (아래 천문대 섹션 참조). 프톨레마이오스가 제공한 데이터는 매우 능력 있는 지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그룹에 의해 세심하게 확인 및 수정되었다.[16] 알마문은 또한 지구의 둘레에 대한 연구를 조직하고 당시 가장 상세한 세계 지도 중 하나를 만들어낼 지리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일부는 이러한 노력을 최초의 대규모 국가 지원 연구 프로젝트의 예로 간주한다.[47]
이슬람 세계 최초의 천문대 건설은 828년 바그다드에서 칼리프 알 마문에 의해 명령되었다. 건설은 지혜의 집(House of Wisdom) 학자들인 수석 천문학자 야히야 이븐 아비 만수르(Yahya ibn Abi Mansur)와 사나드 이븐 알리 알-알야후디(Sanad ibn Ali al-Alyahudi)의 감독하에 이루어졌다.[48] 이 천문대는 알-샴미시야(al-Shammasiyya)에 위치했으며, 마움타한 천문대(Maumtahan Observatory)라고 불렸습니다. 태양, 달, 행성의 첫 관측이 끝난 후 다마스쿠스 근처 카시운 산(Mount Qasioun)에 두 번째 천문대가 건설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검증된 표(The Verified Tables)"로 번역되는 알-지지 알-뭄타한(al-Zij al-Mumtahan)이라는 저서에 수록되었다.[47][49]
그리스어 학술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이었다.[61] 때로는 시리아어를 거쳐 번역되기도 했다.
국가 사업으로서 의학 서적, 천문학(점성술 포함), 수학 관련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등의 문헌부터 철학 관련 문헌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주석서 등 방대한 서적들이 대대적으로 번역되었다 ('''「대번역」'''). 또한, 사절단을 동로마 제국에 파견하여 문헌을 수집하기도 했다.
5. 의의 및 영향
지혜의 집은 아바스 왕조 시대 바그다드에 설립된 학술 기관으로, 번역 운동을 통해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등 다양한 문명의 지식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흡수하여 이슬람 세계의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예일대학교의 아랍학자 디미트리 구타스(Dimitri Gutas)는 지혜의 집의 실제 존재와 기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1] 그는 '지혜의 집'이라는 명칭이 번역 오류이며, 실제로는 창고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혜의 집을 언급하는 동시대 자료가 거의 없고, 일관된 명명 규칙이나 물리적 유적, 뒷받침할 텍스트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지혜의 집이 실제 학원이라기보다는 바그다드의 더 큰 학문 공동체를 위한 은유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1]
그러나 아바스 칼리프들이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고, 바그다드에 광범위한 도서관이 존재했으며, 학자들이 많은 양의 저술을 남겼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혜의 집의 존재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4]
번역을 통해 이슬람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아랍어로 학문을 논하게 되면서 아랍어는 지적인 언어이자 공용어로서의 힘을 강화했다.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과학과 철학이 이슬람 세계에 본격적으로 이식되어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유대교 학자들도 사아디아 가온이나 마이모니데스처럼 철학 서적을 아랍어로 읽고 쓰게 되었으며, 아람어나 그리스어 대신 아랍어가 공용어 및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
5. 1. 학문적 영향
9세기 경 지혜의 집을 통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갈레노스 등 그리스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저서가 그리스어에서 이슬람어로 번역됨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등이 이슬람어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슬람 체계는 다양한 그리스 학자들의 저서에서 얻은 학술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코란을 재해석하여 이성 중심적인 이슬람의 교리를 적립하였다.이슬람에서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지식이 활발하게 유입되던 시기에 중세 유럽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배척하여 '암흑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번역을 통해 흡수한 이슬람의 학문적 성과는 유럽의 스콜라 철학(신학 중심의 철학)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혜의 집은 압바스 왕조 시대에 일어난 주요 그레코-아랍 번역 운동(Graeco-Arabic translation movement)의 일부로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된 저술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혜의 집이 그러한 작업의 유일한 중심지였을 가능성은 적다.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서는 지혜의 집 설립 이전부터 이미 대규모 번역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9] 이러한 번역 운동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난 많은 독창적인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수학, 천문학, 철학, 의학에 대한 고급 연구의 발전은 아랍 과학(Arabic science)의 시작을 알렸고, 더욱 많고 최신의 번역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10]
지혜의 집은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의 지리적 위치 덕분에 아랍, 페르시아,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다른 학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면서 가능해졌다.[53] 8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바그다드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 알 자히즈(al-Jahiz), 알킨디(al-Kindi), 알가잘리(al-Ghazali) 등 수많은 학자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이들은 모두 바그다드의 활기찬 학문 공동체에 기여하여 공식적인 학원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수많은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53][9] 지혜의 집과 관련된 학자들이 기여한 분야는 철학, 수학, 의학, 천문학, 광학 등을 포함하지만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11][53]
번역 운동은 2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아랍 과학의 황금기 동안 과학 지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전 세계 여러 문화, 즉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의 사상과 지혜가 아랍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 기간 동안 중요한 목표는 이 운동을 통해 얻은 모든 지식을 담은 종합적인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 화학, 철학, 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졌다. 번역이라는 영향력 있는 성과는 제국 학자들에게 근동과 그리스 전통의 방대한 초기 지식을 보여주었고, 철학과 학문을 넘어선 주요 학문의 탄생을 가져왔다. 예술과 과학의 융합은 지성의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이해 방식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는 학문적 지식과 창의적인 연습을 통해 달성되었다.[35] 지혜의 집은 학문적 성장과 기여를 위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번역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36]
번역 운동은 지혜의 집에서 시작되어 2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1세기 반 이상, 주로 중동 출신의 시리아계 기독교 학자들이 지혜의 집에서 모든 과학 및 철학적 그리스 텍스트를 아랍어로 번역했다.[37][38] 지혜의 집에서의 번역 운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호학』 번역으로 시작되었다. 알-마문 시대가 되자 번역가들은 그리스 점성술 텍스트를 넘어섰고, 그리스 저술들은 이미 세 번째 번역 단계에 있었다.[1] 번역된 저자로는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유클리드, 플로티누스, 갈레누스, 수술타, 차라카, 아리아바타, 브라마굽타 등이 있다. 이 운동 기간 동안 약물 조성, 약물 혼합 및 단순 약물의 성질,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의 의학적 문제에 관한 책 등 많은 중요한 텍스트가 번역되었다. 이러한 번역들은 의학, 농업, 금융, 공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새로운 발견들은 개정된 번역과 주석을 유도하여 고대 저자들의 작품을 수정하거나 추가했다.[16] 대부분의 경우 이름과 용어가 변경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의 제목은 원래 제목인 “Megale Syntaxis”를 아랍어로 수정한 것이다.[16]
지혜의 집과 관련된 저명한 인물 목록[53]
인물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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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샤르 알발키(786–886) | 아바스 왕조 궁정의 저명한 페르시아 점성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번역했다. |
아베로에스(1126–1198) | 이슬람 이베리아(현재의 스페인) 출생,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으로 유명한 무슬림 철학자였다. |
아비센나(980–1037) | 19세기까지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서 주요 의학 교과서였던 「의학 정전」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페르시아 철학자이자 의사. [9] |
알가잘리(1058–1111) |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지지하는 철학자들에게 도전한 「철학자들의 모순」의 저자였던 페르시아 신학자. |
무함마드 알이드리시(1099–1169) |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 휘하에서 활동하며 세계 지도에 기여한 아랍 지리학자. |
무함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 (d. 850) | 지혜의 집의 페르시아 다방면의 전문가 책임자이자 대수학의 창시자. "알고리즘"이라는 단어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
알킨디 (d. 873) | 최초의 아랍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이념을 결합했다. |
마슬라마 알마즈리티(950–1007) |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한 아랍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
후나인 이븐 이삭(809–873) | 지혜의 집을 책임졌던 아랍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학자이자 철학자. 생전에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학자들의 저술 116편 이상을 번역했다. |
바누 무사 형제 | 주목할 만한 페르시아 출신의 기술자이자 수학자들. |
사흘 이븐 하룬(Sahl ibn Harun) (d. 830) | 철학자이자 다방면의 전문가. |
알하자즈 이븐 유수프 이븐 마타르(786–833) | 유클리드의 저작 번역으로 유명한 사바인 수학자이자 번역가. |
타비트 이븐 쿠라(826–901) |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개혁한 사바인 수학자, 천문학자이자 번역가. 정역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54] |
유수프 알쿠리 (d. 912) | 바누 무사 형제가 고용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
쿠스타 이븐 루카(820–912) | 그리스어 원전을 아랍어로 번역한 수학자이자 의사. |
아부 비쉬르 마타 이븐 유누스(870–940) | 기독교 의사, 과학자이자 번역가. |
야히야 이븐 알바트리크(796–806) | 아시리아 기독교 천문학자이자 번역가. |
야히야 이븐 아디(893–974) | 시리아 야코브파 기독교 철학자, 신학자이자 번역가. |
신드 이븐 알리 (d. 864) | 지지 알 신드힌드를 번역하고 수정한 천문학자. |
알자히즈(781–861) | 「키타브 알하야완」과 수많은 문학 작품으로 알려진 저술가이자 생물학자. |
이스마일 알자자리(1136–1206) | 1206년 「독창적인 기계 장치에 대한 지식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물리학자이자 기술자. |
오마르 카이얌(1048–1131) | 3차 방정식의 해법으로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 시인, 수학자, 천문학자. |
번역 덕분에 이슬람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아랍어로 학문을 논하기 시작했고, 아랍어는 지적인 언어이자 공용어로서의 힘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헬레니즘의 과학이나 철학 등의 전통이 이슬람 세계에 본격적으로 이식·소개되어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유대교도들도, 사아디아 가온이나 마이모니데스는 말할 것도 없이, 철학 관련 서적을 아랍어로 읽고 쓰게 되었다. 그때까지 유대교도들 사이에서는 아람어나 그리스어가 공용어·일상어였지만, 아랍어로 대체되었다(유대교나 회당, 성서 해석·시 작품 등과 관련된 경우를 제외하고).
5. 2. 세계사적 영향

14~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Renaissnace영어)는 학문과 예술의 재생 혹은 부활의 시기로 서유럽 문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특히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 정신을 부활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신 중심적이었던 중세시대의 '암흑기'를 거친 유럽사회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활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 초기, 유럽에는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연구나 사상을 제대로 공부한 학자들이 거의 없었다. 이 결과 고대 그리스의 연구, 사상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증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아랍어로 번역되어있던 고대 그리스 철학이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는 역수입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슬람의 학문적 황금 번영시기를 거쳐서 번역된 서적들은 르네상스 운동이 가능하게끔 하는 학문적 밑받침이 되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사회에서 굉장한 명사로 대접받은 이슬람의 학자도 생기게 되었다. 이슬람의 의학자이자 철학자인 이븐 시나(980∼1037)는 유럽에서 ‘의학의 아버지’로 칭한다. 또한 이븐 루시드(1126∼1198)[71]는 당대 최고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로 인정받았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이들 두 사람을 빼놓고는 서양 철학이 연결이 안 된다고 언급하였고, 단테(1265∼1321)는 ‘신곡’에서 이븐 시나와 이븐 루시드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동급’으로 묘사했을 정도로 이슬람의 문명은 유럽사회로 빠르고, 의미있게 전파되었다. 유럽이 종교적으로 이슬람을 배척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당시 유럽의 학자들은 이슬람 세계를 자신의 스승과 학문적 동료들이 사는 곳으로 바라봤다.
바그다드 지혜의 집의 주요 공헌 중 하나는 이슬람 세계의 다른 도서관들에 미친 영향이다. 교육 및 연구 측면에서 여러 민족과 제국을 연결하는 요소로 인정받았다. 지혜의 집은 이슬람 역사 전반에 걸쳐 존중받았으며, 당시와 그 이후의 많은 도서관들의 모델이 되었다. 이 시기 동안과 이후에 많은 도서관들이 생겨났고, 이 도서관들이 바그다드 지혜의 집을 기반으로 했음이 분명하다. 이들 도서관은 지혜의 집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익하고 이로운 특징들을 재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55]
바그다드의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와 혼동해서는 안 될 다른 "지혜의 집"들은 다음과 같다.
- 카이로의 "다르 알 히크마(Dar al-Hikmah)"는 1004년 파티마 칼리프인 알 하킴 비암르 알라에 의해 설립된 지식의 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2]
- 아글라브 왕조의 지혜의 집.
- 안달루시아에 설립한 안달루시아 지혜의 집.
- 튀니지 튀니스의 베이트 알 히크마(Beït al-Hikma)(지혜의 집), 1983년 설립.
- 파키스탄 카라치의 함다르드 대학교의 중앙 도서관은 '바이트 알 히크마트(Bait al hikmat)'라고 불린다.
- 프랑스에 본부를 둔 국제 NGO인 "라 메종 드 사제스(La Maison de Sagesse)"(지혜의 집).[56][57]
- 이란 테헤란의 지혜의 집(House of Wisdom دارالحکمة س), 알리레자 모하마디(Alireza Mohammadi)가 2017년 설립.
- 모로코 페스의 지혜의 집, 필리프 바르바랭(Philippe Barbarin) 추기경과 칼 토라불리(Khal Torabully)가 2018년 설립.[58][59]
번역 덕분에 이슬람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아랍어로 학문을 논하기 시작했고, 아랍어는 지적인 언어이자 공용어로서의 힘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헬레니즘의 과학이나 철학 등의 전통이 이슬람 세계에 본격적으로 이식·소개되어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유대교도들도, 사아디아 가온이나 마이모니데스는 말할 것도 없이, 철학 관련 서적을 아랍어로 읽고 쓰게 되었다. 그때까지 유대교도들 사이에서는 아람어나 그리스어가 공용어·일상어였지만, 아랍어로 대체되었다.
5. 3. 과학적 영향
지혜의 집은 이슬람 과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슬람 과학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분석도 포함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천문학에서 별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면 미래의 별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슬람 학자들은 대개 여러 분야의 지식을 추구했다. 그들은 의학, 지구과학, 천문학, 수학, 논리학,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인문과 예술 분야에도 통달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다. 학자들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제국 곳곳에서 많은 학생들이 그들에게 모여들었다.
학문은 그 자체로 고상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었지만, 그 성과는 일상생활에도 응용되어 많은 실제적인 효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수학은 우주의 복잡한 문제를 푸는 데 사용되었으며, 과학과 공학 같은 분야에도 응용되었다. 천문학은 종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예배 시간, 메카의 방향, 라마단[67]의 시작 등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지혜의 집은 본래 외국 서적의 보관과 번역을 담당했다. 팔라비어, 고대 시리아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등으로 쓰인 과학, 수학, 농학, 약학, 철학 서적들이 번역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그리스어 도서가 아닌,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쳐 과학 지식을 습득했다. 지혜의 집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유럽 과학 발전의 다리 역할을 했으며,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 유럽 과학 혁명의 기반을 마련했다.
지혜의 집은 압바스 왕조 시대의 그레코-아랍 번역 운동(Graeco-Arabic translation movement)의 일부였지만, 유일한 중심지는 아니었다.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서는 이미 대규모 번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9] 이 번역 운동은 이슬람 세계에서 독창적인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수학, 천문학, 철학, 의학 등 고급 연구의 발전을 이끌었다.[10]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아랍어 학술 연구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이어지거나 새롭게 시작되었다. 니시비스 학파, 에데사 학파, 곤디샤푸르 의학 아카데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콘스탄티노플 황실 도서관 등이 고전 지혜의 전승 및 학습 중심지였다.[14][15]
우마이야 칼리파국 시대에 무아위야 1세는 다마스쿠스에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라는 도서관을 설립했다. 의학, 연금술, 물리학, 수학, 점성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수집되고 번역되었다.[16] 우마이야 왕조는 중국으로부터 제지 기술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와 페르시아 학자들을 고용하여 번역과 새로운 지식 개발에 힘썼다.[17][18]
750년, 아바스 왕조는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수도로 삼았다. 칼리프 알 만수르는 궁전 도서관을 설립하고 지식인들을 지원했다.[20] 그는 인도 등지에서 학자들을 초청하여 수학 및 천문학 지식을 공유하게 했다.[16]
아바스 제국에서는 많은 외국 저술이 그리스어,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시리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는 학문과 시에 관심이 많아 번역 운동을 크게 장려했다. 알 라시드의 도서관은 지혜의 집의 전신이었으며,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 또는 키자나트 쿠투브 알 히크마(Khizanat Kutub al-Hikma)로도 알려졌다.[21]
지혜의 집에는 과학자와 학자들의 모임, 번역 부서, 도서관이 있었고, 연금술 연구와 천문 관측 등 실험적 노력도 이루어졌다. 알 마문(al-Ma'mun)은 그리스 철학과 과학 업적의 필사를 장려하고, 비잔티움에서 중요한 원고들을 가져왔다. 지혜의 집에서는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독창적인 과학 및 철학적 업적을 생산하여 과거 학자들의 천문학 정보를 검증할 수 있었다.[2]
번역 운동은 2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아랍 과학의 황금기 동안 과학 지식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의 사상과 지혜가 아랍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 화학, 철학, 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졌고, 예술과 과학의 융합은 지성의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이해 방식의 발전을 가져왔다.[35]
번역 운동은 지혜의 집에서 시작되어 2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1세기 반 이상, 시리아계 기독교 학자들이 모든 과학 및 철학적 그리스 텍스트를 아랍어로 번역했다.[37][38] 알-마문 시대에는 그리스 점성술 텍스트를 넘어 세 번째 번역 단계에 이르렀다.[1]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유클리드, 플로티누스, 갈레누스, 수술타, 차라카, 아리아바타, 브라마굽타 등 많은 저자들이 번역되었다. 의학, 농업, 금융, 공학 발전에 기여한 번역도 많았다.
새로운 발견들은 개정된 번역과 주석을 유도하여 고대 저자들의 작품을 수정하거나 추가했다.[16]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처럼 이름과 용어가 변경되기도 했다.[16]
828년 바그다드에서 칼리프 알-마문(al-Ma'mun)은 이슬람 세계 최초의 천문대 건설을 명령했다. 지혜의 집 학자들인 야히야 이븐 아비 만수르(Yahya ibn Abi Mansur)와 사나드 이븐 알리 알-알야후디(Sanad ibn Ali al-Alyahudi)가 건설을 감독했다.[48] 알-샴미시야(al-Shammasiyya)에 위치한 이 천문대는 마움타한 천문대(Maumtahan Observatory)라고 불렸다. 이후 다마스쿠스 근처에 두 번째 천문대가 건설되었고, 그 결과는 "검증된 표(The Verified Tables)"로 번역되는 알-지지 알-뭄타한(al-Zij al-Mumtahan)에 수록되었다.[47][49]
지혜의 집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53]
이름 | 주요 업적 |
---|---|
알마샤르 알발키(Abu Ma'shar al-Balkhi) (786–886) | 아바스 왕조 궁정의 점성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번역 |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 | 이슬람 이베리아 출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으로 유명 |
아비센나(Avicenna) (980–1037) | 페르시아 철학자이자 의사, 「의학 정전」 저술 |
알가잘리(Al-Ghazali) (1058–1111) | 페르시아 신학자, 「철학자들의 모순」 저술 |
무함마드 알이드리시(Muhammad al-Idrisi) (1099–1169) | 아랍 지리학자, 세계 지도 제작에 기여 |
무함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Muhammad ibn Musa al-Khwarizmi) (d. 850) | 지혜의 집 책임자, 대수학 창시자, "알고리즘" 단어 유래 |
알킨디(Al-Kindi) (d. 873) | 아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이념 결합 |
마슬라마 알마즈리티(Maslama al-Majriti) (950–1007) | 아랍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그리스어 원전 번역 |
후나인 이븐 이삭(Hunayn ibn Ishaq) (809–873) | 아랍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학자이자 철학자, 지혜의 집 책임, 116편 이상 번역 |
바누 무사 형제 | 페르시아 출신 기술자이자 수학자 |
사흘 이븐 하룬(Sahl ibn Harun) (d. 830) | 철학자이자 다방면의 전문가 |
알하자즈 이븐 유수프 이븐 마타르(Al-Ḥajjāj ibn Yūsuf ibn Maṭar) (786–833) | 사바인 수학자이자 번역가, 유클리드 저작 번역 |
타비트 이븐 쿠라(Thābit ibn Qurra) (826–901) | 사바인 수학자, 천문학자이자 번역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개혁, 정역학 창시자[54] |
유수프 알쿠리(Yusuf Al-Khuri|Yusuf al-Khuri) (d. 912) | 바누 무사 형제가 고용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
쿠스타 이븐 루카(Qusta ibn Luqa) (820–912) | 그리스어 원전을 아랍어로 번역한 수학자이자 의사 |
아부 비쉬르 마타 이븐 유누스(Abu Bishr Matta ibn Yunus) (870–940) | 기독교 의사, 과학자이자 번역가 |
야히야 이븐 알바트리크(Yahya ibn al-Batriq) (796–806) | 아시리아 기독교 천문학자이자 번역가 |
야히야 이븐 아디(Yahya ibn Adi) (893–974) | 시리아 야코브파 기독교 철학자, 신학자이자 번역가 |
신드 이븐 알리(Sind ibn Ali) (d. 864) | 지지 알 신드힌드를 번역하고 수정한 천문학자 |
알자히즈(Al-Jahiz) (781–861) | 「키타브 알하야완」과 문학 작품으로 알려진 저술가이자 생물학자 |
이스마일 알자자리(Ismail al-Jazari) (1136–1206) | 「독창적인 기계 장치에 대한 지식의 책」을 저술한 물리학자이자 기술자 |
오마르 카이얌(Omar Khayyam) (1048–1131) | 페르시아 시인, 수학자, 천문학자, 3차 방정식 해법으로 유명 |
번역 덕분에 이슬람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아랍어로 학문을 논하기 시작했고, 아랍어는 지적인 언어이자 공용어로서의 힘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과학이나 철학 등의 전통이 이슬람 세계에 본격적으로 이식·소개되어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유대교도들도 사아디아 가온(사아디아 벤 유수프)이나 마이모니데스와 같이 철학 관련 서적을 아랍어로 읽고 쓰게 되었다. 아람어나 그리스어 대신 아랍어가 공용어·일상어가 되었다.
6. 관련 기관
바그다드 외에도 여러 곳에 "지혜의 집"으로 불리는 기관들이 있었다.[55]
- 이집트 카이로에는 파티마 칼리프 알 하킴 비암르 알라가 1004년에 "다르 알 히크마(Dar al-Hikmah)"라는 또 다른 지혜의 집을 설립했다.[2] 이곳 도서관은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여 "세계의 불가사의"로 알려졌다. 카이로 지혜의 집은 책을 사랑하고 많은 책을 수집했던 알 아지즈 빌라가 시작했고, 알 하킴 비암르 알라는 학자들을 모아 책을 저술하고 과학 지식에 기여하게 했다.[55]
- 아글라브 왕조의 지혜의 집은 아미르 이브라힘 이븐 모하마드 알 아글라비가 라카다(Raqqada)에 설립했다. 많은 학술 원고, 과학 저널, 책들이 이곳에 모였고, 학자들은 매년 바그다드로 여행하여 중요한 문학 작품과 다른 글들을 가져와 이곳의 독특하고 희귀한 자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55]
- 안달루시아 지혜의 집은 우마이야 칼리프인 알 하캄 알 무스타니르가 설립했다. 그는 여러 과학 분야에 대한 지식으로 학자의 거장으로 알려졌으며, 다양한 장르와 과학 분야를 포함하는 방대한 양의 원고, 글, 책을 수집했다.[55]
- 바그다드에는 압바스 왕조 시대 연구 센터를 본떠 만든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라는 연구소가 있는데, 이 단지는 13세기 마드라사를 포함하고 있지만 중세 시대의 "바이트 알 히크마" 건물과는 다르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피해를 입었다.
- 튀니지 튀니스의 베이트 알 히크마(Beït al-Hikma)](지혜의 집)는 1983년에 설립되었다.
- 파키스탄 카라치의 함다르드 대학교 중앙 도서관은 '바이트 알 히크마트(Bait al hikmat)'라고 불린다.
- 프랑스에 본부를 둔 국제 NGO인 "라 메종 드 사제스(La Maison de Sagesse)"(지혜의 집)가 있다.[56][57]
- 이란 테헤란의 지혜의 집(House of Wisdom)은 알리레자 모하마디가 2017년에 설립했다.
- 모로코 페스의 지혜의 집은 필리프 바르바랭 추기경과 칼 토라불리가 2018년에 설립했다.[58][59]
6. 1. 마드라사
'''마드라사'''는 교육시설을 가리키는 아라비아어로 메드레세라고도 한다. 전통적으로 울라마[72]를 육성하기 위한 고등교육시설을 말하며,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쿠타브(학교)에 대해 학원이라고 번역된다. 법학을 중심으로 코란제학, 하디스학, 신학, 언어학, 고시학 등의 교수를 중심으로 수학, 과학, 의학, 철학 등 이슬람에게는 외래의 학문도 교수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슬람 세계에 널리 존재해서 작은 마을에도 하나 이상, 대도시에서는 수십에서 100개를 초월하는 마드라사가 있었다.[72] 마드라사는 큰 모스크 그 자체인 경우도 있으며, 모스크의 부속시설인 경우도 있었다. 수업은 모스크의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보통이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마드라사로서의 특별한 시설에 모스크가 부속되어 있는 것도 있다.대규모 마드라사는 수십 명의 교수에게 봉급을 지불하고 수백 명에서 천 명이 넘는 학생에게 장학금과 기숙사를 제공했다. 재원은 주로 와쿠프(기부된 토지)였으며, 와쿠프는 권력자가 기부한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와쿠프 운용이나 마드라사 수업 내용은 정치에서 어느 정도 자립해서 이루어졌다. 학생은 한 곳의 마드라사에서만 공부하기보다는 스승을 찾아 각지의 마드라사를 유학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울라마로 인정되기까지 10년에서 20년 정도 걸렸다. 이슬람 세계에 보편적인 제도로서 마드라사가 탄생하는 것은 11세기부터로, 셀주크 왕조의 재상 니잠 알무르크가 건설한 니자미야 학원이나 아이유브 왕조[73]의 창시자 사라프 아딘 등에 의한 조직적인 설립이 보인다.
마드라사는 이슬람의 합법적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초등교육보다는 외래 과학이 포함된 고급 학문을 배우는 곳이었다. 마드라사는 모스크와도 연계되어 있으며, 사적인 집단과 유사하게 운영되었고, 대부분의 세속적인 과학의 발상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과학을 원하는 수준만큼 배울 수 있는 학교와 비슷한 역할이었다.
6. 2. 모스크
'''모스크'''는 이슬람교 사원을 칭하는 말이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모스크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지만, 학문 중심지이기도 했다. 모스크에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시간 계시원(clockers영어)이라는 직업이 있었는데, 이는 난해하면서도 정확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저명한 천문학자나 최소한의 훈련을 거친 전문가가 맡았다. 당시 이슬람에서는 천체관측과 해시계로 기도 시각을 계산했기 때문에, 모스크를 통해 시간 관련 과학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리 때문에, 각 지역에서 메카 방향을 찾기 위한 지리학도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모스크 내에서의 과학은 지혜의 집에서 연구되던 과학과는 달리 종교적 응용을 위한 과학에 가까웠다. 물론 지혜의 집에서 발전된 과학과 모스크에서 발전된 과학이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발전된 과학은 이슬람 세계 내에서 공유되었지만, 모스크와 지혜의 집은 연구 목적과 방향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6. 3. 이슬람의 도서관
750년,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몰아내고 이슬람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762년 칼리프 알 만수르(재위 754년 ~ 775년)는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 알 만수르는 페르시아 사산 왕조[66]의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이 중에는 다른 나라의 서적도 있었다. 이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기 위해서 알 만수르는 사산 왕조의 도서관을 본따 궁정 도서관을 설립했다.또한, 당시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던 바르마크가는 페르시아 문화의 복원과 보호를 장려했다. 그들은 바그다드에 첫 번째 제지 공장을 설립했는데, 제지 공정 기술은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가 된 중국인 기술자에 의해서 전해졌다. 이전에는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사용했는데 종이보다 강도가 낮았고 비쌌다. 강하고 싼 종이의 등장은 책과 도서관의 급증을 불러왔다. 또한 도서를 장르와 카테고리에 따라서 분류하는 도서목록이라는 개념이 지혜의 집과 중세 이슬람 도서관에 소개되었다.
도서관은 지혜의 집(Bayt al Hikma영어)으로 불리면서 종교, 과학, 문학 등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였다. 대부분의 도서관은 마드라사나 모스크(이슬람의 사원)에 부속기관으로 딸려 있었으며, 사서들이 관리했다. 대중에게 개방된 도서관은 이슬람 전체에 수백 개 정도 설립되었다. 코르도바(현재 스페인 영지)에만 해도 70곳의 도서관이 있었으며, 그 중 하나는 소장 장서가 40~50만 권에 육박하였다. 바그다드에는 13세기 경에 30곳의 마드라사와 부속 도서관이 있었으며, 1500년 다마스쿠스에는 150곳의 마드라사와 도서관이 있었다.
마라가 관측소 부속 도서관은 4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10세기 카이로에서 본 글의 지혜의 집(Bayt al Hikma)가 아닌 다른 지혜의 집(Dar al'-lim영어)으로 불리던 곳은 200만 권을 소장하였고, 18,000권이 과학 서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세기 의학의 아버지로 칭해지는 의사 이븐 시나(980~1037)는 아시아인에게 왕립도서관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
거기에서 나는 주제별로 분류된 책이 겹겹이 쌓여 있는 수많은 방을 보았다. 아랍 문헌과 시에 할당된 방과 법학에 할당된 방이 있었고, 각각의 특수한 과학도 방 하나씩을 차지했다. 나는 그리스 저자 목록을 뒤져 내가 원하는 책을 찾아보았다. 나는 그 제목을 들어본 사람조차 극히 드문 책들과 나 자신이 그 전에도 후에도 보지 못한 책들을 보았다.
'''
8세기 경 중국의 종이 제작 기술이 유입되면서 도서관의 번창에 더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슬람은 당시 중세의 유럽 도서관보다 소장하는 장서가 더 많았고, 발달된 도서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장서를 수집하는데 든 비용은 칼리프와 부유한 후원자들이 지원했음이 분명하다.
6. 4. 이외의 지혜의 집
바그다드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지혜의 집"으로 불리는 기관들이 많이 존재했다.[55]-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파티마 칼리프 알 하킴 비암르 알라에 의해 1004년에 또 다른 지혜의 집(Dar al-Hikmah)이 설립되었다.[2] 이곳에는 방대한 자료를 소장한 도서관이 있어 "세계의 불가사의"로 알려졌다. 카이로 지혜의 집은 책을 사랑하고 많은 책을 수집했던 알 아지즈 빌라에 의해 시작되었고, 실제 창립자인 알 하킴 비암르 알라는 학자들을 모아 책을 저술하고 과학적 지식에 기여하도록 했다.[55]
- 아글라브 왕조의 지혜의 집은 아미르 이브라힘 이븐 모하마드 알 아글라비가 라카다(Raqqada)에 설립했다. 많은 학술 원고, 과학 저널, 책들이 이곳에 모였고, 학자들은 매년 바그다드로 여행하여 중요한 문학 작품과 다른 글들을 가져와 이곳의 독특하고 희귀한 자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55]
- 안달루시아 지혜의 집은 우마이야 칼리프인 알 하캄 알 무스타니르가 설립했다. 그는 여러 과학 분야에 대한 지식으로 학자의 거장으로 알려졌으며, 다양한 장르와 과학 분야를 포함하는 방대한 양의 원고, 글, 책을 수집했다.[55]
- 바그다드에는 압바스 왕조 시대 연구 센터를 본떠 만든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라는 연구소가 있는데, 이 단지는 13세기 마드라사를 포함하고 있지만 중세 시대의 "바이트 알 히크마" 건물과는 다르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피해를 입었다.
- 튀니지 튀니스의 베이트 알 히크마(Beït al-Hikma)](지혜의 집)는 1983년에 설립되었다.
- 파키스탄 카라치의 함다르드 대학교 중앙 도서관은 '바이트 알 히크마트(Bait al hikmat)'라고 불린다.
- 프랑스에 본부를 둔 국제 NGO인 "라 메종 드 사제스(La Maison de Sagesse)"(지혜의 집)가 있다.[56][57]
- 이란 테헤란의 지혜의 집(House of Wisdom)은 알리레자 모하마디가 2017년에 설립했다.
- 모로코 페스의 지혜의 집은 필리프 바르바랭 추기경과 칼 토라불리가 2018년에 설립했다.[58][59]
7. 쇠퇴
10대 칼리프 무타와킬(재위: 847년 - 861년)은 마아문 시대부터 이어져 온 무타질라 학파 지지 정책을 포기했다. 이는 무타질라 학파의 극단적인 합리주의적·추상적인 사상에 대한 반발로 부상한 전통주의자들, 소위 "하디스의 무리(아훌 알-하디스 ahl al-ḥadīth)"를 고려한 것이었다. "하디스의 무리"라 불린 전통주의자들의 입장은 이슬람 법의 법원은 첫째로 꾸르안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와 관련된 하디스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었다. 아바스 왕조 초기의 신학 논쟁에서는 꾸르안과 하디스에서 언급되는 "유일신 알라의 절대성"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지만, "하디스의 무리"를 포함한 전통주의의 생각에서는 "꾸르안 창조론"을 둘러싼 논쟁처럼 무타질라 학파에 보이는 그리스·로마 철학류의 "합리주의"적인 경전 해석은 꾸르안과 하디스에서 말하는 "알라의 절대성"을 해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일반적인 무슬림 신자들의 종교적 감정과도 괴리되고 있었다.[63] 또한, 무타질라 학파 사람들이 사용했던 아랍어 용어는 기존의 아랍어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스어적인 번역어를 많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하디스학·전승학 분야에서 필수적인 전통적인 아랍어 문법학을 익힌 전통주의적인 학자들에게는 무타질라 학파 사람들의 논설에서 사용되는 표현은 "아랍어답지 않은 새로운 표현"으로 비쳤다.[64] 무타와킬 시대는 사마라에 수도를 둔 채였으며, 칼리프의 보호를 잃은 "지혜의 집"도 번역 활동에서 아랍어를 우선시하는 그 꾸르안과 하디스의 해석에는 전통적인 아랍어 학의 지식이 필수적이었던 것과 그 이후의 반동기에 의해 활동이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었다.
1258년 몽골 제국에 의한 바그다드 전투로 바그다드가 함락되었을 때, 지혜의 집도 그 방대한 문서와 함께 잿더미가 되었다.
8. 주요 인물
이름 | 출생-사망 | 주요 업적 및 활동 |
---|---|---|
알마샤르 알발키 | 786–886 | 아바스 왕조 궁정의 페르시아 점성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번역 |
아베로에스 | 1126–1198 | 이슬람 이베리아(스페인) 출신,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으로 유명한 무슬림 철학자 |
아비센나 | 980–1037 | 19세기까지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서 주요 의학 교과서였던 「의학 정전」 저술[9] |
알가잘리 | 1058–1111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도전한 「철학자들의 모순」 저자 |
무함마드 알이드리시 | 1099–1169 |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 휘하에서 활동, 세계 지도에 기여 |
무함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 | d. 850 | 지혜의 집 책임자, 대수학 창시자, "알고리즘"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 |
알킨디 | d. 873 | 최초의 아랍 철학자 중 한 명,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이념 결합 |
마슬라마 알마즈리티 | 950–1007 |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한 아랍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
후나인 이븐 이삭 | 809–873 | 지혜의 집 책임자, 아랍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학자이자 철학자, 116편 이상 저술 번역 |
바누 무사 형제 | 페르시아 출신 기술자이자 수학자들 | |
사흘 이븐 하룬 | d. 830 | 철학자이자 다방면의 전문가 |
알하자즈 이븐 유수프 이븐 마타르 | 786–833 | 유클리드 저작 번역으로 유명한 사바인 수학자이자 번역가 |
타비트 이븐 쿠라 | 826–901 |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개혁, 정역학 창시자[54] |
유수프 알쿠리 | d. 912 | 바누 무사 형제가 고용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
쿠스타 이븐 루카 | 820–912 | 그리스어 원전을 아랍어로 번역한 수학자이자 의사 |
아부 비쉬르 마타 이븐 유누스 | 870–940 | 기독교 의사, 과학자이자 번역가 |
야히야 이븐 알바트리크 | 796–806 | 아시리아 기독교 천문학자이자 번역가 |
야히야 이븐 아디 | 893–974 | 시리아 야코브파 기독교 철학자, 신학자이자 번역가 |
신드 이븐 알리 | d. 864 | 지지 알 신드힌드를 번역하고 수정한 천문학자 |
알자히즈 | 781–861 | 「키타브 알하야완」과 문학 작품으로 알려진 저술가이자 생물학자 |
이스마일 알자자리 | 1136–1206 | 「독창적인 기계 장치에 대한 지식의 책」 저술 물리학자이자 기술자 |
오마르 카이얌 | 1048–1131 | 3차 방정식 해법으로 유명한 페르시아 시인, 수학자, 천문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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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왕조페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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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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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아바스왕조 시대에 존재하던 다른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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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왕조 때 권력을 휘두른 이란계(系)의 명문(名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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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이븐 루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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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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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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