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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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학문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언론인, 기업인으로 활동했으며,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1907년 일본 유학 후 기자, 언론사 간부,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만주국 시절 재만 동포를 위한 활동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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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 김동인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감자'와 같은 작품을 통해 사실주의를 개척하고, 《창조》를 창간했으며, 사후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동아일보 - 동아일보기 전국소프트테니스대회
동아일보기 전국소프트테니스대회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소프트테니스 대회로, 현재 1923년과 1924년 18세 이하부 여자 단체전 우승팀 기록만 일부 남아 있어 상세한 역사 규명을 위한 추가 조사가 요구된다. - 김성수 (언론인) -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되어 민주주의, 민족주의, 문화주의를 사시로 내걸고 민족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일제강점기 폐간 후 복간되어 방송 사업을 시작했고, 여러 논란을 겪으며 현재 주 6일제로 신문을 발행한다. - 김성수 (언론인) - 김상협
김상협은 삼양그룹 창업주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의 조카로, 도쿄대 졸업 후 고려대 교수와 총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이며, 친일 행적 논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 만주국 관련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만주국 관련자 - 김창영 (1890년)
김창영은 일제강점기 경찰 및 관료, 만주국 관리로서 항일 무장 세력 탄압과 귀순 공작에 참여하고 금산군수와 전라남도 참여관을 지냈으며, 광복 후 경성부부윤을 역임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벌받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진학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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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한자 표기 | 大法院 |
로마자 표기 | Daebeobwon |
영어 명칭 | Supreme Court of Korea |
위치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
법원 정보 | |
관할 | 대한민국 |
설치 근거 | 대한민국 헌법 제101조, 법원조직법 |
구성 | 대법원장 대법관 재판연구관 사법연수원 법원공무원 |
대법원장 | 조희대 |
주요 기능 | 사법부의 최고 법원 하급 법원의 판결에 대한 상고심 재판 법률의 해석 및 적용에 관한 최종 판단 |
역사 | |
설립 | 1948년 9월 13일 |
이전 | 1995년 6월 종로구에서 서초구로 이전 |
조직 | |
구성 | 대법원장 대법관 (13명) 재판연구관 |
기타 정보 | |
웹사이트 | 대법원 공식 웹사이트 |
2. 생애
1907년 10대 초반에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 보통과(1908년), 와세다 대학(1913년), 도쿄 외국어학교(1916년) 등에서 수학했다. 최남선과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류했다. 귀국 후 《경성일보》, 《아사히 신문》 경성지국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조선총독부와 자금주 김성수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동아일보에서 초대 정경부장, 학예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동아일보 퇴사 후 러시아 여행을 떠났으나, 도쿄,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에는 가지 않고 귀국했다. 이 여행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및 이시영 등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 운동가들을 정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2] 귀국 후 최남선과 주간지 《동명》을 창간, 주간을 맡았고 1924년 3월 31일부터 같은 해 6월까지 일간지 《시대일보》로 개편, 발행했다. 1925년 1월 호치신문사(報知新聞社) 경성지국 통신부장을 지냈고, 1927년부터 1928년 4월까지 브라질에 체류했다.
1930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회원, 같은 해 12월 27일 경성상공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해방 후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2년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 1955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 등을 역임했지만 일본에 계속 체류하였다.
1957년경 귀국, 동아일보에 칼럼을 기고하며 한국무역진흥회사 부사장(1952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1955년), 전경련 부회장(1963년) 등을 역임하며 재계에서 활동했다. 1960년대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 서울시 자문위원회 건설위원장, 이민공사 사장, 한일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3]
81세로 사망하기 직전 자필 광고를 작성하여 부음과 함께 동아일보에 실었다.[3]
2. 1. 생애 초반
10대 초반이던 1907년부터 일본에 유학하여 게이오 의숙 보통과(1908년), 와세다 대학(1913년), 도쿄 외국어학교(1916년) 등에서 두루 수학했다. 최남선과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류한 사이였다. 귀국 후 《경성일보》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었고, 《아사히 신문》 경성지국에서도 근무했다.2. 2. 귀국과 언론 활동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당시 조선총독부와 자금주 김성수 사이를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창간된 동아일보에서 초대 정경부장, 학예부장, 논설위원을 맡았다.동아일보 창간 후 6개월 만에 퇴사하여 러시아를 목적지로 한 여행을 떠났는데, 도쿄와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러시아에는 가지 않고 돌아왔다. 이때의 여행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이시영 등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고 있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정탐 목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2] 귀국 후에는 최남선과 함께 주간지 《동명》을 창간해 주간을 맡았고, 1924년 3월 31일부터 같은 해 6월까지 일간지 《시대일보》로 개편, 발행하였다. 1925년 1월 일본 신문사 호치신문사(報知新聞社) 경성지국 통신부장을 역임했고, 1927년부터 1928년 4월까지 브라질에 체류하기도 했다.
1930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회원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 12월 27일 경성상공협회 상무이사로 선임되었다.
2. 3. 해방 이후
해방 후 그는 한동안 두문불출하다가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2년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 1955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 등을 역임했지만 그는 계속 일본에 체류하였다.2. 4. 사망
1957년경에 완전히 귀국한 후, 동아일보에 칼럼을 기고하는 한편으로 기업 활동에 종사하여 한국무역진흥회사 부사장(1952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1955년), 전경련 부회장(1963년) 등을 역임하며 재계의 대표급으로 활동했다. 1960년대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 서울시 자문위원회 건설위원장, 이민공사 사장, 한일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3]81세로 사망하기 직전 자필로 광고를 작성하여 부음과 동시에 올렸는데, 이 광고가 동아일보에 실린 일화가 유명하다.[3]
3. 평가
진학문은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어 '친일언론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5] 그러나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으로 재직하며 재만 동포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준 대변자였다는 상반된 평가도 존재한다. 언론인 김을한(金乙漢, 1905~1992)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3. 1. 긍정적 평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진학문은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알게 된 총독부 고위 관리의 권유로 1936년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내무행정 책임자)이 되었다. 이 일로 '친일언론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100만 명에 이르는 재만(在滿) 동포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준 대변자이기도 했다.[5]
언론인 김을한(金乙漢, 1905~1992)은 만주 시절 진학문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조선인이 개간한 황무지를 일인(日人)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주는 등 그는 그 시대 재만 동포들의 크나큰 희망이었고 마음의 지주였다." (김을한, 《인물론 – 진학문》, 신문평론 1976년 8월호)
3. 2. 부정적 평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알았던 총독부 고위 관리의 권유로 1936년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내무행정 책임자)이 되었고, 이 일로 '친일언론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5]
참조
[1]
뉴스
秦學文씨 別世
http://www.kinds.or.[...]
동아일보
1974-02-04
[2]
뉴스
관동군 촉탁 · 만주국 고관 지낸 친일언론인 - 전경련 상임부회장 진학문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8-02
[3]
뉴스
광고
http://gonews.kinds.[...]
동아일보
2008-08-02
[4]
뉴스
관동군 촉탁 · 만주국 고관 지낸 친일언론인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
2004-05-21
[5]
블로그
D-story 9 : 창간 얼굴들 4 – 진학문 선생
http://dongne.do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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