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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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찬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이강년의 의병에 참여하여 무력 투쟁을 시작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3·1 운동 이후 서로군정서와 의용군에서 활동하며 국내 적 기관 파괴 및 친일파 처단에 주력했고, 대한통의부와 참의부에서 제1중대장으로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1924년 통의부 내 갈등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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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지원, 여성 계몽 운동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 불렸고, 무장 독립운동과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 계획 등에 참여하다 체포 후 순국하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통의부 - 김동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동삼은 협동학교 설립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서간도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 서로군정서와 정의부 참모장 등을 역임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1931년 체포 후 복역 중 순국하여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 통의부 - 양세봉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양세봉은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며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 조선혁명군 등에서 활약한 독립군 지휘관으로서, 한중 연합군을 편성하여 융링제 전투 등에서 승리했으나 일본군 밀정의 계략으로 암살당했고 남북한 모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참의부 - 양세봉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양세봉은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며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 조선혁명군 등에서 활약한 독립군 지휘관으로서, 한중 연합군을 편성하여 융링제 전투 등에서 승리했으나 일본군 밀정의 계략으로 암살당했고 남북한 모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참의부 - 박희광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대한통의부와 참의부 등에서 친일파 암살 작전에 참여하고 뤼순감옥에서 복역했으며 김구의 측근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채찬 | |
---|---|
지도 | |
기본 정보 | |
본관 | 평산 채씨 |
출생 | 1383년 |
사망 | 1457년 (향년 74세) |
자 | 종개(宗介) |
관력 | |
주요 관직 | 지중추원사 좌찬성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정부인 여산 송씨 |
부 | 채귀(蔡龜) |
형제 | 채빈 |
자녀 | 채수(蔡壽) 채윤(蔡崙) 채양(蔡襄) 채전(蔡詮) |
기타 정보 | |
신분 | 문신 |
시대 | 조선 |
2. 생애
1905년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무력으로 항쟁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당하자 남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에는 합니하(哈泥河) 산골에서 백서농장(白西農庄)을 만들고 둔전제(屯田制)로 군인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하였다.[1] 1920년부터는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처단 및 일본 기관 공격을 주도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강계군 문옥면 주재소 습격, 친일파 후창군수 권응규 사살, 관전현 일경 격퇴, 일민단·보민회·강립단 등 친일기관 습격, 의용단 결사대 조직 및 강계 어뢰면 주재소 공격 등이 있다.[1] 1921년에는 김승학 등과 독립신문 한문판 발행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1]
1922년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하였다. 전덕원 등과 의견 마찰로 통의부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교섭한 결과, 김승학, 이유필, 이종혁, 차천리, 박응백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 주만참의부를 설립하고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5월 이의준[4], 김창균[5]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6][7]
1924년 여름, 통의부 주요 간부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집안현(輯安縣)에서 통의부에 대항하다가, 9월 21일 밤 본부의 문학빈(文學彬) 외 10여 명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사망하였다.[8]
2. 1. 초기 활동 (1905년 ~ 1919년)
1905년 이강년을 따라 의병 활동에 참여했으며,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백서농장을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2. 1. 1. 의병 투쟁 (1905년)
1905년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무력으로 항쟁하였다.2. 1. 2. 만주 망명과 독립군 양성 (1910년 ~ 1919년)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당하자 남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에는 합니하(哈泥河) 산골에서 백서농장(白西農庄)을 만들고 둔전제(屯田制)로 군인을 양성하였다.2. 2.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활동 (1919년 ~ 1921년)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하였다.[1] 1920년부터는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처단 및 일본 기관 공격을 주도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강계군 문옥면 주재소 습격, 친일파 후창군수 권응규 사살, 관전현 일경 격퇴, 일민단·보민회·강립단 등 친일기관 습격, 의용단 결사대 조직 및 강계 어뢰면 주재소 공격 등이 있다.[1] 1921년에는 김승학 등과 독립신문 한문판 발행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1]2. 2. 1. 서로군정서 활동 (1919년)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적 기관을 파괴하고 적의 밀정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다.[1] 1920년 본부가 길림(吉林) 방면으로 이동한 후에는 신용관, 김소하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1] 같은 해 5월에는 강계군 문옥면(江界郡文玉面)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이덕창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厚昌郡守) 권응규를 사살하게 하였다.[1] 1921년 관전현(寬甸縣)에서 공격해오는 일경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전, 즙안(楫安), 통화(通化), 임강(臨江), 유하(柳河) 등 각 현에 있는 친일기관인 일민단(日民團), 보민회(保民會), 강립단(强立團) 수십 개소를 습격하여 제거하였다.[1] 또 의용단(義勇團) 결사대 수백 명을 조직하여 강계(江界) 어뢰면(漁雷面) 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1] 1921년 김승학 등과 독립신문 한문판을 발행하는 자금을 제공하였다.[1]2. 2. 2. 의용군 활동 (1920년 ~ 1921년)
1920년 서로군정서 본부가 길림(吉林) 방면으로 이동한 후, 신용관, 김소하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에는 강계군 문옥면(文玉面)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이덕창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厚昌郡守) 권응규를 사살하게 하였다. 1921년에는 관전현에서 공격해오는 일본 경찰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전, 즙안(楫安), 통화(通化), 임강(臨江), 유하(柳河) 등 각 현에 있는 친일기관인 일민단(日民團), 보민회(保民會), 강립단(强立團) 수십 개소를 습격하여 제거하였다. 또 의용단(義勇團) 결사대 수백 명을 조직하여 강계군 어뢰면(漁雷面) 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2. 3. 대한통의부와 참의부 활동 (1922년 ~ 1924년)
1922년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하였다. 전덕원 등과 의견 마찰로 통의부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교섭한 결과, 김승학, 이유필, 이종혁, 차천리, 박응백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 주만참의부를 설립하고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5월 이의준[4], 김창균[5]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6][7]1924년 여름, 통의부 주요 간부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집안현(輯安縣)에서 통의부에 대항하다가, 9월 21일 밤 본부의 문학빈(文學彬) 외 10여 명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사망하였다.[8]
2. 3. 1. 대한통의부 활동과 분열 (1922년)
1922년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덕원 등과 의견 마찰로 통의부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교섭하였다. 그 결과 김승학, 이유필, 이종혁, 차천리, 박응백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의 주만참의부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6]2. 3. 2. 참의부 설립과 활동 (1923년 ~ 1924년)
1922년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덕원 등과 의견 마찰로 통의부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교섭한 결과, 김승학, 이유필, 이종혁, 차천리, 박응백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의 주만참의부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5월 이의준[4], 김창균[5]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6][7]2. 4. 사망
1924년 여름, 채찬은 통의부 주요 간부들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집안현(輯安縣)으로 이동하여 통의부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21일 밤, 통의부 본부 소속 문학빈(文學彬) 외 10여 명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사망하였다.[8]3. 사후
채찬은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1]
3. 1. 대한민국 정부 포상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참조
[1]
간행물
채찬 (미상 ~ 1924. 9. 21)
http://www.mpva.go.k[...]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2]
간행물
채찬(蔡燦)
http://encykorea.aks[...]
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뉴스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채찬
https://www.inews365[...]
충북일보
2015-05-10
[4]
간행물
이의준(李義俊, 1893~1929-01-28)
http://www.mpva.go.k[...]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5]
간행물
김창균(金昌均, 1892~?)
http://www.mpva.go.k[...]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6]
뉴스
사이토 총독(齋藤總督) 국경시찰여정(國境視察旅程)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4-05-08
[7]
뉴스
사이토 총독(齋藤總督)을 저격(狙擊)한 참의부원(參議府員) 예심종결(豫審終結), 압록강 하류에서 총독 탄 배를 저격 경호대와 오래동안 총화밧군 사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7-10-17
[8]
뉴스
사이토 총독저격(齋藤總督 狙擊)한 백광운사망설(白狂雲死亡說)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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