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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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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승학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한성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1907년 한일신협약 반대 연설로 구금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만주로 이주하여 무장 투쟁에 참여하고, 3·1 운동 이후 대한독립단에 가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발간, 참의부 참의장, 한국독립당 참여 등 만주와 상하이에서 활동했으며,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한국독립사》를 저술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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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기본 정보
김승학
김승학
본관김해 김씨
출생1925년 10월 15일
사망2018년 10월 1일 (92세)
국적대한민국
직업역사학자
학력
학교서울대학교 사학과
학위문학박사
경력
직책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저서
주요 저서《한국독립운동사》
《일제강점하의 민족운동사연구》
《항일무장투쟁사》
《한국민족주의론》
수상
훈장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내역대한민국학술원상
기타
로마자 표기Gim Seung-hak

2. 생애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1905년 한성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의주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에 반대하는 대중 연설을 하다가 구금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광복 후에는 독립운동사 편찬에 관심을 가졌으며, 저서로 유고집 《한국독립사》가 있다.

2. 1. 항일 독립 투쟁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김승학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 망명을 선택할 때 만주로 이주하여 무장 투쟁에 가담하였다. 1919년 3·1 운동으로 의병 단체 통합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단(도총령 박장호) 조직에 참여하였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게 되었다.

구 의병 출신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의민부와 민국독립단에 참여하였고, 광복군사령부(사령장 조맹선)의 간부를 맡아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발간 작업을 맡았다.

1927년 3월에는 임시정부의 참의부 참의장을 맡았고, 한국독립당(위원장 홍진)에도 참여했다. 이 때문에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 등에서 5년 이상 옥고를 치렀으나,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였다.[2]

2. 2.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11월 23일 《독립신문》을 다시 발간하고 발행인으로 참여하였다.[6] 1945년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5]

1947년 9월 5일 이승만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성수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7]

건국 유공자 심사를 맡았던 그가 작성한 독립 운동 자료는 그동안 이 분야에서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어 왔으며, 1948년 육필 원고로 작성한 〈친일파 군상〉이라는 제목의 친일 인물 명단과 반민특위 재판관, 검찰관 예상 명단이 발견되어 2001년 공개된 바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63년 독립운동가 공적 심사에 오광선과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의 영향으로 많은 수의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기도 하였다. 1964년 12월 17일 숨을 거두었다.

3. 독립운동사 편찬과 《한국독립사》

후손 김병기의 증언에 따르면, 김승학은 광복 이전에도 독립운동사 편찬을 위한 각종 사료를 많이 수집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일제에 여러 차례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사료가 분실되기도 하였다.[1] 광복 후에는 고향인 신의주에 독립운동사 편찬 사무소를 마련하고 다시 독립운동 사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서울로 이주한 후에도 이어졌으며,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도 수집한 사료를 가지고 갈 정도였다.[1]

1953년 1월 부산에서 애국동지원호회를 기반으로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다시 만들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1년 뒤인 1954년 11월께 초고 교정본을 완성하였다.[1] 1956년 2월 5일 애국동지원호회(회장 문일민)에서 이 원고를 《한국독립운동사》로 간행하였으나, 편찬을 주도했던 김승학은 참여하지 못했고, 간행본과 초고본 사이에 상당한 수정이 있었다고 한다.[1] 김승학은 서거 직전까지 집필한 《한국독립사》에서 《한국독립운동사》가 자신의 뜻과 어긋나는 점이 많고 동의 없이 발간되었다고 비판하였다.[1]

이후에도 김승학은 독립운동사 편찬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특히 당시 생존했던 여러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사진과 자필 이력서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63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가 공적심사에 참여했고, 많은 독립운동가가 그의 자료 덕분에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1]

1964년 김승학은 독립운동사 집필 관련 자료와 여러 자필 이력서를 바탕으로 저서이자 유고집인 《한국독립사》를 간행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의 발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1]

참조

[1] 웹사이트 김승학 - 네이버 http://100.naver.com[...]
[2]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3] 서적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6
[4] 웹사이트 김승학 https://terms.naver.[...]
[5]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6] 웹인용 해방후 속간된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 공개 https://www.yna.co.k[...] 2012-08-10
[7] 서적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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