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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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호동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위치한 지역으로, 굽은다리(곡교리)로 불리다가 즈믄 개의 문짝집이라는 뜻의 천호(千戶)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백제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한양과 수운을 잇는 나루터와 역참이 발달하여 도읍과 가까운 마을로 발전했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1970년대에는 여러 행정동으로 분할되었다. 현재는 강동구에서 인구 및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한 지역으로, 풍납토성의 사적지와 현대백화점 등의 상업 시설, 서울 지하철 5호선과 8호선 환승역인 천호역 등이 위치해 있다. 또한, 천호동 로데오거리, 천호시장 등 다양한 상업 시설과 더불어 성덕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가 위치해 있다. 과거 텍사스촌으로 알려진 사창가가 존재했으나, 2004년 매춘 금지법 도입 이후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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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동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천호동 |
한자 표기 | 千戶洞 |
로마자 표기 | Cheonho-dong |
행정 구역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수도 | 서울특별시 |
기초자치단체 | 강동구 |
면적 정보 | |
면적 | 3.07km² |
인구 정보 (2001년 기준) | |
총 인구 | 106,782명 |
인구 밀도 | 34,782명/km² |
언어 정보 | |
천호제1동 정보 | |
면적 (천호제1동) | 0.71km² |
세대 (천호제1동, 2012.12.31. 기준) | 13,046 |
인구 (천호제1동, 2022년 2월 기준) | 26,723 |
법정동 (천호제1동) | 천호동 |
통 (천호제1동) | 36 |
반 (천호제1동) | 320 |
동주민센터 (천호제1동) | 서울특별시 강동구 구천면로42길 59 |
홈페이지 (천호제1동) | 천호1동 주민센터 |
![]() | |
천호제2동 정보 | |
면적 (천호제2동) | 1.57km² |
세대 (천호제2동, 2012.12.31. 기준) | 17,097 |
인구 (천호제2동, 2022년 2월 기준) | 33,160 |
법정동 (천호제2동) | 천호동 |
통 (천호제2동) | 43 |
반 (천호제2동) | 408 |
동주민센터 (천호제2동) | 서울특별시 강동구 올림픽로 698 |
홈페이지 (천호제2동) | 강동구 천호2동 주민센터 |
![]() | |
천호제3동 정보 | |
면적 (천호제3동) | 0.79km² |
세대 (천호제3동, 2012.12.31. 기준) | 12,387 |
인구 (천호제3동, 2022년 2월 기준) | 26,489 |
법정동 (천호제3동) | 천호동 |
통 (천호제3동) | 30 |
반 (천호제3동) | 283 |
동주민센터 (천호제3동) | 서울특별시 강동구 진황도로23길 7 |
홈페이지 (천호제3동) | 강동구 천호3동 주민센터 |
![]() |
2. 역사적 배경
천호동은 2017년 현재 강동구에서 가장 번화한 주거 지역으로, 굽은다리가 있는 곡교리로 불리다가 오랜 마을이 많았던 동네라는 의미에서 '즈믄개의 문짝집'이라는 뜻의 천호(千戶)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풍수지리에 기반하였다거나 하칭이었다는 이설들도 있다.[7] 천호(千戶)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거주하기에 이상적인 곳으로 여겨져 "천 개의 집"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2. 1. 백제 시대
풍납토성(북위례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높낮은 언덕과 구릉이었으며 한강을 끼고 있어 농사와 수렵이 용이해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성을 축조하여 고구려와 말갈의 침략으로부터 풍납토성의 동북쪽을 지키는 방어선으로 쓰였으며, 한강의 범람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서 마을이 형성되기 좋은 환경이었다.2. 2. 고려-조선 시대
고려-조선 시대에 천호동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의 한 나루터 마을로서 암사동과 인접하여 발전하였다. 당말, 토말, 굽은다리 등 자연마을이 언덕과 구릉 위에 형성되어, 한양과 수운이 오가는 나루터와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참이 발달하였다. 또한 일대 농작물 생산이 용이하여 도읍과 가까운 마을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한양의 5개 나루터는 송파진, 양화진, 광진, 마포진, 노량진이었다.[7]2. 3. 일제강점기
1902년 대한제국이 우정국 주소사업으로 당말, 벽동말, 차재말, 별북망대 등 마을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曲橋里)로 합쳤다.[7] 1936년 일제가 한강 근처 양진나루(지금의 광장동)와 광진나루(지금의 천호동)를 잇는 광진교를 건설하면서 "한강철교", "한강대교" 다음으로 건설된 다리라 하여 "광진교"라 명명했다. 이후 현대식 도로인 구천면로를 설치하게 되어, 천호동은 이 당시 서울 남쪽에서 가장 발전하게 되었다.2. 4. 현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천호동으로 바뀌었고[8], 1975년 10월 1일 성동구에서 분리된 강남구에 편입되었다.[9] 1979년 10월 1일 강남구에서 다시 강동구로 분리되었다.[10]1970년대에는 천호1동, 천호2동, 천호3동, 천호4동으로 분할 관리되었으나, 2005년 이후 천호4동이 천호2동과 천호3동으로 분할 편입되어 현재는 3개의 행정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천호동은 현재까지 강동구에서 인구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번화한 지역이다.
천호역은 서울 지하철 5호선과 서울 지하철 8호선의 환승역이며, 현대백화점 등 대형 백화점이 있는 강동구의 유일한 지역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로 60분 거리에 있다.
대한민국에서 매춘은 불법이지만, 천호동에는 "텍사스촌"으로 알려진 오래된 사창가가 존재한다.[4] 2004년 매춘 금지법 도입 이후 사창의 수는 감소했다.[5] 2018년 12월, 이 지역에 여전히 수십 개의 사창이 있었으며, 그 중 한 곳에서 발생한 화재로 여성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6]
3. 지명 유래
천호동(千戶洞)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곳이 거주하기에 이상적인 위치여서 "천 개의 집"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지역은 백제 시대 한강 변에 축조된 평지 토성인 풍납토성의 사적지이기도 하다.
3. 1. 정설
이 지역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동북쪽에 위치하며, 고덕산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과거 해발 40~70m의 산들이 있어 백제 초기 도읍 북쪽 지역을 방어하고, 이후 조선시대까지 한강의 범람으로부터 서민들을 지키는 마을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수운의 길목으로 강원, 충청의 좌로수참을 주관하는 요충지였고, 한양과 광주를 잇는 도진촌락(道津村落)으로 자연 발생하기 시작했다.[1]천호동(千戶洞)이라는 이름에 대한 여러가지 설은 다음과 같다.
- 고려, 조선시대 고유지명설(故有地名-說): 이 일대가 번화하여 조선시대 만 가구를 다루고 관리하는 군대 계급인 만호(萬戶)가 있었듯이, 그 만호 계급 아래 천 가구를 관리하던 천호(千戶) 정도의 가구가 사는 마을이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조선시대때 이미 구천면 곡교리(龜川面 曲橋里)라는 지명이 있었으므로 이 설은 믿기 어려우나, 천호리(千戶里) 라는 이름이 구천-곡교(龜川-曲橋)이라는 한자보다 쓰기 편해 그렇게 혼용되었다고 전한다.[1]
- 하칭설(下稱說): 일제강점기 때인 1934년 8월에 광진교를 착공하게 되는데, 이는 한강에서 두 번째 다리였고,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다리가 만들어진다. 1936년 10월에 압록강다리 다음으로 길고 멋진 철제 다리를 완공하게 되었는데, 도시설계와 토지측량을 들어간 일제에 의해 도로설계가 실시됨으로써 우연하게도 이곳의 지명이 도쿄시 가토구 가메이(東京市 江東区 亀戶)와 한자명이 같은 이유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 구천(龜川)/곡교(曲橋)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천호(千戶)라 하칭(下稱)하였으리라는 것이 유력설이다. 한간에서는 구천이라는 이름이 일본인 성씨와 같아 바꾸게 한 것은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1]
- 구청 자료: 광진교 준공식 때 주민대표로 뽑힌 고분다리(曲橋里)에 사는 최씨 노인이 준공식을 마치고 천호동 뒷산 북망지(北望地)에 올라가 광진교를 가득 메우고 건너오는 인파를 보고 “앞으로 이곳에 집이 천호(千戶)가 더 들어설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는 일화가 천호동으로 개명하게 된 사연이라고도 말하지만 확실치 않다.[1]
- 1960년대 초 역사학자의 설: 천호동의 토성이 있었던 일대를 백제 초기 도읍지 풍납토성의 동북측 뱀성(사성)으로 보았고, “남부여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 나라 시대의 한 성 마을의 양식과 보초소동과 함께 사람이 사는 집이 함께있는 성마을 모습이 혼재되어 있어 이를 본따 1000개의 문짝집, 천호라 지었다”는 설이 있다.[1]
3. 2. 기타 설
천호동(千戶洞)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고려, 조선시대 고유지명설: 이 지역이 번화하여 조선시대에 만 가구를 관리하는 군대 계급인 만호(萬戶) 아래, 천 가구를 관리하던 천호(千戶) 정도의 가구가 사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천호동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미 구천면 곡교리(龜川面 曲橋里)라는 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천호리(千戶里)라는 이름이 구천-곡교(龜川-曲橋)라는 한자보다 쓰기 편해서 혼용되었다고 전해진다.
- 하칭설(下稱說): 1936년 10월에 완공된 광진교는 한강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다리로,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광주를 연결했다. 도시설계와 토지측량을 실시한 일제가 도로 설계를 하면서, 이 지역의 지명이 동경시 강동구 구호(亀戶)와 한자명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구천(龜川)/곡교(曲橋)라는 이름을 없애고 천호(千戶)라고 하칭(下稱)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각에서는 구천이라는 이름이 일본인 성씨와 같아서 바꾸게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 구청 설: 광진교 준공식 때 주민 대표로 뽑힌 고분다리(曲橋里)에 사는 최씨 노인이 준공식을 마치고 천호동 뒷산 북망지(北望地)에 올라가 광진교를 가득 메우고 건너오는 인파를 보고 "앞으로 이곳에 집이 천호(千戶)가 더 들어설 것이다."라고 예언하여 천호동으로 개명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4. 옛 지명
굽은다리가 있는 곡교리로 불리다가 오랜 마을이 많았던 동네라는 뜻의 천호(千戶)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풍수지리에 기반하였다거나 하칭이었다거나 하는 다른 설들도 많다.[7]
1902년 대한제국이 우정국 주소사업으로 당말, 벽동말, 차재말, 별북망대 등 마을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曲橋里)로 합쳤다. 1936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한강 근처 양진나루(지금의 광장동)와 광진나루(지금의 천호동)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면서 "광진교"라 이름 지었다.
천호동(千戶洞)이라는 이름이 생기기까지, 삼국시대에는 백제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동북방향 지역으로, 풍납토성 동북쪽에서 고덕산 사이 지역이 현재 천호동 지역이다. 과거 해발 40~70m 산들이 위치해 백제 초기 도읍 북쪽 지역의 방어,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강의 범람으로부터 서민들을 지키는 지역마을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조선시대 때에는 수운의 길목으로서 강원, 충청의 좌로수참을 주관하는 요충지였고, 한양과 광주를 잇던 도진촌락(道津村落)으로 자연 발생하기 시작했다.
천호동의 옛 지명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들이 전해진다.
- 고려, 조선시대 고유지명설(故有地名-說): 이 일대가 번화해 조선시대 만 가구를 다루고 관리하는 군대 계급인 만호(萬戶)가 있었듯이, 그 만호 계급 아래 천 가구를 관리하던 천호(千戶) 정도의 가구가 사는 마을이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 이미 구천면 곡교리(龜川面 曲橋里)라는 지명이 있었으므로 이 설은 믿기 어려우나, 천호리(千戶里)라는 이름이 구천-곡교(龜川-曲橋)라는 한자보다 쓰기 편해 그렇게 혼용되었다고 전해진다.
- 하칭설(下稱說): 1934년 8월에 광진교를 착공하게 되는데, 이는 한강에서 두 번째 교량이었고,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다리가 만들어진다. 1936년 10월에 압록강다리 다음으로 길고 멋진 철제 다리를 완공하게 되었는데, 도시설계와 토지측량을 들어간 일제에 의해 도로설계가 실시됨으로써 우연하게도 이곳의 지명이 도쿄시 가토구 가메이도(東京市 江東区 亀戶)와 한자명이 같은 이유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 구천(龜川)/곡교(曲橋)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천호(千戶)라 하칭(下稱)하였으리라는 것이 유력설이다.
- 구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광진교 준공식 때 주민대표로 뽑힌 고분다리(曲橋里)에 사는 최씨 노인이 준공식을 마치고 천호동 뒷산 북망지(北望地)에 올라가 광진교를 가득 메우고 건너오는 인파를 보고 “앞으로 이곳에 집이 천호(千戶)가 더 들어설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는 일화가 천호동으로 개명하게 된 사연이라고도 말하지만 확실치 않다.
- 1960년대 초 역사학자가 주장한 설: 천호동의 토성이 있었던 일대를 백제 초기 도읍지 풍납토성의 동북측 뱀성(사성)으로 보았고, “남부여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 나라 시대의 한 성 마을의 양식과 보초소동과 함께 사람이 사는 집이 함께있는 성마을 모습이 혼재되어 있어 이를 본따 1000개의 문짝집, 천호라 지었다”는 설이 있다.
천호동에는 다음과 같은 옛 지명들이 있었다.
- 고분다리(曲橋里): 옛날에 구부러진 다리가 있던 마을이라서 곡교리라고도 불린다. 여러 마을 한가운데 놓여져 있어 가운뎃말이라고도 일컬어졌으며 이곳으로부터 시장이 번화했으며 조선시대부터 역참이 있고, 면치가 있던 작은 장터였다. (고분다리 시장~ 천호동시장길) 한자로 곡교리(曲橋里)라고 표기하고 있으니 표준어로 굽은다리가 된 것이다.
- 갯갓말: 다니는 언덕길이 경사가 심하여 비탈길이라 하고 이름이 갯갓말, 혹은 까까-말 개-깐말이라 하였다.
- 당말: 고분다리 시장 뒤 언덕 마을. 신당이 있으므로 당마을 또는 당촌(堂村)이라 한다.
- 사택말 (사택길, 촌): 지금의 한신아파트와 동아아파트 사이에 있던 네개의 못(四澤) 옆 마을을 일컬어 사택촌이라고 하였다 (구 암사시장 입구 뒤)
- 차재말: 배를 타기 전 수레(차)가 물건을 싣거나 내려놓았다 - 차재(車載)하는 언덕마을이라는 뜻이다.
- 벽동말: 벽오동나무가 있어서 벽동마을 또는 벽동촌(碧桐村)이라 불리었다.
- 은호대: 오래전 조선시대 때 포졸이 지키던 숨겨진 소초 은호(隱護)가 있었던 뜰이라 전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 토말: 천호삼성아파트 동쪽 부근에 있었던 마을로 추정된다.
- 십자성 마을: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조성한 마을, 월남전 파병을 다녀온 군인들의 노고를 치하, 그들의 거주권을 위하여 벽동마을(천호동)과 원터골(명일동) 사이 남측 벌판에 마을을 조성, 이 이름을 동남아시아의 상징이자, 월남(베트남)에서 비추이는 별인, 남십자성을 보고 온 군인의 마을이라 하여 "십자성 마을" 이라 지었다.
- 천사 마을: 1970년대 이후 파이롯트 공장도 설립이 되고 뚝방이 생김에 따라 기존 한강 배후 습지에 주거지가 형성이 된다. 이후 1990년 주민자치일환으로 이름을 지어 천호4동의 마을이며, 축약음이 천사와 같은 이름이라 하여 "천사 마을(天使-)" 이라 지었다. (지금 천호제일교회~강동 초등학교 일원)
- 장미 마을: 1980대 이후 한강 안쪽 뚝방이 생기면서 천호2동 주민자치의 일환으로 골목에 장미꽃길과 보조대를 설치하여 일대를 장미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금은물: 당말 아래, 동신중학교 부근으로 추정, 물이 흐른 작은 개울, 실개천으로 추정한다.
- 봐지개울: 천호동과 명일동 사이에서 흐르던 개울, 성내천으로 흘러들어갔던 지류 중에 하나다.
- 토산개울: 지금의 우성아파트 근처의 작은 개울, 흙산개울이라고도 한다. 한강 백사장을 지나 바로 유입이 되었다고 한다.
- 기와집골: 마을에서 보기 드문 귀한 기와집이 족고개 지나 웃길나들이 골짜기에 있어서 이곳을 기와죽골 또는 개죽골이라 불렀다.
- 족고개: 광나루로 한양 나들이 갈 때 넘어야 하는 곳으로 불리었으며 지금의 부성한약국 위쪽 고개를 말한다.
- 감골: 감나무가 많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대추골: 우성아파트 북동쪽 내리막길에 있다.
- 당산재: 당말 남측의 중간 고개.
- 구름고개: 동신중학교 옆 구름이 모이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
- 미나리깡: (사택골 옆) 미나리밭이라 하여 미나리깡이라 불리었다.
- 왜골: 지금의 주홍빌딩 안쪽 고개인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자주 넘는다 하여 "왜고개" 라고도 했다.(천호중 북서쪽)
- 천호동 문구거리: 과거 너른나루(광진)의 기록소 터가 있어, 이를 기록하기 위해 먹, 종이 등의 물품을 대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 광나루: 일명 너른나루 또는 광진. 현재 광진교가 있는 지점에서 암사동에 이르는 일대의 명칭으로서, 남쪽 선착장을 광나루, 북쪽 선착장을 양나루라고 불렀었다.
- 구천면길: 조선시대에 말길로 추정되며, 과거의 광진나루(광진교)~ 명일동~ 하남~ 북 광주군으로 가던 옛길이다. 일제강점기에 천호동 방향으로 도로개설공사가 이루어졌다.
- 북망대(北望臺): 천호동 뒷산, 동아재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산 위에 북망지가 있어서 임금이 계시는 곳을 향해 절을 올렸다.
5. 행정 구역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천호동으로 바뀌었고[8], 1975년 10월 1일 성동구에서 분리된 강남구에 편입되었으며[9], 1979년 10월 1일 강남구에서 분리된 강동구에 편입되었다.[10]
1970년대 행정동은 천호1동, 천호2동, 천호3동, 천호4동으로 분할 관리하였으나 2005년 이후 천호4동을 2동과 3동으로 분할 편입함으로써 현재는 3개의 행정동으로 분할되어 있다.
법정동 | 행정동 |
---|---|
천호동 | 천호제1동 |
천호제2동 | |
천호제3동 |
6. 주요 시설
천호동은 강동구에서 현대백화점과 같은 대형 백화점이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7] 서울 지하철 5호선과 서울 지하철 8호선의 환승역인 천호역이 있으며, 인천국제공항까지 리무진 버스로 60분 거리에 있다.
6. 1. 문화 시설
- 해공도서관
- 천일 어린이 전용도서관
- CGV 천호
- 롯데시네마 강동
6. 2. 시장
시장 종류 |
---|
천호시장 |
고분다리 시장 |
광영 시장 |
6. 3. 공원
- 생태공원
- 천호동 공원
- 샛마을 근린공원
- 천호 어린이공원
6. 4. 역사 유적
백제 시대에는 풍납토성(북위례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높낮은 언덕과 구릉이었으며 한강을 끼고 있어 농사와 수렵이 용이해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말갈의 침략으로부터 풍납토성의 동북쪽을 지키는 방어선으로 쓰이는 사성이 축조되었으며 한강의 범람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서 마을이 형성되기 좋은 환경이었다.고려 ~ 조선 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의 한 나루터 마을로서 암사동과 인접하여 발전하게 되며 당말, 토말, 굽은다리 등 자연마을이 이 언덕과 구릉 위에 형성되어 한양과 수운이 오가는 나루터와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참이 발달하고, 일대 농작물 생산이 용이하여 도읍과 가까운 마을로 발전되었다. (조선시대 한양의 5개 나루터는 송파진, 양화진, 광진, 마포진, 노량진이었다.)
이 지역에는 선사유적지, 사성, 천호동 토성 등이 있다.
7. 교통
1936년 일제가 한강 근처 양진나루(지금의 광장동)와 광진나루(지금의 천호동)를 잇는 광진교를 건설하면서 "한강철교", "한강대교" 다음으로 "광진교"라 명명했다. 이후 현대식 도로인 구천면로가 설치되면서 천호동은 당시 서울 남쪽에서 가장 발전하게 되었다.[7]
5호선과 8호선의 환승역인 천호역이 있으며, 강동역이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천호동까지 리무진 버스로 60min 거리에 있다.
7. 1. 지하철
5호선 천호역과 강동역이 있으며, 8호선 천호역은 5호선과 8호선의 환승역이다.7. 2. 기타
천호(千戶)는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거주하기에 이상적인 곳으로 여겨져 "천 개의 집"을 의미한다. 또한, 이곳에는 백제 시대에 한강 변에 축조된 평지 토성인 풍납토성의 사적지가 있다. 천호동은 현대백화점과 같은 대형 백화점이 위치한 강동구의 유일한 지역이다. 천호역은 서울 지하철 5호선과 서울 지하철 8호선의 환승역이다. 천호동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로 60min 거리에 있다.8. 교육
천호동에는 다음과 같은 학교들이 있다.
- 초등학교: 서울강동초등학교, 서울천동초등학교, 서울천일초등학교, 서울천호초등학교, 서울신암초등학교
- 중학교: 성덕중학교, 천호중학교, 천일중학교, 동신중학교
- 고등학교: 성덕고등학교 (구 성덕여자상고 - 구 강동공고)
8. 1. 중학교
8. 2. 고등학교
성덕고등학교 (구 성덕여자상고 - 구 강동공고)8. 3. 초등학교
9. 윤락가 (텍사스촌)
대한민국에서는 매춘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천호동에는 "텍사스촌"으로 알려진 오래된 사창가가 존재한다.[4] 2004년 매춘 금지법 도입 이후 사창의 수는 감소했다.[5] 2018년 12월, 해당 지역에 여전히 수십 개의 사창이 있으며, 그 중 한 곳에서 발생한 화재로 여성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6]
참조
[1]
웹사이트
ko:천호동 (Cheonho-dong 千戶洞)
http://www.encyber.c[...]
Doosan Encyclopedia
2008-04-18
[2]
웹사이트
The origin of Cheonho-dong
https://archive.toda[...]
Gangdong District official site
2008-04-18
[3]
웹사이트
Less brothels, more prostitution
http://koreajoongang[...]
2019-02-01
[4]
웹사이트
"[Editorial] Prostitutes Have Human Rights Too"
http://english.donga[...]
2019-02-01
[5]
웹사이트
Korea's infamous red-light zone to fade into history
http://www.koreahera[...]
2019-02-01
[6]
웹사이트
Fire in dilapidated Seoul brothel kills 2
http://koreajoongang[...]
2019-02-01
[7]
웹사이트
천호동의 개요
https://web.archive.[...]
[8]
법률
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도·군·구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법률
1962-11-21
[9]
대통령령
대통령령 제7816호 구의증설및관할구역변경에관한규정
1975-09-23
[10]
대통령령
대통령령 제9630호 서울특별시은평구등7개구설치및구관할구역조정에관한규정
1979-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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