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청도관은 이원국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태권도 도장으로, 당수도, 가라테, 쿵푸 등 다양한 무술을 융합하여 기술 체계를 확립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설립된 무술 학교 중 송무관 다음으로 오래되었으며, 초기에는 흰색, 빨간색, 검은색의 띠 체계를 사용했다. 1955년 최홍희의 제안으로 '태권도' 명칭을 채택했으며, 이후 국기원과 대한태권도협회의 기반을 다졌다. 현재는 친목 단체로서 국기원 시스템을 따르며, 단증을 발급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청도관 | |
---|---|
개요 | |
이름 | 청도관 (靑濤館) |
로마자 표기 | Cheong Do Gwan |
주요 정보 | |
창립일 | 1944년경 |
국가 | 대한민국 |
창시자 | 이원국 |
주요 인물 | 이원국 이준구 엄운규 정용택 |
무술 | |
주요 무술 | 당수도 태권도 |
계승 정보 | |
모체 | (정보 없음) |
계승 | (정보 없음) |
2. 역사
이원국은 일제강점기에 택견, 가라테, 쿵푸 등 다양한 무술을 비밀리에 수련했다.[3] 일본 추오 대학에서 기친 후나코시에게 쇼토칸 가라테를 배우고, 중국과 오키나와현을 방문하여 무술 연구를 했다.[4] 해방 이후, 이원국은 한국 고유 무술을 복원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서울 안국동[3]에서 청도관(靑濤館, "푸른 물결 도장")을 설립했다. 청도관은 송무관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무술 학교였다.
초기 청도관의 띠 체계는 흰색, 빨간색, 검은색으로 구성되었으며, 당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심사는 6개월마다 두 급수씩 승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급수 | 색깔 |
---|---|
8급-5급 | 흰색 |
4급-1급 | 빨간색 |
1단-7단 | 검은색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원국에게 내무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이원국이 거절하자 그와 그의 제자 손덕성을 체포하기도 했다.[5] 이는 권위주의적인 이승만 정권의 횡포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한국 전쟁 직전, 이원국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그의 수제자 유웅준을 청도관 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유웅준은 북한을 지지하여 손덕성에게 관장직을 넘겨주었다. 이후 손덕성은 1959년 엄운규에게 청도관 관장직을 물려주었다.
1955년,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명칭을 제안했고, 다른 관장들은 점차 이 명칭을 수용했다. 1965년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KTA)가 출범하면서 모든 관에서 "태권도"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6]
엄운규는 국기원 회장을 역임하며 국기 태권도가 세계적인 무술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현대 태권도 자유 대련 규칙 제정에 기여하고,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국기원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6]
강서중은 이원국 문하에서 당수도/공수도를 수련한 청도관 최초의 검은띠 졸업생이다. 1953년 국무관을 창설하고, 대한민국 육군 지휘 사범 등을 역임했다. 1969년 미국으로 건너가 도장을 설립하고, 미국 태권도 협회(ATA)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6]
2. 1. 설립 배경
이원국은 서울 안국동[3]에서 택견을, 오키나와현에서 가라테를, 중국 허난성과 상하이의 수련관에서 쿵푸를 배웠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의 전통 무술이 억압받았기 때문에, 이원국은 비밀리에 무술을 수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원국의 제자인 정용택은 "그가 처음 수련을 시작했을 때, 발각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 때문에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3]이원국은 일본 추오 대학에서 기친 후나코시 스승 밑에서 쇼토칸 가라테 4단 단을 받았다. 또한 무술 기술, 역사 및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과 오키나와현을 방문했다. 이원국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한국식 당수도, 가라테, 쿵푸의 주요 차이점은 급소를 어떻게 사용하고 공격하느냐에 있었다.[4]
이원국은 해방 이후 한국 고유 무술을 복원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청도관(靑濤館|푸른 물결 도장중국어)을 설립하였다. 청도관은 일제강점기 이후 설립된 무술 학교, 즉 "관"들 중 송무관 다음으로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
청도관의 띠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
급수 | 색깔 |
---|---|
8급-5급 | 흰색 |
4급-1급 | 빨간색 |
1단-7단 | 검은색 |
심사는 6개월마다 진행되었고, 학생들은 시험마다 두 급수를 뛰어넘었다(예: 8급에서 6급). 그 이유는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가난하여 빈번한 심사를 치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2. 2. 초기 발전 (1944-1955)
이원국은 서울 안국동[3]에서 택견을, 오키나와현에서 가라테를, 중국 허난성과 상하이의 수련관에서 쿵푸를 배웠다. 일본 추오 대학에서 기친 후나코시 스승 밑에서 수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원국은 한국식 당수도, 가라테, 쿵푸의 주요 차이점을 급소 사용 및 공격 방법에 있다고 보았다.[4]이원국은 이러한 다양한 무술을 융합하여 청도관(靑濤館, "푸른 물결 도장")의 초기 기술 체계를 확립하였다. 초기 청도관의 띠 체계는 흰색(8급-5급), 빨간색(4급-1급), 검은색(1단에서 7단)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가난하여 빈번한 심사를 치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심사는 6개월마다 진행되었고 학생들은 시험마다 두 급수씩 승급했다(예: 8급에서 6급).
청도관은 한국에서 최초로 개관한 관이었으며, 법학을 전공한 이원국은 한국 경찰학교의 교사로 임명되어 초기 제자들 중 상당수가 경찰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원국에게 내무부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이원국이 이를 거절하자 이승만은 이원국[5]과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손덕성을 체포했다. 이는 권위주의적인 이승만 정권의 횡포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석방 후, 이원국과 그의 가족은 한국 전쟁 직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원국은 한국을 떠나기 전 그의 수제자인 유웅준을 청도관 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유웅준은 북한을 지지하게 되었고, 결국 그 자리는 손덕성에게 돌아갔다. 손덕성은 1959년 엄운규에게 청도관 관장직을 물려주었다. 엄운규는 국기원 (세계 태권도 본부)의 원장도 역임했다.
2. 3. 태권도 통합 과정 (1955-1965)
1955년,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명칭을 제안하였다. 다른 관장들은 이 명칭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당시 각 관에서는 가라테의 역사적 명칭 두 가지를 한국어로 발음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당수도(唐手道, Karate; 중국 손길의 길)'는 청도관, 무덕관, 송무관, 오도관(ITF 계열), 정도관에서 사용되었다.'공수도(空手道, Karate; 빈 손길의 길)'는 조선 연무관 권법 공수도 부(이후 지도관)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지도관, 창무관, 한무관에서 사용되었다. 강덕원은 당수 또는 공수 대신 "무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당시 오도관과 청도관의 관장이었던 최홍희 장군은 '태권도'라는 명칭을 즉시 채택했다.
1965년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KTA) 산하 공식 명칭이 되면서 모든 관에서 '태권도'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2. 4. 발전과 분화 (1965-현재)
1965년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KTA)가 출범하면서 모든 관에서 "태권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6]엄운규는 이원국, 유웅준, 손덕성에 이어 청도관의 네 번째 관장이었다. 김운용의 뒤를 이어 국기원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엄운규는 기술 능력 때문에 "밀어 차기 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현대 태권도 자유 대련 규칙 제정에 기여하고,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국기원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이원국의 초기 제자인 엄운규는 국기원 회장으로서 국기 태권도가 세계 최고의 무술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으며, 한국 태권도 및 청도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17년 6월 10일 사망했다.
강서중은 1938년 유도, 수박도를 시작으로 이원국 문하에서 당수도/공수도를 수련한 청도관 최초의 검은띠 졸업생이다. 1953년 국무관을 창설하고, 1957년부터 1969년까지 중앙정보부 수석 사범, 1960년부터 1968년까지 대한민국 육군 지휘 사범을 역임했다.
1969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브루클린에 도장을 설립한 강서중은 강력한 힘, 격파 기술, 창헌 품새 지식으로 유명했다.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미국 태권도 협회(ATA)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6] 이원국은 강서중을 10단 검은띠로 승급시켰는데, 이는 청도관 원년 멤버 중 최초였다.
강서중은 전미 태권도 연맹(AATF)과 세계 태권도 청도관 연맹 회장을 맡고 있으며, 뉴욕과 푸에르토리코에 도장을 두고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와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태권도 클럽을 설립했다. 2009년 4월 태권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주요 인물
청도관 발전에 기여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정용택: 1921년 서울 출생. 일제강점기에 이원국에게 당수도를 배웠다.[5] 강인함과 용기로 유명했으며, 이원국의 최고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일본에서 한국 외 최초의 청도관 분관을 열었고, 전일본태권도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74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태권도를 전파, 1984년 9단 승단을 받았다. 2006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5]
- 존 리: 청도관 졸업생.[7] 최홍희의 요청으로 미국에 창헌 오도관 형을 소개해 태권도가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8]
- 박해만: 1949년 서울 YMCA에서 무술을 시작했다.[9] 한국 전쟁 참전 후 엄운규에게 배우며 1954년 1단 승급. 1962년 청와대 경호원 수석 태권도 사범이 되어 18년간 근무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태권도 대표 대통령 경호원이었다.[9] 현재 세계 청도관 협회 회장이다.[9]
- 이규석: 아시아 태권도 연맹 수석 부회장[5]
3. 1. 이원국
이원국은 서울 안국동[3]에서 택견을, 오키나와현에서 가라테를, 중국 허난성과 상하이의 수련관에서 쿵푸를 배웠다. 일본 추오 대학에서 기친 후나코시 스승 밑에서 수련했으며, 쇼토칸 가라테에서 4단 단을 받았다.[4] 이원국의 제자인 정용택에 따르면 "그가 처음 수련을 시작했을 때, 발각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 때문에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이 저자에게 말했기 때문에, 그는 십 대 시절에 비밀리에 수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이원국은 무술 기술, 역사 및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과 오키나와현을 방문했다. 이원국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한국식 당수도, 가라테, 쿵푸의 주요 차이점은 급소를 어떻게 사용하고 공격하느냐에 있었다.[4]
이원국 아래 청도관의 띠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
띠 색깔 | 급수/단수 |
---|---|
흰색 | 8급-5급 |
빨간색 | 4급-1급 |
검은색 | 1단-7단 |
심사는 6개월마다 진행되었고, 학생들은 시험마다 두 급수를 뛰어넘었다(예: 8급에서 6급). 그 이유는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가난하여 빈번한 심사를 치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도관은 한국에서 최초로 개관한 관이었다. 이원국은 법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한국 경찰학교의 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초기 제자들 중 상당수가 경찰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후에 이원국에게 내무부 장관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원국이 정중히 거절하자 이승만은 이원국[5]과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손덕성을 체포했다. 석방된 후 이원국과 그의 가족은 한국 전쟁 직전 일본으로 이주했다. 이원국은 한국을 떠나기 전 그의 수제자인 유웅준을 청도관 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유웅준은 대신 북한을 지지하게 되었고, 결국 그 자리는 손덕성에게 돌아갔다.
3. 2. 엄운규
손덕성에 이어 청도관 4대 관장이 된 엄운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로 "밀어 차기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 기술로 약 3.05m 떨어진 곳에서 상대를 찰 수 있었다고 한다.[5]엄운규는 현대 태권도 자유 대련 규칙 제정에 기여했으며, 현대 태권도 형성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대한민국 군 특별 강사였으며,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국기원 형성과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원국의 초기 제자 중 한 명인 엄운규는 태권도 초창기와 연결된다. 청도관 관장이자 국기원 회장으로서, 그는 국기 태권도가 세계 최고 무술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데 필요한 힘, 예절, 높은 기술, 매너, 도(道)를 수십 년간 유지하도록 했다. 그는 한국 태권도와 청도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엄운규는 2017년 6월 10일에 사망했다.
3. 3. 강서중
강서중은 1938년 유도, 수박도를 시작으로 이원국(청도관 창시자) 문하에서 당수도/공수도를 수련했으며, 청도관 최초의 검은띠 졸업생이다.[6] 1953년 그는 태권도 유파를 창설하고 국무관으로 명명했다. 1957년부터 1969년까지 한국군 정보기관으로 알려진 중앙정보부의 수석 사범을, 1960년부터 1968년까지는 대한민국 육군의 지휘 사범을 역임했다.1969년, 강서중은 8단 검은띠를 소지한 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브루클린에 태권도 도장을 설립했다.[6] 그는 강력한 힘, 격파 기술, 창헌(Chang Hon) 품새에 대한 뛰어난 지식으로 유명했다.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미국 태권도 협회(ATA)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6] 그러나 이행웅(ATA 공동 창립자)이 그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1978년 H.U. 리에 의한 ATA의 정치적 장악 때문에 그의 이름은 ATA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원국은 사망하기 전 강서중을 10단 검은띠로 승급시켰는데, 이는 청도관 원년 멤버 중 최초였다.
오늘날 89세의 강서중은 여전히 가르치고 있으며, 전미 태권도 연맹(AATF)과 세계 태권도 청도관 연맹의 회장을 맡고 있다. 그의 태권도 시스템은 세 아들 모두가 사범이 되어 자신만의 도장과 조직을 운영하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강 태권도 시스템은 뉴욕 대도시 지역과 푸에르토리코에 도장을 두고 있으며,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와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태권도 클럽을 설립했다.
2009년 4월, 강서중은 태권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4. 정용택
鄭容澤|정용택일본어은 1921년 3월 3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존경받는 지식인 계층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모든 것을 잃었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5] 어릴 때부터 무술에 관심을 가졌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무술을 공개적으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이 불법이었다. 19세가 되어서야 이원국 선생의 지도로 당수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무술 훈련이 합법화된 후 정용택은 후기 청도관 제자들 사이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무용담 때문에 거의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강인함과 용기로 유명했다. 이원국 선생의 최고 제자 중 한 명으로 남았으며, 평생 스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5]이원국 선생이 은퇴하여 일본으로 이주한 후, 정용택은 곧 스승을 따라 도쿄에 정착하여 한국 외에 최초의 청도관 분관을 열었다. 1955년 청도관은 (모든 한국 무술 학교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 무술 커리큘럼에 "태권도"라는 이름을 채택했고, 정용택 사범은 전일본태권도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도쿄 무술계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1959년, 도쿄에 머물면서 권위 있는 마스터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5]
1974년, 전문 지식을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로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도쿄와 캔자스시티에 머무는 동안 스승 이원국 선생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방문을 받았다. 1984년 이러한 방문 중 한 번에 정용택은 9단 승단을 받았다. 1988년 은퇴하여 학교를 제자들에게 넘겨주고 캘리포니아주 가든그로브로 이주했다. 하지만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며 은퇴 후 19년 동안 제자, 사범, 사범들을 도와 청도관 전통을 이어갔다. 2006년 11월 11일 캘리포니아주 폰테인밸리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5]
3. 5. 존 리 (Jhoon Rhee)
존 리는 청도관 졸업생이었다.[7] 따라서 청도관은 리가 미국인들에게 처음 가르친 것과 자주 연관된다. 리는 미국인들에게 형으로 불리는 창헌 오도관 형을 소개했는데, 이는 최홍희, 남태희, 한차교, 공영일, 최창근, 김복만, 박정태에 의해 개발되었으며[8] 오늘날 고 최홍희의 ITF (천지, 단군, 도산, 원효, 율곡, 중근, 퇴계, 화랑, 충무, 광개)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는 태권도가 일본 형으로는 할 수 없는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를 원했던 최홍희의 권유로 이 일을 했다. 존 리는 최홍희가 보낸 대한민국 육군 야전 교범에서 창헌 형을 배웠다고 말한다. 창헌 형 세트는 존 리 계보에서 나온 독립적인 미국 태권도 사범들에 의해 여전히 가르쳐지고 있다. 1970-1971년 리는 오하라 출판사를 통해 5권으로 된 창헌 형 시리즈를 출판했다. 원래 ATA조차도 1980년대까지 창헌 형을 사용했으며, 오늘날에도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과 사용하는 형이 청도관/창헌의 영향을 받는 수십 개의 사설 미국 태권도 단체가 있다. 이러한 단체에는 ITF, 미국 태권도 연맹(USTF), 미국 전국 태권도 연맹(NTFA), 미국 가라테 및 태권도 기구(AKATO), 미국 가라테 검은띠 협회(AKBBA), 전국 진보 태권도 협회(NPTA) 등이 있다.3. 6. 박해만
박해만은 1949년 서울 YMCA에서 시범을 본 후 무술을 시작했다. 시범을 본 후, 아버지에게 윤병인 문하의 YMCA 권법부에 들어가도 되는지 물었고, 아버지는 이를 승낙했다.[9] 박해만은 한국 전쟁 발발 전 6개월 동안 윤병인에게 무술을 배웠으며, 무술 훈련을 받기 전에는 체조 선수로 활동했다.[9] 한국 전쟁 중에는 대한민국 육군 통신대에 배속되어 엄운규와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다.[9] 한국 전쟁 이후 엄운규에게서 배우며 1954년 마침내 1단으로 승급했다.[9] 1955년 서울대학교에서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고, 1962년 청와대 경호원 수석 태권도 사범이 되었다.[9] 청와대에서 18년 동안 가르쳤다.[9]대한민국이 처음 공화국이 되었을 때, 초대 대통령 박정희는 최고의 무술가 6명에게 가장 뛰어난 전사를 보내 경호원으로 삼도록 지시했고, 박해만 사범은 태권도를 대표하여 선발되었다.[9] 그는 오랫동안 대통령 경호원으로 청와대에 머물렀다.[9] 현재 세계 청도관 협회 회장이며,[9] 이 협회는 1944년, 이 무술의 공식 명칭이 정해지기 전에 시작된 가장 오래된 태권도 학교이다.[9] 현재 박해만은 은퇴했지만, 전 세계를 다니며 태권도 기준을 갱신하고 있다.[9]
박해만의 주목할 만한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9]
- 최초의 비한국인 9단: 에드워드 B. 셀 사범[9]
- 최초의 여성 청도관 9단이자 최초의 미국 태생 국기원 9단: 브렌다 셀 사범[10][11]
- 마사 태권도의 프랭크 마사
- 세계 태권도 협회의 셰이머스 오닐
- 빅토리 태권도 청도관 협회의 회장이자 설립자: 매니 소사 사범
박해만 사범에 의해 고위 랭크로 승단한 다른 사람으로는 영국 청도관의 마크 아일스 사범(9단), 앤디 데이비스 사범(9단) 및 데이비드 맥골드릭 사범(9단),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아리스티데스 몬탈보 산티아고 사범(9단) 등이 있다.[9]
3. 7. 기타 주요 인물
- '''신현옥''' - 연합 청도관[5]
- '''이규석''' - 아시아 태권도 연맹 수석 부회장[5]
4. 기술 및 철학
청도관의 기술과 철학은 초창기부터 기본기 연마, 강력한 기술 개발, 정확한 기술 적용, 강력한 발차기, 예절 및 에티켓에 대한 깊은 이해에 중점을 두었다.[4] 대표적인 기술은 옆차기, 뛰어 옆차기, 미는 옆차기이지만, 청도관의 원칙에 따라 다른 많은 기술도 연습한다. 이원국은 제자들이 명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했으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만 제자로 받아들였다. 또한 청도관 학생으로서 명예로운 삶을 살도록 장려했는데, 이는 한때 한국 무술이 가졌던 좋은 평판을 회복하고 태권도 학생들이 문제아라는 인식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청도관의 철학은 태권도가 자기 방어, 자기 계발, 그리고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청도관 부회장(퇴임) 박해만은 오늘날 청도관이 국기원 시스템의 커리큘럼을 100% 지지하는 사회적 친목 클럽이며, 국기원 태권도가 청도관 태권도이고, 청도관과 다른 8개 관의 옛 시스템에서 발전했다고 언급한다.[7]
청도관 회원들은 다음의 회원 선서를 따른다.
- 우리 회원들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정신과 몸을 수련한다.
- 우리 회원들은 상호 우애로 단결한다.
- 우리 회원들은 규정을 준수하고 사범의 지시에 따른다.
이원국은 학생들이 청도관 회원이 되기 전에 예비 회원들에게 청도관 회원 선서를 읽게 하고 선서를 준수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오늘날 일부 청도관 관련 학교에서는 수업 시작 전과 종료 후에 회원들에게 회원 선서를 낭독하게 한다.
4. 1. 기술적 특징
초기 청도관의 기술 체계는 가라테, 쿵푸 등의 영향을 받았다. 이원국은 일본 추오 대학에서 기친 후나코시 스승 밑에서 쇼토칸 가라테를 수련했고, 중국과 오키나와현을 방문하여 무술 기술, 역사 및 철학을 연구했다.[4]청도관의 대표적인 기술은 옆차기, 뛰어 옆차기, 미는 옆차기이다. 하지만, 청도관의 원칙에 따라 다른 많은 기술도 연습한다.
초기 청도관의 띠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 흰색(8급-5급), 빨간색(4급-1급) 및 검은색(1단에서 7단). 심사는 6개월마다 진행되었고, 학생들은 시험마다 두 급수를 뛰어넘었다(예: 8급에서 6급).[3]
청도관은 초창기부터 기본기 연마, 강력한 기술 개발, 정확한 기술 적용, 강력한 발차기, 그리고 예절과 에티켓에 대한 깊은 이해에 중점을 두었다.
오늘날 청도관은 국기원 시스템의 커리큘럼을 따르고 있다. 청도관 부회장(퇴임) 박해만은 국기원 태권도가 청도관 태권도이며, 청도관과 다른 8개 관의 옛 시스템에서 발전했다고 언급한다.[7] 엄운규(전 국기원 원장)에 따르면, 현재 청도관은 국기원의 완전한 커리큘럼을 따른다고 한다.
일부 오래된 청도관 계열 도장에서는 이원국이 쇼토칸 가라테에서 도입한 오리지널 ''평안(Pyong-Ahn)'' 품새를 수련한다. (평안 품새는 오키나와에서 유래되었으며, 이곳에서는 ''Pinan''이라고 불린다. 일본에서는 이 품새를 ''헤이안''이라고 부른다.)
손덕성이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세계 태권도 협회를 설립한 후 그의 계보를 잇는 도장들은 국무 품새도 수련한다. 다른 오래된 청도관 도장에서는 팔괘 품새를 수련하는데, 이는 태극 품새의 전신이다. 국기원 시스템의 유단자들은 검은띠를 딴 후 국기원의 유단자 및 고단자 품새(고려, 금강, 태백, 평원, 십진, 지태, 천권, 한수, 일여)를 수련한다.
많은 청도관 도장에서는 국제 태권도 연맹(ITF)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창헌류 품새를 수련하기도 한다. 존 리는 청도관 졸업생으로, 최홍희의 권유로 미국인들에게 창헌 오도관 형을 소개했다.[8]
4. 2. 철학적 특징
청도관의 철학은 태권도가 자기 방어, 자기 계발, 그리고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초창기부터 기본기 연마, 강력한 기술 개발, 정확한 기술 적용, 강력한 발차기, 그리고 예절과 에티켓에 대한 깊은 이해에 중점을 두었다.[4] 이원국은 처음부터 제자들이 명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했으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만 제자로 받아들였고, 청도관 학생으로서 명예로운 삶을 살도록 장려했다. 이는 한때 한국 무술이 가졌던 좋은 평판을 회복하고, 태권도 학생들이 문제아라는 인식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이었다.청도관 회원들은 다음의 회원 선서를 따른다.
- 우리 회원들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정신과 몸을 수련한다.
- 우리 회원들은 상호 우애로 단결한다.
- 우리 회원들은 규정을 준수하고 사범의 지시에 따른다.
학생들은 청도관 회원이 되기 전에, 이원국은 예비 회원들에게 청도관 회원 선서를 읽게 하고 선서를 준수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오늘날, 일부 청도관 관련 학교에서는 각 수업 시작 전과 종료 후에 회원들에게 회원 선서를 낭독하게 한다.
청도관 로고는 주먹을 쥔 손(육체적 힘을 상징)이 두루마리를 잡고 있는 한국의 음/양 기호(학문을 상징)를 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청도관 학생들이 삶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균형이다. 두루마리의 양쪽 끝에는 "청도(Chung Do)"를 나타내는 한국 한글 문자가 있다. ''공식 청도관'' 로고에는 "청도관(靑濤館)"의 한자가 포함되어 있다.
5. 현대의 청도관
청도관은 여전히 한국에 존재하며 더 이상 무술 스타일이 아닌 친목 사교 클럽으로 기능하고 있다. 청도관은 대한태권도협회와 국기원의 기반을 형성한 송무관, 지동관, 창무관, 무덕관, 한무관, 정도관, 강덕원, 오도관과 같은 8개의 공인된 관 중 하나이다.[5]
5. 1. 친목 단체로서의 역할
청도관은 여전히 한국에 존재하며, 더 이상 무술 스타일이 아닌 친목 사교 클럽으로 기능하고 있다.[5] 청도관은 대한태권도협회와 국기원의 기반을 형성한 8개의 공인된 관(송무관, 지동관, 창무관, 무덕관, 한무관, 정도관, 강덕원, 오도관)중 하나이다.청도관은 여전히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세계 본부에서 단증 및 기타 종류의 증서를 발급한다. 청도관 회원들은 국기원 품증 및 단증도 받을 수 있다.
5. 2. 단증 발급
청도관은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세계 본부에서 단증 및 기타 종류의 증서를 발급한다.[1] 청도관 회원은 국기원 품증 및 단증도 받을 수 있다.[1]5. 3. 계승 및 발전
청도관은 현재 한국에서 무술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친목 사교 클럽으로 기능하고 있다. 청도관은 송무관, 지도관, 창무관, 무덕관, 한무관, 정도관, 강덕원, 오도관과 같은 8개의 공인된 다른 관들과 함께 대한태권도협회와 국기원의 기반을 형성했다.[1]청도관은 여전히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세계 본부에서 단증 및 기타 증서를 발급한다. 청도관 회원들은 국기원 품증 및 단증도 받을 수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Portions of The Modern History of TaeKwonDo
http://www.martialar[...]
[2]
서적
Chung Do Kwan
https://archive.org/[...]
Tuttle
[3]
웹사이트
Interview with Lee, Won Kyuk ''Accademia Italiana Tang Su Do''
http://www.tangsudo.[...]
[4]
웹사이트
Interview with Lee, Won Kyuk. ''Accademia Italiana Tang Su Do''
http://www.tangsudo.[...]
[5]
서적
Martial Arts in the Modern World
Praeger
[6]
웹사이트
About UsHistory
http://www.tkangtkd.[...]
[7]
논문
A Modern History of Tae Kwon Do
http://www.stanford.[...]
[8]
간행물
The Evolution of Tae Kwon Do Poomse, Hyung and Tul
http://www.raynersla[...]
2011-05-00
[9]
웹사이트
Martial Arts Biography – Edward B. Sell
https://web.archive.[...]
USA Dojo
2010-02-03
[10]
웹사이트
New Heights Fitness, Brenda J. Sell
https://web.archive.[...]
2018-01-01
[11]
웹사이트
US Chung Do Kwan Celebrates 50th Anniversary During National Championship in Daytona Beach
http://www.sportsdes[...]
Sports Destination Management
2018-01-01
[12]
서적
Chung Do Kwan
https://archive.org/[...]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