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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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만리는 해주 최씨 출신으로, 조선 세종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419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집현전 박사 등을 거쳐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고제도 연구에 몰두하여 《자치통감훈의》, 《정관정요주》 등을 저술했다. 그는 불교 배척과 유교 이념 수호를 위해 상소를 올렸으며, 1444년에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였다. 1444년 사직 후 낙향했으며, 사후 공혜라는 시호를 받았다.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훈민정음 창제 반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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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5년 사망 - 평원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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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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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최만리 |
원래 이름 | 崔萬理 |
자 (字) | 자명(子明) |
호 (號) | 강호산인(江湖散人) |
시호 (諡號) | 공혜(恭惠) |
본관 | 해주(海州) |
출생지 | 고려 풍해도 해주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안성군 |
사망일 | 1445년 10월 23일 |
정치 활동 | |
정당 | 무소속 |
직책 | 조선국 통정대부(朝鮮國 通政大夫) |
군주 | 조선 세종대왕 이도 |
섭정 | 영의정 황희, 왕세자 이향 |
임기 | 1431년 2월 15일 ~ 1444년 2월 29일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활동 시기 | 조선 세종대왕 시대 |
주요 활동 |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 |
학력 및 경력 | |
학력 | 1419년 생원시 합격, 1427년 문과 급제 |
경력 | 문신, 정치인, 사상가, 유학자, 법학자, 집현전 부제학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중화 양씨 부인 |
자녀 | 아들: 최각(崔塙), 최정(崔埥), 최당(崔塘), 최은(崔垠), 최연(崔堧), 딸: 최씨 |
부모 | 부: 최하(崔荷), 모: 충주 지씨 부인(지용수(池龍壽)의 딸) |
친인척 | 사위 이의석, 사돈 윤회, 외조부 지용수 |
2. 생애
1419년(세종 1년) 생원으로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집현전이 설치되자 정7품 집현전 박사를 거쳐 1427년 교리(校理)가 되었다. 교리 재직 중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 응교·직제학·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세종 9) 세자(훗날의 문종)가 조현(朝見)할 때 서장관겸검찰관(書狀官兼檢察官)이 되어 직제학 정인지 등과 함께 세자의 사부가 되어 주강(晝講)을 담당하였다. 집현전 응교, 우문학(右文學)을 겸하였고, 좌필선(左弼善) 정인지와 함께 세자에게 고금의 고사성어와 훌륭한 정치를 강론하였다.
집현전에서 고제도(古制度) 연구에 몰두하여, 고제도의 해석과 번역, 적용 등의 활동을 하였다. 오례(五禮)·시정(施政) 등 고제도의 연구와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고,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議》·《정관정요주 貞觀政要註》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세종 18)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초시 대독관(代讀官)이 되어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1437년 집현전 직제학, 1439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부제학이 되었다.
1438년 부제학, 1439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440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는데, 불교 배척 상소가 6회, 첨사원(詹事院) 설치 반대 상소가 3회로 대부분이었다.
세종대왕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관심을 보이자, 최만리는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임을 들어 왕실의 불교 지원을 비판하였다. 흥천사(興天寺) 사리각 중수 반대, 경찬회(慶讚會) 혁파와 불교 배척 상소 등 14차례 상소를 통해 유교 사상을 수호하고 엄격하게 적용하려 했다.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5] 상소의 주된 내용은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이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이두와 달리 언문(諺文)은 유익함이 없으며, 널리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점과 동궁이 언문 관련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했다. 상소를 올린 학자들의 대표격이었으며, 이로 인해 세종의 분노를 사서 처벌을 받았다.[5] 당시 시대적 배경은 명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성장하는 시기였으며, '명(明)을 중심으로 조선이 일본을 교화한다'는 조선 건국 이후의 문화 외교적 전통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일본에게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급해준 것에 대한 책임 추궁, 진사시험 출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며 사형의 남용에 반대하여 감형을 주장하는 등의 상소를 올려 시정하게 하였다.[1]
1444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1] 1445년 10월 23일 사망했다.[1]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1] 사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산3(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안장되었고, 부인 중화양씨와 합장되었다.[1] 묘소 근처에는 아버지 최하와 어머니 지씨 내외, 둘째 아들 예조좌랑 최정(崔埥)과 며느리 여흥이씨 내외의 묘소 등이 있고, 사당인 강호재가 세워졌다.[1] 신도비는 1962년 이숭녕이 짓고,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1]
2. 1. 가계 및 출신
본관은 해주이며, 자(字)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아버지는 최하(崔荷)이다. 해주 최씨의 시조이자 해동공자로 불리며 문헌공도와 사학12도를 세운 최충의 12대손이며, 고려 중기의 저명한 문인이자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의 6대손이다. 외할아버지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지용수이다.증조부는 최공(崔珙), 조부는 최안해(崔安海)이고, 아버지 최하(崔荷)는 예빈시윤을 역임하고 사후 증직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충주 지씨로 문하시랑을 지낸 지용수의 딸이다. 중화 양씨 판관 양미(楊美)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 형제와 딸 1명을 두었다. 딸은 덕수 이씨 이의석에게 출가하였다. 다섯째 아들 최연은 집현전 전한을 지냈는데, 그는 후일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최경창의 고조부이자,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의 9대조가 된다. 할아버지 최안해의 동생은 최안택인데, 그는 의병장 최경회의 5대 방조이며,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증외고조부가 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최경회의 7대조가 된다.
관계 | 이름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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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최하(崔荷|최하중국어) | 최충의 11대손 | |||||||||||||||||||||||||||||||||||||||
어머니 | 충주 지씨 지씨 부인 ({{lang|zh|충주 지씨|} | }) ||
고문 | 현대 한국어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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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조종 이래로 지성으로 사대하여 오로지 중화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지금 문자와 궤도가 같을 때에 언문을 창작하는 것은 보기에 놀랍습니다. 만약 언문이 모두 옛 글자를 본떠 만든 것이고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글자 모양은 비록 옛 전서를 모방했다 하더라도 음으로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과 어긋나니 실로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만약 중국에 유포된다면 혹 비난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어찌 사대하여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중국어 | 우리 왕조는 조상 이래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며, 오로지 중화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지금 문자가 같고 궤도가 같을 때 언문을 창작하는 것은 보기에 놀랍습니다. 만약 언문이 모두 옛 글자를 본떠 만든 것이고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글자 모양은 비록 옛 전서를 모방했을지라도 음으로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과 어긋나 실제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만약 중국에 유포된다면 혹 비난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어찌 사대하여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
예로부터 구주 안에서 풍토가 비록 다르더라도 방언 때문에 따로 문자를 만든 예는 없었습니다.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도 각각 그들만의 문자가 있지만,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므로 족히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전해지기를, 하(夏)나라의 문화를 사용하여 오랑캐를 변하게 한다고 하였지, 오랑캐의 풍속에 변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역대 중국은 모두 우리나라를 기자(箕子)의 유풍을 이은 나라로 여겨 문물과 예의가 중화와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언문을 별도로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는 것은 이른바 소합의 향기를 버리고 사마귀의 환약을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문명의 커다란 누(累)가 아니겠습니까?중국어 | 옛날부터 중국의 여러 지역 안에서 풍토가 비록 다르더라도, 방언 때문에 따로 문자를 만든 일은 없었습니다. 비록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과 같은 오랑캐들이 각기 그들만의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는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므로 족히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전하기를, 하의 문화를 사용하여 오랑캐를 변화시킨다고 했지, 오랑캐의 풍속으로 변화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역대 중국은 모두 우리나라를 기자의 유풍을 이은 나라로 여겨, 문물과 예의가 중화와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언문을 별도로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는 것은, 이른바 소합의 향기를 버리고 사마귀의 환약을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문명의 커다란 해(害)가 아니겠습니까? |
신라의 설총이 만든 이두는 비록 천하고 속되지만, 모두 중국에서 통용되는 글자를 빌려 말하는 데 도움을 주고 문자와는 본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아 비록 하찮은 아전이나 종, 노비의 무리들까지도 반드시 익히려고 했습니다. 먼저 수서(數書)를 읽어 대략 문자를 알고 난 뒤에 이두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두를 사용한 자는 반드시 문자에 의거해야만 뜻을 전달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이두를 통해 문자를 아는 자가 많았으니, 또한 학교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본래 문자를 알지 못하여 마치 끈으로 매듭을 짓던 시대와 같다면, 언문을 빌려 잠시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의견을 가진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차라리 언문을 사용하여 임시변통하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에서 통용되는 문자를 익혀 오래도록 사용할 계책을 세우는 것이 낫다."라고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두는 수천 년 동안 사용되었고, 문서나 기일(期日) 따위의 일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옛것을 고쳐 아무런 폐단이 없는 글자를 버리고, 쓸데없는 언문을 따로 창제하려 하는 것입니까? 만약 언문을 사용한다면, 아전들은 오로지 언문만 익히고 학문과 문자를 돌보지 않아 아전들이 둘로 갈라질 것입니다. 만약 아전이 언문으로 벼슬에 나아간다면, 후진들은 모두 그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여, "스물일곱 자의 언문만으로도 세상에 설 수 있는데, 어찌 마음을 썩이고 생각을 수고롭게 하여 성리학(性理學)을 궁구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수십 년 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질 것입니다. 비록 언문으로 아전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한다면, 배움을 등지고 담벼락을 쳐다보는 것과 같아 사리(事理)의 시비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언문에만 능숙하여 무엇에 쓰이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쌓아 온 문자를 숭상하는 풍습이 점점 쇠퇴할까 두렵습니다. 전에 이두는 비록 문자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식견 있는 자들이 오히려 천하게 여겨 이두를 한문으로 고치려 했는데, 더구나 언문은 문자와 전혀 관계없이, 오로지 속된 말만을 사용하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언문이 이전 왕조부터 있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문명한 정치에서 노(魯)나라가 도(道)를 변하게 한 뜻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오히려 이를 따르려 하겠습니까?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의논이 있을 것이니, 이는 명백히 알 수 있는 이치입니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통용되는 병통입니다. 지금 이 언문은 다만 새롭고 기이한 재주일 뿐, 학문에는 손해가 되고, 정치에는 이로움이 없습니다. 여러 번 생각해 보아도 가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중국어 | 신라의 설총이 만든 이두는 비록 천하고 속되지만, 모두 중국에서 통용되는 글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어 넣어, 문자와 본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아, 비록 미천한 아전이나 종, 노비의 무리들까지도 반드시 익히려고 했습니다. 먼저 수서(數書)를 읽어 대략 문자를 알고 난 뒤에 이두를 사용했으므로, 이두를 사용하는 자는 반드시 문자에 의거해야 뜻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두를 통해 문자를 아는 자가 많았으니, 이는 또한 학문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본래 문자를 알지 못하여, 마치 끈으로 매듭을 짓던 시대와 같다면, 언문을 빌려 잠시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의견을 가진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차라리 언문을 사용하여 임시변통하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에서 통용되는 문자를 익혀 오래도록 사용할 계책을 세우는 것이 낫다."라고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두는 수천 년 동안 사용되어 왔고, 문서나 기일 따위의 일에 아무런 폐단이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옛것을 고쳐 아무런 폐단이 없는 글자를 버리고, 쓸데없는 언문을 따로 창제하려 하는 것입니까? 만약 언문을 사용한다면, 아전들은 오로지 언문만 익히고 학문과 문자를 돌보지 않아, 아전들이 둘로 갈라질 것입니다. 만약 아전이 언문으로 벼슬에 나아간다면, 후진들은 모두 그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여, "스물일곱 자의 언문만으로도 세상에 설 수 있는데, 어찌 마음을 썩이고 생각을 수고롭게 하여 성리학을 궁구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수십 년 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질 것입니다. 비록 언문으로 아전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한다면, 배움을 등지고 담벼락을 쳐다보는 것과 같아 사리(事理)의 시비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언문에만 능숙하여 무엇에 쓰이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쌓아 온 문자를 숭상하는 풍습이 점점 쇠퇴할까 두렵습니다. 전에 이두는 비록 한자를 빌려 썼지만, 식견 있는 자들은 오히려 이를 천하게 여겨, 이를 한문으로 고치려 했습니다. 더구나 언문은 한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어찌 속되고 천한 언어를 사용하려 하는 것입니까? 만약 언문이 이전 왕조부터 있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문명한 정치에서 노나라가 도를 변하게 한 뜻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를 따르려 하겠습니까?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의논이 있을 것이니, 이는 명백히 알 수 있는 이치입니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통용되는 병통입니다. 지금 이 언문은 다만 새롭고 기이한 재주일 뿐, 학문에는 손해가 되고, 정치에는 이로움이 없습니다. 여러 번 생각해 보아도 가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
만약 형벌이나 옥사(獄事)의 문서를 이두로 쓴다면, 문리에 어두운 어리석은 백성들은 글자 한 자의 차이로 인해 혹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언문으로 곧바로 그 말을 적어 읽어 들려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모두 쉽게 알아들을 수 있어 억울함을 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억울함이 매우 많았으니, 이로써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 말하면, 옥졸(獄囚)이 이두를 해독할 수 있어 자백하는 글을 친히 읽어보고 그 내용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매를 맞는 것을 견디지 못해 억울하게 복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자백하는 글의 뜻을 알지 못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명백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언문을 쓴다 한들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형옥(刑獄)의 공정함이 공정하지 않음은 옥리의 처신에 달려 있는 것이지 말과 글이 같고 다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언문으로 옥사의 공정을 이루려 하는 것은 신 등이 보기에 불가합니다.중국어 | 만약 형벌이나 옥사의 문서를 이두로 쓴다면, 문리에 어두운 어리석은 백성들은 글자 한 자의 차이로 인해 혹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언문으로 곧바로 그 말을 적어 읽어 들려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모두 쉽게 알아들을 수 있어 억울함을 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 사이에 억울함이 매우 많았으니, 이로써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 말하면, 옥졸(獄囚)이 이두를 해독할 수 있어 자백하는 글을 친히 읽어보고 그 내용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매를 맞는 것을 견디지 못해 억울하게 복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자백하는 글의 뜻을 알지 못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명백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언문을 쓴다 한들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형옥의 공정함이 공정하지 않음은 옥리의 처신에 달려 있는 것이지, 말과 글이 같고 다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언문으로 옥사의 공정을 이루려 하는 것은 신 등이 보기에 불가합니다. |
옛 유학자는 말하기를 "무릇 모든 완구나 기호는 모두 뜻을 빼앗고, 서찰(書札)은 유학자에게 가장 가까운 일이지만, 한결같이 그것을 좋아하면 또한 스스로 뜻을 잃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동궁(東宮)께서는 비록 덕성이 이루어졌지만, 오히려 마땅히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쏟아 더욱 미치지 못하는 바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은 비록 이롭다고 하더라도, 특수한 문사(文士)의 육예(六藝) 중 하나일 뿐입니다. 더구나 만에 하나라도 치도(治道)에 이로운 점이 없는데도, 연구하고 정밀히 생각하며 날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실로 시의(時敏)한 학문에 손해가 됩니다. 신 등은 모두 문묵(文墨)의 변변치 못한 재주로 시종(侍從)의 죄를 짓고 있으나, 마음에 품은 바가 있어 감히 침묵하지 못하고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여 성총(聖聰)을 우러러 아뢰옵니다.중국어 | 옛 유학자는 말하기를 "무릇 모든 완구나 기호는 모두 뜻을 빼앗고, 서찰은 유학자에게 가장 가까운 일이지만, 한결같이 그것을 좋아하면 또한 스스로 뜻을 잃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동궁께서는 비록 덕성이 이루어졌지만, 오히려 마땅히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쏟아 더욱 미치지 못하는 바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은 비록 이롭다고 하더라도, 특수한 문사의 육예 중 하나일 뿐입니다. 더구나 만에 하나라도 치도에 이로운 점이 없는데도, 연구하고 정밀히 생각하며 날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실로 시의(時敏)한 학문에 손해가 됩니다. 신 등은 모두 문묵의 변변치 못한 재주로 시종의 죄를 짓고 있으나, 마음에 품은 바가 있어 감히 침묵하지 못하고 삼가 폐부를 다하여 성총을 우러러 아뢰옵니다. |
2. 5. 기타 상소 및 생애 후반
그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일본에게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급해준 것에 대한 책임 추궁 상소, 진사시험 출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며 사형의 남용에 반대하여 감형을 주장하는 등의 상소를 올려, 이를 시정하게 하였다.[1]1444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1] 1445년 10월 23일에 사망했다.[1]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1]
사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산3(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안장되었고, 부인 중화양씨와 합장되었다.[1] 묘소 근처에는 아버지 최하와 어머니 지씨 내외, 둘째아들 예조좌랑 최정(崔埥)과 며느리 여흥이씨 내외의 묘소 등이 있고, 사당인 강호재가 세워졌다.[1] 신도비는 1962년 이숭녕이 짓고,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1]
3. 저서
- 《자치통감훈의》
- 《정관정요주》
4. 가족 관계
아버지는 崔荷|최하중국어이며, 어머니는 충주 지씨로 지용수의 딸이다. 부인은 중화 양씨로 양미(楊美)의 딸이다.[6]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최하(崔荷) |
어머니 | 충주 지씨 |
외할아버지 | 지용수 |
동생 | 최만현(崔萬玹) |
장인 | 양미(楊美) |
부인 | 중화 양씨 |
첫째 아들 | 최각(崔塙) |
둘째 아들 | 최정(崔埥)[6] |
둘째 며느리 | 여흥 이씨 |
셋째 아들 | 최당(崔塘) |
넷째 아들 | 최은(崔垠) |
다섯째 아들 | 최연(崔堧) |
딸 | 해주 최씨 |
다섯째 아들 최연은 집현전 전한을 지냈으며, 삼당시인 최경창의 증조부이자 최규서의 7대조가 된다. 딸은 덕수 이씨 이의석에게 출가하였다.
5. 평가
최만리는 집현전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고제도의 해석과 적용에 기여했고, 대쪽 같은 선비이자 청백리로 부정과 타협하지 않은 깨끗한 관원으로 평가받는다.[7]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집현전 학사들의 대표로 활동한 점은 세종대왕의 업적을 부각하는 과정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1]
5. 1. 긍정적 평가
20년 이상을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고제도의 해석과 적용에 기여하였다. 대쪽 같은 선비로 인정받았으며,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으로서 일관하였으며 진퇴가 뚜렷하였다[7]는 평가도 있다.5. 2. 부정적 평가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집현전 학사들의 대표격인 인물로 활동한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이는 세종대왕의 미화와 함께 두드러지게 나타나 논란의 여지가 되었다.[1]6. 대중문화 속 최만리
7. 기타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萬里洞)은 최만리가 살던 곳이라서, 그의 이름에서 따서 만리동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참조
[1]
서적
Hangul: The Origin of Korean Alphabet
Tong-Mun Kwan
[2]
웹사이트
漢字文化圈的脫漢運動
http://www.de-han.or[...]
[3]
웹사이트
Another translation
http://laputan.blo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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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율곡 이이의 증조할머니이다.
[5]
웹인용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0일 경자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2023-09-14
[6]
문서
통덕랑 예조좌랑에 이르렀고 사후 통훈대부 종부시정 지제교에 증직되었다.
[7]
웹인용
최만리: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https://web.archive.[...]
201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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