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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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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해산은 조선 전기의 무관으로, 화약 병기 및 군 장비 개발에 기여한 인물이다. 영주 최씨 출신으로, 아버지로부터 화약수련법을 전수받았다. 1401년 군기시에 등용되어 군기감승, 군기판사, 군기감사 등을 역임하며 화차 개발 및 화포 발사 시험을 주관했다. 1431년에는 오랜 군기감 근무로 인한 비리 혐의로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의 비호 아래 공조우참판으로 승진하고, 파저강 토벌 작전에서도 용서받았다. 이후 제주안무사, 중추원부사, 강계절제사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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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산

2. 생애

최해산은 영주(永州)를 본관으로 하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자 발명가이다. 최무선의 아들로, 15세에 글을 깨우쳤으나 아버지로부터 화약 제조 비법을 전수받았다.

2. 1. 관직 진출과 화약 무기 개발

1401년(조선 태종) 군기시(軍器寺)에 등용되어 주부(主簿)를 거쳐 경기우도 병선군기점고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이 되었다. 1409년 군기감승(軍器監丞)에 올랐고, 그해 10월에는 화차를 만들어 왕이 참석한 가운데 해온정(解慍亭)에서 발사 시험을 하였다. 1424년(조선 세종 6) 12월에는 군기판사로서 왕을 모시고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가 화포 발사 연습을 주관하였다. 1425년 군기감사를 지냈고, 1431년 6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그해 10월, 조정 신하들은 최해산이 오랜 군기감 근무로 옳지 못한 일이 많았다며 그의 체직(遞職)을 건의했지만, 조선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듬해 공조우참판으로 승진했다. 1개월 후 판경성군사(判鏡城郡事)로 전보되었을 때도 세종은 그가 외직으로 나갈 경우 군기감의 업무가 부실해진다 하여 중추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433년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과 함께 파저강(婆猪江) 토벌 작전에 참전했을 때 군기(軍機)를 이행하지 않아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조선 세종은 "20여 년 동안 오로지 화포를 맡았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라며 벼슬만 거두도록 하여 용서하였다. 그 뒤에도 제주안무사, 중추원부사, 강계절제사 등을 지냈다. 그는 전수받은 화약수련비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성과 열을 다하여 화약병기를 비롯한 군장비 보강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 2. 군기감 비리와 세종의 비호

1431년 10월, 최해산이 오랜 군기감 근무로 옳지 못한 일이 많았다 하여 조정 신하들이 그의 체직(遞職)을 품신했지만, 조선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듬해 공조우참판으로 승진했다. 1개월 후 판경성군사(判鏡城郡事)로 전보되었을 때도 세종은 그가 외직으로 나갈 경우 군기감의 업무가 부실해진다 하여 중추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433년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과 함께 파저강(婆猪江) 토벌작전에 참전했을 때도 군기(軍機)를 이행하지 않은 관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조선 세종은 그가 20여 년 동안 오로지 화포를 맡았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 벼슬만 거두도록 하라고 하여 용서하였다.

2. 3. 말년

1433년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과 함께 파저강 토벌 작전에 참전했으나, 군기(軍機)를 이행하지 않아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 세종은 최해산이 20여 년 동안 화포를 맡아온 공을 감안하여 벼슬만 거두도록 하고 용서하였다. 이후 제주안무사, 중추원부사, 강계절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최해산은 전수받은 화약수련비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화약병기를 비롯한 군장비 보강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3. 관련 작품

=== 드라마 ===

3. 1.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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