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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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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회는 1956년 고노 이치로를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 자유민주당 내 파벌이었다. 고노의 사후 파벌 내 갈등과 분열을 겪었으며, 나카소네 야스히로 계열의 이탈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1972년 해산되었고, 이후 후쿠다 다케오가 이끄는 세이와 정책 연구회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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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회
기본 정보
춘추회 로고
춘추회 로고
결성일1957년 10월 1일
유형친목 단체
목적언론계 상호 친목 도모
창립 회원김성환
정지용
장덕수
설의식
윤석중
이헌구
조용만
주요한
최석채
함상훈
박종화
주영섭
정을보
김광섭
이광수
양주동
이희승
김진섭
오천석
장리석
김환기
전혜린
모윤숙
정비석
이봉래
황산덕
박순천
김활란
송금선
임영신
김마리아
박에스더
최은희
김필례
회원 자격전·현직 언론인
주요 활동월례 강연회
송년회
야유회
해외 시찰
사무실 위치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관련 단체한국언론진흥재단

2. 역사

춘추회는 1956년 고노 이치로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그의 지도 아래 운영되었다. 1964년 고노가 이케다 하야토의 후계 경쟁에서 사토 에이사쿠에게 패배하고 이듬해 사망하면서 파벌은 구심점을 잃었다. 고노 사후 집단 지도 체제를 시도했으나, 1966년 사토 총재 재선 문제를 둘러싼 내부 갈등으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계열이 이탈하며 분열되었다. 이후 모리 기요시, 소노다 나오 등이 회장직을 맡았지만, 고노 요헤이 등 주요 인물들이 나카소네 파로 옮겨가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춘추회는 1972년 해산하여 후쿠다 파에 합류하였다.

2. 1. 결성 (1956년)

1956년, 고노 이치로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이후 고노의 지도력 아래 파벌이 운영되었다. 이케다 내각 초기에 비주류가 되어 고노 신당 결성을 꾀했으나 단념했다. 1964년 고노는 병으로 물러난 이케다 하야토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사토 에이사쿠와 다투었으나 패배하였고, 실의에 빠진 채 다음 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 2. 고노 이치로 시대 (1956년 ~ 1965년)

1956년, 고노 이치로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이후 고노의 지도 아래 파벌이 운영되었다. 이케다 내각 초기에는 비주류로 밀려나면서 고노가 신당 창당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1964년, 병으로 물러난 이케다 하야토의 후임 총재 자리를 두고 사토 에이사쿠와 경쟁했으나 패배했다. 고노는 이듬해인 1965년 실의 속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2. 3. 분열과 쇠퇴 (1965년 ~ 1972년)

1965년 고노 이치로가 병으로 사망한 후, 춘추회는 한동안 집단 지도 체제로 파벌을 유지했다. 하지만 1966년 사토 에이사쿠 총재 재선 문제를 둘러싸고 파벌 내 대립이 격화되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무라 우메키치, 노다 다케오 등은 반(反)사토 노선을 주장했고, 시게마사 세이지, 모리 기요시, 소노다 나오 등은 친(親)사토 노선을 지지했다. 결국 이 갈등으로 인해 나카소네 계열(신정동지회)이 춘추회에서 이탈하면서 파벌은 분열되었다.

이후 모리 기요시가 회장에 취임했지만, 1968년 사망했다. 소노다 나오가 회장직을 이어받았으나, 파벌의 쇠퇴를 막지는 못했다. 고노 이치로의 아들이자 정치적 후계자로 여겨지던 고노 요헤이마저 나카소네 파로 옮겨갔고, 우노 소스케, 후지나미 다카오 등 다른 의원들도 세력을 확장하던 나카소네 파로 잇따라 이적하면서 춘추회의 당내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춘추회는 1972년 후쿠다 다케오와의 관계 속에서 해산하고, 후쿠다 파에 합류하게 되었다.

2. 4. 해산과 후쿠다 파벌로의 합류 (1972년)

고노 이치로 사후 춘추회는 한동안 집단 지도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1966년 사토 에이사쿠 총재 재선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무라 우메키치, 노다 다케오 등 반(反)사토 노선을 지지하는 그룹과 시게마사 세이지, 모리 기요시, 소노다 나오 등 친(親)사토 노선을 지지하는 그룹 간의 대립이 격화된 것이다. 결국 나카소네 계열은 신정동지회를 결성하며 춘추회에서 이탈하여 파벌은 분열되었다.

이후 모리 기요시가 회장에 취임했으나 1968년 사망했고, 소노다 나오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파벌의 창립자인 고노 이치로의 정치적 후계자로 여겨지던 고노 요헤이마저 나카소네 파로 옮겨갔고, 우노 소스케, 후지나미 다카오 등 다른 의원들도 세력을 확장하던 나카소네 파로 잇따라 이탈하면서 춘추회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당내 영향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결국 춘추회는 후쿠다 다케오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1972년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후쿠다 파에 합류하게 되었다.

3. 주요 인물

춘추회는 고노 이치로, 모리 키요시 등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 외에도 기타무라 도쿠타로, 쓰루기 노리히로, 시게마사 세이지, 스나다 시게마사, 다나카 쇼지, 네모토 류타로, 하마치 분페이, 야마무라 신지로 등이 주요 멤버로 활동했다. 이들 중 일부는 춘추회에 잔류했지만, 상당수는 이후 신정동지회, 세이와 정책 연구회 등 다른 파벌로 이적하거나 새로운 파벌을 형성하며 분화되었다.

3. 1. 춘추회 잔류 인물

3. 2. 신정동지회로 이적

3. 3. 세이와 정책 연구회(후쿠다 파벌)로 이적

3. 4. 기타 파벌로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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