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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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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정회는 1984년 일본 자유민주당 내 다나카 가쿠에이 파벌에서 다케시타 노보루를 차기 총리대신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으로 결성된 정치 단체이다. 다나카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다케시타, 가네마루 신 등이 주도하여 비밀 회동을 거쳐 결성되었고, 다나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5년 2월 공식 출범했다. 창정회 결성은 다나카 파벌 내 갈등을 심화시켰고, 다나카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다케시타는 창정회를 해산하고, 1987년 헤이세이 연구회를 결성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창정회는 다나카의 측근들의 배신으로 평가받기도 하며, 일본 정치 내 파벌 갈등의 중요한 사례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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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정회
개요
약칭창정회 (創政会)
영문 명칭Sōseikai
국가일본
창립1981년 7월 2일
해산1987년 7월 4일
후신헤이세이 연구회
주요 인물
주도 인물다케시타 노보루
주요 인물가네마루 신
관련 정보
관련 사건다케시타 노보루의 총리 취임

2. 연혁

1984년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끌던 목요 클럽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었지만, 다케시타 노보루를 차기 총리대신으로 옹립하려는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파벌 개혁 움직임이 일어나는 등 파벌 내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8]

같은 해 10월, 니카이도 스스무 옹립 구상이 실패하면서 다나카 파벌의 균열이 가시화되었다. 12월에는 다케시타, 가네마루 신, 오부치 게이조, 오자와 이치로 등 7명이 비밀 회동을 갖고 다케시타 옹립 계획을 논의했고, 하시모토 류타로 등이 합류하여 목요 클럽 내에 공부 모임을 만들기로 하고 모임 이름을 『창정』에서 따오기로 결정했다.[9][10]

1985년 1월, 다나카 가쿠에이의 동의를 얻어 정책 연구 모임을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다나카는 이것이 단순한 공부 모임이 아닌 사실상의 쿠데타임을 뒤늦게 눈치챘다.[3] 다나카는 창정회 참가를 막으려 했지만, 결국 1985년 2월 7일, 중의원 의원 29명, 참의원 의원 11명 등 총 40명이 참여한 창정회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1]

록히드 사건 재판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위스키를 자주 마시던 다나카는 창정회 결성에 분노하여 매일같이 위스키를 마셨고,[4] 결국 2월 27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정치 생명이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5]

1986년 4월, 다케시타는 창정회를 해산했고, 이후 다나카 파벌은 다케시타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8] 1987년 7월, 다케시타는 정식으로 자신이 이끄는 파벌인 경세회를 결성했다.[8]

2. 1. 1984년: 창정회 결성 배경

1984년,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끌던 목요 클럽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었지만, 다나카의 강력한 지배력과 후계자 부재로 인해 파벌 내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특히, 다케시타 노보루를 차기 총리대신으로 옹립하려는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파벌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8]

같은 해 10월, 니카이도 스스무 옹립 구상이 실패하면서 다나카 파벌의 균열이 가시화되었다. 다나카는 니카이도를 달래기 위해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후임 총재로 니카이도를 공식 지명했지만, 이는 다케시타와 가네마루 신을 자극하여 새로운 파벌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가속화시켰다.[1]

12월 18일, 아카사카의 한 프랑스 요리점에서 다케시타, 가네마루, 오부치 게이조, 오자와 이치로 등 7명이 비밀 회동을 갖고 다케시타 옹립 계획을 논의했다.[9] 이틀 뒤, 가네마루는 아베 신타로와 만나 다케시타 옹립 계획을 공유했다.

12월 25일, 하시모토 류타로 등이 합류하여 12명(일설에는 18명)이 다시 모여 목요 클럽 내에 공부 모임을 만들고, 모임의 이름을 다케시타가 발행하던 기관지 『창정』에서 따오기로 결정했다. 또한, 연초로 예정된 발족 준비회 멤버 25명을 선정했다.[10]

2. 2. 1985년: 창정회 결성과 다나카 가쿠에이의 반격

1985년 1월 23일, 쓰키지료테이 가쓰라에서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오자와 이치로 등 25명이 모여 다나카 가쿠에이의 동의를 얻어 정책 연구 모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1월 27일 밤, 다케시타는 다나카의 저택을 방문하여 정책 연구회 창설 허가를 요청했고, 다나카는 "내가 (총리대신을) 한 번 더 한 뒤에 네가 총리가 돼라"라며 승인했다.[3]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고, 다나카는 1월 29일 창정회 가입자가 70명에 달하고, 주도면밀한 준비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으며 인사까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단순한 공부 모임이 아닌 사실상의 쿠데타임을 눈치챘다.[3]

1월 30일, 다나카는 다마키 가즈오 등에게 "다케시타는 아직 10년 이르다", "(창정회에는) 정책 공부 외에는 시키지 않겠다"라며 분노를 표출했다. 또한 다나카 파벌 사무총장 오자와 다쓰오를 불러 호통을 쳤다.[3]

1월 31일, 다나카는 니카이도 스스무에게 다나카 파벌 의원들의 창정회 참가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날 낮에 열린 다나카 파벌 총회에서 니카이도와 에사키 마스미는 창정회를 견제하는 발언을 했다.[3] 다나카의 공세에 밀려 창정회 가입 희망자는 83명에서 40명으로 급감했지만, 당시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기 위해 필요한 추천인 수가 50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40명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1985년 2월 7일, 다나카의 반대와 회유에도 불구하고 중의원 의원 29명, 참의원 의원 11명 등 총 40명이 참여한 창정회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1] 참석자는 다음과 같다.

중의원 (29명)



참의원 (11명)



록히드 사건 재판의 스트레스로 술을 자주 마시던 다나카는 창정회 결성에 분노하여 매일같이 위스키를 마셨다.[4]

1985년 2월 27일, 다나카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도쿄 우편 병원에 입원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언어 장애 등이 남아, 다나카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5]

2. 3. 1986년 ~ 1987년: 다나카 파벌의 분열과 헤이세이 연구회 창립

1986년 4월 25일, 다케시타는 당시 54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창정회를 해산했다. 이후 다나카 파벌인 목요 클럽은 다케시타를 지지하는 세력과 니카이도를 중심으로 다케시타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8] 1987년 7월 4일, 다케시타는 정식으로 자신이 이끄는 파벌인 '''경세회'''를 결성했다.[8]

3. 주요 인물

창정회에 참여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10]

중의원 (29명)



참의원 (11명)


3. 1. 창정회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끌던 자민당 내 최대 파벌 목요 클럽은 1984년 기준으로 소속 의원 수가 121명에 달했지만, 다나카의 강력한 지배하에 있었다. 내각총리대신 복귀를 원했던 다나카는 자신의 파벌에서 총리대신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10년 넘게 이어지면서, 파벌 내에서는 다른 파벌 출신을 중용하는 다나카에 대한 반발심이 커졌다. 이에 소장파 의원들은 다케시타 노보루를 중심으로 뭉쳤고, 1984년 말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총재 임기가 끝나갈 무렵 차기 총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984년 10월 24일, 목요 클럽의 명목상 회장 니카이도 스스무스즈키 젠코, 후쿠다 다케오, 공명당 위원장 다케이리 요시카쓰, 민사당 위원장 사사키 료사쿠 등의 지지를 받아 총재 선거에 출마하려 했다. 하지만 후쿠다파의 의견이 정리되지 않았고, 목요 클럽의 가네마루 신의 방해 공작으로 실패했다. 자민당 총재 선거에 다른 정당이 관여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컸다. 다나카도 니카이도의 출마에 반대하여, 결국 나카소네가 재선에 성공했다.[8] 이 사건은 니카이도 옹립 구상으로 불리며, 다나카파에 심각한 균열을 초래하고 다나카의 파벌 지배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다나카는 니카이도를 달래기 위해 나카소네의 후임 총재로 니카이도를 공식 지명했다. 이 발언은 다케시타와 가네마루를 자극했고, 이들은 새로운 파벌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1984년 12월 18일, 아카사카의 프랑스 요리점에서 다케시타, 가지야마 세이로쿠, 가네마루, 오부치 게이조,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 엔도 가나메 등 7명이 모여 차기 총재 선거에서 다케시타를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9] 오자와는 이 계획이 자신과 가지야마의 제안이었다고 주장한다. 12월 20일, 가네마루는 도쿄도의 한 호텔에서 후쿠다파의 아베 신타로와 만나 다케시타 옹립 계획을 공유했다.

12월 25일, 가메오카 다카오, 하시모토 류타로 등이 참여한 12명(일설에는 18명)이 다시 모였다.[10] 이 모임에서 목요 클럽 내에 공부 모임을 만들고, 다케시타가 발행하던 기관지 '창정'을 모임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연초 발족 준비회 멤버 25명을 선정했다.

1985년 1월 23일, 쓰키지료테이 가쓰라에서 다케시타, 가네마루, 오부치, 하시모토, 오자와, 가지야마, 하타 등 25명이 모여 다나카의 동의를 얻어 공부 모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1월 27일, 다케시타는 다나카의 저택을 방문하여 정책연구회 창설 허가를 요청했다. 다나카는 이를 승인하며 "내가 (총리대신을) 한 번 더 한 뒤에 네가 총리가 돼라"라고 말했다. 다음 날 신문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자, 와타나베 고조오쿠다 게이와가 다나카를 찾았지만, 다나카는 오히려 입회를 권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가네마루는 창정회 창설에 다른 뜻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다나카의 사위인 다나카 나오키에게 가입을 적극 권유했다.

그러나 다나카는 29일에 창정회 가입자가 70명에 달하고, 공부 모임이 주도면밀한 준비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으며, 인사까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창정회가 단순한 공부 모임이 아닌 사실상의 쿠데타임을 눈치챘다. 이대로라면 다나카파 소속 의원의 2/3에 달하는 80명 이상이 창정회에 가입할 우려가 있었다.

1월 30일, 다나카는 다마키 가즈오 등에게 "다케시타는 아직 10년 이르다", "창정회가 정책 공부 이외의 것을 하게 두지 않겠다", "다케시타가 돈을 뿌린 것 같다" 등의 발언을 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목요 클럽 사무총장 오자와 다쓰오에게도 화를 냈다.

1월 31일, 다나카는 니카이도를 자택에 불러 목요 클럽 소속 의원의 창정회 참가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날 낮에 열린 총회에서 니카이도와 에사키 마스미는 창정회를 견제하는 발언을 했다. 다나카의 공세에 밀려 창정회 가입 희망자는 83명에서 40명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당시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기 위해 필요한 추천인 수가 50명이었으므로, 40명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다케시타는 지나치게 대결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 창립 총회를 호텔이 아닌 목요 클럽 사무소가 있는 빌딩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1985년 2월 7일, 창정회의 설립 총회가 열렸다. 참가 인원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다나카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절반이나 남은 셈이었고, 이들은 다케시타의 정치적 지지 기반이 되었다.[8]

록히드 사건의 여파로 술을 가까이하던 다나카는 창정회 결성 소식을 듣고 화를 참지 못해 매일같이 위스키를 마셨다. 그러다 2월 말, 하야사카 시게조에게 "젊은 애들이 말했던 부회장 제도를 만들까?"라고 제안했고, 하야사카도 이에 호응했다.

2월 26일, 목요 클럽 내에서 입각한 의원들로 구성된 영회(栄会)가 다나카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같은 날 열린 총회에서 다나카는 "현명한 자는 듣고 아둔한 자는 말을 한다"라고 연설했다. 그리고 이 날도 다나카는 취할 때까지 마셨다.

다음 날 아침, 몸 상태가 이상함을 느낀 다나카는 골프장에 갈 계획을 취소하고 자택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오후 5시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언어 장애가 생겼고, 다나카의 정치 생명은 막을 내렸다.

1986년 총선 전날인 4월 25일, 다케시타는 당시 54명으로 구성돼 있던 창정회를 해산했다. 이후 목요 클럽은 다케시타 지지 세력과 니카이도를 중심으로 한 다케시타 반대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했고, 1987년 7월 4일 다케시타는 자신이 이끄는 파벌인 경세회를 결성하게 된다.[8]

다나카는 오자와, 가지야마, 하타 등 자식처럼 여겼던 부하들이 쿠데타에 가담한 것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오자와는 "평소 흠모하던 다나카 씨를 끌어내릴 의도는 없었다"라고 말했으며, 창정회 창립 전날엔 펑펑 울었다고 했다. 가지야마는 파벌의 후계자를 정한다면 족하고 다나카의 지배가 이어지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타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고토다 마사하루는 "다나카 씨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훗날 반드시 기회를 봐서 끌어내리고자 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다케시타의 측근이자 창정회 창립 멤버였던 와타나베 고조는 다나카의 저택을 찾았을 때 "네 녀석, 다음 선거 때 낙선시킬 거다"라고 호통을 들었다고 한다.[13]

노나카 히로무는 "다나카 씨가 록히드 사건에 당했을 때 우리가 창정회를 만들었"고, "반기를 든 부하들을 앞에 두고 이 마당에 돈을 뿌리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라고 회상했다.[14]

창정회에 참여한 의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의원 (29명)



참의원 (11명)


3. 2. 다나카 파벌 (목요 클럽)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끌던 목요 클럽은 1984년 기준으로 소속 의원이 121명에 달하는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었다. 그러나 다나카의 강력한 지배하에 있었고, 총리대신 복귀를 원했던 다나카는 자신의 파벌에서 총리대신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10년 넘게 이어지면서, 다른 파벌 출신을 중용하는 다나카에 대한 반발심이 파벌 내에서 생겨났다.

1984년 10월, 니카이도 스스무스즈키 젠코, 후쿠다 다케오, 공명당의 다케이리 요시카쓰, 민사당사사키 료사쿠 등의 지지를 받아 총재 선거에 출마하려 했다. 하지만 가네마루 신의 방해 공작과 다른 정당의 개입에 대한 반감으로 실패했고, 다나카도 반대하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재선에 성공했다. 이 니카이도 옹립 구상 사건은 다나카 파벌에 심각한 균열을 초래했고, 다나카의 파벌 지배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다나카는 니카이도를 달래기 위해 나카소네의 후임 총재로 니카이도를 지명했다. 이 발언은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를 자극했고, 새로운 파벌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84년 12월, 아카사카의 프랑스 요리점에서 다케시타, 가지야마 세이로쿠, 가네마루, 오부치 게이조,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 엔도 가나메 등 7명이 모여 다케시타를 총재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후 가네마루는 아베 신타로와 만나 계획을 공유했다.

1985년 1월, 쓰키지료테이 가쓰라에서 다케시타, 가네마루, 오부치, 하시모토 류타로, 오자와, 가지야마, 하타 등 25명이 모여 다나카의 동의를 얻어 공부 모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다케시타는 다나카에게 정책연구회 창설 허가를 구했고, 다나카는 이를 승인하며 "내가 (총리대신을) 한 번 더 한 뒤에 네가 총리가 돼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나카는 창정회 가입자가 70명에 달하고, 공부 모임이 주도면밀하게 준비되었으며, 인사까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창정회가 단순한 공부 모임이 아니라 사실상의 쿠데타임을 눈치챘다. 다나카는 오자와 다쓰오를 불러 화를 내고, 니카이도에게 목요 클럽 소속 의원의 창정회 참가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다나카의 공세로 창정회 가입 희망자는 83명에서 40명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다케시타는 대결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창립 총회를 목요 클럽 사무소가 있는 빌딩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1985년 2월 7일, 창정회의 설립 총회가 열렸다. 참가 인원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다나카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40명이나 남았고, 이들은 다케시타의 정치적 지지 기반이 되었다.[8] 참가자는 중의원 의원 29명, 참의원 의원 11명이었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10]

중의원 (29명)



참의원 (11명)



록히드 사건의 여파로 술을 가까이하던 다나카는 창정회 결성 소식에 분노하여 매일같이 위스키를 마셨다. 그러다 2월 말 뇌경색으로 쓰러져 언어 장애가 생겼고, 다나카의 정치 생명은 종언을 고했다.[12]

1986년 총선 전날, 다케시타는 창정회를 해산했다. 이후 목요 클럽은 다케시타 지지 세력과 니카이도를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으로 나뉘었고, 1987년 다케시타는 '''경세회'''를 결성했다.[8]

오자와, 가지야마, 하타 등 자식처럼 여겼던 부하들의 쿠데타에 다나카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오자와는 "평소 흠모하던 다나카 씨를 끌어내릴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으며, 가지야마는 파벌의 후계자를 정한다면 족하고 다나카의 지배가 이어지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고토다 마사하루는 "다나카 씨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훗날 반드시 기회를 봐서 끌어내리고자 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노나카 히로무는 "반기를 든 부하들을 앞에 두고 이 마당에 돈을 뿌리는 건....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라고 회상했다.[14]

4. 평가 및 영향

창정회는 자민당 내 파벌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측근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 등이 다나카에게 등을 돌린 것은 정치적 배신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13][14]

4. 1. 부정적 평가

자민당 내 파벌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측근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 등이 다나카에게 등을 돌린 것은 정치적 배신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오자와 이치로, 가지야마 세이로쿠, 하타 쓰토무 등은 다나카가 자식처럼 아꼈던 인물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13][14]

다나카는 오자와, 가지야마, 하타 등 자식처럼 여겼던 부하들이 쿠데타에 가담한 것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오자와는 "평소 흠모하던 다나카 씨를 끌어내릴 의도는 없었다. 다케시타 씨를 후계자로 지명해 준다면 그걸로 끝날 일이었다"라고 말했으며 창정회 창립 전날엔 펑펑 울었다고 했다. 가지야마는 파벌의 후계자를 정한다면 그걸로 족하고 다나카 씨의 지배가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타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고토다 마사하루는 "다나카 씨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훗날 반드시 기회를 봐서 끌어내리고자 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13]

다케시타의 측근으로 창정회 창립 멤버였던 와타나베 고조는 다나카의 저택을 찾았을 때 "네 녀석, 다음 선거 때 (동향인) 가와시마를 내보내서 낙선시킬 거다"라고 화냈다고 한다.[13]

노나카 히로무는 "다나카 씨가 록히드 사건에 당했을 때 우리가 창정회를 만들었죠. 그때 가지야마 씨가 "우리 간부가 먼저 가서 다나카 씨한테 혼날 테니 너희는 그 다음에 가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늦게 다나카 씨를 찾아가 방에 들어가니 뒤에 있는 서랍에서 상자를 꺼내면서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다"라고 하더군요. 반기를 든 부하들을 앞에 두고 이 마당에 돈을 뿌리는 건....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라고 회상했다.[14]

참조

[1] 뉴스 田中角栄に反旗、竹下派旗揚げ 「政界のドン」金丸信(5) https://www.nikkei.c[...] 2011-08-28
[2] 웹사이트 小沢一郎が明かす田中派クーデターの舞台裏(15)竹下登はクーデターの途中で震えだした https://webronza.asa[...] 論座 2019-09-30
[3] 간행물 『創政会』誕生の舞台裏を探る 行政問題研究所 1985-04
[4] 서적 田中角栄邸書生日記 日経BPコンサルティング 2002-04-13
[5] 서적 愛蔵版 角栄一代 セブン&アイ出版 2018-03
[6] 뉴스 平成の黄門・渡部恒三氏に聞く(5)七奉行の一人として http://www.kahoku.co[...] 2017-08-29
[7] 간행물 政界三強鼎談、今学ぶべきは誰の内閣は、政権交代二年でこの体たらく憂国三銃士が吠える、石原慎太郎・野中広務・亀井静香・司会後藤謙次 2011-10
[8] 뉴스 田中角栄に反旗、竹下派旗揚げ 「政界のドン」金丸信(5) https://www.nikkei.c[...] 2011-08-28
[9] 웹사이트 小沢一郎が明かす田中派クーデターの舞台裏(15)竹下登はクーデターの途中で震えだした https://webronza.asa[...] 論座 2019-09-30
[10] 간행물 『創政会』誕生の舞台裏を探る 行政問題研究所 1985-04
[11] 서적 田中角栄邸書生日記 日経BPコンサルティング 2002-04-13
[12] 서적 愛蔵版 角栄一代 セブン&アイ出版 2018-03
[13] 뉴스 平成の黄門・渡部恒三氏に聞く(5)七奉行の一人として http://www.kahoku.co[...] 2017-08-29
[14] 간행물 政界三強鼎談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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