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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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위치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김세중의 설계와 김종필이 이끈 동상건립위원회를 통해 건립되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입상 조형물이었다. 건립 초기에는 조형, 복식 고증 문제로 비판을 받았으며, 1994년, 2005년 동상 이전 논의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2010년 복원 작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광화문광장 재조성 과정에서 존치되어 세종대왕 동상과 함께 광장을 대표하는 조형물로 자리 잡았다. 12.23 분수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상 옆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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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동상 | |
---|---|
기본 정보 | |
![]() | |
위치 | 세종로, 광화문광장, 서울특별시 |
설계자 | 김세중 |
높이 | 17m |
완료일 | 1968년 4월 27일 |
헌정 대상 | 이순신 |
복원 | 2010년 11월 ~ 12월 |
조각상 정보 | |
원어 제목 | 忠武公李舜臣像 |
종류 | 동상 |
제작 연도 | 1968년 |
도시 | 서울특별시 |
기타 정보 | |
한국어 명칭 | 충무공 이순신 동상 |
웹사이트 | 대한민국 구석구석 |
2. 역사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박정희 대통령 시절 건립되었다.[4][5] 당시 김종필이 이끈 동상건립위원회가 주도했으며, 조각가 김세중이 설계를 맡고 역사학자들이 자문에 참여했다.[5] 이는 광화문광장 정비 사업의 일환이었으며,[6] 당시 군사 정부의 상징성을 반영한다는 해석도 있었다.[2] 건립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입상 조형물로 기록되었다.[2]
그러나 동상은 제막 직후부터 칼을 쥔 손의 방향, 일본도 및 중국식 갑옷 논란 등 고증 오류와 관련된 비판에 직면했다.[13] 1970년대 후반 동상 재제작이 논의되었으나 10.26 사건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무산되었다.[13]
이후에도 동상 이전 논의는 계속되었다. 1994년에는 세종로라는 이름에 맞춰 동상을 충무로로 이전하고 세종대왕 동상을 새로 건립하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동상이 이미 세종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서울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3] 2005년에도 정부 차원에서 이전이 고려되었으나 여론의 반대로 취소되었다.[3]
시간이 흘러 동상이 노후화되자 2010년 11월, 42년 만에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7][8] 약 40일간 경기도 이천시로 옮겨져 녹 제거, 내부 골격 보강, 재도색 등의 과정을 거쳤으며,[7][8] 그해 12월 23일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9] 이 과정에서도 동상의 얼굴, 칼, 갑옷 등에 대한 역사적 고증 논란이 다시 제기되기도 했다.[9]
한편, 2006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광화문 광장 조성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순신 동상은 광장의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14] 이후 광장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추가로 건립되어, 두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 함께 위치하게 되었다.[12][14] 2019년에는 박원순 시장 재임 시절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계획의 일환으로 동상 이전이 다시 검토되었으나,[15] 비판 여론과 전문가 의견 등을 고려하여 최종 결정이 보류되었다.[13][15]
동상 주변에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기념하는 '12.23 분수'와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박물관이 지하에 마련되어 있다.[10][11]
2. 1. 건립 배경 및 초기 역사 (1968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의해 확장된 태평로를[13] 대한민국 독립 후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복원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막대한 비용 문제로 대신 "세종로에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자"는 결정이 내려졌다.[13] 이 동상은 김종필이 이끈 동상건립위원회가 주도하여 건립되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에게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5] 선정된 인물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조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었다.동상 건립은 광화문광장 재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한국의 근대화와 재건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6] 또한, 갑옷을 입은 전쟁 영웅의 모습은 당시 대한민국 군사 정부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했다.[2]
동상 설계는 조각가이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였던 김세중(1928–1986)이 맡았고, 국사편찬위원회 소속 역사학자들이 자문에 참여했다.[4][5] 그러나 당시 한국은 물자가 부족하여 탄피, 놋쇠 식기, 고철 등을 모아 제작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제작이 중단되기도 했다.[13]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거행하며 완공되었다.[4][5] 제막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입상 조형물이었다.[2]
하지만 제막 직후부터 동상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칼을 오른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항복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과 함께, 들고 있는 칼이 일본도이며 입고 있는 갑옷은 중국식이라는 고증 오류 논란이 일었다.[13] 이러한 비판으로 인해 1970년대 후반 동상 재제작이 결정되기도 했으나, 1979년 10.26 사건 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13]

2. 2. 초기 논란 (1968년 ~ 1970년대)
1968년 4월 27일 제막식 직후부터 동상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13] 칼을 오른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항복하는 자세 같다는 점, 동상이 들고 있는 칼이 일본도와 유사하다는 점, 입고 있는 갑옷이 중국 양식이라는 점 등이 주요 비판 내용이었다. 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1970년대 후반에는 동상을 다시 만들기로 결정되었으나, 1979년에 발생한 박정희 암살 사건(10.26 사건) 등 정치적 혼란 속에서 결국 실행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13]2. 3. 이전 논의 (1994년, 2005년)
1994년, 당시 한국 정부는 "도로의 이름에 맞는 동상을 세우자"는 취지로 세종로에 있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충무로로 이전하고, 대신 세종로에는 세종의 동상을 새로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했다.[13] 그러나 서울시는 "충무공 동상은 이미 세종로의 상징이 되었다"며 이전에 반대했고, 결국 계획은 무산되었다.[13]2. 4. 복원 (2010년)
2010년 11월, 건립 42년 만에 동상의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40일 동안 철거되었다.[7][8] 200톤 크레인을 이용해 들어 올려진 동상은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공장으로 옮겨졌다.[7]공장에서는 녹 제거를 위한 샌드 블라스팅 작업과 함께, 도로변 오염물 등 지난 40여 년간 쌓인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내부 골격을 강화하고 재도색을 거쳤다.[7][8] 동상의 색상은 시간이 지나며 청동색에서 짙은 녹색으로 변했는데, 복원 과정에서 두 색상을 혼합한 색으로 최종 결정되었다.[9] 복원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동상의 실물 크기 사진을 부착한 가로 3m, 세로 3m, 높이 6m 크기의 직사각형 기둥이 임시로 설치되었다.[7]
복원 작업은 2010년 12월 23일에 완료되어 일반에 다시 공개되었다.[9] 그러나 복원 과정에서 동상의 얼굴 모습이나 칼, 갑옷 등이 역사적 사실에 맞게 묘사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한국 시민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칼이나 갑옷 양식이 중국이나 일본의 것에 가까워 한국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다.[9]
2. 5. 광화문 광장 재조성 (2006년 ~ 현재)
2006년 12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은 "광화문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14] 이는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 있던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을 제자리에 복원하는 계획과 함께, 세종로와 태평로를 통합하여 '세종대로'로 하고 그 일부를 공원화하여 '광화문 광장'을 조성하는 내용을 포함했다.오세훈 시장은 국가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상징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하며[14], 기존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그대로 유지하고 인근에 세종대왕 동상을 새로 건립하는 방식으로 광장을 구상했다. 이를 통해 한국사에서 존경받는 인물인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담아 광화문 광장을 "'''국가 대표 광장'''"으로 만들고자 했다.[14] 오 시장은 2009년 7월 29일 광화문 광장 개장 행사에서 "파리의 샹젤리제나 워싱턴의 내셔널 몰처럼 국가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한국에는 없었다"고 언급하며 광장 조성의 의미를 설명했다.[14]
2019년 1월 21일, 서울시는 광화문 광장을 확장하고 재구조화하기 위한 "광화문 광장 국제 설계 공모전"의 당선작을 발표했다.[15] 이 당선작 설계안에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을 광장 내 다른 위치로 이전하는 계획이 포함되었다.[13][15] 그러나 이 설계안에 대해 시민사회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비판이 제기되자,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박원순은 2019년 말까지 최종 결정을 연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15] 당시 설계 공모전 심사위원단 역시 확장안을 선정하면서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역사성이 있으므로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덧붙였다.[15]
3. 조형 및 특징
이 동상은 조각가이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였던 김세중 (1928–1986)이 설계하고 국사편찬위원회 소속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거쳐 1968년 4월 27일에 세워졌다.[4][5] 당시 김종필이 이끈 동상건립위원회가 건립을 주도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동상 건립은 광화문광장 재정비 사업의 일환이었으며, 한국의 근대화와 재건을 상징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6] 갑옷을 입은 전쟁 영웅의 모습은 당시 대한민국 군사 정부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했다.[2] 제막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입상 조형물이었다.[2]
2010년 11월에는 42년 만에 처음으로 동상을 옮겨 40일간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경기도 이천시의 공장으로 옮겨져 녹과 오염 물질을 제거하고 내부 골격을 보강한 뒤 재도색하여 12월 23일에 다시 공개되었다.[7][8][9] 이 과정에서 동상의 색깔이 처음의 청동색에서 짙은 녹색으로 변해왔다는 점이 확인되었고, 복원 후에는 두 색상의 혼합색으로 결정되었다.[9] 복원 과정에서는 동상의 얼굴, 칼, 갑옷 등이 역사적 사실에 맞게 표현되었는지, 특히 일부 요소가 지나치게 중국적이거나 일본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상 주변에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기리는 12.23 분수와 작은 박물관 등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10][11] 또한, 광장 내 다른 주요 조형물인 세종대왕 동상과는 약 250m 거리를 두고 있다.[12]
3. 1. 12.23 분수
동상 옆에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분수가 있다. 이 분수는 임진왜란 당시 12척의 군함으로 23번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여 ''12.23 분수''라고 명명되었다. 물줄기는 300개의 작은 분수와 함께 18m 높이까지 솟아오르며, 이는 그가 바다에서 치른 전투를 상징한다.[10]3. 2. 기타 시설
동상 옆에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분수가 있다. 이 분수는 임진왜란 당시 12척의 군함으로 23번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여 ''12.23 분수''라고 명명되었다. 물줄기는 300개의 작은 분수와 함께 18m 높이까지 솟아오르며, 이는 그가 바다에서 치른 전투를 상징한다.[10] 동상 아래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11]이순신 장군 동상은 광장에 있는 다른 대형 조형물인 세종대왕 동상으로부터 250m 거리에 위치해 있다.[12]
4. 논란 및 비판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건립 초기부터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해 왔다. 동상 건립은 박정희 정권 시기, 일제강점기에 확장된 태평로를 복원하는 대신 "세종로에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자"는 결정에 따라 추진되었다.[13] 당시 부족한 물자 속에서도 탄피, 놋쇠 식기, 고철 등을 모아 제작될 정도로 국가적인 사업이었으나,[13] 1968년 제막 직후부터 여러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비판으로는 동상의 복식 및 고증 오류 문제가 있다. 칼을 오른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나 칼과 갑옷의 형태가 일본도나 중국 양식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었다.[13] 이러한 문제로 1970년대 후반 동상 재제작이 결정되기도 했으나, 1979년 박정희 암살 사건(10.26 사건)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13]
동상의 위치 또한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었다. 1994년 정부는 도로명(세종로)과 동상(이순신)의 불일치를 이유로 동상을 충무로로 이전하고 세종대왕 동상을 새로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서울시가 "충무공 동상은 이미 세종로의 상징"이라며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3] 이후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은 광화문 광장 조성 계획의 일환으로 기존 동상을 유지하고 세종대왕 동상을 추가 건립하는 방식을 채택했다.[14] 그러나 2019년 박원순 서울시장 시기에는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계획과 맞물려 동상 이전 문제가 다시 공론화되었고,[13][15] 설계 공모 당선작에 이전 계획이 포함되었으나 비판 여론과 동상의 역사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15] 속에서 최종 결정이 보류되었다.
4. 1. 복식 및 고증 문제
동상이 제막된 1968년 직후부터 복식 및 고증과 관련된 여러 비판이 제기되었다.[13] 동상이 칼을 오른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항복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있었고, 손에 쥔 칼은 일본도이며 입고 있는 갑옷은 중국 양식이라는 주장이 나왔다.[13] 이러한 문제 제기로 인해 1970년대 후반 동상을 다시 제작하기로 결정되었으나, 1979년 박정희 암살 사건(10.26 사건)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13]시간이 흘러 2010년 동상 복원 작업이 진행될 때에도 고증 논란은 다시 불거졌다. 시민들과 역사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의 얼굴 모습, 칼, 갑옷 등이 역사적 사실에 맞게 정확하게 묘사되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일부에서는 갑옷이나 칼의 형태가 한국 전통 양식이 아닌, 지나치게 중국적이거나 일본적이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4. 2. 동상의 위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세종로 네거리에 건립되었다.[4][5]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동상건립위원회를 이끌던 김종필에게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5] 일제강점기에 확장되었던 태평로를 복원하는 대신, 막대한 비용 문제로 인해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한 배경도 있다.[13]
동상의 위치는 건립 이후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94년 정부는 "도로 이름에 맞는 동상을 세우자"며 세종로의 충무공 동상을 충무로로 이전하고, 대신 세종대왕의 동상을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했다.[13] 그러나 서울시는 "충무공 동상은 이미 세종로의 상징이 되었다"며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3] 2005년에도 정부 차원에서 동상 이전을 고려했으나, 여론의 반대로 계획이 취소되었다.[3]
2006년 12월,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광화문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세종로 일부를 공원화하여 광화문 광장을 조성하는 계획을 발표했다.[14] 이 과정에서 기존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인근에 세종대왕 동상을 추가로 건립하여, 한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두 인물의 역사성을 담은 '국가 대표 광장'을 만들고자 했다.[14]
2019년 1월,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은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를 위한 국제 설계 공모 당선작을 발표했는데, 이 설계안에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13][15] 그러나 설계안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박원순 시장은 최종 결정을 연기했으며, 당시 설계 공모 심사위원단은 확장안을 선택하면서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역사성이 있으므로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덧붙였다.[15]
현재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광화문 광장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약 250m 거리에 세종대왕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12]
5. 사회문화적 의의
광화문광장의 중심에 자리한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단순한 조형물을 넘어 한국 사회와 문화 속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 동상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인 이순신 장군을 기리며, 국가적 위기 극복과 민족적 자긍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3] 건립 이후 수십 년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주요 랜드마크로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존재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는 동상 이전 논의 당시 국민적 반대로 무산된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3]
또한, 동상은 광화문광장을 찾는 시민들과 외국인들에게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한국 역사를 알리는 중요한 교육적 역할을 수행한다. 동상 주변의 시설과 복원 과정에서 벌어진 역사 고증 논란[9] 등은 동상이 지닌 역사 교육적 가치를 보여준다. 이처럼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민족 영웅의 상징이자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서 다층적인 사회문화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5. 1. 민족 영웅의 상징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건립되었다.[4][5] 조각가이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였던 김세중(1928–1986)이 설계를 맡았고, 국사편찬위원회 소속 역사학자들이 자문했다. 당시 김종필이 이끌던 동상건립위원회에서 추진한 첫 번째 동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에게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이는 광화문광장 재정비 사업의 일환이자 한국의 근대화와 재건을 상징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6] 갑옷을 입은 전쟁 영웅의 모습은 당시 대한민국 군사 정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2] 제막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입상 조형물이었다.[2]이순신 장군 동상은 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인 그의 위상을 반영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국난 극복의 상징으로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존재로 여겨진다. 2005년 정부가 동상 이전을 검토했으나, 국민적 반대에 부딪혀 계획이 취소되기도 했다.[3] 이는 동상이 단순한 조형물을 넘어 국민들에게 갖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0년 11월에는 42년 만에 처음으로 동상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7][8] 40일간 경기도 이천시의 공장으로 옮겨져 녹 제거, 오염 물질 세척, 재도색, 내부 골격 강화 등의 작업을 거쳤다.[7][8][9] 복원 기간 동안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실물 크기 사진을 담은 임시 구조물이 설치되었다.[7] 오랜 세월 동안 청동색에서 짙은 녹색으로 변했던 동상의 색상은 복원 후 두 색상이 혼합된 모습으로 결정되었다.[9] 복원 과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얼굴, 칼, 갑옷 등의 묘사가 역사적으로 정확한지에 대한 논쟁이 시민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갑옷 등이 지나치게 중국적이거나 일본적이며 한국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이순신 장군과 동상에 대한 높은 국민적 관심을 반영한다. 복원된 동상은 2010년 12월 23일 다시 공개되었다.[9]
동상 옆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23번의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12.23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18m 높이로 솟아오르는 물줄기와 300개의 작은 분수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0] 동상 아래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박물관도 마련되어 있다.[11] 이 동상은 광화문광장의 또 다른 주요 상징물인 세종대왕 동상에서 약 250m 떨어져 있다.[12]
5. 2. 역사 교육의 장
광화문광장은 한국 역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그의 업적과 한국 역사를 알리는 교육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동상은 1968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건립되었는데,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다.[5] 이는 김종필이 이끈 동상건립위원회가 추진했으며, 조각가 김세중 교수가 설계하고 국사편찬위원회 소속 역사학자들이 참여하여 역사적 의미를 더하고자 했다.[5] 건립 당시 동상은 대한민국 군사 정부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2] 한국의 근대화와 재건을 상징하는 사업의 일환이었다.[6]
동상 주변 시설 역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역사를 알리는 데 기여한다. 동상 옆의 ''12.23 분수''는 임진왜란 당시 12척의 배로 23번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며,[10] 동상 아래에는 그의 생애와 업적을 다루는 작은 박물관도 마련되어 있다.[11] 이러한 요소들은 방문객들이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돕는다.
또한, 동상은 복원 과정에서 그 모습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얼굴, 칼, 갑옷 등이 한국적인 고증에 맞는지에 대한 시민과 역사학자들의 관심은 동상이 단순한 조형물을 넘어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소재임을 보여준다.
세종대왕 동상과 함께 광화문광장의 중심축을 이루며, 약 250m 거리에 위치한[12] 두 동상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한국 역사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참조
[1]
뉴스
South Koreans at sword's point over hero's statue
https://www.latimes.[...]
Los Angeles Times
2017-03-10
[2]
서적
A Companion to Asian Art and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5-06-22
[3]
서적
Remembering, Forgetting and City Builders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2012-11-28
[4]
웹사이트
Statue of Admiral Yi Sun-Shin (충무공 이순신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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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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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噴水台】李舜臣銅像の移転をめぐる問題=韓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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呉世勲ソウル市長「光化門広場は国家の象徴物になる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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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説】光化門広場の政治利用、絶対に容認でき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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