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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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7년 전쟁, 네덜란드 침공,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그는 계몽 군주로서 통치하며 경제 개혁과 문화 예술 후원에 힘썼으며, 특히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후원했다. 178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이 되었으며, 1787년 프로이센 육군 야전원수가 되어 네덜란드 침공을 지휘했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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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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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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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
독일어 이름 | Karl Wilhelm Ferdinand |
작위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자 |
출생 | 1735년 10월 9일 |
출생지 | 볼펜뷔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신성 로마 제국 |
사망 | 1806년 11월 10일 |
사망지 | 오텐센, 함부르크 |
매장일 | 1806년 11월 24일 |
매장 장소 | 함부르크 오텐센, 크리스티안 교회 1819년 11월 6일,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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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작위 계승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자 |
통치 시작 | 1780년 3월 26일 |
통치 종료 | 1806년 11월 10일 |
이전 통치자 | 카를 1세 |
다음 통치자 | 프리드리히 빌헬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1764년, 오거스타 오브 웨일스와 결혼 |
자녀 | 아우구스타,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의 부인 카를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세자 캐롤라인, 영국 왕비 게오르크 빌헬름 크리스티안 공자 아우구스투스 공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아멜리아 공주 |
가문 | 브라운슈바이크-베버른 가문 |
아버지 | 카를 1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
어머니 | 필리피네 샤를로테 폰 프로이센 |
2. 초기 생애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어머니의 감독 아래 요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예루살렘 등에게서 폭넓고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에는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1753년, 아버지 카를 1세는 공국의 수도를 볼펜뷔텔에서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로 옮겼고, 왕가는 새로 지어진 브라운슈바이크 궁전으로 이사했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1735년 10월 9일 볼펜뷔텔에서 태어났으며, 아마도 볼펜뷔텔 성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1세와 그의 아내 프로이센의 필리피네 샤를로테 공주의 장남이었다.
그의 아버지 카를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신분 중 하나인 소국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통치 군주(Fürstde)였다. 필리피네 샤를로테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가장 아끼는 딸이자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이었다. 주권 군주의 상속자로서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세습 친왕(Erbprinz)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2. 2. 교육 및 초기 경력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1세와 그의 아내이자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딸인 필리피네 샤를로테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요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예루살렘 등의 가정교사로부터 폭넓고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젊은 시절에는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프로이센 왕가와의 친척 관계 및 동맹 관계 때문에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후국 군대는 프로이센군에 종속되어 있었다. 페르디난트도 젊은 나이에 7년 전쟁에 참전하여 동맹군 일원으로서 하스텐베크 전투, 민덴 전투, 발부르크 전투에서 싸웠다. 이때 페르디난트는 군 복무를 그만두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여 크게 다퉜다. 그러나 유명한 장군이었던 두 숙부 루트비히 에른스트와 페르디난트는 조카를 응원했다. 결국 페르디난트는 북독일 여러 제후의 맹주인 프리드리히 2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아버지에게 패하여 군 복무에서 물러났다.
3. 군사 경력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1756년부터 1763년까지 7년 전쟁에 참전하여 하스텐베크 전투, 민덴 전투, 바르부르크 전투 등에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주며 비정규전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1773년에는 프로이센 장군이 되었고, 1778년부터 1779년까지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787년, 프로이센 육군 야전원수로서 네덜란드 연합주(네덜란드 공화국)를 침공하여 바타비아 혁명을 진압하고 오라녜 공 빌럼 5세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캠페인은 신속하고 거의 무혈로 진행되어 그의 군사적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1792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지휘 하에 두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나,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이 과격화되었고, 발미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령관 직에서 강등되었다.[1]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프로이센군 최고 사령관으로 복귀했으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루이 니콜라 다부에게 패배하고 중상을 입어 사망했다.
3. 1. 7년 전쟁 참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1756년부터 1763년까지 7년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하노버 선제후국(대영 제국과의 개인 연합)과 주변 국가들을 프랑스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하노버 관찰군에 합류했다. 이 부대는 처음에는 앵글로-하노버 출신 윌리엄 오거스터스 공작이 지휘했다. 하스텐베크 전투(1757년)에서 보병 여단을 이끌고 돌격을 감행하여 명성을 얻었다.클로스터체벤 협약으로 하노버는 일시적으로 전쟁에서 벗어났지만, 이듬해 복귀했다. 윌리엄 오거스터스 공작은 영국으로 소환되었고, 남은 연합 북독일군은 브라운슈바이크페르디난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는 조카인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에게 장군(general officer)으로서 군 복무를 다시 시작하도록 설득했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민덴 전투(1759년)와 바르부르크 전투(1760년)에서 연합 앵글로-독일군의 일원이었다. 두 전투 모두 프랑스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였으며, 그는 훌륭한 부관 지휘관임을 입증했다. 그는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삼촌이 지휘하는 군대에서 계속 복무했으며, 이는 북독일군에게 일반적으로 성공적인 결과였다. 그는 비정규전(irregular warfare)의 공인된 대가가 되었다.
3. 2. 네덜란드 침공 (1787)
1787년, 공작은 프로이센 육군의 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가 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를 2만 명 규모의 프로이센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 연합주(네덜란드 공화국)를 침공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 침공의 목표는 바타비아 혁명의 애국자들을 진압하고, 오라녜 공의 총독(stadtholder) 오라녜 공 빌럼 5세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토의 상당 부분이 빌럼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개인 병력은 애국자 민병대를 진압할 수 없었으며, 여러 네덜란드 지방은 그를 지원하기를 거부했다.[3]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공작의 침공에 대해 "그의 성공은 신속하고 완벽했으며 거의 무혈이었고, 동시대인들의 눈에 이 캠페인은 완벽한 지휘의 전형으로 보였다."라고 기술했다. 애국자들은 책략에 밀려 압도당했다. 그들의 민병대는 어떠한 실질적인 저항도 할 수 없었고, 봉기를 포기해야 했으며, 많은 애국자들이 프랑스로 도망갔다.[4]
공작의 군대는 9월 13일 네덜란드에 진입하여 그날 네이메헌을 점령했다.[5] 7,000명의 병력을 거느린 잘름 라인그라프 휘하의 가장 큰 애국자 군대는 빠르게 책략에 밀려 위트레흐트를 포기해야 했고, 공작은 9월 16일에 위트레흐트를 점령했다.[6] 프로이센 군대는 짧은 포격 후 17일에 호르컴을 점령했고, 18일에는 도르드레흐트, 19일에는 델프트를 점령했다. 그들은 17일에 왕당파 반란이 일어난 후 애국자들이 철수해야 했던 헤이그에 20일에 진입했다. 애국자들이 마지막으로 점령한 도시인 암스테르담은 10월 10일에 항복했다. 이 캠페인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빌럼 5세는 권력을 되찾았고, 1795년까지 그 권력을 유지했다.
동시대인들과 역사학자들 모두 공작의 결정적인 캠페인을 칭찬했는데, 그는 군대를 집중시키고 압도적인 국지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책략을 펼친 후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그는 또한 낮은 사상자 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한 영국 관찰자는 "나무의 수액이 유일하게 흘린 피"라고 말했는데(과장), 이는 양측이 건설한 나무 말뚝울타리와 포대에 대한 언급이었다.

3. 3. 프랑스 혁명 전쟁 참전
1792년 초여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페르디난트는 코블렌츠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대비했다. 지롱드가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도록 조치한 후, 1792년 4월 20일 표결을 통해 가톨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테스탄트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지휘 하에 두었다.3. 3. 1. 발미 전투와 패배
1792년 7월 25일,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프랑스 혁명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프랑스 혁명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프랑스 왕족에게 해가 가해지면 파리 시민에게 보복할 것이라는 위협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오히려 튀일리 궁 습격 사건을 유발하여,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정의 멸망을 초래했다.[1]발미 전투에서 패배한 후, 페르디난트는 최고 사령관 직에서 강등되었다.[1]
3. 4. 나폴레옹 전쟁과 죽음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지휘 하에 두었다.프로이센은 프랑스 혁명에 대항한 제2차 또는 제3차 동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1806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4차 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 70세가 넘었음에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프로이센의 루이제 여왕의 요청으로 프로이센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복귀했다.
당시 프로이센 군대는 구식 전술을 사용하고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받았다. 참모본부의 구조는 특히 역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여러 장교들이 서로 다른 계획을 세우고 어떤 계획을 따라야 할지 동의하지 않아 조직력 부족과 우유부단함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1806년 10월 14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아우어슈테트의 대규모 프로이센 군대를 지휘했다. 프로이센 군은 프랑스 군보다 2배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원수 다부에게 패배했다. 전투 중에 그는 머스킷 총탄에 맞아 두 눈을 잃었고, 그의 부관 프리드리히 빌헬름 카를 폰 슈메타우 역시 치명상을 입어 프로이센 지휘 체계에 혼란을 야기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공작은 진격하는 프랑스 군대 앞에서 군대와 함께 실려갔다. 그는 1806년 11월 10일 오텐젠에서 부상으로 사망했다.

공작의 시신은 1806년 오텐젠의 크리스티안 교회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이후 1819년 11월 6일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으로 옮겨져 다시 매장되었다.
4. 통치자로서의 업적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아버지 카를 1세의 뒤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이 된 후,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하여 공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카를 1세는 전쟁을 열정적으로 지지했지만, 그 비용으로 국가 재정이 거의 파탄났다. 1773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게하임라트 페론체 폰 로텐크로이츠의 지원을 받아 경제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 국가 재정을 회복하고 경제를 개선했다.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훈련된 군대를 대영 제국에 용병으로 제공하여 국가 재정을 채울 기회를 보았다. 1776년 카를 1세는 영국 지지 조약을 체결했고,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은 프리드리히 아돌프 리데젤 장군 지휘 하에 4,000명의 병력을 미국에서 영국군과 함께 복무하도록 제공했다.
1780년 카를 1세가 사망하면서 왕위를 계승한 그는 경제와 신중함이 특징인 계몽 군주로서 모범적인 군주로 알려졌다. 백성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과 신중함을 결합하여 점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고, 계몽주의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다. 특히 젊은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후원하여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했다.[2]
삼촌 프리드리히 대왕을 닮았지만, 국왕의 결단력이 부족했고, 군사 및 시민 문제에서 지나치게 신중한 경향이 있었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를 프로이센과 긴밀한 동맹으로 이끌었고,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위해 싸웠으며, 야전원수로서 자신의 연대를 모범적인 연대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1803년 독일 제후국 해산 과정에서 세속화된 인접 제국 수도원인 간더스하임과 헬름슈테트를 병합했다.
4. 1. 계몽 군주로서의 면모
1773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후작(동시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의 칭호도 계승)이 되었다. 이후 소규모의 볼펜뷔텔 후국은 정부 개혁의 성공으로 번영했다. 요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예루살렘과 교육자 요아힘 하인리히 캄페의 훈도 덕분에 페르디난트는 전형적인 계몽 군주로 성장했다.공작은 백성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과 신중함을 바탕으로 점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동시대 군주들의 보수주의와 다른 이들의 지나치게 열정적인 대대적 변화 사이에서 성공적인 중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계몽주의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으며, 특히 젊은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후원하여 가우스의 아버지가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했다.[2]
1777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애첩 마리아 안토니아 폰 브란코니와 헤어지고 루이제 폰 헤르테펠트를 새로운 정부로 삼았다. 페르디난트는 아내 오거스타와 별거한 채 나머지 30년을 루이제와 행복하게 보냈다. 페르디난트의 딸 캐롤린 아말리에에 따르면 루이제는 "궁 안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현명한 피조물"이었다.
스웨덴 공주이자 일기 작가인 헤드비그 엘리자베스 샤를로테는 1799년에 브라운슈바이크를 방문하여 공작을 "재치 있고, 문자 그대로의 사람이자 유쾌한 지인이지만,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의례적이다. 그는 매우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백성들의 필요를 돌보는 훌륭한 국가의 아버지이다."라고 묘사했다.[3]
1803년 독일 제후국 해산 과정에서 인접한 제국 수도원인 간더스하임과 헬름슈테트가 세속화되어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에 병합되었다.
4. 2. 경제 개혁
카를 1세는 전쟁을 열정적으로 지지했지만, 그 비용을 지불하느라 국가 재정을 거의 파탄시켰다. 그 결과, 1773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게하임라트 페론체 폰 로텐크로이츠의 지원을 받아 경제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매우 성공적으로 국가 재정을 회복하고 경제를 개선했다. 이로 인해 공작은 공국 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미국 독립 전쟁이 1775년에 발발하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훈련된 군대를 대영 제국에 용병으로 제공하여 국가 재정을 채울 기회를 보았다. 1776년, 카를 1세는 영국을 지지하는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그렇게 한 최초의 군주였다. 이 조약에 따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은 미국에서 영국군과 함께 복무할 4,000명의 병력을 프리드리히 아돌프 리데젤 장군의 지휘하에 제공했다. 리데젤은 영국군 장군 존 버고인 휘하의 사라토가 전역에 참전하는 모든 독일군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버고인은 사라토가 전투 (1777)에서 패배했고, 그의 군대는 컨벤션군으로 포로가 되었다. 항복 조건에 따라 컨벤션군은 가석방되어 유럽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미국 대륙 회의는 이 협약을 철회했다.[1] 컨벤션군은 178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억류되었다.
4. 3. 문화 예술 후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계몽주의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다. 특히 젊은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후원하여 가우스의 아버지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했다.[2]5. 결혼과 가족 관계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1764년 영국 공주 오거스타와 결혼하여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우구스테 카롤리네 프리데리케 | 1764년 - 1788년 |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 사생아 출산 중 합병증으로 사망. |
카를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 1766년 - 1806년 | 황태자, 심각한 학습 장애, 오라녜나사우의 프레데리카와 결혼, 자녀 없음. |
캐롤라인 아말리에 | 1768년 - 1821년 | 영국 국왕 조지 4세와 결혼, 웨일스 공주 샬럿 출산, 이혼 소송 후 사망. |
게오르크 빌헬름 크리스티안 | 1769년 - 1811년 | 심각한 학습 장애, 무능력자 선언, 미혼. |
아우구스트 | 1770년 - 1822년 | 맹인, 미혼. |
프리드리히 빌헬름 | 1771년 - 1815년 | 아버지의 뒤를 이음, 두 아들을 낳음. |
아멜리에 카롤리네 도로테아 루이제 | 1772년 - 1773년 | 요절 |
이 부부의 자녀 중 많은 수가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겪었는데, 일부에서는 근친상간을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로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자녀들을 "대부분 정신과 신체가 불구자"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
장남 카를 게오르크 아우구스트는 심각한 학습 장애를 겪었지만 황태자로 지명되었고, 1790년 오라녜나사우의 프레데리카와 결혼했다. 차남 게오르크 빌헬름 크리스티안은 더 심각한 학습 장애로 인해 무능력자로 선언되었다. 셋째 아들 아우구스트는 맹인이었다. 넷째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만이 건강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두 딸 역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 큰딸 아우구스테 카롤리네는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드리히 1세와 별거 후 사망했고, 작은딸 캐롤라인은 영국 국왕 조지 4세와 이혼 소송 후 사망했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또한 포르스텐부르크라는 성을 가진 사생아를 한 명 두었다.[2]
5. 1. 영국 공주 오거스타와의 결혼

과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왕가는 살리카법에 따라 가문의 토지 분할을 피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가문 내에서 결혼했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하노버)의 두 국가로 통합되었다. 선제후국은 가문의 하노버 분가가 영국과의 동군 연합으로 통치했다. 따라서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영국-하노버 공주인 영국 공주 오거스타, 웨일스 공 프레데릭과 그의 아내 작센-고타 공녀 아우구스타의 딸이자, 당시 재위 중인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여동생과 결혼하도록 준비되었다.
1764년, 7년 전쟁이 끝난 직후, 그는 런던으로 (해리치에 상륙) 공주 오거스타와 결혼하기 위해 여행을 갔다. 그는 전쟁 중 영국 연합군과 함께 복무한 덕분에 영국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영국 의회는 결혼 선물로 80000GBP의 거액과 연간 3000GBP의 수입을 그에게 투표하여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조지 3세는 환영하지 않았고, 왕자는 왕실 궁궐 대신 서머셋 하우스에 숙소를 제공받고, 군사 경호원을 제공받지 못했으며, 결혼식 하인들에게 낡은 옷을 입도록 지시받는 등 수많은 작은 모욕을 통해 불쾌감을 표현했다. 이는 대중의 열정을 더욱 악화시켰는데, 특히 왕자가 오페라에 참석하면서 인기가 없는 군주에게 등을 돌렸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더욱 그랬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윌리엄 피트 (전쟁 중 영국 총리였지만 1761년에 사임)와 의회 야당의 다른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왕실의 불쾌감에 반항했다. 결혼은 완료되었지만, 이러한 책략의 결과로 왕자는 영국에 단 13일만 머물렀다.


1764년 1월 16일, 카를은 영국의 아우구스타 공주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누나였다. 이 부부는 서로 먼 친척이었는데, 조지 1세의 증손자였다. 따라서 아주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지만,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가문과 하노버 가문 사이에는 많은 혼인 관계가 있었고, 이 두 가문은 모두 벨프 가문의 분가였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부부의 자녀 중 많은 수가 신체적, 정신적 또는 심리적 장애를 갖게 된 원인으로 근친상간을 지적해 왔다. 실제로 공작은 자신의 자녀들을 폰 마센바흐에게 "대부분 정신과 신체가 불구자"라고 묘사하기까지 했다.
결혼 직후, 공작은 아내를 위해 리치몬드 성을 지었다. 이 성은 그녀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영국식 건축 양식과 영국식 정원으로 지어졌다.
공작과 그의 아내 아우구스타는 네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우구스테 카롤리네 프리데리케 | 1764년 - 1788년 |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 사생아 출산 중 합병증으로 사망. |
카를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 1766년 - 1806년 | 황태자, 심각한 학습 장애, 오라녜나사우의 프레데리카와 결혼, 자녀 없음. |
캐롤라인 아말리에 | 1768년 - 1821년 | 영국 국왕 조지 4세와 결혼, 웨일스 공주 샬럿 출산, 이혼 소송 후 사망. |
게오르크 빌헬름 크리스티안 | 1769년 - 1811년 | 심각한 학습 장애, 무능력자 선언, 미혼. |
아우구스트 | 1770년 - 1822년 | 맹인, 미혼. |
프리드리히 빌헬름 | 1771년 - 1815년 | 아버지의 뒤를 이음, 두 아들을 낳음. |
아멜리에 카롤리네 도로테아 루이제 | 1772년 - 1773년 | 요절 |
미래의 스웨덴 여왕인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드비히 엘리자베스 샤를로테는 공작 부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공작 부인은 영국의 여왕의 여동생이자 전형적인 영국 여성이다. 그녀는 목사의 아내처럼 매우 소박하게 보였고, 많은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매우 존경받지만, 매너가 전혀 없다. 그녀는 얼마나 어렵고 불쾌할 수 있는지 고려하지 않고 가장 이상한 질문을 한다.
공작은 또한 적어도 한 명의 사생아를 두었는데, 그의 아들은 포르스텐부르크라는 이름으로, 유망한 군 경력을 시작했지만 1793년 전투에서 사망했다.
5. 2. 자녀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1764년 1월 16일 영국의 아우구스타와 결혼하여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었다.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우구스타 카롤리네 | 1764년 12월 3일 | 1788년 9월 27일 | 1780년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 자녀를 낳음. |
카를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 1766년 2월 8일 | 1806년 9월 20일 | 1790년 오라녜나사우 공주 프레데리카 루이제 빌헬미네와 결혼, 자녀 없음. |
카롤리네 아말리에 | 1768년 5월 17일 | 1821년 8월 7일 | 1795년 영국 국왕 조지 4세와 결혼, 자녀를 낳음. |
게오르크 빌헬름 크리스티안 | 1769년 6월 27일 | 1811년 9월 16일 | 무능력자로 선언되어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됨. |
아우구스트 | 1770년 8월 18일 | 1822년 12월 18일 | 무능력자로 선언되어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됨. |
프리드리히 빌헬름 | 1771년 10월 9일 | 1815년 6월 16일 | 1802년 바덴 공주 마리아 엘리자베트 빌헬미네와 결혼, 자녀를 낳음. |
아멜리에 카롤리네 도로테아 루이제 | 1772년 11월 22일 | 1773년 4월 2일 | 유아기에 사망. |
일부 평론가들은 이 부부의 자녀 중 많은 수가 신체적, 정신적 또는 심리적 장애를 갖게 된 원인이 근친상간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자녀들을 폰 마센바흐에게 "대부분 정신과 신체가 불구자"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
장남 카를 게오르크 아우구스트는 심각한 학습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거의 백치"로 여겨졌지만, 황태자로 지명되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0년에 오라녜나사우의 프레데리카와 결혼했다. 그는 1806년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차남 게오르크 빌헬름 크리스티안은 형보다 훨씬 더 심각한 학습 장애를 겪었고, 무능력자로 선언되어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셋째 아들 아우구스트는 맹인이었고, 역시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넷째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정신과 신체가 건강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3]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와 아우구스타는 세 딸도 두었는데, 그 중 두 딸은 성인이 되었다. 두 딸 모두 미래의 국왕과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에 실패하고 남편과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큰딸 아우구스테 카롤리네 프리데리케는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했지만 별거했고, 사생아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작은딸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은 영국 국왕 조지 4세와 결혼하여 웨일스 공주 샬럿을 낳았지만, 남편은 간통을 이유로 이혼을 시도했고, 캐롤라인은 남편의 대관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6. 평가 및 유산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프로이센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군인이자 계몽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군사 전략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군사적 행동은 때때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제러미 블랙은 1783년부터 1793년까지의 영국 외교 정책을 다룬 자신의 저서에서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공작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군사적 역량과 리더십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1]
아르튀르 츄케는 자신의 저서 "혁명 전쟁: 제1차 프로이센 침공"에서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공작의 군사 작전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었다.[3]
참조
[1]
서적
Saratoga 1777: Turning Point of a Revolution
Osprey
2000
[2]
웹사이트
The Sesquicentennial of the Birth of Gauss
http://www.mathsong.[...]
2008-02-26
[3]
서적
Hedvig Elisabeth Charlottas dagbok
https://books.google[...]
P.A. Norstedt & Söners förlag
[4]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5]
서적
数学を拡げた先駆者たち 無限、集合、カオス理論の誕生
青土社
2009-04-15
[6]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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