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다 문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이다 문자는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류큐 왕국과 일본의 야에야마 제도에서 사용된 그림 문자 체계이다. 세금 징수 기록을 위해 나무판에 농작물, 가축, 물고기 등을 상징하는 그림 문자와 쑤저우 숫자를 차용한 숫자, 가구 기호 등을 사용했다. 1609년 사쓰마 번의 류큐 왕국 복속 이후 인두세 부과와 관련하여 사용이 시작되었으며, 메이지 시대 초등학교령 발포로 한자와 가나가 보급되면서 쇠퇴했다. 현재는 국립민족학박물관 등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요나구니와 타케토미 지역에서 민속 예술이나 상품 디자인에 활용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시아의 문자 - 동파 문자
동파 문자는 중국 나시족이 사용하는 그림 문자로, 7세기 당나라 초기에 기원하여 동파교 의례 텍스트 기록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현대에는 관광 상품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세계 유일의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그림 문자 체계이다. - 아시아의 문자 - 수 문자
수 문자는 중국 수족의 문자로, 갑골문, 금문과 유사하며 천문, 지리, 종교 등 문화 정보를 기록하는 데 쓰이나 해독에 지식이 필요하고 소멸 위기에 있어 중국 정부가 보존 노력 중이며 유니코드 등록이 추진되고 있다. - 요나구니정 - 요나구니 공항
오키나와현 요나구니섬에 위치한 요나구니 공항은 1943년 일본군에 의해 건설되어 민간 항공 운항을 시작, 활주로 확장과 제트기 취항을 거쳐 현재 류큐 에어 커뮤터가 나하 및 신이시가키 공항 노선을 운항하며 항행 안전 시설과 편의 시설을 갖춘 1층 터미널을 운영하고 있다. - 요나구니정 - 요나구니섬
요나구니섬은 일본 최서단 오키나와현의 섬으로, 대만과 가까워 대만 산을 볼 수 있고, 독특한 지형과 자연환경, 요나구니마, 하나자케 등의 특산물, 해저 지형 논쟁, Dr.코토 진료소 촬영지, 센카쿠 열도 관련 해안 감시 기지 등으로 지정학적 중요성을 가진다. - 표어문자 - 예서
예서는 중국 서체의 한 종류로, 전서에서 파생되어 한나라 시대에 주요 서체로 사용되었으며, 획이 가로로 길고 파책을 특징으로 하며, 서예 분야에서 꾸준히 계승되어 현대에는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 - 표어문자 - 서하 문자
서하 문자는 1036년 야리인영이 창제한 약 6,000자로 구성된 서하 왕조의 고유 문자 체계로, 한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구조를 지니며 정부 공식 문서 및 불경 번역 등에 사용되었고, 서하 멸망 후에도 사용 기록이 있으며, 현재 유니코드에 6,145자 이상이 등재되어 일부 글자에는 중국에 대한 대항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카이다 문자 | |
---|---|
카이다 문자 | |
유형 | 표어 문자 (상업 거래 및 납세 기록에 사용) |
사용 기간 | 중세 - 메이지 시대 |
사용 언어 | 요나구니어 |
유니코드 | 할당 없음 |
2. 역사
1609년, 사쓰마번은 류큐 왕국을 침공하여 복속시켰고, 이후 오키나와 본섬과 야에야마 제도에 대한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류큐 왕국에 매년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1640년에는 야에야마 제도에 인두세를 부과하였다.[2]
각 섬에 할당량이 정해지고, 다시 각 공동체에 할당된 후,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개인에게 할당량이 정해졌다. 공동체 지도자들은 이시가키의 정부 사무실에서 할당량 통보를 받았고, 잉카 제국의 키푸와 유사한 짚 기반 계산 및 숫자 기록 방식인 ''와라잔''(야에야마에서는 ''바라잔'')을 사용하여 계산을 확인했다.[3] 그 후, 각 가구의 할당량이 이타후다/板札일본어 또는 한사쓰/判札일본어라는 나무 판에 적혔다. 카이다 문자가 사용된 곳이 바로 여기였다.[3] ''소로/そろ일본어'' 스타일의 일본어가 행정 언어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외딴 섬은 문맹 농민에게 알리기 위해 그림 문자에 의존해야 했다.[3]
19세기 초, 오하마 세이키라는 관리가 ''이타후다''를 위해 "완벽한 상형 문자"를 디자인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이전의 "불완전한" 상형 문자가 존재했음을 암시한다.[3] 스도(1944)는 9세대 전, 케다구스쿠 가문의 조상인 마세가 카이다 문자와 ''와라잔''을 대중에게 가르쳤다는 요나구니 구술 역사를 기록했고, 이 사건을 17세기 후반으로 추정했다.[2]
메이지 시대에 초등학교령이 발포될 때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8] 주로 상품의 매매 기록이나 징세 기록에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인 문장을 표기할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고, 공교육이 도입된 이후에는 한자와 가나가 보급되면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8] 인두세는 1903년에 폐지되었다.[4]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습으로 대부분의 카이다 문자 기록이 소실되었지만,[8] 국립민족학박물관 등에 징세 기록을 적은 목판이 남아있다. 현재 요나구니와 타케토미에서는 기록 보관 시스템보다는 예술적 가치를 위해 민속 예술, 티셔츠 및 기타 제품에 사용된다.[4] 요나구니 섬 해저 지형에서도 카이다 문자와 유사한 흔적이 있는 바위가 발견되었지만,[9] 연대상 맞지 않아 논란이 있다.
2. 1. 기원 및 어원
카이다 문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스도 도시카즈(須藤利一)는 1944년 "카이다"라는 명칭이 사쓰마번에서 "정부 기관"을 의미하는 "카리야"(仮屋, karja:)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2] 그는 이 용어가 오키나와와 야에야마의 관리들에게 차용되었고(현대 이시가키어에서는 karja:), 표준 일본어의 /j/가 요나구니어에서 규칙적으로 /d/에 대응하며, 모음 사이에서 /r/이 종종 생략되는 현상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가설은 카이다 문자가 세금 징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과 부합한다.[2]한편, 이케마 에이조(池間栄三)는 1839년 오하마 세이키(大浜清喜)라는 관리가 "완벽한 상형 문자"를 고안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카이다 문자가 류큐 왕조의 지배 이후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요나구니 섬의 구전 역사에 따르면, 9세대 전 케다구스쿠 가문의 조상인 마세가 카이다 문자와 와라잔(藁算, 짚을 이용한 계산법)을 대중에게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스도는 이 사건을 1640년의 인두세 시행에 따라 17세기 후반으로 추정했다.[8]
2. 2. 사용 및 쇠퇴
카이다 문자는 주로 세금 징수와 관련된 기록에 사용되었다. 각 섬과 공동체, 개인에게 할당된 세금은 '이타후다'(板札) 또는 '한사쓰'(判札)라고 불리는 나무판에 기록되었으며, 이때 카이다 문자가 사용되었다.[3] 류큐 왕국의 행정 언어는 일본어였지만, 외딴 섬에서는 문맹률이 높아 그림 문자인 카이다 문자가 사용되었다.[3]1640년에 인두세가 야에야마에 부과되었는데[2], 각 섬에 할당량이 정해지고, 다시 각 공동체에 할당된 후,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개인에게 할당량이 정해졌다. 공동체 지도자들은 이시가키의 정부 사무실에서 할당량 통보를 받았고, 잉카 제국의 키푸와 유사한 짚 기반 계산 및 숫자 기록 방식인 ''와라잔''(야에야마에서는 ''바라잔'')을 사용하여 계산을 확인했다.[3]
19세기 초, 오하마 세이키라는 관리가 ''이타후다''를 위해 "완벽한 상형 문자"를 디자인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이전의 "불완전한" 상형 문자가 존재했음을 암시한다.[3] 스도(1944)는 9세대 전, 케다구스쿠 가문의 조상인 마세가 카이다 문자와 ''와라잔''을 대중에게 가르쳤다는 요나구니 구술 역사를 기록했고, 이 사건을 17세기 후반으로 추정했다.[2] 인두세는 1903년에 폐지되었지만,[4] 카이다 문자는 메이지 시대에 전국적인 초등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어 문맹률이 급격히 낮아질 때까지 사용되었다.[4][8]
카이다 문자는 상품 매매나 징세 기록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인 문장을 표기할 정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8] 공교육 도입 이후에는 한자와 가나가 보급되면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8]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습으로 대부분의 카이다 문자 기록이 소실되었지만,[8] 국립민족학박물관 등에 징세 기록을 적은 목판이 남아있다. 현재 요나구니와 타케토미에서는 기록 보관 시스템보다는 예술적 가치를 위해 민속 예술, 티셔츠 및 기타 제품에 사용된다.[4] 요나구니 섬 해저 지형에서도 카이다 문자와 유사한 흔적이 있는 바위가 발견되었지만,[9] 연대상 맞지 않아 논란이 있다.
3. 구성 요소
카이다 문자의 그림 문자는 쌀, 보리, 콩과 같은 농작물,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 물고기, 직물 등 다양한 사물을 표현한다. 동물, 식물 및 그 부산물에 대한 언급을 포함한다.
숫자의 경우, "수추마"(스주마, 蘇州碼)라고 불리는 유사한 체계가 오키나와와 미야코에서 발견되며, 쑤저우 숫자(蘇州碼子)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와라잔(藁算)은 짚을 묶어 숫자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잉카 제국의 키푸(Quipu)와 유사하다.
다한이라고 불리는 가구 기호는 각 가구를 구별하는 데 사용되었다.
3. 1. 그림 문자
카이다 문자의 그림 문자는 쌀, 보리, 콩과 같은 농작물,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 물고기, 직물 등 다양한 사물을 표현한다. 동물, 식물 및 그 부산물에 대한 언급을 포함한다.3. 2. 숫자
숫자의 경우, "수추마"(스주마, 蘇州碼)라고 불리는 유사한 체계가 오키나와와 미야코에서 발견되며, 쑤저우 숫자(蘇州碼子)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와라잔(藁算)은 짚을 묶어 숫자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잉카 제국의 키푸(Quipu)와 유사하다.3. 3. 가구 기호
다한이라고 불리는 가구 기호는 각 가구를 구별하는 데 사용되었다.4. 현대적 의의
5. 연구사
사사모리 기스케는 1893년 오키나와현 방문 기록인 ''난토 탐험''(南島探検, ''남쪽 섬 탐험'')에서 카이다 문자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는 카이다 문자 텍스트를 복사하여 남겼으며, 당시 정권이 섬 주민들에게 강요한 고된 노동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다시로 야스사다는 오키나와와 미야코에서 발견된 다양한 숫자 체계를 수집하여 1887년 도쿄 국립 박물관에 기증했다.[5]
1915년, 수학 교사 야무로 키이치(矢袋喜一)는 자신의 저서에서 카이다 문자, ''바라잔'' 매듭 세는 밧줄, 지역 숫자 단어의 예시를 소개했다. 1930년대에 섬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한 인류학자 가와무라 타다오는 카이다 문자가 소포를 보내는 데 사용되는 방식을 기록했다.[7] 스도 도시카즈(須藤利一)는 1944년 카이다 문자를 사용하여 잎에 상거래를 기록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카이다 문자의 어원을 제안했다.[2]
참조
[1]
서적
Taketomi-jima shi minwa min'yō hen
[2]
서적
Nantō oboegaki
[3]
서적
Yaeyama rekishi
[4]
서적
Yonaguni no rekishi
[5]
서적
Yonaguni-jima sōgō chōsa hōkokusho
https://okimu.jp/use[...]
2020-08-15
[6]
간행물
A Quinary System of Notation employed in Luchu on the Wooden Tallies termed Shō-Chū-Ma.
[7]
서적
Nanpō bunka no tankyū
[8]
웹사이트
沖縄Q&A
http://www13.plala.o[...]
沖縄県大阪事務所
2003-04-20
[9]
웹사이트
地上にも同じくさび跡?
http://www.churashim[...]
日本トランスオーシャン航空
2002-01-25
[10]
웹인용
与那国島のカイダー字をめぐる一考察
http://okimu.jp/user[...]
沖縄県立博物館・美術館
2018-05-16
[11]
웹인용
沖縄Q&A
http://www13.plala.o[...]
沖縄県大阪事務所
2003-04-20
[12]
웹인용
地上にも同じくさび跡?
http://www.churashim[...]
日本トランスオーシャン航空
2002-01-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