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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펫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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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펫배거는 남북 전쟁 이후 남부로 이주한 북부 출신 사람들을 경멸적으로 이르는 말로, 카펫 가방을 사용하던 데서 유래했다. 현대에는 지역 연고 없이 공직에 출마하는 외부인이나, 1990년대 영국 상호저축은행의 주식회사 전환 과정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미국에서는 정치적 맥락에서, 영국에서는 금융,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원주민 예술계, 프랑스에서는 낙하산 후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의 OSS 작전명으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스테이크 요리의 한 종류를 지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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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펫배거
일반 정보
용어카펫배거 (Carpetbagger)
유형경멸적인 호칭
대상남북 전쟁 이후 남부로 이주한 북부인
특히 부를 축적하거나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온 사람
동의어양키
스캘러왜그
역사적 배경
시기남북 전쟁 이후 재건 시대
원인남부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
북부 자본과 기회의 유입
활동남부의 토지, 부동산, 사업 인수
정치 참여 및 공직 진출
비판과 논란
비판남부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
남부 경제 수탈
옹호남부 재건에 기여
북부의 선진적인 제도와 문화 도입
흑인 권리 옹호
사회적 영향
남부 사회사회적 갈등 심화
북부인에 대한 적대감
재건 정책의 실패
정치적 영향공화당 지지 세력 형성
남부 민주당의 반발
용어의 유래
어원'양탄자 가방(carpet bag)'을 들고 다니는 사람
의미부랑자, 떠돌이
쉽게 이주하는 사람

2. 용어의 유래와 정의

"카펫배거(carpetbagger)"는 주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는 미국 남북 전쟁(U.S. Civil War) 이후 미국 남부로 이주한 북부인들 중 다수가 들고 다녔던 카펫 가방(carpet bag)(카펫 천으로 만든 값싼 여행 가방)에서 유래했다. 이 용어는 곧 외부인에 의한 기회주의와 착취를 의미하게 되었다.

테네시 국무장관이자 급진 공화당원이었던 앤드류 J. 플레처(Andrew J. Fletcher)는 이 용어를 널리 퍼뜨린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3] 그는 1867년, 몸이 불편했던 테네시 주지사 윌리엄 G. 브라운로(William G. Brownlow)의 재선을 지지하는 선거 유세 연설에서, 남북 전쟁 직후 군대를 따라 북부에서 내려와 관직을 노리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 진심으로 여기에 정착하여 우리 중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북부 사람을 나보다 더 기꺼이 환영하는 사람은 없지만, 한 벌의 더러운 셔츠와 한 켤레의 더러운 양말을 오래된 녹슨 카펫 가방에 넣고 와서, 빨래를 하기도 전에 관직에 출마하는 모험가와 관직 추구자에게는 환영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 연설에서 "카펫 가방(carpet bag)"이라는 표현이 유명해졌고, 여기에서 "카펫 가방 정부(carpet-bag government)"라는 용어도 생겨났다.[4]

현대 미국에서는 이 용어가 특정 지역에 짧은 기간 동안만 거주했거나 지역 사회와 별다른 유대 관계가 없으면서 공직에 출마하는 외부인, 즉 낙하산 후보(parachute candidate)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편, 20세기 말 영국에서는 '카펫배거'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는 상호 조직(mutual organization)(예: 건축 조합(building society))에 가입한 뒤, 개인적인 금전적 이익을 위해 해당 조직을 주식회사(joint stock company)로 전환하도록 탈상호화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5]

3. 역사적 배경

남북 전쟁 이후 미국 남부의 공화당은 세 그룹으로 구성되었다. 백인 남부 민주당원들은 이 중 두 그룹을 경멸적인 용어로 불렀는데, 공화당을 지지한 백인 남부 출신은 스캘러웨그(Scalawag), 북부에서 새로 이주해 온 이들은 '''카펫배거'''(Carpetbagger)라고 불렸다. 나머지 한 그룹은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었다.[6] 당시 남부에 있던 430개의 공화당 신문 대부분은 스캘러웨그가 편집했고, 약 20%는 카펫배거들이 편집했다. 백인 사업가들은 공화당 신문을 보이콧하는 경향이 있어, 이 신문들은 주로 정부의 후원으로 유지되었다.[7][8]

1862년부터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전쟁으로 패배한 남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교사, 종교 전도사 등이 포함되었으며, 일부는 북부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71][72] 또한 1865년 설립된 연방 정부 기관인 해방노예국(Freedmen's Bureau)에서 활동하며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돕거나, 남부에 공립학교를 세우고 정치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71][72] 특히 많은 북부 여성들은 오랫동안 교육이 금지되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남부로 이주했다.[73]

역사가 에릭 포너는 대부분의 카펫배거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과 함께, 남부 사회를 노예제에서 자유 사회로 바꾸려는 개혁 의지를 동시에 가졌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포너에 따르면 이들은 일반적으로 시민권 법안, 경제 개발 지원, 공립학교 시스템 설립 등 남부의 민주화와 현대화를 지지했다.[9] 하지만 남부로 이주한 모든 북부인이 순수한 개혁의 열정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74] 카펫배거들의 남부 이주 동기는 이처럼 복합적이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이후 남부 재건 과정에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3. 1. 개혁의 열망

남북 전쟁 이후, 1862년부터 북부의 노예 폐지론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미국 남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10][71] 이들 중에는 교사나 선교사가 많았으며, 일부는 북부 교회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상당수는 인종 평등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려는 이상주의자들이었으며[71], 1865년에 설립되어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가난한 백인들을 돕기 위한 연방 기관인 해방노예국(Freedmen's Bureau)의 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11][12][71] 해방노예국은 이전까지 공립학교 시스템이 부재했던 남부의 시골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여, 문맹률이 높았던 흑인과 가난한 백인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11][12][72]

노예제 하에서는 많은 흑인들이 법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글을 읽는 것이 금지되었었다. 전쟁 이후 수백 명의 북부 백인 여성들이 남부로 이주하여 새로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데 헌신했다.[13][73] 이들은 비슷한 신념을 가진 남부 출신 교사들과 함께 교육 활동에 참여했으며, 특히 감리교와 침례교 교회는 전쟁 전후로 노예와 해방된 흑인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14]

1872년 미국 지도. 재건 시대 북부와 남부 간의 부의 불균형을 보여줌


교육과 평등 실현 외에도 다른 동기들이 카펫배거들의 남부 이주에 영향을 미쳤다. 일부는 은행이나 소매업체를 설립하는 등 경제적인 기회를 추구했다. 이들 중 다수는 전직 북군 병사들로, 새로운 개척지에서 자신들의 저축과 에너지를 투자하고자 했다. 또한 "면화 재배로 남부에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당시 신문 보도에 이끌려 남부로 온 민간인들도 있었다.[15]

역사가 에릭 포너는 대부분의 카펫배거들이 개인적인 이익 추구와 함께 "노예 제도의 문명을 자유의 문명으로 대체하기 위한" 노력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결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포너에 따르면, 카펫배거들은 일반적으로 남부 사회의 민주화와 현대화를 목표로 하는 시민권 법안, 경제 개발 지원, 공립학교 시스템 설립 등을 지지했다.[9] 이들은 남부인들(흑인과 백인 모두)이 경제적 진취성이나 근면함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북부의 자본과 에너지"만이 남부에 자유 노동 시스템의 축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15] 이러한 생각은 남부의 비효율적인 남부 농장 제도를 철도, 공장 및 보다 효율적인 농업으로 대체하려는 현대화 비전으로 이어졌다. 카펫배거들은 공립학교 설립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수많은 대학과 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주 의회의 도움을 받아 남부 철도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는데, 1870년 북부인들은 남부 철도 노선의 21%(마일리지 기준)를 장악했고, 이사의 19%가 북부 출신이었다. 1890년까지 그들은 마일리지의 88%, 이사의 47%를 장악했다.[18]

카펫배거들은 대체로 교육 수준이 높고 중산층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변호사, 사업가, 신문 편집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며, 상당수(재건 시대 의회에서 활동한 60명 중 52명 포함)는 북군 복무 경험이 있는 참전 용사였다.[16] 하지만 남부로 이주한 모든 북부인이 개혁적인 열망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며, 일부는 개인적인 야심을 채우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74] 대표적인 "흑인 카펫배거"들은 자본과 노동의 이익이 동일하며, 해방된 흑인 노예들은 "인생 경주에서 정직한 기회" 이상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17]

3. 2. 경제적 동기

남북 전쟁 이후 남부로 이주한 북부 사람들 중 상당수는 경제적인 기회를 찾으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농장을 사거나 빌려서 부유한 지주가 되었고, 해방된 흑인들을 노동력으로 고용한 사업가들이었다.[75]

이러한 이주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상당수는 전직 북군 군인들로, 남부를 유망한 새로운 미개척지로 보고 재산을 투자하려 했다.[75] 또한, 일부 민간인들은 "남부에서 목화를 재배하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당시 언론 보도에 매력을 느껴 남부로 향하기도 했다.[75] 이러한 투자자들은 남부에서 대체로 환영받았다.[75]

역사가 에릭 포너는 카펫배거들의 동기가 단순히 개인적인 이익 추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대부분의 카펫배거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과 '노예제의 문명을 자유의 문명으로 대체하기 위한' 노력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결합했을 것이다...카펫배거들은 일반적으로 남부의 민주화와 현대화를 목표로 하는 조치, 즉 시민권 법안, 경제 개발 지원, 공립학교 시스템 설립을 지지했다."[9]고 분석하며, 이익 추구와 함께 개혁 정신, 남부의 '경제적 재건'에 대한 사명감이 결합되어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남부인들이 경제적 창의성이나 자기 연마가 부족하다고 보았으며, '북부의 자본과 에너지'만이 남부에 자유 노동 체제의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었다.[75]

카펫배거들은 대체로 교육 수준이 높은 중산층 출신인 경향이 있었다. 변호사, 사업가, 신문 편집자 등 북부 사회의 주요 직업군에 속한 이들이 많았다. 특히, 재건 시대에 미국 연방 의회 의원을 지낸 카펫배거 60명 중 52명은 북군 참전 경험이 있는 예비역 군인들이었다.[76]

많은 카펫배거들은 스캘러웨그(남부 출신 공화당 지지자)들과 함께 남부의 경제와 사회를 현대화하려는 구상을 공유했다. 이들은 비효율적인 남부의 플랜테이션 시스템을 철도, 공장, 그리고 더 효율적인 농업 경영 방식으로 대체하고자 노력했다.[78] 이들은 공립학교 설립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여러 대학을 세우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78] 특히 철도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남부 철도망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70년, 북부인들은 남부 철도 영업 거리의 21%를 장악했고, 철도 회사 임원의 19%는 카펫배거였다. 1890년에는 북부인들의 장악 비율이 88%로 크게 증가했으며, 카펫배거 출신 임원 비율도 47%에 달했다.[78]

3. 3. 부정적인 측면: 자기 이익과 착취

남북 전쟁 이후 남부의 백인 민주당원들은 북부에서 온 공화당원들을 '카펫배거'라 부르며 경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6] 이들은 카펫배거들이 남부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을 야기하며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1875년 미시시피주의 민주당 의원 와일리 P. 해리스(Wiley P. Harris)는 카펫배거들이 외부에서 와서 권력과 이익을 독점하고, 주민들을 비난하며 부패를 만연시킨다고 주장했다.[23]

:만약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는 200명의 남부 남성들이 인디애나폴리스로 가서 인디애나 주민들을 축출하고, 모든 권력과 명예와 이익의 자리를 장악하고, 주민들을 암살자이자 야만인이라고 비난하고, 모든 공공 행정 부처에 부패를 도입하고, 정부를 축복 대신 저주로 만들고, 계몽되고 지능적이며 도덕적인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사회의 가장 무지한 계층과 연합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어떤 사회적 관계를 낳을 것인가.[23]

물론 모든 카펫배거가 부정적인 의도만 가졌던 것은 아니다. 역사가 에릭 포너는 많은 카펫배거들이 개인적인 이익 추구와 함께 남부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동시에 가졌다고 분석한다. 이들은 시민권 법안, 경제 개발, 공립학교 시스템 설립 등 남부의 민주화와 현대화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9] 실제로 해방자국 직원이나 교사, 종교 전도사 등으로 활동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교육과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한 이들도 많았다.[71][72][73]

하지만 일부 카펫배거들은 개인적인 야심을 채우기 위해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거나 부패에 연루되기도 했다. 이러한 행태는 남부 백인들뿐만 아니라 흑인 사회 내부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미시시피주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상원의원이었던 히람 로즈 레벌스(Hiram Rhodes Revels)는 공화당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875년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부 카펫배거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흑인 유권자들을 조종하고 남북 전쟁 시기의 증오심을 부추긴다고 강하게 비판했다.[24][81]

:재건 이후, 나의 백성의 대다수는 마치 정신적으로 노예가 된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조국을 개의치 않고, 아무리 악명 높더라도 스스로 권력을 잡고 영속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는 원칙 없는 모험가들에 의해 지배당했습니다...나의 백성들은 이러한 음모가들이 악명 높게 부패하고 부정직한 사람들이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그들을 뽑아야 한다고, 당의 구원이 그것에 달려 있다고, 투표용지를 훼손한 사람은 공화당원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원칙 없는 선동가들이 나의 백성들의 지적 속박을 영속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입니다...최근의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적개심과 증오는 제 생각에 이 주에서는 어떤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라졌으며, 과거의 적개심을 유지하고 인종 간의 증오를 심어주어 직책과 그 보수를 통해 스스로를 과장하고 나의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일부 원칙 없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래 전에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들을 비하시키는 것입니다.[24]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레드셔츠(Red Shirts)나 화이트 라이너스(White Liners)와 같은 백인 준군사 조직들은 폭력과 협박을 동원하여 공화당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이들은 공화당원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하고, 흑인들의 투표권을 억압했다.[20][21][22] 미시시피주 야주 카운티의 공화당 보안관이었던 카펫배거 앨버트 T. 모건(Albert T. Morgan)은 백인 민주당원들의 폭동으로 군 정부가 장악되자 결국 도망쳐야 했다. 이러한 폭력적인 저항으로 인해 많은 카펫배거들이 1875년에서 1876년 사이에 남부를 떠나게 되었다.[80]

4. 주별 정치 상황

(내용 없음)

4. 1. 미시시피 주

메인주 출신의 연방군 장군 애들버트 에임스(Adelbert Ames)는 재건 시대 동안 미시시피주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된 후 공화당 소속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에임스는 미시시피주 흑인들의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남부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그의 당이 분열되면서 성공하지 못했다.[19]

1868년 미시시피주에서 열린 헌법 제정 회의는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이 회의에는 남부 백인 30명, 남부 흑인 노예 해방자 17명, 그리고 대부분 연방군 출신인 비남부 출신자 24명이 참여했다. 비남부 출신자 24명 중 4명은 전쟁 전부터 남부에 거주했으며, 이 중 2명은 남부연합군 복무 경력이 있었다. 회의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뉴욕주 출신의 베로스 B. 에글스턴(Beroth B. Eggleston) 장군, 위스콘신 제2 자원 봉사단의 A.T. 모건 대령, 켄터키주에서 흑인 연대를 창설했던 전 지휘관 W.S. 배리 장군, 일리노이주 노크스 대학 출신의 장군 겸 변호사이자 일리노이 제15 보병대의 W.H. 기브스 소령, 펜실베이니아주의 W. B. 커닝햄 판사, 미주리 제7 보병대의 E.J. 카스텔로 대위 등이 있었다. 이들은 미시시피주 공화당 창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1875년까지 미시시피주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레드셔츠와 화이트 라이너스와 같은 백인 준군사 조직의 압력으로 1875년에서 1876년 사이에 거의 대부분 주를 떠나야 했다. "민주당의 군사 조직"으로 묘사된 이 백인 준군사 조직들은 공개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여 공화당의 지배를 전복하고, 협박과 암살을 통해 공화당원들을 축출하고 흑인 노예 해방자들의 투표권을 억압했다.[20][21][22] 1875년 미시시피주의 민주당 의원 와일리 P. 해리스(Wiley P. Harris)는 당시 남부 백인들의 불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만약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는 200명의 남부 남성들이 인디애나폴리스로 가서 인디애나 주민들을 축출하고, 모든 권력과 명예와 이익의 자리를 장악하고, 주민들을 암살자이자 야만인이라고 비난하고, 모든 공공 행정 부처에 부패를 도입하고, 정부를 축복 대신 저주로 만들고, 계몽되고 지능적이며 도덕적인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사회의 가장 무지한 계층과 연합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어떤 사회적 관계를 낳을 것인가.[23]

미시시피주 야주 카운티의 공화당 보안관이었던 앨버트 T. 모건(Albert T. Morgan)은 반란을 일으킨 백인 민주당원들이 카운티 정부를 장악하고 그를 도망치게 만들면서 잠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후 자신의 경험을 담은 "야주; 또는 남부 자유의 감시선에서"(Yazoo; Or, On the Picket Line of Freedom in the South, 1884)라는 책을 저술했다.

1875년 11월 6일, 미시시피주 공화당원이자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상원 의원인 히람 로즈 레벌스(Hiram Rhodes Revels)는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에임스 주지사와 북부인들을 비판했다. 이 편지는 널리 알려졌는데, 레벌스는 그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흑인 유권자들을 조종하고 남북 전쟁 시대의 증오심을 유지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 재건 이후, 나의 백성의 대다수는 마치 정신적으로 노예가 된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조국을 개의치 않고, 아무리 악명 높더라도 스스로 권력을 잡고 영속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는 원칙 없는 모험가들에 의해 지배당했습니다...나의 백성들은 이러한 음모가들이 악명 높게 부패하고 부정직한 사람들이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그들을 뽑아야 한다고, 당의 구원이 그것에 달려 있다고, 투표용지를 훼손한 사람은 공화당원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원칙 없는 선동가들이 나의 백성들의 지적 속박을 영속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입니다...최근의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적개심과 증오는 제 생각에 이 주에서는 어떤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라졌으며, 과거의 적개심을 유지하고 인종 간의 증오를 심어주어 직책과 그 보수를 통해 스스로를 과장하고 나의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일부 원칙 없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래 전에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들을 비하시키는 것입니다.[24]

테네시 군(Army of the Tennessee)에서 싸웠던 오하이오주 포츠머스 출신의 변호사 엘자 제퍼즈(Elza Jeffords)는 남북 전쟁 후에도 미시시피주에 남았다. 그는 1883년부터 1885년까지 미국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이는 재건 시대 이후 미시시피주를 대표한 마지막 공화당원이었다. 그는 의회를 떠난 지 16일 만에 미시시피주 빅스버그에서 사망했다. 미시시피주 출신의 다음 공화당 하원 의원은 80년이 지난 1964년에야 선출되었는데, 미시시피주 마이즈 출신의 프렌티스 워커(Prentiss Walker)가 1965년부터 1967년까지 한 번의 임기를 지냈다.

4. 2. 노스캐롤라이나 주

노스캐롤라이나주 민주당원들에게 정치 부패는 명백한 비판의 대상이었다고 역사학자 폴 에스콧은 지적한다.[82] 대표적인 예로, 밀턴 S. 리틀필드(Milton S. Littlefield) 장군은 "카펫배거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는 대규모 사기성 철도 건설 계획을 지원받기 위해 의회 표를 매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에스콧은 일부 민주당원도 연루되었지만, 공화당원들이 "철도와 그에 따른 부패를 위한 2800만달러의 주 예산 문제에 주요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막대한 금액이었으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역사학자 에릭 포너는 리틀필드가 철도 채권 발행을 위해 의회의 지지를 얻고자 20만달러 상당의 뇌물을 제공했으며, 이 과정에는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모두 연루되었다고 지적한다.[83]

노스캐롤라이나주 민주당원들은 의회의 "타락한 악당들"이 "매일 뇌물을 받았다"고 맹비난했다. 심지어 한 지역 공화당 공직자조차 "저는 의회의 제 친구 몇몇이 취한 행동과 재정 문제에 대해 그로부터 파생된 것을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정말 당황스러운 일입니다."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에스콧에 따르면, 이러한 낭비와 부패는 주 정부의 재정 지출을 증가시켜 세금 부담을 가중시켰다. 물론 긍정적인 지출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1869년 의회는 학교법을 제정하여 공립학교 시스템의 재건과 확장에 기여했다. 그러나 더 많은 예산이 부적절하거나 현명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주로 공화당 지도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알라만스군(Alamance County)의 한 공화당 관리는 이러한 상황을 강하게 비판하며, 권력자들이 "악당을 길러내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노동 계급으로부터 징수된 세금"으로 이루어진다고 개탄했다. 그는 신속한 개혁이 없다면 사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4. 3.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4. 4. 루이지애나 주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없습니다.)

4. 5. 앨라배마 주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앨라배마 주'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4. 6. 조지아 주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조지아 주'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4. 7. 아칸소 주

윌리엄 하인즈 퍼부시(William Hines Furbush)는 1839년 켄터키주 캐롤군에서 혼혈 노예로 태어나 오하이오주에서 일부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62년 아칸소주 헬레나로 이주했다. 1865년 2월 오하이오주로 돌아온 후, 콜럼버스에서 제42 흑인 보병대에 입대했다.[36][37][38][87]

남북 전쟁 후, 퍼부시는 미국 식민화 협회를 통해 라이베리아로 이주하여 사진사로 일했으나, 18개월 후 오하이오주로 돌아왔고 1870년까지 아칸소주로 다시 이주했다.[87] 퍼부시는 1873년부터 1874년까지 아칸소주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필립스군과 먼로군으로 구성된 아칸소 델타 지역의 흑인 다수 지역구였다. 그는 1879년부터 1880년까지 새로 설립된 리군에서도 하원의원으로 복무했다.[36][37][38]

1873년, 아칸소주는 시민권법을 통과시켰다. 퍼부시와 리처드 A. 도슨(Richard A. Dawson) 상원의원을 포함한 다른 세 명의 흑인 지도자들은 리틀록의 한 바텐더가 자신들에게 서비스를 거부한 것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주의 시민권법에 따른 재건 시대 동안 유일하게 성공한 기소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의회에서 퍼부시는 아칸소주 동부의 필립스군, 크리텐던군, 먼로군, 세인트프랜시스군의 일부 지역을 떼어내 흑인 인구가 다수인 리군을 만드는 데 힘썼다.

1873년 첫 번째 입법 임기가 끝난 후, 퍼부시는 공화당 출신 엘리샤 백스터(Elisha Baxter) 주지사에 의해 리군 보안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보안관으로 두 번 재선되어 1873년부터 1878년까지 재직했다. 그의 임기 동안 그는 재건 시대 이후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사이의 권력 분담 타협인 "융합" 정책을 채택했다. 퍼부시는 원래 공화당원으로 선출되었지만, 보안관으로서의 임기가 끝날 무렵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이는 당시 경제적 권력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던 민주당원들과 협력하는 것이 정치적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다.[39]

1878년, 퍼부시는 다시 아칸소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선거는 아칸소주 동부의 흑인 다수 지역에서 흑인과 공화당 유권자에 대한 백인의 협박이 만연했던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흑인 민주당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아칸소주 의회에 선출된 최초의 흑인 민주당원으로 알려져 있다.[39]

1879년 3월, 퍼부시는 아칸소주를 떠나 콜로라도주로 이주하여 검정관과 이발사로 일했다. 콜로라도 보난자(Bonanza)에서는 마을 경찰관을 총으로 쏴 살해한 혐의로 린치를 당할 뻔했으나 도망쳤고, 이후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88] 오하이오주를 거쳐 1888년 아칸소주 리틀록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개업했다. 1889년, 동료 흑인 민주당원 E. A. 풀턴(E. A. Fulton)과 함께 민주당 지지 흑인 유권자를 확보하기 위한 주간지 ''내셔널 데모크랫''(National Democrat) 창간을 계획했다. 그러나 신문은 성공하지 못했고, 1891년 아칸소주 선거법 제정으로 많은 흑인 유권자의 투표권이 사실상 박탈되자 퍼부시는 아칸소주를 떠났다.[39][88]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조지아주를 거쳐 1901년 10월 인디애나주 메리언(Marion)의 상이용사를 위한 국립 요양원에 정착했다. 퍼부시는 1902년 9월 3일 이 요양원에서 사망하여 메리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39][88]

4. 8. 텍사스 주

텍사스에서는 다른 남부 주에 비해 카펫배거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공화당은 1867년부터 1874년 1월까지 주 정부를 장악했지만, 북부 출신 인사의 비중은 높지 않았다. 주 정부 고위 관리와 주 대법원 판사 중 북부 출신은 각각 한 명에 불과했다. 지방 법원 판사 중에서는 약 13%~21%, 1869년 재건 헌법을 작성한 대표 중에서는 약 10%가 북부 출신이었다. 제12대 주 의회 의원 142명 중 북부 출신은 12명에서 29명 정도였으며, 군 단위의 위원, 판사, 보안관 중에서도 북부 출신은 약 10%를 차지했다.[40][89]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자 뉴욕 출신인 조지 톰슨 루비는 텍사스 재건 시대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1866년 프리드먼 국(Freedmen's Bureau)의 대리인이자 교사로 텍사스주 갤버스턴에 파견되었다. 루비는 공화당원으로 활동하며 1868년~1869년 주 헌법 제정 회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이후 텍사스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갤버스턴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철도 건설을 지지했으며, 특히 1870년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두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유색인 노동 조합'(Labor Union of Colored Meneng)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74년 민주당이 주 정부를 다시 장악하자 루비는 뉴올리언스로 이주하여 언론 활동에 종사했으며, 남부의 인종 차별과 폭력을 피해 캔자스주로 이주하려는 흑인들을 돕는 엑소더스 운동(Exoduster movement)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40][89]

5. 현대적 용례

"카펫배거"라는 용어는 본래 미국 남북 전쟁 직후의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유래했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 의미가 확장되어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 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기회주의적인 행태나 외부인이 특정 지역 또는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며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할 때 쓰인다.

가장 흔하게는 정치 영역에서 특정 지역과의 연고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주하여 출마하는 낙하산 후보를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또한, 경제적 이익을 위해 특정 상황이나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는 사람, 혹은 문화적으로 민감한 영역에서 부적절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행태를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 각 국가 및 분야별 구체적인 용례와 사례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5. 1. 미국

미국에서 "카펫배거"(carpetbagger)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특정 지역 사회와의 연고나 친밀감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다른 주, 선거구 또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정치인, 즉 낙하산 후보를 가리킨다.[59]

이 용어는 정치적 기회를 찾아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하는 정치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 아칸소주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2000년 미국 상원 선거에 출마하기 전까지 뉴욕주에 거주하거나 주 정치에 참여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 후보들로부터 카펫배거라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뉴욕 시장이자 공화당 후보였던 루디 줄리아니는 뉴욕 시청 위에 아칸소 주기(State flag of Arkansas)를 게양하며 클린턴을 조롱하기도 했다.[63] 그럼에도 클린턴은 선거에서 승리했다. 1964년 로버트 F. 케네디 역시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 뉴욕주로 이주했을 때 비슷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한 연설에서 "나의 동료 뉴욕 시민 여러분(My fellow New Yorkites!)"이라고 유머러스하게 받아치며 이미지를 희석시켰고, 선거에서 승리했다.

반면, 2022년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 공화당 후보였던 메흐메트 오즈는 선거 몇 달 전까지 뉴저지주에 거주했다는 사실 때문에 상대 후보인 존 페터맨으로부터 카펫배거라는 집중 공격을 받았다. 페터맨은 이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일부 분석가들은 카펫배거 논란이 페터맨의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61][62] 2004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앨런 키스가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일리노이주로 이주하여 카펫배거라는 비난을 받았고, 일리노이주 출신인 버락 오바마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다른 사례들도 있다. 웨스트버지니아주 연방 하원의원 알렉스 무니는 2014년 첫 하원의원 선거 출마 당시, 이전에 메릴랜드주 상원의원이자 메릴랜드 공화당 의장이었다는 이유로 카펫배거라는 비판을 받았다.[60] 2024년 미국 하원 콜로라도주 선거를 앞두고, 콜로라도주 제3선거구를 대표하던 공화당 소속 로런 보버트는 재선을 위해 경쟁이 덜한 제4선거구로 지역구를 옮기면서 카펫배거라는 비난에 직면했다.[64] 존 매케인 역시 1982년 첫 하원의원 선거에서 카펫배거라는 비판을 받았다.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나 앤도버와 예일대학교에서 교육받은 조지 W. 부시는 스스로를 텍사스주 사람이라고 밝혔음에도 일부 남부인들 사이에서 카펫배거로 여겨졌지만,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 제43대 플로리다 주지사였던 제브 부시는 정치 경력을 시작하기 몇 년 전 텍사스주에서 플로리다주로 이주했는데, 그의 회고록에서는 그를 "현대판 카펫배거"로 불릴 만한 좋은 예로 평가하기도 한다.

현대 정치 외에도, 이 용어는 여전히 남부인들의 희생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북부 출신 인물에게 적용될 수 있다. 미식축구 감독 브라이언 켈리는 노터데임 감독직을 떠나 LSU로 이적했는데, 이는 10년간 9500만달러에 달하는 계약 때문이었다.[65] 그는 어색한 남부 사투리를 흉내 내고 "이제 전국 챔피언십을 우승할 자원을 갖게 되었다"[66]고 주장했지만, 이후 상위권 팀들에게 연이어 패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높은 수입을 반환하거나 부진한 성적을 반영하여 계약을 재협상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아 비판받았다.

또한, 카펫배거라는 단어는 1960년대 이후 남부로 이주한 많은 북부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애틀랜타 대도시권, 노스캐롤라이나주롤리더럼, 텍사스주휴스턴댈러스, 그리고 뉴올리언스와 같이 북부 인구 유입이 많았던 지역에서 흔히 사용된다. 이 단어는 남부 사람들이 북부 사람들을 "양키"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게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나, 때로는 고풍스러운 단어라는 인식 때문에 실제 경멸보다는 희극적인 효과를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5. 2. 영국

1990년대 후반, 영국에서는 상호저축은행의 대규모 상호금융 전환 과정에서 "카펫배거(carpetbagging)"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상호금융기관이 주식회사로 전환될 때 단기적인 이익, 즉 뜻밖의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해당 기관에 가입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종종 재정적 기회를 노리는 기회주의자로 여겨졌으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투자 기회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 했다. 카펫배거들은 주로 상호저축은행에 소액의 회원 계좌를 개설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전환이나 인수가 이루어지면 이들은 수천 파운드에 달하는 주식을 배분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투자 금액과 상관없이 일률적인 비율로 배분되어 소액 투자자에게도 유리했다. 이러한 '명목상' 회원들의 증가는 때때로 기관의 상호금융 전환을 부추기거나 가속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카펫배거'라는 용어가 이 맥락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1997년 초 더 울리치 상호저축은행의 최고경영자(CEO)가 은행의 전환 계획을 발표하면서였다. 그는 신규 예금자들이 전환 시 얻을 수 있는 잠재적 이익을 제한하는 새로운 규칙을 발표하며, 언론 인터뷰에서 "카펫배거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다"고 언급했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상호금융 전환을 지지하는 그룹인 "전환을 위한 회원들(Members for Conversion)"은 carpetbagger.com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했다. 이 사이트는 영국 상호저축은행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좌를 개설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상호금융 전환을 위한 결의안 채택을 조직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많은 상호저축은행들은 소위 "카펫배거 방지" 정책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은행의 주된 영업 지역 밖에 거주하는 고객의 신규 예금 가입을 제한하거나, 신규 회원이 계좌를 개설할 때 향후 전환 시 발생할 수 있는 이익을 자선단체 지원 재단(Charities Aid Foundation)과 같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하는 조항을 규정에 추가했다. 더비셔(Derbyshire) 주택 금융 조합은 특정 기간 동안 최소 1만파운드의 예금 잔고를 요구하는 "요새(Fortress)" 정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2000년에는 carpetbagger.com 웹사이트가 심각한 해킹 공격을 당했으며, 이후 새로운 웹사이트인 themoneybag.com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다. 한편, 기존의 carpetbagger.com은 rpoints.com으로 바뀌어, 상호금융 전환보다는 일반적인 금전적 가치 획득 정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카펫배거'라는 용어는 이후에도 주택협동조합의 상호금융 전환 등 협동조합 운동 내에서 유사한 상황을 설명할 때 계속 사용되고 있다.

5. 3. 오스트레일리아

(내용 없음)

5. 4. 프랑스

프랑스 정치에서 카펫배거는 프랑스어낙하산을 의미하는 parachutage|파라슈타주fra로 알려져 있다.[69]

5. 5. 기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전략사무국(OSS)은 유럽의 반나치즘 저항 세력에게 필요한 도구와 물자를 비밀리에 공급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OSS는 이 작전을 카펫배거 작전(Operation Carpetbagger)이라고 명명했다. 야간 작전에 투입된 개조된 B-24 리베레이터 항공기 역시 "카펫배거"라고 불렸는데, 이 항공기들은 탐지를 피하기 위해 광택 없는 검은색으로 도색되는 등 특수한 개조가 이루어졌다. 1944년 1월부터 9월까지 카펫배거 작전은 영국 공군 해링턴 기지(RAF Harrington)와 점령된 유럽의 여러 지점 사이에서 2,263회의 출격을 기록했다.[52] 영국 정보기관은 이 작전 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란을 이용하여, 지하 조직이나 저항 세력에 실제 화폐나 위조 화폐를 전달하는 정보원의 활동을 은폐하기도 했다.

호주에서는 "카펫배거(carpetbagger)"라는 용어가 원주민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부도덕한 판매업자나 사업 관리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53][54][55][56] 또한, 뉴사우스웨일스주 총리와 호주 자유당 소속 연방 재무장관을 역임한 존 페이는 2010-2011년 퀸즐랜드 홍수 당시, 피해자들을 착취하려는 불성실한 "기술자"들을 비판하며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57][58]

요리 분야에서는 카펫백 스테이크(carpetbag steak)라는 요리가 존재한다. 이는 스테이크 끝부분을 잘라 주머니 형태로 만든 뒤, 을 비롯하여 버섯, 블루 치즈, 마늘 등 다양한 재료를 채워 넣은 음식이다. 속을 채운 스테이크는 이쑤시개나 실로 봉합하며, 때로는 베이컨으로 감싸기도 한다.[67] 소고기와 굴의 조합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여겨지며, 가장 오래된 관련 기록은 1891년 미국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주에서는 1899년에서 1907년 사이에 출판된 요리법에서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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