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칸타브리아 전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칸타브리아 전쟁은 기원전 29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 로마 제국과 칸타브리족, 아스투레스족을 비롯한 북부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민족 간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로마는 피레네 산맥 서쪽의 독립적인 민족들을 정복하려 했으며, 칸타브리족은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저항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원정을 지휘하며 8개 군단과 보조 부대를 투입했지만, 험난한 지형과 칸타브리족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전쟁은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결국 로마는 승리했지만, 칸타브리아족의 전술과 상징을 받아들였으며, 이 지역에는 오랫동안 로마 군대가 주둔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스투리아스의 역사 -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행정 개편으로 기원전 27년에 설치된 로마 제국의 속주로,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에 위치하며 타라코를 중심으로 로마의 지배하에 이베리아 반도 북부 지역을 통합하는 기지 역할을 수행하며 로마화 과정을 거쳐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 기원전 1세기 스페인 - 문다 전투
    문다 전투는 기원전 45년 3월 17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아들들의 원로원파 군대를 격파하여 카이사르 내전을 종결시키고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카이사르의 독재 체제 확립을 가져온 전투이다.
  • 칸타브리아주의 역사 - 알타미라 동굴
    알타미라 동굴은 스페인에 위치한 동굴로, 마들렌기에 제작된 동물 벽화로 유명하며 구석기 시대 미술의 중요한 유적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현재는 훼손 방지를 위해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
  • 칸타브리아주의 역사 - 카스티야라비에하
    카스티야라비에하는 [주제에 대한 간략한 정의]이며, [역사적 발전, 주요 특징, 관련 개념 등 핵심 내용 요약]이다.
칸타브리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칸타브리아 전쟁
로마자 표기Bellum Cantabricum
다른 명칭칸타브리아 및 아스투리아스 전쟁
로마자 표기Bellum Cantabricum et Asturicum
일부로마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
칸타브리아 전쟁이 일어난 [[이베리아 반도]]의 지역들
칸타브리아 전쟁이 일어난 이베리아 반도의 지역들
시기기원전 29년 – 기원전 19년
장소현대의 아스투리아스, 칸타브리아, 갈리시아, 레온, 팔렌시아
결과로마의 승리
영토 변경칸타브리아, 아스투리아스, 갈라이키아는 히스파니아의 일부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됨
교전 세력
교전국 1아스투레스족
칸타브리족
갈라이키족
교전국 2로마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코로코타 (칸타브리족)
가우손 (아스투레스족)
교전국 2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피르미우스
병력 규모
교전국 170,000–100,000명 (추정 인구 기준)
교전국 270,000–80,000명
피해 규모
교전국 1전멸
교전국 2심각한 피해
참고 사항로마 군대는 포로를 잡지 않았고, 켈트족은 노예로 잡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았음. 칸타브리아인과 아스투레스인의 대규모 학살이 발생함.
주요 전투
전투 목록아라킬룸
아스투리카
아마이아
베르기둠
훌리오브리가
란시아
벨리카
몬스 빈디우스
몬테 베르노리오
몬스 메둘리우스

2. 역사적 배경

루키우스 안네우스 플로루스는 《모든 700년의 전쟁에 대한 T. 리비우스의 개요 2권》에서 칸타브리아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4]

''Sub occasu pacata erat fere omnis Hispania, nisi quam Pyrenaei desinentis scopulis inhaerentem citerior adluebat Oceanus. Hic duae validissimae gentes, Cantabri et Astures, inmunes imperii agitabant.''|서쪽에서는 거의 모든 히스파니아가 평정을 이루었으나, 피레네 산맥이 끝나는 절벽에 인접하고 더 가까운 대양에 의해 씻겨 내려가는 부분만 제외되었다. 여기 두 강력한 민족인 칸타브리족과 아스투리아족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살았다.la

칸타브리족과 아스투리아족은 로마 제국에 복속되지 않고 저항하였다.

2. 1. 칸타브리족과 아스투레스족

루키우스 안네우스 플로루스는 그의 저서 《모든 700년의 전쟁에 대한 T. 리비우스의 개요 2권》에서 칸타브리아 전쟁과 아스투리아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칸타브리족은 이베리아에서 벌어진 이전 전쟁에서 다양한 편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며 처음 등장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칸타브리아와 아스투리아 전쟁 이전 몇 년 동안 로마 군대는 북부 히스파니아 민족들의 호전적인 특징에 익숙해졌다. 예를 들어,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한니발의 군대에 칸타브리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원전 151년에는 바카에족과 함께 싸웠으며 로마의 누만티아 공방전을 격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세르토리우스 전쟁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증언에 따르면 기원전 49년 이르다 전투에도 칸타브리족이 있었다.

칸타브리족은 로마 제국 전역에 알려졌으며, 로마 군대는 심지어 그들에게 군기 중 하나를 잃기도 했다. 로마 역사가들은 로마가 지배하는 메세타 센트랄에 대한 칸타브리족의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이 캠페인을 정당화했지만, 아스투리아 금과 칸타브리아 철에 대한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아스투리아족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역사 기록에 등장했으며, 기원전 207년 메타우루스 강 전투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군대에 소속된 이베리아 용병으로 기록되었다.[4][5]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그들의 역사는 덜 명확해진다.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의 루시타니족, 켈트이베리아족, 로마 내전과 관련된 자료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최초의 아스투르-칸타브리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상대적인 무명 상태에서 다시 등장했다.[6]

갈라이키족은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그들의 영토에 대한 최초의 로마 침략에 직면했으며, 그의 캠페인은 ''리미아'' 강까지 이르렀다. 기원전 61-60년에 히스파니아 울테리어의 프로프라에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브리간티움(카루니움, 베탄조스 – 라 코루냐로도 지정됨)에서 갈라이키족과 해상 및 육상 합동 전투를 벌였고, 여기서 갈라이키족은 로마에 명목상의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그러나 몇몇 갈라이키족 부족은 나머지 켈트 저항 세력과 함께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으며,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와 가이우스 피르미우스가 서부 갈라이키아의 밀집된 숲 지역에서 저항하는 오피다에 대한 추가 전쟁을 벌였을 때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2. 2. 갈라이키족

칸타브리족은 이베리아에서 벌어진 이전 전쟁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며 처음 등장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한니발의 군대에 칸타브리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원전 151년에는 바카에족과 함께 싸웠고 누만티아 공방전을 격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세르토리우스 전쟁과 기원전 49년 이르다 전투에도 칸타브리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전례를 통해 칸타브리족은 로마 제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로마 군대는 심지어 그들에게 군기 중 하나를 잃기도 했다.[4]

갈라이키족은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그들의 영토에 대한 최초의 로마 침략을 받았으며, 그의 원정은 ''리미아'' 강까지 이르렀다. 기원전 61-60년에 히스파니아 울테리어의 프로프라에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브리간티움(카루니움, 베탄조스 – 라 코루냐로도 지정됨)에서 갈라이키족과 해상 및 육상 합동 전투를 벌였고, 여기서 갈라이키족은 로마에 명목상의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그러나 몇몇 갈라이키족 부족은 나머지 켈트 저항 세력과 함께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으며,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와 가이우스 피르미우스가 서부 갈라이키아의 밀집된 숲 지역에서 저항하는 오피다에 대한 추가 원정을 벌였을 때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6]

3. 로마군의 전략과 전술

칸타브리아군의 끈질긴 저항에 아우구스투스는 8개 군단을 투입해야 했다.[7]

군단
제1 아우구스타
제2 아우구스타
제4 마케도니카
제5 알라우다이 (아스투리아스에서 작전)
제6 빅트릭스 (아스투리아스에서 작전)
제9 히스파나
제10 게미나 (아스투리아스에서 작전)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다양한 보조 부대도 투입되었다.

보조 부대
알라 Augusta
알라 Parthorum
알라 II Gallorum
알라 II Thracum Victrix Civium Romanorum
코호르스 II Gallorum
코호르스 IV Thracum Aequitata



이 부대의 총 병력은 50,000명(군단병 30,000명, 보조병 20,000명)이었다.[7]

로마 해군도 갈리아 아퀴타니아에서 칸타브리아 해안으로 파견되었다. 이는 로마의 승리에 중요한 요소였는데, 지상군이 시작한 칸타브리아인 포위를 완료했기 때문이다. 총 70,000명의 로마군이 투입된 것으로 추산되지만, 군단당 5,000명의 병력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저자마다 이 수치는 다르다. 실제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개혁을 통해 군단병이 약 6,000명에 달했기 때문에, 보조병을 포함하면 이 수치는 80,000명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군단이 공식적으로 6,200명으로 구성되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수는 보통 5,000명에서 8,000명 사이를 맴돌았다.

3. 1. 칸타브리족의 전술

로마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칸타브리족은 병력이 열세였기 때문에 로마군에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게릴라전 전술을 펼쳤다. 이들은 험준한 산악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거리 무기로 빠르게 기습 공격을 하고 매복했다가 재빨리 후퇴하는 방식으로 로마군의 열과 보급선에 큰 피해를 입혔다.[7]

칸타브리아 스테이와 동전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칸타브리족은 경무기에 능숙했다. 루카누스는 "Cantaber exiguis et longis Teutonus armis" (짧은 무기를 가진 칸타브리아인과 긴 무기를 가진 게르만인)라고 언급했다. 이들은 짧은 검, 단검, 짧은 , 투창, , 나무로 만든 둥근 또는 타원형의 방패, 가죽 흉갑을 갖추었다. 또한 북부 히스파니아 민족 특유의 양날 전투 도끼인 ''bipennis''도 사용했다. 궁술이나 투석기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알고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칸타브리아인은 경기병을 활용했고, 이들의 기병 전술 중 일부는 로마군에 채택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창을 던지는 기병의 원형 대형인 ''circulus cantabricus''와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가 묘사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대규모 정면 공격인 ''cantabricus impetus''가 있다.

3. 2. 로마군의 대응

로마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칸타브리족은 병력이 열세여서 로마군을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고 게릴라전 전술을 썼다. 이들은 험준한 산악 지형을 잘 알아, 원거리 무기로 빠르게 기습하고 매복한 뒤 재빨리 후퇴하여 로마군의 대열과 보급선에 큰 피해를 입혔다.[7]

칸타브리아 스테이와 동전에 묘사된 내용을 보면, 칸타브리족은 경무기에 능숙했다. 루카누스는 "짧은 무기를 가진 칸타브리아인과 긴 무기를 가진 게르만인(Cantaber exiguis et longis Teutonus armis)"이라고 썼다. 이들은 짧은 검, 단검, 짧은 , 투창, 나무로 만든 둥글거나 타원형의 방패, 가죽 흉갑을 갖추었다. 또한 북부 히스파니아 민족 특유의 양날 전투 도끼인 ''bipennis''도 사용했다. 궁술이나 투석기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알고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칸타브리아 전쟁 당시 로마령 칸타브리아의 경계와 오늘날의 칸타브리아의 관계, 그곳에 살았던 부족, 인접 민족, 도시 및 지리적 특징을 보여주는 지도


칸타브리아인은 경기병을 사용했으며, 이들의 기병 전술 중 일부는 로마군에 채택되었다. 예를 들어 창을 던지는 기병의 원형 대형인 ''circulus cantabricus''와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가 묘사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대규모 정면 공격인 ''cantabricus impetus''가 있다.

칸타브리아군의 저항이 거세어 아우구스투스는 8개 군단을 투입해야 했다.[7]

군단
제1 아우구스타
제2 아우구스타
제4 마케도니카
제5 알라우다이 (아스투리아스에서 작전 수행)
제6 빅트릭스 (아스투리아스에서 작전 수행)
제9 히스파나
제10 게미나 (아스투리아스에서 작전 수행)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다음과 같은 다양한 보조 부대도 투입되었다.

보조 부대
Ala Augusta
Ala Parthorum
Ala II Gallorum
Ala II Thracum Victrix Civium Romanorum
Cohors II Gallorum
Cohors IV Thracum Aequitata



이 부대의 총 병력은 50,000명(군단병 30,000명, 보조병 20,000명)이었다.[7]

로마 해군도 갈리아 아퀴타니아에서 칸타브리아 해안으로 파견되었다. 이는 로마의 승리에 중요한 요소였는데, 지상군이 시작한 칸타브리아인 포위를 완료했기 때문이다. 총 70,000명의 로마군이 투입된 것으로 추산되지만, 군단당 5,000명의 병력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저자마다 이 수치는 다르다. 실제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개혁을 통해 군단병이 약 6,000명에 달했기 때문에, 보조병을 포함하면 이 수치는 80,000명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군단이 공식적으로 6,200명으로 구성되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수는 보통 5,000명에서 8,000명 사이를 맴돌았다.

4. 주요 전투 (Bellum Asturicum)

칸타브리와 아스투레족에 맞선 로마 원정


아스투레족은 칸타브리족과 연합하여 공동 방어를 펼쳤다. 기원전 25년 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에서 온 병력을 포함한 세 개의 로마 군단이 아스투라 강(현대 에슬라 강) 근처에 주둔했다. 동시대 로마 역사가 플로루스는 《로마사 요약》에서[8] 아스투레족 트란스몬타니의 군대가 눈 덮인 산(이는 봄의 피코스 데 에우로파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에서 내려와 아스투라 강 근처에 집결하여 세 개의 로마 겨울 야영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베나벤테 지역의 아스투레족 시스몬타니 부족인 ''브리게키니''는 이러한 계획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알렸다. 아우구스투스는 도움에 대한 보상으로 브리가툼 (아우구스투스 아스투리카의 야영지)을 ''브리게키''에게 주었고, 동맹에게 평원에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의 장군 푸블리우스 카리시우스는[9] 아스투르 군대(아마도 가우손이 지휘했을 것임)를 공격하여 플로루스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아스투레족 시스몬타니 요새인 란시아의 언덕 요새로 피신하게 했다.

란시아가 포위되자 아스투레족 군대는 ''몬스 메둘리우스''로 피신했다(일부 학자들은 플로루스가 로마사에 그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라스 메둘라스에 위치해 있다고 본다). 로마 군단은 산을 포위하고 약 24.14km 길이의 해자와 도랑을 건설했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칸타브리족 병사들은 항복하기보다는 자신의 무기와 주목 독으로 자살하는 것을 선호했다.[10]

5. 전쟁의 종결

이 분쟁에서 로마인들은 이례적으로 포로를 잡지 않았다. 켈트족에게는 노예가 되는 것보다 자살을 택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들은 칼, 불, 또는 주로 이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약물로 스스로 독살했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에 따르면, 그들은 주목(Taxus baccata) 씨앗으로 만든 혼합물을 사용했는데, 이 나무는 켈트족에게 신화적인 의미를 지녔다.[11] 스트라본은 그들이 죽음과 고통을 경시하여 십자가형을 당하면서도 승리의 찬가를 불렀다고 말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들에게 군인으로서 자유인으로 죽는 것은 승리였다.[11]

주요 전투는 기원전 19년에 완료되었지만, 기원전 16년까지 소규모 반란이 있었다. 로마는 다른 영토에서 그랬듯이, 개혁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대량의 사망자에도 불구하고, 지역 저항은 매우 거세서 로마인들은 70년 이상 동안 두 개의 군단(X ''게미나''와 IV ''마케도니카'')을 주둔시켜야 했다.[11]

칸타브리아 전쟁과 칸타브리아족의 로마에 대한 항복(아스투레스족이 항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로 돌아올 때 일반적인 승리 축하를 거부했다)을 통해 로마 군단은 그들로부터 쌍십자 태양 상징과 칸타브리족의 라바로와 같은 달 상징을 채택했다. 그들은 300년 후에도 이 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로마군은 또한 칸타브리아족에게서 기병 전술인 ''circulus cantabricus''와 ''cantabricus impetus''를 모방했다.[11]

참조

[1] 서적 The Epitome of Roman History, Book II https://penelope.uch[...] Loeb Classical Library 2013-12-10
[2] 간행물 Histories against the Pagans http://attalus.org/t[...]
[3] 서적 La Historia de León, Vol. 1: Prehistoria y Edad Antigua http://dialnet.uniri[...] Universidad de León 2013-11-18
[4] 문서 Ad Urbe Condita
[5] 문서 Istorion
[6] 문서 Classical Philology
[7] 서적 La Historia de León, Vol. 1: Prehistoria y Edad Antigua http://dialnet.uniri[...] Universidad de León 2013-11-18
[8] 웹사이트 Florus: Epitome of Roman Wars http://www.thelatinl[...] Thelatinlibrary.com 2014-03-03
[9] 웹사이트 P. Carisius http://www.rovenet.c[...] 2005-02-17
[10] 간행물 Histories against the Pagans http://attalus.org/t[...]
[11] 논문 Los auxiliares cántabros del ejército romano y las maniobras de la caballería romana https://revistas.uva[...] Universidad de Valladolid 2020-06-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