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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진치 페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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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커진치 페렌츠는 1759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헝가리의 작가, 언어 개혁가, 번역가이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 계몽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헝가리의 자코뱅 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석방 후 세페할롬에서 문학 활동을 하며 헝가리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고, 헝가리어 개혁에 기여했다. 주요 작품으로 '가시와 꽃', '포로 일기' 등이 있으며, 레싱, 괴테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했다. 그의 묘소는 세페할롬에 있으며, 헝가리 학술원 설립에 참여하는 등 헝가리 문학에 큰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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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진치 페렌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커진치 페렌츠
로마자 표기Kazinczy Ferenc
출생1759년 10월 27일
출생지에르셰묀
사망1831년 8월 23일
사망지세프헐롬
묘소세프헐롬, 샤토라우여이헤이, 보르쇼드-어버우이-젬플렌 헝가리
직업
직업작가
언어 개혁가
시인
번역가
공증인
교육감
작품
대표 작품Tövisek és virágok (1811)
Poétai episztola Vitkovics Mihályhoz (1811)
Ortológus és neológus nálunk és más nemzeteknél (1819)
언어 및 국적
사용 언어헝가리어
국적헝가리
교육
학력법학
출신 대학데브레첸 대학 (1766)
케슈마르크 대학 (1768)
샤로슈퍼터크 대학 (1769-1779)
사상 및 영향
사조계몽주의 시대
고전주의
가족
배우자토록 소피아(1804년 결혼)
자녀이피게니아
에우게니아
탈리아
마르크 에밀 페렌츠
언털 소프론 페렌츠
언너 이피게니아
발린트 세실 페렌츠
러요시
기타 정보
영향많은 헝가리 작가

2. 삶

소피 퇴뢰크는 커진치의 연인이자 나중에는 그의 아내였다.


페렌츠의 막내 아들 러요시 커진치는 헝가리의 국민 영웅이다.


자코뱅 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1801년 석방된 후, 커진치는 1804년 11월 11일, 21살 연하인 퇴뢰크 소피와 결혼했다. 소피는 부유하고 저명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커진치는 오랫동안 자신을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녀의 문화적 소양과 성숙함에 이끌려 결혼을 결심했다고 일기에 적었다.[25] 소피는 사랑으로 커진치와 결혼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사위를 친구로 여겼다.

두 사람은 약 27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종종 심각한 재정 문제에 시달렸지만 일기와 편지에 따르면 행복한 삶을 살았다.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으나, 첫째 딸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26]

  • 이피게니아 (1805 - 1806)
  • 에우게니아 (1807 - 1903)
  • 탈리아 (1809 - 1866)
  • 마르크 에밀 페렌츠 (1811 - 1890)
  • 안탈 소프론 페렌츠 (1813 - 1885)
  • 안나 이피게니아 (1817 - 1890)
  • 벌린트 세실 페렌츠 (1818 - 1873)
  • 러요시 (1820 - 1849)[26]


커진치가 헝가리 문학계를 이끄는 동안, 소피는 가사와 자녀 양육에 힘썼으며, 친구들의 자녀 교육까지 도맡았다. 또한 허브와 가정 약 제조에 능숙하여 1831년 콜레라 유행 당시 많은 환자들을 도왔다고 전해진다.[25]

커진치의 막내아들 러요시 커진치는 군인이 되어 육군 대령까지 올랐다. 그는 1848-1849년 헝가리 독립 전쟁에 참전했으며,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처형되어 아라드의 15번째 순교자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되었다.[27]

커진치는 1831년 콜레라로 사망하여 샤토랄야우헤이 셰팔롬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커친치 페렌츠는 헝가리 왕국 비하르 주 에르세메옌(오늘날 루마니아 시미안)에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인 커친치 요제프(1732-1784)는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바우이 주에서 치안 판사로 일했으며, 어머니는 보사니 주잔나(1740-1812)였다. 페렌츠에게는 4명의 형제와 4명의 자매가 있었다.[4] 그는 여덟 살까지 외할아버지인 페렌츠 보사니 밑에서 자랐는데, 외할아버지는 비하르 주의 서기이자 의회 대사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처음 7년 동안 외국어를 전혀 접하지 못했다.[5]

1766년 고모의 병간호를 위해 가족이 데브레첸으로 3개월간 이사했을 때, 커친치는 그곳의 데브레첸 대학교에서 잠시 공부했다.[6] 이후 부모 곁으로 돌아와 케슈마르크(오늘날 슬로바키아 케주마로크) 대학교 학생에게서 라틴어독일어를 배웠다. 계몽적인 사상을 가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힘써 라틴어와 독일어로 직접 가르치고 대화했으며, 외국어 학습, 미술과 음악 실습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아들을 주 의회에 데려가거나, 1774년 사로스파타크를 방문한 요제프 2세 황제의 오찬에 참석시키는 등 견문을 넓히도록 도왔다.[7][8]

커친치 페렌츠의 어머니인 보사니 주잔나(1740-1812)의 초상화


커친치가 독서와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낸 샤로스파타크 대학교 도서관


아버지 요제프는 처음에는 페렌츠가 군인이 되기를 바랐으나, 아들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하고는 작가가 되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작가라는 직업을 종교적인 소명으로 여겨, 14세의 페렌츠에게 크리스티안 퓌르히테고트 겔러트의 종교 논문을 라틴어에서 헝가리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페렌츠는 베센예이 죄르지의 아기스 트라게디아 (1772), 이그나츠 메사로스의 카르티감(1772) 등 다른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을 더 선호했으며, 살로몬 게스너의 전원시와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아나크레온의 시를 통해 문학적 소양을 넓혔다.[8]

1769년 9월 11일, 커친치는 샤로스파타크 대학교 학생이 되어 1779년까지 수학했다.[9] 첫 해에는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1773년부터는 수사학을 배웠다. 또한 고대 그리스어를 독학했으며, 1775년까지 신학 과정을 수강했다. 샤로스파타크에 주둔하던 프랑스인 군인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9] 아버지의 사후(1774년) 잠시 겔러트의 번역을 이어갔으나, 신학 교수의 만류로 중단하고 세속적, 국가적 주제로 관심을 돌려 1775년에는 이슈트반 로손치 하뇨키의 작품을 본떠 국가에 대한 짧은 지리서를 집필하여 어머니의 비용으로 코시체(오늘날 슬로바키아 코시체)에서 출판했다.[7]

1776년, 그는 죄르지 베세네이가 독일어로 쓴 단편 소설 Die Amerikanerde헝가리어로 번역하여 Az amerikai Podoc és Kazimir keresztyén vallásra való megtérésehu(미국인 포독과 카지미르의 기독교로의 개종영어)라는 제목으로 코시체에서 출판했다.[10] 이 번역 작업을 통해 그는 이신론과 종교적 관용의 원칙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 번역본에서 헝가리어 világosság|빌라고사그hu('명료함', '선명함'을 의미)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베세네이는 이를 높이 평가했고, 그의 긍정적인 반응은 커친치에게 큰 영감을 주어 작가로서의 길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7] 커친치는 당시 헝가리 문학의 주요 인물과 교류하게 된 것을 기뻐했지만, 베세네이의 문학 세계가 독자적인 문학 학파를 형성할 만큼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추종자가 되지는 않았다.[7]

학업 중 페렌츠는 젬플렌주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삼촌을 따라 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황제의 도시 빈, 특히 그곳의 웅장한 미술 컬렉션은 젊은 커친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1] 이 시기 그는 잘로몬 게스너,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 다비드 바로티 사보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샤로스파타크의 사서를 통해 샨도르 바로치가 번역한 장-프랑수아 마르몽텔의 Contes Moraux프랑스어(도덕적 이야기영어)를 접했는데, 이 책은 그가 가장 아끼는 책이 되어 훗날 감옥까지 가져갔다. 바로치의 번역은 아름답고 새로운 문체, 리듬감 있는 문장 구성, 극적인 압축성, 언어의 엄격함과 순수함, 그리고 프랑스적인 생소함까지 보여주었는데, 이는 커친치에게 헝가리 미문학 발전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헝가리어 번역가이자 언어 순화 운동가로서의 삶의 목표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7] 이후 그는 코시체, 에페르예시, 페슈트 등지에서 법률 견습 과정을 거쳤다.

2. 2. 법률 경력과 프리메이슨 활동

그는 학업을 마친 후 법률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779년 9월 9일, 톨나 주 검사였던 사무엘 밀레츠를 만나기 위해 코시체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법학 학위를 받았으며, 그의 첫사랑인 에르제베트 로즈고니와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인 다비드 바로티 사보를 처음 만났다. 그는 10월 18일까지 코시체에 머물렀다.[8] 한편 1779년 루마니아오라데아(당시 헝가리 나지바라드)에서는 헝가리어 형태론 규칙 연구의 선구자인 문법학자 미클로스 레바이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 문학과 문법에 대한 생각을 자주 교환했다.[12]

커진치 페렌츠는 변호사 활동(1779-1780)과 교육감(1785-1790)으로 코시체에 거주했다.


1781년 1월 11일부터 1782년 6월 2일까지는 슬로바키아의 프레쇼프(당시 헝가리 에페르예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직업 외에도 춤, 플루트 연주, 그림, 독서 등 예술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특히 독일 작가들을 좋아했다. 프레쇼프에 머무는 동안 그는 니노스 슈타인메츠의 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11]

1782년 8월부터는 부다페스트(당시 페슈트)에서 변호사 업무를 이어갔으며, 버르나트 요제프의 서기로 일했다. 부다페스트에서 그는 당대의 저명한 작가였던 오르치 뢰린츠와 러데이 게데온과 교류했다. 러데이는 커진치에게 서양 문학뿐만 아니라 츠리니 미클로시와 같은 옛 헝가리 작가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었다. 이러한 교류는 커진치의 미적 감각을 발전시키고 시야를 넓히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7] 그는 부다페스트의 활발한 지적,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요제프 2세의 절대 군주정 개혁, 특히 교회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커진치


1784년 초, 커진치는 미슈콜츠프리메이슨 로지에 가입했다. 그의 약혼녀의 아버지이자 코시체 학구 총감독이었던 라요스 퇴뢰크 백작이 그를 추천했으며, 그는 1784년 1월 16일 정식 회원이 되었다. 프리메이슨 활동을 통해 그는 안젤로 솔리만, 이그나츠 본 등 여러 지식인과 교류하며 계몽주의 사상과 문명화 과정을 지지하게 되었다. 프리메이슨은 당시 도덕과 취향을 세련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커진치는 특히 관용 칙서와 같은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책을 지지하며 프리메이슨 신념을 강화했다. 그는 종교적 관용, 언론의 자유, 개신교도의 공직 진출 허용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7]

같은 해 1784년 10월 13일, 그는 아바우 군(Abaúj County)의 명예 서기 및 치안 판사로 임명되었고, 11월 29일에는 젬플렌 군(Zemplén County)의 부기록관 직책도 얻었으나 수석 기록관과의 갈등으로 곧 사임했다.

커진치는 이후에도 프리메이슨 활동을 이어갔으며, 1790년대 초에는 일루미나티 사상에도 공감하며 아란카 죄르지에게 "그들의 목표는... evertere superstitionem, opprimere Tyrannismum, benefacere|미신 타파, 폭정 붕괴, 박애la... 이것이 삶의 가장 달콤한 행복이 아니겠는가?"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7]

2. 3. 교육감 시절과 문학 활동

1784년 아바우 군의 서기로 일했으며, 1786년에는 코쉬체의 교육감으로 임명되었다.

1780년 페렌츠 커진치 초상화


코쉬체에서 그는 유럽의 고전 작품들을 번역하는 데 힘썼다. 특히 고대 헝가리어 문헌을 참고하여 헝가리 고유의 어휘를 되살려 사용하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활동은 헝가리어의 발전과 문학 부흥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788년에는 다비드 버로티 서보와 야노쉬 버투서니와 함께 문학 잡지 "머저르 무제움"(Magyar Museum|머저르 무제움hu)을 창간했다. 이후에는 "오르페우스"(Orpheus|오르페우스hu)라는 잡지를 혼자서 운영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2. 4. 투옥과 석방 이후

1795년, 헝가리의 자코뱅 운동에 참여한 역할 때문에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사면되어 1801년에야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투옥에서 풀려난 후 동료 작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공개적인 활동은 자제했다. 약 6년 반에 걸친 투옥 기간 동안 겪은 일은 "포로의 일기(Fogságom naplója)"라는 제목의 작품에 기록했다.

커진치 페렌츠의 셰팔롬(Széphalom) 별장


투옥 당시 그의 재산 가치는 약 2만헝가리 포린트였으나, 이 중 상당 부분이 투옥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석방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샤토랄야우헤이 근처 키스바냐치카에 있는 포도밭과 언덕, 즉 '셰팔롬'('예쁜 언덕'이라는 의미)뿐이었다. 그는 투옥 후 청구된 비용을 정리하고 자녀를 양육해야 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1804년 겨울에는 다시 심각한 병을 앓았지만, 데브레첸의 수석 의사인 요제프 센트죄르지의 치료 덕분에 회복했다. 센트죄르지는 그의 친구가 되었고, 이후 몇 년 동안 그들은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같은 해, 그는 이전 후원자의 딸인 퇴뢰크 소피와 결혼했다.

1806년 그는 셰팔롬에 정착했으며, 당시 새로운 저택에는 방 3개만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20년 동안 문단을 주도하며, 거의 모든 헝가리 작가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문학 논쟁에도 참여했다.

181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젬플렌 현의 문서 보관소 정리 및 관리에 힘썼다. 샤톨라이어우이헤이에 있는 젬플렌 문서 보관소의 역사적인 가구 배치 일부는 그가 직접 설계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책상이 그곳에 놓여 있다. 문서 보관소 앞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카진치 페렌츠의 동상이 서 있다.

1828년에는 헝가리 학술원 설립을 위해 열린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역사 부문에서 최초의 통신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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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년 8월 23일, 셰팔롬에서 콜레라로 사망했으며, 자신의 바람대로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과거 그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는 이블 미클로시의 설계로 고전주의 양식의 영묘가 세워졌다. 영묘에는 "후세가 카진치 페렌츠에게 감사를 담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24]

3. 언어 개혁

커진치 페렌츠는 헝가리 문학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코시체에서 초등학교 감독관으로 재직하던 시기인 1786년부터 문학 잡지인 "헝가리 박물관"과 "오르페우스"를 창간하여 문학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1801년 투옥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1804년 아내 퇴뢰크 소피와 함께 세페할롬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약 20년 동안 헝가리 문단을 이끌었다. 이 시기 커진치는 당대의 거의 모든 헝가리 시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활발히 교류했고, 다양한 문학 논쟁에 참여하며 자신의 문학적 견해를 펼쳤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당대 헝가리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4. 주요 작품

커진치 페렌츠는 헝가리 문학 발전, 특히 헝가리어 개혁 운동에 기여한 중요한 작가이자 번역가였다. 그는 뛰어난 문체로 레싱, 괴테, 빌란트, 클로프슈토크, 오시안, 라 로슈푸코, 마르몽텔, 몰리에르, 메타스타시오, 셰익스피어, 스턴, 키케로, 살루스트, 아나크레온 등 당대 유럽의 주요 작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들의 걸작을 헝가리어로 번역하여 소개함으로써 헝가리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24] 번역 외에도 시, 에세이, 서간체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원작을 집필하며 헝가리어의 표현력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버로치 샨도르의 작품(페슈트, 1812, 8권), 시인 즈리니의 작품(1817, 2권), 데이카의 시(1813, 3권), 요한 키시의 시(1815, 3권) 등 다른 헝가리 작가들의 작품을 편집하여 출판하기도 했다.[24]

그의 작품과 번역물을 모아 놓은 전집은 1814년부터 1816년까지 페슈트에서 9권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원작 편지 모음집(''Eredeti Munkái'')은 요제프 바이지와 페렌츠 톨디에 의해 1836년부터 1845년까지 페슈트에서 5권으로 편집되었으며, 시집은 1858년과 1863년에 출판되었다.[24]

4. 1. 원작


  • ''Tövisek és virágokhun'' (가시와 꽃) - 1811년[13][7][14]
  • ''Poétai episztola Vitkovics Mihályhozhun'' (미하일로 비트코비치에게 보내는 시적 서한) - 1811년[7]
  • ''Felelet a mondolatrahun'' (팜플렛) - 1815년
  • ''Ortológus és neológus nálunk és más nemzeteknélhun''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정통주의자와 신학자) - 1819년[7]
  • ''Pályám emlékezetehun'' (나의 문학 활동 회고록) - 1828년
  • ''Fogságom naplójahun'' (포로 일기) - 1828년

4. 2. 번역

커진치 페렌츠는 헝가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번역가로 활동했다. 그의 번역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되었지만, 죄르지 베세네이의 작품 번역과 샨도르 바로치의 번역본을 접하며 본격화되었다.

14세 때 아버지의 지시로 크리스티안 퓌르히테고트 겔러트의 종교 논문을 라틴어에서 헝가리어로 번역하려 했으나, 신학 교수의 만류로 중단했다.[8][7] 이후 독일어로 쓰인 죄르지 베세네이의 단편 소설 ''Die Amerikaner''를 헝가리어로 번역하여 1776년 카사에서 ''Az amerikai Podoc és Kazimir keresztyén vallásra való megtérése'' (미국인 포독과 카지미르의 기독교로의 개종)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10] 이 번역은 그에게 이신론과 종교적 관용 사상을 접하게 했으며, '빌라고사그'(világosság, 명료함)라는 단어를 헝가리어 역사상 처음 사용한 것으로 기록된다. 베세네이의 긍정적인 반응은 커진치가 작가의 길을 걷는 데 큰 영감을 주었다.[7]

샨도르 바로치가 번역한 장-프랑수아 마르몽텔의 ''Contes Moraux'' (도덕적 이야기)는 커진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헝가리 미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번역가의 소명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7] 그는 젊은 시절 살로몬 게스너의 전원시와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아나크레온의 시를 읽으며 문학적 소양을 넓혔다.[8]

1780년대부터 본격적인 번역 활동을 펼쳐, 살로몬 게스너의 작품 번역에 착수하여 1783년 ''지크바르트''의 헝가리어판을 출판했고, 1788년에는 ''게스너 이딜리움'' (Gessner Idylliumi)을 출판했다.[7] 특히 ''게스너 이딜리움''은 원문에 대한 충실성, 문체의 아름다움, 언어의 음악적 리듬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커진치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 시기 그는 게스너, 요한 카스파르 라파터, 다니엘 초도비에츠키 등 유럽의 저명한 작가 및 예술가들과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7]

반면, 1789년에 출판한 "바치메제이넥 외스베-세데트 레벨레이(Bácsmegyey의 수집된 편지)"는 알브레흐트 크리스토프 카이저의 서간체 소설을 번역한 것이지만, 원작의 인물과 배경을 자신의 친구들과 카사의 사교계 모임에 맞게 각색하는 자유로운 번역 방식을 택했다. 이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으나, 원작을 충실히 옮기는 번역 원칙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7][14]

1790년에는 헝가리 성관이 부다로 돌아왔을 때 왕관 경비대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슈뢰더가 각색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번역했다.[18]

이그나츠 마르티노비치의 자코뱅 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된 기간(1794-1801)에도 커진치는 번역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기존 번역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번역을 진행했으며, 때로는 펜 대신 녹슨 페인트나 자신의 피를 사용하기도 했다.[21] 그의 투옥 경험은 훗날 ''Fogságom naplója'' (나의 감금 일기)라는 작품으로 기록되었다.[22]

석방 이후에도 그는 왕성한 번역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주요 번역 작품은 다음과 같다.

그는 특히 뛰어난 문체로 원작의 정신을 살리면서도 헝가리어의 표현력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1814년부터 1816년까지 페슈트에서 출판된 그의 9권짜리 전집은 대부분이 번역 작품으로 채워져 있을 정도로 번역은 그의 문학 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24] 그는 또한 , 미클로시 즈리니, 가보르 데이카, 요한 키시 등 다른 헝가리 작가들의 작품을 편집하여 출판하기도 했다.[24]

5. 유산과 평가

커진치 페렌츠는 헝가리 문학과 언어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828년 헝가리 학술원의 설립을 위해 열린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역사 부문에서 최초의 통신 회원이 되었다.

181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젬플렌 현의 문서 보관소 정리 및 관리에 힘썼다. 샤토랄야우헤이에 있는 젬플렌 문서 보관소의 역사적인 가구 배치 일부는 그가 직접 설계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책상이 남아 있다. 문서 보관소 앞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가 직접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의미를 담아 쉐팔롬이라고 이름 붙인 곳에 그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는 1873년 건축가 미클로시 이블이 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했으며, 영묘에는 "후세가 카진치 페렌츠에게 감사를 담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23]

컬체이 페렌츠는 기념 연설에서 커진치 페렌츠를 다음과 같이 칭찬하며 그의 문학사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시인들 중에서 이 사람과 조금이라도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누가 이 훌륭한 인물과 교류하지 않았을까요... 커진치는 모든 작품을 질서, 열정, 젊음의 기세를 담아 창작함으로써 모든 작가, 시인 등의 관심을 끌고, 우리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창립했습니다."

참조

[1] 간행물 Transactions of the Philological Society Philological Society (Great Britain)
[2] 웹사이트 1759. október 27. Kazinczy Ferenc születése http://www.rubicon.h[...]
[3] 웹사이트 AZ IRODALOMTÖRTÉNET ÉS KRITIKA. - Magyar irodalomtörténet - Kézikönyvtár http://www.arcanu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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