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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노와카 테루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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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토노와카 테루마사는 일본의 전 스모 선수로, 1984년 사도가타케 베야에 입문하여 2005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마쿠우치 최고 등급에서 90번의 대회를 치렀으며, 요코즈나를 상대로 8번의 금성을 획득했다. 2000년 무릎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은퇴 후에는 사도가타케 베야를 계승하여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23년에는 제자 학대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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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노와카 테루마사
기본 정보
코토노와카 2010
코토노와카 2010년 사진
시코나코토노와카 테루마사 (琴ノ若 晴將)
본명콘노 미츠야 (今野 満也)
애칭와카
출생일1968년 5월 15일
출생지일본 야마가타현 오바나자와시
신장191cm
체중181kg
BMI49.61
소속 헤야사도가타케 헤야
주특기오른쪽 샅바 잡기, 寄り (요리), 上手投げ (우와테나게)
최고 지위서쪽 세키와케
생애 전적785승 764패 100휴 (130 장소)
마쿠우치 전적608승 657패 84휴 (90 장소)
우승산단메 우승 2회
수상수훈상 2회, 감투상 5회
첫 도효1984년 5월 장소
입막1990년 11월 장소
은퇴일2005년 11월 장소
은퇴 후사도가타케 헤야 오야카타
기타 활동일본 스모 협회 이사 (2기, 2022년 3월 ~)
취미비디오 게임, 서예
금성 획득8개 (아케보노 1개, 타카노하나 3개, 와카노하나 2개, 아사쇼류 2개)
오야카타 명
오야카타 명사도가타케

2. 선수 경력

오바나자와 시립 오바나자와 중학교 시절 유도포환던지기 선수로 활동했으며, 뛰어난 신체 조건으로 사도가타케 오야카타(전 요코즈나 고토자쿠라)에게 스카우트되었다.[1][12] 1984년 3월 신체검사에서 고혈압 문제로 잠시 입문이 늦어졌으나, 같은 해 5월 바쇼에서 고토니시키 등과 함께 첫 도효를 밟았다.[1][12]

초기에는 본명인 이마노(今野), 코토콘노(琴今野) 등의 시코나를 사용하다 1988년부터 코토노와카(琴ノ若)로 활동했다.[1] 입문 6년 만인 1990년 7월 주료로 승급하여 세키토리가 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마쿠우치에 처음 진출했다.[1][12] 1991년 3월 재입막 이후 은퇴할 때까지 마쿠우치 등급을 유지하며 꾸준히 활약했다.

1993년 9월 처음 고무스비에 올랐고, 1999년 1월에는 자신의 최고 지위인 세키와케를 달성했다. 비록 유쇼(優勝) 경험은 없지만, 마에가시라 시절 요코즈나를 상대로 총 8개의 긴보시(金星)를 획득했으며 (다카노하나 3개, 아사쇼류 2개 등), 삼상(三賞)도 7차례(수훈상 2회, 투혼상 5회) 수상했다.

마쿠우치 재위 90장소(역대 8위), 마쿠우치 통산 608승 등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2000년 3월 입은 왼쪽 무릎 부상을 시작으로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렸으나[3], 특유의 끈기와 기량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잘생긴 외모로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1] 2003년 11월 부상 시에는 공상 제도(公傷制度)가 폐지되기 전 마지막으로 이를 활용하기도 했다.

2005년 11월, 스승인 12대 사도가타케 오야카타가 정년을 맞이하자, 협회 규정에 따라 베야(部屋)를 계승하기 위해 현역에서 은퇴하고 13대 사도가타케 오야카타가 되었다. 은퇴 당시 구라마에 국기관 시절 도효를 경험한 마지막 현역 세키토리였다.

'''통산 성적'''


  • 통산 전적: 785승 764패 100휴 (승률 .507)
  • 마쿠우치 전적: 608승 657패 84휴 (승률 .481)
  • 현역 재위: 130 장소
  • 마쿠우치 재위: 90 장소 (역대 8위)
  • 산야쿠 재위: 9 장소 (세키와케 2 장소, 고무스비 7 장소)
  • 마쿠우치 통산 출장: 1260회 (역대 8위)


'''주요 수상'''

  • 삼상: 7회
  • 수훈상: 2회 (1996년 7월, 1998년 9월)
  • 감투상: 5회 (1995년 7월, 1996년 3월, 1998년 7월, 2004년 3월, 2004년 9월)
  • 금성: 8개
  • 아케보노 1개
  • 다카노하나 3개
  • 와카노하나 2개
  • 아사쇼류 2개
  • 각 등급 우승
  • 산단메 우승: 2회 (1987년 5월, 1989년 9월)


'''시코나 변천'''

  • 곤노 미츠야 (今野 満也): 1984년 5월
  • 코토콘노 미츠야 (琴今野 満也): 1984년 7월 ~ 1988년 1월
  • 코토노와카 사네야 (琴の若 實哉): 1988년 3월 ~ 1998년 7월
  • 코토노와카 마사카츠 (琴乃若 將勝): 1998년 9월 ~ 1999년 5월
  • 코토노와카 테루마사 (琴ノ若 晴將): 1999년 7월 ~ 2005년 11월


'''주요 상대 전적'''

역사명승수패수역사명승수패수역사명승수패수역사명승수패수
아오키야마83아키노시마1916아키노슈11아케보노223
아사쇼류411아사세키류24아사노쇼84아사노와카64
아사히토요67아마13아미니시키62이타이20
이와키야마14시오마루10에나자쿠라21코시23
쿄호30코니시키47코노하나65카이오822
카이호97카키조에32카스가오40카스가니시키02(1)
카스가후지52이와오34키세노사토13(1)킷카와77
키타자쿠라10아사히와야마1111아사히텐포810아사히도잔46
키라이호36키리시마31키리니시키44킨카이잔21
쿠시마우미61켄코47코호10고쇼로30
쿠로미21코니시키76사카호코22시키시마45
시모토리42주몬지38슌케츠11진가쿠02
센토류10다이시41타이쥬야마01다이쇼호37
다이젠56다이히쇼10키토우1920타카노츠루10
타카노나미22(1)29(1)타카노하나5(1)34타카노후지20타카노와카45
타카미노리6(1)5타카미스기85고후우41릿코12
타마아스카12타마카이리11타마카스가161타마노시마55
타마리키도41치요다이카이212치요텐잔45토코노야마20
데지마7(1)19테라오1210데와아라시10토가142
토키노우미84토키츠우미33토키텐쿠11토사노우미1714(1)
토치아즈마414토치사카53토치시10토치노와1012
토치노하나33토치노와카134토모후지24치노하나42
토요사쿠라40토요노우미102토요노시마01나미노하나54
하쿠호02하쿠로잔11하나노쿠니12하마니시키10
하마노시마510오이카제42하루노야마20히고노우미811
후텐오32타케야마52호쿠토키63마이노우미57
미스기리1116미토이즈미97미나토후지96미야마67
무사시마루13(1)29무소야마12(1)26(1)야마토30요시지40
리키오01료고쿠32로호14와카쇼요93
와카세가와32와카토마20와카노사토10(2)9와카노시로21
와카노하나1023와카노야마54


2. 1. 초기 (1984년 ~ 1990년)

오바나자와 시립 오바나자와 중학교 시절, 유도부원으로 활동하며 현 대회 단체전 준우승을 경험했고, 포환던지기 선수로도 야마가타현 대회에서 6위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운동 신경을 보였다.[1][12] 중학교 입학 당시 이미 신장이 180cm를 넘었으며, 14세에는 1.87m에 달하는 큰 체격을 가졌다.[1][12] 그의 재능을 알아본 전 요코즈나 고토자쿠라인 사도가타케 오야카타(스승)가 10번 이상 찾아와 설득한 끝에 스모계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1][12]

1984년 3월, 같은 사도가타케 베야 소속이 되는 고토니시키와 함께 신제자 검사를 받았으나, 긴장으로 인한 고혈압 때문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1][12] 결국 두 달 뒤인 1984년 5월 바쇼(스모 대회)에서 첫 도효를 밟으며 프로 스모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 그의 동기생으로는 훗날 고무스비까지 오른 나미노하나가 있다.[12]

처음에는 본명인 이마노(今野)로, 이후 코토콘노(琴今野)라는 시코나(스모 선수 이름)를 사용하다가 1988년부터 코토노와카(琴ノ若)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1] 입문 초기에는 중요한 경기에 약해 다소 성장이 더뎠지만, 고토니시키와의 꾸준한 연습을 통해 기량을 갈고 닦았다.[12] 그 결과, 입문 6년 만인 1990년 7월 바쇼에서 신 주료로 승급하며 정식으로 급여를 받는 세키토리의 지위에 올랐다.[1][12]

2. 2. 마쿠우치 진출과 활약 (1991년 ~ 2005년)

1990년 7월 주료 등급에 올라 세키토리가 되었고, 두 장소 만인 같은 해 11월에는 처음으로 마쿠우치에 진출했다.[1] 첫 마쿠우치에서는 7승 8패로 마케코시(負越)했지만, 1991년 3월 장소에서 재입막하여 9승 6패로 가치코시(勝越)한 이후로는 계속 마쿠우치 등급을 유지했다.

1993년 9월 장소에서는 처음으로 산야쿠 등급인 고무스비로 승진하여 8승 7패를 기록했다. 이후 고무스비와 마에가시라를 오가며 꾸준히 활약했다. 1995년 7월 장소에서는 두 명의 오제키를 꺾고 첫 삼상(三賞)으로 투혼상을 받았다. 1996년 3월 장소에서는 첫날부터 7연승을 거두는 등 11승을 올려 두 번째 투혼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7월 장소에서는 아케보노와 다카노하나 두 요코즈나를 모두 꺾는 '더블 긴보시'를 달성하며 9승 6패로 첫 수훈상을 받았다.[13]

1998년 7월 장소에서는 2일째부터 10연승을 포함해 11승을 거두며 세 번째 투혼상을, 9월 장소에서는 요코즈나 1명과 오제키 1명을 꺾고 두 번째 수훈상과 함께 통산 4번째 긴보시를 획득했다. 마침내 1998년 11월 장소에서 고무스비로 10승 5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고, 1999년 1월 장소에서 세키와케로 승진했다. 신 세키와케 장소에서도 8승 7패로 가치코시했지만, 이 무렵 입은 왼쪽 무릎 부상으로 다시 산야쿠에서 내려왔고 이후로는 세키와케나 고무스비로 복귀하지 못했다.

비록 유쇼(優勝) 경험은 없지만, 마에가시라 시절 요코즈나를 상대로 총 8번의 긴보시를 획득했다. 특히 다카노하나를 상대로 3번의 긴보시를 따냈으며, 아케보노 1번, 와카노하나 2번, 아사쇼류 2번의 금성을 기록했다. 아사쇼류를 상대로는 2003년 3월과 7월에 연달아 승리하며 강한 면모를 보였다.

2004년 7월 장소에서는 당시 전승 가도를 달리던 요코즈나 아사쇼류와 맞붙어 역사에 남을 만한 경기를 펼쳤다. 코토노와카가 우와테나게로 아사쇼류를 넘겼으나, 아사쇼류가 브릿지 자세로 버티는 사이 코토노와카가 먼저 손을 짚었다. 교지(行司)인 기무라 쇼노스케는 코토노와카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모노이이(物言い)가 들어왔다. 3분 넘는 협의 끝에, 아사쇼류의 몸이 땅에 닿는 것과 코토노와카의 손이 짚는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판단되어 토리나오시(取り直し)가 선언되었다.[2] 재경기에서는 아사쇼류가 승리했지만, 첫 번째 경기에서 아사쇼류가 이미 시니타이(死に体)였다는 논란이 일었다. NHK에는 "아사쇼류는 이미 죽은 몸이었고 코토노와카가 이겼다"는 시청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코토노와카 본인도 경기 후 인터뷰에서 손을 짚은 것은 카바이테(庇い手)였으며, 재경기가 된다면 시니타이 같은 제도는 없애는 편이 낫다고 강하게 불만을 표했다. 3일 뒤 타마노시마와의 경기에서는 비슷한 상황에서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손을 짚어주었고, 타마노시마는 코토노와카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2000년 3월 훈련 중 왼쪽 무릎 반월판을 심각하게 다친 이후[3],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2002년 7월과 2003년 11월에도 무릎 부상을 당했으며, 말년에는 무릎 인대 4개 중 3개가 끊어지고 반월판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 의사가 놀랄 정도였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 11월 부상 때는 공상 제도(公傷制度)가 폐지되기 직전 이를 활용하여 다음 장소에 결장하면서도 등급 하락을 피할 수 있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특기인 오른쪽 마와시 잡기를 하면 전성기 못지않은 우와테나게를 보여주기도 했다.

부상 속에서도 투혼을 발휘하여 2004년 3월 장소에서는 11승을 거두며 33장소 만에 네 번째 투혼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9월 장소에서는 센슈라쿠(千秋楽)에 당시 우승 경쟁 중이던 도치아즈마를 꺾고 다섯 번째 투혼상을 받았다. 오랜 선수 생활 동안 총 7번의 삼상 (수훈상 2회, 투혼상 5회)을 수상했다.

공격 시작이 느려 '미스터 1분'이라는 별명이 있었지만[13], 일단 상대의 속공을 막아내고 미즈이리(水入り)에 가까운 지구전이 되면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미즈이리를 사상 최다인 4번 경험하기도 했다.

2005년 11월 장소, 스승인 12대 사도가타케 (전 요코즈나 고토자쿠라)가 정년을 맞이하게 되자, 코토노와카는 오야카타(親方) 자격을 계승하기 위해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 일본 스모 협회 규정상 오야카타가 정년퇴임하면 소속 선수들은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일째인 11월 25일 슌케츠에게 패배하여 5승 8패로 마케코시가 확정된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발표했고, 다음 날 키세노사토와의 경기는 부전패 처리되었다. 코토노와카 본인은 마지막 장소를 센슈라쿠까지 마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코토노와카는 마쿠우치에 총 90장소 동안 재위했으며 (역대 8위), 마쿠우치 통산 608승 (역대 15위권), 마쿠우치 통산 1260회 출장 (역대 8위)의 기록을 남겼다. 은퇴 당시 구라마에 국기관의 도효에 서 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 현역 세키토리이기도 했다.

2. 3. 경기 스타일

코토노와카는 상대의 공격을 받아치며 반격하는 기술을 주로 사용했고, 다른 선수들에 비해 스모 경기 시간이 긴 편이었다. 이 때문에 "미스터 1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13] 상대의 마와시를 잡을 때는 오른손을 안으로 넣고 왼손을 밖으로 빼는 '미기요쓰'(右四つ) 자세를 선호했다. 주특기는 우와테나게(上手投げ, 팔로 상대를 던지는 기술)로, 전체 승리의 20% 이상을 이 기술로 거두었다. 이는 일반적인 스모 선수의 우와테나게 승리 비율(평균 7%)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공격 타이밍이 늦다는 점은 속공형 선수에게 약점이 되기도 했지만, 일단 상대의 빠른 공격을 막아내고 서로 버티는 물입리(水入り, 장기전으로 인한 잠시 중단)에 가까운 상황이 되면 끈질기게 버티며 공격에 강한 모습을 보이는 장점도 있었다. 실제로 물입리를 역대 최다인 4번 경험하기도 했다(1994년 무사시마루와의 경기, 2001년 기토리키와의 경기 등). 하지만 공격 타이밍이 늦는 점이 때로는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선수 생명이 길고 경기 시간이 긴 경기가 많아 "가장 오랜 시간 혼바쇼(本場所)에서 씨름을 한 선수", "씨름을 좋아하는 선수"로 불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00년 7월 혼바쇼에서는 시키시마와 1분이 넘는 경기를 펼쳤고, 같은 해 9월 혼바쇼에서는 타마하루카스와 3분이 넘는 긴 승부를 벌여 모두 승리했다.

2004년 7월 혼바쇼 중일(中日, 8일째)에 열린 아사쇼류와의 경기는 역사에 남을 만한 논란을 낳았다. 당시 전승 가도를 달리던 요코즈나 아사쇼류를 코토노와카가 우와테나게로 넘겼다. 이때 아사쇼류는 브릿지 자세로 버티며 끝까지 코토노와카의 마와시를 놓지 않았다. 코토노와카는 아사쇼류가 이미 시니타이(死に体, 승부가 결정된 상태)라고 판단하여, 요코즈나 위로 쓰러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손을 씨름판에 짚었다. 이 손이 아사쇼류의 몸이 땅에 닿기보다 아주 약간 먼저 닿았다. 심판(기무라 쇼노스케)는 코토노와카의 '카바이테'(庇い手, 상대를 배려하여 손을 짚는 행위)로 보고 코토노와카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곧바로 이의가 제기되었다. 3분 15초간의 긴 협의 끝에, 심판단은 아사쇼류의 몸이 땅에 닿는 것과 코토노와카의 손이 땅에 닿은 것(이를 '츠키테'(つき手, 땅에 손을 짚어 패배하는 행위)로 간주)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판단하여 다시 하기(取り直し, 재경기)를 선언했다.[2] 재경기에서는 아사쇼류가 승리했다. 경기 후 코토노와카는 "그것은 '츠키테'가 아니라 '카바이테'였다. 승부가 확실히 났기 때문에 손을 짚었을 뿐이다. 그대로 요코즈나 위로 쓰러져도 상관없었다. 재경기가 될 거라면 '시니타이' 같은 제도는 없애는 편이 낫다"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일본방송협회에는 "아사쇼류는 이미 시니타이였고 코토노와카가 이긴 경기였다"는 시청자 항의 전화가 수십 건 이상 걸려왔다.

이 논란이 있은 지 3일 후인 11일째 경기에서, 코토노와카는 타마노시마와 맞붙었다. 코토노와카에게 왼손 마와시를 잡힌 타마노시마는 아비세타오시(浴びせ倒し)로 패배했는데, 이때 타마노시마가 쓰러지려 하자 코토노와카는 아사쇼류와의 경기 때처럼 손을 짚어 상대 선수를 보호했다. 경기 후 타마노시마는 "코토노와카 선수가 손을 짚어주지 않았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라며 그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3. 은퇴와 사도가타케 베야 계승 (2005년 ~ 현재)

2005년 11월 혼바쇼를 마지막으로, 당시 마쿠우치 최고령 선수였던 37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는 스승이자 장인인 전 요코즈나 고토자쿠라가 일본 스모 협회의 정년(65세)을 맞이함에 따라, 그 뒤를 이어 사도가타케 베야를 계승하기 위한 결정이었다.[3] 은퇴와 동시에 13대 사도가타케(佐渡ヶ嶽) 오야카타를 습명하고 베야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1996년 3월 고토자쿠라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베야 계승이 예정되어 있었다. 결혼 후 법적 이름은 곤노 미쓰야(今野 満也)에서 가마타니 미쓰야(鎌谷 満也)로 변경했다.[3]

3. 1. 지도자 경력

2005년 11월, 스승이자 장인인 전 요코즈나 고토자쿠라가 정년(65세)을 맞이함에 따라 현역에서 은퇴하고 즉시 사도가타케 베야[佐渡ヶ嶽部屋]의 스승 자리를 물려받아 13대 사도가타케(佐渡ヶ嶽)가 되었다.[3] 그는 1996년 고토자쿠라의 딸과 결혼하면서 이미 베야를 계승할 예정이었다.[3]

스승이 된 후 여러 제자들의 성장을 이끌었다. 2007년 7월에는 고토미츠키의 오제키 승진을 감독했으며,[5] 2008년 5월에는 고토오슈가 마쿠우치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 고토카스가는 그가 스승이 된 후 처음으로 마쿠우치 등급으로 승진한 선수가 되었다. 2011년에는 고토쇼기쿠를 오제키로 승진시켰는데, 이는 고토미츠키 이후 일본인 선수로는 처음이었다.[5] 이후 고토에코, 고토쇼호, 그리고 그의 아들인 고토노와카 등이 마쿠우치에 도달했다. 특히 아들 고토노와카는 2024년 1월 오제키로 승진했다.[6][27]

그러나 제자들과 관련된 논란도 있었다. 2010년 7월, 고토미츠키가 스모 야구 도박 문제로 해고되면서 사도가타케는 감독 책임을 물어 협회 내에서 두 계급 강등되는 징계를 받았다.[5] 2011년 4월에는 제자 고토하루히가 스모 승부 조작 문제로 은퇴 권고 처분을 받아 승격 정지 3년의 추가 징계를 받았다. 2023년 1월에는 전 제자 야나기하라 타이쇼가 부당한 처우(휴장 불허, 상한 음식 강요 등)를 주장하며 협회와 사도가타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31][32]

징계 기간 이후 협회 내에서 다시 입지를 다졌다. 2022년 3월 일본 스모 협회 이사로 선출되어 심판 부장을 맡았고,[23][24] 2023년 1월부터는 단독 심판 부장으로 활동했다.[8] 2024년 3월 이사로 재선임되어 홍보 부장과 종합 기획 부장을 맡고 있다.[29][30]

사도가타케의 일본 스모 협회 주요 직책 변화는 다음과 같다.

시기직책비고
2010년 3월심판부 위원
2010년 9월평년기 (순회부)고토미츠키 도박 사건으로 강등[5]
2011년 4월(승격 정지 3년)고토하루히 승부 조작 사건 관련
2014년 4월위원징계 해제 후 재승격
2020년 3월임원 대우 위원순회부 부부장, 경비 본부 부부장 겸임[19]
2022년 3월이사심판 부장 (이세가하마와 공동)[23][24]
2023년 1월이사심판 부장 (단독)[8]
2024년 3월이사홍보 부장, 종합 기획 부장[29][30]



사도가타케 베야는 2020년 9월 기준으로 37명의 선수가 소속된 대규모 베야 중 하나이며,[20] 그는 대회 중 하나미치(선수 입장 통로)에서 제자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4. 가족

1996년 4월, 스승인 사도가타케의 장녀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고, 이로써 사도가타케 베야를 계승하는 것이 결정되었다.[13]

아들인 가마타니 마사카쓰(코토자쿠라 마사카츠 2세)는 1997년 11월에 태어났다.[9] 코토노와카는 2006년 5월 27일 료고쿠 국기관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장남 마사카쓰와 함께 씨름판에 올랐고, 아들에게 자신의 시코나인 '코토노와카'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16]

마사카쓰는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2015년 11월, 아버지의 사도가타케 베야에 입문하여 '코토카마타니'라는 시코나로 스모 경력을 시작했다.[9][16][17] 그는 2016년 1월 조노구치에서 전승 우승을 차지했고,[16] 같은 해 5월 마쿠시타 아래 등급인 산단메로 승급했다. 이때 아버지는 '코토노와카' 시코나를 물려주려 했으나, 마사카쓰는 "아직 그 이름을 댈 정도가 아니다"라며 사양했다. 이후 2016년 9월 마쿠시타 등급으로 승진했다.[9]

2019년 5월 마쿠시타 동쪽 2번째 자리에서 4승 3패의 성적을 거두었고, 같은 해 7월 주료 등급으로 승진하면서 아버지의 시코나를 이어받아 2대 코토노와카 마사카츠가 되었다.[18] 그는 오제키로 승진하면 할아버지이자 선대 사도가타케인 코토자쿠라의 시코나를 잇기로 생전의 선대 사도가타케(할아버지)와 약속한 바 있다.[10] 2024년 1월 오제키 승진이 결정되었고,[26] 같은 해 3월 바쇼에서 가치코시를 달성하며 5월 대회 전에 2대 코토자쿠라 마사카츠로 개명할 수 있게 되었다.

5. 논란

코토노와카는 지도자로서 활동하면서 제자들의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10년 7월, 제자 고토미츠키가 스모 야구 도박 문제에 연루되어 일본 스모 협회로부터 해고 처분을 받았다. 이에 코토노와카는 감독 책임을 물어 해당 혼바쇼 동안 근신 처분을 받았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이 문제의 책임을 지고 위원에서 평년기로 2계급 강등되는 추가 징계를 받았다. 동시에 담당 부서도 심판부에서 순회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2011년 4월에는 또 다른 제자 고토하루히가 스모 승부 조작 문제에 연루되어 은퇴 권고 처분을 받았다. 코토노와카는 이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번 감독 책임을 지고 3년간 승격이 정지되는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제자들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그의 지도자 경력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5. 1. 아사쇼류와의 경기 논란 (2004년)

2004년 7월 나고야 장소 8일째, 당시 마에가시라였던 코토노와카는 전승 가도를 달리던 요코즈나 아사쇼류와 맞붙었다. 이 경기에서 코토노와카는 아사쇼류를 우와테나게 기술로 넘겼다. 이때 아사쇼류는 씨름판 바닥에 등이 닿지 않으려고 브릿지 자세로 버티며 코토노와카의 마와시를 놓지 않았다. 코토노와카는 이미 승부가 결정되었다고 판단하여 아사쇼류 위로 쓰러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왼손으로 도효 바닥을 짚었다.

심판인 기무라 쇼노스케는 코토노와카의 손이 바닥을 짚는 행위를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카바이테)으로 보고 코토노와카에게 승리를 선언하는 부채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곧바로 씨름 규칙상 금지된 행위인 츠키테(손짚기 반칙)라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3분 15초간의 긴 협의 끝에, 심판단은 코토노와카의 손이 아사쇼류의 몸보다 먼저 도효에 닿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츠키테로 간주했다. 결국 아사쇼류의 몸이 떨어진 것과 코토노와카의 손이 닿은 것이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재경기를 결정했다.

재경기에서는 아사쇼류가 키리카에시 기술로 승리하며 연승을 이어갔다. 그러나 첫 번째 경기의 판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크게 일었다. 특히 아사쇼류가 브릿지 자세로 버틸 때 이미 죽은 몸(승부가 결정된 상태)이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코토노와카의 손이 먼저 닿은 것은 명백했지만, 아사쇼류가 '죽은 몸'이었다면 코토노와카의 승리가 되어야 했다. 심판단의 의견이 갈리면서 결국 '동체' 판정 후 재경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경기 후 코토노와카는 인터뷰에서 "그것은 '츠키테'가 아니라 '카바이테'였다. 승부가 확실히 결정되었기에 손을 짚은 것뿐이다. 그대로 요코즈나 위에 쓰러져도 괜찮았다. 재경기가 된다면 '죽은 몸' 같은 제도는 없애는 편이 낫다"고 강하게 불만을 표출했다. 이 경기가 중계된 후 일본방송협회에는 "아사쇼류는 이미 죽은 몸이었고 코토노와카가 이겼다"는 내용의 항의 전화가 수십 건 이상 빗발쳤다.

이 논란의 경기 3일 뒤인 대회 11일째, 코토노와카는 다마노시마와 대결했다. 코토노와카는 다마노시마를 아비세다오시 기술로 꺾었는데, 이때도 다마노시마가 쓰러질 때 손을 짚어 상대방의 부상을 방지했다. 경기 후 다마노시마는 "코토노와카 씨가 손을 짚어주지 않았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라며 그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이는 아사쇼류와의 경기에서 코토노와카가 주장했던 '카바이테'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5. 2. 제자 학대 의혹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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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오바나자와 시립 오바나자와 중학교 입학 당시 신장이 180cm를 넘었으며, 뛰어난 신체 조건을 바탕으로 유도부원으로 활동하며 현 대회 단체전 준우승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포환던지기 선수로도 도움 출전하여 야마가타현 대회에서 6위를 차지하는 등 다재다능한 스포츠 소년으로 지역 내에서 주목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전 요코즈나 고토자쿠라인 사도가타케 오야카타는 그에게 스모 입문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주변의 반대와 본인의 거절 의사에도 불구하고, 사도가타케 오야카타의 10번이 넘는 방문과 열정적인 설득 끝에 입문을 결심하게 되었다.[12] 1984년 3월 장소의 신제자 검사에 같은 사도가타케 방의 고토니시키 등과 함께 응시했으나, 긴장으로 인해 혈압이 급상승하여 불합격 판정을 받아 초도효가 한 장소 늦춰졌다. 5월 장소 초도효 동기생으로는 고무스비 나미노하나가 있으며, 매우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하쿠타카야마의 아버지와는 중학교 시절 포환던지기에서 경쟁했으며, 코토노와카가 6위를 차지했을 때 하쿠타카야마의 아버지가 우승했다.[14]

어린 시절에는 중요한 경기에 약한 모습을 보여 출세가 다소 늦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고토니시키의 연습 상대가 되면서 실력이 향상되었다. 공격 시작이 느려 '미스터 1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13], 일단 상대의 속공을 막아내고 물입리에 가까운 지구전이 되면 끈질기고 강한 모습을 보이는 장점도 있었다. 실제로 물입리도 사상 최다인 4번 경험했다 (1994년 무사시마루전, 2001년 기토리키전 등).

1996년 4월, 스승인 사도가타케 오야카타의 장녀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 이로써 장차 사도가타케 방을 계승하는 것이 사실상 결정되었다.

2000년 1월 장소에서는 제자 고토리유의 금성 획득에 자극받아 자신도 다카노하나를 꺾고 금성을 따냈다.

은퇴 당시 구라메 국기관의 씨름판에 섰던 경험이 있는 유일한 현역 관록이자 마쿠우치 역사였다. 선수 생명이 길었고 장시간 경기가 많았기에, "가장 긴 시간 본 장소에서 씨름을 한 역사", "씨름을 좋아하는 역사"라고도 불렸다.

2010년 3월 장소부터 심판부 소속이 되었으나, 같은 해 7월 장소 직전에 제자 고토미츠키가 스모 야구 도박 문제로 해고 처분을 받으면서 책임을 지고 근신 처분을 받았다. 9월 장소 전에는 이 문제의 책임을 물어 위원에서 평년기로 2계급 강등되고 심판부에서 순회부로 이동하여, 심판 위원을 맡은 기간은 실질적으로 두 장소에 불과했다. 2011년 4월에는 제자 고토하루히가 스모 승부 조작 문제로 은퇴 권고 처분을 받아 승격 정지 3년의 처분을 받았다. 처분이 끝난 2014년 4월에 위원으로 재승격했고, 2020년 3월에는 임원 대우 위원으로 승격[19]하여 순회부 부부장 및 경비 본부 부부장을 맡았다. 2022년 1월 이사 후보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되어[22] 같은 해 3월 이사로 정식 취임했으며[23], 심판 부장( 이세가하마와 2인 체제)에 임명되었다[24]. 2024년 3월에는 홍보 부장과 종합 기획 부장에 취임했다[30].

2006년 5월 27일, 료고쿠 국기관에서 단발식을 겸한 은퇴 기념 스모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장남 마사카츠(현 2대 고토노와카)도 함께했으며, 장차 '고토노와카'의 시코나를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마사카츠는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2015년 11월 장소에 사도가타케 방에 입문하여 '고토카마야'라는 시코나로 초도효를 밟았다.[16][17] 이후 주료 승진이 확정된 2019년 7월 장소부터 아버지의 시코나를 이어받아 2대 고토노와카가 되었다.[18] 코토노와카는 생전에 선대 스승(장인)과 약속한 대로, 아들이 오제키로 승진하면 선대 스승의 시코나였던 '고토자쿠라'를 잇게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2024년 1월 장소에서 아들 고토노와카가 오제키 승진을 확정짓자, 평소 사도가타케의 지도력을 비판하던 기토리키조차 "분하지만 저 녀석의 가르침이 좋았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있다.[27]

=== 2004년 아사쇼류와의 논란의 경기 ===

2004년 7월 장소 8일째 경기에서 당시 전승 가도를 달리던 요코즈나 아사쇼류와 맞붙었다. 코토노와카는 우와테나게 기술로 아사쇼류를 넘겼는데, 이때 아사쇼류는 브릿지 자세로 버티며 끝까지 코토노와카의 마와시를 놓지 않았다. 한편, 코토노와카는 손을 짚었다. 그 손이 아사쇼류가 떨어지기보다 한순간 먼저 토호에 닿았다. 카바이테(상대를 배려하여 손을 짚는 행위)로 본 기무라 쇼노스케 (31대)의 군바이(부채)는 코토노와카에게 올라갔지만, 곧바로 이의가 제기되었다. 3분 15초간의 긴 협의 끝에, 심판단은 아사쇼류의 몸이 떨어진 것과 코토노와카의 왼손이 츠키테(손이 먼저 땅에 닿아 패배하는 경우)가 된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판단하여 다시 하기(재경기)를 선언했다.

재경기에서는 아사쇼류가 키리카에시 기술로 승리하여 8연승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판정은 '죽은 몸' 해석을 둘러싸고 큰 논란을 일으켰다. 코토노와카의 손이 먼저 닿은 것은 명백했지만, 아사쇼류가 '살아있는 몸'이었는지 '죽은 몸'이었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상황이었다. 결국 심판단의 의견이 갈려 동체(동시) 판정으로 재경기가 결정된 것이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코토노와카는 자신의 행동이 '츠키테'가 아닌 '카바이테'였으며, 재경기가 될 바에는 '죽은 몸'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강하게 불만을 표출했다. 중계 방송사인 일본방송협회에는 판정에 항의하는 전화가 수십 건 이상 걸려왔으며, 대부분 "아사쇼류는 이미 죽은 몸이었고 코토노와카가 이겼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지 3일 뒤인 11일째 경기에서 코토노와카는 타마노시마와 대결했다. 코토노와카는 아비세다오시 기술로 타마노시마를 쓰러뜨렸는데, 이때도 타마노시마가 넘어질 때 손을 짚어 상대방의 부상을 막는 모습을 보였다. 타마노시마는 경기 후 "코토노와카 세키(関, 세키토리의 존칭)가 손을 짚어주지 않았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라며 코토노와카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참조

[1] 서적 Grand Sumo Weatherhill
[2] 웹사이트 Sumo 101: Controversial decisions https://www.japantim[...] Japan Times 2019-05-25
[3] 웹사이트 Kotonowaka's retreat: the mountain recedes! http://www.lemondedu[...] Le Monde du Sumo 2005-12-01
[4] 웹사이트 Health risks in spotlight as Spring Basho nears start https://www.japantim[...] 2020-03-05
[5] 웹사이트 Hakuho continues winning streak at autumn sumo tournament https://www.japantim[...] Japan Times 2010-09-13
[6] 웹사이트 琴ノ若の大関昇進が事実上決定 昇進目安の直近3場所33勝到達 初Vまでしこ名は変えず https://www.nikkansp[...] Nikkan Sports 2024-01-28
[7] 웹사이트 八角理事長の続投決定、実質4期目「公明正大な協会運営を行う」 佐渡ケ嶽、伊勢ノ海が理事新任 (Sadogatake, Isenoumi newly appointed as directors) https://www.nikkansp[...] 2022-03-28
[8] 웹사이트 藤島副部長が審判長に 伊勢ケ浜親方の理事辞任受け https://www.sanspo.c[...] Sankei Sports 2023-01-06
[9] 웹사이트 Japanese teen gets good start on living up to sumo legacy http://www.asianews.[...] Asian News Network 2015-11-11
[10] 웹사이트 琴鎌谷改め琴ノ若、次の目標は大関で「琴桜」襲名 https://www.nikkansp[...] Nikkan Sports 2019-05-29
[11] 웹사이트 Kotonowaka Terumasa Rikishi Information http://sumodb.sumoga[...] Sumo Reference
[12] 웹사이트 師匠紹介 https://sadogatake.j[...] 佐渡ヶ嶽部屋
[13] 간행물 大相撲名門列伝シリーズ(2) 二所ノ関部屋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4] 간행물 大相撲ジャーナル
[15] 간행물 相撲
[16] 웹사이트 佐渡ケ嶽親方の長男、九州場所デビューへ 埼玉栄高・鎌谷将且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15-09-11
[17] 웹사이트 佐渡親方長男の鎌谷ら合格 九州場所新弟子検査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15-11-08
[18] 뉴스 佐渡ケ嶽親方の長男琴鎌谷が十両昇進「琴ノ若」襲名 https://www.nikkansp[...] 2019-05-29
[19] 웹사이트 伊勢ケ浜親方は審判部長 相撲協会 https://www.jiji.com[...] JIJI.COM 2020-03-25
[20] 웹사이트 琴恵光、最多37人の部屋頭に「何事も積み重ね」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0-09-05
[21] 웹사이트 相撲協会理事候補に現職芝田山親方と花籠親方、新たに佐渡ケ嶽親方立候補へ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1-12-09
[22] 뉴스 相撲協会の役員選挙、無投票決定 https://www.chugoku-[...] 2022-01-27
[23] 뉴스 八角理事長の続投決定、実質4期目「公明正大な協会運営を行う」 佐渡ケ嶽、伊勢ノ海が理事新任 https://www.nikkansp[...] 2022-03-28
[24] 뉴스 “協会NO2”の事業部長に陸奥理事 審判部長は伊勢ケ浜、佐渡ケ嶽両理事の2人体制に https://hochi.news/a[...] 2022-03-30
[25] 웹사이트 審判部の佐渡ケ嶽部長が左下腿肉離れで休場 全治3週間見込み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2-05-20
[26] 웹사이트 佐渡ケ嶽審判部長、腰痛で初場所初日から休場 弟子で1人息子の琴ノ若は大関とりの場所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4-01-13
[27] Youtube 【新大関】琴ノ若 誕生!悔しいけどアイツの教えが良かった! https://www.youtube.[...] 貴闘力部屋 2024-02-10
[28] 뉴스 日本相撲協会、3期連続の無投票で理事候補と副理事候補決定 八角理事長続投なら実質5期目 https://www.nikkansp[...] 2024-01-26
[29] 뉴스 日本相撲協会の八角理事長が続投決定、実質5期目 暴力問題の撲滅などを誓う https://www.nikkansp[...] 2024-03-25
[30] 뉴스 春日野親方が協会NO2の事業部長に 新任理事の浅香山親方は九州場所担当部長…新職務分掌発表 https://hochi.news/a[...] 株式会社報知新聞社 2024-03-27
[31] 웹사이트 佐渡ヶ嶽部屋 コロナ禍引退の元力士が相撲協会提訴 千葉 松戸 https://www.nhk.or.j[...] NHK千葉放送局 2023-03-02
[32] 웹사이트 敗した牛肉を「焼き肉のタレに漬け込めば臭いは消える」と食べさせ…大相撲・佐渡ヶ嶽部屋が元力士に訴えられた“ドケチいじめ”(1/3ページ) https://bunshun.jp/a[...] 文春オンライン 2024-05-02
[33] 웹사이트 Rikishi in Juryo and Makunouchi http://www.szumo.hu/[...] szumo.hu
[34] 웹사이트 琴ノ若 晴將 力士情報 http://sumodb.sumoga[...] sumodb
[35] 문서 腰椎捻挫により12日目から途中休場
[36] 문서 左膝半月板損傷
[37] 문서 左膝前十字靱帯及び左膝外側側副靱帯及び左膝外側半月板損傷により11日目から途中休場
[38] 문서 公傷
[39] 문서 上腕二頭筋長頭腱断裂・大胸筋挫傷により3日目から途中休場
[40] 문서 左膝関節捻挫及び左膝外側側副靱帯損傷により10日目から途中休場
[41] 문서 14日目に引退。年寄佐渡ヶ嶽襲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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