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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베르토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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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베르토 말러는 184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마야 문명 연구가이다. 그는 건축과 공학을 공부하고 오스트리아 시민이 된 후, 멕시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군사 원정에 참여했다. 멕시코에 남기로 결정한 말러는 사진술과 메소아메리카 고대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평생을 마야 유적 탐사와 기록에 헌신했다. 그는 유적 보존을 옹호했으며, 하버드 대학교 피바디 연구소와 협력하여 연구 결과를 출판했으나 갈등을 겪기도 했다. 말년에는 메리다에서 사진을 판매하며 생활하다가 1917년 사망했으며, 사후에 많은 기록들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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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베르토 말러
기본 정보
테오베르토 말러
테오베르토 말러
본명테오도르 말러
출생1842년 1월 12일, 로마
사망1917년 11월 22일 (향년 75세), 메리다
국적오스트리아
직업고고학자, 탐험가, 사진작가
경력
분야마야 문명
참여1865년 ~ 1867년: 멕시코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인
1876년: 마야 문명 유적지 탐험 시작
참고
관련 인물알프레드 모즐리

2. 생애

테오베르토 말러는 1842년 1월 12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바덴 대공국을 대표하는 외교관 프리드리히 말러와 빌헬미네 슈바르츠 사이에서 태어났다.[1][2] 그의 어머니는 1844년 가족이 바덴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하여 말러와 그의 누이는 아버지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말러의 성격을 깊이 형성하여 독립심과 정서적 회복력을 키웠다.[1][2] 아버지와의 관계는 소원하고 긴장되었는데, 말러는 나중에 자서전 ''Leben meiner Jugend'' (''나의 젊은 시절'')에서 이러한 역학 관계를 묘사했다.[1][2]

말러는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에서 공학건축을 공부했으며,[5] 1863년 21세의 나이에 으로 이주하여 오스트리아 시민이 되었고, 빈 링슈트라세의 신 고딕 보티프 교회를 설계한 건축가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 밑에서 일했다.

1864년, 말러는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군사 원정에 사관 후보생으로 합류하여 대위로 승진했다.[6] 그의 초기 멕시코에 대한 관심은 식민지 건축에 집중되었지만, 1867년 막시밀리안 정권이 몰락한 후 말러는 유럽으로 추방되기보다는 멕시코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후 멕시코 시민권을 얻었고 그의 이름을 "테오베르토"로 변경했다.[3] 파리런던을 방문하기도 했다.[6]

1878년 봄, 말러는 아버지의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갔다.[3] 이 문제는 복잡한 법적 문제와 얽혀있어 해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러는 변호사들에게 문제 해결을 위임하고 그동안 파리에 머물면서 멕시코 고대 유물에 대한 강의를 하고, 멕시코와 메소아메리카에 관한 자료들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3] 파리의 사교계에서 말러는 사진가로 알려지게 되었다.[5] 1884년에 유산 문제가 해결되자, 말러는 약간의 재산을 상속받고 마야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멕시코로 돌아갔다.[3]

세이발의 스텔라 사진(1908)


말러는 사진술메소아메리카의 고대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6년에 미틀라의 구조물에 대한 상세한 사진을 찍었고, 이듬해 여름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로 이주하여 팔렌케 유적을 방문했다.[5] 그는 팔렌케에서 유적지를 스케치, 측정, 사진 촬영하며 이전 출판물들의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 식물학자 구스타브 베르누이와 교류하며 마야 유적 기록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말러는 마야 문명 유적을 탐사하고 기록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1884년 유산을 상속받아 마야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멕시코로 돌아간 후,[1] 유카탄주의 티쿨 마을에 정착하여 사진 스튜디오를 차리고 마야어를 배웠다.[3] 그는 치첸이트사와 우슈말 같은 이미 잘 알려진 유적뿐만 아니라, 숲 속 깊숙이 숨겨진 새로운 유적들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데 힘썼다.[3] 1895년에는 티칼을 조사하고, 파시온 강과 우스마신타 강을 따라 모툴 데 산 호세, 세이발, 피에드라스 네그라스 등의 사진을 촬영했다.[6]

말러는 당시 만연했던 유적 훼손 및 유물 반출 행위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3] 그는 유적을 원래 상태로 보존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멕시코 정부에 이러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3] 그의 이러한 노력은 상당히 시대를 앞선것으로 평가받고 있다.[3]

말러는 자신의 조사 결과를 출판하는 데 있어 하버드 대학교의 피바디 연구소와 협력 관계를 맺었지만, 동시에 갈등을 겪었다.[3] 1898년부터 피바디 연구소는 말러의 보고서 출판에 동의했다. 그러나 말러는 피바디 편집자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과 삽화를 책에 포함시키려 했고, 말러가 새로운 탐험을 위해 숲으로 떠나 몇 달 동안 연락이 두절되기도 하여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3]

치첸이트사, 유카탄, 멕시코. 엘 카스티요, 1892년.


말러는 유적에서 흥미로운 조각들을 떼어내 유럽이나 북미 도시로 보내는 당시 고대 유물 수집가와 고고학자들의 관행에 혐오감을 느꼈다.[3] 그는 이러한 관행이 유적에 손상을 야기한다고 지적하며, 유적을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해야 한다는 신념을 멕시코 정부에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러한 말러의 견해는 시대를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3]

결국 피바디 연구소는 1909년에 말러와의 계약을 종료했지만, 1912년까지 말러에게서 받은 자료의 출판을 완료했다.[3] 이 책들은 여전히 마야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말러는 1910년 더 많은 보고서를 출판할 후원자를 찾기 위해 유럽을 여행했지만, 파리의 국립 도서관에 자신의 사진 일부를 판매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 1898년에 미국의 피바디 고고학 민족학 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세 차례 탐험을 했지만, 치첸 이차를 조사하고 있던 E.H. 톰슨의 적대감 때문에 1905년에 조사를 중단했고, 티칼 보고서는 불완전한 것이 되었다.[6]

1905년, 말러는 육체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정글 탐험을 중단하고 유카탄 메리다에 있는 집으로 은퇴했다.[3]

1910년, 더 많은 보고서를 출판할 후원자를 찾기 위해 유럽을 여행했지만, 파리의 국립 도서관에 자신의 사진 일부를 판매하는 것 외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4]

말년의 테오베르토 말러는 염세주의자로 알려졌다.[4] 그의 재산은 잘못된 투자와 유카탄의 1907년 경제 위기로 인해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관광객과 젊은 고고학자들에게 자신의 사진 사본을 팔고 메리다 미술 학교에서 마야 미술과 건축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근근이 살았다.[4] 말러는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팔아 생활에 보탰다.[5]

1917년, 테오베르토 말러는 75세의 나이로 메리다에서 사망했다.[4] 그의 많은 기록들은 사후에 출판되었는데, 1930년대에 한 묶음이, 1970년대와 1990년대에 더 많은 기록이 출판되었다.[4]

2. 1. 초기 생애 (1842-1864)

테오베르토 말러는 1842년 1월 12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바덴 대공국을 대표하는 외교관 프리드리히 말러와 빌헬미네 슈바르츠 사이에서 태어났다.[1][2] 그의 어머니는 1844년 가족이 바덴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하여 말러와 그의 누이는 아버지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말러의 성격을 깊이 형성하여 독립심과 정서적 회복력을 키웠다.[1][2] 아버지와의 관계는 소원하고 긴장되었는데, 말러는 나중에 자서전 ''Leben meiner Jugend'' (''나의 젊은 시절'')에서 이러한 역학 관계를 묘사했다.[1][2]

말러는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에서 공학건축을 공부했으며,[5] 1863년 21세의 나이에 으로 이주하여 오스트리아 시민이 되었고, 빈 링슈트라세의 신 고딕 보티프 교회를 설계한 건축가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 밑에서 일했다.

1864년, 말러는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군사 원정에 사관 후보생으로 합류하여 대위로 승진했다.[6] 그의 초기 멕시코에 대한 관심은 식민지 건축에 집중되었지만, 1867년 막시밀리안 정권이 몰락한 후 말러는 유럽으로 추방되기보다는 멕시코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후 멕시코 시민권을 얻었고 그의 이름을 "테오베르토"로 변경했다.[3] 파리런던을 방문하기도 했다.[6]

2. 2. 오스트리아와 멕시코 (1864-1878)

테오베르토 말러는 184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바덴 대공국외교관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말러와 어머니 빌헬미네 슈바르츠 사이에서 태어났다.[1][2] 어머니는 1844년 가족이 바덴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했고, 말러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1][2]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에서 공학건축을 공부한 후,[5] 21세에 으로 이주하여 오스트리아 시민이 되었고,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 밑에서 일했다.

1864년, 말러는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군사 원정에 사관 후보생으로 합류하여 대위로 승진했다.[6] 1867년 막시밀리안 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멕시코에 남기로 결정하고, 메소아메리카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이후 멕시코 시민권을 얻고 이름을 "테오베르토"로 변경했다.[6]

말러는 사진술메소아메리카의 고대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6년에 미틀라의 구조물에 대한 상세한 사진을 찍었고, 이듬해 여름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로 이주하여 팔렌케 유적을 방문했다.[5] 그는 팔렌케에서 유적지를 스케치, 측정, 사진 촬영하며 이전 출판물들의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 식물학자 구스타브 베르누이와 교류하며 마야 유적 기록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1878년 봄, 말러는 아버지의 유산 문제로 유럽으로 돌아가[6] 파리에서 멕시코 고대 유물에 대한 강의를 하고, 관련 자료를 연구했다. 1884년에 유산 문제가 해결되어 멕시코로 돌아갔다.[6]

2. 3. 유럽 체류와 귀환 (1878-1885)

테오베르토 말러는 1878년 봄, 아버지의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갔다.[3] 이 문제는 복잡한 법적 문제와 얽혀있어 해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러는 변호사들에게 문제 해결을 위임하고 그동안 파리에 머물면서 멕시코 고대 유물에 대한 강의를 하고, 멕시코와 메소아메리카에 관한 자료들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3] 파리의 사교계에서 말러는 사진가로 알려지게 되었다.[5] 1884년에 유산 문제가 해결되자, 말러는 약간의 재산을 상속받고 마야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멕시코로 돌아갔다.[3]

1864년 멕시코 황제로 부임하는 막시밀리안 대공을 지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군에 참가하여 멕시코로 간 이후, 말러는 제정 붕괴까지 3년 동안 복무하며 대위까지 진급했다.[6] 1875년에 부친이 사망 한 후, 프로이센 왕국 정부가 부친의 재산을 압류했기 때문에 1878년에 유럽으로 돌아와야 했다.[6] 이 유산문제 해결에는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말러는 터키와 코카서스를 여행하기도 했다.[6]

2. 4. 마야 유적 탐사와 연구 (1885-1905)

테오베르토 말러는 마야 문명 유적을 탐사하고 기록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1884년 유산을 상속받아 마야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멕시코로 돌아간 후,[1] 유카탄주의 티쿨 마을에 정착하여 사진 스튜디오를 차리고 마야어를 배웠다.[3] 그는 치첸이트사와 우슈말 같은 이미 잘 알려진 유적뿐만 아니라, 숲 속 깊숙이 숨겨진 새로운 유적들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데 힘썼다.[3] 1895년에는 티칼을 조사하고, 파시온 강과 우스마신타 강을 따라 모툴 데 산 호세, 세이발, 피에드라스 네그라스 등의 사진을 촬영했다.[6]

말러는 당시 만연했던 유적 훼손 및 유물 반출 행위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3] 그는 유적을 원래 상태로 보존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멕시코 정부에 이러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3] 그의 이러한 노력은 상당히 시대를 앞선것으로 평가받고 있다.[3]

말러는 하버드 대학교의 피바디 연구소와 협력하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출판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3] 피바디 연구소는 1898년부터 그의 보고서를 출판하기로 계약 하였으나, 말러는 피바디 편집자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과 삽화를 책에 포함시키려 했고, 새로운 탐험을 위해 몇달동안 연락이 두절되기도 하였다.[3] 결국 피바디는 1909년에 말러와의 계약을 종료했지만, 그들이 그에게서 받은 자료의 출판을 완료하는 데는 1912년까지 걸렸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된 책들은 여전히 마야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3] 1898년에 미국의 피바디 고고학 민족학 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세 차례 탐험을 했지만, 치첸 이차를 조사하고 있던 E.H. 톰슨의 적대감 때문에 1905년에 조사를 중단했고, 티칼 보고서는 불완전한 것이 되었다.[6]

1905년, 말러는 육체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정글 탐험을 중단하고 유카탄 메리다에 있는 집으로 은퇴했다.[3]

2. 5. 피바디 연구소와의 협력과 갈등 (1898-1909)

테오베르토 말러는 자신의 조사 결과를 출판하는 데 있어 하버드 대학교의 피바디 연구소와 협력 관계를 맺었지만, 동시에 갈등을 겪었다.[3] 1898년부터 피바디 연구소는 말러의 보고서 출판에 동의했다. 그러나 말러는 피바디 편집자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과 삽화를 책에 포함시키려 했고, 말러가 새로운 탐험을 위해 숲으로 떠나 몇 달 동안 연락이 두절되기도 하여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3]

말러는 유적에서 흥미로운 조각들을 떼어내 유럽이나 북미 도시로 보내는 당시 고대 유물 수집가와 고고학자들의 관행에 혐오감을 느꼈다.[3] 그는 이러한 관행이 유적에 손상을 야기한다고 지적하며, 유적을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해야 한다는 신념을 멕시코 정부에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러한 말러의 견해는 시대를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3]

결국 피바디 연구소는 1909년에 말러와의 계약을 종료했지만, 1912년까지 말러에게서 받은 자료의 출판을 완료했다.[3] 이 책들은 여전히 마야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말러는 1910년 더 많은 보고서를 출판할 후원자를 찾기 위해 유럽을 여행했지만, 파리의 국립 도서관에 자신의 사진 일부를 판매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

2. 6. 말년과 사망 (1905-1917)

테오베르토 말러는 1905년에 육체적으로 힘든 정글 탐험을 끝내고 유카탄 메리다에 있는 집으로 은퇴했다.[4] 1910년, 더 많은 보고서를 출판할 후원자를 찾기 위해 유럽을 여행했지만, 파리의 국립 도서관에 자신의 사진 일부를 판매하는 것 외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4]

말년의 테오베르토 말러는 염세주의자로 알려졌다.[4] 그의 재산은 잘못된 투자와 유카탄의 1907년 경제 위기로 인해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관광객과 젊은 고고학자들에게 자신의 사진 사본을 팔고 메리다 미술 학교에서 마야 미술과 건축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근근이 살았다.[4] 말러는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팔아 생활에 보탰다.[5]

1917년, 테오베르토 말러는 75세의 나이로 메리다에서 사망했다.[4] 그의 많은 기록들은 사후에 출판되었는데, 1930년대에 한 묶음이, 1970년대와 1990년대에 더 많은 기록이 출판되었다.[4]

3. 주요 업적

4. 비판적 관점

5. 저서 및 출판물

테오베르토 말러의 테우안테펙과 팔렌케 발굴에 대한 보고는 1879년 프랑스 잡지 ''La Nature''에 실렸다. 1879년부터 1902년까지는 독일 지리학 잡지 ''Globus''에 유카탄 조사(Yukatekische Forschungen)를 발표했다.

피보디 박물관의 의뢰로 수행된 조사 보고서는 영어로 번역되어 박물관의 모노그래프로 출판되었다.

말러가 생전에 출판하지 못했던 사진, 스케치, 조사 데이터 등은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1971년과 1997년에 출판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Biography https://www.mesoweb.[...] 2024-12-11
[2] 웹사이트 Institutional Repository of IAI https://publications[...] 2024-12-11
[3] 간행물 Charles Pickering Bowditch https://archive.org/[...]
[4] 문서 See Alma Durán-Merk and Stephan Merk: I declare this to be my last Will: Teobert Maler's testament and its execution. in: Indiana 28 (2011), pp. 339-358, http://www.redalyc.org/pdf/2470/247022796015.pdf
[5] 문서 NDB
[6] 서적 The Oxford Encyclopedia of Mesoamerican Cultures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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