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이드 스티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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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로이드 스티븐스(1805–1852)는 미국의 탐험가, 작가, 외교관, 그리고 파나마 철도 회사의 부사장이자 사장이었다.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834년 유럽 여행을 시작하여 여행기를 출판하며 이름을 알렸다. 1839년 중앙 아메리카 특별 대사로 임명되어 프레드릭 캐더우드와 함께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마야 유적을 탐험하고 기록했는데, 이들의 탐험은 마야 문명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스티븐스는 1849년 파나마 철도 회사 부사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고로 건강이 악화되어 185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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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이드 스티븐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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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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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존 로이드 스티븐스 |
출생 | 1805년 11월 28일 |
출생지 | 뉴저지주 슈루즈버리 |
사망 | 1852년 10월 13일 |
사망지 | 뉴욕주 뉴욕 |
안장지 | 뉴욕 시 마블 묘지 |
국적 | 미국 |
직업 | 탐험가 변호사 철도 임원 작가 |
소속 | 파나마 철도 회사 |
학력 | 컬럼비아 칼리지 리치필드 법학대학원 |
알려진 업적 | 마야 유적지 설명을 포함한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 탐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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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
변호사 | 변호사 |
외교관 | 1834년, 미국 특사, 러시아 1839년, 중앙 아메리카 특사 |
작가 | "Incidents of Travel in Egypt, Arabia Petraea, and the Holy Land" (1837) "Incidents of Travel in Central America, Chiapas, and Yucatan" (1841) "Incidents of Travel in Yucatan" (1843) |
철도 건설 | 파나마 철도 회사 사장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존 로이드 스티븐스는 1805년 11월 28일 뉴저지주 슈루즈베리 타운십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뉴저지주의 성공한 상인인 벤자민 스티븐스였고, 어머니 클레멘스 로이드는 저명한 지역 판사의 딸이었다.[2][3] 스티븐스가 태어난 이듬해, 가족은 뉴욕 시로 이주했다. 그는 뉴욕에서 두 곳의 사립 학교를 다니며 고전 교육을 받았다. 13세의 나이에 컬럼비아 대학교의 컬럼비아 칼리지에 입학하여 1822년, 4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했다.[3]
대학 졸업 후 1년 동안 변호사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이후 리치필드 로스쿨 과정을 이수했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뉴욕 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 1. 법조계 경력
스티븐스는 뉴욕에서 8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했다.[9] 그러나 법조계 경력을 이어가지 않고, 1834년부터는 병 치료를 명목으로 여행을 시작하며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2. 2. 초기 여행과 저술 활동
뉴욕에서 8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하던 스티븐스는[9] 1834년, 건강 문제로 요양을 위해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이듬해인 1835년부터는 자신의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American Monthly Magazine』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10]. 1836년에는 이집트와 페트라 지역을 여행했으며, 이때의 경험을 담은 글이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10]. 이 여행을 바탕으로 1837년에는 첫 저서인 ''이집트, 아라비아 페트라, 성지 여행기''를 출간했고, 이어서 1838년에는 유럽에서의 경험을 정리한 ''그리스, 터키, 러시아, 폴란드 여행기''를 펴냈다.1839년, 스티븐스는 당시 미국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의 지시에 따라 외교관 신분으로 중앙 아메리카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공식 임무는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현지 유력자를 찾는 것이었으나[11], 이 임무는 비교적 단기간에 마무리하고 남은 시간은 고대 유적 탐험에 할애했다. 이 탐험에는 영국 출신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프레데릭 캐더우드가 동행했다. 두 사람은 함께 온두라스의 코판과 멕시코 치아파스의 팔렌케 등 마야 문명의 주요 유적지를 탐사하고 기록했으며, 이후 유카탄 반도로 이동하여 우슈말 유적 등을 조사했다.

스티븐스는 이 중앙 아메리카 탐험의 결과물을 1841년에 ''중앙 아메리카, 치아파스, 유카탄 여행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이전 저서들을 능가하는 큰 성공을 거두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0].
이후 스티븐스와 캐더우드는 다시 유카탄 반도를 탐험하며 우슈말 외에도 카바, 툴룸 등 당시 서구 사회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마야 유적들을 발견하고 상세히 기록했다. 특히 치첸이트사 유적에서는 일부 건축물에서 톨텍 문화의 영향을 확인하고, 구기장의 존재를 밝혀내는 등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을 이루었다. 이 두 번째 유카탄 탐험의 결과는 1843년에 ''유카탄 여행기''로 출간되었으며, 이 책 역시 학계와 대중 모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12].
3. 정치 및 외교 활동
1837년 스티븐스는 네덜란드 공사 직에 추천되었으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마틴 밴 뷰런은 하르마누스 블리커를 대신 임명했다. 이후 1846년에는 주 헌법 제정 위원회의 대표로 선출되어, 소액 사건을 다루는 화해 법원의 도입과 채택에 기여했다.
3. 1. 중앙아메리카 특사 임명
1839년 스티븐스는 미국 외교관으로서 중앙 아메리카로 파견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마틴 밴 뷰런은 스티븐스에게 중앙 아메리카의 유력자들을 설득하여 미국 측에 서도록 하는 임무를 맡겼다.[11] 하지만 스티븐스는 이 외교 임무를 비교적 수월하게 마무리하고, 남은 시간을 여행과 탐험에 할애했다. 그는 영국 출신 화가 프레데릭 캐더우드와 함께 온두라스의 코판과 멕시코의 팔렌케 유적지를 탐사했으며, 이후 유카탄 반도로 건너가 우슈말 유적을 방문했다. 이 중앙 아메리카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1841년에 출판한 여행기는 이전 저작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0]
4. 메소아메리카 연구
스티븐스는 이전에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병 치료를 위해 유럽, 이집트, 페트라 등을 여행하며 여행기를 출판하여 이미 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9][10] 그는 메소아메리카의 잊힌 도시들에 대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나 후안 갈린도와 같은 초기 탐험가들의 기록을 읽고 큰 흥미를 느꼈다.
1839년, 마틴 밴 뷰런 대통령은 스티븐스를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특별 대사로 임명했다.[11] 이는 스티븐스가 본격적으로 메소아메리카 탐험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 탐험에는 영국의 건축가이자 뛰어난 화가인 프레드릭 캐더우드가 동행했다.
스티븐스와 캐더우드는 1839년부터 1842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중앙아메리카와 유카탄 반도 일대의 마야 문명 유적지를 탐사했다. 이전까지 소수의 탐험가나 군인에 의한 단편적인 보고만 있었을 뿐, 마야 문명은 서구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스티븐스는 탐험 과정에서의 생생한 경험과 함께, 마치 고고학 보고서처럼 유적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했다.
탐험의 결과는 두 권의 책, Incidents of Travel in Central America, Chiapas, and Yucatán|중앙 아메리카, 치아파스 및 유카탄 여행기eng(1841)와 Incidents of Travel in Yucatán|유카탄 여행기eng(1843)로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10][12] 이 책들은 마야 문명의 존재를 처음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캐더우드가 그린 정교하고 사실적인 유적 그림들은 스티븐스의 글에 생생함을 더하며 책의 가치를 크게 높였다. 캐더우드는 잡풀을 제거하고 조명을 설치하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유물의 세부적인 모습을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스티븐스와 캐더우드의 작업은 마야 유적을 건설한 주체가 외부의 다른 민족이 아닌 바로 마야인들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6] 스티븐스의 책은 에드거 앨런 포와 같은 동시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3]
4. 1. 코판 유적 발견
존 로이드 스티븐스는 메소아메리카의 잊힌 도시들에 대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후안 갈린도 같은 초기 탐험가들의 기록을 흥미롭게 읽었다. 1839년, 마틴 밴 뷰런 대통령은 스티븐스를 중앙 아메리카 특별 대사로 임명했다. 당시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정부는 내전으로 인해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다.스티븐스는 그의 여행 동반자이자 건축가이며 도안가인 프레드릭 캐더우드와 함께 영국령 온두라스(현재 벨리즈)에 상륙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마야 문명의 유적인 코판을 마주하게 되었다. 유적의 규모와 정교함에 압도된 두 사람은 2주간 머물며 유적지를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했다.
스티븐스는 이 웅장한 유적이 오래전에 사라진 미지의 문명에 의해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 마야인들이 이러한 건축물을 세웠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더우드는 유적에서 발견된 조각상들의 얼굴 특징이 현대 마야인들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스티븐스는 코판 유적지를 단돈 50USD에 사들였고, 이를 해체하여 강을 통해 미국의 박물관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캐더우드는 잡풀과 나무 그늘에 가려진 유적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인공 조명을 사용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세밀하고 사실적인 그림들은 스티븐스의 여행기에 실려, 당시 사람들에게 마야 유적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코판 탐사 이후, 스티븐스와 캐더우드는 팔렌케, 키리구아, 욱스말 등 다른 주요 마야 유적지를 방문하며 탐험을 계속했다.[4]
4. 2. 팔렌케, 키리구아, 욱스말 등 탐험
존 로이드 스티븐스는 메소아메리카의 사라진 도시들에 대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나 후안 갈린도 같은 초기 탐험가들의 기록을 읽고 흥미를 느꼈다. 1839년, 마틴 밴 뷰런 미국 대통령은 스티븐스를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특별 대사로 임명했다.[11] 하지만 스티븐스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정부는 내전으로 인해 붕괴되고 있었고, 그는 대통령의 임무를 비교적 쉽게 마친 후 남은 시간을 탐험에 할애했다. 이때의 경험과 발견은 나중에 ''중앙 아메리카, 치아파스 및 유카탄 여행기''(Incidents of Travel in Central America, Chiapas, and Yucatán)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스티븐스는 영국의 건축가이자 화가인 프레드릭 캐더우드와 함께 영국령 온두라스(현재의 벨리즈)에 도착하여 탐험을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주요 마야 유적은 코판이었다. 유적의 규모와 정교함에 놀란 그들은 2주간 머물며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했다. 스티븐스는 이 유적이 오래전에 사라진 미지의 민족에 의해 세워졌을 것이라 추측했는데, 당시 원주민 마야인들이 이러한 건축물을 세웠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행한 캐더우드는 유적의 조각상 얼굴이 당시 마야인들과 닮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스티븐스는 코판 유적지를 50USD에 사들여 미국 박물관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그들은 팔렌케, 키리구아, 욱스말 등 다른 주요 유적지로 향했다. 1840년 5월 11일 팔렌케에 도착하여 6월 초까지 머물면서 비문의 사원, 십자가 사원, 태양의 사원, 잎이 무성한 십자가의 사원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4]
1841년 10월, 스티븐스와 캐더우드는 다시 유카탄 반도를 찾아 마야 유적 탐사를 이어갔다. 두 번째 탐험(1841-1842)에서는 욱스말을 다시 방문하고, 카바, 라브나, 마야판, 사일, 툴룸, 치첸이트사, 이사말, 크스탐팍(X'tampak) 등 총 44곳에 달하는 마야 유적지를 조사했다. 특히 욱스말에서는 총독의 집, 수녀원 사각형, 마법사의 피라미드 등을 자세히 기록했으며, 치첸이트사에서는 건축 양식에서 톨텍 문화의 영향을 발견하고 구기장의 존재를 확인했다. 캐더우드는 이때 볼론첸의 세노테(우물)를 그린 유명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5]
캐더우드가 그린 정교한 그림과 석판화는 스티븐스의 생생한 기록과 함께 마야 문명의 실체를 서구 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작업은 마야인들이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과 지성을 지닌 문명을 이룩했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스티븐스와 캐더우드는 탐험 결과를 바탕으로, 유럽이나 아시아 문명의 민족 집단이 이 도시들을 건설했다는 기존의 이론과 달리, 마야인들이 직접 이 고대 도시들을 건설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6]
스티븐스의 탐험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중앙 아메리카, 치아파스 및 유카탄 여행기''(1841)와 ''유카탄 여행기''(1843)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0][12] 그의 책은 에드거 앨런 포와 같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3]
4. 3. 유카탄 반도 재탐험
1841년 10월, 스티븐스는 프레데릭 캐더우드와 함께 유카탄으로 돌아가 마야 유적 조사를 계속했다.[5] 이는 1839년부터 1840년까지 진행된 첫 탐사에 이은 두 번째 탐사(1841년~1842년)였다.이 탐사 기간 동안 스티븐스와 캐더우드는 총 44개의 마야 유적지를 방문하고 기록했다.[5] 주요 방문지로는 치첸 이트사, 이사말, 카바, 라브나의 관문, 마야판, 사일, 툴룸, 욱스말, 그리고 크스탐팍 등이 포함되었다.[5][12] 특히 욱스말에서는 총독의 집, 수녀원 사각형, 마법사의 피라미드 등을 상세히 기록했으며,[5] 치첸이트사에서는 건축 양식에서 톨텍의 영향을 발견하고 구기장의 존재를 확인하는 등 중요한 관찰을 남겼다.[12]
캐더우드는 이 탐사에서도 유적의 모습을 정교하게 그렸는데, 볼론첸의 우물에 대한 유명한 그림도 이때 그려졌다.[5] 캐더우드의 그림과 석판화는 마야인들이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의 가장 뛰어난 예술적, 지적 성취를 이룬 문명의 주체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대규모 건축물 외에도 석조 및 석고 조각, 프레스코, 채색 도자기, 나무 부조 등 예술적으로 세련된 작품들을 제작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6]
이 두 번째 탐험의 결과는 1843년 ''유카탄 여행기''(Incidents of Travel in Yucatáneng)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이전의 중앙 아메리카 여행기처럼 큰 호평을 받았다.[12] 스티븐스와 캐더우드의 연구는 고대 중앙 아메리카 도시를 건설한 이들이 바로 마야인들이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으며, 이는 당시 유럽이나 아시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기존 이론에 반하는 중요한 기여였다.[6]
4. 4. 마야 문명 기원 연구
존 로이드 스티븐스는 메소아메리카의 잊혀진 도시들에 대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나 후안 갈린도와 같은 초기 탐험가들의 기록을 읽고 흥미를 느꼈다. 1839년, 당시 미국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은 스티븐스를 중앙아메리카 특별 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가 임지에 도착했을 때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은 내전으로 인해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스티븐스는 이 시기 겪었던 일들을 훗날 Incidents of Travel in Central America, Chiapas, and Yucatán|중앙 아메리카, 치아파스 및 유카탄 여행기eng라는 책으로 출판했다.스티븐스는 건축가이자 그림 실력이 뛰어난 프레드릭 캐더우드와 함께 영국령 온두라스(현재의 벨리즈)에 도착하여 코판에서 처음으로 마야 문명 유적과 마주했다. 유적의 장엄함에 압도된 그들은 2주간 머물며 유적 지도를 제작했다. 스티븐스는 처음에는 이 유적이 너무나 정교하여 당시 원주민인 마야인들이 아닌, 오래전에 사라진 미지의 문명이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동행한 캐더우드는 유적의 조각상 얼굴이 현대 마야인들과 매우 닮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스티븐스는 코판 유적지를 50USD에 사들여 미국으로 옮겨 박물관에 전시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그들은 팔렌케, 키리구아, 욱스말 등 여러 마야 유적지를 탐사했다. 1840년 5월 11일부터 6월 초까지 머물렀던 팔렌케에서는 비문의 사원, 십자가 사원, 태양의 사원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4] 1841년 10월에는 유카탄 반도로 돌아가 탐사를 이어갔다. 스티븐스의 기록에 따르면, 두 번의 탐사(1839–1840, 1841–1842) 동안 치첸 이트사, 이사말, 카바, 라브나, 마야판, 사일, 툴룸, 욱스말, 크스탐팍 등 총 44곳의 마야 유적지를 방문했다. 특히 욱스말에서는 총독의 궁전, 수녀원 건물군, 마법사의 피라미드 등을 조사하고 기록했다. 캐더우드는 볼론첸의 세노테(cenote, 자연 우물)를 그린 유명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5]
캐더우드가 그린 정밀한 그림과 석판화는 마야 문명이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적, 지적 성취를 이루었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마야인들은 거대한 건축물뿐만 아니라 석조 및 회반죽 조각, 프레스코화, 채색 토기, 목조 부조 등 예술적으로 매우 세련된 작품들을 남겼다. 이러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스티븐스와 캐더우드는 고대 마야 도시들이 외부의 유럽이나 아시아 민족이 아닌, 바로 마야인들 자신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이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외래 문명 기원설을 반박하는 중요한 주장이었다.[6]
스티븐스의 마야 문명 기원에 대한 생각은 후대의 여러 학자들보다 오히려 더 정확한 측면이 있었다. 그는 마야 유적을 건설한 이들이 바로 현재 마야인들의 조상이라고 정확히 추측했으며, 유적의 연대를 수천 년 전으로 과장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13] 또한 그의 1843년 저서에는 현지 학자 피오 페레스(Pío Pérez)가 정리한 연대기와 마야 달력의 날짜 표기법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14]
스티븐스의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켜 에드거 앨런 포와 같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으며,[3]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D. 코에 따르면, 조셉 스미스 주니어는 스티븐스의 책 내용을 교회의 신문에 발췌하여 싣고, 몰몬경에 나오는 제라헴라 땅이 과테말라이며 팔렌케 유적이 니파이인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주석을 달기도 했다.[15]
5. 파나마 철도 회사
1849년 파나마 철도 회사가 설립되자 스티븐스는 부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철도 건설 준비를 위해 파나마와 누에바 그라나다를 방문했다. 누에바 그라나다의 수도인 보고타로 가는 도중 노새에서 떨어져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파나마 철도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되었다.[9]
스티븐스는 파나마 지협 철도 건설에 참여하며 회사 운영을 이끌었으나, 1852년 파나마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위독한 상태로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그 해에 사망했다.[12]
6. 개인적인 삶
뉴저지주 Shrewsbury|슈루즈버리영어에서 태어났다. 뉴욕에서 8년 동안 변호사로 일했으며[9], 1834년부터는 건강 문제로 유럽 등지를 여행하기 시작했다.[10]
1841년에는 미국 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7]
말년에는 파나마 지협 철도 건설 사업에 참여했는데[9], 1852년 봄 파나마에 체류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렸다. 잠시 회복하여 뉴욕으로 돌아왔으나 병이 재발했고[8], 결국 1852년 10월 13일에 사망했다. 그는 뉴욕 시티 마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8]
7. 저서
스티븐스와 프레더릭 캐서우드의 저작, 특히 ''중앙아메리카, 치아파스, 유카탄 여행기''는 오랫동안 셀바(중앙아메리카 아열대숲) 속에 잊혀 있던 마야 문명을 대중에게 처음으로 상세히 소개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이전에도 일부 탐험가나 군인의 보고가 있었지만, 방대한 내용과 생생한 묘사로 마야 문명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스티븐스는 1839년~1840년과 1841년~1842년, 두 차례의 탐사를 통해 유적을 고고학 보고서처럼 정확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벨리즈, 온두라스, 과테말라 지역 주민들의 생활 모습, 유카탄 북부 메리다 같은 도시의 축제, 의복, 음악 등 문화적 정보까지 담아냈다. 탐험 중 겪었던 생생한 이야기와 유적에 대한 뛰어난 묘사는 독자들이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캐서우드가 그린 정교한 삽화는 책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그는 잡풀과 나무 그늘에 가려진 유적을 그리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조명을 설치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때로는 하루 종일 불편한 자세로 그림 작업에 몰두했다. 캐서우드의 그림은 마야 유적의 생생한 모습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Incidents of Travel in Egypt, Arabia Petraea, and the Holy Land'' (이집트, 아라비아 페트라, 성지 여행기), 1837년, Harper and Brothers
- ''Incidents of Travel in Greece, Turkey, Russia, and Poland'' (그리스, 터키, 러시아, 폴란드 여행기), 1838년, Harper and Brothers 1권 2권
- ''Incidents of Travel in Central America, Chiapas, and Yucatan'' (중앙아메리카, 치아파스, 유카탄 여행기), 2권, 1841년, Harper and Brothers / John Murray 1권 2권 (201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재발행)
- 일본어 번역: 고지마 게이코(小島ケイ子) 역, ''中米・チアパス・ユカタンの旅 マヤ遺跡探険記1839~40일본어''(중미·치아파스·유카탄의 여행: 마야 유적 탐험기 1839~40), 인문서원(人文書院), 2010년. (2권)
- ''Incidents of Travel in Yucatan'' (유카탄 여행기), 2권, 1843년, Harper and Brothers / John Murray 1권 2권
8. 평가 및 영향
존 로이드 스티븐스와 프레더릭 캐서우드가 함께 쓴 `≪중앙아메리카 치아빠스와 유까딴의 여행에서 있었던 일≫`(Incidents of Travel in Central America, Chiapas and Yucatáneng)은 오랫동안 중앙아메리카의 밀림 속에 잊혀 있던 마야 문명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린 중요한 저작이다. 이전에도 소수의 탐험가나 군인들이 마야 유적에 대해 보고한 바는 있었으나, 스티븐스의 책처럼 방대한 내용과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로 접근한 것은 처음이었다.
스티븐스는 1839년에서 1840년, 그리고 1841년에서 1842년에 걸쳐 두 차례 탐사를 진행했으며,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고고학 보고서에 버금갈 정도로 유적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의 기록은 당시 벨리세, 온두라스, 과테말라 밀림 지역 주민들의 생활 모습이나 유까딴 북부 메리다와 같은 도시의 축제, 의복, 음악 등 현재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문화적 요소들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생생한 탐험담과 유적에 대한 뛰어난 묘사는 독자들이 마치 마야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스티븐스의 글과 더불어 동반자였던 프레더릭 캐서우드의 정교한 그림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캐서우드는 잡목에 가려진 유적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조명을 설치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세밀한 그림은 마야 유적의 모습을 독자들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했다.
존 로이드 스티븐스의 마야 유적에 대한 통찰력은 주목할 만하며, 여러 측면에서 후대의 많은 학자들보다 정확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마야 유적이 당시 마야인들의 조상이 건설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추측했으며, 유적의 연대를 수천 년 전으로 과장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13] 또한, 1843년에 출간된 그의 책에는 현지 학자 피오 페레스(Pío Pérez)의 연대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마야 달력의 날짜에 대한 현지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14]
스티븐스의 저서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마야 문명 연구가인 마이클 D. 코에 따르면, 교회 창시자 조셉 스미스 주니어는 스티븐스의 책 내용을 발췌하여 교회 신문인 Times and Seasonseng에 게재했다. 스미스는 이 내용에 주석을 달아, 『몰몬경』에 등장하는 제라헴라(Zarahemla) 땅이 과테말라(당시 치아파스주 포함)이며 팔렌케 유적은 니파이인(Nephites)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설명했다.[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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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Person Detail: John Lloyd Steph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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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arts Journal (Summe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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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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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S Member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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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ブリタニカ百科事典第11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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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Mormons and Archaeology: An Outside View
https://www.dia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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