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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비아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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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레비아강 전투는 기원전 218년 12월 18일에 벌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초기 전투로, 카르타고의 한니발 군과 로마 공화국 군 사이에 벌어졌다. 한니발은 티키누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군을 트레비아 강까지 추격했고, 그곳에서 성급한 로마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의 공격을 유도하여 매복 작전을 통해 로마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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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비아강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마테우스 메리안 엘더,
마테우스 메리안 엘더, "트레비아 전투" (1625)
전투 정보
전투명트레비아 전투
일부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기원전 218년 12월 22일/23일
장소현재 북부 이탈리아의 트레비아 강 하류 서안
결과카르타고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교전국 2카르타고
지휘관 및 병력
로마 지휘관셈프로니우스 롱구스
로마 병력40,000명
보병:
로마군 16,000명
이탈리아 동맹군 20,000명
기병: 4,000명
카르타고 지휘관한니발
카르타고 병력40,000명
보병:
아프리카/이베리아 보병 21,000명
갈리아 보병 8,000명
기병: 11,000명
코끼리: 약 30마리
사상자
로마 사상자사망: 20,000명
포로: 다수
카르타고 사상자보병: 수천 명
기병: 소수
코끼리: 여러 마리

2. 배경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진입했다.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출격했으나, 티키누스 전투에서 패배했다. 스키피오는 플라켄티아까지 후퇴하여 다른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이끄는 군단과 합류를 기다렸다. 그 사이 한니발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현지 부족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군대를 증강시켰다.

병력을 4만 명 가까이 늘린 한니발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트레비아 강을 사이에 두고 로마군 야영지와 대치했다. 이 무렵 로마군도 이미 합류를 완료한 상태였다. 로마의 집정관은 매일 번갈아 가며 군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스키피오는 이전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롱구스가 전군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가 성급하고 충동적인 기질을 가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스키피오보다는 상대하기 편하다고 생각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티키누스 전투의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가 회복하여 다시 지휘권을 가지기 전에 한니발을 몰아내려고 조바심을 냈다. 특히 다음 해에 집정관 선거가 있었기에 공을 세우고 싶었던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기병을 조심하라는 충고도 흘려들었다.

2. 1.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발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부터 241년까지 카르타고로마 사이에서 벌어졌다. 기원전 3세기 서부 지중해를 장악한 두 강대국은 주로 시칠리아 섬과 그 주변 해역,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패권을 놓고 다퉜다. 이 전쟁은 23년 동안 지속되어 카르타고가 패배했다. 5년 후, 카르타고의 주요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끄는 군대가 오늘날의 스페인 남동부에 상륙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고, 자신의 가족인 바르카 가문이 통치하는 준 군주국적인 자치 영토로 만들었다. 이 확장은 카르타고에게 은광, 농업 자원, 인력, 조선소와 같은 군사 시설, 그리고 영토의 깊이를 제공하여 미래의 로마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도록 했다.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직전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략적인 영토.


하밀카르는 기원전 228년 사망할 때까지 자치적으로 카르타고 이베리아를 통치했다. 그는 사위인 미남 아스드루발에게,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는 아들인 한니발에게 계승되었다. 기원전 226년 에브로 조약은 에브로 강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세력권의 북쪽 경계로 설정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는 에브로 강 남쪽에 위치한 독립 도시인 사군툼 (현대 사군토)과 별도의 동맹 조약을 맺었다. 기원전 219년, 한니발 휘하의 카르타고 군대는 사군툼을 포위, 점령, 약탈했고, 이는 로마가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하는 결과를 낳았다.

2. 2.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

한니발은 기원전 219년 말과 218년 초 이베리아 도시인 신 카르타고(현대 카르타헤나)에서 카르타고 군대를 소집했다. 이 군대는 기원전 218년 5월 북쪽으로 진군하여 피레네 산맥 동쪽의 로 진입한 후 해안을 따라 로마 동맹국들을 피하기 위해 내륙 경로를 택했다. 그는 형제 하스드루발 바르카에게 이베리아의 카르타고의 이익을 맡겼다. 스키피오 형제의 군대를 태운 로마 함대는 9월에 로마의 동맹국인 마살리아(현대 마르세유)의 론 강 입구에 상륙했는데, 이는 한니발이 론 강 전투에서 지역 알로브로게스 세력과 강을 건너 싸우고 있을 때와 거의 같은 시기였다. 로마 기병 순찰대가 카르타고 기병대를 격퇴했지만 한니발의 주력군은 로마군을 피했고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로마군과 함께 이베리아로 계속 진격했다. 푸블리우스는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카르타고군은 10월에 보병 38,000명과 기병 8,000명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건넜으며, 기후, 지형의 어려움과 원주민 부족들의 게릴라전 전술을 극복했다.

한니발은 보병 20,000명, 기병 6,000명, 그리고 약 3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이끌고 현재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몬테에 도착했다. 로마군은 이미 겨울 숙영지로 철수했고 한니발의 출현에 놀랐다. 카르타고군은 여행 중에 다 떨어진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 또한 로마군과 효과적으로 맞붙을 수 있을 만큼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북부 이탈리아의 갈리아 부족들로부터 동맹을 구하고 싶어했다. 지역 부족인 타우리니는 비우호적이었고, 한니발은 즉시 그들의 수도(현대 토리노 근처)를 포위하고 습격하여 주민들을 학살하고 그곳의 보급품을 압수했다. 이 잔혹한 행동으로 한니발은 다른 갈리아 부족들에게 비협조의 가능한 결과를 분명히 알렸다.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한니발은 이베리아로 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던 마살리아의 로마군이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미 북부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강화했다고 추정했다.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로마군과 맞서게 될 것이라고 믿었고, 치살피네 골족 사이에서 강력하게 징집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그는 자신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포 계곡을 따라 대담하게 진격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그의 군대를 카르타고군에 맞서 똑같이 대담하게 이끌었고, 그로 인해 골족은 중립을 유지했다. 두 지휘관 모두 모인 군대에게 열띤 연설을 하여 다가오는 전투에 대한 병사들의 열정을 불어넣으려 했다. 한니발은 자신의 병사들에게 그들이 후퇴할 곳이 없으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2. 3. 이탈리아 북부에서의 초기 전투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진입했다.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출격했으나, 티키누스 전투에서 패배했다. 스키피오는 플라켄티아까지 후퇴하여 다른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이끄는 군단과 합류를 기다렸다. 그 사이 한니발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현지 부족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군대를 증강시켰다.

병력을 4만 명 가까이 늘린 한니발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트레비아 강을 사이에 두고 로마군 야영지와 대치했다. 이 무렵 로마군도 이미 합류를 완료한 상태였다. 로마의 집정관은 매일 번갈아 가며 군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스키피오는 이전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롱구스가 전군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3. 전투의 경과

제2차 포에니 전쟁티키누스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군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지휘 아래 트레비아강까지 후퇴했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이끄는 또 다른 로마군이 합류하면서 한니발은 두 명의 집정관을 상대하게 되었다. 셈프로니우스는 성급한 성격이었고, 스키피오가 회복하기 전에 한니발을 몰아내고 싶어 했다. 그는 스키피오의 경고를 무시하고 한니발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전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로마군은 중앙에 중무장 보병을, 양쪽에는 기병을 배치하여 카르타고군을 추격했다. 카르타고군은 중앙에 갈리아 경보병을, 양 날개에는 기병을 배치했다. 로마군은 중앙에서 우세했지만, 겨울철 트레비아강을 건너면서 저체온증추위, 허기에 시달렸다. 로마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에 밀리기 시작했고, 매복해 있던 마고의 부대가 로마군을 포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중앙의 로마 중무장 보병은 선전했지만, 결국 2만 명의 로마군이 포위되어 살육당했다. 1만 5천 명 정도가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이 전투는 한니발의 탁월한 전술이 승리한 전투였다.

3. 1. 카르타고군의 전략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가 성급하고 충동적인 기질을 가진 것을 알고, 스키피오보다 상대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셈프로니우스는 티키누스 전투에서 입은 스키피오의 부상이 회복되기 전에, 그리고 다음 해 집정관 선거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한니발을 몰아내고자 조바심을 냈다.

한니발은 전투 전날 지형을 정찰하고, 동생 마고에게 기병 1,000명과 경보병 1,000명을 주어 강변 숲 속에 매복시켰다. 그는 카르타고군에게 충분한 식사와 휴식을 제공했다. 다음 날 새벽, 카르타고 기병은 로마군을 급습했고, 셈프로니우스는 즉시 휘하 기병에게 격퇴를 명령했다. 카르타고 기병이 밀리는 것을 본 셈프로니우스는 성급하게 전 보병에게 추격을 명령하며 트레비아강을 건너게 했다.

전투의 시작 단계를 보여주는 지도
전투 시작 단계


다음 날 아침(12월 22일 또는 23일)은 춥고 눈이 내렸다. 해가 뜨기 직전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대를 강 건너로 보내 로마군의 초병을 몰아내고 싸움을 걸도록 했다. 한편, 그의 군대 나머지 부대는 일찍 아침 식사를 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누미디아인들이 나타나자 셈프로니우스는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기병대 전체를 출동시켰다. 폴리비우스는 "누미디아인들은 쉽게 흩어져 퇴각했지만, 곧 돌아서서 대담하게 공격했다. 이것이 그들의 독특한 전술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셈프로니우스는 누미디아인들이 물러서기를 거부하자 즉시 6,000명의 벨리테스la를 먼저 출동시키고, 그 다음에는 군대 전체를 출동시켰다. 그는 전투를 너무나 갈망하여 로마군 중 아침 식사를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미디아인들은 천천히 물러났고 셈프로니우스는 세 개의 열로 트레비아 강의 얼음물 속으로 그의 군대 전체를 밀어 넣었다. 트레비아 강물은 가슴 높이까지 차올랐다.

3. 2. 전투의 전개

티키누스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군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지휘 아래 트레비아강까지 후퇴했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이끄는 또 다른 로마군이 합류하면서 한니발은 두 명의 집정관을 상대하게 되었다. 셈프로니우스는 성급한 성격이었고, 스키피오가 회복하기 전에 한니발을 몰아내고 싶어 했다. 그는 스키피오의 경고를 무시하고 한니발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전투 전날, 한니발은 동생 마고에게 기병 1,000명과 경보병 1,000명을 주어 강변 숲속에 매복시켰다. 다음날 새벽, 카르타고 기병이 로마군을 급습하자 셈프로니우스는 즉각 기병에게 격퇴를 명했다. 카르타고 기병이 밀리는 것을 본 셈프로니우스는 성급하게 전 보병에게 추격을 명령했다.

로마군은 중앙에 중무장 보병을 배치하고 카르타고군을 추격했다. 카르타고군은 중앙에 갈리아 경보병을, 양 날개에는 기병을 배치했다. 로마군은 중앙에서 우세했지만, 겨울철 트레비아강을 건너면서 저체온증추위, 허기에 시달렸다. 로마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에 밀리기 시작했고, 매복해 있던 마고의 부대가 로마군을 포위했다.

중앙의 로마 중무장 보병은 선전했지만, 2만 명의 로마군이 포위되어 살육당했다. 1만 5천 명 정도가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한니발의 전술이 승리한 것이다.

12월 18일 이른 아침, 한니발은 소수의 기병을 보내 로마군 야영지를 기습하게 했다. 로마 기병이 맞서 싸우자 카르타고 기병은 후퇴했고, 롱구스는 전군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다. 강 건너편에 도착한 로마군은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로마 보병은 카르타고 보병을 상대로 우세하게 싸웠다. 그러나 양익에서 누미디아 기병 중심의 카르타고 기병이 로마 기병을 압도했다. 카르타고 기병은 로마군의 측면으로 돌아갔고, 숲 속에 숨어 있던 마고의 분견대가 로마군의 후방을 습격했다. 포위된 로마군은 주변부부터 손실이 증가했다. 롱구스는 정면의 갈리아 보병에게 전력을 집중하여 돌파구를 찾았고, 중앙을 돌파한 로마군은 그대로 철수했다. 그러나 약 절반은 포위망에 갇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4. 양측의 전력

카르타고군은 주로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갈리아 출신의 다양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보병은 약 30,000명, 기병은 약 10,000명이었으며, 30여 마리의 전투 코끼리도 있었다.

로마군은 보병 약 36,000명(로마군 16,000명, 동맹 도시군 20,000명)과 기병 약 4,000명으로 구성되었다.

4. 1. 카르타고군

카르타고군은 보병 약 30,000명, 기병 약 10,000명, 전투 코끼리 30여 마리로 구성되었다. 한니발은 보병 20,000명과 기병 6,000명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트레비아 전투에서 이 병력은 보병 29,000명(밀집 대형 21,000명, 경보병 8,000명)과 기병 11,000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아프리카인, 이베리아인, 갈리아인의 조합이었으며, 밀집 대형 보병 8,000명은 갈리아인이었다. 한니발이 이베리아를 떠났을 때 함께 했던 코끼리 37마리 중 30마리 정도가 생존해 있었다.

카르타고군은 최전열에 전투 코끼리를 배치하고, 그 후방에 보병 대열을 전개했다. 보병 대열은 중앙에 갈리아 보병, 양익에는 베테랑 리비아히스파니아 보병이 배치되었다. 보병 대열의 양익에는 기병을 둘로 나누어 배치했다. 전투 전날, 한니발은 동생 마고에게 기병 1,000명, 경장 보병 1,000명으로 구성된 2,000명의 분견대를 주어 강가 숲 속에 매복시켰다.

카르타고군은 다양한 지역 출신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병사 유형출신 지역특징
밀집 대형 보병북아프리카 (주로 "리비아인")큰 방패, 헬멧, 짧은 칼, 긴 창으로 무장, 팔랑크스 대형으로 전투. 일부는 노획한 로마식 갑옷 착용.
경보병 산병북아프리카투창으로 무장
충격 기병 ("중기병")북아프리카창을 든 충격 부대
경기병 산병주로 누미디아 (북아프리카)투창을 던지고 근접전을 피함
밀집 대형 ("중") 보병이베리아갈리아맹렬하게 돌격하지만 전투가 길어지면 붕괴되는 경향
기병갈리아, 일부 이베리아인갑옷을 착용하고 밀집 대형 병사로 전투
경기병이베리아대부분 경기병
슬링어발레아레스 제도



카르타고군은 전쟁 코끼리를 사용했는데,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토착 북아프리카 코끼리가 있었다. 이 코끼리들은 어깨 높이가 약 2.5m로, 더 큰 아프리카 코끼리와는 달랐다. 자료는 코끼리들이 병사를 태운 탑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4. 2. 로마군

트레비아 전투 당시 로마군은 대부분의 로마 남성 시민들이 보병으로 복무해야 했고, 더 부유한 소수는 기병대를 제공했다. 전통적으로 로마인들은 전쟁 시 2개의 군단을 소집했는데, 각 군단은 4,2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약 1,200명의 보병은 표준 군단병의 갑옷과 장비를 갖출 여유가 없는 가난하거나 젊은이들이었는데, velitesla라고 알려진 창을 든 산병으로 복무했다. 나머지 병력은 중장 보병으로, 갑옷, 큰 방패 및 짧은 찌르기 검을 갖추었다. 중장 보병은 세 개의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맨 앞 계급은 하스타티la라고 불렸으며, 두 번째 계급인 프린키페스la는 더 좋은 갑옷을 입었으며, 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병사로 구성되었다. 세 번째 계급은 군대의 베테랑인 트리아리la로 구성되었다.

집정관 군대는 일반적으로 로마 군단과 그들의 라틴 동맹국이 제공한 유사한 규모와 장비를 갖춘 군단을 결합하여 형성되었다. 동맹 군단은 일반적으로 로마 군단보다 더 많은 기병대를 부속시켰다. 기원전 218년 각 집정관은 4개 군단(로마 군단 2개, 동맹국 군단 2개)으로 구성된 더 큰 군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총 병력은 약 20,000명이었다.

기원전 300년경부터 서기 100년까지 로마 보병이 사용했던 몬테포르티노 형 투구 덮개. 뺨 가리개는 없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트레비아 전투로 이끈 연합군은 4개의 로마 군단을 포함했다. 완전한 병력으로 이들은 16,800명의 병력을 보유해야 했으며, 여기에는 4,800명의 velitesla가 포함되었다. 최소한 하나의 군단은 병력이 현저히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동시대의 그리스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총 16,000명의 로마인을 기록했고, 200년 후에 글을 쓴 로마 역사가인 리비우스는 18,000명을 기록했다. 또한 약 20,000명의 동맹 보병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4개의 라틴 동맹 군단과 강력한 갈리아 군대가 포함되었다. 6,000명의 경보병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들이 36,000명 또는 38,000명의 보병에 포함되는지, 아니면 그들에 추가되는지는 불분명하다. 8개 군단에서 velitesla의 명목상 총 인원이 9,600명이고, 티키누스 전투에서 많은 병력이 손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6,000명이 주어진 보병의 총 인원에 포함된다고 추정한다. 또한 4,000명의 기병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로마인, 라틴 동맹국, 갈리아인이 혼합되어 있었다.

로마군은 최전면에 경장 보병을 전개하고, 그 후방에 3열의 보병 대열을 전개,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는 통상적인 전투 대형을 취했다(로마 군단 참조). 다만,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유인책에 의해 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채로 야영지에서 출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완전한 전투 대형은 갖출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날 아침(12월 22일 또는 23일)은 춥고 눈이 내렸다. 해가 뜨기 직전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대를 강 건너로 보내 로마군의 초병을 몰아내고 싸움을 걸도록 했다. 한편, 그의 군대 나머지 부대는 일찍 아침 식사를 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누미디아인들이 나타나자 셈프로니우스는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기병대 전체를 출동시켰다. 폴리비우스는 "누미디아인들은 쉽게 흩어져 퇴각했지만, 곧 돌아서서 대담하게 공격했다. 이것이 그들의 독특한 전술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대치는 기병대의 휠링 형태로 변했지만, 누미디아인들이 물러서기를 거부하자 셈프로니우스는 즉시 6,000명의 벨리테스la를 먼저 출동시키고, 그 다음에는 군대 전체를 출동시켰다. 그는 전투를 너무나 갈망하여 로마군 중 아침 식사를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미디아인들은 천천히 물러났고 셈프로니우스는 세 개의 열, 각각 4km 길이로 트레비아 강의 얼음물 속으로 그의 군대 전체를 밀어 넣었다. 트레비아 강물은 가슴 높이까지 차올랐다.

양 군이 대형을 갖추고 접전 지점으로 이동하고 있다.


로마군은 중앙에 중장 보병(약 13,000명)이 배치되었으며, 양 옆에는 동맹군(총 17,000명)이 배치되었다. 여기에는 아직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는 치스알피나 갈리아인 부대도 포함되었지만, 출처에 따르면 그들의 정확한 숫자나 위치는 불분명하다. 생존한 6,000명의 벨리테스la는 후방에서 재정비 중이었다. 로마군은 4,000명의 기병을 양익에 배치했다. 로마군은 총 약 3만 명의 중장 보병을 보유하여, 조만간 병력의 우위를 통해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포위함.


결국 부담이 커지면서 측면에 있던 라틴 동맹군과 골족, 그리고 후방의 velitesla 부대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한편, 로마 보병은 중앙에서 그들을 맞이한 8,000명의 골족과 아프리카 중장 보병 부대를 격파하고 카르타고군 중앙을 완전히 돌파했다. 그들이 추격을 멈추고 재정비했을 때, 그들 뒤에 있던 나머지 군대가 붕괴되었고 전투에서 패배했음이 분명했다. 로마 보병과 함께 싸우던 셈프로니우스는 전투 현장에서 그들을 철수시키라고 명령했고, 대형을 유지하며 10,000명의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방해 없이 트레비아 강을 다시 건너 인근 로마가 점령한 플라센티아에 도달했다. 카르타고군은 부분적으로 포위된 로마군의 잔여 병력을 추격하고 섬멸하는 데 집중했다.

트레비아 전투에 참가한 로마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구분병력
보병약 36,000명 (로마군 16,000명, 동맹 도시군 20,000명)
기병약 4,000명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20,000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지만,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의 피해는 경미했으며, 대부분 중앙에 배치된 갈리아 보병이었다.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한 로마군은 플라켄티아까지 후퇴했고, 2명의 집정관은 카르타고 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북부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 전투로 한니발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고, 카르타고 군에 합류하는 갈리아 병사가 늘어나면서 병력은 50,000명을 넘어섰다. 한니발은 더 큰 전과를 얻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5. 1. 로마군의 피해

로마군은 중앙에서 카르타고군을 거의 무찌르는 듯했으나, 겨울철에 트레비아강을 건너 몸이 젖어 저체온증이 발생했고, 추위와 허기로 힘이 약해졌다.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에 밀렸고, 숲속에 매복해있던 마고의 기병과 보병이 로마군을 포위했다. 중앙의 로마 중무장보병의 선전으로 한니발군은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할 수 없었지만, 거의 2만 명의 로마군이 포위 속에서 살육당했다. 살아서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로마병사는 1만 5천 명 정도였다.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로마군의 피해 규모에 대한 논쟁이 있다. 덱스터 호요스는 로마 생존자가 카르타고군 중앙을 돌파한 보병뿐이라고 주장한다. 리처드 마일스는 이 그룹에 속하지 않은 "많은" 병사가 죽었다고 말하며, 나이젤 베그널은 로마 기병 중 소수만이 살아남았다고 기록한다. 골즈워시는 로마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10,000명으로 구성된 부대 외에도 "많은 수의 병사"들이 플라센티아 또는 그들의 야영지로 흩어졌다고 말한다. 반면 존 레이즌비는 12,500명 외에 "소수의" 보병이 탈출했지만 기병의 "대부분"은 탈출했다고 주장하며, 레너드 코트렐도 이에 동의한다. 폴 에르드캠프에 따르면, 로마군은 전투 중에 20,000명이 사망하여 병력의 절반을 잃었으며, 이는 포로로 잡힌 자는 제외한 숫자이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손실은 20,000명이 넘는 대패였다.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초기 로마군이 겪은 가장 큰 패배 중 하나였다.

5. 2. 카르타고군의 상황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는데, 주로 중앙에 배치된 갈리아 보병이 피해를 입었다. 노획한 로마군의 갑옷과 무기로 재무장한 아프리카 보병도 일부 있었다. 이 승리로 한니발은 갈리아 부족들의 지지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고, 카르타고 군에 참가하는 갈리아 병사 수는 계속 늘어나 곧 50,000명을 넘어섰다.

5. 3. 전략적 영향

트레비아강 전투에서 예상 밖의 대패를 당한 로마군은 플라켄티아까지 후퇴했다. 2명의 집정관은 카르타고 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북부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손실은 20,000명을 넘었다. 이에 비해 카르타고 군의 손실은 경미했고, 대부분은 중앙의 갈리아 보병이었다.

로마 정규군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이를 격파한 한니발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카르타고 군에 참가하는 갈리아 병사는 증가했고, 곧 카르타고 군의 병력은 50,000명을 넘어섰다. 한니발은 더 큰 전과를 요구하며 남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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