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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라텔롤코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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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틀라텔롤코 학살은 1968년 10월 2일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학생 시위대에 대한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사회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학생들은 민주화와 사회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 평화 시위 중이던 학생들을 향해 발포하여 대규모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학살 이후 멕시코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미국의 지원과 멕시코 정부의 기밀 해제 등을 통해 진실이 밝혀졌다. 사건은 멕시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문화 예술 작품을 통해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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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라텔롤코 학살
사건 개요
사건 명칭틀라텔롤코 학살
부분멕시코 1968년 운동 및 멕시코 더러운 전쟁의 일부
위치멕시코 멕시코시티 라스 트레스 쿨투라스 광장
날짜1968년 10월 2일
시간오후 6시 15분
시간대UTC−6
유형대량 학살
사망자350–500명
부상자1000명 이상
이미지
플라자 데 라스 트레스 쿨투라스, 1968년 10월 2일
플라자 데 라스 트레스 쿨투라스, 1968년 10월 2일
틀라텔롤코 학살 희생자에게 바쳐진 기념비
틀라텔롤코 학살 희생자에게 바쳐진 기념비

2. 역사적 배경

1968년 멕시코 정부는 멕시코 시티에서 개최되는 멕시코 시티 올림픽을 위해 1.5억달러를 투자하며 국제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국내적으로는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대통령 정부는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한편, 사회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노동 조합과 농민 운동 등 체제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이어갔다.[11] 이러한 경향은 이전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행정부(디아스 오르다스가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 시절부터 나타났는데, 당시 노동 지도자 데메트리오 바예호가 체포되고 농민 운동가 루벤 하라밀로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1] 특히 1958년, 정부는 데메트리오 발레호가 철도 노동 조합을 조직하려 하자 이를 즉시 중단시키고, '사회적 해체'를 범죄로 규정한 멕시코 형법 제145조 위반 혐의로 그를 체포하기도 했다.[35]

이러한 억압적인 정치 상황과 사회적 불만 속에서 제도혁명당(PRI)의 장기 집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변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커져갔다. 1968년 여름, 학생들 간의 충돌 사건에 대한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은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UNAM)와 국립 폴리테크닉 연구소(IPN) 등 여러 대학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학생 운동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전국 파업 위원회(CNH)를 결성하여 정부에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올림픽 개막이 임박하면서 루이스 에체베리아 내무부 장관을 중심으로 한 정부는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강경 대응을 준비했고, 이러한 긴장 관계는 결국 1968년 10월 2일 틀라텔롤코 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2. 1. 1968년 멕시코 학생 운동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대통령 정부는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공공 질서를 유지하려 했으나, 노동 조합과 농민들의 권리 개선 요구 운동을 억압하는 경향을 보였다.[11] 이전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행정부(디아스 오르다스가 내무부 장관이었던 시절)에서는 노동 지도자 데메트리오 바예호가 체포되고 농민 운동가 루벤 하라밀로가 살해되는 등[11], 독립적인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억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58년,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정권 하에서 노동 조합 지도자 데메트리오 발레호가 철도 노동 조합을 조직하려 하자, 멕시코 정부는 이를 즉시 중단시키고 "사회적 해체"를 범죄로 규정한 멕시코 형법 제145조 위반 혐의로 발레호를 체포했다.[35]

1968년 7월, 멕시코 시티에서 발생한 라이벌 학생 집단 간의 충돌에 대한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은 학생 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8] 이 사건은 제도혁명당(PRI)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UNAM)와 국립 폴리테크닉 연구소(IPN) 등 주요 대학 학생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7월 22일, 직업학교 2학년과 5학년 학생들이 연루된 충돌이 발생했고, 다음 날 다시 충돌이 벌어지자 기동대척탄병(Granaderos)이 투입되어 직업학교 5학년 건물을 강제로 수색하며 학생들을 체포했다.[38] 이 과정에서 무력 진압이 이루어졌고, 많은 학생과 교사들이 부상을 입었다.[41] 이는 대학 자치권 침해로 받아들여졌고, 학생 운동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정부의 강경 대응에 맞서, 학생들은 1968년 여름 전국 파업 위원회(Consejo Nacional de Huelga, CNH)를 공식적으로 결성했다. CNH는 멕시코 전역의 70여 개 대학 및 고등학교 학생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사회적, 교육적,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모든 후속 시위를 조직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37] 전성기에는 240명의 학생 대표가 참여하여 투표로 의사를 결정했으며[38], 라울 알바레스 가린, 소크라테스 캄포스 레무스, 마르셀리노 페렐리오, 길베르토 게바라 니에브라 등이 사실상의 지도부 역할을 수행했다. CNH는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제 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을 활용하여 평화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했다.

CNH는 정부에 다음과 같은 6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39]

# 멕시코 형법 제145조 및 제145(b)조(공서양속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3인 이상의 자가 주최한 집회에 참석한 자의 처벌)의 철회

# 척탄병(Granaderos, 전략적인 경찰 활동 부대)의 폐지

# 정치범의 석방

# 분쟁 시 부상자의 보상

# 이전 유혈 사태의 책임자 특정

# 경찰서장 외 2명의 해임

학생들은 '여단'(brigadases)을 조직하여 거리, 버스, 시장 등에서 정부의 억압과 부패를 알리는 전단을 배포하고 시민들과 대화하며 기부금을 모금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38] 초기에는 많은 시민과 버스 운전사들이 학생들의 민주주의와 정의 요구에 공감하며 지지를 보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에서는 학생들의 공격적인 행동 방식에 대해 우려하며 그들의 동기를 의심하기도 했다.[35]

정부의 탄압이 계속되자 학생들의 저항도 격화되었다. 특히 9월 23일, 경찰과 군대가 국립 폴리테크닉 연구소(IPN)의 사카텐코(Zacatenco)와 산토 토마스(Santo Tomás) 캠퍼스를 점거하려 하자 학생들은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 충돌은 9월 23일 오후 5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의사 레온 로요라(León Loyola)는 저서 《산토 토마스의 밤》에서 "불평등한 유혈 전투"였다고 묘사하며, 학생들이 가진 22구경 권총화염병에 맞서 군대는 M-1 소총과 바주카포를 동원했다고 기록했다. 프랑스 신문 《렉스프레스》(L'Express)는 이 전투로 15명이 살해되었고, 1000발 이상의 총탄이 발사되었다고 보도했으나, 멕시코 정부는 공식적으로 3명 사망, 45명 부상만을 발표하며 사태를 축소하려 했다.

3. 전국 파업 위원회(CNH)

1968년 여름, 멕시코 정부가 대학교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사건에 반발하여 전국 파업 협의회(Consejo Nacional de Huelga|콘세호 나시오날 데 우엘가spa, 이하 CNH)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CNH는 멕시코 내 70여 개 대학 및 고등학교 학생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사회적, 교육적, 정치적 개혁을 목표로 디아스 오르다스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는 중심 기구 역할을 수행했다.[37]

3. 1. CNH의 요구사항

1968년 여름, 멕시코 정부가 대학교의 자치권을 침해하자 이에 반발하여 전국 파업 협의회(Consejo Nacional de Huelga|콘세호 나시오날 데 우엘가spa, 이하 CNH)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CNH는 멕시코 전역의 70개 대학교와 고등학교 학생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사회적, 교육적,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며 디아스 오르다스 정권에 맞선 모든 시위를 조직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37] 가장 활발했을 때 CNH에는 240명의 학생 대표가 참여했으며, 투표를 통해 의사 결정을 내리고 서로 다른 학교 간의 경쟁 의식을 줄여나갔다.[38]

라울 알바레스 가린(Raúl Álvarez Garínspa), 소크라테스 캄포스 레무스(Sócrates Campos Lemusspa), 마르셀리노 페렐리오(Marcelino Perellóspa), 길베르토 게바라 니에블라(Gilberto Guevara Nieblaspa)는 사실상 CNH를 이끈 4명의 주요 지도자였다. 당시 멕시코 올림픽 개최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CNH 지도자들은 평화적인 활동을 통해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자 했다.

CNH는 정부에 다음과 같은 6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39]

# 멕시코 형법 제145조 및 제145조의2(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3인 이상의 집회에 참석한 자를 처벌하는 조항) 폐지

# 척탄병(Granaderos, 특수 기동 경찰 부대) 해체

# 정치범 석방

# 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자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보상

# 이전의 유혈 사태에 책임이 있는 관리들의 처벌

# 경찰서장 및 기타 관련 경찰 간부 해임

3. 2. 학생 운동의 확산

정부의 기동대가 직업학교#5를 강제 수색하며 학생과 교사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사건은 대학교 자치에 대한 명백한 침해였다.[41]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 운동은 더욱 결속력을 다졌고, 수도 멕시코시티를 넘어 다른 지역 학생들의 지지까지 얻게 되었다. 학생들은 6명 이상으로 구성된 여단(brigada)을 조직하여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들은 공공 버스나 거리, 시장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정부의 부패와 탄압을 알리는 팸플릿을 배포하고 시민들과 직접 대화하며 지지를 호소했다.[38] 또한,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 활동도 벌였다. 초기에는 많은 시민과 버스 운전사들이 학생들의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한 요구에 공감하며 기부했지만, 일부 학생들의 공격적인 행동은 시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했고, 학생들이 단순히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기도 했다.[35]

1968년 8월 1일,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UNAM) 총장 Javier Barros Sierra|하비에르 바르스 시에라es[42]는 정부의 노골적인 대학 자율성 침해에 항의하며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 약 5만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이 시위는[37]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 학생 운동이 폭력적이지 않으며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멕시코 사회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37][43] 시위대는 시우다드 우니베르시타리아(Ciudad Universitaria, CU)에서 출발하여 인수르헨테스 대로(Avenida de los Insurgentes)를 따라 펠릭스 쿠에바스(Félix Cuevas)까지 행진한 뒤, 코요아칸 대로(Avenida Coyoacán)를 거쳐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시위는 별다른 소란이나 체포자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4. 틀라텔롤코 학살

1968년 멕시코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기대와 긴장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학생, 노동자, 도시 빈민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연대하여 당시 PRI 장기 집권 하의 경직된 정치 체제에 도전하며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10] 그러나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대통령 정부는 사회 안정을 명분으로 노동 조합과 농민 운동을 억압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이어갔다. 이전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행정부(디아스 오르다스가 내무부 장관이었던 시절)에서는 노동 지도자 데메트리오 바예호가 체포되고 농민 운동가 루벤 하라밀로가 살해되는 등 사회 운동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11]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68년 7월, 멕시코 시티에서 발생한 학생 간의 다툼을 경찰이 과잉 진압한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학생 운동이 촉발되었다. 멕시코 자치 국립 대학교(UNAM)와 국립 폴리테크닉 연구소(IPN)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은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억압에 반발하며 전국 파업 위원회(CNH)를 결성하고 시위를 조직했다. 학생 운동은 여름 내내 규모가 커졌고, 특히 1968년 하계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정부는 시위 확산을 경계했다.

결국 1968년 10월 2일, 정부의 강경 대응에 항의하고 평화적인 집회를 열기 위해 약 1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틀라텔롤코 광장에 모였다.[12] 그러나 디아스 오르다스 정부는 군대와 '올림피아 대대'로 알려진 비밀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평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군인들은 광장을 포위하고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했으며, 이 과정에서 학생, 시민, 언론인, 심지어 어린이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11][13] 이 참혹한 사건은 멕시코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틀라텔롤코 학살로 기록되었다. 사건 직후 정부는 학생 측의 폭력 행위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며 진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이후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정부가 계획적으로 학살을 자행했음이 드러났다.[14]

4. 1. 학살의 전개

멕시코시티 학생 시위. 1968년 8월 27일.


1968년 10월 2일, 약 10,000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정부의 행동에 항의하고 평화롭게 연설을 듣기 위해 틀라텔롤코 광장(3개의 문화 광장)에 모였다.[12] 국가 파업 위원회(CNH)와 직접 관련이 없는 많은 시민들, 예를 들어 주거 단지의 이웃 주민, 구경꾼, 아이들도 광장에 함께 모여 시위를 지켜보거나 연설을 들었다. 학생들은 광장에 있는 13층짜리 치와와 아파트 건물 앞에서 집회를 열었으며, ''¡No queremos olimpiadas, queremos revolución!'' ("우리는 올림픽을 원하지 않고, 혁명을 원한다!")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집회 주최 측은 주변에 군 병력이 증가하는 것을 감지했지만 시위를 중단하지 않았다.

거리에 배치된 멕시코 군인들. 1968년 7월 30일.


경찰 소속 헬리콥터 한 대와 소속 헬리콥터 한 대가 광장 상공을 비행했다. 오후 5시 55분경, 근처 멕시코 외교부 건물에서 붉은 신호탄이 발사되었다. 이어 오후 6시 15분경에는 헬리콥터에서 녹색과 붉은색 신호탄 두 발이 추가로 발사되었다. 이를 신호로 5,000명의 군인, 200대의 장갑차[13] 및 군용 트럭이 광장을 완전히 포위했다.[12][38][44] 광장에서 첫 총격이 발생한 이후의 정확한 상황은 수십 년간 불분명했으나, 2000년 이후 미국과 멕시코 정부가 관련 기록과 정보를 공개하면서 연구자들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새로운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는 학살 이후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멕시코 정부는 주변 아파트에서 군대를 향해 총격이 가해져 군대가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학생들은 헬리콥터가 군중에게 발포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널리스트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는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 그녀의 저서 ''틀라텔롤코의 밤''(La Noche de Tlatelolco)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갑자기 하늘에 신호탄이 나타나자 모두 반사적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바로 그때 첫 총성이 들렸다. 군중은 극심한 공포에 빠져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11][35] CNH 지도부가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 광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사건 당시 외교부 건물. 이곳에서 첫 신호탄이 발사되었으며, 이후 저격 및 감시 활동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68년 하계 올림픽의 보안 유지를 명목으로 창설된 비밀 정부 조직인 올림피아 대대(군인, 경찰관, 연방 보안 요원 등으로 구성됨)[13]가 CNH 지도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광장으로 진입했다.[44] 올림피아 대대원들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아군 병사들에게 오인 사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왼손에 흰 장갑을 끼거나 흰 손수건을 묶어 서로를 식별했다.[11] 당시 올림피아 대대 소속이었던 에르네스토 모랄레스 소토 대위는 "하늘에서 신호탄을 보자마자, 미리 약속된 신호에 따라 우리는 지정된 두 개의 출입구를 봉쇄하고 아무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고 증언했다.[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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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향한 군대의 공격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고, 수십 명의 사망자와 훨씬 더 많은 부상자를 낳았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향해서뿐만 아니라 주변 건물과 군중 속의 구경꾼이나 행인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학생,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 이탈리아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를 포함한 언론인,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총에 맞아 쓰러졌고, 광장은 순식간에 시신으로 뒤덮였다. 한편, 시위 연설자들이 있던 치와와 아파트 건물에서는 올림피아 대대원들이 사람들을 밀치고 엘리베이터 벽 근처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일각에서는 이 올림피아 대원들이 먼저 군중이나 다른 병사들을 향해 총을 쏘아 혼란을 유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13][44]

영상 증거에 따르면, 올림피아 대대의 최소 두 개 중대가 인근 아파트 건물에 미리 숨어 있었으며,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루이스 에체베리아의 처남이 소유한 몰리노 델 레이 아파트에는 기관총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산티아고 데 틀라텔롤코 교회 지붕에는 저격수들이 배치되었고, 첫 신호탄을 발사한 인물들을 포함한 많은 관련자들이 인근 수도원과 외교부 건물에 집결해 있었다. 외교부 건물 19층에는 기관총이, 17층에는 비디오카메라가 설치되어 상황을 감시하고 있었다. 영상 증거 중에는 흰 장갑을 낀 남성 10명이 교회에서 나와 군인들과 마주치자 신분증으로 보이는 것을 제시하고 풀려나는 장면도 포착되었다.[13][44]

치와와 아파트 건물과 그 주변 지역은 전기와 전화가 모두 차단되어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학살은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군인과 경찰은 광장 주변의 집들을 일일이 수색하며 시위 참가자들을 색출했다. 목격자들은 구급차가 먼저 주요 시신들을 실어 날랐고, 이후 군용 트럭이 도착해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부상자들을 포함한 나머지 시신들을 쌓아 어디론가 옮겼다고 증언했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시신들이 쓰레기 수거차에 실려 알 수 없는 장소로 옮겨졌다고도 한다. 군인들은 건물의 엘리베이터 벽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옷을 벗긴 채 구타했으며, 약 3,000명의 사람들이 교회 옆 수도원으로 끌려가 다음 날 아침까지 구금되었다. 구금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학생 시위와 관련 없는 인근 주민이나 행인이었다. 다른 목격자들은 다음 날 올림피아 대대원들이 서비스직 노동자나 조사관 등으로 위장하여 학생들을 찾기 위해 집집마다 수색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사건 다음 날 아침, 신문들은 정부의 발표를 인용하여 20명에서 28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으며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11][35] 대부분의 멕시코 언론은 정부의 입장을 따라 학생들이 먼저 아파트 건물에서 저격 총격을 가해 군대의 대응을 유발했다고 보도했다. 1968년 10월 3일자 ''엘 디아''(El Día) 신문의 아침 헤드라인은 "틀라텔롤코 집회에서의 범죄적 도발이 끔찍한 유혈 사태를 불렀다"였다. 이처럼 당시 언론은 정부의 통제 하에 사건을 축소하고 왜곡 보도했으나, 2001년 조사 과정에서 공개된 문서들은 당시 저격수들이 실제로는 대통령 경호대 소속이었으며, 군대의 발포를 유도하기 위해 먼저 총격을 가하라는 지시를 받았음을 시사했다.[14][48]

4. 2. 은폐와 진실

학살 다음 날 아침, 멕시코 정부는 사건의 원인이 건물에 숨어 있던 무장 시위대의 선제공격 때문이며, 대는 자기 방어를 위해 응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35] 대부분의 멕시코 언론은 정부의 발표를 따라 학생 저격수가 광장을 둘러싼 아파트에서 총격을 가해 군의 반응을 유발했다고 보도했다. 1968년 10월 3일자 ''엘 디아''(El Diaes) 신문 조간 헤드라인은 "틀라텔롤코 집회에서의 범죄적 도발이 피비린내 나는 폭동을 일으켰다"고 전했다.[48]

그러나 사건 직후부터 정부 발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정부는 주변 아파트에서 군대에 대한 총격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학생들은 헬리콥터가 군중에게 발포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반박했다. 저널리스트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 출간한 저서 ''틀라텔롤코의 밤''(La noche de Tlatelolcoes)에서 "갑자기 하늘에 신호탄이 나타났고 모두가 자동적으로 위를 쳐다봤다. 그때 처음 총성이 들렸다. 군중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고 묘사하며 정부 발표와 다른 정황을 제시했다.[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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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정부가 사건을 계획적으로 조작하고 은폐하려 했다는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학살 당시 올림픽 보안을 명목으로 창설된 비밀 정부 조직 '올림피아 대대'(Batallón Olimpiaes)[13][46]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병사, 경찰관, 연방 보안 요원 등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13] 민간인과 구별하고 아군에게 오인 사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흰 장갑이나 흰 손수건을 왼손에 착용하고[11] 학생 지도부 체포를 명분으로 광장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위대와 관객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으며, 인근 건물 내부까지 진입해 사람들을 구타하고 체포했다. 에르네스토 모랄레스 소토 대위는 "하늘에서 신호탄을 보자마자... 우리는 언급된 두 개의 입구를 봉쇄하고 아무도 들어오거나 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고 증언했다.[11][47] 일부에서는 올림피아 대대원들이 먼저 군대와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혼란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3][44]

또한, 정부가 사전에 저격수를 배치했다는 증거도 나왔다. 산티아고 데 틀라텔롤코 교회 지붕과 인근 멕시코 외교부 건물 등에 저격수가 배치되었고,[44] 당시 국무장관 루이스 에체베리아의 처남이 소유한 아파트에는 기관총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비디오 증거에는 흰 장갑을 낀 남성들이 교회에서 나와 신분증을 제시하고 병사들에게 제지받지 않고 통과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13][44]

결정적으로 2001년, 멕시코 정부의 조사를 통해 저격수들이 대통령 경호대 소속이었으며, 군대를 도발하여 발포하도록 유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이 담긴 문서가 발견되었다.[14][48] 이는 학살이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정부의 작전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2003년에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국가 안보 기록 보관소가 미국 정보 공개법에 따라 CIA, 국방부, 미국 국무부, FBI, 백악관 관련 기록을 공개하면서 미국의 개입 정황도 드러났다.[21] 이 문서들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1968년 하계 올림픽의 안전을 우려하는 멕시코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용 무전기, 무기, 탄약 및 폭동 진압 훈련 자료를 제공했다. 또한 멕시코 시티의 CIA 지부는 학살 발생 6일 전,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루이스 에체베리아와 연방 보안청(DFS) 청장 페르난도 구티에레스 바리오스로부터 "상황이 곧 완전히 통제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는 멕시코 정부가 사전에 무력 진압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디아스 오르다스 정부는 학생 운동의 배후에 카를로스 마드라소와 같은 반체제 PRI 정치인이 자금을 지원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 시도하기도 했다.[21]

5. 진상 조사와 그 이후

틀라텔롤코 산티아고 사원 벽에 남은 총알 자국. 학살의 비극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1977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대통령에 의해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학살 책임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으나, 디아스 오르다스는 자신의 행동을 강하게 옹호했다. 그는 스페인으로 떠나기 직전 기자에게 "나는 공화국 대통령을 역임하고 멕시코에 봉사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6년 동안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1968년이다. 왜냐하면 그 해는 [...] 국가에 봉사하고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다행히 우리는 헤쳐나갔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질문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학살을 정당화하는 태도를 보였다.[15][16]

틀라텔롤코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 '세 문화 광장'에 세워져 있다.


학살 30주년이 되는 1998년,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은 의회의 진상 조사를 승인하며 과거사 규명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당이었던 제도 혁명당(PRI) 정부는 사건 관련 공식 문서 공개를 거부하며 조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미국 국가 안보 기록 보관소의 케이트 도일에 따르면, 미겔 데 라 마드리 전 대통령조차 재임 시절 군과 내무부에 자료를 요청했지만, 조사를 막으려는 정치적 압력에 부딪혔으며, 결국 관련 부처는 "파일이 엉망이고 아무것도 없다"고 발뺌했다고 한다.[17][49]

2000년, 71년간 지속된 PRI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국민행동당(PAN) 소속의 비센테 폭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진상 규명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폭스 대통령은 2001년, 학살 관련 기밀 문서의 공개를 명령했다.[18][50] 공개된 문서를 통해, 정부의 발표와 달리 시위대가 먼저 발포한 것이 아니라, '올림픽 여단(Brigada Olímpicaspa)'이라 불리는 대통령 경호대 소속 특수부대가 광장 주변 건물에서 먼저 발포하여 학살을 촉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기록이 정확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17][51]

폭스 대통령은 2002년 이그나시오 카리요 프리토를 특별 검사로 임명하여 학살 책임자 처벌을 추진했다.[19][52] 그 결과 2006년, 학살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루이스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이 집단 학살 혐의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2009년 3월, 법원은 복잡한 항소 절차 끝에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과 학살 사건을 직접 연결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기소된 집단 학살 혐의를 기각했다.[20][53] 그럼에도 카리요 프리토 검사는 국제 사법 재판소(ICJ)와 미주 인권 위원회 등에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을 기소하는 등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20][53]

5. 1. 미국의 역할

2003년 10월, 미국의 정보 공개법 요청에 따라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국가 안보 기록 보관소는 CIA, 펜타곤, 국무부, FBI, 백악관의 기밀 기록들을 공개했다.[21][54] 이 문서들을 통해 학살 사건에 미국 정부가 일정 부분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멕시코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멕시코 정부가 치안 유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자, 미국 국방부는 학살 사건 전후로 멕시코에 군용 무전기, 무기, 탄약 및 폭동 진압 훈련 자료를 제공했다.[21][54] 이는 결과적으로 멕시코 정부의 강경 진압을 간접적으로 지원한 셈이 되었다.

또한, 멕시코시티에 주재하던 CIA 지부는 1968년 7월부터 10월까지 대학가의 동향과 멕시코 정부 내부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거의 매일 작성했다. 특히 학살 발생 6일 전,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루이스 에체베리아와 연방 보안청(DFS) 청장 페르난도 구티에레스 바리오스는 CIA 측에 "상황이 곧 완전히 통제될 것"이라고 전달한 사실도 밝혀졌다.[21][54] 이는 미국 정부가 멕시코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외에도 디아스 오르다스 정부가 학생 지도자 중 한 명인 소크라테스 캄포스 레무스를 회유 또는 압박하여, 카를로스 마드라소와 같은 PRI 내 반체제 정치인들이 학생 운동에 자금을 대고 배후 조종했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리도록 공작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21][54]

6. 추모와 기억

1993년, 사건 발생 25주년을 맞아 희생된 학생들과 시민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플라사 데 라스 트레스 문화스에 세워졌다. 멕시코 대법원에도 학살을 추모하는 벽화가 설치되었다.

2006년 6월, 학살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루이스 에체베리아가 집단 학살 혐의로 기소되어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렸으나, 같은 해 7월 법원은 공소 시효가 만료되었다는 이유로 기소를 기각했다. 이는 학살 책임자 처벌을 둘러싼 논란을 남겼다.

2008년 12월, 멕시코 상원은 매년 10월 2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56][22] 이에 따라 매년 10월 2일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2008년 10월 2일, 학살 40주년을 맞아 멕시코시티에서는 두 차례의 대규모 추모 행진이 열렸다. 첫 번째 행진은 사범대학에서 소칼로 광장까지 이어졌고, 두 번째 행진은 국립 폴리테크닉 연구소에서 학살 현장인 플라사 데 라스 트레스 문화스까지 진행되었다. 행사 주최 측인 '68 위원회'(Comité del 68)는 약 4만 명의 시민이 행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25][55]

교사 대학에서 소칼로로 향하는 행진의 선두


소칼로로 향하는 행진의 일부


"No estuve ahí pero no olvido"(나는 그곳에 없었지만 잊지 않는다)라고 적힌 표지판


에헤 센트랄에서 가짜 피로 인체와 비둘기의 분필 윤곽을 그리는 시위자들


2020년 10월 2일, 인권, 인구, 이민 차관 알레한드로 엔시나스는 연방 정부가 1968년 학생 운동과 1971년의 엘 할코나소 탄압에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을 공공 장소에서 삭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특히 푸에르토 발라르타의 리센시아도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국제공항 명칭 변경을 제안했으며, 군대 소유 기록을 포함한 8,000개의 기록 보관함을 디지털화하여 공개할 것을 약속했다.[23]

2024년 10월 2일, 학살 당시 비판적인 활동으로 교수직에서 해고된 어머니를 둔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여 틀라텔롤코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24] 이는 국가 차원에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을 위로하려는 노력으로 평가된다.

6. 1. 문화 예술 속 틀라텔롤코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그녀의 대표작 《틀라텔롤코의 밤》은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을 담고 있다.


틀라텔롤코 학살은 멕시코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문학,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작품들은 학살의 기억을 보존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29]
문학

  •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는 1971년 《틀라텔롤코의 밤》(La noche de Tlatelolco)을 출간했다. 이 책은 학살 생존자들의 인터뷰, 당시의 구호, 슬로건, 현수막 내용 등을 모아 기록한 것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29]
  • 로베르토 볼라뇨는 1999년 소설 《부적(Amulet)》에서 학살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알시라 수스트 스카포의 실화를 바탕으로, 경찰의 습격 당시 대학교 화장실에 갇혀 살아남은 여성 아욱실리오의 시점에서 사건을 그린다. 볼라뇨는 이후 소설 《야만적인 탐정들(The Savage Detectives)》에서도 이 이야기를 다시 언급했다.[28]
  • 학살을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한 카를로스 몬시바이스,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 옥타비오 파스, 하이메 사비네스 등 여러 작가들이 학살에 대한 시를 남겼다.[29]
  • 로사리오 카스텔라노스가 쓴 틀라텔롤코 학살에 관한 시는 미국 작곡가 존 아담스의 오라토리오 엘 니뇨(El Niño, 2000)에 사용되기도 했다.[29]

영화 및 TV

  • 레오바르도 로페스 아레체 감독의 시네마 베리테 다큐멘터리 영화 《엘 그리토, 멕시코 1968》(El Grito, México 1968)은 시위와 학살 당시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 호르헤 폰스 감독의 1989년 영화 《로호 아마네세르》(Rojo Amanecer, 붉은 새벽)는 학살 당시 틀라텔롤코 광장 주변 아파트에 살던 한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사건을 재조명했다. 이 영화는 목격자와 피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엑토르 보닐라, 마리아 로호, 비치르 형제, 에두아르도 팔로모 등이 출연했다.[29]
  •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은 1973년 영화 《성스러운 산(The Holy Mountain)》에서 학살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 리처드 딘도 감독의 2004년 다큐멘터리 《니 올비도, 니 페르돈》(Ni olvido, ni perdón, 망각도 용서도 없다)은 당시의 영상 자료와 함께 목격자 및 참여자들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26]
  • 카를로스 볼라도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장편 영화 《틀라텔롤코, 베라노 델 '68》(Tlatelolco, verano del '68)은 2012년 멕시코에서 개봉했다.[27]
  • 영화 《보라르 데 라 메모리아》(Borrar de la memoria)는 1968년 7월에 살해된 한 소녀("라 엠파케타다")의 사건을 조사하는 저널리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학살을 간접적으로 다룬다.
  • 2015년 영화 《로스 파레시도스》(Los parecidos)는 학살 당일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틀라텔롤코 사건과 당시 학생들과 정부 간의 긴장을 주요하게 언급한다.
  •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 시즌 1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멕시코 연방 보안청(DFS)의 역할을 간략히 설명하고 군대가 광장을 습격하는 장면을 짧게 보여준다.
  •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미지의 적》(Un extraño enemigo)은 정보 기관의 시각에서 틀라텔롤코 학살을 다룬다.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브레이크 잇 올: 라틴 아메리카 록의 역사》(Break It All: The History of Rock in Latin America)의 첫 두 에피소드는 학살 사건과 이 사건이 당시 라틴 아메리카 록 음악계에 미친 영향을 조명한다.

음악

  • 1969년, 멕시코 록 밴드 팝 뮤직 팀은 "틀라텔롤코"라는 제목의 싱글을 발표했으나, 정부의 검열로 인해 며칠 만에 방송이 금지되었다.
  • 멕시코 아티스트 마야 가잘의 노래 "Jarhdin"에는 학살이 일어난 라스 트레스 쿨투라스 광장에서 녹음된 2분 분량의 오디오 샘플이 포함되어 있다.
  • 앞서 언급했듯이, 존 아담스의 오라토리오 엘 니뇨는 로사리오 카스텔라노스의 학살 관련 시를 가사로 사용했다.[29]


틀라텔롤코는 아즈텍 시대 희생 제의가 행해졌던 장소이자 스페인에게 항복했던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틀라텔롤코 학살이 멕시코의 국가적 트라우마와 불의의 역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예술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현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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