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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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베트 독립 운동은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병된 티베트에서 일어나는 독립을 위한 운동이다. 1959년 라싸 봉기 이후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 망명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티베트의 독립 지위, 중국의 지배, 티베트 문화 보존 등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몽골 제국, 원나라, 청나라 시기를 거치며 티베트는 자치를 누리기도 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의 통치를 받았다. 1950년대부터 미국 CIA와 영국 MI6는 티베트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현재 달라이 라마는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자치권을 추구하는 '중도의 길'을 걷고 있으며, 국제 사회는 다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1951년 십칠조협의를 통해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1959년 라싸에서 대규모 민족 운동이 발생하였고,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망명하여 중국공산당과 대립하였다(1959년 티베트 봉기 참조).[20]
2. 역사적 배경
중화인민공화국은 1951년 티베트 정부 "간덴포탕"을 제압하고 "17개조 협정"을 강압적으로 승인시켰다. 청나라 말엽 이후 중국 정권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던 중앙 티베트(티베트 자치구 지역)에 다시 지배권을 확립하고, 이를 "서장 평화 해방"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 초 암도 지역, 1956년부터 캄에서 시작된 캄 반란 등은 티베트 폭동 발발의 계기가 된 "민주 개혁"으로 이어졌고, 1959년 이후 중앙 티베트에서도 전개되었다. 그러나 1958년-1960년에 실시되었던 것은 농업 개혁에 실패하고 중국 전역에서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진 대약진 운동이었다.
티베트 망명 정부(간덴포탕) 측은 고대부터 티베트는 독립국이었다는 입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 통치를 "부당한 점령"이라고 주장하며,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의 협상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주권 하의 진정한 자치"를 요구하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14세'''”는 중화인민공화국 만리방화벽에서 금지어로 등록되어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해 무시하고 관련 도서나 사진 소지조차 금지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직후에는 청나라 지배하에 있었던 여러 민족의 “민족 자결권”을 인정했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티베트는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라는 주장으로 전환하였다.
동서 냉전과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망명 정부 사이에 교섭이 없었지만, 1970년대 후반 이후 접촉이 재개되었다. 티베트 측은 “완전한 독립”을 철회하고 “중국 주권하의 완전한 자치”·“티베트 전역을 단위로 한 티베트인의 자치 행정 단위 설정” 등을 제안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이를 “형태를 바꾼 독립 주장”이라고 거부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1세기 초부터 “티베트의 독립은 경제적, 지리적으로 비현실적이며,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며 “티베트의 외교와 방위는 중국 정부가 담당하고, 내정은 티베트인 자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59]
라싸 시에서는 당국의 엄격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현지 티베트계 주민이나 승려의 저항 운동이 때때로 발생하고 있다. 1989년 3월 대규모 항의 운동은 폭동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이후, 외국인의 티베트 방문에는 많은 제한이 설정되었다.
2008년 3월 14일 대규모 폭동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 단파 방송·자유 아시아 방송 등에 따르면, 승려와 니중을 포함한 10여 명의 티베트족이 티베트 깃발을 흔들며 전단을 배포하며 항의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무장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이어졌다. 300명의 승려가 데푼 사원에서 조캉 사원까지 데모 행진을 계획했지만, 시 중심부 10km 지점에서 무장 경찰에 진압되어 50명 이상이 연행되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008년 8월 21일 르 몽드 인터뷰에서 티베트계 주민에게 중국군이 발포하여 사망자 수가 140명에 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으나, 이후 “사망자 수에 대해 들었을 뿐 확인 방법은 없다”고 정정했다.[60]
2011년 1월 17일, 중국 국영 신화사는 2006년 시작된 “신농촌” 프로그램에 따라 5년 동안 약 30만 가구, 143만 명의 티베트족 농민·유목민을 “신농촌” 정착지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보도했다.[61] 국제연합 특별 조사관 Olivier De Schutter영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제 이주 정책이 유목민의 식량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고했다.[61]
시진핑 정권은 “중국몽”을 내걸고 2014년 우루무치역 폭발 사건을 계기로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억압을 강화했다.[62] 2017년 5월 19일, 칭하이성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에서 22세 티베트 승려가 분신 자살했으며, 2009년 이후 중국 정부의 대 티베트 정책에 항의하여 분신 자살한 티베트인은 150번째였다.[63]
티베트 관련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연도 사건 내용 1724-1732 옹정제의 티베트 분할. 강첸포탕은 티베트 북부(암도 지역), 동부(캄 지역 동·남부) 통치권 상실. 1905-1910 사천 총독 조이풍의 티베트 침략. 13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탈출. 1911 신해혁명 발발. 13대 달라이 라마 티베트 귀환, 티베트 군 반격 개시. 1918-1919 티베트 군, 디추 강 넘어 캉딩(타르체도) 근접. 1932-1933 티베트 군, 제쿤도(옥수) 탈환 목표로 진격했으나 중국 칭하이·쓰촨 연합군에 패배. 1949 마보방 타이완 탈출, 류원휘 공산당 항복. 암도·캄 지역 동부 중국 공산당 지배. 1950 중국 인민해방군 캄 지역 서부 침입, 창두(참도) 점령(창두 전투). 1951 중국 인민해방군 중앙 티베트 진군, 십칠조협의 체결. 중국은 “티베트 평화 해방(서장 평화 해방)”이라 칭함. 1955 암도·캄 지역 「민주 개혁」 시작. 1956 암도·캄 지역 반중 봉기(티베트 폭동 발발). 1957 암도·캄 패배 반중 게릴라 추시 간둑 결성. 1959 라싸 시민 봉기. 14대 달라이 라마 등 인도 망명. 중국 「티베트 지방 정부」 폐지, 「티베트 임시 정부 수립」 선언. 1965 중국, 「티베트 자치구(서장 자치구)」 발족. 1974 「추시 간둑」 무장 해제.
2. 1. 몽골 제국과 원나라 시기
1239년 몽골의 왕자 고덴이 칭하이 지역을 장악한 후, 1240년 그의 장군 도르다 다르칸(Doorda Darqan)을 티베트 정찰 임무에 파견하였다. 이 원정 동안 르와스렝(Rwa-sgreng)과 걀라캉(Rgyal-lha-khang)의 카담파 사원이 불타고 500명이 사망하였다. 1241년 몽골 칸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전 세계의 몽골 군사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1244년 고덴 왕자가 사캬파의 지도자에게 수도로 와서 공식적으로 티베트를 몽골에 복속시킬 것을 초청하면서 티베트에 대한 몽골의 관심이 재개되었다. 사캬파 지도자는 1246년 그의 두 조카인 드로굔 촉걀 팍파('Phags-pa; 1235–80)와 차나 도르제(Phyag-na Rdo-rje; 1239–67)와 함께 코코노르에 도착하였다. 이 사건은 티베트가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티베트는 1350년대까지 원나라의 행정적 지배하에 있었다. 그 시점에서 티베트는 독립을 되찾았다.
2. 2. 청나라 시기
1720년, 청나라 군대가 준가르 칸국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티베트에 진입하면서 청나라의 티베트 지배가 시작되었다. 중국 황제는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에게 티베트의 종교 및 정치 문제를 담당하도록 임명했다. 달라이 라마는 라싸 주변 지역의 지도자가 되었고, 판첸 라마는 시가쩨 현 지역의 지도자가 되었다.[5]
18세기 초, 청나라는 라싸에 상주 관리인 암반을 파견하기 시작했다.[5] 1750년, 중앙 정부가 군인 수를 약 100명으로 줄이기로 결정한 후, 티베트의 여러 세력들이 라싸 폭동을 일으켜 상주 관리들을 살해하자 청나라 군대가 진입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 상주 관리를 복직시켰다. 티베트 주둔 군인 수는 약 2,000명으로 유지되었고, 상주 관리가 재편성한 지역 부대가 방어 임무를 지원했다. 티베트 정부는 이전과 같이 일상적인 업무를 계속 처리했다.[5]
준가르 전쟁 기간 동안 라싸, 바탕, 다르첸도, 라리, 창두, 리탕 등 여러 지역에 준장군 부대가 주둔했다.[5] 준장군 부대와 만주 팔기군 모두 준가르와의 전쟁에서 티베트에서 싸운 청나라 군대의 일부였다.[6] 사천의 사령관 웨이 중치(웨이페이의 후손)가 2,000명의 준장군 병사와 1,000명의 만주 병사로 구성된 "사천 루트"로 라싸를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라싸에 진입했다고 한다.[7] 1728년 이후 청나라는 깃발군 대신 준장군 부대를 사용하여 라싸 주둔군을 유지했다.[8] 준장군과 깃발군은 모두 티베트에 주둔한 청나라 주둔군을 구성했다.[9] 1,300명 이상의 준장군 중국 병사들이 3,000명의 티베트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청나라에 의해 티베트에 주둔했다.[10]
19세기 중반, 암반과 함께 사천 출신 중국군 공동체가 티베트 여성과 결혼하여 라싸의 루부 지역에 정착하여 그들의 후손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티베트 문화에 동화되었다.[11] 헤벌린은 중국인 무슬림 군대와 그들의 자손이 살았던 곳이고, 루부는 한족 군대와 그들의 자손이 살았던 곳이다.[12]
1904년, 영국은 티베트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에 대응하기 위해 티베트 원정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티베트와 시킴 사이의 국경 분쟁을 해결한다는 명목이었으나, 곧 티베트 침략으로 변했다. 영국 인도군은 라싸를 침략하여 점령했고, 13대 달라이 라마는 시골로 피신했다. 영국이 라싸를 점령한 후, 영국과 티베트 사이에 라싸 조약이 체결되어 영국은 이 지역에서 큰 경제적 영향력을 얻었지만 티베트는 청나라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영국은 청나라 정부와 티베트에 관한 영국과 중국 간의 협약을 체결하여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지배를 확인했다. 영국은 중국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는 대가로 티베트를 병합하거나 간섭하지 않기로 동의했고, 중국은 "다른 어떤 외국도 티베트의 영토 또는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기로 했다.[13]
1906년 영국과 중국 간의 티베트에 관한 협약은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13] 1907년 영국-러시아 협약은 라싸나 베이징의 승인 없이 청나라의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했다.[14] 1910년, 청 중앙 정부는 티베트에 대한 주권과 직접 통치를 주장했고, 13세 달라이 라마는 영국령 인도로 망명했다. 같은 달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를 '폐위'하고 새로운 환생을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15]
2. 3. 중화민국 시기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청 황제 퇴위의 황제 칙령에 따라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은 중화민국에 이양되었다.[16][17][18]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중국 내전으로 인해 중국 세력은 티베트 일부 지역만 장악했다. 13대 달라이 라마 정부는 우짱(Dbus-gtsang)과 서부 캄을 통치하며 티베트의 독립을 선포했고, 외몽골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나 다른 국가들로부터는 승인을 받지 못했다. 동부 캄은 중국 군벌 류원후이가, 암도(칭하이) 지역은 군벌 마부팡이 통제했다. 마복상 장군은 몽골 및 티베트 사무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티베트가 중화민국의 일부라는 입장을 지지했다.[19]
이 시기 티베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요 사건들이 있었다.
연도 | 사건 내용 |
---|---|
1724-1732 | 옹정제의 티베트 분할. 강첸포탕은 티베트 북부(암도 지역), 동부(캄 지역의 동부·남부) 통치권을 상실. |
1905-1910 | 사천 총독 조이풍의 티베트 침략. 13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탈출. |
1911 | 신해혁명 발발. 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로 귀환, 티베트 군 반격 개시. |
1918-1919 | 티베트 군, 일시적으로 디추 강을 넘어 캉딩(타르체도) 근접. |
1932-1933 | 티베트 군, 제쿤도(옥수) 탈환 목표로 진격했으나 중국 칭하이·쓰촨 연합군에 패배. |
1949 | 암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칭하이성 성장 마보방이 타이완으로 탈출, 캄 지역 동부를 장악하고 있던 류원휘가 공산당에 항복. 암도 지역과 캄 지역 동부가 중국 공산당 지배하에 들어감. |
2. 4.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침공했다.[20] 1951년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대표들이 서명한 「티베트 평화 해방 17개조 협정」에 따라 중앙 정부와 티베트 정부 대표들의 공동 행정 아래 티베트가 통치될 것이라고 명시되었다.[20]1959년 3월 라싸에서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여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여 중국공산당과 대립하게 되었다.[20]
중국은 당시 티베트 인구 대부분이 라마들이 소유한 토지에 얽매인 농노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논란이 되고 있다. 십칠조협의는 티베트 본토에만 시행되었고, 동부 캄과 암도는 다른 중국 성과 마찬가지로 취급되어 토지 개혁이 완전히 시행되었다. 그 결과, 1956년 6월 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는 결국 라싸로 확산되었지만 1959년 진압되었다. 14대 달라이 라마와 다른 정부 주요 인물들은 인도로 망명했다.[20]
1951년 티베트 정부 "간덴포탕"을 제압하고 "17개조 협정"을 강압적으로 승인시켰다. 청나라 말엽 이후 중국 정권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던 중앙 티베트(티베트 자치구 지역)에 다시 지배권을 확립하고, 이를 "서장 평화 해방"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 초부터 암도 지역에서, 1956년부터 캄에서 시작되어 캄 반란 등이 발생했다. 티베트 폭동 발발의 계기가 된 "민주 개혁"이 1959년 이후의 직접 통치와 함께 중앙 티베트에서도 전개되었다. 그러나 1958년-1960년에 실시되었던 것은 농업 개혁에 실패하고 중국 전역에서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진 대약진 운동이었다.
이에 대해 티베트 망명 정부(간덴포탕) 측은 고대부터 티베트는 독립국이었다는 입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 통치를 "부당한 점령"이라고 주장하며, 당초에는 "독립의 회복"을,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의 협상이 시작된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권 하의 진정한 자치"를 요구하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잠정 정부가 다람살라에 자리를 잡은 후 즉시 세계인권선언을 기반으로 한 헌법 초안의 제정을 지시했고, 달라이 라마를 국가 원수로 하는 입헌 군주제를 표방한 헌법 초안이 1963년에 제정, 공포되었다. 인도와 네팔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 분포하는 망명 티베트인 사회는 헌법 초안(후에 여러 번 개정됨) 및 이에 준거하여 제정된 망명 티베트인 헌장에 의거하여 조직되어 있다. 주요 망명 티베트인 거주지는 다람살라(약 12000명), 뭉고트(14000명), 마이소르 등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세계 평화와 티베트 종교·문화의 보급에 대한 공헌이 높이 평가되어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내 인터넷 필터링 시스템 만리방화벽에서 금지어로 등록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상술한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고 있으며, 관련 도서의 반입, 그의 사진을 소지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직후에는 과거 청나라 지배하에 있었던 여러 민족의 “민족 자결권”을 인정하고, 1931년 장시성에서 수립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시대에는 티베트를 포함한 여러 민족에 대해 “민주적인 자치국”을 수립하고 “자유롭게 중화 연방에 가입하거나 탈퇴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족 자결권과 높은 자치성을 인정했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티베트는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라는 주장으로 전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서 냉전에 더해 문화 대혁명이 행해지고 있던 시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망명 정부 측 사이에는 무교섭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 이후 접촉이 재개되었다. 티베트 측은 “완전한 독립”을 철회하고 “중국 주권하의 완전한 자치”·“티베트 전역을 단위로 한 티베트인의 자치 행정 단위의 설정” 등의 취지로 타협하는 제안을 여러 차례 하고 있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이것을 “형태를 바꾼 독립 주장”이라고 하여 거부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 14세는 21세기 초부터 “티베트의 독립은 경제적, 지리적으로 비현실적이며,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다” “티베트의 외교와 방위는 중국 정부가 담당하고, 내정은 티베트인 자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59]
라싸 시에서는 당국의 엄격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현지 티베트계 주민이나 승려의 저항 운동도 때때로 발생하고 있다. 티베트 폭동으로 달라이 라마 14세가 라싸를 탈출한 지 30주년이 되는 1989년 3월에는 대규모 항의 운동이 폭동으로까지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이후, 외국인의 티베트 방문에는 많은 제한이 설정되었다(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현재에도 외국 언론의 티베트에서의 자유로운 보도를 금지하고 있다).
탄압 상황에 대해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발표된 예를 들면, 2007년 8월 사천성의 티베트족 거주 지역에서 열린 축제에서 “달라이 라마의 귀환을 원한다”고 큰 소리로 외친 한 티베트족 남성이 당국에 체포된 것을 계기로 수백 명의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많은 민중이 구타당했다. 그 며칠 후, 군인 약 10000명이 출동하여 주민 4000명의 마을을 포위하고 불온 분자를 차례차례 체포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미국 의회에서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은 당일 새벽, 라싸에서 티베트 불교 승려 수백 명이 수상을 축하하는 활동을 하고 있던 중, 4000명의 무장 경찰과 군인이 출동하여 많은 승려를 구타하고 수십 명의 승려가 체포되었다고 한다.
2008년 3월 14일에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미국의 단파 방송·자유 아시아 방송 등에 따르면, 승려와 니중을 포함한 10명 남짓의 티베트족이 티베트 깃발을 흔들며 전단을 배포하면서 항의 활동을 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무장 경찰이 때리는 등 폭력으로 항의 활동을 진압했다. 성직자에 대한 갑작스러운 폭력에 패닉 상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300명의 승려가 참가하여 데푼 사원에서 조캉 사원까지 데모 행진을 할 계획이었지만, 시 중심부 10km 지점에서 무장 경찰에게 진압되어 50명 이상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이 모습은 세계 각국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폭동에 대해 강경책을 취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 행위를 문화적 학살이라고 부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반대로, 이 사건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은 “달라이 라마 14세 측에 의한 조직적인 파괴 활동”이라고 하며, 그 “증거도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혹에 대해 달라이 라마 14세 측은 부정하며 “원인 규명을 위해 국제적인 제3자 기관에 의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그 조사에 대해 모든 정보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008년 8월 21일 발행된 불어 신문 르 몽드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에서 “(이번 달) 18일에 티베트 자치구 동부 캄 지역에서 항의 행동을 벌이고 있던 티베트계 주민에게 중국군이 발포했다”고 말했다. 인터뷰에서는 “사망자 수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면서 사망자 수가 140명에 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을 보였다. 그러나 그 후 달라이 라마 측은 이것을 정정하고, 달라이 라마의 진의는 “사망자 수가 140명에 달했을 가능성에 대해 들은 것뿐이다. 확인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나는 모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60] 또한, 동지에 의한 “올해 3월의 폭동 이후, 라싸 지역에서만 400명이 살해되었다”는 달라이 라마의 발언에 대해서도, 인도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측근은 “캄 지역에서 소요가 일어난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사상자 수나 그 밖의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소요가 일어난 정확한 일시도 모른다”고 하고 있다.[60]
2011년 1월 17일, 중국 국영 신화사가 티베트 자치구 주석의 발표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자치구 정부는 2006년에 시작된 “신농촌” 프로그램에 따라 5년 동안 약 30만 가구, 1430000명의 티베트족 농민·유목민을 “신농촌”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착지로 강제 이주시켰다.[61] 새로운 정착지는 오지이며, 자치구 주석은 2013년까지 185500세대의 티베트인을 더 강제 이주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61] 티베트의 유목민은 이에 대해 강제 이주된 첫 해에만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 지불되는 보상금이 다하면, 그 후에는 블록식 빈집만 남고 대부분의 가족은 생계 수단이 없다고 호소했다.[61] 국제연합의 식량 권리 특별 조사관이었던 Olivier De Schutter영어는 현지 조사를 실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와 내몽골에서 실시하고 있는 강제 이주 정책은 유목민을 가축을 팔아 이주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어 그들의 식량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61]
“중국몽”을 내건 시진핑 정권 들어서는 이전보다 더욱 억압적이고 강권적인 소수 민족 정책이 취해지게 되었다.[62] 시진핑은 국가 주석이 된 지 얼마 안 된 2014년의 우루무치역 폭발 사건을 계기로, 지금이야말로 “사회의 안정”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주조”해야 한다며 억압을 강화했다.[62] 시진핑에 따르면, 중국의 모든 개인의 행복과 발전은 서구 열강의 압박 역사를 격파하고 “부강”을 구현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라고 한다.[62] 시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인 중국에서는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소수 민족을 포함한 다양한 주장은 “안정”이나 “발전”을 저해하고 “중국식”의 “인권”에 반하는 것이라고 한다.[62] 이러한 안정 최우선 정책은 정치적, 문화적, 법적, 또는 정신적인 저항 세력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적으로 삼고, 적이라고 간주하여 “카르트 집단”으로 몰아넣는다.[63] 중국 공산당은 각 민족에 종교 교리의 개변이나 풍속 습관의 변경을 강요하고 있다.[62] 2017년 5월 19일 새벽, 칭하이성의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에서 22세의 티베트 승려가 분신 자살했다.[63] 2009년 이후 중국 정부의 대 티베트 정책에 항의하여 분신 자살을 기도한 티베트인은 그가 150번째였다.[63]
3. 티베트의 지위 논쟁
달라이 라마는 미국 국회와 유럽 의회 등 여러 국제 무대에서 연설하며 티베트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운동을 펼쳐왔다. 1987년부터는 중국이 티베트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로 남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 망명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티베트 독립 운동에 참여하는 주요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단체명 | 설립 연도 및 위치 | 주요 활동 |
---|---|---|
자유 티베트 운동 | 1987년~1989년 (티베트 내부) | 중국 공산당에 의해 승려 10명 구금 (2004년 기준 3명 구금) |
티베트 청년 의회 | 인도 다람살라 | 7만 명의 회원을 보유했다고 주장 |
국제 티베트 독립 운동 | 1995년, 미국 인디애나주 | 다양한 국제 활동 주력 |
국제 티베트 원조 기구 | 200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국제 티베트 독립 운동 조직의 유럽 지부 역할 |
1951년 이전, 특히 1912년부터 1951년 사이 티베트의 지위는 독립 지지자와 반대자들 사이에서 큰 논쟁거리였다.
1950년 이후 티베트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티베트 망명자들은 대약진운동 등으로 인해 약 120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지만,[30] 이 수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패트릭 프렌치는 티베트인들이 데이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신뢰할 수 있는 통계를 내기 어렵다고 지적했지만, 40만 명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보았다.[31] 워렌 W. 스미스는 티베트 인구 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20만 명이 "실종"되었다고 계산했다.[32] 『공산주의의 흑서』는 80만 명의 사망자를 제시하며, 티베트인의 10%가 수용되었고 생존자는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33] 반면, 중국 인구 통계학자들은 30만 명의 "실종된" 티베트인 중 9만 명이 국외로 도망쳤다고 추산했다.[34]
중국 정부는 1737년 티베트 인구가 약 800만 명이었으나, 지역 신권 정치의 '후진성'으로 인해 1959년에는 약 100만 명으로 급감했다고 주장한다.[37] 200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대티베트의 인구는 730만 명이며, 그중 500만 명이 티베트인이다. 중국 정부는 인구 증가의 원인을 신권 정치 폐지와 현대적인 생활 수준 도입으로 보고, 티베트인들이 한족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인들의 삶이 1950년 이전 달라이 라마 통치 시기보다 훨씬 향상되었다고 주장한다.[38] 티베트 자치구(TAR)의 GDP 30배 증가, 22,500km의 고속도로 건설, 세속 교육 도입, 과학 연구소 설립, 영아 사망률 감소 (43%→0.661%), 평균 수명 증가 (35.5세→67세), 『게사르왕전』 수집 및 출판, 티베트 사원 유지 및 보호를 위한 3억 위안 배정 등을 그 예로 들고 있다.[38]
중화인민공화국은 1951년 티베트 정부 “간덴포탕”을 제압하고 “17개조 협정”을 강압적으로 승인시켰다. 청나라 말엽 이후 중국 정권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던 중앙 티베트(티베트 자치구 지역)에 다시 지배권을 확립하고, 이를 “서장 평화 해방”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 초 암도 지역, 1956년 캄에서 시작된 캄 반란 등이 발생했다. 티베트 폭동의 계기가 된 “민주 개혁”은 1959년 이후 중앙 티베트에서도 전개되었다. 그러나 1958년-1960년에 실시되었던 것은 농업 개혁에 실패하고 중국 전역에서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진 대약진 운동이었다.
티베트 망명 정부(간덴포탕) 측은 고대부터 티베트가 독립국이었다는 입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부당한 점령”이라고 주장하며, 초기에는 “독립 회복”을, 1979년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권 하의 진정한 자치”를 요구하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다람살라에 잠정 정부를 세운 후 세계인권선언 기반 헌법 초안 제정을 지시, 1963년 입헌 군주제를 표방한 헌법 초안을 제정, 공포했다. 인도와 네팔 등 세계 각지에 분포하는 망명 티베트인 사회는 헌법 초안(이후 여러 번 개정) 및 망명 티베트인 헌장에 의거하여 조직되어 있다. 주요 망명 티베트인 거주지는 다람살라(약 12,000명), 뭉고트(14,000명), 마이소르 등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http://www.tibethouse.jp/dalai_lama/message/1989_nobel_peace_prize.html] “'''달라이 라마 14세'''”는 중화인민공화국 인터넷 필터링 시스템 만리방화벽에서 금지어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노벨 평화상 수상을 무시하며, 관련 도서 반입 및 사진 소지를 금지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초기 청나라 지배하의 여러 민족의 “민족 자결권”을 인정하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시대에는 티베트 등 여러 민족에게 “민주적인 자치국” 수립, “자유로운 중화 연방 가입 또는 탈퇴”를 규정하는 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족 자결권과 높은 자치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티베트는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라는 주장으로 전환했다.
냉전과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망명 정부 사이에 교섭이 없었지만, 1970년대 후반 이후 접촉이 재개되었다. 티베트 측은 “완전한 독립”을 철회하고 “중국 주권하의 완전한 자치”, “티베트 전역을 단위로 한 티베트인의 자치 행정 단위 설정”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이를 “형태를 바꾼 독립 주장”이라고 거부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1세기 초부터 “티베트의 독립은 경제적, 지리적으로 비현실적이며,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며 “티베트의 외교와 방위는 중국 정부가 담당하고, 내정은 티베트인 자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했다.[59]
라싸 시에서는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티베트계 주민이나 승려의 저항 운동이 발생하고 있다. 1989년 3월, 달라이 라마 14세의 라싸 탈출 30주년 기념 대규모 항의 운동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후 외국인의 티베트 방문에는 많은 제한이 설정되었다(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현재도 외국 언론의 티베트 자유 보도를 금지하고 있다).
2007년 8월 사천성 티베트족 거주 지역 축제에서 “달라이 라마 귀환”을 외친 티베트족 남성이 체포된 것을 계기로 수백 명의 민중과 경찰이 충돌, 많은 민중이 구타당했다. 군인 약 1만 명이 출동하여 주민 4000명의 마을을 포위하고 불온 분자를 체포했다. 달라이 라마가 미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은 당일 새벽, 라싸에서 티베트 불교 승려 수백 명이 수상 축하 활동 중 4000명의 무장 경찰과 군인에게 구타당하고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2008년 3월, 3월 10일 데푼 사원 승려들의 데모로 시작된 항의 운동이 3월 14일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2008년 티베트 소요사태). 자유 아시아 방송 등에 따르면, 승려와 니중 포함 10명 남짓의 티베트족이 티베트 깃발을 흔들며 전단 배포 중 무장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패닉 상태가 되었다. 300명의 승려가 데푼 사원에서 조캉 사원까지 데모 행진 계획 중 시 중심부 10km 지점에서 무장 경찰에게 진압되어 50명 이상이 연행되었다.
이 모습은 세계 각국에서 보도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를 문화적 학살이라고 비난했다.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은 “달라이 라마 14세 측의 조직적인 파괴 활동”이라고 주장하며 증거가 있다고 했으나, 달라이 라마 14세 측은 부정하며 국제적인 제3자 기관의 조사를 요구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008년 8월 21일 르 몽드 인터뷰에서 “(이번 달) 18일에 티베트 자치구 동부 캄 지역 항의 행동 중이던 티베트계 주민에게 중국군이 발포했다”고 말했다. 사망자 수가 140명에 달했을 가능성을 언급했으나, 이후 “사망자 수 확인 불가, 모른다”고 정정했다.[60] “올해 3월 폭동 이후, 라싸 지역에서만 400명 살해” 발언에 대해서도 달라이 라마 측근은 “캄 지역 소요는 인식, 사상자 등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했다.[60]
2011년 1월 17일, 신화사 보도에 따르면, 자치구 정부는 2006년 시작된 “신농촌” 프로그램으로 5년간 약 30만 가구, 143만 명의 티베트족 농민·유목민을 “신농촌” 정착지로 강제 이주시켰다.[61] 2013년까지 18만 5,500세대를 추가 강제 이주 예정이었다.[61] 티베트 유목민은 강제 이주 첫 해 보상금 소진 후 블록식 빈집만 남아 생계 수단이 없다고 호소했다.[61] 국제연합 식량 권리 특별 조사관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제 이주 정책이 유목민의 식량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고했다.[61]
시진핑 정권은 “중국몽”을 내걸고 더욱 억압적인 소수 민족 정책을 취했다.[62] 2014년 우루무치역 폭발 사건을 계기로 “사회의 안정” 실현,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 “주조”를 주장하며 억압을 강화했다.[62]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통해서만 개인의 행복과 발전이 실현된다고 한다.[62] 개발도상국인 중국에서는 생존권 보장을 위해 “사회의 안정”이 중요하며, 소수 민족 주장은 “안정”, “발전”을 저해하고 “중국식” “인권”에 반한다고 한다.[62] 안정 최우선 정책은 정치, 문화, 법, 정신적 저항 세력을 “카르트 집단”으로 간주하여 표적으로 삼는다.[63] 중국 공산당은 각 민족에게 종교 교리 개변, 풍속 습관 변경을 강요한다.[62] 2017년 5월 19일, 칭하이성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에서 22세 티베트 승려가 분신 자살했다.[63] 2009년 이후 중국 정부의 대 티베트 정책에 항의하여 분신 자살한 티베트인은 150번째였다.[63]
3. 1. 독립 지지 측 주장
1951년 이전, 특히 1912년부터 1951년 사이 티베트의 지위는 티베트 독립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에서 크게 논쟁의 대상이다.티베트 독립 지지자들은 몽골 제국이 멸망한 1368년과 청나라가 지배를 시작한 1720년 사이, 그리고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과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된 1951년까지 티베트가 독립된 국가이자 주권 국가였다고 주장한다.[29] 더욱이, 원나라와 청나라의 명목상 지배 기간에도 티베트는 대체로 자치를 누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앙 티베트 행정부(CTA)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지배를 티베트의 역사적 지위인 독립 국가 및 티베트인의 자결권을 침해하는, 티베트의 천연자원과 전략적 가치에만 몰두한 불법적인 것으로 본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독재적이고 분할 통치 정책과 동화 정책을 지적하며, 이를 티베트의 독특한 민족 구성, 티베트 문화, 정체성을 파괴하고 중국에 불가분의 일부로 고착시키려는 제국주의의 예로 본다. 청나라 멸망 후 몽골과 티베트는 모두 독립을 선언하고 서로를 독립 국가로 인정했다.

티베트 망명자들은 1950년 이후 대약진운동, 폭력 또는 기타 비자연적 원인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약 120만 명이라고 주장한다.[30] 중앙티베트행정부는 또한 티베트 자치구로 유입된 수백만 명의 중국 이민자들이 문화적으로나 혼혈을 통해 티베트인들을 희석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망명 단체들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최근 원래 티베트 문화의 외관을 복원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티베트의 삶의 방식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후야오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1980년 라싸를 방문했을 때, 그 지역이 이웃 성보다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불만을 표했으며, 이후 개혁이 시행되어 중앙 정부의 티베트 정책은 대부분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지만, 승려와 수녀들이 때때로 투옥되었고,[35] 많은 티베트인들(주로 승려와 수녀)이 매년 티베트를 탈출했다.[36]
티베트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단체는 다음과 같다.
- 티베트 청년회의 – 인도의 망명 티베트 정부 소재지인 다람살라에 위치, 회원 수 3만 명이라고 주장함.[39]
- 국제 티베트 독립 운동 – 미국 인디애나주에 위치. 1995년 3월에 설립되었으며, 현재 티베트 독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비영리 단체임.[40]
- 국제 티베트 지원 기구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 2004년에 설립됨.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종교 지도자인 현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는 더 이상 독립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 의회와 유럽 의회를 포함한 많은 국제 무대에서 연설했다. 1987년에는 티베트의 지위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티베트가 독립해서는 안 되고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의미 있는 자치권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중도의 길"로 알려져 있다.[41] 2017년 11월 그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개방적인 경제를 도입한 중국이 이전과 비교해 40~50% 변화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티베트인들이 독립을 원하지 않고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경제 개발을 원한다고 주장했다.[4][3] 2020년 10월 그는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지 않으며 노벨상 수상자로서 중국을 방문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공화국' 개념을 선호합니다. 공화국 개념에서 소수 민족은 티베트인, 몽골인, 만주인, 신장 위구르인과 같이 조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42]
3. 2. 독립 반대 측 주장
티베트 독립 반대 측은 7세기 티베트 제국이 왕실 결혼을 통해 중국 왕조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이래 티베트가 중국 역사의 일부였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를 합법적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한다.[29] 그 이후 원나라의 티베트 정복과 그 이후 모든 중국 정부(명나라, 청나라, 중화민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가 티베트에 대한 법적 주권을 행사해 왔다고 주장한다.[29]또한, 이러한 입장은 1912년부터 1951년 사이에 어떤 국가도 티베트를 외교 승인하지 않았고(외몽골 제외), 중화민국 정부 하의 중국은 계속해서 이 지역에 대한 주권을 유지했으며, 티베트 지도자들 자신도 1925년 중화민국 헌법 초안 위원회, 1931년 중화민국 국민의회, 1931년 국민당 제4차 전국대표대회, 1946년 새로운 중국 헌법을 초안한 중화민국 제헌 국민회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8년 새로운 중국 헌법을 초안하기 위한 또 다른 국민의회에 대표를 파견함으로써 중국 주권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29]
4. 1950년 이후 티베트 상황
1951년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체결한 십칠조협의를 통해 합병되었다. 그러나 1959년 3월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에서 대규모의 민족 운동이 발생하였고,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여 중국공산당과 대립하였다(1959년 티베트 봉기 참조).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인 집단 거주 지역에서는 1980년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2008년 3월, 라싸에서 승려들과 당국 간의 충돌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는 세계 각국에서 베이징 올림픽 성화 릴레이에 대한 항의활동으로 이어졌다. 달라이 라마는 올림픽 개최를 지지하는 한편, 중국 공산당에 대화를 요청하였다. 2008년 5월부터 특사와 중국 공산당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으나, 큰 진전은 없었다. 2009년 3월에는 티베트 독립운동 50주년을 맞아 긴장이 고조되어 당국은 경비를 강화하였다.
티베트 망명 정부(간덴포탕) 측은 고대부터 티베트가 독립국이었다는 입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 통치를 “부당한 점령”이라고 주장하며, 초기에는 “독립 회복”을,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의 협상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권 하의 진정한 자치”를 요구하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다.
4. 1. 중국의 티베트 정책
1951년 십칠조협의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병되었으나, 1959년 3월 라싸에서 대규모 민족 운동이 발생하고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면서 중국공산당과 대립하였다.중화인민공화국은 1951년 티베트 정부 “간덴포탕”을 제압하고 “17개조 협정”을 강압적으로 승인시켰다. 청나라 말엽 이후 통치가 미치지 못했던 중앙 티베트(티베트 자치구 지역)에 다시 지배권을 확립하고, 이를 “서장 평화 해방”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 초부터 암도 지역에서, 1956년부터 캄에서 캄 반란 등이 발생했다. 티베트 폭동 발발의 계기가 된 “민주 개혁”이 1959년 이후의 직접 통치와 함께 중앙 티베트에서도 전개되었다. 그러나 1958년-1960년에 실시되었던 것은 농업 개혁에 실패하고 중국 전역에서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진 대약진 운동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세계인권선언을 기반으로 한 헌법 초안의 제정을 지시했고, 달라이 라마를 국가 원수로 하는 입헌 군주제를 표방한 헌법 초안이 1963년에 제정, 공포되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세계 평화와 티베트 종교·문화 보급에 대한 공헌으로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http://www.tibethouse.jp/dalai_lama/message/1989_nobel_peace_prize.html] “'''달라이 라마 14세'''”는 만리방화벽에서 금지어로 등록되어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해 무시하고 관련 도서 반입, 사진 소지조차 금지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직후에는 “민족 자결권”을 인정하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시대에는 티베트를 포함한 여러 민족에 대해 “민주적인 자치국”을 수립하고 “자유롭게 중화 연방에 가입하거나 탈퇴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헌법을 제정했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티베트는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라는 주장으로 전환하였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망명 정부 사이에 무교섭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 이후 접촉이 재개되었다. 티베트 측은 “완전한 독립”을 철회하고 “중국 주권하의 완전한 자치”·“티베트 전역을 단위로 한 티베트인의 자치 행정 단위 설정” 등을 제안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형태를 바꾼 독립 주장”이라고 거부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1세기 초부터 “티베트의 독립은 비현실적이며,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며 “외교와 방위는 중국 정부가 담당하고, 내정은 티베트인 자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했다.[59]
라싸 시에서는 당국의 엄격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현지 티베트계 주민이나 승려의 저항 운동도 때때로 발생하고 있다. 1989년 3월에는 대규모 항의 운동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이후, 외국인의 티베트 방문에는 많은 제한이 설정되었다(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현재에도 외국 언론의 티베트에서의 자유로운 보도를 금지하고 있다).
탄압 상황에 대해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발표된 예를 들면, 2007년 8월 사천성의 티베트족 거주 지역에서 열린 축제에서 “달라이 라마의 귀환을 원한다”고 외친 한 티베트족 남성이 체포된 것을 계기로 수백 명의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많은 민중이 구타당했다. 며칠 후, 군인 약 1만 명이 출동하여 주민 4000명의 마을을 포위하고 불온 분자를 체포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미국 의회에서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은 당일 새벽, 라싸에서 티베트 불교 승려 수백 명이 수상을 축하하는 활동을 하던 중, 4000명의 무장 경찰과 군인이 출동하여 많은 승려를 구타하고 수십 명의 승려가 체포되었다고 한다.
2008년 3월에는 3월 10일의 데푼 사원 승려들의 데모로 시작된 항의 운동이 3월 14일에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다(2008년 티베트 소요사태). 미국의 단파 방송·자유 아시아 방송 등에 따르면, 승려와 니중을 포함한 10명 남짓의 티베트족이 티베트 깃발을 흔들며 전단을 배포하면서 항의 활동을 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무장 경찰이 때리는 등 폭력으로 진압했다. 또한 300명의 승려가 참가하여 데푼 사원에서 조캉 사원까지 데모 행진을 할 계획이었지만, 시 중심부 10킬로미터 지점에서 무장 경찰에게 진압되어 50명 이상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이 모습은 세계 각국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폭동에 대해 강경책을 취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 행위를 문화적 학살이라고 부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난하고 있다.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은 “달라이 라마 14세 측에 의한 조직적인 파괴 활동”이라고 하며, 그 “증거도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14세 측은 부정하며 “원인 규명을 위해 국제적인 제3자 기관에 의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그 조사에 대해 모든 정보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008년 8월 21일 르 몽드 인터뷰에서 “(이번 달) 18일에 티베트 자치구 동부 캄 지역에서 항의 행동을 벌이고 있던 티베트계 주민에게 중국군이 발포했다”고 말했다. 사망자 수가 140명에 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을 보였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측은 “사망자 수가 140명에 달했을 가능성에 대해 들은 것뿐이다. 확인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나는 모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60] 또한, “올해 3월의 폭동 이후, 라싸 지역에서만 400명이 살해되었다”는 달라이 라마의 발언에 대해서도, 인도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측근은 “캄 지역에서 소요가 일어난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사상자 수나 그 밖의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소요가 일어난 정확한 일시도 모른다”고 하고 있다.[60]
2011년 1월 17일, 중국 국영 신화사는, 자치구 정부는 2006년에 시작된 “신농촌” 프로그램에 따라 5년 동안 약 30만 가구, 143만 명의 티베트족 농민·유목민을 “신농촌”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착지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보도했다.[61] 자치구 주석은 2013년까지 18만 5,500세대의 티베트인을 더 강제 이주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61] 티베트의 유목민은 강제 이주된 첫 해에만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 지불되는 보상금이 다하면, 그 후에는 블록식 빈집만 남고 대부분의 가족은 생계 수단이 없다고 호소했다.[61] 국제연합의 식량 권리 특별 조사관이었던 Olivier De Schutter영어는 현지 조사를 실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와 내몽골에서 실시하고 있는 강제 이주 정책은 유목민을 가축을 팔아 이주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어 그들의 식량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61]
“중국몽”을 내건 시진핑 정권 들어서는 이전보다 더욱 억압적이고 강권적인 소수 민족 정책이 취해지게 되었다.[62] 시진핑은 우루무치역 폭발 사건을 계기로, “사회의 안정”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주조”해야 한다며 억압을 강화했다.[62] 시진핑에 따르면, 중국의 모든 개인의 행복과 발전은 서구 열강의 압박 역사를 격파하고 “부강”을 구현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라고 한다.[62] 시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인 중국에서는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소수 민족을 포함한 다양한 주장은 “안정”이나 “발전”을 저해하고 “중국식”의 “인권”에 반하는 것이라고 한다.[62] 이러한 안정 최우선 정책은 정치적, 문화적, 법적, 또는 정신적인 저항 세력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적으로 삼고, 적이라고 간주하여 “카르트 집단”으로 몰아넣는다.[63] 중국 공산당은 각 민족에 종교 교리의 개변이나 풍속 습관의 변경을 강요하고 있다.[62] 2017년 5월 19일 새벽, 칭하이성의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에서 22세의 티베트 승려가 분신 자살했다.[63] 2009년 이후 중국 정부의 대 티베트 정책에 항의하여 분신 자살을 기도한 티베트인은 그가 150번째였다.[63]
- 연표
년도 | 사건 |
---|---|
1724-1732 | 옹정제의 티베트 분할 |
1905-1910 | 사천 총독 조이풍의 티베트 침략. 13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탈출. |
1911 | 신해혁명 발발. 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로 귀환. |
1918-1919 | 티베트 군은 일시적으로 디추 강을 넘어 캉딩(타르체도)에 근접. |
1932-1933 | 티베트 군은 제쿤도(옥수) 탈환을 목표로 진격하였으나, 중국의 칭하이·쓰촨 연합군에 패배. |
1949 | 암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마보방이 타이완으로 탈출, 캄 지역 동부를 장악하고 있던 류원휘가 공산당에 항복하면서 암도 지역과 캄 지역 동부가 중국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감. |
1950 | 중국 인민해방군이 강첸포탕의 세력권인 캄 지역 서부에 침입하여 창두(참도)를 점령(창두 전투). |
1951 | 중국 인민해방군은 신장 방면, 제쿤도 방면(칭하이), 창두 방면의 3방면에서 중앙 티베트로 진군, 베이징에서는 17개조 협정이 체결, 라싸는 무혈 입성. 중국은 이를 「티베트 평화 해방(서장 평화 해방)」이라고 칭함. |
1955 | 암도·캄 지역에서 「민주 개혁」이 시작. |
1956 | 암도·캄 지역에서 반중 봉기가 시작(티베트 폭동 발발). |
1957 | 암도·캄에서 패배한 각지의 반중 게릴라가 강첸포탕 관할하의 「티베트」로 후퇴하여 반중 게릴라 통일 조직 추시 간둑을 결성. |
1959 | 라싸 시민 봉기. 14대 달라이 라마, 강첸포탕, 티베트가 탈출. 중국 국무원은 「티베트 지방 정부」의 폐지를 공포, 강첸포탕은 이에 대항하여 「티베트 임시 정부 수립」을 선언한 후 국경을 넘어 인도로 망명. |
1965 | 중국은 티베트의 「서장」 지역을 영역으로 하는 「티베트 자치구(서장 자치구)」를 발족. |
1974 | 「추시 간둑」 무장 해제. |
4. 2. 티베트인들의 저항
1951년 십칠조협의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병된 티베트는 1959년 라싸에서 대규모 민족 운동이 발생하면서 저항을 시작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여 중국공산당과 대립하게 되었다. (1959년 티베트 봉기 참조)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이 되는 2008년 3월 10일, 티베트 승려 600여 명의 항의 시위는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와의 충돌로 이어져 유혈사태로 번졌다. 중국공산당의 무력 진압으로 사태는 더욱 격화되었다. (2008년 티베트 소요 사태 참조)
2008년 3월, 라싸에서 승려들과 당국 간의 충돌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이는 세계 각국에서의 베이징 올림픽 성화 릴레이에 대한 항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달라이 라마는 올림픽 개최를 지지하면서도 중국 공산당에 대화를 요청했으나, 2008년 5월부터 시작된 특사와 중국 공산당과의 대화는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2009년 3월, 티베트 독립운동 50주년을 맞아 긴장이 고조되면서 당국은 경비를 강화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008년 8월 21일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달) 18일에 티베트 자치구 동부 캄 지역에서 항의 행동을 벌이고 있던 티베트계 주민에게 중국군이 발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측은 사망자 수가 140명에 달했을 가능성은 들은 것뿐이며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정정했다.[60]
라싸 시에서는 당국의 엄격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현지 티베트계 주민이나 승려의 저항 운동이 때때로 발생하고 있다. 1989년 3월에는 달라이 라마 14세가 라싸를 탈출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대규모 항의 운동이 폭동으로까지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이후 외국인의 티베트 방문에는 많은 제한이 설정되었다.
탄압 상황의 예로, 2007년 8월 사천성의 티베트족 거주 지역 축제에서 "달라이 라마의 귀환을 원한다"고 외친 남성이 체포된 것을 계기로 수백 명의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많은 민중이 구타당했다. 며칠 후 군인 약 1만 명이 출동하여 주민 4000명의 마을을 포위하고 불온 분자를 체포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미국 의회에서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던 날 새벽, 라싸에서 티베트 불교 승려 수백 명이 수상을 축하하는 활동을 하던 중, 4000명의 무장 경찰과 군인이 출동하여 많은 승려를 구타하고 수십 명의 승려가 체포되었다.
2008년 3월 14일에는 데푼 사원 승려들의 데모로 시작된 항의 운동이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2008년 티베트 소요사태) 자유 아시아 방송에 따르면, 승려와 니중을 포함한 10명 남짓의 티베트족이 티베트 깃발을 흔들며 전단을 배포하면서 항의 활동을 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무장 경찰이 폭력으로 진압했고, 갑작스러운 폭력에 패닉 상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300명의 승려가 데모 행진을 할 계획이었지만, 시 중심부 10킬로미터 지점에서 무장 경찰에게 진압되어 50명 이상이 연행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세계 각국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폭동에 대해 강경책을 취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 행위를 문화적 학살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은 "달라이 라마 14세 측에 의한 조직적인 파괴 활동"이라고 주장하며, 달라이 라마 14세 측은 이를 부정하며 국제적인 제3자 기관에 의한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2011년 1월 17일, 중국 국영 신화사는 티베트 자치구 주석의 발표를 통해 2006년에 시작된 "신농촌" 프로그램에 따라 5년 동안 약 30만 가구, 143만 명의 티베트족 농민·유목민을 "신농촌"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착지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보도했다.[61] 티베트 유목민들은 강제 이주된 첫 해에만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 지불되는 보상금이 다하면, 그 후에는 생계 수단이 없다고 호소했다.[61]
시진핑 정권은 "중국몽"을 내걸고 이전보다 더욱 억압적이고 강권적인 소수 민족 정책을 취하고 있다.[62] 2014년 우루무치역 폭발 사건을 계기로 "사회의 안정"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주조"해야 한다며 억압을 강화했다.[62] 중국 공산당은 각 민족에게 종교 교리의 개변이나 풍속 습관의 변경을 강요하고 있다.[62] 2017년 5월 19일, 칭하이성의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에서 22세의 티베트 승려가 분신 자살했다.[63] 이는 2009년 이후 중국 정부의 대 티베트 정책에 항의하여 분신 자살을 기도한 150번째 티베트인이었다.[63]
최근에는 중국 정부가 80만 명 이상의 티베트 학생들을 공립 기숙학교에서 생활하게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학생들은 부모로부터 떨어져 중국어를 배우고 당과 국가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지만, 종교적 신념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 금지되는 등 티베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미국은 티베트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미국 상원과 하원 의원들은 티베트의 자치를 지지하는 서한을 미 행정부에 보내고, 달라이 라마를 백악관에 초청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4. 3. 티베트 망명 정부
1959년 3월 라싸 시에서 대규모 민족 운동이 발생한 이후,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여 중국공산당과 대립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미국 국회와 유럽 의회 등 국제적인 장소에서 연설하며 티베트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1987년에는 독립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 캠페인을 시작하기도 했다.달라이 라마는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로 티베트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달라이 라마는 폭넓은 지지를 얻었지만, 티베트 망명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세계인권선언을 기반으로 한 헌법 초안 제정을 지시했고, 1963년에는 달라이 라마를 국가 원수로 하는 입헌 군주제를 표방한 헌법 초안이 제정, 공포되었다. 인도와 네팔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 분포하는 망명 티베트인 사회는 이 헌법 초안과 망명 티베트인 헌장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 주요 망명 티베트인 거주지는 다람살라(약 12,000명), 뭉고트(14,000명), 마이소르 등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세계 평화와 티베트 종교·문화 보급에 대한 공헌으로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http://www.tibethouse.jp/dalai_lama/message/1989_nobel_peace_prize.html]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노벨 평화상 수상을 무시하고 있으며, 관련 도서나 사진 소지조차 금지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티베트 망명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접촉이 재개되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 측의 "완전한 자치" 제안을 거부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1세기 초부터 "티베트의 독립은 비현실적이며,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라고 언급하며 외교와 방위는 중국 정부가, 내정은 티베트인이 담당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59]
티베트 망명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부당한 점령"이라 주장하며, 초기에는 "독립 회복"을 요구했으나,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의 협상 시작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권 하의 진정한 자치"를 요구하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단체는 다음과 같다.
- 자유 티베트 운동 : 1987년에서 1989년 사이에 티베트 내부에서 시작된 운동.
- 티베트 청년 의회 : 티베트 망명정부가 위치한 인도의 다람살라에 위치.
- 국제 티베트 독립 운동 : 미국 인디애나 주에 위치.
- 국제 티베트 원조 기구 : 2004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설립.
4. 4. 시진핑 정부의 티베트 정책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중국 정부는 티베트에 대해 더욱 억압적이고 강경한 소수 민족 정책을 시행했다.[62] 2014년 우루무치역 폭발 사건을 계기로 시진핑은 "사회의 안정"을 강조하며,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주조"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억압을 강화했다.[62]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통해야만 중국인의 행복과 발전이 실현되며, 이를 위해 "사회 안정"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소수 민족의 주장을 "안정"과 "발전"을 저해하는 "중국식 인권"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62]이러한 정책은 정치, 문화, 법, 정신적 저항 세력을 "카르트 집단"으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63] 중국 공산당은 각 민족에게 종교 교리 및 풍습, 습관 변경을 강요했다.[62]
2017년 5월 19일, 칭하이성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에서 22세 티베트 승려가 중국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며 분신 자살했다. 2009년 이후 150번째 분신자살이었다.[63]
류샤오보는 저서 『통일이란 곧 노예화...류샤오보가 말하는 대만, 홍콩 그리고 티베트』에서 대일통과 중국 민주화 운동은 양립할 수 없으므로, 티베트, 타이완, 홍콩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4]
5. 국제 사회의 반응
1959년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여 중국공산당과 대립하면서 티베트 문제는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인 집단 거주 지역에서는 198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59]
2008년 3월, 라싸에서 승려들과 당국 간의 충돌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는 세계 각국에서 열린 베이징 올림픽 성화 릴레이에 대한 항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달라이 라마는 올림픽 개최를 지지하면서도 중국 공산당에 대화를 요청했다. 2008년 5월부터 특사와 중국 공산당 간의 대화가 시작되었으나 큰 진전은 없었다. 2009년 3월, 티베트 독립운동 50주년을 맞아 긴장이 고조되자 당국은 경비를 강화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51년 티베트 정부 “간덴포탕”을 제압하고 “17개조 협정”을 강압적으로 승인시켜 티베트 자치구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를 “서장 평화 해방”(서장의 평화적인 해방)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950년대 초부터 암도 지역, 1956년부터 캄 지역에서 캄 반란 등이 발생했다. 1959년 이후에는 중앙 티베트에서도 “민주 개혁”이 전개되었으나, 이는 농업 개혁 실패로 중국 전역에서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대약진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에 대해 티베트 망명 정부(간덴포탕)는 티베트가 고대부터 독립국이었다는 입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부당한 점령”이라고 주장하며, 초기에는 “독립 회복”을,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협상을 시작한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권 하의 진정한 자치”를 요구하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세계 평화와 티베트 종교·문화 보급에 기여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14세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무시하고, 관련 도서 반입 및 사진 소지조차 금지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초기에는 여러 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시대에는 티베트를 포함한 여러 민족에게 “민주적인 자치국” 수립과 “자유로운 중화 연방 가입 또는 탈퇴”를 허용하는 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족 자결권과 높은 자치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티베트는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라는 주장으로 전환했다.
냉전과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양측 간 교섭이 없었지만, 1970년대 후반 이후 접촉이 재개되었다. 티베트 측은 “완전한 독립”을 철회하고 “중국 주권하의 완전한 자치”·“티베트 전역을 단위로 한 티베트인의 자치 행정 단위 설정” 등을 제안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이를 “형태를 바꾼 독립 주장”이라며 거부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1세기 초부터 “티베트 독립은 경제적, 지리적으로 비현실적이며,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며 “티베트의 외교와 방위는 중국 정부가 담당하고, 내정은 티베트인 자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했다.[59]
라싸에서는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현지 티베트계 주민이나 승려의 저항 운동이 발생하고 있다. 1989년 3월에는 티베트 폭동 30주년을 맞아 대규모 항의 운동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후 외국인의 티베트 방문에는 많은 제한이 설정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현재까지도 외국 언론의 티베트 자유 보도를 금지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망명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07년 8월 쓰촨성 티베트족 거주 지역 축제에서 “달라이 라마의 귀환을 원한다”고 외친 남성이 체포된 것을 계기로 수백 명의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여 많은 민중이 구타당했다. 며칠 후 군인 약 1만 명이 출동하여 주민 4000명의 마을을 포위하고 불온 분자를 체포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미국 의회에서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던 날 새벽, 라싸에서 티베트 불교 승려 수백 명이 수상 축하 활동을 하던 중 4000명의 무장 경찰과 군인이 출동하여 많은 승려를 구타하고 수십 명을 체포했다고 한다.
2008년 3월에는 3월 10일 데푼 사원 승려들의 데모로 시작된 항의 운동이 3월 14일 대규모 폭동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2008년 티베트 소요사태). 자유 아시아 방송에 따르면, 승려와 니중을 포함한 10명 남짓의 티베트족이 티베트 깃발을 흔들며 전단을 배포하며 항의하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무장 경찰이 폭력으로 진압했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패닉 상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300명의 승려가 데푼 사원에서 조캉 사원까지 데모 행진을 할 계획이었지만, 시 중심부 10킬로미터 지점에서 무장 경찰에게 진압되어 50명 이상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이 모습은 세계 각국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를 문화적 학살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은 “달라이 라마 14세 측에 의한 조직적인 파괴 활동”이라고 주장하며 증거가 있다고 했지만, 달라이 라마 14세 측은 부정하며 국제적인 제3자 기관의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2008년 8월 21일 르 몽드 인터뷰에서 티베트 소요사태와 관련하여 “(이번 달) 18일에 티베트 자치구 동부 캄 지역에서 항의 행동을 벌이고 있던 티베트계 주민에게 중국군이 발포했다”고 말했다. 사망자 수가 140명에 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을 보였으나, 이후 달라이 라마 측은 이를 정정하고, 달라이 라마의 진의는 “사망자 수가 140명에 달했을 가능성에 대해 들은 것뿐이다. 확인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나는 모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60]
2011년 1월 17일, 중국 국영 신화사는 티베트 자치구 주석의 발표를 인용, 자치구 정부가 2006년에 시작된 “신농촌” 프로그램에 따라 5년 동안 약 30만 가구, 143만 명의 티베트족 농민·유목민을 “신농촌”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착지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보도했다.[61] 자치구 주석은 2013년까지 18만 5,500세대의 티베트인을 더 강제 이주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61] 티베트 유목민들은 강제 이주된 첫 해에만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그 후에는 블록식 빈집만 남아 대부분 가족의 생계 수단이 없다고 호소했다.[61] 국제연합의 식량 권리 특별 조사관이었던 올리비에 드 슈터는 현지 조사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와 내몽골에서 실시하는 강제 이주 정책이 유목민의 식량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중국몽”을 내건 시진핑 정권은 이전보다 더욱 억압적이고 강권적인 소수 민족 정책을 취하고 있다.[62] 시진핑은 2014년 우루무치역 폭발 사건을 계기로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주조”해야 한다며 억압을 강화했다.[62] 시진핑에 따르면, 중국의 모든 개인의 행복과 발전은 서구 열강의 압박 역사를 격파하고 “부강”을 구현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통해서만 실현된다.[62] 개발도상국인 중국에서는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소수 민족을 포함한 다양한 주장은 “안정”이나 “발전”을 저해하고 “중국식”의 “인권”에 반하는 것이라고 한다.[62] 이러한 안정 최우선 정책은 정치적, 문화적, 법적, 또는 정신적인 저항 세력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카르트 집단”으로 몰아넣는다.[63] 중국 공산당은 각 민족에 종교 교리의 개변이나 풍속 습관의 변경을 강요하고 있다.[62] 2017년 5월 19일 새벽, 칭하이성의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에서 22세의 티베트 승려가 분신 자살했다.[63] 2009년 이후 중국 정부의 대 티베트 정책에 항의하여 분신 자살을 기도한 티베트인은 그가 150번째였다.[63]
5. 1. CIA와 MI6의 활동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체결한 십칠조협의를 통해 합병된 티베트에서는, 1950년대 중반부터 서방 정부 요원들이 침투했다.[22]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티베트인들을 준군사 조직으로 훈련시켰으며,[22] 영국 비밀정보국(MI6) 요원 시드니 위그놀(Sydney Wignall)은 1955년 등산가로 위장하여 티베트를 여행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밝혔다.[23]1956년 티베트 동부 캄(Kham)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미국의 비밀 군사 개입이 시작되었다. CIA 캠프에서 훈련받은 캄파 전투원들은 보급품과 함께 티베트로 공수되었다. 1959년 티베트 봉기와 그에 따른 중국군의 대응으로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했는데, 이 과정에서 CIA의 지원을 받았다. 1959년 이후 CIA는 티베트 게릴라를 훈련시키고 중국과의 싸움을 위한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25] 그러나 1970년대 초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의 화해를 모색하면서 지원은 중단되었다.[25]
뉴욕 타임스는 1998년 10월 2일 티베트 망명 운동이 1960년대에 CIA로부터 연간 1700000USD를 받았다고 보도했다.[26] CIA의 티베트 프로그램 예산은 다음과 같다.[28]
항목 | 금액 |
---|---|
달라이 라마에 대한 보조금 | 180000USD |
네팔에 주둔한 2,100명의 티베트 게릴라 지원 | 500000USD |
기타 비용 | 1060000USD |
총계 | 1730000USD |
14세 달라이 라마는 CIA가 티베트 독립 운동을 지원했지만, “티베트 독립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모든 공산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그들의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말했다.[21]
5. 2. 각국의 입장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티베트 독립에 반대하지만, 티베트 망명 정부를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 2020년 1월, 미국 의회는 티베트 정책·지지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이 라마의 후계 문제에 개입하는 중국 당국자들을 제재하고, 티베트 수도 라싸에 미국 영사관 설치를 추진하는 등 티베트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1] 2020년 10월에는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티베트 망명정부 수반을 만나면서, 미국 정부가 티베트 망명정부 수립 60년 만에 처음으로 망명정부 수반을 공식적으로 만난 사례가 되었다.[1] 이는 중국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려는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미국 상원과 하원 의원들은 티베트인의 권리와 자치권 보호를 미국의 티베트 정책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서한을 행정부에 전달하고, 달라이 라마를 백악관에 초청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1]
유럽 의회에서도 달라이 라마가 연설하는 등 티베트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1]
5. 3. 티베트 지지 단체
달라이 라마는 미국 국회와 유럽 의회 등 여러 국제 무대에서 연설하며 티베트 독립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주장해왔다. 그는 중국이 티베트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로 남을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티베트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단체명 | 위치 | 설립 연도 | 주요 활동 |
---|---|---|---|
티베트 청년회의 | 인도 다람살라 | 회원 수 3만 명이라고 주장[39] | |
국제 티베트 독립 운동 | 미국 인디애나주 | 1995년 3월 | 티베트 독립에 대한 정보 제공 (501(c)(3) 비영리 단체)[40] |
국제 티베트 지원 기구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2004년 |
그러나 현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는 더 이상 독립을 요구하지 않고,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티베트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중도의 길'을 주장하고 있다.[41] 2017년 11월 그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중국의 변화를 언급했고, 2020년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공화국' 개념을 선호"하며 티베트인, 몽골인, 만주인, 신장 위구르인이 조화롭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42]
일부 단체는 독립이나 자치권 확대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티베트인의 권리 보장을 지지한다.
단체명 | 위치 | 설립 연도 | 주요 활동 |
---|---|---|---|
프리 티베트 캠페인 | 영국 런던 | 1987년 | 티베트인들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 지지[43] |
국제 티베트 지원 네트워크 | 영국 런던 | 2000년 | 전 세계 티베트 관련 단체의 상위 단체 |
시브 간가 비디아 만디르, 파파마우, 알라하바드 | 2016년 4월 9일 | 알라하바드에서 티베트 자유 연대 집회 개최 (3,000명 이상 참가)[44] |
5. 4. 유명 인사들의 지지
달라이 라마는 미국 국회와 유럽 의회 등 여러 국제적인 장소에서 연설하며 티베트 독립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지지해왔다.[45] 1987년부터 "티베트 자유"라는 말과 티베트의 깃발이 언론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티베트 독립 운동은 미국과 유럽에서 주목받는 운동이 되었다.[45]"티베트 자유" 운동은 리처드 기어, 샤론 스톤, 러셀 브랜드, 스티븐 시걸 등 여러 유명 인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47] 국제 티베트 캠페인 이사회 의장인 리처드 기어는 이 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 중 한 명이다.
샤론 스톤은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 중국의 "나쁜 업보" 때문일 수 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달라이 라마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48][49]
스티븐 시걸은 티베트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여러 티베트 자선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50] 그는 티베트 라마인 페노르 린포체에게서 툴쿠 중드락 도르제의 환생으로 인정받았으며, 투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51]
밀라레파 기금은 티베트 독립 운동을 알리기 위해 콘서트를 주최하는 단체로, 1994년 롤라팔루자 투어에서 영감을 받아 라이브 에이드 방식으로 티베트 독립을 홍보하는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199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첫 콘서트에는 비요크, 라디오헤드, 스매싱 펌킨스 등 유명 가수들이 참여했다.[52][53][54]
가상 밴드 고릴라즈는 TV 광고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홀로그램 공연에서 2D가 "FREE TIBET" 티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여주며 지지를 표명했다.[56]
2008 리에주-바스토뉴-리에주 사이클링 대회에서 캐이들 에반스는 '티베트 자유'가 인쇄된 속옷을 입고 200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이 운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57]
2011년 인도 영화 ''락스타''는 사다 하크 노래 장면에 티베트 자유 깃발과 슬로건이 나와 논란이 되었고, 중앙영화인증위원회는 이를 삭제하라고 명령했지만 감독은 거부했다. 결국 감독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해당 장면을 삭제해야 했다.
6. 한국의 관점과 입장
대한민국은 티베트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는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는 다양한 단체와 개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1987년부터 1989년 사이 티베트 내부에서 시작된 자유 티베트 운동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적발되어 승려들이 구금되기도 하였다.[1] 인도 다람살라에 위치한 티베트 청년 의회는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 1995년 미국 인디애나주에 공식 조직된 국제 티베트 독립 운동은 다양한 국제 활동을 펼치고 있다.[3] 200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설립된 국제 티베트 원조 기구는 국제 티베트 독립 운동 조직의 유럽 지부 역할을 하고 있다.[4]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은 티베트 독립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고 있지만, 아직 티베트 망명정부의 공식 인정을 얻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티베트의 인권 문제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지지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티베트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지지한다.
7. 연표
- 1724년 - 1732년: 옹정제의 티베트 분할로 간덴포탕은 티베트 북부(암도 지역), 동부(캄 지역의 동부·남부)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 궁포남걀의 냐롱 지역 정복 활동으로 강첸포탕의 영향력 증대.
- 1905년 - 1910년: 사천 총독 조이풍의 티베트 침략. 캄 지역 봉건 영주들을 제압하고 라싸를 점령. 13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탈출.
- 1911년: 신해혁명 발발. 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로 귀환, 티베트 군 반격 개시.
- 1918년 - 1919년: 티베트 군이 일시적으로 디추 강을 넘어 캉딩(타르체도)에 근접.
- 1932년 - 1933년: 티베트 군은 제쿤도(옥수) 탈환을 목표로 진격했으나, 중국의 칭하이성·쓰촨 연합군에 패배.
- 1949년: 암도 지역의 마보방이 타이완으로 탈출, 캄 지역 동부의 류원휘가 공산당에 항복하여 암도 지역과 캄 지역 동부가 중국 공산당 지배하에 들어감.
-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캄 지역 서부에 침입하여 창두를 점령(창두 전투).
- 1951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중앙 티베트로 진군, 17개조 협정 체결. 라싸 무혈 입성. 중국은 이를 티베트 평화 해방이라 칭함.
- 1955년: 암도·캄 지역에서 민주 개혁 시작.
- 1956년: 암도·캄 지역에서 반중 봉기 시작(티베트 폭동 발발).
- 1957년: 암도·캄에서 패배한 반중 게릴라가 추시 간둑 결성.
- 1959년 3월: 라싸 시민 봉기. 달라이 라마 14세, 강첸포탕, 티베트 탈출. 중국은 강첸포탕 폐지, 강첸포탕은 티베트 임시 정부 수립 선언 후 인도 망명.
- 1965년: 중국, 티베트 자치구 발족.
- 1974년: 추시 간둑 무장 해제.
- 1989년 3월: 라싸에서 대규모 항의 운동 및 폭동 발생, 많은 사상자 발생.
- 2008년 3월: 데푼 사원 승려들의 데모를 시작으로 대규모 폭동 발생(2008년 티베트 소요사태), 많은 사상자 발생.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를 문화적 학살이라고 비난.
- 2011년: 중국 정부는 2006년부터 "신농촌" 프로그램을 통해 티베트족 농민·유목민을 강제 이주.
- 2017년 5월 19일: 칭하이성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에서 티베트 승려 분신 자살. 2009년 이후 150번째 분신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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