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피카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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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피카누 전투는 1811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이끄는 미군과 테쿰세의 동생 텐스콰타와가 이끄는 쇼니족 등 아메리카 원주민 연합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해리슨은 인디언 영토 확보를 위해 노력했고, 테쿰세는 이에 반대하며 부족 통합을 시도했다. 전투는 텐스콰타와가 해리슨 군을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되었고, 미군은 승리했지만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테쿰세 연합에 타격을 주었으며, 이후 1812년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티피카누 전투는 해리슨의 정치적 경력에 영향을 미쳤고, 기념비 건립 등 역사적 기념 사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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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피카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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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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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811년 11월 7일 |
장소 | 인디애나주배틀 그라운드 근처, 티페카누 군 |
결과 | 미국의 승리 |
관련 전쟁 | 미국-인디언 전쟁 및 테쿰세 전쟁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테쿰세 연합 |
교전국 2 | 미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텐스크와타 |
지휘관 2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병력 규모 | |
병력 1 | 500–700명의 전사 |
병력 2 | 보병 250명, 기병 90명, 민병대 7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불명, 알려진 사망자 36명 (추정 사망 50–65명, 부상 70–80명) + 포로 1명 |
사상자 2 | 사망 62명, 부상 126명 |
2. 배경
1800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새로 만들어진 인디애나 준주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더 많은 정착민을 유치하기 위해 인디언 영토를 확보하려 했다.[70][71] 해리슨은 여러 차례 토지 양도 조약을 협상했고, 1809년 9월 30일 웨인 요새 조약을 통해 마이애미 족, 포타와토미 족, 레나페 족 등 인디언 지도자들로부터 300만 에이커(약 12000km2)의 땅을 미국에 매각하게 했다.[70][71]
쇼니 족의 지도자 테쿰세는 1809년 포트 웨인 조약에 반대했다.[1] 그는 모든 부족의 동의 없이는 토지를 판매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6] 테쿰세의 동생 텐스콰타와는 '예언자'로 불리며, 원주민들에게 전통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종교 운동을 주도했다.[8][9] 테쿰세는 부족의 땅을 여행하며 전사들에게 저항 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고, 프로펫스타운에서 저항을 조직했다.[1][10]
1810년, 테쿰세와 해리슨은 회담을 가졌으나 결렬되었다. 테쿰세는 조약의 무효화와 토지 반환을 요구했지만, 해리슨은 각 부족이 미국과 개별적으로 합의를 맺었다고 주장했다.[11] 테쿰세는 토지가 반환되지 않으면 영국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고 경고했다.[12] 1811년 여름, 해리슨은 테쿰세를 다시 회의에 소환했으나, 회의는 성과 없이 끝났다.[16] 테쿰세는 해리슨에게 남부 부족들을 규합하러 떠난다고 알리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17]
텐스콰타와는 티피카누 강의 프라펫스타운(Prophetstown)에 머물렀다. 프라펫스타운은 수백 개의 건물과 상당한 인구를 가진 마을로 성장했다.[18] 해리슨은 군사력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믿었고, 전쟁 장관 윌리엄 유스티스는 원주민과의 평화를 유지하라고 명령했지만, "예언자가 적대 행위를 시작하거나 심각하게 위협한다면 공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1]
3. 전투의 전개
테쿰세가 남부에서 부족들을 모으고 있는 동안, 윌리엄 헨리 해리슨 지사는 1,000명 이상의 부대를 이끌고 와바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 텐스콰타와와 그의 동료들을 압박하려 했다. 해리슨 부대는 가는 길에 오늘날 테레호트 근처에 해리슨 요새를 건설했다.[25] 해리슨이 요새에 있는 동안, 육군 장관 윌리엄 유스티스는 "필요하다면 피라핏츠타운(프로펫스타운) 인디언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력을 행사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1] 1811년 11월 6일 늦게 해리슨 부대가 프로펫스타운 외곽에 도착했을 때, 한 젊은 인디언이 백기를 들고 마을 밖으로 나와 다음날까지 전투를 하지 말자는 텐스콰타와의 메시지를 전했다. 해리슨은 동의했지만, 텐스콰타와의 진의를 의심하여 밤새 보초를 세웠다. 텐스콰타와 무리들은 해리슨이 마을을 습격하려 한다고 생각하여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하고, 약 500명의 전사가 미합중군의 주둔지로 향했다.
전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해리슨의 경계병이 1811년 11월 7일 새벽에 진격해 오는 인디언 전사를 발견했다는 기록과, 텐스콰타와 측의 증언에 따르면 보초병이 위네바고 전사 두 명을 사살한 것이 원인이 되어 공격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33] 해리슨의 병사들은 총소리를 듣고 깨어났을 때 이미 인디언 전사들에게 포위된 것을 알았다.[38]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인디언 전사들은 해리슨 부대의 방어선을 뚫고 숙영지 안까지 침투했다. 보초들이 숙영지로 후퇴하자 병사들은 재빨리 자발적으로 집단을 만들어 방어선을 확보하고 반격을 시작했다.[1] 그날 아침 동안 해리슨 부대는 여러 차례 공격을 막아냈고, 결국 인디언 전사들은 철수했다.
화이트 룬과 스톤 이터는 텐스콰타와의 전쟁 지휘관이었다. 텐스콰타와는 전투를 내려다보는 작은 언덕에 자리 잡았다. 전투 시작과 함께 기습 효과가 사라져 전사들은 산발적인 소규모 공격으로 혼란스럽고 조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재편성하여 해리슨의 부대가 그들을 몰아낼 때마다 미국인들에게 돌진했다. 한편 소총을 든 전사들은 숲에서 방어선을 향해 엎드려 기어갔다.[40]
미군은 초기 기습에 혼란을 겪었지만, 곧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로버트 바턴 대위의 정규군과 프레드릭 가이거 대위의 켄터키 민병대는 격렬한 공격에 직면하여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해리슨은 피터스 중위가 지휘하는 인디애나 민병대로 그들을 대체했고, 웬트워스 중위는 첫 번째 공격에서 사망했다. 해리슨은 최전선이 (프로펫스타운을 향해) 나무 그늘에 위치한 소총을 든 전사들에게 압박을 받으며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인들은 공격이 계속됨에 따라 방어선을 유지했고, 정규군이 그 중요한 지역을 강화했다.[1] 민병대의 소구경 소총은 전사들이 방어자들에게 돌진할 때 거의 효과가 없었다.[39]
진영 북쪽 끝에서 데이비스 소령은 용기병들을 이끌고 반격을 가했다. 데이비스 중대의 대부분은 그 후 반격을 받고 해리슨의 주력 방어선으로 후퇴했지만, 데이비스는 사망했다.[1] 나무 그늘은 제4연대 정규군에 의해 제거되었다.[1] 후방에서 공격이 가장 강력했다. 인디애나 옐로우 재킷은 집중적인 포화를 받아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었고, 지휘관 스펜서 대위도 사망했다.[1] 해리슨은 로브 대위가 지휘하는 예비 중대 두 개를 스펜서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교인 존 팁턴 소위에게 합류시켜 방어선의 틈을 메웠다.[42]
전투는 약 2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탄약이 부족해지고 날이 밝아오자 원주민 전사들은 퇴각했다. 해리슨의 부대가 추격하여 숲에서 36명의 전사 시체를 발견하고, 두피를 벗겼다.[43] 해리슨 부대는 68명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으며, 12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인디언의 피해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역사가들은 50명 이상 전사하고, 70 ~ 80명이 부상했다고 주장한다.
테쿰세가 지원군을 데리고 돌아올 것을 두려워한 해리슨은 진지 방어를 굳건히 하라고 명령했다. 다음날 11월 8일, 해리슨이 군인 몇 명을 인디언 마을을 정찰 보냈는데, 정착촌은 비어있었다. 인디언이 밤사이에 마을에서 빠져나간 것이었다. 승리를 거둔 미합중군은 마을을 불태우고 빈센즈로 돌아왔다.
3. 1. 전투 이전
1800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새로 만들어진 인디애나 준주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더 많은 정착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인디언 영토를 확보할 명분을 찾았다. 해리슨은 수많은 토지양도 조약 협상을 벌였으며, 1809년 9월 30일 〈웨인 요새 조약〉을 통해 마이애미 족, 포타와토미 족, 레나페 족 등의 인디언 지도자들로부터 300만 에이커(약 12000km2)의 땅을 미국에 매각하도록 했다.[70][71]
쇼니족의 지도자 테컴시는 1809년 포트 웨인 조약에 반대했다.[1] 그는 토지는 모든 부족이 공유하는 것이므로 모든 부족의 완전한 동의 없이는 특정 토지를 판매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테컴시의 동생 텐스콰타와는 예언자로 알려졌으며, 전통적인 조상의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북서부 부족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했다.[8][9] 테컴시는 1809년 조약에 저항했지만, 미국과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것은 주저했다. 그는 부족의 땅을 여행하며 전사들에게 족장을 버리고 자신의 저항 운동에 합류하도록 촉구하고, 조약의 조건을 준수하는 족장과 전사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프로펫스타운에서 저항을 조직했다.[1][10]
1810년, 테컴세와 해리슨 주지사는 그루스랜드(해리슨의 빈센스 자택)에서 만났다. 테컴세는 조약의 무효화와 부족에게 토지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해리슨은 각 부족이 미국과 개별적으로 별도의 합의를 맺었다고 주장하며 토지의 공동 소유라는 생각을 비웃었다.[11] 테컴세는 토지가 반환되면 미국에 충실히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국과 동맹을 맺겠다고 분명히 밝혔다.[12]
이듬해 해리슨은 국경에서 소수의 남성 살해와 소금을 가득 실은 배 도난 사건에 대해 쇼니족을 비난했지만,[15]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공격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는 편지를 워싱턴에 계속 보냈다. 그는 1811년 여름 테컴세를 회의에 소환했다.[1] 테컴세는 해리슨에게 자신이 머스코지족과 촉토족 사이에서 모병을 하러 떠난다고 알리고, 분쟁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기 전에 돌아왔을 때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17]
텐스크와타와는 티피카누 강의 프라펫스타운에 진을 친 쇼니족과 함께 머물렀다. 프라펫스타운은 수백 개의 건물과 상당한 인구를 가진 마을로 성장했다.[18] 해리슨은 호전적인 부족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군사력을 믿었다. 전쟁 장관 윌리엄 유스티스는 원주민과의 평화 유지를 명령했지만, "하지만 예언자가 적대 행위를 시작하거나 심각하게 위협한다면 공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1]
해리슨은 텐스크와타와에게 일련의 요구 사항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는 텐스크와타와의 추종자들이 일리노이주에서 백인을 살해했다고 비난했고(거의 확실히 메인 포크와 그의 포타와토미족의 소행이었다), 프라펫스타운에서 비쇼니족 거주자의 출입을 금지했으며, 쇼니족이 말을 훔쳤다고 비난했다. 텐스크와타와는 말을 돌려주겠다고 답했지만 다른 요구 사항에는 응답하지 않았다.[22]
해리슨은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인디애나에서 약 400명의 민병대와 켄터키주 검찰총장 조셉 해밀턴 데이비스가 이끄는 켄터키주에서 온 120명의 기병 자원봉사자가 왔다. 콜로넬 존 파커 보이드가 지휘하는 정규군 300명과 추가적인 원주민 정찰대가 있었다. 모두 합쳐 약 1,000명의 병력이었다.[23]
해리슨은 빈센스 북쪽의 녹스 요새에 산발적으로 흩어진 민병대를 집결시켰다.[24] 그들은 테레호트에 도착하여 야영하고 해리슨 요새를 건설했다.[25] 10월 한 달 동안 요새 건설, 보급 및 병력 훈련에 시간을 보냈다. 쇼니족은 해리슨에게 중재자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던 델라웨어족 추장들을 체포했고, 석방된 후 10월 말에 도착하여 여러 공격적인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요새 밖에서 경비병이 총에 맞자 해리슨은 그것을 공격적인 행위이자 프라펫스타운에 대한 군사적 보복의 이유로 간주했다. 그는 유스티스에게 편지를 써서 "이제 남은 것은 그[텐스크와타와]를 응징하는 것이며, 그는 반드시 응징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6]
3. 2. 티피카누 전투
1811년 11월 7일 새벽, 텐스콰타와의 전사들이 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하면서 티피카누 전투가 시작되었다. 해리슨의 경계병이 진격해 오는 인디언 전사를 발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텐스콰타와 측의 증언에 따르면 보초병이 위네바고 전사 두 명을 사살한 것이 원인이 되어 공격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33] 해리슨의 병사들은 총소리를 듣고 깨어났을 때 이미 인디언 전사들에게 포위된 것을 알았다.[38]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인디언 전사들은 해리슨 부대의 방어선을 뚫고 숙영지 안까지 침투했다. 보초들이 숙영지로 후퇴하자 병사들은 재빨리 자발적으로 집단을 만들어 방어선을 확보하고 반격을 시작했다.[1] 그날 아침 동안 해리슨 부대는 여러 차례 공격을 막아냈고, 결국 인디언 전사들은 철수했다.
화이트 룬과 스톤 이터는 텐스콰타와의 전쟁 지휘관이었다. 텐스콰타와는 전투를 내려다보는 작은 언덕에 자리 잡았다. 전투 시작과 함께 기습 효과가 사라져 전사들은 산발적인 소규모 공격으로 혼란스럽고 조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재편성하여 해리슨의 부대가 그들을 몰아낼 때마다 미국인들에게 돌진했다. 한편 소총을 든 전사들은 숲에서 방어선을 향해 엎드려 기어갔다.[40]
미군은 초기 기습에 혼란을 겪었지만, 곧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로버트 바턴 대위의 정규군과 프레드릭 가이거 대위의 켄터키 민병대는 격렬한 공격에 직면하여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해리슨은 피터스 중위가 지휘하는 인디애나 민병대로 그들을 대체했고, 웬트워스 중위는 첫 번째 공격에서 사망했다. 해리슨은 최전선이 (프로펫스타운을 향해) 나무 그늘에 위치한 소총을 든 전사들에게 압박을 받으며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인들은 공격이 계속됨에 따라 방어선을 유지했고, 정규군이 그 중요한 지역을 강화했다.[1] 민병대의 소구경 소총은 전사들이 방어자들에게 돌진할 때 거의 효과가 없었다.[39]
진영 북쪽 끝에서 데이비스 소령은 용기병들을 이끌고 반격을 가했다. 데이비스 중대의 대부분은 그 후 반격을 받고 해리슨의 주력 방어선으로 후퇴했지만, 데이비스는 사망했다.[1] 나무 그늘은 제4연대 정규군에 의해 제거되었다.[1] 후방에서 공격이 가장 강력했다. 인디애나 옐로우 재킷은 집중적인 포화를 받아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었고, 지휘관 스펜서 대위도 사망했다.[1] 해리슨은 로브 대위가 지휘하는 예비 중대 두 개를 스펜서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교인 존 팁턴 소위에게 합류시켜 방어선의 틈을 메웠다.[42]
전투는 약 2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탄약이 부족해지고 날이 밝아오자 원주민 전사들은 퇴각했다. 해리슨의 부대가 추격하여 숲에서 36명의 전사 시체를 발견하고, 두피를 벗겼다.[43]
전투는 약 2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해리슨은 188명의 사상자를 냈다. 37명이 전사했고, 25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또 다른 126명이 경상을 입었다.[44] 옐로우 재킷은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고, 장교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했다.[45] 아메리카 원주민 사상자 수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미국군보다 확실히 적었다. 역사가들은 최대 50명이 사망하고 약 70~8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추산한다.[1] 전사들은 프로펫스타운으로 후퇴했고, 한 추장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텐스콰타와와 대면하여 많은 사망자 때문에 그가 속였다고 비난했다. 그의 주문이 그들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가 그의 마법 약을 더럽혔다고 비난하며 새로운 주문을 외우겠다고 제안했고, 전사들에게 두 번째 공격을 가하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거부했다.[1]
미군은 예언자의 마을을 불태우고 빈센즈로 귀환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티피카누 전투 다음 날, 미군 부상자들은 마차에 실려 뱅센느로 후송되었다.[48] 약 6일 후 해리슨 요새에 도착하여 강을 따라 뱅센느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고, 11월 18일에 도착하여 주방위군은 해산되었다.[49]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윌리엄 유스티스에게 티피카누 강 근처 전투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했다.[50] 유스티스는 해리슨에게 진영을 제대로 요새화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답신을 보냈는데, 해리슨은 요새화 없이도 그 위치가 충분히 안전하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51]
처음에 신문들은 유럽에서 진행 중인 나폴레옹 전쟁에 집중하면서 전투에 대한 정보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오하이오의 한 신문은 켄터키에서 온 급보를 인용하여 이 전투를 미국의 패배로 묘사했다.[52] 조셉 해밀턴 데이비스의 사망에 충격을 받은 켄터키 신문들은 해리슨을 비판했고, 한 신문은 데이비스를 애도하는 기사를 1면에 실었다. 이 소식이 동부로 전해지자 해리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롱 아일랜드 스타''는 "해리슨 총독의 인디언과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도했다.[1]
4. 1. 미군의 승리와 한계
미군은 티피카누 전투에서 전술적으로 승리했지만, 원주민 저항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이 패배는 테컴세 연합에 타격을 입혔지만, 그들은 프로펫스타운을 재건했고 전투 후 국경 지대에서 원주민의 폭력이 증가했다.[55]역사가들은 오랫동안 테컴세가 전투에서 패한 텐스크와타와에게 격분하여 공격을 감행한 동생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믿어왔지만, 알프레드 A. 케이브와 로버트 오웬스 등의 역사가들은 원주민들이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해리슨을 속이려 했고, 텐스크와타와는 계속 연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하며, 상황이 더 미묘했다고 주장한다.[53]
해리슨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알프레드 케이브에 따르면 "티피카누 전투 이후 인디언 대리인, 무역상, 공무원들의 당시 보고서 어디에서도 해리슨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주장을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54]
쇼니족은 이듬해 프로펫스타운을 부분적으로 재건했다.[59] 테컴세는 국경 지대의 군사 작전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의 전사들은 1812년 전쟁에서 영국군과 함께 미국으로부터 디트로이트 요새를 점령했으며, 1813년 템즈 강 전투에서 테컴세가 사망한 후에야 그의 연합은 미국에 대한 위협을 중단했다.
"티피카누와 타일러 투"는 1840년 대통령 선거에서 해리슨과 그의 러닝메이트인 존 타일러의 슬로건이자 인기 있는 노래가 되었다. 휘그당은 이 노래를 슬로건으로 사용하고 전투를 상기시키면서 해리슨의 성공을 활용했다.[60]
4. 2. 원주민 연합의 와해와 1812년 전쟁
티피카누 전투의 패배는 테쿰세 연합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그들은 프로펫스타운을 재건했고, 국경 지대에서 원주민의 폭력은 증가했다.[55] 테스콰타와는 전투 후 명성을 잃고 연합의 지도자 직에서 물러났지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다른 지도자들에게 탄압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알프레드 A. 케이브와 로버트 오웬스 등의 역사가들은 원주민들이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해리슨을 속이려 했고, 테스콰타와는 계속 연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하며, 상황이 더 미묘했다고 주장한다.[53]1811년 12월 16일, 뉴매드리드 지진이 남부와 중서부를 강타하자, 많은 부족들은 이 지진을 테스콰타와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미국 정착민과 인디애나와 일리노이 준주의 고립된 전초기지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여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56][57]
미국이 1812년 전쟁에서 대영국에 선전포고를 할 무렵, 테쿰세 연합은 미국에 대한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고, 이번에는 영국과 공개적으로 동맹을 맺었다.[58] 테쿰세는 국경 지대의 군사 작전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의 전사들은 1812년 전쟁에서 영국군과 함께 미국으로부터 디트로이트 요새를 점령했으며, 1813년 템즈 강 전투에서 테쿰세가 사망한 후에야 그의 연합은 미국에 대한 위협을 중단했다.
5. 역사적 평가 및 기념
티피카누 전투에 참전한 백인들은 미국 의회의 감사를 받았다. 원래 결의안에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통과되기 전에 삭제되었다. 해리슨은 이것을 모욕으로 여겼고, 의회가 자신을 칭찬받을 가치가 없는 유일한 인물로 암시했다고 생각했으며, 비난과 무례함에 직면했다고 생각했다.[61] 티피카누 전투 이후 보이드의 공개 비판은 논란을 야기했다. 그는 정규군이 없었다면 민병대가 궤멸되었을 것이라며 해리슨의 지휘관으로서의 적합성에 의문을 제기했다.[62][63] 그러나 해리슨은 템즈 전투 승리로 1818년 의회 감사와 미국 의회 금메달을 받았다.[64] 인디애나주에는 전투에서 활약한 미국 군인들의 이름을 딴 바솔로뮤, 데이비스, 스펜서, 팁턴, 워릭 등의 군이 있다.[65]
해리슨은 1835년 첫 대통령 선거 운동 중 전투터로 돌아와 연설을 했고, 전투터 보존을 위한 기념비 건립을 촉구했다. 존 팁턴은 나중에 이 땅을 매입, 보존하여 1836년 11월 7일(전투 25주년)에 주에 기증했다.[67] 1908년, 인디애나 주 의회는 전투터에 높이 약 25.91m의 오벨리스크 기념비 건립을 의뢰했다. 1960년 10월 9일, 티피카누 전투터는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었다.[68] 1961년, 전투 150주년 기념행사에는 약 1만 명이 참석했다.[69] 이후 몇 년간 전투터는 방문객이 줄고 낡아갔다. 현재 티피카누 카운티 역사협회가 전투터와 전투 관련 박물관을 관리한다.[69]
5. 1. 논란과 재평가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테컴세가 전투에서 패한 텐스콰타와에게 격분하여 공격을 감행한 동생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믿어왔다. 텐스콰타와는 전투 후 명성을 잃고 연합의 지도자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해리슨과의 회의에서 여러 원주민 지도자들은 텐스콰타와의 영향력이 사라졌다고 주장했으며,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다른 지도자들에게 탄압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알프레드 A. 케이브와 로버트 오웬스 등의 역사가들은 원주민들이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해리슨을 속이려 했고, 텐스콰타와는 계속 연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하며, 상황이 더 미묘했다고 주장한다.[53]해리슨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알프레드 케이브에 따르면 "티피카누 전투 이후 인디언 대리인, 무역상, 공무원들의 당시 보고서 어디에서도 해리슨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주장을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54] 이 패배는 테컴세 연합에 타격을 입혔지만, 그들은 프로펫스타운을 재건했고 전투 후 국경 지대에서 원주민의 폭력이 증가했다.[55] 아담 조트너는 텐스콰타와의 종교 운동 강화를 제외하고는 양측 모두에게 재앙이었다고 말한다.[1]
1811년 12월 16일, 최초의 뉴매드리드 지진이 남부와 중서부를 강타했다. 많은 부족들이 이 지진을 텐스콰타와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행동 촉구"로 여겼다.[56]
5. 2. 기념 사업
티피카누 전투 참전 백인들은 미국 의회의 감사를 받았다. 원래 결의안에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이름이 있었으나, 통과 전 삭제되었다. 해리슨은 이를 모욕으로 여겼고, 의회가 자신을 칭찬받을 가치 없는 유일한 인물로 암시했다고 생각했으며, 비난과 무례함에 직면했다고 생각했다.[61] 티피카누 전투 이후 보이드의 공개 비판은 논란을 야기했다. 그는 정규군이 없었다면 민병대가 궤멸되었을 것이라며 해리슨의 지휘관으로서의 적합성에 의문을 제기했다.[62][63] 그러나 해리슨은 템즈 전투 승리로 1818년 의회 감사와 미국 의회 금메달을 받았다.[64] 인디애나주에는 전투에서 활약한 미국 군인들의 이름을 딴 여러 군이 있다. 바솔로뮤, 데이비스, 스펜서, 팁턴, 워릭 등이다.[65]
해리슨은 1835년 첫 대통령 선거 운동 중 전투터로 돌아와 연설했고, 전투터 보존을 위한 기념비 건립을 촉구했다. 존 팁턴은 이후 이 땅을 매입, 보존하여 1836년 11월 7일(전투 25주년)에 주에 기증했다.[67]
1908년, 인디애나 주 의회는 전투터에 높이 약 25.91m의 오벨리스크 기념비 건립을 의뢰했다. 1960년 10월 9일, 티피카누 전투터는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었다.[68] 1961년, 전투 150주년 기념행사에는 약 1만 명이 참석했다.[69]
이후 몇 년간 전투터는 방문객이 줄고 낡아갔다. 현재 티피카누 카운티 역사협회가 전투터와 전투 관련 박물관을 관리한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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