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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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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는 독일 제국의 군인으로,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게릴라전을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1890년 소위로 임관하여 참모본부에서 근무했으며, 중국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하고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서 헤레로 반란 진압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주츠트루페 지휘관으로, 영국군에 맞서 탕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프리카 병사들을 활용한 게릴라전을 펼쳤다. 종전 후 독일로 돌아와 영웅 대우를 받았으나,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정치적 활동을 하다가 나치 정권의 대사직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뛰어난 게릴라 전술로 평가받으며, 2010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의 이름이 변경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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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14년의 레토-포어베크
1914년의 레토-포어베크
별명아프리카의 사자
출생 및 사망
출생일1870년 3월 20일
출생지프로이센 왕국 라인주 자를루이
사망일1964년 3월 9일
사망지서독 함부르크
소속
국가(1890년–1918년)
(1918년–20년)
군대

복무 기간1890년–1920년
최종 계급보병대장
부대4 근위 보병 연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식민지 방위군
11 군단
지휘제2 해병대대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 방위군
주요 전투
전투 목록의화단 운동
헤레로 전쟁
워터버그 전투
제1차 세계 대전
동아프리카 전역
탕가 전투
야신 전투
마히와 전투
응고마노 전투
리오마 전투
키사키 전투
남반제 전투
콘도아 이랑기 전투
믈랄리 전투
나마쿠라 전투
두투미 전투
키바타 전투
킬로사 전투
독일 혁명
훈장
훈장푸르 르 메리트 훈장 (참나무 잎 추가)
기타
관련 활동강연, 작가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레토포어베크의 출생지인 자르루이


파울 에밀 폰 레토포어베크는 프로이센 라인 주의 자르루이에서 육군 장교로 복무하던 아버지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1832–1919)와 어머니 마리 폰 아이젠하르트-로테 (1842–1919) 사이에서 태어났다.[5] 그는 포메라니아의 하위 귀족 가문 출신이다.[5] 베를린의 기숙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포츠담과 베를린-리히터펠데의 사관 후보생 부대에 입대했다.[6] 1890년, 독일 제국 육군에서 소위(Leutnant)로 임관했다.[6]

1890년 독일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한 레토포어베크는[9] 독일 참모 본부(German General Staff)에 배속되었다.[8] 1888년 2월에는 검집 부착 사관후보생(Portepeede-Fähnrichde)으로서 제4 근위 연대에 입대하여, 후에 포병 장교로서 군사학을 배웠다.

로버트 가우디에 따르면, 레토포어베크는 저서 ''나의 삶''에서 카이저의 제국군에서 보낸 10년간의 주니어 장교 시절에 대해 "매서운 추위 속 새벽 점호, 연대 훈련, 카이저, 황태자 프리드리히, 독일 최고의 군사 전략가였던 "금빛 사나이" 원수 백작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the Elder) 등 그 시대의 유명 인사들을 볼 수 있었다."라고 회상하며 향수를 느꼈다.[7] 또한 "동료 장교들과의 술자리, 밤늦도록 이어진 카드 게임, 베를린에서의 화려한 무도회"와 "젊은 여성들은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추위에 떨었고, 젊은 장교들은 뻣뻣한 새 제복을 입고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마지막 점호 전에 슈판다우 막사로 돌아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기 위한 정신없는 질주"가 이어졌다고 덧붙였다.[7]

레토포어베크는 "한 젊은 장교가 파트너가 없는 젊은 여성에게 춤을 청하지 않아서 나이 많은 장교에게 꾸중을 듣는 것을 기억한다"며,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다고 썼다.[8]

1900년에는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한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9] 그는 중국 문화의 고대 역사와 정교한 예법에 매료되었지만, 게릴라와의 전투를 매우 싫어했으며 전쟁이 독일군의 규율에 해롭다고 생각했다.[10] 1901년 중국에서 독일 참모본부로 복귀했다.[10]

1904년부터 1908년까지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에서 헤레로 반란과 그 이후의 학살에 참여했다.[11]

1904년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 주둔한 레토포어베크 대위


헤레로와 워터버그 전투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그는 나중에 이 전투를 "게릴라전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단 한 번의 작전으로 그들을 패배시킬 기회"라고 불렀다.[12] 나마족이 헨드릭 비트보이의 지도 아래 독일 통치에 반기를 들었을 때에도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 남아 전투를 계속했다.[13] 야코프 모렌가를 추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06년 모렌가와 그의 부하들과의 총격전에서 왼쪽 눈에 부상을 입어 실명되었고, 가슴에도 부상을 입었다.[13] 그 후 치료와 회복을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후송되었다.[14] 레너드 모즐리는 "레토포어베크는 이 훌륭하고 환상적인 호텐토트족에게서 동아프리카에서 영국군과의 전쟁에서 그에게 매우 유용했던 부시크래프트를 배웠다."라고 썼다. 레토포어베크는 호텐토트족 게릴라 지도자 새뮤얼 아이작을 심문하며 생존 기술에 대한 질문을 했다.[15]

1907년 레토포어베크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헤센 카셀의 제11군단 참모로 배속되었다.[16] 1909년 3월부터 1913년 1월까지는 니더작센 빌헬름스하펜제2 해병대대 사령관을 역임했다.[17] 1913년 10월, 독일 제국군은 그를 중령으로 진급시키고 독일령 카메룬(오늘날의 카메룬나이지리아 일부)의 슐츠트루페(보호군)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나,[18] 명령 변경으로 1914년 4월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탄자니아 본토인 탕가니카)에 배치되었다.[18] 새로운 임지로 이동하는 동안 레토포어베크는 덴마크 작가 카렌 블릭센과 평생의 우정을 맺었다.[19]

2. 1. 출생 및 가문



파울 에밀 폰 레토포어베크는 프로이센 라인 주의 자르루이에서 육군 장교로 복무하던 아버지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1832–1919)와 어머니 마리 폰 아이젠하르트-로테 (1842–1919) 사이에서 태어났다.[5] 그는 포메라니아의 하위 귀족 가문 출신이다.[5] 베를린의 기숙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포츠담과 베를린-리히터펠데의 사관 후보생 부대에 입대했다.[6] 1890년, 독일 제국 육군에서 소위(Leutnant)로 임관했다.[6]

레토포어베크 소위는 독일 참모 본부(German General Staff)에 배속되었다.[8] 1888년 2월에는 검집 부착 사관후보생(Portepeede-Fähnrichde)으로서 제4 근위 연대에 입대하여, 후에 포병 장교로서 군사학을 배웠다.

로버트 가우디에 따르면, 레토포어베크는 저서 ''나의 삶''에서 카이저의 제국군에서 보낸 10년간의 주니어 장교 시절에 대해 "매서운 추위 속 새벽 점호, 연대 훈련, 카이저, 황태자 프리드리히, 독일 최고의 군사 전략가였던 "금빛 사나이" 원수 백작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the Elder) 등 그 시대의 유명 인사들을 볼 수 있었다."라고 회상하며 향수를 느꼈다.[7] 또한 "동료 장교들과의 술자리, 밤늦도록 이어진 카드 게임, 베를린에서의 화려한 무도회"와 "젊은 여성들은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추위에 떨었고, 젊은 장교들은 뻣뻣한 새 제복을 입고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마지막 점호 전에 슈판다우 막사로 돌아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기 위한 정신없는 질주"가 이어졌다고 덧붙였다.[7]

레토포어베크는 "한 젊은 장교가 파트너가 없는 젊은 여성에게 춤을 청하지 않아서 나이 많은 장교에게 꾸중을 듣는 것을 기억한다"며,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다고 썼다.[8]

2. 2. 초기 군 경력

1890년 독일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한 레토포어베크는[9] 독일 참모 본부에 배속되었다.[10] 1900년에는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한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9] 그는 중국 문화의 고대 역사와 정교한 예법에 매료되었지만, 게릴라와의 전투를 매우 싫어했으며 전쟁이 독일군의 규율에 해롭다고 생각했다.[10] 1901년 중국에서 독일 참모본부로 복귀했다.[10]

1904년부터 1908년까지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에서 헤레로 반란과 그 이후의 학살에 참여했다.[11] 헤레로와 워터버그 전투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그는 나중에 이 전투를 "게릴라전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단 한 번의 작전으로 그들을 패배시킬 기회"라고 불렀다.[12] 나마족이 헨드릭 비트보이의 지도 아래 독일 통치에 반기를 들었을 때에도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 남아 전투를 계속했다.[13] 야코프 모렌가를 추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06년 모렌가와 그의 부하들과의 총격전에서 왼쪽 눈에 부상을 입어 실명되었고, 가슴에도 부상을 입었다.[13] 그 후 치료와 회복을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후송되었다.[14] 레너드 모즐리는 "레토포어베크는 이 훌륭하고 환상적인 호텐토트족에게서 동아프리카에서 영국군과의 전쟁에서 그에게 매우 유용했던 부시크래프트를 배웠다."라고 썼다.[15]

1907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헤센 카셀의 제11군단 참모로 배속되었다.[16] 1909년 3월부터 1913년 1월까지는 니더작센 빌헬름스하펜''제2 해병대대'' 사령관이었다.[17] 1913년 10월, 독일 제국군은 그를 중령으로 진급시키고 독일령 카메룬 (오늘날의 카메룬과 현재 나이지리아의 일부)의 ''슐츠트루페'' (보호군)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나, 명령이 변경되어 1914년 4월 13일부터 독일령 동아프리카 (오늘날의 탄자니아 본토인 탕가니카)에 배치되었다.[18] 새로운 임지로 이동하는 동안 레토포어베크는 덴마크 작가 카렌 블릭센과 평생의 우정을 맺었다.[19]

2. 3.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복무

1904년, 레토포어베크는 대위로 진급하여 헤레로 반란과 그 이후의 학살 당시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에 배속되었다.[11]

레토포어베크는 헤레로와 워터버그 전투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그는 나중에 이 전투를 "게릴라전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단 한 번의 작전으로 그들을 패배시킬 기회"라고 불렀다.[12] 나마족이 헨드릭 비트보이의 지도 아래 독일 통치에 반기를 들었을 때, 레토포어베크는 계속 전투를 벌이기 위해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에 남아 있었다. 그는 야코프 모렌가를 추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6년 모렌가와 그의 부하들과의 총격전에서 레토포어베크는 왼쪽 눈에 부상을 입어 실명되었고, 가슴에도 부상을 입었다.[13]

그 후 그는 치료와 회복을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후송되었다.[14] 레너드 모즐리는 "레토포어베크는 이 훌륭하고 환상적인 호텐토트족에게서 동아프리카에서 영국군과의 전쟁에서 그에게 매우 유용했던 부시크래프트를 배웠다."라고 썼다. 레토포어베크는 호텐토트족 게릴라 지도자 새뮤얼 아이작을 심문하며 생존 기술에 대한 질문을 했다.[15]

2. 4. 독일 복귀 및 카메룬 부임

1907년 레토포어베크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헤센 카셀의 제11군단 참모로 배속되었다.[16] 1909년 3월부터 1913년 1월까지는 니더작센 빌헬름스하펜제2 해병대대 사령관을 역임했다.[17] 1913년 10월, 독일 제국군은 그를 중령으로 진급시키고 독일령 카메룬(오늘날의 카메룬나이지리아 일부)의 슐츠트루페(보호군)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나,[18] 명령 변경으로 1914년 4월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탄자니아 본토인 탕가니카)에 배치되었다.[18]

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포스터, 레토포어베크가 아프리카 병사들을 이끌고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레토포어베크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주츠트루페 지휘관이었다.[21] 그는 전쟁 계획은 동아프리카가 다른 전선에 비해 부차적인 곳임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많은 수의 영국군을 묶어두기로 결심했다.[20] 그는 그들을 서부 전선에서 멀리 떨어뜨려 독일의 전쟁 노력에 기여하고자 했다.[20]

그는 주도권을 잡을 필요성을 느껴 베를린과 식민지 총독 하인리히 슈네의 중립 유지 명령을 무시했다.[22] 슈네는 1885년 베를린 회의의 콩고 조약에 의존하여 중립을 달성하려 했으나, 레토포어베크는 탕가에 대한 영국군의 수륙 양용 공격을 격퇴할 준비를 했다.[22][23] 1914년 11월 2일부터 4일 동안 벌어진 탕가 전투에서 독일군은 영국군의 공격을 격퇴했다.[23] 이후 레토포어베크는 부대와 부족한 보급품을 모아 동아프리카의 영국 철도를 공격했고, 1915년 1월 19일 야신 전투에서 승리하여 소총 등 보급품을 확보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24] 그러나 이 과정에서 톰 폰 프린스 대위를 포함한 숙련된 병사들을 많이 잃었다.[25]

''Schutztruppe'' 아스카리 부대 (1914)


레토포어베크는 영국령 동아프리카 (후일 케냐, 우간다, 잔지바르)로 습격을 감행하여 요새, 철도, 통신을 목표로 삼아 게릴라전을 수행했다.[26] 그는 아스카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스와힐리어에 능통하여 아프리카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26] 그는 "우리는 모두 여기 아프리카인이다"라고 말하며 흑인 장교를 임명하기도 했다.[26] ''슈츠트루페''는 새로운 병력을 모집하여 14,000명 규모로 확장되었는데, 대부분이 아스카리였다.[26]

육지에 배치된 ''쾨니히스베르크'' 대포


1915년, 그는 루피지 강 삼각주에서 자침된 독일 순양함 의 병력과 포병을 얻었다. 막스 루프 사령관 휘하의 유능한 승무원과 육상용으로 개조된 포병은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가장 큰 표준 포가 되었다.

3. 1. 동아프리카 전역의 시작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레토포어베크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주츠트루페 지휘관이었다.[21] 그는 전쟁 계획은 동아프리카가 다른 전선에 비해 부차적인 곳임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많은 수의 영국군을 묶어두기로 결심했다.[20] 그는 그들을 서부 전선에서 멀리 떨어뜨려 독일의 전쟁 노력에 기여하고자 했다.[20]

그는 주도권을 잡을 필요성을 느껴 베를린과 식민지 총독 하인리히 슈네의 중립 유지 명령을 무시했다.[22] 슈네는 1885년 베를린 회의의 콩고 조약에 의존하여 중립을 달성하려 했으나, 레토포어베크는 탕가에 대한 영국군의 수륙 양용 공격을 격퇴할 준비를 했다.[22][23] 1914년 11월 2일부터 4일 동안 벌어진 탕가 전투에서 독일군은 영국군의 공격을 격퇴했다.[23] 이후 레토포어베크는 부대와 부족한 보급품을 모아 동아프리카의 영국 철도를 공격했고, 1915년 1월 19일 야신 전투에서 승리하여 소총 등 보급품을 확보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24] 그러나 이 과정에서 톰 폰 프린스 대위를 포함한 숙련된 병사들을 많이 잃었다.[25]

레토포어베크는 영국령 동아프리카 (후일 케냐, 우간다, 잔지바르)로 습격을 감행하여 요새, 철도, 통신을 목표로 삼아 게릴라전을 수행했다.[26] 그는 아스카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스와힐리어에 능통하여 아프리카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26] 그는 "우리는 모두 여기 아프리카인이다"라고 말하며 흑인 장교를 임명하기도 했다.[26] ''슈츠트루페''는 새로운 병력을 모집하여 14,000명 규모로 확장되었는데, 대부분이 아스카리였다.[26]

1915년, 그는 루피지 강 삼각주에서 자침된 독일 순양함 의 병력과 포병을 얻었다. 막스 루프 사령관 휘하의 유능한 승무원과 육상용으로 개조된 포병은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가장 큰 표준 포가 되었다.

3. 2. 게릴라 전술과 아스카리의 활용

레토포어베크의 전쟁 계획은 동아프리카가 다른 전선에 비해 부차적인 곳임을 알고, 최대한 많은 수의 영국군을 묶어두어 서부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20]

1914년 8월, 레토포어베크는 14개 아스카리 야전 부대에서 2,600명의 독일 국적자와 2,472명의 아프리카 병사로 구성된 군사 주둔지를 지휘했다.[21] 그는 베를린과 식민지 총독 하인리히 슈네의 명령을 무시하고, 탕가시에 대한 영국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 탕가 전투는 1914년 11월 2일부터 4일 동안 진행되었다.[23] 이후 그는 부족한 보급품을 모아 동아프리카의 영국 철도를 공격했고, 1915년 1월 19일 야신 전투에서 승리하여 소총 및 기타 보급품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톰 폰 프린스 대위를 포함한 많은 숙련된 병사들을 잃었다.[25]

레토포어베크는 영국령 동아프리카 (후일 케냐, 우간다, 잔지바르)로 습격을 감행하여 요새, 철도, 통신을 목표로 삼는 게릴라전을 전개했다.[26] 그는 ''Schutztruppe''를 14,000명 규모로 확장했는데, 대부분 아스카리였다. 레토포어베크는 스와힐리어에 능통하여 아프리카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흑인 장교를 임명하기도 했다.[26]

1915년, 그는 루피지 강 삼각주에서 자침된 독일 순양함 의 병력과 포병을 흡수하여 전력을 강화했다. 이 순양함의 포병은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사용된 가장 큰 표준 포가 되었다. 1916년 3월, 얀 스머츠 장군 휘하의 영국군과 샤를 톰뵈르 휘하의 벨기에군은 타보라 근처에서 45,000명의 병력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레토포어베크는 기후와 지형을 이용하여 영국군과 교전하며 저항을 계속했고, 1917년 10월 마히와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29] 이 전투 후, 레토포어베크는 소장(''Generalmajor'')으로 진급했다.[30]

1917년 11월 ''Schutztruppe''의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통한 응고마노 전투


1917년 11월 25일, 레토포어베크는 루부마 강을 건너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로 진입했다.[31] 그는 응고마노의 포르투갈 주둔지를 공격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32] 퀴닌을 포함한 의료 보급품을 실은 강 증기선을 점령했다.[33] 1918년 7월 나마쿠라 전투 (모잠비크 나마쿠라)를 통해 기관총과 박격포를 획득했다.[34]

레토포어베크 장군과 하인리히 슈네 식민지 총독


레토포어베크는 하인리히 슈네 총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우선시했다. 슈네 총독은 전쟁을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재앙으로 간주했다.[36] 레토포어베크는 노이 모시에서 울루구루 산맥에 이르는 예상 행군로를 따라 식량 보급 기지를 구축했다.[37]

1918년 9월 28일, 레토포어베크는 다시 루부마 강을 건너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돌아왔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북로데시아를 습격했다. 1918년 11월 13일, 휴전 이틀 후, 그는 카사마를 점령했고,[51] 카탕가로 계속 남서쪽으로 향했다. 11월 14일 아침 참베시 강에 도착했을 때, 영국 치안 판사 헥터 크로드가 휴전을 알리는 메시지를 전달했다.[52] 레토포어베크는 잠비아의 참베시 기념비로 표시된 지점에서 휴전에 동의하고, 아버콘에서 군대를 항복했다(11월 25일).[52][53] 당시 그의 군대는 독일 장교 30명, 독일 부사관 및 기타 사병 125명, 아스카리 1,168명, 그리고 약 3,500명의 운반인으로 구성되었다.[54]

다르에스살람에서 레토포어베크와 게오르크 크라우트와 함께 있는 영국 장교, 1919년 3월

3. 3. 영국군의 공세와 장기 항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레토포어베크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방위대 사령관이었다. 그는 동아프리카가 다른 전선에 비해 부차적인 곳임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많은 수의 영국군을 묶어두어 서부 전선에서 독일의 전쟁 수행에 기여하고자 했다.[20]

1914년 8월, 레토포어베크는 14개 아스카리 야전 부대에서 2,600명의 독일 국적자와 2,472명의 아프리카 병사로 구성된 군사 주둔지를 지휘했다.[21] 그는 주도권을 잡을 필요성을 느껴 베를린과 식민지 총독 하인리히 슈네의 명령을 무시했다. 슈네는 1885년 베를린 회의의 콩고 조약에 의존하여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중립을 달성하려 했다.[22] 1914년 11월 2일, 레토포어베크는 탕가시에 대한 영국군의 수륙 양용 공격을 격퇴하는 탕가 전투를 치렀다.[23] 이후 동아프리카의 영국 철도를 공격하여 1915년 1월 19일 야신 전투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24] 이러한 승리로 독일군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 외에도, 절실히 필요한 소총 및 기타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토포어베크는 쉽게 대체할 수 없는 톰 폰 프린스 대위를 포함하여 많은 숙련된 병사들을 잃었다.[25]

레토포어베크는 게릴라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부대를 보급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했다. ''Schutztruppe''는 새로운 병력을 모집하고 규모를 14,000명의 병사로 확장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아스카리였다. 레토포어베크가 스와힐리어에 능통한 것은 아프리카 병사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는 흑인 장교를 임명하고 "우리는 모두 여기 아프리카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6] 한 역사가에 따르면, "당시 어떤 백인 지휘관도 아프리카인의 가치를 전투원으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그렇게 예리하게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27]

1915년, 그는 루피지 강 삼각주에서 자침된 독일 순양함 의 병력과 포병을 얻었다. 막스 루프 사령관 휘하의 유능한 승무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육상용으로 개조된 포병은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사용된 가장 큰 표준 포가 되었다.

1916년 3월, 얀 스머츠 장군 휘하의 영국군과 샤를 톰뵈르 휘하의 벨기에군은 타보라 근처에서 45,000명의 병력으로 공세를 시작했다.[41] 레토포어베크는 기후와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조건에 따라 영국군과 교전했다. 영국군의 증원군은 레토포어베크에게 영토를 양보하도록 강요했다. 저항을 계속하면서, 레토포어베크는 1917년 10월 마히와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2,700명의 사상자를 입혔다.[29] 레토포어베크 자신은 519명이 사망, 부상 또는 실종되었으며 탄약도 거의 바닥나 철수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전투 소식이 독일에 전해진 후, 레토포어베크는 소장 (''Generalmajor'')으로 진급했다.[30]

1917년 11월, 레토포어베크는 부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철수했고, 영국군은 추격했다. 1917년 11월 25일, 그의 선봉대는 루부마 강을 건너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로 진입했다.[31] 강을 건넌 첫날, 부대는 응고마노의 새로 보충된 포르투갈 주둔지를 공격하여, 당분간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32] 그 후 퀴닌을 포함한 의료 보급품을 실은 강 증기선을 점령함으로써, 의료적 필요의 일부를 충족했다.[33] 1918년 7월 나마쿠라 전투 (모잠비크 나마쿠라)를 점령한 후 기관총과 박격포를 획득했다.[34]

|thumb|left|1917년 11월 ''Schutztruppe''의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통한 응고마노 전투]]

1918년 9월, 레토포어베크는 다시 루부마 강을 건너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돌아와 북로데시아(현재의 잠비아)를 습격했다. 1918년 11월 13일, 휴전 이틀 후, 그는 영국군이 철수한 카사마를 점령했고,[51] 카탕가로 계속 남서쪽으로 향했다. 11월 14일 아침 참베시 강에 도착했을 때, 영국 치안 판사 헥터 크로드가 백기를 들고 나타나 레토포어베크에게 남아프리카 장군 야콥 반 데벤터의 메시지를 전달하여 휴전을 알렸다.[52] 레토포어베크는 현재 잠비아의 참베시 기념비로 표시된 지점에서 휴전에 동의했다. 그는 영국군의 지시에 따라 북쪽으로 행군하여 아버콘에서 군대를 항복했고, 11월 25일에 그곳에 도착했다.[52][53] 당시 그의 군대의 잔존 병력은 독일 장교 30명, 독일 부사관 및 기타 사병 125명, 아스카리 1,168명, 그리고 약 3,500명의 운반인으로 구성되었다.[54]

|left|thumb|아프리카 예술가가 그린, 레토포어베크가 아버콘에서 영국군에 항복하는 모습]]

3. 4. 종전과 항복



1918년 11월 13일, 휴전 이틀 후, 레토포어베크는 영국군이 철수한 카사마를 점령했다.[51] 그는 카탕가로 계속 남서쪽으로 향했다. 11월 14일 아침 참베시 강에 도착했을 때, 영국 치안 판사 헥터 크로드가 백기를 들고 나타나 레토포어베크에게 남아프리카 장군 야콥 반 데벤터의 메시지를 전달하여 휴전을 알렸다.[52] 레토포어베크는 현재 잠비아의 참베시 기념비로 표시된 지점에서 휴전에 동의했다. 그는 영국군의 지시에 따라 북쪽으로 행군하여 아버콘(현재의 음발라)에서 군대를 항복했고, 11월 25일에 그곳에 도착했다.[52][53] 당시 그의 군대의 잔존 병력은 독일 장교 30명, 독일 부사관 및 기타 사병 125명, 아스카리 1,168명, 그리고 약 3,500명의 운반인으로 구성되었다.[54]

3. 5. 동아프리카 전쟁의 참상

레토포어베크의 전쟁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다른 전선에 비해 동아프리카가 부차적인 전선임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많은 영국군을 동아프리카에 묶어두어 서부 전선에서 병력을 빼내려는 것이었다.[20] 이를 위해 그는 게릴라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부대를 보급하기 위해 활용 가능한 모든 것을 사용했다.[20]

그의 전략은 초토화 전술을 포함했는데, 이는 현지 주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44] 레토포어베크는 하인리히 슈네 총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 지휘관으로서 군대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했다.[36] 그는 노이 모시에서 울루구루 산맥에 이르는 예상 행군로를 따라 식량 보급 기지를 구축하고, 인근 마을의 기아를 전쟁의 불행으로 치부했다.[37]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사망하고, 인구가 약화되어 1919년 스페인 독감 유행에 취약해졌다.[45]

독일군이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동아프리카에 가한 비극에 대해, 탕가 병원장이자 레토포어베크와 함께 했던 의학 박사 루드비히 데페는 "우리는 파괴된 들판, 약탈된 탄약고, 그리고 당장의 기아를 뒤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문화의 대리인이 아니며, 우리의 발자취는 죽음, 약탈된 마을, 그리고 우리와 적의 군대가 30년 전쟁에서 진군한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탄했다.[46]

전쟁으로 인해 많은 원주민 아프리카인이 약해진 상태가 되면서, 1918-1919년에 전 세계적인 스페인 독감 유행이 동아프리카를 휩쓸었을 때 특히 감염되기 쉬웠다.[47][48] 독일군의 무신경함과 냉혹함이 있었지만, 영국군 또는 벨기에군에 의한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의 자비의 기록도 또한 없다.[100] 그들은 아프리카인의 복지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고, 현지 영양 부족인 사람들에 대한 지원도 거의 하지 않았다.[101]

4. 전후 활동



레토포어베크는 1919년 3월 초, 영웅적인 환영을 받으며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낡은 열대복장을 한 ''슈츠트루페''의 참전용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장식된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승리 행진을 했다.[57]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대영 제국을 침략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독일 사령관이었다.[58]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정치에 참여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국방군(Reichswehr)에 남았다. 독일로 돌아온 지 14개월 후, 레토포어베크는 함부르크에서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종식시킨 군대를 지휘했다.[59] 그러나 레토포어베크는 카프 쿠데타에 연루된 후 1920년 여름 국방군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그는 브레멘에서 수입-수출 관리자로 일했다.[60][61]

1935년 육군 기동 훈련 중 귄터 폰 클루게 장군의 초청을 받은 레토포어베크 (오른쪽)


1926년 6월, 레토포어베크는 브레멘에서 1916년 12월까지 지략 대결을 벌였던 영국의 정보군단 대령 리처드 마이너트하겐을 만났다.[62] 3년 후, 레토포어베크는 런던으로 초대를 받아 얀 스머츠를 처음으로 직접 만났다. [63] 두 사람은 지속적인 우정을 맺었다. 스머츠가 1950년에 사망했을 때, 레토포어베크는 그의 미망인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64]

비슷하게 자주 인용되는 주장으로, 레토포어베크가 그의 저격수 중 한 명의 손에 죽은 영국 사냥꾼 프레데릭 셀루스의 "신사답지 못한 죽음"에 대해 사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65] 그러나 이 주장은 어떠한 현대적 증거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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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레토포어베크는 본국에 영웅으로 개선했다. 검은 말을 탄 그는, 낡은 열대용 전투복을 입은 방위대(Schutztruppede)의 귀환병 120명을 이끌고,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운터 덴 린덴을 지나 개선 퍼레이드를 했다[105]

종전 후, 레토포어베크는 독일인 병사 및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하고, 아프리카인에게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조직 만들기에 진력했다.

4. 1. 독일 귀환과 정치 참여

1919년 3월, 레토포어베크는 독일로 귀환하여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낡은 열대복장을 한 슈츠트루페(방위대/Schutztruppede) 참전용사들을 이끌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개선 행진을 했다.[57]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대영 제국을 침략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독일 사령관이었다.[58] 종전 후, 레토포어베크는 독일인 병사 및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하고, 아프리카인에게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한 조직 만들기에 진력했다.

1919년 4월, 그는 해군 소속의 근위 저격 기병 군단(Garde-Kavallerie-Schützen-Korps, 병사의 대부분은 프라이코어 ) 제1 저격 연대(Schutztruppen-Regiment 1)의 지휘관으로 전임했다. 같은 해 6월 23일, 함부르크에서 부패한 식품으로 인한 폭동( 이른바 쉴체 폭동, SülzeUnruhen)이 발생했다. 레토포어베크는 7월 1일 "군단 레토"와 함께 함부르크에 진입, 에르하르트 여단과 합류하여 진압 작전을 펼쳤다.[59]

바이마르 공화국 정치에 참여하려 했으나, 국방군(Reichswehr)에 남았다. 그러나 카프 쿠데타에 연루된 후 1920년 여름 국방군에서 해임되었다.[60][61] 그 후 그는 브레멘에서 수입-수출 관리자로 일했다.

1928년 5월부터 1930년 7월까지 군주주의 정당인 독일 국가 인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당 대표가 되어 당을 점점 더 극우로 이끌자 1930년에 당을 탈퇴했다. 이후 레토포어베크는 보수 인민당에 입당하여 1930년 독일 연방 선거에 출마했으며, 상 바이에른 선거구에서 당의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재선에는 실패했다. 그는 히틀러와 그의 운동을 강하게 불신했으며,[64] 그의 친척인 한스-위르겐 폰 블루멘탈에게 나치에 대항하기 위해 ''제강철모''와 연합을 구성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로 인해 포어베크-블루멘탈 협정이 체결되었다. 나치 정권 성립 후인 1935년, 히틀러가 영국 대사직을 제안했지만 "냉담하고 거만하게" 거절했다.[106]

4. 2. 나치 독일 시기

1935년, 히틀러파울 폰 레토포어베크에게 세인트 제임스 궁정 주재 대사직을 제안했으나, "냉담한 거만함으로 거절"했다.[67] 이 제안은 베를린 방문 중 퇴역한 리처드 마이너츠하겐 대령으로부터 나왔다.[67] 찰스 밀러는 어느 ''Schutztruppe'' 장교의 조카에게 "폰 레토가 히틀러에게 꺼지라고 말했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질문했고, 조카는 "그렇습니다. 단지 그렇게 정중하게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거절 이후, 레토포어베크는 "계속 감시를 받았고" 그의 자택 사무실은 수색을 받았다.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로 인해, 1938년 68세의 나이로 특별 임무를 위한 장군 계급으로 진급했지만, 현역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레토포어베크의 부관 중 한 명인 테오도어 폰 히펠은 동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군사 정보국인 아프베어의 특공대 부대인 브란덴부르거를 창설했다.[68]

4.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말 무렵, 레토포어베크는 빈곤한 상태였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브레멘에 있던 그의 집이 파괴되었고, 한동안 마이너트자겐과 스머츠의 친구들로부터 받은 식량 꾸러미에 의존했다.[107] 그러나 전후 경제 호황 이후 그는 다시 편안한 환경을 누렸다.[107] 1953년 그는 다르에스살람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생존한 아스카리들이 옛 행진곡 "Heia Safari!"로 그를 환영했다. 영국 식민지 관리들은 그를 완전한 군사적 예우로 환영했다.[69][108]

아프리카에서 식민주의가 종말을 고하면서, 탄자니아의 독립을 위한 여러 활동가들이 레토포어베크의 아스카리의 아들들로서 그의 조언을 구하러 왔다. 과거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백인 인구에 대한 폭력이 있었기에, 레토포어베크는 나중에 독립 탄자니아의 정부 관리가 된 그들 중 한 명에게 "백인들을 경멸하거나 그들이 저지른 실수로 그들을 굴욕시키지 말라고" 충고했다.[70]

5. 죽음과 유산

1964년, 94번째 생일을 11일 앞두고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는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서독 정부와 연방군(Bundeswehr)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두 명의 전직 아스카리를 국빈으로 초청했다.[72]

여러 연방군 장교들이 명예 경호원으로 임명되었고, 서독 국방부 장관 카이-우베 폰 하셀은 "그는 진정으로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라고 고인을 기리는 추도사를 했다.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프로른스토르프에 있는 비첼린 교회 묘지에 묻혔다.[72]

구 함부르크-옌펠트 막사의 부조 조각


잠비아 북부주에 있는 챔베시 기념비는 챔베시 기념관 또는 레토포어베크 기념관이라고도 불리며, 유럽의 휴전 3일 후인 제1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적대 행위 중지를 기념한다.


레토포어베크가 사망한 해인 1964년, 서독 ''분데스탁''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에 복무한 생존 아스카리에게 소급 급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임시 출납 사무소가 빅토리아 호의 므완자에 설치되었다. 모인 350명의 전직 군인 중 레토포어베크가 1918년에 지급한 증명서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들은 복무 증거로 낡은 제복 조각을 제시했다. 돈을 가져온 독일 은행가는 아이디어를 냈다. 각 청구인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요청하고 빗자루를 건네준 다음 독일어로 도수 훈련을 하라고 명령했다.[64] 단 한 명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73]

한때 독일 연방군, 즉 ''분데스베어''의 막사 4곳이 레토포어베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들은 레어, 함부르크-옌펠트, 브레멘, 바트제게베르크에 위치해 있었다. 최근 178개의 군사 시설이 폐쇄된 후, 남아 있는 곳은 동프리슬란트의 레어에 있는 레토포어베크 카세르네뿐이다. 전 함부르크-옌펠트 막사에는 레토포어베크와 그의 아스카리 병사들의 대형 테라코타 부조 조각이 있는 "탄자니아 공원"이 있었지만, 현재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74] 레토포어베크와 아스카리들의 또 다른 조각상은 프리드리히스루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기념관 근처 뮐렌테이히에 전시되어 있다.[75]

2010년 초, 자르루이 시의회는 레토포어베크가 1920년 카프 폭동에 연루된 것을 이유로 ''폰 레토포어베크 슈트라세''의 이름을 변경했다.[76] 하노버에서는 "레토포어베크 슈트라세"가 "나미비아 슈트라세"로 변경되었다. 부퍼탈, 쿠스하펜, 묀헨글라트바흐, 할레, 오스트리아 그라츠에는 여전히 레토포어베크 장군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77]

드라이오사우루스과 종인 ''디살로토사우루스 레토포어베키''는 레토포어베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5. 1. 유산 및 평가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뛰어난 게릴라 전술을 펼친 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102] 그의 동아프리카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이 유일하게 연합군 영토를 침공한 사례이자,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게릴라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110] 그는 낯선 땅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능력을 보였으며, 휘하의 백인 장교, 부사관, 아스카리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102]

1964년, 서독 분데스탁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에 복무한 생존 아스카리에게 소급 급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빅토리아 호의 므완자에 설치된 임시 출납 사무소에는 350여 명의 전직 군인들이 모였는데, 레토포어베크가 1918년에 지급한 증명서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복무 증거로 낡은 제복 조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돈을 가져온 독일 은행가는 각 청구인에게 빗자루를 건네주고 독일어로 도수 훈련을 하도록 명령했고, 단 한 명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64][73][112][113]

한때 독일 연방군(분데스베어) 막사 4곳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나, 군사 시설 폐쇄로 현재는 레어에 있는 레토포어베크 카세르네만 남아있다. 전 함부르크-옌펠트 막사에는 레토포어베크와 그의 아스카리 병사들의 대형 테라코타 부조 조각이 있는 "탄자니아 공원"이 있었지만, 현재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74] 레토포어베크와 아스카리들의 또 다른 조각상은 프리드리히스루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기념관 근처 뮐렌테이히에 전시되어 있다.[75]

2010년, 자르루이 시의회는 레토포어베크가 1920년 카프 폭동에 연루된 것을 이유로 ''폰 레토포어베크 슈트라세''의 이름을 변경했다.[76] 하노버에서는 "레토포어베크 슈트라세"가 "나미비아 슈트라세"로 변경되었다. 부퍼탈, 쿠스하펜, 묀헨글라트바흐, 할레, 오스트리아 그라츠에는 여전히 레토포어베크 장군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77]

드라이오사우루스과 종인 ''디살로토사우루스 레토포어베키''는 레토포어베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개인사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 레토포어베크는 1919년 마르타 발로스(1884–1953)와 결혼했다.[71] 그들은 뤼디거(1921–1940), 아른트(1922–1941), 헬로이즈(1923-2018), 그리고 우르줄라(1927)와 같이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71] 그의 두 아들 뤼디거 폰 레토포어베크와 아른트 폰 레토포어베크, 그리고 의붓아들 페터 발로스는 베어마흐트(Wehrmacht)에서 복무 중 전사했다.[71]

7. 훈장

레토포어베크는 다음과 같은 훈장과 기장을 받았다.[78]


  •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de:
  • * 적색 독수리 훈장 장교, 왕관 포함
  • * 프로이센 왕관 훈장 기사, 3급, 검 포함
  • * 푸르 르 메리트 (군사), 1916년 11월 4일; 참나무 잎 포함, 1917년 10월 10일
  • * 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
  • 바이에른 왕국/Königreich Bayernde:
  • * 막스 요제프 군사 훈장 기사
  • * 바이에른 군사 공로 훈장 기사, 4급, 검과 왕관 포함
  • 작센코부르크고타/Sachsen-Coburg und Gothade 작센알텐부르크/Sachsen-Altenburgde 작센마이닝겐/Sachsen-Meiningende 에르네스틴 공국: 작센에른스트 기사 훈장 사령관, 2급
  •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de: 뷔르템베르크 왕관 훈장 기사, 금사자 포함
  • 러시아 제국/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ru: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기사, 3급, 검 포함

참조

[1] 뉴스 Gen. von Lettow-Vorbeck Dead; World War I Guerrilla Leader https://www.nytimes.[...] 2023-11-06
[2] 간행물 A Case Study in Leadership - Colonel Paul Emil Von Lettow-Vorbeck https://apps.dtic.mi[...] 2023-11-05
[3] 학위논문 When Elephants Clash: A Critical Analysis of Major General Paul Emil Von Lettow-Vorbeck in the East African Theater of the Great War https://apps.dtic.mi[...] Defense Technical Information Center 2003
[4] 서적 Guerilla: Colonel von Lettow-Vorbeck and Germany's East African Empire https://archive.org/[...] Macmillan
[5]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6]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7]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8]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9]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10]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11]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12]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13]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14] 서적 The Great War in Africa
[15]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16]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17]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18]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19] 서적 The Great War in Africa
[20]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21] 서적
[22]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23]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24]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25] 서적 African Kaiser
[26] 서적 The Meinertzhagen Mystery
[27] 서적 Battle for the Bundu, The First World War in East Africa
[28] 학위논문 They Walk Through The Fire Like The Blondest German – African Soldiers Serving the Kaiser in German East Africa 1888–1918 McGill University, Montreal
[29] 서적
[30] 서적
[31] 문서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World War One
[35] 서적
[36] 문서 Miller, p. 41.
[37] 문서 Miller, p. 236.
[38] 문서 Hoyt, pp. 89–90
[39] 문서 Hoyt, p. 119.
[40] 문서 Farwell, p. 276.
[41] 문서 Louis, Great Britain and Germany's Lost Colonies 1914–1919, p. 74.
[42] 문서 Miller, p. 291.
[43] 문서 Miller, p. 237.
[44] 문서 The Boers in East Africa: Ethnicity and Identity
[45] 문서 Warfare in World History
[46] 문서 Ferguson, Empire, p. 253.
[47] 문서 Farwell, p. 354.
[48] 문서 Miller, p. 329.
[49] 문서 Hoyt, p. 171.
[50] 서적 Tip and Run: The untold tragedy of the Great War in Africa Weidenfeld and Nicolson 2007
[51] 간행물 The Evacuation of Kasama in 1918 http://www.nrzam.org[...] 2007-03-07
[52] 간행물 The Chambeshi Memorial http://www.nrzam.org[...] 2007-05-18
[53] 문서 Lettow-Vorbeck, My Life
[54] 문서 Haupt, Deutschlands Schutzgebiete in Übersee 1884–1918, p. 154.
[55] 문서 Miller, p. 327.
[56]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57] 문서 Farwell, pp. 355–356.
[58] 문서 Article 17 of the Armistice did not require his "surrender" but simply "evacuation of all German forces operating in East Africa."
[59] 문서 Miller, p. 331
[60] 문서 Lettow Vorbeck. My Life pp. 142ff
[61] 문서 Farwell, p. 356.
[62] 문서 Garfield, p. 164.
[63] 문서 Garfield, p. 178.
[64] 문서 Farwell, p. 357.
[65] 웹사이트 Frederick Selous http://www.enotes.co[...] enotes.com 2011-12-27
[66] 간행물 German Historical Institute London Bulletin Volume XXIX, No. 2 https://www.ghil.ac.[...] 2019-03-02
[67] 문서 Miller, p. 331
[68] 문서 Lefèvre, Brandenburg Division, pp. 17–29.
[69] 문서 This trip was sponsored by the German news magazine Stern.
[70]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Caliber 2017
[71] 서적 African Kaiser: General Paul von Lettow-Vorbeck and the Great War in Africa, 1914-1918 https://books.google[...] Caliber/[[Berkeley Books]] ([[Penguin Random House]]) 2021-06-19
[72] 서적 'Kolonialheld für Kaiser und Führer. General Lettow-Vorbeck – Mythos und Wirklichkeit' Ch. Links, Berlin 2006
[73] 문서
[74] 간행물 Briefly Noted: A monument under lock and key: Seeking Germany's colonial lieux de mémoire http://www-personal.[...] "[[Heldref Publications]] (Helen Dwight Reid Education Foundation/[[Taylor & Francis]])" 2009-08-15
[75] 웹사이트 Lettow-Vorbeck und seine Askari https://www.panorami[...]
[76] 뉴스 Stadtrat beschließt neue Straßennamen http://www.saarbruec[...] Saarbrücker Zeitung 2010-05-03
[77] 뉴스 Lettow-Vorbeck-Straße hat ausgedient http://www.suedkurie[...] Südkurier 2012-10-25
[78] 웹사이트 Paul Emil von Lettow-Vorbeck http://prussianmachi[...] 2020-10-29
[79] 웹사이트 Lettow-Vorbeck: Der deutsch-ostafrikanische Imperativ (1984) https://www.imdb.com[...]
[80] 문서 총독의 입장은, 유럽의 식민지 보유국이 해외의 영토를 유럽의 전쟁으로부터 분리해 중립으로 유지한다는 1885년의 콩고 법에 입각하고 있었다.
[81] 문서 톰 폰 프린스는 스코틀랜드인의 아버지와 독일인의 어머니를 가지고 있었고, 그와 렛트우=폴베크는 카셀 사관학교의 클래스메이트였다. 그는 최종적으로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정착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 대위로서 현역 근무에 불려 돌아와, 제13아스카리 중대 및 제7・제8저격 중대(Schützenkompagnie, 주로 독일인 이민자의 자식으로 구성되었다. 제8은 기승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폰 프린스는 그 영웅적 행동으로부터, 얼마 안 되어 아스카리들에게 "Bwana Sakarani"(난폭자)라고 별명을 붙여졌다.
[82] 문서
[83] 문서 Battle for the Bundu
[84] 문서 독일 제국 육군에 있어서 소장은 여단을 지휘하는 계급
[85] 문서
[86] 문서
[87] 웹사이트 The Evacuation of Kasama in 1918 http://www.nrzam.org[...] The Northern Rhodesia Journal 2007-03-07
[88] 웹사이트 The Chambeshi Memorial http://www.nrzam.org[...] The Northern Rhodesia Journal 2007-03-18
[89] 서적 Deutschlands Schutzgebiete in Übersee 1884-1918
[90] 문서 휴전 협정 제17조는 그의 "항복"을 요구하고 있지 않고, 단순히 "동아프리카에서 작전하는 독일군의 전 철퇴"라고만 쓰여 있다
[91] 문서
[92] 문서
[93] 문서
[94] 문서
[95] 문서
[96] 서적 The Great War in Africa
[97] 서적 Great Britain and Germany’s Lost Colonies 1914-1919
[98] 문서
[99] 문서
[100] 서적 Empire
[101] 문서
[102] 문서
[103] 문서
[104] 문서 1914년부터 1920년에 걸친 연합국 혹은 식민지 정부의 문헌의 거의 모두는 프로파간다이거나, 혹은 독일이야말로 "… 바로 아프리카 개척의 정점을 (단순한 전장으로서 사용함으로써)" 범한 것에 죄가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있으려고 이들 식민지를 독일에 돌려주는 일은 없다"라고 하는 풍조를 창출하기 위해서 생각해 내진 것이다
[105] 문서
[106] 서적 Miller
[107] 서적 Miller
[108] 잡지 Stern
[109] 서적 Miller
[110] 서적 Hoyt
[111] 간행물 Brandenburg Division
[112] 서적 Farwell
[113] 서적 M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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