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루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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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드루 4세는 17세기 후반 콩고 왕국의 군주로, 여러 차례 왕위에 올랐다. 알바루 8세의 서손으로 태어나, 1695년 이복 형에게 선위받아 즉위한 후, 1703년 퇴위했다가 1715년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는 킴파 비타가 이끄는 안토니안 운동에 대처했으며, 콩고 왕국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페드루 4세는 콩고 왕위가 경쟁 가문들 사이에서 돌아가며 계승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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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루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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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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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마니콩고 |
재위 기간 | 1695년 12월 1일 ~ 1718년 2월 21일 |
이전 통치자 | 알바루 10세 |
다음 통치자 | 마누엘 2세 |
출생일 | 1666년 |
사망일 | 1718년 2월 21일 (52세) |
사망 장소 | 상살바도르 |
왕조 | 아구아 호사다 |
본명 | 페드루 아폰수 누사무 아 음벰바 |
생애 | |
출생 | 1666년 4월 13일 콩고 왕국 상살바도르 |
사망 원인 | 홍역으로 병사 |
가계 | |
아버지 | 피에르 마뉘엘 페드루 |
친척 | 알바루 8세(조부), 알바루 10세(이복 적형), 마누엘 1세(이복 적제), 피에르 콩스탕탱 다 실바(이복 서제), 앙드레 1세(5촌 종숙부) |
배우자 | 왕비 1명, 후궁 1명 |
자녀 | 1남 3녀 (그 중 장녀, 차녀 둘은 어린 시절 병사) |
종교 | |
종교 | 콩고 토속 신앙 → 로마 가톨릭 (세례명: 베드로) |
2. 생애
페드루 4세는 콩고 왕국의 군주 알바루 8세의 서손(庶孫)으로, 처음에는 왕위 계승 가능성이 낮았다. 그는 17세기 후반 내전으로 분열된 왕국에서 새로운 왕족 가문인 아구아 로사다 가문을 일으켰다. 1695년 이복형 알바루 10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처음으로 군주가 되었다. 이후 잠시 왕위에서 물러났다가 1715년 다시 복위하여 1718년 사망할 때까지 콩고 왕국을 통치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알바루 8세의 서손(庶孫)이며, 알바루 8세의 서차남(庶次男)인 Pierre Manuel Pedro|피에르 마뉘엘 페드루pt의 서차남으로 태어났다. 페드루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17세기 후반 콩고 왕국의 경쟁 가문이었던 킴판주 가문과 킨라자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아구아 로사다 가문을 세운 인물이다.그는 오늘날의 앙골라 세라 두 칸다 지역에 있는 키방구 산으로 피신한 왕족들 사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669년 할아버지인 알바루 8세가 사망한 후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이후 형제가 사망하자 왕위를 요구했으나, 수도인 므반자콩고(상 살바도르)에서 정식 대관식을 치르지 못해 완전한 정통성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1695년 12월 9일, 이복형인 알바루 10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군주로 즉위하였다.
2. 2. 왕위 계승 및 통치
알바루 8세 군주의 서손(庶孫)이자, 알바루 8세의 서차남 피에르 마뉘엘 페드루(Pierre Manuel Pedro, 1650~1731)의 서차남으로 태어났다. 1669년 친할아버지인 알바루 8세가 세상을 떠난 후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695년 12월 9일, 이복 형인 알바루 10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즉위 이듬해인 1696년 5월 13일, 이복동생인 피에르 콩스탕탱 다 실바(Pierre Constantin da Silva, 1674~1709)를 왕위를 이을 동생, 즉 왕태제(王太弟)로 책봉하였다. 이후 1703년 2월 1일, 왕태제 실바에게 보위를 선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지내던 중, 1715년 1월 5일 주앙 2세로부터 다시 보위를 받아 12년 만에 복위하였다. 복위한 다음 해인 1716년 2월 29일에는 다니엘 1세의 막내 서자인 마누엘 왕자(Manuel)를 후계공(後繼公)으로 삼았다.
그러나 1718년 1월 3일 갑작스럽게 홍역에 걸렸고, 병세가 위중해지자 닷새 뒤인 1월 8일 마누엘 후계공에게 보위를 선위하고 다시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후 병상에서 투병하다 홍역 발병 약 1개월 만인 1718년 2월 21일, 향년 52세로 서거하였다.
3. 콩고 왕국 재건 노력
페드루 4세는 콩고 왕국의 왕위 계승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했다. 그는 전 여왕 아나 아폰수 데 레앙과 카푸친 선교사 프란체스코 다 파비아의 도움을 받아 협상을 시도했지만, 경쟁자들 사이의 깊은 갈등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18세기 초에 이르러, 많은 백성들은 페드루 4세가 수도 므반자콩고(상 살바도르)를 되찾아 왕국을 재건하는 데 충분히 힘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불만을 품었다. 이러한 여론에 따라 페드루 4세는 1694년, 키방구에서 군대를 이끌고 상 살바도르로 향했고 그곳에서 사제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왕위를 노리던 주요 경쟁자 중 한 명인 렘바, 킨샤사의 주앙 2세가 즉시 위협해오자 페드루 4세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 몇 년 동안 산에 머물러야 했다.
1700년 이후, 페드루 4세는 옛 수도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식민지 개척자 그룹을 파견했다. 한 그룹은 그의 집사인 마누엘 크루즈 바르보사가 이끌었고, 다른 그룹은 한때 페드루 4세와 잠시 협력했던 경쟁자 페드루 콘스탄이뉴 다 실바(키벵가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짐)가 이끌었다. 이 시기에 페드루 4세 자신도 키방구에서 수도에 더 가까운 작은 산인 에불룰루로 거처를 옮겼다.
4. 안토니안 운동과 킴파 비타
페드루 4세의 통치 기간 중, 왕국 재건에 대한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불만이 고조되었다. 특히 18세기 초, 많은 사람들은 페드루 4세가 콩고 왕국의 옛 수도인 므반자콩고(상 살바도르)를 재점령하고 왕국을 통합하는 데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는 1694년 므반자콩고로 진군하여 왕위에 오르려 했으나 경쟁자의 위협으로 물러났고, 1700년 이후에는 부하들을 보내 수도 재점령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페드루 4세 자신은 수도에서 가까운 에불룰루 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도 재건을 위해 파견된 이들 사이에서 천년왕국 운동이 발생했다. 여러 예언자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킴파 비타(베아트리스 킴파 비타)라는 여성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안토니즘 운동을 이끌었다. 그녀는 자신이 성 안토니오에게 사로잡혔다고 주장하며, 페드루 4세의 결단력 부족을 강하게 비판했다.
페드루 4세는 킴파 비타의 영향력이 커지자, 측근인 카푸친회 신부 베르나르두 다 갈로의 조언에 따라 그녀를 이단으로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를 실행하지 못했고, 그 사이 킴파 비타는 페드루 4세의 영향권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므반자콩고 재건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페드루 4세의 옛 부하였던 페드루 콘스탄티뉴 다 실바(키벵가)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이는 페드루 4세와 페드루 콘스탄티뉴 다 실바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페드루 4세는 킴파 비타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706년 7월, 그는 자신의 거점인 에불룰루 근처에서 킴파 비타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킴파 비타 사후에도 안토니즘 운동의 불씨는 남아있었으나, 페드루 4세는 1709년 므반자콩고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페드루 콘스탄티뉴 다 실바와 그의 지지자들을 최종적으로 격파함으로써 운동을 진압했다. 같은 해, 그는 경쟁자였던 주앙 2세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5. 통치 후반과 유산
페드루 4세는 콩고 왕국의 왕위 계승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여러 시도에 참여했다. 이는 구 여왕 아나 아폰수 데 레앙과 카푸친 선교사 프란체스코 다 파비아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으나, 경쟁자들 사이의 뿌리 깊은 반목으로 인해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다.
18세기 초, 백성들 사이에서는 페드루 4세가 수도 므반자콩고(상 살바도르)를 재점령하고 왕국을 재건하는 데 소극적이라는 불만이 커져갔다. 이러한 여론을 의식하여 페드루 4세는 1694년, 키방구에서 군대를 이끌고 므반자콩고(상 살바도르)로 진격하여 사제로부터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곧바로 주요 경쟁자인 렘바의 주앙 2세로부터 위협을 받자 므반자콩고(상 살바도르)에서 물러나 몇 년간 산지에 머물렀다.
1700년 이후, 페드루 4세는 옛 수도를 되찾기 위해 두 그룹의 개척자들을 파견했다. 한 그룹은 그의 집사 마누엘 크루즈 바르보사가 이끌었고, 다른 그룹은 한때 그와 동맹을 맺었던 경쟁자 페드루 콘스탄티뉴 다 실바(키벵가)가 이끌었다. 페드루 4세 자신도 키방구에서 수도 므반자콩고(상 살바도르)와 더 가까운 작은 산인 에불룰루로 거처를 옮겼다.
5. 1. 사후
그의 후손 가운데 서얼 고손자인 알바루 은동구는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콩고 왕국 제56대 마니콩고로 재위하였고, 또 다른 서얼 고손자인 페드루 5세는 1859년부터 1891년까지 콩고 왕국 제57대 마니콩고로 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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