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튼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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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이튼 호 사건은 1808년, 영국 해군 프리깃함 페이튼 호가 네덜란드 국기를 위장하고 나가사키에 침입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영국은 네덜란드 선박 나포를 시도하며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원들을 납치하고 식량 등을 요구했으며, 이에 일본은 굴욕적으로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나가사키 봉행 마쓰다이라 야스히데가 할복하고, 나베시마 번이 책임을 져야 했다. 페이튼 호 사건은 일본의 쇄국 정책 강화, 서양 학문 연구의 시작, 나베시마 번의 근대화 노력 등 일본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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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튼 호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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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튼 호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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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일시 | 1808년 |
발생 장소 | 나가사키 |
관련 국가 | 영국 일본 |
사건 개요 | |
주요 인물 | 토머스 워든 (페이튼 호 함장) 마쓰다이라 야스타다 (나가사키 부교) |
주요 내용 | 영국 군함 페이튼 호가 나가사키항에 침입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을 습격, 약탈 및 협박 사가번 군사를 동원하여 영국군에 대치 |
영향 | 분카의 흑선 사건의 발단 마쓰다이라 야스타다, 미우라 요모쓰 등 관련자 처벌 해안 방어 강화령 발령 |
배경 | |
당시 상황 | 나폴레옹 전쟁 중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적대 관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상관이 존재, 정보 교류의 거점 영국 해군의 동양 진출 및 통상 요구 |
페이튼 호의 목적 | 네덜란드 상관의 재물 약탈 러시아 함대 정보 수집 일본과의 통상 가능성 탐색 |
사건 전개 | |
페이튼 호의 침입 |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하고 나가사키항에 접근 데지마 상관원들을 생포, 정보를 얻으려 함 |
협박과 약탈 | 마쓰다이라 야스타다에게 식량과 물자 요구 거부 시 나가사키 시내를 파괴하겠다고 협박 사가번 군사 동원 지연으로 영국군의 요구 수용 |
영국군의 철수 | 식량과 물자를 보급받고 나가사키항에서 철수 일본 정부에 사과하지 않음 |
사건의 영향 | |
막부의 대응 | 마쓰다이라 야스타다 등 관련자 처벌 해안 방어 강화령을 내려 해안 경비 강화 외국 선박에 대한 경계 강화 |
외교적 영향 | 영국과의 관계 악화 외국 선박에 대한 배척 강화 |
후대의 평가 | 막부의 무능함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 해안 방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계기 |
2. 배경
1641년 이후 일본은 네덜란드와 통상을 하였고, 나가사키 데지마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영국도 에도 시대 초기에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하고 대일 무역을 했으나, 1623년에 철수하였다.[1]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면서, 1793년에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점령했다. 1798년 바타비아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해산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은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네덜란드 국왕으로 임명하여, 프랑스에 의한 네덜란드(홀란트 왕국)가 성립되었다. 이 때문에 세계 각지에 있던 네덜란드의 식민지는 모두 프랑스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1]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관할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있던 바타비아(자카르타)는 여전히 구 네덜란드(프랑스) 지배 하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아시아의 제해권은 이미 영국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바타비아에서는 구 네덜란드(프랑스) 지배 하의 무역상은 중립국인 미국 국적선을 고용하여 나가사키와 무역을 계속했다.
2. 1. 일본의 쇄국 정책
1641년 이후 일본은 유럽 국가들 중 네덜란드 공화국(후의 네덜란드)만 통상을 허용하였고, 나가사키 데지마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이 설치되어 있었다.[1] 영국도 에도 시대 초기에는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하고 대일 무역을 했으나, 네덜란드와의 영업 경쟁에서 패배하여 경영 부진으로 1623년에 나가사키 히라도의 상관을 폐쇄했고, 그 후 재개를 시도했으나 에도 막부에 의해 거절당했다.[1] (히라도 영국 상관은 영국(히라도) 상관 참조)[1]2. 2. 유럽의 정세 변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면서, 1793년에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점령했고, 네덜란드 총독 빌럼 5세는 영국으로 망명했다.[1] 1798년 네덜란드 현지 혁명파에 의해 바타비아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해산되었다.[1] 1806년 나폴레옹은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네덜란드 국왕으로 임명하여, 프랑스인에 의한 네덜란드(홀란트 왕국)가 성립되었다.[1] 이 때문에 세계 각지에 있던 네덜란드의 식민지는 모두 프랑스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1]영국은 망명해 온 빌럼 5세의 의뢰로 네덜란드의 해외 식민지를 접수하기 시작했다.[1]
2. 3. 나가사키 무역 상황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면서 1793년에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점령되었고, 네덜란드 총독 빌럼 5세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네덜란드 현지 혁명파에 의해 바타비아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798년에 해산되었다. 1806년에는 나폴레옹이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네덜란드 국왕으로 임명하면서 프랑스인에 의한 네덜란드(홀란트 왕국)가 성립되었고, 세계 각지의 네덜란드 식민지는 모두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영국은 망명해 온 빌럼 5세의 의뢰로 네덜란드의 해외 식민지를 접수하기 시작했지만,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관할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있던 바타비아(자카르타)는 여전히 구 네덜란드(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 해상권은 이미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타비아의 무역상들은 중립국인 미국 선박을 고용하여 나가사키와 무역을 계속했다.
3. 사건의 전개
1808년 10월 4일(분카 5년), 벵골 총독 민토의 정책에 따라 네덜란드 선박 나포를 목적으로 영국 해군 프리깃함 페이튼 호 (플리트우드 펠류 함장[2])는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하여 국적을 속이고 나가사키로 입항했다.[1][3] 페이튼 호는 나가사키 항에 진입하여 네덜란드 상관원 2명을 납치하고, 물과 식량을 요구하며 이를 제공하지 않으면 항구 내의 일본 배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
나가사키 봉행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사가번, 후쿠오카번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나가사키 경비를 담당했던 사가번이 경비 절감을 위해 수비병을 무단으로 감축하여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국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인질 석방을 위해 영국 측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시간을 벌기 위해 소량의 물품만 제공했다.
10월 17일 새벽, 인근 오무라번주 오무라 스미마사가 번 병력을 이끌고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오무라 스미마사와 함께 페이튼 호를 억류하거나 소각할 계획을 세웠지만, 그 사이에 페이튼 호는 닻을 올리고 나가사키 항 밖으로 빠져나갔다.
3. 1. 페이튼호의 침입
1808년 10월 4일(분카 5년), 플리트우드 펠로 함장이 이끄는 영국 해군 프리깃함 페이튼호는 네덜란드 선박 나포를 목적으로 네덜란드 국기를 게양하고 국적을 속여 나가사키에 입항했다.[6]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은 관례에 따라 나가사키 봉행소 네덜란드 통역사와 함께 페이튼호를 맞이하기 위해 길드사무소 직원 고즈만(Dirk Gozeman)과 시멜(Gerrit Schimmel) 두 명을 작은 배에 태워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페이튼호에 승선하자마자 무장한 선원들에게 납치되었다.[3]
페이튼호는 네덜란드 국기를 내리고 영국 국기를 게양한 후, 네덜란드 선박을 찾기 위해 무장 보트로 나가사키 항내를 수색했다. 나가사키 봉행소는 페이튼호에 서신을 보내 네덜란드 상관원 석방을 요구했지만, 페이튼호는 물과 식량을 요구하는 답신만 보냈다.
다음 날인 10월 5일, 펠로 함장은 인질 중 한 명인 고즈만을 석방하면서 장작, 물과 음식(쌀, 야채, 고기)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며, 이를 제공하지 않으면 항구 내 일본 배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4] 인질을 잡히고 병력도 부족했던 나가사키 봉행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시간을 벌기 위해 요청된 물은 소량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다음날 제공하겠다고 속였다. 나가사키 봉행소는 음식과 음료수를 준비하여 배에 싣고, 네덜란드 상관에서 제공된 돼지와 소를 페이튼호에 보냈다. 펠로 함장은 나머지 인질인 시멜도 석방하고 출항 준비를 시작했다.[7]
3. 2. 나가사키 봉행소의 대응
1808년 10월 4일(분카 5년), 네덜란드 선박 나포를 목적으로 영국 해군 프리깃함 페이튼 호가 나가사키에 입항하자, 나가사키 봉행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네덜란드 상관원 석방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페이튼 호는 물과 식량을 요구하는 답신만 보냈을 뿐이었다.[6]네덜란드 상관장(카피탄) 헨드릭 데프는 나가사키 봉행소로 피난하여 교전을 피할 것을 권했다.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길드사무소 직원의 생환을 약속하는 한편, 항만 경비를 담당하는 나베시마 번, 후쿠오카번에 영국 측의 습격에 대비하고, 페이튼 호를 억류하거나 방화(放火)할 준비를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나가사키 경비를 담당하던 나베시마 번은 경비 절감을 위해 수비병을 무단으로 줄여, 실제 병력은 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에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사쓰마번, 구마모토번, 구루메번, 오무라번 등 규슈 여러 번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다음날인 16일, 페이튼 호 함장은 인질 중 한 명을 석방하고 장작, 물, 식량(쌀, 야채, 고기)을 요구하며, 이를 제공하지 않으면 항구 내 일본 배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 병력이 부족했던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하며, 시간을 벌기 위해 요청된 물은 소량만 제공했다.
나가사키 봉행소는 음식과 음료수를 준비하여 페이튼 호에 보냈고,[7] 페이튼 호 함장은 나머지 인질도 석방하고 출항 준비를 시작했다.
17일 새벽, 오무라번주 오무라 스미요시가 번 병력을 이끌고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오무라 스미요시 등과 함께 페이튼 호 억류 및 방화 계획을 추진했지만, 그 사이에 페이튼 호는 닻을 올리고 나가사키 항 밖으로 빠져나갔다.
3. 3. 협상과 페이튼호의 퇴각
1808년 10월 4일, 펠로 함장이 이끄는 영국 해군 프리깃함 페이튼호는 인질로 잡은 네덜란드 상관원들의 석방 조건으로 물과 식량을 요구했다. 또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항구 내 일본 선박들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7]인질을 잡힌데다 병력도 충분하지 않았던 나가사키 봉행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량의 물만 제공하고, 나머지 물품은 다음 날 이후에 충분히 제공하겠다고 속여 시간을 벌고자 했다.
나가사키 봉행소는 식량과 음료수를 준비해 배에 싣고, 네덜란드 상관에서 제공한 돼지와 소를 페이튼호에 보냈다.[7] 펠로 함장은 나머지 인질인 시멜도 석방하고 출항 준비를 시작했다.
10월 17일 새벽, 인근 오무라번의 번주 오무라 스미요시가 번 병력을 이끌고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오무라 스미요시 등과 함께 페이튼호를 억류하거나 불태울 계획을 세웠지만, 그 사이 페이튼호는 닻을 올리고 나가사키 항을 빠져나갔다.
4. 결과
페이튼 호 사건은 인적, 물적 피해 없이, 인질로 잡혔던 네덜란드인들도 무사히 석방되면서 평온하게 해결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여러 방면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4. 1. 일본의 피해와 책임 추궁
준비된 병력도 없이 침입한 배의 요구에 쉽게 응할 수밖에 없었던 나가사키 봉행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나라의 체면을 욕보였다고 스스로 할복했다. 마음대로 병력을 줄였던 나베시마 번 가로 등 몇 사람도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 막부는 나베시마 번이 나가사키 경비 책임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11월에는 영주 나베시마 나오나오에게 100일 폐문을 명령했다.[8]4. 2. 외국 선박 입국 절차 강화
페이튼 호 사건 이후, 도후와 나가사키 봉행 마가리 부치케이 등이 임시 점검 체제 개혁을 실시하였고, 비밀 신호기를 이용하는 등 외국 선박의 입국 절차가 강화되었다.[8] 그 후에도 영국 선박의 출현이 잇따르자, 막부는 1825년에 이국선 타격령을 발령하게 된다.4. 3. 영국에 대한 인식 변화와 서양 학문 연구
이 사건 이후,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영국은 침략성을 가진 위험한 국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막부는 이러한 인식 변화에 대응하여 조직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809년에는 모토키 쇼에이 등 6명의 나가사키 통역관에게 영어 학습을 명했다. 그 뒤 네덜란드어 통역관 전원에게 영어, 러시아어 연수를 명령했다.[8]모토키 등은 네덜란드 상인 얀 코크 블롬호프로부터 영어를 배웠다.[8] 1811년에는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인 《암액리아흥학》(諳厄利亜興学) 10권이 완성되었고, 1814년에는 막부의 명에 의해 본격적인 사전인 《암액리아어림대성》(諳厄利亜語林大成) 15권이 완성되었다.[8]
4. 4. 나베시마 번의 근대화 노력
이 굴욕을 맛본 나베시마 번은 다음 대 나베시마 나오마사 아래에서 근대화에 진력하여, 메이지 유신 때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8]4. 5. 국제 관계적 관점: 진보적 평가
페이튼 호 사건 당시 일본은 국제 정세 변화에 대한 정보력이 부족하여 사건에 무기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8] 이는 국제 관계에서 정보의 중요성과 외교 역량 강화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영국을 '영국 오랑캐'로 칭하며 침략성을 가진 위험한 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막부는 1809년 모토키 쇼에이 등 6명에게 나가사키를 통해 영학 수련을 명하는 등 조직적인 연구를 시작했다.[8] 1811년에는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인 암액리아흥학|암에쿠리아쿄가쿠영어 10권이 완성되었고, 1814년에는 막부의 명에 의해 본격적인 사전 암액리아어림대성|암에쿠리아고린타이세영어 15권이 완성되는 등,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8]4. 6. 네덜란드의 상황
영국이 자와섬을 점령하고 바타비아와 연락이 두절되자,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원들은 본국의 지원 없이 장기간 고립되었다. 상관장 헨드릭 두프는 나폴레옹 제국 몰락 후까지 7년간 일본에 머물렀다.[8]참조
[1]
문서
ギリシャ神話의 등장인물 「パエトーン」에 유래
[2]
문서
英雄으로서 고명한 [[エドワード・ペリュー]]의 차남
[3]
웹사이트
フェートン号事件(フェートンごうじけん)とは
https://kotobank.jp/[...]
2018-10-10
[4]
문서
2016年9月
[5]
서적
薩摩と西欧文明: ザビエルそして洋学、留学生
https://books.google[...]
ザビエル渡来450周年記念シンポジウム委員会図書出版 南方新社
2000
[6]
문서
영웅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펠로]]의 둘째 아들
[7]
문서
[[도진야시키]]의 중국인의 중국인에게서 구입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일본 내에서 육식의 습관이 없어서 고기(특히 저장용 고기)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당시의 군함에 신선한 식육의 공급원으로 산 돼지 등이 실리는 것은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8]
서적
薩摩と西欧文明: ザビエルそして洋学、留学生
http://books.google.[...]
ザビエル渡来450周年記念シンポジウム委員会図書出版 南方新社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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