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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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가성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류조지 가문과 나베시마 가문이 통치하던 거점이었다.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 다카노부가 사망한 후, 가신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실권을 장악했다. 1602년 혼마루 개축을 시작하여 1611년 나베시마 가쓰시게 시대에 성이 완성되었으며, 1726년 대화재로 천수각을 포함한 혼마루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후 니노마루에 주요 건물을 건립하여 번청으로 삼았으나, 1835년 화재로 혼마루에 주요 건물을 재건했다. 1874년 사가의 난으로 성의 주요 건물이 소실되었고, 현재는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사가성 혼마루 역사관과 사가성 공원 등 주변 시설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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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성(사가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위해 축조한 성으로, 가토 기요마사 등이 축성을 담당했으며, 전쟁 후 해체되어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일부 석벽이 복원되어 있다.
사가성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사가성 |
다른 이름 | 물에 잠긴 성 |
로마자 표기 | Saga jō |
한자 표기 | 佐賀城 |
가나 표기 | さがじょう |
한글 표기 | 사가 성 |
별칭 | 류조지 사가 성 무라나카 성 사카 성 에이 성 시즈미 성 거북이 등껍질 성 |
위치 | 사가, 사가 현, 일본 |
![]() | |
구조 | |
유형 | 평산성 |
구조 | 윤곽 계곽 복합식 평성 |
천수 | 4중 5층 (현존하지 않음) |
역사 | |
건축 | 1602년-1611년 |
건축자 | 나베시마 씨 |
재건 | 1728년 1836년 2004년 |
주요 개축 | 나베시마 나오마사 |
사용 시기 | 에도 시대 |
철거 | 해당 정보 없음 |
현재 상태 | 일부 원형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고, 일부는 2004년에 재건됨 |
소유권 | 해당 정보 없음 |
일반 공개 여부 | 공개 |
통제 주체 | 해당 정보 없음 |
주둔군 | 해당 정보 없음 |
현재 사령관 | 해당 정보 없음 |
사령관 | 해당 정보 없음 |
점령자 | 해당 정보 없음 |
전투 | 사가의 난 (1874년) |
사건 | 해당 정보 없음 |
폐성 연도 | 1871년 (메이지 4년) |
문화재 | |
문화재 | 국가 중요 문화재 (샤치노몬 및 속루) 사가 현 사적 사가 시 중요 문화재 (어좌의 방) |
현존 및 재건 | |
현존 | 샤치노몬 및 속루 이축된 어좌의 방 석벽 해자 토루 |
재건 | 혼마루 고텐 일부 (사가 현립 사가 성 혼마루 역사관) |
좌표 | |
좌표 | 33°14′44.69″N 130°18′7.65″E |
2. 역사
사가성은 원래 무로마치 시대에 규슈 북부의 작은 지역을 지배했던 료조지씨가 무라나카 성을 거성으로 삼았던 것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개축 및 확장한 것이다. 센고쿠 시대 류조지 가문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규슈 북부에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 가문의 당주 류조지 다카노부가 시마즈·아리마 연합군에 패사하면서 류조지 가문 내의 실권은 가신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장악하였다.
1569년 오토모 소린의 공격에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활약으로 이마야마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료조지 다카노부의 아들 마사이에, 그 아들 타카후사의 거성이 되었다.
1585년 나오시게는 무라나카 성의 개축 계획을 세웠지만, 주군 류조지 마사이에의 거절로 실행되지 않았다. 이 계획은 에도 막부 정권하에 사가 번주로 인정받은 1602년에 혼마루 개축을 시작하면서 실행되었다. 1611년 그의 아들 나베시마 가쓰시게가 번주로 재임 시 성이 완성되었다. 내측 해자의 폭은 80m에 이르고, 혼마루에는 5층의 천수각이 건립되었다. 1615년 일국일성령이 반포되자, 나베시마 가문의 거성이었던 하스이케 성은 폐성되었다.
1726년 대화재로 천수각 이외의 혼마루 건물 대부분이 전소되었다. 이후 어전 등 주요 부속건물을 성의 니노마루에 건립하여 1728년 완성, 사가 번의 번청으로 삼았다. 1835년 화재로 니노마루의 어전 등이 소실되자, 혼마루에 주요 건물을 재건하고 정무를 혼마루에서 보게 된다. 현존하는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는 1838년에 완성된 건물이다. 천수각은 1726년 대화재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1874년(메이지 7년) 사가의 난으로 사가 성은 반란군의 거점이 되었고, 성의 주요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샤치 문에는 당시의 탄흔이 남아있다.[2] 이후 사가 성터에는 학교, 기상대, 현청 등 공공시설이 들어섰다.
1953년(쇼와 28년)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는 사가 현 중요문화재로, 1957년(쇼와 32년)에는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때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는 《사가 성 샤치 문 및 쓰즈키 망루 1동》으로 등재되었다.
1958년(쇼와 33년) 19세기 건물로 추정되는 고자노마(御座間)가 미즈가에오키 공원(水ヶ江大木公園)으로 이축되어 시민회관으로 사용되었다. 2001년(헤이세이 13년) 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4년(헤세 16년) 혼마루 어전 복원과 함께 현재 위치로 이축되었다. 혼마루 어전은 사가 성 혼마루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6년(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2. 1. 중세
1569년(에이로쿠 12년), 오토모 소린은 고라산(筑後国)의 요시미다케성에 본진을 두고, 사가 평야의 북쪽 길에서 대군을 투입하여 공격, 사가 료조지성 주변은 모두 불타고 성은 궁지에 몰렸다. 료조지 다카노부는 일단 오토모와 화평했지만, 1570년(겐키 원년), 다시 소린은 대군으로 사가를 공격해왔다. 다시 궁지에 몰린 료조지군은 사가 료조지성에 농성했다. 궁지에 몰린 료조지군의 나베시마 나오시게(후의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야습으로 이마야마 진에서 오토모군 총대장 오토모 친사다를 討死시켰다(이마야마 전투). 이후, 료조지 다카노부의 아들 마사이에, 그 아들 타카후사의 거성이 된다.그 중세의 사가 료조지성의 소재지와 실태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많다. 헤이세이 21·22년도에 사가시 교육위원회에 의해 발굴된 서쪽 오몬 부근에서 중세 사가 료조지성과 관련된 대형 건물 2동과 해자 등의 유구와 유물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사가 료조지성역의 료조지씨 관저 터에 대해서는 와카나스 회관과 사가 니시 고등학교 운동장이 그 추정지로 생각되고 있다.
사가성의 위치는 원래 무로마치 시대에 규슈 북부의 작은 지역을 지배했던 료조지씨의 통제하에 있던 요새화된 마을이었다. 1584년 료조지 다카노부가 시마즈씨와 아리마씨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그의 가신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성을 장악하였다. 나오시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맹을 맺었고, 임진왜란 기간 동안 명성을 얻었는데, 이때 저명한 성 건축가 가토 기요마사와 훗날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친분을 쌓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나베시마씨는 히젠국의 영지를 인정받았고, 나오시게의 아들 나베시마 카츠시게가 사가번의 초대 다이묘가 되었다. 나오시게는 1602년에 도쿠가와 막부의 승인을 얻어 성 재건 공사를 시작했고, 공사는 카츠시게에 의해 1611년에 완료되었다. 원래 건물은 80미터 너비의 해자로 둘러싸인 5층의 천수각을 포함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해자는 돌담이 아닌, 내부 요새를 가릴 만큼 높은 흙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흙벽에는 추가적인 은폐를 위해 소나무와 녹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이것이 성의 별명이 된 이유이다.
2. 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류조지 가문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규슈 북부에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 가문의 당주 류조지 다카노부가 시마즈·아리마 연합군에 패사하였다. 이를 계기로 류조지 가문 내의 실권은 가신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장악하였다.1585년 나오시게는 무라나카 성의 개축 계획을 세웠지만, 주군 류조지 마사이에의 거절로 실행되지 않았다. 이 계획이 이행된 것은 에도 막부 정권하에 사가 번주로 인정받은 1602년이 되던 해였다. 이 해 성의 혼마루가 개축되었고, 1611년 그의 아들 나베시마 가쓰시게가 번주로 재임 시 성이 완성되었다. 내측 해자의 폭은 80m에 이르고, 혼마루에는 5층의 천수각이 건립되었다. 1615년 일국일성령이 반포되자, 이미 나베시마 가문의 거성이었던 하스이케 성은 폐성되었다.
성은 몇 번의 화재가 있었고, 특히 1726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천수각 이외의 혼마루 건물 대부분이 전소되었다. 이에 따라 어전 등 주요 부속건물을 성의 니노마루에 건립하여 1728년 완성되었다. 이 니노마루 건물을 사가 번의 번청으로 삼았다. 그러나, 1835년 일어난 화재로 다시금 니노마루의 어전 등 건물이 소실되자, 혼마루에 주요 건물을 재건하고 정무를 성의 혼마루에서 주관하게 된다. 현존하는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는 이 무렵인 1838년에 완성된 건물이다. 천수각은 1726년 대화재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2. 3. 메이지 시대 이후
1874년(메이지 7년) 사가의 난으로 사가 성은 반란군의 거점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성의 주요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샤치 문에는 당시의 탄흔이 남아있다.[2] 이후 사가 성터에는 학교, 기상대, 현청 등 공공시설이 들어섰다.1953년(쇼와 28년)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는 사가 현 중요문화재로, 1957년(쇼와 32년)에는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때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는 《사가 성 샤치 문 및 쓰즈키 망루 1동》으로 등재되었다.
1958년(쇼와 33년) 19세기 건물로 추정되는 고자노마(御座間)가 미즈가에오키 공원(水ヶ江大木公園)으로 이축되어 시민회관으로 사용되었다. 2001년(헤이세이 13년) 이 건물은 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4년(헤세 16년) 혼마루 어전 복원과 함께 현재 위치로 이축되었다. 혼마루 어전은 사가 성 혼마루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6년(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2. 3. 1. 사가의 난과 에토 신페이
1874년(메이지 7년) 사가 번의 번사였던 에토 신페이를 중심으로 사가의 난이 일어났고, 사가 성은 잠시나마 이들 반란군의 거점이 되었다.[2] 이 난으로 성의 주요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샤치 문에는 당시 전투의 상흔이 남아 있다.3. 구조
사가성은 사가현 사가시 중심부에 있는 윤곽식과 제곽식이 혼합된 평성이다. 성 주변은 여러 겹의 해자로 둘러싸여 방어되었으며, 공격을 받을 때 성의 주요 부분을 제외한 지역을 수몰시켜 적의 공격을 막는 구조로 되어 있어 "시즈미 성(沈み城: 잠수 성)"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
메이지 시대 초기에 일어난 사가의 난으로 성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는 남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2] 성터에는 현청, 방송국, 미술관, 박물관 등 공공시설이 건립되어 사가현의 정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2]
원래 무로마치 시대에 료조지 가문의 통제하에 있던 요새화된 마을이었으나, 1584년 료조지 다카노부가 시마즈와 아리마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가신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성을 장악했다.[1]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맹을 맺고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친분을 쌓았다.[1]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젠국 영지를 인정받았고, 그의 아들 나베시마 가쓰시게가 사가번의 초대 다이묘가 되었다.[1] 1602년 도쿠가와 막부의 승인을 얻어 성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고, 1611년에 완료되었다.[1]
해자는 돌담이 아닌 높은 흙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흙벽에는 소나무와 녹나무가 심어져 성을 은폐했다.[1] 1726년 화재로 성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궁궐 부분은 외곽에 복원되어 에도 시대 동안 사가번 정부의 중심지가 되었다.[1] 1835년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나베시마 나오마사에 의해 건물이 재건되었다.[1]
메이지 유신 이후 성은 지역 정부 사무소로 사용되었으나, 1874년 사가의 난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버렸다.[1] 이후 성터는 법원, 현청 사무소, 학교 등으로 사용되었고, 1953년에 성문 중 하나가 사가현 중요문화재로, 1957년에는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성의 주요 부분이 복원되어 현재 사가성 역사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 성 복원 건축물이다.[1] 2006년에는 일본 성 기금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1]
3. 1. 천수각
1611년 나베시마 가쓰시게가 번주로 재임하던 시절, 그의 아버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계획에 따라 사가 성이 완성되었다. 이때 내측 해자의 폭은 80m에 달했고, 혼마루에는 5층의 천수각이 건립되었다.[1] 1726년에 일어난 대화재로 천수각을 포함한 혼마루 건물 대부분이 소실된 이후, 천수는 재건되지 않았다.[1]3. 2. 건축물
메이지 시대 초기에 일어난 사가의 난으로 성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만 남아 현존하고 있다. 이들 문과 망루는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2]성터에는 현청, 합동청사, 방송국, 미술관, 박물관, 초중고등학교, 공원 등 공공시설이 건립되어 있으며, 사가현의 정치, 경제 중심지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후젠의 전국 다이묘 료조지 가문이 축성한 무라나카성이 게이초 시대에 나베시마 가문에 의해 확장 및 개수를 거쳐 현재의 사가성 모습이 되었다.
사가성은 사가시 중심부에 위치하며, 성곽 구조는 윤곽 계단식 복합형 평성이다. 너비 50m가 넘는 해자는 석축이 아닌 토루로 축조되었다. 평탄한 땅에 위치하기 때문에 성내가 보이지 않도록 토루에는 소나무와 녹나무가 심어져 있다. 성이 수목 속에 잠긴 듯 보이는 것과, 예전에는 여러 겹의 외해자를 두르고, 공격을 받았을 때는 다부세강에서 보낸 많은 물로 본마루 이외를 수몰시켜 적의 침공을 방어하는 구조였던 것으로부터, 「'''잠긴 성(沈み城)'''」이라고도 불려 왔다.

1874년(메이지 7년) 에토 신페이를 중심으로 한 사가의 난이 일어나 사가성은 이 반란군에 일시 점령되었다. 이 전투에서 샤치 문, 샤치 문 쓰즈키 망루, 본마루 고텐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잃었다. 샤치 문에는 당시의 탄흔이 현재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4. 현대의 사가 성
메이지 유신 이후, 사가 성은 지역 정부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74년 사가의 난으로 에토 신페이와 그의 추종자들이 성을 점령하면서 성내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버렸다.[1]
이후 성터는 법원 건물과 현청 사무소 부지로 사용되었고, 1883년에는 소학교가 되었다. 1953년에 성의 현존하는 문 중 하나가 사가현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57년에는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로 승격되었다.[1]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성의 주요 부분이 복원되었다. 현재는 사가성 역사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 성 복원 건축물이다. 2006년에는 일본 성 기금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1]
사가 성은 『하가쿠레』의 저자 야마모토 츠네토모가 일했던 성이기도 하다.[1]
현재 성터는 사가 성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사가 현립 사가 성 혼마루 역사관이 개관되어 있다. 주변에는 동해자와 토루가 복원되어 당시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니노마루에는 사가 현청, 합동청사, 방송국, 미술관, 박물관, 초중고등학교 등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어 사가 현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2]
사가번의 기와 제작업자 하야타 히데오키는 사가 성의 샤치 문 등 건축물에 기와를 납품했다.[2] 옛날 사가 성 내에 초등학교(현재는 이전)가 있었으며, 이 학교 졸업생으로는 B&B의 시마다 요우시치가 있다.[2] 인근의 사가 현립 사가니시 고등학교는 "에이죠"를 통칭으로 사용하며, 야구부 유니폼에도 "EIJO"로 표기되어 있다.[2]
4. 1. 교통
JR 규슈 사가역에서 나카지마행 버스를 타고 《샤치 문앞》(鯱の門前)에서 내리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4. 2. 주변 시설
참조
[1]
서적
佐賀市史
佐賀市史編さん委員会
1978-00-00
[2]
문서
佐賀城鯱ノ門及び続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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