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선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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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선만노는 금나라 말기, 몽골 제국 침입기에 활동한 인물로, 금나라 장수에서 시작하여 대진국을 건국하고 동하국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1206년 남송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금나라 장수로 중용되었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요동 선무사로 임명된 후 독자적인 행동을 하며 완안철가를 살해했다. 이후 대진국을 건국했으나 몽골의 공격으로 동하국을 세우고 고려와 관계를 맺었지만, 몽골과의 관계 악화로 고려를 침략했다. 결국 1233년 몽골에 의해 동하국이 멸망하면서 포선만노는 생포되었고,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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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선만노 | |
|---|---|
| 기본 정보 | |
![]() | |
| 칭호 | 황제 |
| 왕조 | 대진국 |
| 재위 기간 | 1214년 - 1233년 |
| 수도 | 남경 |
| 휘 | 포선만노(蒲鮮万奴) |
| 자 | 알 수 없음 |
| 시호 | 알 수 없음 |
| 묘호 | 알 수 없음 |
| 출생년도 | 알 수 없음 |
| 사망년도 | 알 수 없음 |
| 부 | 알 수 없음 |
| 모 | 알 수 없음 |
| 황후 | 알 수 없음 |
| 능묘 | 알 수 없음 |
| 연호 | 천태(天泰) : 1215년 - 1223년 대동(大同) : 1224년 - 1233년 |
| 생애 | |
| 주요 활동 | 야호령 전투 참가 경략안무사 역임 |
2. 금나라의 장수 시절
포선만노의 출신은 사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원사』 권119 열전6 탑사전 등에서는 "'''완안만노'''"라고도 표기되어 있어[4] 금나라 황실과 관련된 가문 출신으로 추정된다.[5] 이는 『귀잠지』 권5의 "[금의]종실의 만노", "동평왕세가"의 "완안만노, 금의 내족(內族)이다"라는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6]
2. 1. 남송과의 전쟁
포선만노가 처음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206년(태화 6년/병인년)으로, 개희용병으로 침공해 온 남송의 장수 황보빈을 격퇴하기 위해 금나라-남송 국경 지대에 파견되었다.[2][7] 평장의 복산규의 부하에 있던 "부통상구국사" 포선만노는 완안새불, 완안달길불 등과 함께 7천 기병을 이끌고 남송군을 야습하여, 완안새불은 중군을, 완안달길불은 좌익군을, 포선만노는 우익군을 각각 이끌고 남송군을 크게 격파했다.[7] 남송군이 궤주하자 포선만노는 진양로로 가는 길을 막아 퇴로를 차단했고, 금나라 군은 진택에서 남송군을 포위하여 참수 2만 급, 말과 가축 1천여 마리를 얻는 대승을 거두었다.[7] 이 대승을 계기로 완안새불과 포선만노는 각각 작위를 올랐고,[8] 이후 포선만노가 금나라의 장수로 중용되는 계기가 되었다.[2]2. 2. 요동 선무사 부임
1211년(대안 3년/신미), 몽골군의 침공을 받은 금나라는 야호령 전투에서 패배하여 장성 이북의 통제력을 잃었다. 요동에서는 거란인 야율유가가 금군을 격파하고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자립했다. 금나라 조정은 동북로(東北路) 초토사(招討使)의 관아를 타오얼허 유역의 태주에서 동쪽 숭가리강 유역의 자오저우로 옮기고[9], 야율유가 토벌을 위해 완안철가와 포선만노를 파견했다.[10] 포선만노는 완안철가와 달리 함평부에 주둔했으며[11], 처음에는 북쪽 자오저우의 완안철가, 남쪽 함평의 포선만노가 중간의 야율유가를 협공하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2]그러나 완안철가의 군대가 강해지는 것을 꺼린 포선만노는 기병 2천 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독자적으로 태주의 병사 3천 명과 호구를 함평으로 옮기려 했다.[11] 포선만노의 속셈을 눈치챈 완안철가는 이를 거부했지만, 포선만노가 선무사(宣撫使)로 승격되자 원군을 보내지 않은 죄로 살해되었다.[11] 포선만노의 요동 파견, 함평등로(咸平等路) 선무사 임명은 1214년(정우 2년/갑술)의 일로, 몽골 측 사료인 『성무친정록(聖武親征錄)』에도 기록되어 있다.[13][14]
3. 대진국 건국
1215년(정우 3년/을해년) 정월,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을 받아 포선만노가 주둔하고 있던 동경요양부(현재의 랴오양 시)를 공략하여 요동 일대를 평정했다. 포선만노는 야율유가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해 그해 3월 심주·광녕(현재의 베이전 시) 방면에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20][21] 한편, 야율유가의 진영(동요)에서는 야율사불 등이 야율유가에게 반기를 들었다(후요 정권).[22]
동요의 내분을 틈타 포선만노는 독자적으로 함평부(현재의 카이위안 시), 요양부, 심주, 징주 등을 공략하여 사실상 금나라로부터 이반했고, 많은 맹안·모극이 이에 따랐다.[23] 같은 해 3월, 포선만노는 9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고려 국경에 가까운 파속로의 경계로 진군했지만, 환단이 파견한 온제한파가련에 의해 격퇴되었다.[23] 4월에는 상경회령부(현재의 아청구)를 약탈했지만, 금나라의 도통 오안발할이 이를 공격했다.[23] 또한, 별도로 5천 명의 병사를 망운역 공략에 파견했지만, 도통 오돈마화상·도통 협곡합타에 의해 삼차리에서 격퇴되었다.[23] 5월에는 도통 온제한복수에 의해 포선만노의 병사가 대녕진에서 공격받아 전멸했다.[23] 9월에는 포선만노 휘하의 9천 명이 의풍·탕지에 출현했지만, 환단에게 패하여 궤주했다.[23] 그러나, 같은 시기에 엄길올, 도마혼, 빈가, 출대, 답애, 안가, 불회, 활졸, 안출, 불덕, 열린의 11 맹안이 포선만노에게 귀부했다.[23]
이러한 상황에서 요동의 대부분을 평정한 포선만노는 1215년 10월, "천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대진'''(大眞)으로 정했으며, 연호를 천태로 정했다.[25][26] 그러나 이후 요동에서 야율유가의 동요와 이반한 야율사불 등의 후요의 항쟁이 격화되면서, 대진 건국으로부터 이듬해 여름 무렵까지 포선만노의 동향은 기록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27] 다만, 고려사에는 포찰이랄도가 포선만노를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어, 대진국과 금나라 잔존 부대 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28]
3. 1. 금나라와의 관계
1211년(대안 3년/신미), 몽골군의 침공을 받은 금나라는 야호령 전투에서의 참패로 장성 이북의 통제를 잃었고, 요동 방면에서는 거란인 야율유가가 금군을 격파하고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자립했다. 이에 금나라 조정은 동북로(東北路) 초토사(招討使)의 관아를 타오얼허 유역의 태주에서 동쪽의 숭가리강 유역의 자오저우로 옮겼으며[9], 이와 함께 야율유가 토벌을 위해 완안철가와 포선만노를 파견했다.[10] 이때 포선만노는 완안철가와 행동을 달리하여 함평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11], 처음에는 북쪽의 자오저우에서 완안철가가, 남쪽의 함평에서 포선만노가, 마침 그 중간에 위치한 야율유가를 협공하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2]그러나 완안철가의 군대가 강력해지는 것을 꺼린 포선만노는 기병 2천 명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고, 또한 독자적으로 태주에서 병사 3천 명과 호구를 함평으로 옮기려 했다.[11] 포선만노의 "다른 뜻"을 눈치챈 완안철가는 포선만노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포선만노가 선무사(宣撫使)로 승격되자 원군을 파견하지 않은 죄로 완안철가는 살해되었다.[11] 포선만노의 요동 파견, 함평등로(咸平等路) 선무로의 임명이 1214년(정우 2년/갑술)에 이루어진 것은 몽골 측의 사료인 『성무친정록(聖武親征錄)』에도 기재되어 있다.[13][14]
같은 해 가을 무렵, 자신에게 거스르는 완안철가를 제거한 포선만노는 오둔양 등과 함께 마침내 야율유가를 토벌하기 위해 40만으로 칭하는 대군을 이끌고 북상했다.[15] 야율유가는 포선만노 군을 귀인현 북쪽의 하천변에서 맞아 싸웠고, 격전 끝에 포선만노 군은 괴멸되어 동경요양부까지 도망쳤다.[16] 이를 받아 금나라의 선종은 11월에 포선만노·오둔양 등에게 조서를 내려 "상경(上京)·요동(遼東)"은 국가의 중요한 지역이므로 각 군은 서로 협력하여 만회하라고 명했다.[17][18][19]
3. 2. 후요와의 항쟁
1211년 (대안 3년/신미), 몽골군의 침공으로 금나라가 야호령 전투에서 패배하며 장성 이북의 통제력을 상실하자, 요동에서는 거란인 야율유가가 금군을 격파하고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자립하였다. 금나라 조정은 야율유가 토벌을 위해 완안철가와 포선만노를 파견했다.[10] 포선만노는 함평부에 주둔하며 완안철가와 다른 행동을 보였다.[11]1214년 (정우 2년/갑술), 포선만노는 자신에게 거스르는 완안철가를 제거하고, 오둔양 등과 함께 40만 대군을 이끌고 야율유가를 토벌하려 북상했다.[15] 야율유가는 귀인현 북쪽 하천변에서 포선만노 군을 맞아 싸워 격파했고, 포선만노 군은 동경요양부까지 도망쳤다.[16]
1215년 (정우 3년/을해년) 정월, 몽골의 도움을 받은 야율유가는 포선만노가 주둔하던 동경요양부를 공략하여 요동 일대를 평정했다. 한편, 야율유가의 진영(동요)에서는 야율사불 등이 야율유가에게 반기를 들었다(후요 정권).[22]
동요의 내분을 틈타 포선만노는 독자적으로 함평부·요양부·심주·징주 등을 공략하며 금나라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다. 많은 맹안·모극이 이에 따랐다.[23] 그해 3월, 포선만노는 9천 병력을 이끌고 고려 국경 근처까지 진군했으나 온제한파가련에게 격퇴당했다.[23]
이후 요동에서는 야율유가의 동요와 야율사불 등의 후요 간 항쟁이 격화되었다.[27]
4. 몽골에 복속과 배반
1215년부터 1216년에 걸쳐 후요・대진의 자립으로 요동 정세가 혼란스러워졌고, 몽골군은 이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1216년(정우 4년/병자) 7월, 무칼리가 장치를 격파하고 요서 지역 대부분을 평정했다.[29] 몽골의 압박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포선만노는 아들 테게를 인질(토르카크)로 보내 복속했다.[30] 그러나 곧 10만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해도로 근거지를 옮겨 다시 자립하였다.[31]
4. 1. 해도(海島) 시기
1216년 몽골의 압박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포선만노는 항복을 결심하고 아들 테게를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30] 그러나 포선만노는 몽골에 완전히 복속하지 않고 10만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해도"로 도망쳤다.[31] 이 "해도"는 압록강 하류 지역의 철주에 속하는 가도로 추정된다.[33] "해도"를 동해 방면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대진국 재상 왕회가 "부해에 둔거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32]5. 동하국 시대
1217년 포선만노는 해도에서 세력을 회복하여 요동 반도로 돌아와 다시 북상하여 여진족의 고향인 동북 지역을 장악하고 동하국(東夏國)을 건국했다.[48] 포선만노가 동하국을 칭하게 된 경위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요동 일대를 포기하고 동북 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것과 관련짓는 설이 유력하다.[30]
5. 1. 강역과 통치 체제
포선만노는 요동 지방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진출하여 현재의 러시아, 중국, 북한에 걸쳐 있는 동해 연안에서 흑룡강 중상류 지역을 지배했다.[45] 이 지역에서 발견된 중세 성곽 도시 유적 중 크라스노야로프스코예 성터와 성자산 산성은 각각 문헌에 나오는 '개원부'와 '남경'으로 비정된다.[46][47]『원사』에는 포선만노가 몽골에 항복했다가 다시 반역하여 동하를 칭했다는 기록이 있으며,[30][48] 이후 포선만노의 세력은 '동하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하국이라 칭하게 된 경위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요동을 포기하고 동북 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것과 관련짓는 설이 다수이다. 고려는 동하국을 '동진국'으로 불렀지만, 여기서는 '동하국'으로 통일하여 표기한다.
5. 2. 고려와의 관계
1218년(흥정 2년/무인) 12월, 포선만노는 몽골 제국에 복속되어 완안자연이 이끄는 동하국군 2만 명과 몽골군 1만 명이 연합하여 고려의 동북 국경에 나타났다. 이들은 고려에 협력하여 후요 정권을 강동성에서 멸망시킬 것을 요청했다.[51] 고려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협력했고, 이후 몽골 제국과 고려는 "형제의 관계"를 맺었다.[52]1219년(흥정 3년/기묘)부터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을 시작하면서 1220년대 동북아시아에는 동하국, 고려, 요동의 금나라 잔존 세력이 병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고려는 몽골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매년 사신을 파견하기로 했으며, 사신은 반드시 동하국을 통과하도록 정해졌다.[53]
그러나 1224년(정대 원년/갑신) 정월, 동하국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몽골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교역 관리소 설치를 요구했다.[54] 1225년(정대 2년/을유) 정월, 몽골 제국 사신 고여 등이 귀로에 도적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56] 몽골, 동하국, 고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후 포선만노는 자주 고려를 침공했는데, 1225년 8월에는 삭주를,[57] 1227년(정대 4년/정해) 9월에는 정주, 장주를,[58] 1228년(정대 5년/무자) 7월에는 장평진을[59] 공격했다. 1229년(정대 6년/기축) 2월, 동하국에서 강화 사신을 보냈지만 협상은 실패했고,[60][61] 다시 고려 영토인 화주가 약탈당했다.[62]
6. 동하국의 멸망
1231년 몽골군의 고려 침공이 진행되는 동안, 1232년 삼봉산 전투를 거치며 금나라 침공은 대세가 기울어졌다. 오고타이 칸을 포함한 몽골군 본대는 북상하여 몽골 고원으로 귀환하려 했다. 1233년(계사년) 몽골 제후들의 논의(쿠릴타이) 끝에, 오고타이의 왕자 구유크와 왕족 알치다이를 주장으로 하는 정식 원정군이 포선만노에게 파견되었다.[72]
6. 1. 몽골의 침공 배경
1226년 금나라가 요동행성의 제부게에게 포선만노 토벌을 명령하면서, 몽골 제국도 이 두 세력을 위험하게 여겼다.[63][64][65]칭기스칸 사망 다음 해인 1228년, 몽골은 "금나라 평장 제부게가 요동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과 "포선만노가 개원에서 자립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리타이 장군을 요동에 파견했다.[65] 이 군대는 칭기스칸 시대부터 몽골 제국에 헌신한 거란인 장군들이 주축이 되었다.[67] 1229년 사리타이는 요동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제부게를 패주시켰다.[65][68]
그러나 사리타이는 동하국으로 진격하는 대신 1231년 고려로 진군하여 "항복하면 동하로 떠나겠다"고 말했다.[68][69][70] 요동→고려→동하 순서로 진군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고려가 반기를 들면서 1232년 사리타이는 전사했다.[71]
6. 2. 최후
1233년(계사년) 몽골 제국은 오고타이 칸의 아들 구유크와 왕족 알치다이를 주장으로 하는 정식 원정군을 포선만노에게 파견하였다.[72] 구유크와 알치다이, 그리고 과거 요서를 휩쓸었던 무칼리의 손자 타슈 등이 이끄는 군단은 그해 9월에 동하국을 침공했고, 동하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포선만노는 생포되었지만,[4] 그 후의 소식은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포선만노가 몽골 제국에 질자(質子, 투르카크)로 보낸 테게 코르치는 계속해서 몽골의 유력 무장으로 중용되었다.참조
[1]
서적
39頁
[2]
서적
19頁
[3]
논문
pp.451-452
[4]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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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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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史』巻113列伝51完顔賽不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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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史』巻122列伝60忠義2烏古論徳升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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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史』巻103列伝41完顔鉄哥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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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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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史』巻103列伝41奥屯襄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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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史』巻14宣宗本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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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史』巻14宣宗本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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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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