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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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견은 338년에 태어나 385년에 사망한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의 황제이다. 그는 명재상 왕맹을 등용하여 내치를 다지고 화북을 통일하는 등 전진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동진 정벌 실패와 그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몰락했다. 부견은 관대한 통치 정책을 펼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지나친 민족 융합 정책과 비수대전 패배는 그의 몰락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는 요장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으며, 사후 장렬천왕으로 시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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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현은 중국 십육국 시대 후조의 승려로, 불교 경전의 오류와 누락을 안타깝게 여겨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나 불교 서적을 구하고 귀국 후 불경 번역에 매진하며 중국 불교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인도 여행기는 《불국기》라는 제목으로 남아 당시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관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 385년 사망 - 침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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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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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대진 천왕 (大秦天王) |
휘 | 부견 (苻堅) |
자 | 영고 (永固) 문옥 (文玉) |
묘호 | 세조 (世祖) |
시호 | 선소황제 (宣昭皇帝) (전진) 장렬천왕 (壯烈天王) (후진) 문소황제 (文昭皇帝) (후량) |
생년 | 337년 |
몰년 | 385년 10월 16일 |
아버지 | 부웅 |
어머니 | 구 귀비 |
배우자 | 구황후 전연의 청하공주 |
자녀 | 부비 외 6명의 아들과 4명의 딸 |
가문 | 부 (포)씨 |
왕조 | 전진 |
통치 | |
재위 기간 | 357년 – 385년 |
연호 | 영흥 (永興): 357년 – 359년 감로 (甘露): 359년 – 364년 건원 (建元): 365년 – 385년 |
전진에서의 지위 | |
전진의 군주 | 357년 – 385년 |
전임자 | 부생 |
후임자 | 부비 |
동해 공 | 354년 – 357년 |
2. 생애
357년 왕맹을 등용하여 함께 반정을 일으켜 부생을 폐위하고 천왕에 즉위하였다. 즉위 초 부견은 왕맹을 중용하여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였다. 왕맹은 부견의 총애를 바탕으로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전진의 국력을 크게 성장시켰다.[74]
366년 동진의 형주를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농서를 정벌하는 등 적극적인 외정에 나섰다. 369년 환온이 북벌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자 전연에서 구원군을 청했는데, 부견은 왕맹의 진언에 따라 구원군을 파견하였다.[74]
북벌군에 타격을 받은 전연이 쇠약해지자 부견은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준비하였다. 전연의 왕족 모용수가 망명해 오자 이를 받아들였으며, 369년 말에 전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74]
370년 왕맹이 전연을 멸망시키자 부견은 왕맹을 사지절(使持節)·도독관동6주제군사(都督關東六州諸軍事)에 임명하여 전연의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다.[74] 372년에는 왕맹을 승상으로 삼아 국정 전반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왕맹의 보좌 아래 전진의 국력은 크게 성장하였다.
373년에는 동진의 양주와 익주를 정복하였으며, 전량과 대나라 등의 여러 지방 세력들도 복속하여 번국이 되었다.[74]
376년에는 전량과 대나라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였다. 동진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고구려와는 우호관계를 맺고 372년에는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74] 고구려에 최초로 불교가 전파되었다.
375년 왕맹이 병사하였다. 378년 동진의 양양을 공격하여 1년 동안의 포위전 끝에 점령하였으며, 회수 일대에도 침입하였다.[74]
부견은 복속된 세력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펼쳤는데, 장안 인근에 선비족과 강족을 이주시켜 살도록 했으며, 복속된 세력의 지도자에게 이들을 이끌게 하였다. 또한 관중의 저족을 화북의 여러 곳으로 이주시켜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74]
383년 부견은 천하 통일을 목표로 여광에게 서역을 정벌하도록 하는 한편,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96만 명의 대군을 징집하여 동진을 공격하였다. 부견의 원정군은 동진 국경 전체에 걸쳐 공격해 들어갔으나, 부견이 직접 참여한 비수(淝水) 방면의 전선에서 배반으로 인해 크게 패배하여 전군이 패주하였다. (비수대전)[74]
부견은 모용수가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의 보호를 받으며 낙양에 도착하여 병력을 수습하였는데, 모용수는 독립할 생각으로 부견을 설득하여 하북으로 향하였다. 부견이 장안에 도착하였을 때, 관중 지역에서는 부견이 이주시켰던 선비족과 강족 지도자인 모용홍, 걸복국인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견은 요장을 파견하여 모용홍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으며,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한 요장도 반란을 일으켰다. 하북 지역에서는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고 업을 지키고 있던 서장자 부비를 공격하였으며, 각지의 군현들은 후연과 전진의 세력 사이에서 이합집산하였다.
이후 요장은 후진, 걸복국인은 서진, 모용충은 서연, 양정은 구지 등을 건국하여 화북 각지가 분열되었다. 하남 지역은 동진이 점령해 나갔다.
부견은 주로 서연·후진 등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며, 385년 서연이 장안을 함락하자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고, 요장의 선양 요구를 거절했다가 결국 살해당했다.[74]
2. 1. 초기 생애
337년 부웅(苻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명민하여 부홍(苻洪)의 총애를 받았다. 등에 '초부응왕(草付應王)'이라는 붉은 글씨가 써 있어 부홍은 이를 보고 성을 포(蒲)씨에서 부(苻)씨로 고치기도 했다.[74] 354년 부웅이 전사하자 부견이 동해왕의 작위를 이어받았다.[74]원래 부견의 조부인 부홍(苻洪)은 략양군(略陽郡)을 근거지로 하는 저족의 추장이었으나, 328년에 부족민을 거느리고 후조(後趙)에 귀순하였고, 그의 일족은 후조의 수도인 예(鄴)로 이주하였다. 그 때문에 부견은 예성(鄴城) 내 영귀리(永貴里)라는 마을에서 338년에 태어났다.
349년 5월, 부홍은 후조에서 이반하여 방두(枋頭)(현재 하남성 학벽시 준현의 남동쪽)를 거점으로 독자 행동을 하게 되었으나, 부견을 포함한 일족은 아직 예(鄴)에 남겨진 상태였다. 같은 해 12월, 숙부인 부건(苻健)을 따라 부견 등 일족은 기회를 봐서 예성에서 탈출하였다. 그리고 관문을 돌파하여 방두로 도망쳐 부홍과 무사히 합류하였다.
350년, 부홍은 대도독(大都督)·대장군(大將軍)·대단우(大單于)·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며 명확하게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의 성을 ‘蒲’에서 ‘苻’로 개명하였다. 부견 등 일족도 이에 따라 성을 바꾸었다.
팔은 무릎 아래까지 길었다고 전해지며, 눈에는 보라색 빛이 서려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조부인 부홍에게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져 ‘견두(堅頭)’라고 불리며 매우 총애를 받았다. 7세에 이미 총명하다는 소문이 높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 처신은 규범에 따랐다. 또한 항상 부홍의 곁을 시중들며, 그의 행동과 태도에서 그의 의도를 간파하여 기회를 놓치는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부홍은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이 아이의 용모는 훌륭하고, 그 자질은 뛰어나다. 이것은 보통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8세 때에는 가학(家學)을 배우기 위해 스승에게 배우고 싶다고 청했다. 이 말을 들은 부홍은 “너는 융적(戎狄)의 이류(異類)(이민족을 뜻함. 자신이 한족이 아님을 자조적으로 말한 것)이고, 우리는 대대로 술꾼 부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금 학문을 구하려 하다니!”라며 크게 기뻐하며 이를 허락했다고 한다.
부견의 초기 생애 관련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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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337년 또는 338년 |
출생지 | 예성(鄴城) 내 영귀리(永貴里) |
아버지 | 부웅(苻雄) |
어머니 | 고황태후(苟皇后) |
조부 | 부홍(苻洪) |
성씨 변경 | 포(蒲)씨에서 부(苻)씨로 변경 (350년) |
작위 계승 | 동해왕(東海王) (354년) |
2. 2. 즉위와 개혁
357년 왕맹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부생을 폐위하고 천왕에 즉위하였다. 즉위 초 부견은 왕맹을 중용하여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였다. 왕맹은 부견의 총애를 등에 업고 법을 엄하게 적용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전진의 국력을 크게 성장시켰다.6월, 정변 이후 신하들은 모두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부견에게 즉위할 것을 요청했다. 부견은 백성들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음을 우려하여 난색을 표했으나, 여러 차례 간곡한 요청에 따르기로 결정하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다만, 황제라는 칭호는 사용하지 않고 대진천왕(大秦天王)을 칭했다. 태극전(太極殿)에서 즉위식을 마치고, 전국에 대사(大赦)를 내리고 영흥으로 개원(改元)했다.
아버지 부웅(苻雄)을 문환황제(文桓皇帝)로 추존하고, 어머니 구씨(苟氏)를 천왕태후(天王太后)로, 부인 구씨(苟氏)를 천왕후(天王后)로, 아들 부홍(苻宏)을 천왕태자(天王太子)로 삼았다. 형 부법(苻法)을 사지절(使持節)·시중(侍中)·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승상(丞相)·록상서사(録尚書事)에, 종조(從祖)인 우광록대부(右光禄大夫) 영안공(永安公) 부후(苻侯)를 태위(太尉)에, 종형(從兄)인 진공(晉公) 부류(苻柳)를 차기대장군(車騎大将軍)·상서령(尚書令)에 임명했다. 또한 부법을 동해공(東海公)에, 동생 부융(苻融)을 양평공(陽平公)에, 부쌍(苻雙)을 하남공(河南公)에, 아들 부비(苻丕)를 장락공(長楽公)에, 부휘(苻暉)를 평원공(平原公)에, 부희(苻熙)를 광평공(廣平公)에, 부예(苻叡)를 거록공(鉅鹿公)에 봉했다 (부견 자신이 황제가 아닌 천왕을 칭했기 때문에, 부생 시대에 왕이었던 자들을 모두 공(公)으로 강봉(降封)했다).
이위(李威)를 위장군(衛将軍)·상서좌복사(尚書左僕射)에, 양평로(梁平老)를 우복사(右僕射)에, 강왕(强汪)을 영군장군(領軍将軍)에, 구등(仇騰)을 상서(尚書)에 임명하고, 그들에게 인선(選)을 맡겼다. 석보(席寶)를 승상장사(丞相長史)·행태자잠사(行太子詹事)에, 여파루(呂婆樓)를 사례교위(司隷校尉)에, 왕맹을 중서시랑(中書侍郎)에 임명했다. 부생의 측근으로 함께 정치를 어지럽혔던 중서감(中書監) 동영(董榮)[4]·조소(趙韶)를 비롯한 20여 명을 주살하고, 부생에게는 려(厲) (“살육무고”, “폭역무친”, “벽한무례” 등의 의미)라는 악시(惡諡)를 내렸다. 동생 부융은 문무에 재능이 있었기에, 부견은 그를 중용하여 국가의 중대한 일은 함께 논의하게 되었다.
8월, 권익(權翼)을 급사황문시랑(給事黄門侍郎)에, 설찬(薛讃)을 중서시랑에 임명했다. 왕맹과 설찬에게 국가의 기밀을 맡겼다.
9월, 부생에 의해 주살되었던 어준(魚遵)·뢰약아(雷弱兒)·모귀(毛貴)·왕타(王墮)·양릉(梁楞)·양안(梁安)·단순(段純)·신로(辛牢) 등 과거 국가의 중신들을 원래의 관직에 복귀시키고 예를 갖춰 개장(改葬)하며, 그 자손들을 재능에 따라 등용했다.
부견의 치세 초, 왕맹 외에도 여러 고급 고문들이 있었다. 그의 형제인 부파(苻法)와 양평공(楊平公) 부융, 아들인 창래공(昌樂公) 부비, 그리고 그의 어머니인 구황태후(苟皇太后)의 애인인 이위(李威)가 그들이었다. 이위의 지원으로 왕맹의 지위는 점점 중요해져 결국 재상급의 지위에 올랐다. 특히 358년경 새해 무렵, 부파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구황태후가 부파를 자살하게 강요했을 때 그러했다. 대부분 디족(氐族) 출신인 고위 관료들은 종종 왕맹을 질투했지만, 왕맹은 부견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과의 갈등에서 항상 승리했다. 부견의 지원을 받은 왕맹은 전국에 법치를 확립했고, 부견이 사면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국 황제의 존경받았으나 부패한 매부인 강덕(強德)을 처형하기도 했다. 이 시기 제국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통치되었다고 전해진다. 부견은 또한 부생 치세의 잔혹한 법률과 사치스러움을 없애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또한 관리들에게 유능한 사람들을 추천하도록 장려하고, 그들이 추천한 사람들이 직무를 잘 수행했는지에 따라 포상하거나 벌을 주었다. 따라서 전진(前秦)의 관리들은 모두 매우 유능하고 책임감 있었다고 전해진다.
2. 3. 화북 통일
366년 동진의 형주를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농서를 정벌하는 등 적극적인 외정에 나섰다.[74] 369년 환온이 북벌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자 전연에서 구원군을 청했는데, 부견은 왕맹의 진언을 따라 구원군을 파견하였다.[74]북벌군에 타격을 받은 전연이 쇠약해지자 부견은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준비하였다.[74] 전연의 왕족 모용수가 망명해 오자 이를 받아들였으며, 369년 말에 전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74]
370년 왕맹이 전연을 멸망시키자 부견은 왕맹을 사지절(使持節)·도독관동6주제군사(都督關東六州諸軍事)에 임명하여 전연의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다.[74]
373년 동진의 양주와 익주를 정복하였으며, 전량과 대나라 등의 여러 지방 세력들도 복속하여 번국이 되었다.[74]
376년 전량과 대나라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였다.[74]
2. 4. 통치 정책과 한계
부견은 복속된 세력에 대해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선비족과 강족을 장안 인근에 이주시켜 살도록 했으며, 복속된 세력의 지도자에게 이들을 이끌게 하였다. 또한 관중의 저족을 화북의 여러 곳으로 이주시켜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74]375년에 왕맹이 병사한 후[74], 부견은 제국 통일을 위한 원정을 계속 수행하였다. 이러한 원정은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제국과 백성의 자원을 고갈시켰고, 군대를 지치게 했다. 또한, 초기에는 검소한 생활로 알려졌던 부견은 궁궐 설계에 다소 사치스럽게 돈을 쓰기 시작했다. 더욱이, 왕맹이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관료들의 청렴성과 능력 유지라는 부분은 무시된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 기록에서 허위 정부 보고서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82년 전진은 유주(幽州, 현재 베이징, 톈진, 허베이 북부), 청주(青州, 현재 산둥 중부와 동부), 기주(冀州, 현재 허베이 중부), 병주(并州, 현재 산시) 등에서 대규모 메뚜기떼 피해를 입어 실패로 끝난 구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기록은 역설적으로 유주를 제외한 이들 주에서 농작물 수확량이 풍부했고, 메뚜기가 삼과 콩 식물에는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상당히 불가능한 시나리오이며, 이는 정부 관리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주의 상황을 정직하게 보고하지 않고 부견과 고위 관료들을 기쁘게 하는 보고서만 작성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왕맹 사후 부견이 모든 것을 직접 감독해야 한다고 느끼고 너무 많은 업무에 압도되었기 때문일 수 있는데, 그가 376년에 발표한 칙령에서 업무량 때문에 머리카락의 절반이 하얗게 되었다는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
2. 5. 비수대전과 몰락
375년 왕맹이 병사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 통일을 목표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96만 명의 대군을 징집하여 동진을 공격하였다. 부견의 원정군은 동진 국경 전체에 걸쳐 공격해 들어갔으나, 부견이 직접 참여한 비수(淝水) 방면의 전선에서 배반으로 인해 크게 패배하여 전군이 패주하였다. (비수대전)[74]부견은 모용수가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의 보호를 받으며 낙양에 도착하여 병력을 수습하였는데, 모용수는 독립할 생각으로 부견을 설득하여 하북으로 향하였다. 부견이 장안에 도착하였을 때, 관중 지역에서는 부견이 이주시켰던 선비족과 강족 지도자인 모용홍, 걸복국인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견은 요장을 파견하여 모용홍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으며,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한 요장도 반란을 일으켰다. 하북 지역에서는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고 업을 지키고 있던 서장자 부비를 공격하였으며, 각지의 군현들은 후연과 전진의 세력 사이에서 이합집산하였다.
이후 요장은 후진, 걸복국인은 서진, 모용충은 서연, 양정은 구지 등을 건국하여 화북 각지가 분열되었다. 하남 지역은 동진이 점령해 나갔다.
부견은 주로 서연·후진 등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며, 385년 서연이 장안을 함락하자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고, 요장의 선양 요구를 거절했다가 결국 살해당했다.[74]
3. 인물 및 평가
부견은 337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부웅(苻雄), 어머니는 고황후(苟皇后)이다. 할아버지 부홍(苻洪)은 디족 수령으로 후조의 시호(石虎) 황제 휘하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 부홍 사후, 삼촌 부건(苻健)이 관중 지역을 정복하고 351년에 전진(前秦)을 건국했다. 부견의 아버지 부웅은 이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동해왕(東海王)에 봉해졌고, 354년 부웅이 죽자 부견이 동해왕 작위를 계승했다. 부견은 효성이 지극하고 식견이 넓으며, 지식과 능력이 뛰어나 명성을 얻었다.
부견은 사촌 형 부생(苻生)의 통치 시기에 군사적 책임을 맡았다. 357년 강족 수령 요향(姚襄)이 전진을 공격했을 때, 부견은 요향을 물리치고 처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요향의 동생 요창(姚萇)은 항복했는데, 부견의 간청으로 목숨을 건졌다.
부생은 폭력적이고 잔혹한 통치를 펼쳐 관리들을 죽이는 일이 잦았다. 많은 관리들이 부견에게 부생을 몰아낼 것을 설득했고, 부견은 왕맹(王猛)과 친구가 되어 부생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부생이 부견과 그의 형 부법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이 새어나오자, 부견은 즉시 행동에 나서 부생을 죽이고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황제 대신 "천왕(天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아버지 부웅을 황제로, 어머니 고씨를 황태후로 추존했다. 아내 고씨는 황후로 책봉되었다.
부견은 배신자를 믿고 나라를 멸망시킨 인물로 평가받았으나,[71] 20세기 이후에는 여러 민족을 통합하려는 이상주의자로 재평가되기도 한다.[73]
3. 1. 업적
부견은 학문을 장려하고 내정을 중시하여 국력 신장과 문화 발전에 힘썼다. 명재상 왕맹의 보좌를 받아 중상주의에서 중농주의로 전환하고, 관개 시설 복구와 농업 기반 정비에 힘썼다. 호적 제도의 확립과 도로 정비를 추진하고, 관료 기구를 정비하고 법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4] 출신이나 옛 원한에 얽매이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민족 간의 대립이 심했던 중국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화합책을 잇달아 채택했다. 국내에서는 학교를 부흥시켜 학문이 번성하고, 풍속을 정비하고, 도로와 숙소를 정비하여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되어, 이 시대에는 드문 평화를 실현했다.외정에서는 전연, 전구지, 전량, 대 등 명문 국가들을 모두 멸망시켜 화북 통일을 달성했고, 나아가 동진 영토인 양주(梁州)와 익주(益州)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국내에서는 동족과 여러 부족의 반란이 잇달았지만, 모두 진압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 서역을 비롯한 각지에서 조공이 이루어졌고, 그 세력은 크게 떨쳤다.
그러나 신하들의 잇따른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강남 정벌을 감행하여, 총병력이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건강(建康)에 접근했으나, 패수의 전투에서 역사적인 대패를 당하여 그 꿈은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전진에 복속했던 여러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전진의 세력권은 순식간에 화북 전토에서 장안 주변과 하북(河北) 일부라는 지방 정권으로 몰락했다. 부견은 이들 반란 세력의 진압을 목표로 응전했지만, 장안의 경제는 파괴되어 심각한 식량 부족에 빠졌고, 결국 장안을 탈출하여 재기를 도모하려 했으나, 요장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3. 2. 성격 및 용모
팔은 무릎 아래까지 길었고, 눈에는 보라색 빛이 서려 있었다고 전해진다.[1]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 처신은 규범에 따랐다.[1] 도량이 넓고 효성이 지극했으며,[1] 박학다식하고 재주와 재능이 많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있었다.[1]3. 3. 평가
전통적으로 부견은 배신자를 믿고 나라를 멸망시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71]남송의 사가 이도(李燾)는 『육조통감박의(六朝通鑑博議)』에서 부견을 상황 판단을 잘못하여 공격해서는 안 될 때 공격한 어리석은 자라고 혹평했다.[72]
20세기 이후, 부견은 여러 민족을 통합하려는 이상주의자로 여겨지게 되었고, 진순신(陳舜臣)이나 백양(柏楊)과 같은 소설가들은 그의 이상을 높이 평가했다.[73]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부웅(苻雄) | 동해경왕(東海景王), 부견(317~355)의 형제, 문환제(文桓帝)로 추존됨 |
어머니 | 고황태후(苟皇后) | |
배우자 | 고황후(苟皇后) | 357년 책봉 |
주요 후궁 | 장씨 | |
무용준(慕容儁)의 딸 | ||
자녀 | 부피(苻丕) | 장락공(長樂公), 후일 황제 등극 |
부휘(苻暉) | 평원도공(平原悼公) (357년 책봉, 385년 자살) | |
부홍(苻宏) | 황태자 (357년 책봉) | |
부희(苻熙) | 광평공(廣平公) (357년 책봉) | |
부예(苻叡) | 졸루공(沮類公) (384년 서연의 무융홍(慕容泓)에 의해 살해됨) | |
부린(苻琳) | 회건공(河間公) (384년 서연군에 의해 살해됨) | |
부선(苻詵) | 중산공(中山公) (385년 자살) | |
rowspan="3" | | 부보(苻寶) | 공주 (385년 처형) |
부금(苻錦) | 공주 (385년 처형) | |
순양공주 | 양벽(楊璧)의 아내 | |
딸 | 양정(楊定)의 아내, 후일 촉지(仇池)의 지도자 |
5. 기타
- 부견(苻堅)이 부생(苻生) 암살을 모의할 때, 측근 여파루(呂婆樓)는 왕맹(王猛)을 추천했다. 부견은 왕맹을 만나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하며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만났을 때와 같다고 말했다.[4]
- 이위(李威)는 왕맹이 처음 관직에 나섰을 때부터 현인임을 알아보고 부견에게 여러 차례 중용을 천거했다. 부견은 왕맹에게 “이위가 그대를 이해하는 것은 관중(管仲)을 아는 포숙(鮑叔牙)과 같다.”라고 말했다.
- 부견은 왕맹을 총애하여 359년에 1년 만에 다섯 번 승진시켰다. 구등(仇騰), 석보(席寶)가 왕맹을 참소했지만, 부견은 오히려 그들을 벌했다.
- 저(氐)족 번세(樊世)는 왕맹을 비난하며 “우리는 선제(苻健)와 함께 진(秦)나라를 일으켰지만, 국권에 참여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번세가 부견에게 항의하자 왕맹은 번세를 책망했고, 번세는 격노하여 왕맹을 죽이려 했다. 부견은 번세를 죽였다.
- 부견은 부홍(苻宏), 부비(苻丕)에게 “왕맹을 섬기는 것은 나를 섬기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 371년, 부견이 사냥을 즐기자 왕락(王洛)이 간언했다. 부견은 사냥을 중지하고 왕맹에게 왕락의 말을 잊지 말라고 했다.
- 372년, 왕맹은 고태(高泰)를 천거했다. 고태는 “통치의 기본은 사람을 얻는 데 있고, 엄격하게 선발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 382년, 부견은 강평자(康平子)의 시에 “정(丁)” 자가 곧은 이유를 묻자, 강평자는 “굽힐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 374년, 모용수(慕容垂) 부인이 부견의 총애를 받자, 조정(趙整)은 “참새가 제비집에 들어오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구름이 햇빛을 가리는 것은 보인다”라고 노래했다. 부견은 조정에게 사과했다.
- 378년, 부견은 조정의 ‘주덕지가(酒德之歌)’를 듣고 술을 경계하는 글로 삼았다.
- 380년, 부견이 종친들에게 저(氐)족 15만 호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자, 조정은 이것이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노래했다. 부견은 따르지 않았다.
- 369년, 전연(前燕) 사신 량침(梁琛)이 오자 부견은 들에서 알현하려 했다. 량침은 궁궐에서 알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부견은 받아들였다.
- 부견은 량침에게 전연의 명신을 물었고, 량침은 모용평(慕容評), 모용수(慕容垂) 등을 꼽았다. 량침은 량익(梁奕)의 집에 머물기를 거절하고, 전연 정보를 캐려는 질문에 응하지 않았다.
- 370년, 전진이 전연을 정벌하자, 량침은 투옥되었다. 전연 멸망 후, 부견은 량침을 석방하고 “충성을 다했을 뿐”이라는 대답을 듣고 주부(主簿)로 발탁했다.
- 373년, 동진(東晉) 주효(周虓)가 사로잡혔다. 부견은 상서랑(尙書郎)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주효는 거절했다. 주효는 부견을 저적(氐賊)이라 불렀다.
- 382년, 주효는 반란을 모의했다가 발각되었지만, 부견은 사면하고 유배 보냈다.
- 부견은 불교를 존숭하고 석도안(釋道安)을 신임했다. 382년, 부견은 석도안을 가마에 함께 태웠다. 권익(權翼)이 간언했지만, 부견은 “석도안은 도(道)에 통달했다.”라며 듣지 않았다.
5. 1. 관련 작품
王道の樹|왕도의 수중국어는 코마에 료(小前亮)의 소설이다.[27][28]5. 2. 일화
- 부견(苻堅)이 부생(苻生) 암살을 모의할 때, 측근 여파루(呂婆樓)에게 누구와 상의해야 할지 묻자, 여파루는 왕맹(王猛)을 추천했다. 부견은 왕맹을 만나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하며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만났을 때와 같다고 말했다.[4]
- 이위(李威)는 왕맹이 처음 관직에 나섰을 때부터 현인임을 알아보고 부견에게 여러 차례 중용을 천거했다. 부견은 왕맹에게 “이위가 그대를 이해하는 것은 관중(管仲)을 아는 포숙(鮑叔牙)과 같다.”라고 말했다.
- 부견은 왕맹을 총애하여 359년에 1년 만에 다섯 번 승진시켰다. 구등(仇騰), 석보(席寶)는 왕맹을 참소했지만, 부견은 오히려 그들을 벌했다.
- 저(氐)족 번세(樊世)는 왕맹을 비난하며 “우리는 선제(苻健)와 함께 진(秦)나라를 일으켰지만, 국권에 참여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번세가 부견에게 항의하자 왕맹은 번세를 책망했고, 번세는 격노하여 왕맹을 죽이려 했다. 부견은 번세를 죽였다.
- 부견은 부홍(苻宏), 부비(苻丕)에게 “왕맹을 섬기는 것은 나를 섬기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 371년, 부견이 사냥을 즐기자 왕락(王洛)이 간언했다. 부견은 사냥을 중지하고 왕맹에게 왕락의 말을 잊지 말라고 했다.
- 372년, 왕맹은 고태(高泰)를 천거했다. 고태는 “통치의 기본은 사람을 얻는 데 있고, 엄격하게 선발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 382년, 부견은 강평자(康平子)의 시에 “정(丁)” 자가 곧은 이유를 묻자, 강평자는 “굽힐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 374년, 모용수(慕容垂) 부인이 부견의 총애를 받자, 조정(趙整)은 “참새가 제비집에 들어오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구름이 햇빛을 가리는 것은 보인다”라고 노래했다. 부견은 조정에게 사과했다.
- 378년, 부견은 조정의 ‘주덕지가(酒德之歌)’를 듣고 술을 경계하는 글로 삼았다.
- 380년, 부견이 종친들에게 저(氐)족 15만 호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자, 조정은 이것이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노래했다. 부견은 따르지 않았다.
- 369년, 전연(前燕) 사신 량침(梁琛)이 오자 부견은 들에서 알현하려 했다. 량침은 궁궐에서 알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부견은 받아들였다.
- 부견은 량침에게 전연의 명신을 물었고, 량침은 모용평(慕容評), 모용수(慕容垂) 등을 꼽았다. 량침은 량익(梁奕)의 집에 머물기를 거절하고, 전연 정보를 캐려는 질문에 응하지 않았다.
- 370년, 전진이 전연을 정벌하자, 량침은 투옥되었다. 전연 멸망 후, 부견은 량침을 석방하고 “충성을 다했을 뿐”이라는 대답을 듣고 주부(主簿)로 발탁했다.
- 373년, 동진(東晉) 주효(周虓)가 사로잡혔다. 부견은 상서랑(尙書郎)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주효는 거절했다. 주효는 부견을 저적(氐賊)이라 불렀다.
- 382년, 주효는 반란을 모의했다가 발각되었지만, 부견은 사면하고 유배 보냈다.
- 부견은 불교를 존숭하고 석도안(釋道安)을 신임했다. 382년, 부견은 석도안을 가마에 함께 태웠다. 권익(權翼)이 간언했지만, 부견은 “석도안은 도(道)에 통달했다.”라며 듣지 않았다.
참조
[1]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2]
문서
一説には文玉とも
[3]
문서
『晋書』の記述
[4]
문서
史書における董龍
[5]
문서
王猛の辞退と苻堅の説得
[6]
문서
後土への祭祀
[7]
문서
程憲の訴え
[8]
문서
苻堅の詔の内容
[9]
문서
征東・鎮東・征西・鎮西将軍
[10]
문서
苻堅の和戎政策
[11]
문서
『資治通鑑』の記述
[12]
문서
『晋書』の記述
[13]
문서
苻堅と慕容垂の会話
[14]
문서
王猛の進言と苻堅の拒否
[15]
문서
『晋書』の記述
[16]
문서
苻堅の寛大さ
[17]
문서
苻堅と王猛の会話
[18]
문서
王猛の報告
[19]
문서
苻堅の命令
[20]
문서
苻堅と王猛の問答
[21]
문서
苻堅の大赦
[22]
문서
『晋書』の記述
[23]
문서
苻堅の鄧羌への任命
[24]
문서
苻堅と王猛の意見の相違
[25]
문서
人材登用に関する命令
[26]
문서
苻堅からの書簡
[27]
문서
王猛の辞退と苻堅の説得
[28]
문서
長安の繁栄
[29]
문서
王猛の遺言
[30]
문서
苻堅の政策
[31]
문서
苻堅の嘆き
[32]
문서
張天錫討伐の命令
[33]
문서
『晋書』の記述
[34]
문서
『晋書』苻堅伝の記述
[35]
문서
劉庫仁と劉衛辰への統治委任
[36]
문서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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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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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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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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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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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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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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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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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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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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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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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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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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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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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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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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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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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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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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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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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문서
六朝通鑑博議 巻五 「謝玄破苻堅於淝水」より
[72]
논문
『六朝通鑑博議』の孫呉論について
[73]
서적
中国傑物伝
中央公論社
[74]
서적인용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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