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노동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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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폴란드 공산당(KPP)의 형성과 소멸
- 3.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노동자당(PPR)의 등장
- 4. 소련 내 폴란드 공산주의 기관
- 5. 고무우카의 지도력, 국가 국민 평의회(KRN), 폴란드 민족 해방 위원회(PKWN)
- 6. 시코르스키 사망 이후 망명 정부
- 7. 폭풍 작전의 실패와 바르샤바 봉기
- 8. 공산주의 주도 전쟁 노력
- 9. 국민 통일 임시 정부(TRJN)
- 10. 새로운 사회정치 체제 형성과 PPR의 역할
- 11. 독일 이후 영토 편입, 전후 복구 및 국가 사회주의 개혁
- 12. 정치 투쟁과 야당 탄압
- 13. 1947년 선거와 합법적 야당의 제거
- 14. 고무우카의 제거, 스탈린주의,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PZPR)
- 참조
1. 개요
폴란드 노동자당(PPR)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당이다. 1942년 바르샤바에서 창당되어 반나치 저항 운동을 주도했으며, 가르디아 루도바라는 군사 조직을 산하에 두었다. PPR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내 공산주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으며, 1944년에는 폴란드 민족해방 위원회(PKWN)를 설립하여 폴란드 임시 정부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7년 총선에서 부정 선거 논란 속에서도 승리한 후, 야당을 탄압하고 폴란드 사회주의 체제 구축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폴란드 사회당과의 합당을 통해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PZPR)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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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노동자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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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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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Polska Partia Robotnicza (폴스카 파르티아 로보트니차) |
첫 번째 지도자 | 마르첼리 노보트코 |
마지막 지도자 |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
창당 | 1942년 1월 5일 |
해산 | 1948년 12월 16일 |
선행 정당 | 폴란드 공산당 |
합병 정당 |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
청년 조직 | 청년투쟁동맹 |
군사 조직 | 인민군(1942-1944) 인민군(폴란드)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
정치적 위치 | 극좌 정치 |
국제 조직 | 코민테른(1942년–1943년) 코민포름(1947년–1948년) |
국내 | 민주 블록(1947년–1948년) |
상징색 | 빨강 |
국가 | 폴란드 |
2. 폴란드 공산당(KPP)의 형성과 소멸
폴란드 공산당(KPP, 1925년까지 폴란드 공산노동자당)은 극좌 정치 조직이었다. 당 지도부(마리아 코슈츠카, 아돌프 바르스키, 막시밀리안 호르비츠, 에드워드 프루흐니악)가 지지하고 옹호한 견해는 이미 1923년에서 1924년 사이에 요제프 스탈린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다. 코민테른은 1926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5월 쿠데타에 대한 KPP의 지지(당의 "5월 오류"로 불림)를 비판했다.
1940년 6월 카틴 학살 이후 스탈린은 폴란드 공산주의자의 비공식 지도자였던 반다 바실레프스카와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회동하며 폴란드에 대한 소련의 정책 방향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1940년부터 소련과 폴란드 간의 다양한 정치, 군사, 문화 등 분야에서의 협력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스탈린의 지원 아래, 소련 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통제하는 폴란드 민간 및 군사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활동의 초기 주요 역할은 반다 바실레프스카와 폴란드 장교 지그문트 베를링이 맡았다. 바실레프스카는 전 폴란드 장관이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측근이었던 레온 바실레프스키의 딸이자 스탈린의 친구였다. 1940년 10월부터 베를링은 소련 붉은 군대 내에 폴란드 사단을 창설하려는 폴란드 장교 그룹을 이끌었다.
1943년 11월, 핀더와 포르날스카가 게슈타포에 체포되면서 PPR은 지도부 공백을 맞았다. 같은 해 11월 23일,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PPR 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고,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는 사무국원이 되었다.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 총리가 사망한 후,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는 블라디슬라프 라치키에비치 대통령, 새로 임명된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 총리, 그리고 카지미에시 소스니코프스키 총사령관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테헤란 회담(1943년 11월~12월)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은 폴란드 지도자들과 상의하거나 통보하지 않은 채, 미래 폴란드 영토를 오데르강과 커존 라인 사이로 결정했다. 이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과거 폴란드의 연합 파트너였던 체코슬로바키아마저 1943년 12월 소련과 우호 조약을 체결하면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폴란드 망명 정부는 점차 동맹국들로부터 외면받았다.
1944년,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폴란드 지도부는 소련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조치를 취해야 했다. 계획된 폭풍 작전은 퇴각하는 독일군을 국내군이 공격하고, 해방된 지역에 임시 폴란드 민간 행정부를 세워 폴란드 망명 정부를 대표하는 이들이 정당한 주인으로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맞이한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따라 1944년 봄과 여름, 폴란드 지하군은 소련군의 진격 경로에서 다수의 군사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소련은 국내군 병사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체포하거나 추방했으며, 서방 연합국은 소련과의 관계 유지를 우선시하며 폴란드 측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주장을 외면하고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작전들은 군사적, 정치적 실패로 돌아갔고, 바르샤바에서의 승리가 폴란드 독립 운동 세력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처럼 보이게 되었다.
소련과 동맹을 맺은 좌익 성향의 폴란드 무장 세력은 PKWN과 임시 정부의 지휘 아래 빠르게 확장되어, 두 개의 군대로 약 40만 명 규모에 이르렀다. 1944년 여름, 제1 폴란드군은 바르샤바 남쪽 비스툴라강 좌안에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제1 기갑 여단이 스투지안키 전투에서 독일군과 교전했다.
폴란드의 미래에 대한 추가 결정은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이루어졌다. 미국과 영국은 전후 국경에 관한 소련의 입장을 수용했지만 (독일의 희생으로 인한 폴란드의 서부 확장의 범위는 명시되지 않았음) 폴란드의 새로운 타협 정부 구성에 런던에 본부를 둔 망명 정부의 참여 문제에 대해 소련과 의견이 달랐다. 연합국 지도자들은 결국 폴란드 내의 기존 공산주의 지배 임시 정부를 국민 통일 임시 정부 (TRJN)로 전환하도록 승인했으며, 민주적이고 친서방 세력의 참여를 확대했지만, 망명 정부는 공식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TRJN은 곧 선거를 실시하여 영구적인 폴란드 정부를 수립하도록 지시받았다. 실제 시행과 관련하여 세 강대국을 대표하는 위원회가 모스크바에서 TRJN 문제를 협상했고, 망명 정부의 전 총리 미코와이치크가 합류할 때까지 회담이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6월에 미코와이치크는 공산주의 측에 영구적으로 유리한 임시 합의에 동의했다.
소련의 영향력이 강한 국제 환경 속에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다가올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정치 권력을 유지할 의사를 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들이 추진한 개혁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 미래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폴란드의 동부 국경 문제는 서방 강대국들이 소련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주요 국제 문제로 부상하지 않았다. 폴란드-독일 국경에 관한 결정은 포츠담 회담에서 이루어졌다. 스탈린은 폴란드의 서쪽 확장을 최대한 추진했으며, 폴란드 정부 대표단이 그들의 관점을 제시하도록 주선하여 영국의 기존 정책(일부 지역을 미래 독일 국가를 위해 유지하려 함)을 좌절시켰다. 폴란드 내에서는 폴란드 노동자당(PPR)이 대규모 "회복 영토" 선전 캠페인을 주도했다. 이는 연합국이 승인한 독일 민족의 추방과 잃어버린 동부 크레시 지역에서 "귀환"한 폴란드인에 의한 해당 지역 재정착을 포함했다. 정확한 동부 경계는 1945년 8월 16일에 서명된 폴란드-소련 조약에서 결정되었으며, 이 조약은 논쟁의 대상이었던 리비우를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국경 내에 남기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후 폴란드 영토 내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의 재정착이 이루어졌다.
과거 사나치아나 국가 민주주의 (폴란드)와 연관되었던 폴란드 정치인들은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부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특히 새로운 행정 및 군사 구조 수립과 관련된 정부 결정을 보이콧하며 저항했다. 이러한 정치적 대립은 무장 활동과 반정부 음모 단체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강대국 간 협력이 중단되자, 폴란드의 서부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폴란드 노동자당(PPR)은 진행 중인 개혁이 성공하면 여론이 유리해질 것이라 믿고 전국 의회 선거를 미루었다. 대신 1946년 6월, PPR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지지를 확인하고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먼저 실시했다. PPR이 주도하는 민주 블록이 구성되었고, 폴란드 사회당도 참여했지만 미코와이치크가 이끄는 폴란드 인민당은 참여를 거부했다.
국제 정치의 분열이 심화되고 두 개의 상호 적대적인 블록이 형성되면서, 스탈린은 소련 영향권 내 국가들에게 더 엄격한 충성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으로 불순하거나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세력과 인물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었다.
[1]
논문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64, No. 4
1970-12
1933년부터 KPP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점점 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코민테른은 당 조직이 폴란드 군사 정보국 요원들에게 침투당해 위험에 처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심 속에서 일부 당 지도자들은 거짓으로 정보국 요원으로 고발되어 소련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1935년과 1936년, KPP는 폴란드 내에서 통일된 노동자 및 농민 전선을 결성하려 시도했으나, 이는 코민테른으로부터 더 큰 박해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코민테른은 또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당 내에 트로츠키주의 세력을 숨기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했다.
다양한 "일탈" 혐의를 근절하려는 모스크바 주도의 기소는 1937년과 1938년에 절정에 달했으며, 대부분 사형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처형은 1940년에 집행되었다. 대숙청 기간 동안, KPP 중앙 위원회의 구성원 70명과 후보 구성원들은 소련으로 도피하거나 끌려갔고, 그곳에서 다른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 총살되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저명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한편,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블라디스와프 고무우카, 에드워드 오찹, 스테판 옌드리호프스키, 알렉산데르 자바즈키 등 미래 폴란드 공산주의 지도자들 다수는 당시 폴란드의 사나치아 정권에 의해 박해받고 투옥되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스탈린의 지휘 아래 있던 코민테른은 1938년 8월, KPP를 해산하고 청산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노동자당(PPR)의 등장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국면을 바꾸었고, 폴란드와 소련 정부 간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영국 정부의 중재로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망명 정부는 소련과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으로부터 정부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소련 내에서 안데르스 군이 창설된 후 블라디슬라프 안데르스 장군에 의해 중동으로 이동하고, 소련군이 폴란드 전쟁 포로들을 학살한 카틴 학살 사건이 드러나면서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소련은 1943년 4월 25일 폴란드 망명 정부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설상가상으로 시코르스키 총리는 1943년 7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이러한 사건들과 국경 문제에 대한 이견은 폴란드와 소련 간의 불신을 깊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탈린은 1941년 여름부터 소련에 체류 중이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과 협력 의사가 있는 다른 폴란드인들을 활용하여 대안적인 폴란드 정책을 추구했다. 1941년 8월부터 폴란드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여 점령지 폴란드 내 폴란드인들에게 독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저항을 촉구했으며, 일부 전직 폴란드 장교들을 점령지로 보내 친소련 지하 활동을 조직하게 했다. 11월에는 소련 내 폴란드인들을 조직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폴란드 내에서 활동을 시작한 공산주의 조직 중 하나는 해방 투쟁 연합(Związek Walki Wyzwoleńczej|즈비온제크 발키 비즈볼렌체이pol)이었으며, 그 지도자 중에는 마리안 스피찰스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1년 9월 소련에서 폴란드로 활동가들을 보내려던 초기 시도는 실패했으나, 12월 말부터 마르첼리 노보트코, 파벨 파인더, 볼레스와프 모와예츠, 마우고르자타 포르날스카 등 소련에서 훈련받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폴란드로 낙하산 투입되었다. 이들은 스탈린의 승인 하에 새로운 폴란드 공산당 창당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 폴란드 사회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지지 기반이 미미했고 부정적인 연상이 강했기 때문에, 당명에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고 '폴란드 노동자당'(Polska Partia Robotnicza|폴스카 파르티아 로보트니차pol, PPR)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2] 전전 폴란드 공산당(KPP)을 계승하는 형태로 구상된 PPR은 1942년 1월 5일 바르샤바에서 새로 파견된 인원들과 현지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회합하여 공식적으로 창당되었다.
스스로를 반나치 폴란드 애국 전선으로 규정한 신생 당은 모스크바에서 인쇄된 ''노동자, 농민, 지식인에게! 모든 폴란드 애국자에게!''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배포하여 독일 점령군에 대한 투쟁을 촉구했다. 좌파적이고 민주적인 강령을 제시하며 주로 총독부(General Government) 지역에서 활동을 집중한 당은 1942년 여름에는 당원 수가 약 6천 명으로 늘어났다. 1943년에는 청년 조직으로 청년 투쟁 연합(Związek Walki Młodych|즈비온제크 발키 므워디흐pol)이 활동했다.
PPR은 사무총장 마르첼리 노보트코가 이끄는 중앙 위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노보트코는 1942년 11월 28일 암살되었고, 이후 볼레스와프 모와예츠가 잠시 사무총장직을 승계했으나 노보트코 암살을 공모했다는 혐의로 당 내부 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1943년 1월, 파벨 파인더가 신임 사무총장이 되었고, 블라디슬라프 고무우카, 프란치셰크 유즈비악과 함께 3인으로 구성된 사무국을 이끌었다.
PPR은 당의 군사 조직으로 가르디아 루도바( Gwardia Ludowa|그바르디아 루도바pol, 인민 경비대)를 창설하여 운영했다. 초대 지휘관은 모와예츠였으며, 그의 사후 유즈비악이 지휘를 맡았다. 가르디아 루도바는 바르샤바 등 도시 지역에서 독일군을 공격하고 농촌 지역에서는 유격 부대를 조직하여 주로 독일군의 통신 시설 파괴 활동을 벌였다.
1943년 2월, PPR은 점령지 폴란드 내에서 폴란드 망명 정부를 대리하던 폴란드 정부 대표단 및 지하 저항군인 국내군 중앙 사령부와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 차이가 커 협상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특히 1943년 4월 25일 소련이 폴란드 망명 정부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한 이후, PPR과 망명 정부 측 지하 기구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폴란드 사회 내 급진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자, PPR은 이를 활용하여 다른 좌파 및 농민 세력과의 연합 전선 구축을 모색했다. 하지만 전후 권력 구도를 염두에 둔 이러한 '민주 전선' 구상은 다른 정치 세력들이 PPR과의 협력에 대체로 소극적이어서 실현되지 못했다.
4. 소련 내 폴란드 공산주의 기관
1943년 1월부터 제안되고 조직된 폴란드 애국자 연합은 1943년 6월 창립 대회를 열었으며, 바실레프스카가 의장을 맡았다. 베를링, 알프레트 람페, 스테판 옌드리호프스키, 안제이 비토스, 볼레스와프 드로브네르 등 다양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이 조직에 참여하여 공산주의 주도의 활동에 협력했다. 소련 당국이 소련 통제 지역 내 폴란드 망명 정부 대표부 지부를 폐쇄하자, 연합은 소련 기관의 지원을 받아 해당 지역에 흩어져 있는 폴란드인들을 위한 사회 복지 부서를 설립하여 지원 활동을 펼쳤다.
군사 분야에서는 1943년 5월 제1 폴란드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보병 사단이 창설되어 베를링이 지휘를 맡았다. 이 사단은 1943년 10월 레니노 전투에 참전했다. 코시치우슈코 사단을 기반으로 제1 폴란드 군단이 창설되었고, 1944년 3월에는 제1 폴란드군으로 확대되었으며, 계속해서 베를링 장군이 지휘했다. 이 군대는 제1 벨로루시 전선에 배속되었다.
한편, 1943년 12월부터는 바실레프스카의 주도로 미래의 공산주의 정부 역할을 할 폴란드 국민 위원회가 조직되기 시작했으나, 모스크바가 바르샤바에 이미 국가 국민 평의회(KRN)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설립 계획은 중단되었다.
소련 내 폴란드 민간 및 군사 활동을 총괄하기 위해 1944년 1월 폴란드 공산주의자 중앙 사무국이 설립되었다. 주요 구성원은 의장 알렉산데르 자바즈키를 비롯하여 바실레프스카, 카롤 시에르체프스키, 야쿠프 베르만, 스타니스와프 라드키에비츠, 로만 잠브로프스키, 힐라리 민츠, 마리안 스피할스키 등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훗날 볼레스와프 비에루트와 긴밀히 협력하며 폴란드 집권 공산주의자 내에서 스탈린주의를 따르는 강경 친소련(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파벌의 핵심을 이루게 되며, 이는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이끄는 폴란드 노동자당(PPR) 내 민족주의적 경향과는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5. 고무우카의 지도력, 국가 국민 평의회(KRN), 폴란드 민족 해방 위원회(PKWN)
새 지도부 하에서 PPR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O co walczymy|오 초 발치미pol)라는 제목의 강령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민주주의와 선거 실시를 약속하며, 국유화와 토지 개혁을 통해 사회 개혁을 추진할 것을 천명했다. 동시에 런던의 망명 정부와 폴란드 지하 국가는 폴란드 국민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며 기존 권위에 도전했다. 또한, 전쟁 후 폴란드의 영토 변경 가능성도 언급되었다.
PPR 중앙위원회는 망명 정부와 지하 국가 기관에 대항하는 성격의 준의회 기구로 국가 민족 위원회 (Krajowa Rada Narodowa|크라요바 라다 나로도바pol, KRN) 창설을 결정했다. KRN은 1944년 1월 1일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의장을 맡았다. KRN은 분열되어 있던 사회주의 및 농민 단체 인사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이 시기 공산주의 계열의 군사 조직은 인민군 (Armia Ludowa|아르미아 루도바pol, AL)으로 개칭되었고, 미하우 롤라-지미에르스키 장군이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모스크바와의 통신이 복구되자 KRN 대표단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다. 소련 당국의 공식적인 환영을 받은 KRN은 6월에 폴란드 애국자 연맹으로부터 "폴란드 국민의 진정한 대표"로 인정받았다. 이후 두 번째 KRN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소련군과 폴란드 공산주의 군대가 해방시킨 부그 강 서쪽 폴란드 영토를 관리할 임시 행정 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1944년 7월 22일, 루블린에서 폴란드 민족 해방 위원회 (Polski Komitet Wyzwolenia Narodowego|폴스키 코미테트 비즈볼레니아 나로도베고pol, PKWN)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PKWN은 PKWN 선언을 발표하여 해방된 폴란드 영토에서의 통치권을 주장하고, 토지 개혁을 포함한 광범위한 사회 개혁과 국가 재건 계획을 공표했다. 사회주의자 출신인 에드바르트 오소프카-모라프스키가 PKWN의 수장을 맡았고, 지미에르스키 장군이 국방부를 담당하게 되면서 베를링 장군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대부분의 PPR 및 KRN 지도자들은 바르샤바를 떠나 소련군 통제 하의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제논 클리슈코 등 일부 인사들은 여전히 독일 점령 하의 수도에 남아 공산주의 활동을 이어갔다.
6. 시코르스키 사망 이후 망명 정부
1944년 1월 초, 소련군은 1939년 당시의 폴란드 국경을 넘어섰다. 영국은 폴란드 정부에게 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재개하고 실질적인 협력을 위해 소련의 요구 조건(커존 라인 국경 인정 및 정부 내 반소련 인사 제거)을 수용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폴란드 측은 이를 주저했다. 미코와이치크 총리는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소련과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제3차 세계 대전 발발을 예상하며 어떠한 양보도 거부한 소스니코프스키 총사령관과 의견 대립을 보였다. 1944년 2월, 처칠 영국 총리는 공개적으로 영국 정부가 커존 라인을 폴란드-소련 국경으로 지지한다고 발표하며 폴란드 망명 정부를 더욱 압박했다.
1944년 6월, 미코와이치크는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에게 정치적 논의를 위해 소련 방문을 제안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폴란드 총리를 초청하여 양국 관계 재개를 위한 회담을 열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7월 30일, 미코와이치크는 타데우시 로머 외무 장관,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 폴란드 국민 위원회 의장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는 폴란드 임시 국민 해방 위원회(PKWN)이 이미 설립된 상태였고, 스탈린은 두 폴란드 대표단 간의 통합 협상을 제안했다. 미코와이치크는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에드바르트 오숩카모라프스키, 반다 바실레프스카 등 PKWN 지도자들과 회담했지만, 그들의 공산주의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PKWN 측은 연립 정부 구성 시 친서방 폴란드 인사에게는 18개 장관직 중 단 4개만을 할당하려 했고, 미코와이치크는 총리직 제안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했다. 미코와이치크는 폴란드 정부 대표단에게 소련이 폴란드인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외교 관계 수립을 고려할 것이며, 아직 공산주의자 편을 최종적으로 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폴란드를 공산주의 국가로 바꾸기 위해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고 판단했다. 결국 미코와이치크는 런던 망명 정부에 PKWN에 대한 상당한 양보의 필요성을 설득하지 못했고,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과의 협상을 사실상 방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미코와이치크가 런던으로 돌아온 후 망명 정부는 폴란드 노동자당(PPR)의 참여를 포함한 자체적인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PKWN은 이를 거부했다.
7. 폭풍 작전의 실패와 바르샤바 봉기
소련의 지원을 받는 PKWN의 설립은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키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봉기가 시작되자 소련군은 비스와강 동쪽 강둑에서 진격을 멈추고 전투에 개입하지 않았다. 봉기군은 압도적인 독일군에 의해 고립되었고, 9월에 베를링이 이끄는 제1 폴란드군 소속 제1 보병 사단이 뒤늦게 강을 건너 구출을 시도했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국내군은 10월 2일에 항복했고,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바르샤바는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 이로써 폴란드 망명 정부는 폴란드 내에서 더 이상 대규모 무력 저항을 조직할 능력을 상실했다. 소스노프스키 장군은 연합국이 바르샤바 봉기군에게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후, 1944년 9월 최고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봉기 실패 후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4년 10월, 처칠과 앤서니 에덴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미코와이치크, 그랍스키, 로머도 동행하여 비에루트, 오솝카-모라프스키, 롤라-지미에르스키 등 PKWN 측 인사들과 다시 협상했다. 미코와이치크는 영토 문제(특히 커즌 라인 수용)를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영국과 소련의 강한 압력에 저항했다. 11월 런던에서 폴란드 망명 정부는 다시 한번 커즌 라인을 국경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국경 문제 논의는 폴란드, 영국, 소련 정부 간의 문제라고 선을 그어 폴란드인들을 실망시켰다. 결국 미코와이치크 총리는 더 이상의 타협안에 대해 동료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1944년 11월 24일 사임했다. 토마시 아르치셰프스키가 이끄는 새로운 망명 정부는 더 이상 연합국에게 중요한 협상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1944년 12월 31일, 국가 국민 평의회(KRN)는 PKWN을 폴란드 공화국 임시 정부로 격상시켰고, 오솝카-모라프스키가 총리를 맡았다. 소련은 즉시 이 새로운 정부를 승인했으며, 서방 연합국은 이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KRN과 임시 정부는 소련 NKVD가 공산주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는 등 탄압을 통해 기반을 다져나가면서 점차 폴란드 내에서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8. 공산주의 주도 전쟁 노력
1944년 9월과 10월에는 인민군(AL)과 소련 파르티잔이 특히 키엘체 주에서 다수의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10월 말, AL 사령관 미에치스와프 모차르의 지휘 아래 대부분의 AL 부대가 전선을 돌파하여 소련-폴란드 측으로 합류했다.
소련군의 공세는 1945년 1월 12일에 재개되었다. 1월 17일, 스타니슬라프 포플라프스키 장군이 이끄는 제1 폴란드군은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제1 폴란드군은 제1 벨로루시 전선에서 싸웠으며, 다음 달에는 포메라니아 장벽의 견고한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6,500명의 병력을 잃었다. 3월에는 콜베르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제2 벨로루시 전선 소속이었던 제1 기갑 여단은 그단스크와 그디니아 해방에 기여했다. 제1군은 4월 16일과 17일에 걸쳐 오데르강을 건넜고, 5월 3일 슈판다우 근처 엘베강에 도달했다. 제1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폴란드 보병 사단을 비롯한 폴란드 부대들은 최종 베를린 전투에도 참여했다.
카롤 시에르체프스키 장군이 지휘하는 제2 폴란드군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4월 16일 루사티안 나이세 강을 건너 드레스덴으로 진격하던 중, 바우첸 전투에서 지휘 부실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나, 베를린으로 향하던 독일 구원 부대를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폴란드에서 나치 독일을 격파하는 데 기여한 이 두 폴란드군은 총 66,000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이는 1939년 9월 작전 당시 폴란드군의 군사적 손실과 비슷한 규모이다.
9. 국민 통일 임시 정부(TRJN)
TRJN의 정확한 형태는 1945년 6월 16일부터 2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담에서 결정되었다. KRN과 임시 정부는 비에루트와 고무우카를 포함한 7명의 정치인으로 대표되었고, 미코와이치크를 포함한 3명의 대표가 망명 세력에서 왔으며, 폴란드에서 온 5명의 비공산주의자가 있었다. 미코와이치크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배적인 역할을 제한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부총리직만 맡게 되었다. 미코와이치크의 인민당은 KRN 구성원의 ⅓을 지명할 권한을 부여받았고, 빈센티 비토스와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가 KRN의 새로운 부의장이 되었다. 1945년 6월 28일, KRN 의장 비에루트는 TRJN을 창설했고, 7월 5일 미국과 영국은 망명 정부에 대한 승인을 철회했다.
TRJN은 이전 임시 정부의 사회주의자 오소브카-모라프스키 총리가 이끌었다. 고무우카와 미코와이치크는 부총리로 포함되었다. 공식 연립 정부는 PPR 구성원 7명, 농민 인민당과 폴란드 사회당 각각 6명, 중도 민주 동맹 (SD) 2명으로 구성되었다. 정부는 PPR과 소련 지배 현실에 동의한 다른 정치인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러나 미코와이치크의 당은 인기를 인식하고 계획된 의회 선거에서 승리할 것을 기대했으며, TRJN을 실제로 임시적인 것으로 생각한 유일한 참가자였다.
10. 새로운 사회정치 체제 형성과 PPR의 역할
폴란드 노동자당(PPR)은 폴란드 제2공화국 시기의 사회적 투쟁 전통을 내세우며,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는 농민 및 사회주의 운동 출신의 좌익 정치인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PPR은 급진적인 토지 소유 및 농업 개혁과 더불어 산업, 은행, 무역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또한, 독일로부터 넘겨받은 회복된 영토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시 국민 민주주의 운동의 민족주의적 수사를 활용하기도 했다.
PPR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농업, 중도주의 운동 내 친공산주의 파벌들을 규합하여 "민주 블록"이 조직되었다. 반면, 미코와이치크가 이끄는 폴란드 인민당(PSL)만이 유일한 합법 야당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며, 다른 정치 세력은 활동이 금지되고 탄압을 받았다.
PPR 내부에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배경을 반영하는 여러 파벌이 존재했다. 야쿠프 베르만, 힐라리 민츠, 로만 잠브로프스키와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등 일부 지도자들은 코민테른의 전통을 계승하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강조했다. 이들은 소련의 절대적인 패권을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으며, 대부분 전쟁 기간 동안 소련에서 활동하며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휘 아래 폴란드 공산주의 조직을 이끌었다. 반면, PPR의 지도자였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폴란드-소련 동맹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를 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파벌을 대표했다. 이들은 폴란드의 국가적 이익을 우선시하며 제한적인 협력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PPR의 모든 파벌은 스탈린 정권에 강력하게 의존했으며, 그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과 일부 다른 정치 세력이 스탈린과 협력한 것은 결과적으로 폴란드 국가의 영토가 크게 축소되는 것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영토 축소는 돌이키기 어려웠을 수 있다.
11. 독일 이후 영토 편입, 전후 복구 및 국가 사회주의 개혁
독일로부터 편입된 영토의 정착과 개발은 높은 우선순위로 간주되었고, 1945년 11월에는 고무우카가 직접 이끄는 회복 영토부가 설립되었다. 고무우카는 새로 획득한 지역이 폴란드에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하며 해당 지역의 경제 개발과 나머지 국가와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전쟁 후 폴란드 관리들은 구 독일의 산업 시설을 전리품으로 여겨 가능한 한 많은 시설을 소련으로 가져가려는 소련 당국과 복잡한 협상을 벌여야 했다.
토지 개혁 법령은 1944년 9월 6일 PKWN에 의해 발효되었다. 100만 가구가 넘는 농민 가족이 대규모 영지와 독일 이후 재산의 분할(약 600만ha의 토지)을 통해 혜택을 받았다. 이 법과 그 시행은 폴란드 분할사와 제2 폴란드 공화국 시대부터 이어진 다양한 토지 개혁 시도와 부분적인 실현을 마무리했다. 또한, 약 150만ha 규모의 수천 개의 국영 농장이 설립되었다. 이 농장들은 식량 생산 역할 외에도 농업의 진보적인 방식을 보여주는 모델 농업 기업으로 기능하도록 의도되었다. 폴란드 사회의 구식 사회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이 개혁은 재산권의 불가침성을 옹호하는 이들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사회 계급으로서의 ''지주''(대규모 토지 소유주) 계급은 사실상 소멸했지만, 자유 시장 경제 시스템은 여전히 대부분의 지역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사유 산업에 대해서는 비교적 온건한 개혁이 시행되었다.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는 수천 개의 기업을 노동자 평의회가 인수하는 등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후 격렬한 전국적 논쟁 끝에 1946년 1월 3일 KRN 법령이 제정되었다. 이 법령에 따라 주간 근무 시간에 50명 이상을 고용하는 기업은 국가가 인수하되, 독일인이 아닌 폴란드인 또는 외국인 소유주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법령에 따라 1948년까지 5,870개의 기업이 국유화되었으며, 15,700개는 개인 소유로 남았다.
경제 계획은 1945년 11월 사회주의자 체스와프 보브로프스키가 이끄는 중앙 계획국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각료회의 경제 위원회는 힐라리 민츠가 이끌었다. 폴란드의 경제 재건은 향후 12년 동안의 계획과 결합되어 수행되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도시에 23만 채, 시골에 30만 채의 주택이 건설되어 인구 분산과 주거 환경 개선에 기여했다.
의무적인 일반 교육이 부활했고 고등 교육은 무료로 제공되었다. 교사 부족 문제 해결이 시급했으며, 대규모 문맹 퇴치 프로그램과 취업자를 위한 시간제 야간 수업 운영으로 많은 교사가 필요했다. 유엔 구호 재건국(UNRRA)은 폴란드 국민에게 식량, 의류, 장비를 지원했으며, 이 지원은 1946년 국가 국민 소득의 22%에 달했다. 1947년 인플레이션은 38%까지 상승했지만 1949년에는 4%로 낮아졌다. 1946년 말 폴란드의 경제는 1938년 전전 수준에 근접하여 이전에 시행되었던 대량 소비 제품의 배급제를 점진적으로 중단할 수 있었다.
경제 개발을 위한 3개년 계획 (1947–49)에 관한 법률은 1946년 KRN에서 통과되었고, 1947년 폴란드 의회 선거 이후 KRN을 대체한 새로운 "입법 세임"(의회)에서 1947년에 다시 통과되었다. 1947년 ''세임''은 노동의 권리를 선포했다. 실업은 해소되었고 실질 임금은 계획 기간 동안 58% 증가했지만, 여전히 1938년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공공 부문은 1947년에 국민 소득의 50%를 생산했으며, 이는 1949년에 64%로 증가했다. 민간 부문은 축소되었고, 협동조합 기업 네트워크는 무역 분야에서 상당한 성장을 경험했다.
12. 정치 투쟁과 야당 탄압
이에 대응하여 폴란드 정부는 소련과 협력하여 내부 치안 기관을 창설하고, 박해와 테러를 통해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1946년 4월에는 정부에 대한 무장 반대를 진압하기 위해 새로운 자원 시민 민병대인 ORMO가 결성되었다. ORMO는 기존의 경찰(시민 민병대), 정치 경찰(UBP), 내부 보안 군단, 폴란드군뿐만 아니라 소련의 정치 경찰(NKVD)과 소련군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NKVD는 정권 반대 세력을 살해, 체포, 괴롭히고 선전을 통해 탄압하고 매도하는 데 앞장섰다. 1944년부터 1948년 사이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소련으로 끌려갔으며, 일부는 법원 판결에 따라 처형되었다. 이러한 전체 보안 시스템은 소련의 정치인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휘 아래 운영되었다.
가톨릭 교회 역시 반정부 입장을 취했다. 1948년 사망할 때까지 추기경 아우구스트 힐론트가 이끌었던 폴란드 가톨릭 교회는 특히 회복된 영토에서 폴란드 교회 조직이 부재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5년 가을, 바티칸의 허가를 받아 독일로부터 되찾은 영토에 임시 교회 행정 구조를 구축했지만, 영구적인 폴란드 교회 행정 승인은 지연되었다. 이는 해당 지역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키고 기존의 독일-폴란드 간 적대감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폴란드 노동자당은 선전 활동에도 힘썼다. 1946년 5월 23일, 당 중앙위원회는 중앙위원회 내에 당 역사 부서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이 부서의 목표는 친공산주의 선전을 강화하고 독립 운동을 비방하는 것이었다. 초대 부서 책임자로는 레지나 카플란-코브린스카가 임명되었다.
한편, 정부는 해산된 국내군과 다른 저항 조직 출신의 야당 민병대 전투원들을 대상으로 1945년과 1947년에 사면을 제안했다. 수만 명의 반대파들이 이 사면을 받아들였으나, 일부는 이후 다시 기소되거나 투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면 조치는 결과적으로 반공 무장 저항 운동을 약화시키고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 1947년 선거와 합법적 야당의 제거
국민투표에서는 상원 폐지, 온건 사회주의적 헌법 개혁, 서부 및 북부 국경의 영구화라는 세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다. 집권 세력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에,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는 등 상당한 압력 속에서 투표가 진행되었고 결과는 민주 블록의 압승으로 조작되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PPR은 반유대주의적인 ''유대공산주의''라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소련의 압력으로 민주 블록은 단순한 과반 승리가 아닌, 선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압도적인 결과가 필요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코와이치크의 인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폴란드가 소련에 완전히 점령될 것을 우려했다. 1947년 폴란드 총선을 앞두고 PPR은 주요 경쟁자였던 인민당을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인민당 후보들은 체포되거나 괴롭힘을 당했으며, 대중 접촉이 차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100명의 야당 활동가가 살해되었고, 다수의 PPR 당원들도 목숨을 잃었다.
1947년 1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민주 블록은 80%의 득표율을 얻었다고 발표했지만, 이 선거는 광범위하게 부정 선거로 여겨진다. 실제 득표 결과나 부정 행위의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선거 결과, 인민당은 정치 무대에서 사실상 제거되었고 폴란드에는 합법적인 야당이 사라졌다. 미코와이치크는 계속되는 탄압과 위협 속에 1947년 10월 폴란드를 탈출하여 국외로 망명했다.
14. 고무우카의 제거, 스탈린주의,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PZPR)
고무우카는 이전부터 소련의 정책을 비판해왔는데, 이는 이제 부적절한 민족주의로 간주되었다. 폴란드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고무우카의 독자적인 "사회주의로 가는 폴란드 길" 노선은 스탈린이 PPR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었다. 결국 고무우카와 그를 따르던 세력은 주요 직위에서 밀려났고, 1948년 8월 중앙위원회는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를 PPR의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비에루트는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며 폴란드 사회를 스탈린주의 모델에 맞춰 개조할 인물로 평가받았다.
PPR은 PPS 내에 남아있던 좌파 세력에게 합당 압력을 가했다. 1948년 12월, 두 정당은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Polska Zjednoczona Partia Robotnicza|폴스카 즈예드노초나 파르티아 로보트니차pol, PZPR)으로 통합되었다. 이 합당은 거의 전적으로 PPR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3] 합당 과정에서 PPS는 수백 명의 당원을 추방하는 방식으로 "정화"되었다.
한편, 폴란드 인민당 (PSL)은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도 1년가량 더 명맥을 유지했다. 1949년, PSL의 남은 세력은 친공산주의 성향의 분파와 합당하여 통일 인민당 (Zjednoczone Stronnictwo Ludowe|즈예드노초네 스트론니츠트보 루도베pol, ZSL)을 창설했다.
PPR이 집권하던 시기 폴란드는 공식적으로 "인민 민주주의" 국가로 선언되었으며, 사회주의 체제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사유 재산과 시장 경제 요소가 일부 용인되었고, 국가의 역할이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PZPR이 창설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했다. 중공업 육성에 초점을 맞춘 6개년 계획이 추진되었고, 국가 사회주의 시스템 구축과 사회 개조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참조
[2]
서적
The World Today Series: Nordic, Central and Southeastern Europe 2008
Stryker-Post Publications
[3]
웹사이트
Władysław Gomułka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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