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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원탁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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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원탁회의는 1989년 폴란드 공산 정권과 자유노조 "연대"가 폴란드의 민주화를 위해 개최한 회의이다. 1988년의 파업으로 연기된 후, 1989년 2월 6일에 시작되어, 소련의 쇠퇴와 연대의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공산 정권은 민주주의를 요구를 수용했다. 회의는 정치 개혁, 노동 조합 다원주의, 경제 및 사회 정책을 주요 의제로 다루었으며, 상원 부활, 하원 선거 방식 변경, 대통령제 도입, 자유 노조 합법화, 언론의 자유 보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회의의 결과로 1989년 6월 선거에서 연대가 압승을 거두었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붕괴하고 폴란드 제3공화국이 출범하는 등 폴란드의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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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원탁회의
기본 정보
폴란드 원탁회의
폴란드 원탁회의
장소폴란드 바르샤바
날짜1989년 2월 6일 ~ 1989년 4월 5일
성격정치적 협상
목표폴란드의 정치 및 경제 시스템 전환에 대한 협상
참여자
정부 측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부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PZPR)
반체제 측연대
가톨릭 교회 대표
기타다양한 사회 단체 대표
주요 의제
정치 개혁자유 선거 도입
대통령제 도입
상원 복원
경제 개혁시장 경제 도입
기업의 자유화
노동자 권리연대 합법화
노동 조건 개선
언론 자유언론 검열 폐지 및 자유로운 출판 보장
주요 합의 사항
정치 체제부분적으로 자유로운 선거 실시 (제한적인 자유 선거)
대통령제 도입
상원 복원
노동 조합연대 합법화
언론언론 자유 보장 (일부 제한 존재)
경제시장 경제 도입을 위한 기반 마련
결과 및 영향
정치적 변화1989년 6월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선거 실시
연대의 압승
공산 정권의 몰락
폴란드의 민주화 이행
사회적 영향시민 사회의 활성화 및 정치 참여 확대
경제적 영향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 및 경제 성장
관련 인물
정부 측 주요 인물치스와프 키슈차크
얀 슈체판스키
"연대" 측 주요 인물레흐 바웬사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중재자타데우시 올쇼프스키 (가톨릭 교회)
평가
긍정적 평가평화적인 정권 교체
민주주의로의 전환
사회적 합의 도출
비판적 평가공산 세력의 기득권 유지 시도
불완전한 개혁
추가 정보
관련 문서폴란드 1989년 폴란드 총선거

2. 배경

폴란드는 당시 소련의 영향 아래 있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1980년부터 시작된 자유노조(Solidarność)의 민주화 운동은 폴란드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는 1980년대 초 공장 파업을 주도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정부는 자유노조를 불법화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강경하게 탄압하려 했지만,[5]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주화 요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0년대 후반 폴란드는 심각한 경제 침체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88년에는 전국적으로 다시 파업이 확산되었다. 1988년 5월부터 이어진 사회적 시위와 깊어지는 경제 위기는[2]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부가 결국 야당과의 대화를 모색하게 된 중요한 국내 요인이었다. 당시 정부는 경제 개혁 추진을 위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3] 정치적 책임을 자유노조와 분담하고자 했다.[4] 자유노조 측 역시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PZPR)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기보다는 국가 재건 과정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5]

1988년 9월, 파업이 잦아들 무렵 레흐 바웬사와 내무부 장관 체스와프 키슈차크 사이에 비밀 회담이 열렸고, 이 자리에서 양측은 국가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공식적인 회의, 즉 '원탁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1989년 2월 6일, 마침내 바르샤바의 각료 회의 사무실(현 대통령 관저)에서 역사적인 원탁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에는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한 야당 측과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PZPR) 및 그 위성 정당들(ZSL, SD 등)로 구성된 정부 측이 참여했으며, 레흐 바웬사체스와프 키슈차크가 공동 의장을 맡았다. 보이체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이끄는 정부는 기존 정치 체제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야당 지도자 일부를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회의는 정부의 예상을 뛰어넘어 폴란드 사회와 정부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바르샤바 대학교 앞에서 "연대" 운동(1988년)

2. 1. 국제 정세

폴란드는 당시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던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소련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고,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한 소련 내부의 변화는 폴란드 국내 상황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소련의 변화와 더불어, 서방 국가들이 자유노조(연대)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 것 역시 폴란드 인민 공화국 당국이 야당과의 대화에 나서게 된 주요 외부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2]

결과적으로 1989년 열린 폴란드 원탁회의는 단순히 폴란드 내부의 정치적 합의를 넘어, 동유럽 공산 블록 전체의 몰락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형성된 얄타 협정에 기반한 국제 질서가 변화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3. 회의 과정

폴란드는 당시 소련군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1980년부터 시작된 자유노조(Solidarność)의 꾸준한 민주화 운동은 사회 변화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폴란드 공산 정권과 자유노조는 첫 민주주의적인 회의를 준비하였다. 본래 회의는 1988년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1988년 폴란드 파업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마침내 1989년 2월 6일, 체스와프 키슈차크 내무부 장관을 중심으로 정부와 야권 대표들이 모여 원탁회의를 비밀스럽게 시작했다. 자유노조 측은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부를 상대로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치열한 논쟁 끝에 공산 정부는 결국 자유노조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회의는 이후 여러 분과로 나뉘어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적 쟁점들을 논의하며 진행되었고, 폴란드 민주주의 전환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3. 1. 분과 회의

회의는 크게 세 개의 주요 위원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6]

  • 정치 개혁 위원회: 의장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의 야누시 레이코프스키와 연대(Solidarność)의 브로니스와프 게레메크가 맡았다.
  • 노동 조합 다원주의 위원회 (복수 노조제·복수 정당제 그룹): 의장은 PZPR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연대의 타데우슈 마조비에츠키, 그리고 전폴란드 노동조합 협정(OPZZ)의 로무알트 소스노프스키가 맡았다.
  • 경제 및 사회 정책 위원회: 의장은 PZPR의 브와디스와프 바카와 연대의 비톨트 치셰차코프스키가 맡았다.


주요 위원회 외에도 특정 현안을 다루기 위해 여러 소위원회와 실무 그룹이 구성되었다.[6]

  • 소위원회:
  • 생태 소위원회
  • 광업 소위원회
  • 주택 정책 소위원회
  • 청소년 문제 소위원회
  • 과학, 교육 및 기술 발전 소위원회
  • 법률 및 법원 개혁 소위원회
  • 농업 소위원회
  • 대중 매체 소위원회
  • 협회 및 지방 정부 소위원회
  • 의료 소위원회
  • 실무 그룹:
  • 임금 및 소득 물가 연동 실무 그룹
  • 노동 조합의 재산권에 관한 실무 그룹
  • 노동 조합법 개정 실무 그룹
  • 지방 정부 실무 그룹
  • 협회 실무 그룹
  • 특정 직원의 고용 관계를 재설정할 권리에 관한 초안 실무 그룹
  • 개별 농민의 노동 조합에 관한 법률 실무 그룹


이러한 실무 그룹에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회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양측의 깊은 상호 불신과 특히 정부 측의 권력 이양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논의는 종종 중단되었다. 가장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주제는 다음과 같다.

  • 임금 인상 및 물가 연동제 도입
  • 향후 복수 정당제에 기반한 선거 실시
  • 신설될 대통령의 권한 범위
  • 미래 의회(하원과 신설될 상원)의 권한
  • 야당 세력의 대중 매체 접근 보장 (언론의 자유)


집권 연립 측에서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그는 직접 회담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 유제프 치레크, 스타니스와프 치오세크 등이, 야당인 연대 측에서는 레흐 바웬사, 헨리크 부이에크 등이 주요 협상 대표로 나섰다.[7] 협상 과정에서 연대는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를 바탕으로 투명한 논의를 강조했으며, 정부 측은 기존의 권력 구조를 유지하려는 입장을 보였다.[8] 협상의 핵심 의제는 향후 선거 방식, 대통령직 신설 및 권한, 상원 부활, 국가 구조 개혁, 자유로운 결사의 자유 및 노동조합 활동 보장이었다.[9]

일부 급진적인 야당 조직들은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회담 자체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4월 5일 회의가 종료될 때까지 여러 중요한 합의들이 도출되었으며, 이는 원탁 합의라는 이름으로 문서화되었다.

3. 2. 주요 쟁점

회의는 세 개의 주요 위원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6] 또한 구체적인 사안을 다루기 위해 여러 소위원회와 실무 그룹이 설립되었다.[6]

'''원탁회의 분과 구성'''
구분명칭
주요 위원회정치 개혁 위원회
노동 조합 다원주의 위원회
경제 및 사회 정책 위원회
소위원회생태 소위원회
광업 소위원회
주택 정책 소위원회
청소년 문제 소위원회
과학, 교육 및 기술 발전 소위원회
법률 및 법원 개혁 소위원회
농업 소위원회
대중 매체 소위원회
협회 및 지방 정부 소위원회
의료 소위원회
실무 그룹임금 및 소득 물가 연동 실무 그룹
노동 조합의 재산권에 관한 실무 그룹
노동 조합법 개정 실무 그룹
지방 정부 실무 그룹
협회 실무 그룹
특정 직원의 고용 관계를 재설정할 권리에 관한 초안 실무 그룹
개별 농민의 노동 조합에 관한 법률 실무 그룹



논의는 양측의 깊은 상호 불신과 정부 측의 권력 이양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난항을 겪었으며, 회의가 중단되는 경우도 잦았다. 특히 다음 쟁점들이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임금 인상 및 물가 연동제 도입
  • 복수 정당제에 기반한 자유로운 선거 실시
  • 신설될 대통령직의 권한 범위
  • 하원(세임) 및 신설될 상원(세나트)의 권한
  • 야당 세력의 대중 매체 접근 보장 (언론 자유)


집권 연립 측에서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회의 불참)의 지명을 받은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 유제프 치레크, 스타니스와프 치오세크 등이, 연대(Solidarność) 측에서는 레흐 바웬사, 헨리크 부이에크 등이 주요 협상 대표로 나섰다.[7] 연대 측은 사회를 대표하며 협상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려 노력했고, 정부 측은 기존 권력을 유지하려는 입장을 보였다.[8] 협상의 핵심 의제는 향후 선거 방식, 대통령의 지위, 상원 신설, 국가 구조 개혁, 자유로운 결사의 자유 및 노동 조합 활동 보장이었다.[9]

일부 급진적인 야당 조직들은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회담 자체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 속에서도 회의는 계속되었고, 1989년 4월 5일 여러 중요한 합의 문서가 서명되었다. 이 합의는 원탁 협정으로 알려지게 된다.

4. 원탁회의 합의

1989년 4월, 폴란드 정부와 야권 세력은 오랜 협상 끝에 역사적인 원탁회의 합의에 도달했다.[12] 이 합의는 폴란드 민주화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정치 구조 개혁''':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상원을 부활시키고, 하원 의석의 일부(35%) 역시 자유선거로 선출하도록 하여 양원제 입법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는 폴란드에 실질적인 민주주의적 의회(Sejm)가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국가 원수로서 대통령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 '''시민 사회 활성화''': 계엄령 하에서 불법화되었던 자유 노조를 포함한 독립적인 노동조합의 합법적인 활동을 보장했다.
  • '''언론의 자유 확대''': 독립적인 언론 활동을 허용하고, 야권이 공영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이는 이후 최초의 독립 일간지 창간 등으로 이어졌다.[13]
  • '''경제 및 사회 개혁''':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유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1989년 6월 4일, 폴란드 역사상 첫 부분적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 노조는 상원 의석의 대부분과 하원의 자유선거 의석 전부를 석권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 체제의 종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곧이어 폴란드 제3공화국이 출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1. 주요 합의 내용

1989년 4월 4일, 폴란드 정부와 자유 노조(Solidarność)를 중심으로 한 야권은 원탁회의 협정(원탁 합의)에 서명했다.[12] 이 협정은 폴란드의 정치 및 사회 시스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주요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정치 구조 개편'''
  • '''상원 신설''': 자유선거를 통해 10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상원(Senat)을 새롭게 구성하기로 했다. 각 주(województwo)에서 2명씩, 구 바르샤바 주와 구 카토비체 주에서는 3명씩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 '''하원 선거 방식 변경''': 하원(Sejm) 의석 460석 중 35%(161석)는 완전한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나머지 65%는 기존의 폴란드 연합 노동자당(PZPR)과 그 위성 정당 및 친정부 성향의 로마 가톨릭 단체에 배분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점진적인 민주화 과정을 위한 조치였으나, 기존 권력 구조의 일정 부분 유지를 보장하는 측면도 있었다.
  • '''대통령제 도입''': 임기 6년의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대통령은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국민의회에서 선출하기로 했다. 이는 기존 공산당 서기장의 권한을 대체하는 조치였다.

  • '''시민적 자유 확대'''
  • '''독립 노동조합 합법화''': 자유 노조를 포함한 독립적인 노동조합의 합법적인 활동을 보장했다. 이는 1981년 계엄령 이후 불법화되었던 자유 노조의 공식적인 복권을 의미했다.
  • '''언론의 자유 신장''':
  • 독립 언론 활동을 허용하여, 최초의 비정부 일간지인 가제타 비보르차(Gazeta Wyborcza)가 창간될 수 있었다. (1989년 5월 8일 첫 발행)[13]
  • 자유 노조는 국영 TVP(Telewizja Polska)에서 매주 30분간 '주간 연대'라는 자체 프로그램을 방송할 권리를 확보했다.[13]
  • 자유 노조는 자체 주간지인 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Tygodnik Solidarności)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초대 편집장: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13]

  • '''기타'''
  • 경제 및 사회 분야의 점진적인 자유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5. 결과 및 영향

폴란드 원탁회의는 공산 정권과 자유 노조 연대를 중심으로 한 야권 세력 간의 역사적인 합의를 통해 폴란드의 정치 및 사회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회의 결과, 상원 부활 및 완전 자유선거 실시, 세임(하원)의 부분적 자유선거 도입, 대통령제 신설, 자유 노조 합법화, 언론 자유 확대 등 민주적 개혁 조치들이 결정되었다.[12]

이 합의에 따라 1989년 6월 4일 실시된 부분적 자유선거에서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가 상원세임(하원)의 자유선거 의석 대부분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폴란드 연합 노동자당(PZPR) 중심의 권력 구조를 해체하고 양원제 의회와 대통령 중심의 새로운 민주 정부 체제로 나아가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원탁회의의 성공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평화적 종식과 폴란드 제3공화국의 출범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동유럽 전체의 민주화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냉전 종식과 동구권 해체를 가속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5. 1. 국내적 영향

1989년 4월 6일,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부와 자유 노조 연대를 비롯한 야권 세력은 원탁 회의 협정을 체결했다.[12] 이 협정은 폴란드 정치 및 사회 시스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탁 회의 주요 합의 내용'''
분야주요 내용
정치 구조* 상원 부활 및 100% 자유선거 실시
노동권* 자유 노조 연대 합법화
언론의 자유* 독립 언론 활동 보장 (최초의 독립 일간지 가제타 비보르차(Gazeta Wyborcza) 창간 허용[13])
경제·사회* 경제 및 사회 분야의 점진적 자유화 추진



이 합의에 따라 폴란드에는 실질적인 정치 권력이 기존의 공산당 중심 체제에서 새롭게 구성될 양원제 의회와 대통령에게 이양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연대는 합법적인 정치 세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언론 분야에서도 다원성이 확대되어, 1989년 5월 8일에는 '가제타 비보르차'가 창간되었고, 야당 인사들의 공영 미디어 출연 및 연대의 광고 방송이 허용되었다.[13]

합의 이후 1989년 6월 4일, 폴란드 역사상 첫 부분적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연대는 자유선거가 보장된 상원 100석 중 99석을 차지했으며, 세임(하원)에서도 자유선거로 선출 가능한 35%의 의석을 모두 확보했다. 이 선거 결과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 체제의 종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폴란드 제3공화국 출범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대통령 선거에서는 폴란드 연합 노동자당(PZPR)의 유일한 후보였던 보이체흐 야루젤스키가 국민의회(상원과 하원 합동 회의)에서 단 한 표 차이로 신승하여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선거 전 연대 측과 정부 측의 정치적 합의에 따른 결과였다. 하원의 65% 의석을 기존 공산당 및 연계 정당에 할당했던 방식은 이후 1991년 총선에서 완전한 자유선거가 실시되면서 폐지되었다.

5. 2. 국제적 영향

폴란드 원탁회의는 단순히 폴란드 내부의 정치적 변화를 넘어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야루젤스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 공산 정권은 정치 권력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야당 지도자들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원탁회의의 결과는 폴란드 정부와 사회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폴란드에서의 사건들은 유럽 전체 공산 블록의 몰락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던 얄타 협정 체제가 사실상 붕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원탁회의는 이후 동유럽 여러 국가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회주의 체제 붕괴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정부와 야당이 무력 충돌 대신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합의를 이루고 체제를 전환한 방식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에도 중요한 선례를 남기며 큰 영향을 미쳤다.

6. 비판 및 평가

폴란드 원탁회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회의 과정과 결과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소련의 개입이나 구 공산당 세력의 기득권 유지 시도라는 비판이 존재한다.[14][15][16][17][18][19] 이러한 시각은 회의가 폴란드의 완전한 민주화를 지연시켰다고 보기도 한다.[19] 다른 한편에서는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 이양을 성공시키고 이후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6. 1. 비판

안제이 즈비아즈다와 같은 '제1 연대'(1980년 8월~1981년 12월) 지도자 일부는 폴란드 원탁회의와 그 이전 마그달렌카에서 열린 공산 정부 내무행정부와의 협상이 모스크바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주장한다. 즈비아즈다는 자신이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소련이 "전체 [폴란드] 사회의 대표로 통과된 반대파 활동가 그룹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그들과 거래를 했다"고 비판했다.[14]

안나 발렌티노비치 역시 2005년 인터뷰에서 원탁회의 협약이 "국가가 아닌 공산주의자들의 성공"이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비판에 힘을 실었다. 그녀는 협상을 주도한 체스와프 키슈차크와 보이체흐 야루젤스키가 "자신의 안전과 (...)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보장"받았으며, 회담 자체가 미래에 "어떤 공산주의 범죄자, 살인자 또는 도둑도 그들의 범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도록" 조직되었다고 주장한다.[15]

안토니 마체레비치는 협상과 협약을 "비밀 경찰의 전형적인 소련 음모"로 평가 절하했다. 그는 키슈차크와 야루젤스키 모두 "모든 단계에서 소련 감독관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 그들의 자율성은 최소화되었다"고 보았다. 마체레비치는 2009년 2월, 원탁회의가 "엘리트의 전술적 성공이었지만, 폴란드의 국가적 관점에서 보면 실패였다"고 평가했다.[16]

가제타 폴스카의 피오트르 봉체크는 1980년대 중반, 공산당 내 '3인 팀'(예지 우르반, 블라디슬라프 포조가 장군, 스타니스와프 치오섹)이 "어제의 반대자가 권력에 끌려들면서 열렬한 동맹자가 되기 때문"이라며 반대파 활동가 중 "정치적으로 활용 가능한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밝혔다.[17] 실제로 1987년 6월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는 야루젤스키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야당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 수많은 야당 분파 중에서 하나의 운동을 선택하여 통치에 참여하도록 허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러한 주장은 국가기억연구소 크라쿠프 사무소의 역사가 필립 무시알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무시알은 2008년 6월, '3인 팀'이 1980년대 말 악화된 경제 상황과 사회 불안 속에서 공산 정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정치적 마케팅 작전"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18]

무시알은 키슈차크 장군이 직접 협상에 참여할 반대파 활동가를 선별했다고 주장한다. 선별 기준은 체제의 "급진적인 거부"가 아닌 "진화"를 지지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협상에 참여한 반대파 활동가 대부분은 과거 특정 시점에 "마르크스주의 교리"에 가깝거나 공산당에 속했던 경력이 있었으며, 모두 비밀 경찰의 철저한 조사를 받았다. 무시알은 이 때문에 폴란드가 "회담을 시작한 첫 번째 동유럽 국가였지만, 1991년 가을에 완전한 자유 선거가 조직된 마지막 국가"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원탁회의 이후 첫 총리가 된 얀 올셰프스키 역시 "기본적인 문제는 [회담 전에] 해결되었고, 원탁회의에서의 협상은 부차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고 말하며 회담의 실질적 의미에 의문을 제기했다.[19]

6. 2. 긍정적 평가

폴란드 원탁회의는 이후 폴란드의 정치 및 사회의 모습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동유럽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는 과정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합의를 이루고 체제를 전환한 방식은 이후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7. 주요 참여자

폴란드 원탁회의에는 정부 측과 자유노조(Solidarność) 측, 그리고 교회 옵서버 등을 포함하여 총 452명이 참여했다.[6] 이 회의는 폴란드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참여자들 중 상당수는 이후 폴란드 정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원탁회의 참가자 중에서는 훗날 대통령이 된 인물이 세 명(레흐 바웬사, 알렉산데르 크바시에프스키, 레흐 카친스키)이나 나왔으며, 다섯 명(체스와프 키슈차크,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얀 올셰프스키, 레셰크 밀레르, 야로스와프 카친스키)은 총리직을 맡았다. 이 외에도 네 명의 부총리, 여섯 명의 하원상원 의장/부의장, 75명 이상의 장관 및 차관, 약 100명의 국회의원, 그리고 초대 대법원장(아담 스트쳄보시) 등 폴란드의 주요 지도자들이 이 회의를 거쳐갔다.[10] 이는 원탁회의가 단순한 협상을 넘어 폴란드의 미래 정치 지형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였음을 보여준다.

7. 1. "연대" 측


  • 그라지나 스타니셰프스카 (Grażyna Staniszewska)
  • 레흐 바웬사 (Lech Wałęsa)
  • 레흐 카친스키 (Lech Kaczyński)
  • 미에치스와프 길 (Mieczysław Gil)
  • 보그단 리스 (Bogdan Lis)
  • 브로니스와프 게레메크 (Bronisław Geremek)
  • 브와디스와프 리와크 (Władysław Liwak)
  • 브와디스와프 핀데젠 (Władysław Findysz)
  • 브와디스와프 프라시니우크 (Władysław Frasyniuk)
  • 비톨트 트제치아코프스키 (Witold Trzeciakowski)
  • 스타니스와프 스토마 (Stanisław Stomma)
  • 스테판 브라트코프스키 (Stefan Bratkowski)
  • 아담 미흐니크 (Adam Michnik)
  • 아로이치 피에트르지크 (Alojzy Pietrzyk)
  • 안제이 밀찬노프스키 (Andrzej Milczanowski)
  • 안제이 비엘로비에이스키 (Andrzej Wielowieyski)
  • 안제이 스텔마호프스키 (Andrzej Stelmachowski)
  • 안제이 첼린스키 (Andrzej Celiński)
  • 알렉산데르 할 (Aleksander Hall)
  • 야누시 오니시키에비치 (Janusz Onyszkiewicz)
  •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Jarosław Kaczyński)
  • 야체크 메르켈 (Jacek Merkel)
  • 야체크 쿠로니 (Jacek Kuroń)
  • 얀 로키타 (Jan Rokita)
  • 얀 올셰프스키 (Jan Olszewski)
  • 얀 유제프 슈체판스키 (Jan Józef Szczepański)
  • 에드바르트 라지비에비치 (Edward Radziewicz)
  • 에드바르트 슈바이크비치 (Edward Szwajkiewicz)
  • 예지 투로비치 (Jerzy Turowicz)
  • 유제프 시리시 (Józef Ślisz)
  • 즈비그뉴 부야크 (Zbigniew Bujak)
  • 클레멘스 샤니아프스키 (Klemens Szaniawski)
  •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Tadeusz Mazowiecki)
  • 헨리크 삼소노비치 (Henryk Samsonowicz)

7. 2. 공산 정권 측

폴란드 공산 정권은 1980년대 자유노조(Solidarność)의 민주화 운동과 1988년 폴란드 파업 등의 압력 속에서 1989년 2월 6일 시작된 원탁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체스와프 키슈차크 Czesław Kiszczak|체스와프 키슈차크pl 장군이 정부 측 협상을 주도했으며,[6] 예르지 우르반 Jerzy Urban|예르지 우르반pl은 정부 대변인으로 참여했다. 치열한 논의 끝에 공산 정권은 자유노조 측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게 되었다.

원탁회의 전체 참가자 약 452명 중[6] 공산 정권 및 관련 단체 측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소속
체스와프 키슈차크 Czesław Kiszczak|체스와프 키슈차크plPZPR (정부 측 대표단 주요 인물)
예르지 우르반 Jerzy Urban|예르지 우르반pl정부 대변인
노르베르트 알렉시에비치 Norbert Aleksiewicz|노르베르트 알렉시에비치plPZPR
스타니스와프 치오세크 Stanisław Ciosek|스타니스와프 치오세크plPZPR
마레크 호와코프스키 Marek Hołdakowski|마레크 호와코프스키plPZPR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Aleksander Kwaśniewski|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plPZPR (훗날 대통령)
레셰크 밀레르 Leszek Miller|레셰크 밀레르plPZPR (훗날 총리)
얀 리흘레프스키 Jan Rychlewski|얀 리흘레프스키plPZPR
즈비그니에프 소보트카 Zbigniew Sobotka|즈비그니에프 소보트카plPZPR
얀 자치우라 Jan Zaciura|얀 자치우라plPZPR
토마시 아담추크 Tomasz Adamczuk|토마시 아담추크plZSL
미코와이 코자키에비치 Mikołaj Kozakiewicz|미코와이 코자키에비치plZSL
보그단 크루레프스키 Bogdan Królewski|보그단 크루레프스키plZSL
얀 야노프스키 Jan Janowski|얀 야노프스키plSD
에드바르트 즈고비츠키 Edward Zgłobicki|에드바르트 즈고비츠키plSD
야누슈 야를린스키 Janusz Jarliński|야누슈 야를린스키plOPZZ
마체이 마니츠키 Maciej Manicki|마체이 마니츠키plOPZZ
하랄드 마투셰프스키 Harald Matuszewski|하랄드 마투셰프스키plOPZZ
알프레트 미오도비치 Alfred Miodowicz|알프레트 미오도비치plOPZZ
타데우시 롱치키에비치 Tadeusz Rączkiewicz|타데우시 롱치키에비치plOPZZ
로무알드 소스노프스키 Romuald Sosnowski|로무알드 소스노프스키plOPZZ
스타니스와프 비시니에프스키 Stanisław Wiśniewski|스타니스와프 비시니에프스키plOPZZ
제논 코멘데르 Zenon Komender|제논 코멘데르plPAX 협회
비에스와프 그비즈 Wiesław Gwiżdż|비에스와프 그비즈plPZKS
카지미에시 모라프스키 Kazimierz Morawski|카지미에시 모라프스키plChSS
브와디스와프 시와-노비츠키 Władysław Siła-Nowicki|브와디스와프 시와-노비츠키plChDSP



이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된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와 총리가 된 레셰크 밀레르 등 폴란드의 주요 정치인이 된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0]

7. 3. 가톨릭 교회 옵서버


  • 브로니스와프 뎀보프스키 신부
  • 얀우시 나르진스키 주교, 폴란드 아우크스부르크 신교 에반겔 교회 감독
  • 아로이즈 오르슐리크 신부

참조

[1] 학술지 The 1989 Polish Round Table Revisited: Making History https://quod.lib.umi[...] 1999-06-01
[2] 서적 Psychologia Okrągłego Stołu Smak Słowa 2019
[3] 학술지 25 lat po przełomie https://ejournals.eu[...] 2014
[4] 웹사이트 30 lat Okrągłego Stołu, część II – kontrowersje https://www.intro.me[...] 2019-02-07
[5] 문서 Kofta et al., p. 221–222.
[6] 서적 Polityczna historia Polski 1989-2023 Wydawnictwo Naukowe SCHOLAR
[7] 문서 Kofta et al., p. 240–242.
[8] 문서 Kofta et al., p. 243–245.
[9] 문서 Kofta et al., p. 251–254.
[10] 웹사이트 Lista obecności https://www.polityka[...] 2024-06-29
[11] 서적 Rycerze Okrągłego Stołu Czytelnik
[12] 뉴스 Poland Sets Free Vote in June, First Since '45; Solidarity Reinstated – A New Parliament – Opposition to Get 35% of Lower House and Open Vote in Upper https://www.nytimes.[...] 2023-04-06
[13] 웹사이트 30 lat Okrągłego Stołu, część I – geneza i przebieg wydarzeń https://intro.media/[...] 2019-02-06
[14] 웹사이트 Okrągły Stół został zaplanowany w Moskwie, interview with Andrzej Gwiazda, Super Express, 08.04.2009 http://www.se.pl/wyd[...]
[15] 웹사이트 Okrągły Stół był sukcesem komunistów, nie społeczeństwa, interview with Anna Walentynowicz, Super Express, 05.02.2009 http://www.se.pl/wyd[...]
[16] 웹사이트 Gover.pl, Polityka w sieci. Macierewicz: Okrągły Stół to przegrana, 06.-2.2009 http://www.gover.pl/[...]
[17] 웹사이트 4 czerwca 1989 r. – jak majstrowano Okrągły Stół by niezalezna.pl, 2011-06-04 http://niezalezna.pl[...]
[18] 웹사이트 Operacja "okrągłego stołu", interview with Filip Musiał, interia.pl, June 5, 2008 http://fakty.interia[...]
[19] 웹사이트 by Andy-aandy, June 3, 2011 http://salski.nowy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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