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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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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989년 북한 평양에서 개최된 행사로, 177개국 22,000명이 참가하여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 서울 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해 북한이 국가적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으며, 릉라도 5월 1일 경기장 등 대규모 시설을 건설했다. 축전은 "반제국주의 연대, 평화와 우정을 위하여"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문화, 스포츠, 정치 행사를 진행했으며, 특히 임수경의 방북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과도한 지출로 북한 경제에 타격을 주었으며, 외부 세계와의 교류는 북한 사회에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쳤다. 이 축전은 남북 관계를 악화시키고, 북한의 고립주의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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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기본 정보
행사 이름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다른 이름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로마자 표기: Je 13-cha Segye Cheongnyeon Haksaeng Chukjeon)
개최 국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최 도시평양
개최 기간1989년 7월 1일 – 7월 8일 (8일간)
참가 규모177개국, 22,000명
행사 장소
주요 장소청춘거리 스포츠촌
능라도 5월 1일 경기장
김일성경기장
관련 역개선역 (김일성경기장)
주최 및 후원
주최세계민주청년연맹
국제학생연맹
후원(정보 없음)
기타 정보
이전 축전제12차 세계 청년 학생 축전
다음 축전제14차 세계 청년 학생 축전
비용미화 45억 달러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로고
대회 로고

2. 준비 과정

평양축전을 위해 릉라도 5월1일 경기장, 평양국제영화회관, 동평양대극장, 평양교예극장, 양각도 축구경기장, 평양국제통신센터, 양각도호텔, 청년호텔 등 대규모 시설들이 건설되었다.[21] 이 중 릉라도 경기장은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경기장으로, 1989년 5월 1일 축제에 맞춰 공식적으로 건설이 완료되었으며 평양축전의 주경기장으로 이용되었다.[21][5][6]

북한 정부는 1987년 8월 19일에 결성된 대한민국 학생 단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와 협력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당시 의장 임종석)는 반미 및 친(親)통일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남한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노력을 집중했으며, 회원인 임수경을 축제에 비밀리에 파견했다.[7]

1981년, 제24회 하계 올림픽 개최지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로 결정된 이후, 북한은 올림픽 공동 개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1987년 8월에는 올림픽 마크를 새긴 김일성경기장 우표를 발행하는 등 공동 개최가 가능하다는 것을 어필했으나, 1987년 10월에 공동 개최안은 무산되었다. 그래서 서울 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해 세계청년학생축전의 개최를 결정했다고 알려져 있다.[14][15]

3. 진행 과정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77개 국가에서 22,000명이 참가하여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되었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자극받아 북한은 이 대회를 국가적인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였다.[22]

8일 동안 참가자들은 "반제국주의 연대, 평화와 우정을 위하여"라는 슬로건 아래 사회, 문화, 스포츠,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 축제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렸으며, 한국전쟁 이후 미국 재무부가 북한 방문을 처음으로 허용한 행사였다. 그러나 북한 정부는 외국인의 이동과 행동을 제한하고 자국민을 감시했다.[8]

덴마크 활동가들이 축제 개막식에서 북한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는 현수막을 펼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들 중 두 명은 구금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8]

축제 기간 동안 1,000여 개의 행사가 열렸다. 원탁 정치 토론, 연대 집회, 본회의, 스포츠 경기, 예술 공연, 영화 상영, 평양 및 기타 지역 방문 등이 진행되었다. 정치 행사는 주로 반제국주의적 토론과 평화, 군축, 비동맹, 인권, 청소년 권리 등의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양국 간 경제 및 정치적 관심사에 대한 회담도 자주 열렸다.[9][10]

축제의 8일은 각각 특정 테마에 할애되었다.[10]


  • 개막식
  • 평화
  • 독립과 민족 해방 투쟁
  • 환경 위기
  • 우정과 국제 연대
  • 청소년 및 학생의 권리
  • 개최국 기념일
  • 폐막식


대한민국 정부 관리 3명이 축제에 참석했지만, 당시 그들의 참석은 비밀이었다.[11]

3. 1. 임수경 방북 사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당시 의장 임종석)는 임수경을 비밀리에 평양축전에 파견했다.[21] 임수경은 '통일의 꽃'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21]

당시 남한 정부는 임수경의 방북을 금지했지만, 임수경은 이를 무시하고 방북했다. 평양에서 임수경은 연예인과 같은 대접을 받았으며, 그녀의 발언과 활동은 북한에서 방송되었다.[4] 임수경은 북한 정부로부터 통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4]

임수경의 모습은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12] 북한 주민들은 미국 식민 통치 하에서 남한 사람들이 불행과 기아에 시달린다고 생각했지만, 임수경은 고위 관리들에게 즉흥적인 발언을 하는 건강하고 말솜씨 좋은 젊은이로 비춰졌다.

축전 이후 임수경은 남한으로 돌아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3] 북한은 임수경 가족과의 인터뷰를 방송했는데, 남한 정권의 가혹함을 묘사하는 대신 가족의 좋은 집을 보여주었다.[3] 북한 시청자들은 "정치범"의 가족이 투옥되지 않고 직장을 유지하는 것에 의아해했다.[3]

일부 역사가들은 임수경이 북한의 이념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한다.[4] 임수경은 북한 주민들과 교류하며 논쟁적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고, 이는 북한 관리들을 당황하게 했다.[4]

4. 참가국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는 177개 국가에서 22,000명이 참가하여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22] 특히 서울 올림픽에 대한 대응으로, 북한은 이 대회를 국가적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여 서울 올림픽보다 큰 규모로 개최했다고 홍보했다.

개회식으로 향하는 코스타리카 대표단. 뒤에는 아일랜드 국기가 보인다.


북한은 180개국과 약 60개의 국가·지역 기구 대표, 국가 수반 등 많은 귀빈이 방문했다고 발표했다. 그린란드, 루뭄바 우호대학교, 서베를린도 1개국으로 간주되었다. 북한은 서울 올림픽에 불참했지만,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는 한국의 학생 운동가 임수경이 참가하여 전 민족이 참여하는 축전임을 강조했다.[14]

일본에서는 총평 청년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교류단"이 파견되었다.[15] 이들은 자치노 계열 여행사 주최로 일교조, 국노 등 노동조합원 90명으로 구성되어 연수 형식으로 참가했다.[15] 조선총련은 축전을 위해 100억의 상납금을 할당받고, 2,000명의 청년과 부인을 지원 요원으로 파견하여 자동차 정비 센터와 포장마차 음식점 운영을 무상으로 담당했다.[16]

5. 반응

서방 세계 언론은 대체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김일성과 북한 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위상을 높이려 한 실패한 시도로 평가했다.[8] 북한 정부는 주민 감시와 제약을 통해 외부 영향을 차단하려 했지만, 축제는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의 영향을 주었다.[3]

미국에서 온 기자 20명이 축제에 참석했다.[9]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북한 주민은 외국인과 기꺼이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화는 종종 매우 부자연스럽고 가짜처럼 들리며, 77세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찬사를 보내는 북한인 없이 1분이 지나가는 경우는 드물다"라고 회상했다.[13]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언론이 축제의 실제 내용보다 북한 체제 비판에 집중하여 편향된 보도를 했다고 지적한다.[9] 이들은 기자들이 축제를 북한의 선전 도구로만 축소하여, 자신들이 비판하고자 했던 북한의 특성과 동일한 문제점을 드러냈다고 비판한다.[9] 이러한 언론 편향은 축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을 왜곡했다는 주장이 있다.

6. 영향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서방 세계에서 김일성과 북한 정부가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다 실패한 시도로 평가받았다.[8] 북한은 주민 감시와 제약을 통해 외부 영향을 차단하려 했으나, 축제는 불가피하게 북한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3]

축제에는 미국 기자 20명이 참석했는데,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북한 주민들의 대화가 부자연스럽고 가짜처럼 들린다고 지적했다.[9][13]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기자들이 축제 보도를 북한/남한 문제와 북한 정권 문제로 축소하여 축제의 실제 내용에 대한 논의를 생략했다고 비판한다.[9] 이러한 언론의 편향성이 축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왜곡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축전 이후 북한은 정보 통제를 강화했지만, 역사학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이는 외부의 영향이 북한에 침투하는 데 있어 주요 변화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했다.[4] 이후 미디어 기술 발전과 중국과의 국경 통제 완화는 북한 주민들의 외부 세계 인식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1981년 제24회 하계 올림픽 개최지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로 결정된 이후, 북한은 올림픽 공동 개최를 주장하며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를 결정했다.[14][15]

6. 1. 경제적 영향

북한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준비하면서 릉라도 5월1일 경기장 등 대규모 시설 건설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연간 정부 예산(45억 달러)을 초과하고, 연간 GDP(157억 달러)[23]의 30%에 육박하는 47억달러를 투입했다.[24][25]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투자는 북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외국인들을 위해 발행한 '외화와바꾼돈표'는 통화량 팽창을 일으켜, 소련 붕괴, 자연재해와 함께 고난의 행군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5] 축전 준비에 쏟아부은 수십억 달러는 결국 50억 달러의 대외 부채로 이어졌고, 채권국들은 북한을 파산한 것으로 간주했다.[9]

축전과 함께 건설된 류경 호텔은 완공되지 못하고, 2020년대에도 건설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고 있다.[15] 북한은 GNP가 300억 달러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경기장과 숙박 시설을 건설하고 190개 이상의 국가 및 지역에서 1만 2,000명 이상을 무료로 초청하는 등 무리한 지출을 감행했다. 이러한 낭비는 북한 경제 악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15][17]

6. 2. 사회문화적 영향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를 전후로 여러 국가의 젊은이들이 북한을 방문했다. 특히 동유럽 국가 출신 젊은이들의 개방적인 연애관은 북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북한 젊은이들은 극히 제한적인 연애만을 경험했기에, 이러한 개방적인 문화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18] 축전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산보'라고 불리는 데이트 문화가 급증했으며, 지방에서도 미혼 남녀가 공개적으로 함께 걷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9]

축전 이후 북한 당국은 외부 정보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주민 통제를 강화했다.[10]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북한 주민들의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 역사학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이를 "외부의 영향이 북한에 침투하는 데 있어 주요 변화의 시작"이라고 평가하며, 이는 북한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4]

6. 3. 남북 관계에 미친 영향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한 북한의 경쟁적 대응으로 널리 알려진 평양축전은 남한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0] 축전 이전에는 1988년 7.7 선언을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가 북한을 상호 번영을 위한 협력 파트너로 간주하면서 남북 관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제시되었다.[10] 그러나 평양 축제 이후, 강인덕에 따르면 "이러한 남북 간의 대립적인 감정은 양측 대중들에게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10]

특히 전대협 대표로 비밀리에 파견된 임수경의 방북 사건은 남북 간 대립을 심화시켰다.[7] 당시 남한 정부는 임수경의 방북을 금지했지만, 임수경은 이를 무시하고 평양에 도착하여 '통일의 꽃'으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4]

그러나 임수경의 공개적인 모습은 남한 청년의 긍정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12] 북한 주민들은 미국 식민 통치 하에서 불행과 기아에 시달리며 억압된 삶을 산다고 이해했지만, 임수경은 고위 관리들에게 즉흥적인 정치적 발언을 하는 건강하고 말솜씨 좋은 젊은이였다.

축전 이후 임수경은 남한으로 돌아가 투옥되었지만,[3] 북한은 임수경 가족과의 인터뷰를 통해 남한 정권의 가혹함을 묘사하는 대신, 가족의 좋은 집을 보여주며 북한 주민들에게 "정치범" 가족의 현실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3]

일부 역사가들은 북한이 임수경을 통해 자국의 이념의 우월성과 인기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한다.[4] 그녀는 북한 주민들과 교류하며 논쟁적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고, 결국 북한 관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예상외로 미국이 지원하는 국가에서 사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4]

결과적으로 축제는 남북 간의 이전 화해 노력을 훼손했고, 양측이 더욱 비협조적인 요구를 하도록 만들었다.[10] 대한민국 대통령은 북한에게 정치 구조를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이전에는 주로 북한 측에서 제시되던 것이었다.[10]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더불어민주당은 임수경의 방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보수 진영에서는 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7. 기념 발행물

북한은 1989년 6월 기념 5원 우표(대회 로고와 조선어·영어 표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와 기념 10원 우표(대회 로고와 플래카드를 배경으로 연설하는 청년)를 발행했으며, 기념 스탬프도 사용되었다.[14]

소비에트 연방(소련)은 대회 로고를 새긴 10코페이카 우표를 발행했고,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은 자유 독일 청년단(FDJ) 오순절(1989년 5월 12일~5월 16일) 기념 25페니히 우표와 세트로 된 20페니히 우표를 1989년 5월 9일에 발행했다.

참조

[1] 논문 Understanding the Socialist Tourism of North Korea Under Kim Jong Un McFarland & Company 2020-03-01
[2] 논문 City profile: is Pyongyang a post-socialist city? 2021-01-01
[3] 웹사이트 North Korea's Response to the World: Is the Door Ajar? RAND 2015-10-19
[4] 웹사이트 Asia Times Online :: Korea News and Korean Business and Economy, Pyongyang News Asia Times 2011-08-13
[5] MA Power Play in Pyongyang: City and Spaces as Theaters of Power under the early Kim regime in North Korea 1950s–1990s https://www.academia[...] University of Puerto Rico 2020-06-01
[6] 웹사이트 Rungnado May First Stadium http://www.worldstad[...] 2014-06-12
[7] 논문 The Societal Impact of Student Politics in Contemporary South Korea 1991-01-01
[8] 뉴스 N. Korea Opens Doors to Stage Youth Festival 1989-07-02
[9] 웹사이트 The Rhetorical Reduction of the 13th 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 1992-10-01
[10] 웹사이트 The Aftermath of the 13th 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 2015-12-01
[11] 서적 The Interaction between Civil Society and the State in the History of Inter-Korean Sports Dialogue, 1988–2018 2020-10-01
[12] 웹사이트 Documenting the "Flower of Reunification": Lim Su-gyeong and the Memories of Korean Border Crossing 2013-01-01
[13] 뉴스 North Korea Bids Hello to the World https://www.nytimes.[...] 1989-07-01
[14] 서적 北朝鮮事典―切手で読み解く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 竹内書店新社 2001-01-01
[15] 서적 北朝鮮トリビア 飛鳥新社 2004-01-01
[16] 서적 朝鮮総連は何をやってきたのか 宝島社 1995-01-01
[17] 뉴스 北朝鮮ミサイル“標的”は韓国 権力闘争…金政権「3つの本質」とは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18] 서적 図解 あっと驚く、北朝鮮! 三笠書房 2004-01-01
[19] 서적 北朝鮮の日常風景 コモンズ 2007-01-01
[20] 서적 北朝鮮の最高機密 文春文庫 1998-01-01
[21] 뉴스 전국대학생연합회,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결정 https://news.kbs.co.[...] 1989-02-11
[22] 뉴스 제13차 평양서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 https://imnews.imbc.[...] 1989-07-01
[23] 문서 1989년 UN 통계 기준
[24] 문서 2024년 환율로는 120억 달러로, 한화로는 약 16조 원이다.
[25] 뉴스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북한경제에 후유증 심각 https://news.kbs.co.[...] 198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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