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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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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병대 제2해병여단 제1대대가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민간인 69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군의 조사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으며, 생존자들의 증언과 사진 자료를 통해 참혹함이 알려졌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사건 관련 조사를 거부하고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시민 평화 법정 개최, 소송 제기 등을 통해 진실 규명 노력이 이어졌다. 2023년, 한국 법원은 대한민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으며, 정부는 이에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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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
사건 개요
명칭퐁니·퐁넛 학살 사건
로마자 표기Pongni·Pongneot yangmin haksal sageon
위치남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마을 및 퐁넛 마을
날짜1968년 2월 12일
유형집단 학살
사망자69–79명
1968년 2월 12일 퐁니, 퐁넛 마을에서 미 해병대가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1968년 2월 12일 퐁니, 퐁넛 마을에서 미 해병대가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가해자
미국 해병대 목격자 및 생존자 증언대한민국 해병대
대한민국 주장한국 해병대 복장을 한 베트콩
관련 사건
관련 캠페인베트남 전쟁 중 민간인 학살 목록

2. 배경

베트남 전쟁은 정규군 간의 전투 외에도 베트콩으로 알려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 활동이 활발했던 전쟁이었다. 북베트남은 이를 “인민 전쟁”이라고 불렀다.[45] 미군과 한국군 등 남베트남 동맹군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기 어려워 민간인을 전략촌에 수용하고, 나머지 지역은 “자유 사격 지대”로 간주하여 수색 섬멸 작전을 펼쳤다. 미라이 학살에서처럼, 작전 중인 미군은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베트콩”이며 “어린 아이도 첩자”라는 태도를 보였다.[46] 조너선 닐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 측이 게릴라를 찾지 못하면 사람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민간인에게 압력을 가했고, 이는 미국 정부의 압력 아래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47]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은 미군의 전략에 따라 안전 마을로 분류되었고, 미국 해병대 켑소대와 자매 결연을 맺어[48] 주민들은 미군이나 한국군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고, 마을에는 남베트남군의 가족들도 살고 있었다.[49]

2. 1. 베트남 전쟁과 민간인 학살 문제

베트남 전쟁은 정규군 간의 전투 외에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게릴라 활동이 활발했던 전쟁이었다. 북베트남은 이를 “인민 전쟁”으로 규정했으나,[45] 미군과 한국군 등 남베트남 동맹군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민간인 피해를 야기했다. 미군의 미라이 학살에서 볼 수 있듯,[46] 민간인들을 전략촌에 수용하고 나머지 지역을 “자유 사격 지대”로 간주하는 전략은 민간인 희생을 초래했다. 퐁니·퐁넛 마을은 미군의 전략에 따라 안전 마을로 분류되었고, 미국 해병대 켑소대와 자매 결연을 맺은 곳이었기에[48] 주민들은 한국군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다.[49]

3. 학살

1968년 2월 12일, 퐁니·퐁넛 마을에서 대한민국 해병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에 강력히 항의하였고, 미군은 독자적인 조사를 벌였다. 주월 미군 사령부 감찰부는 조사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20여 장의 사진이 첨부되었고, A4 용지 규격 총 554장 분량이었다. 보고서에서 한국군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잔혹 행위를 저지르고 사람들을 학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기밀문서로 분류되어 있다가 2000년 6월 1일 비밀이 해제되었다.[38]

미군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은 미 해병 연합 행동소대 Delta-2 소속 본(J. Vaughn) 상병이 촬영한 것이다. 본 상병은 한국군 철수 이후 민간인 부상자 치료를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55]

3. 1. 사건 경위

1968년 2월 12일 오전 11시경,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여단 1중대가 1번 도로를 따라 작전 중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의 민간인 70여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40]

《파월 한국전사》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여 기록했다.[51]

그러나 생존자 증언, 참전 군인 증언, 미군 측 조사 보고서는 이 기록과 다르다.[52] 생존한 마을 주민은 한국군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고 증언한다.[52]

당시 작전에 참여한 1중대 1소대장 최영언 씨는 "자기 마을로부터 선두 1소대 병력 쪽을 향해 사격이 날아왔다. (중략) 중대장의 응답은 마을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베트콩은 떠나고 겁먹은 마을 사람들뿐이었고, 부대 후미의 누군가가 갑자기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증언했다.[40] 2소대장 이상우 역시 "베트콩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마을 주민들도 저항하거나 그런 움직임도 없었다. 애들이 겁이 나서 도망가니까 죽인 거지 참 ……."이라고 말했다.[53]

미국 퀘이커 구호단체 보고서는 퐁니·퐁넛 학살 생존자들이 “한국군이 정찰중에 대인 지뢰에 걸렸고, 마을 사람들은 지뢰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총소리는 없었다. 그 뒤 한국군이 마을에 왔고 학살이 일어났다”고 증언했다고 기록했다.[56]

1968년 4월 29일,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는 파월사령부 사령관 채명신 장군에게 전쟁범죄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채명신 장군은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하며 베트콩의 기만전술이라고 주장하였다.[57]

1969년 2월, 퐁니·퐁넛 마을 생존자들은 남베트남 정부에 복무하고 있는 군인의 가족이고, 합당한 시민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학살을 당하였다며 진실 규명과 배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남베트남 하원 의장에게 보냈다.[49]

1969년 12월 18일,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샘 샤프 대령은 '1968년 2월 12일 한국군 해병에 의한 잔혹행위 의혹'이라는 비밀문서를 보냈다. 첨부된 미해병 제3상륙전사령부 조사보고서 중 응우옌싸의 진술은 당시 학살 정황을 보여준다.

미군 정치 고문 제임스 맥은 보고서에서 퐁니·퐁넛과 같은 민간인 학살이 무수히 일어나 "한국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증오심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진단했다.[62]

3. 2. 학살 직후의 보고

미군 감찰관 로버트 모어헤드 쿡 대령은 1970년 1월 10일 대한민국 해병대가 학살을 저질렀음을 밝히는 보고서를 제출했다.[16] 이 보고서는 기밀 해제 후 공개되었다. 미 해병 연합 행동소대 J. 본 하사가 촬영한 사진들은 학살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22]

4. 학살 이후

이 학살 사건은 널리 알려지면서 해당 지역에서 진행 중이던 평정 작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9] 대한민국 해병대를 인구가 많은 제1군단의 다낭 구역에서 비어있는 구역으로 이동시킨 것은 지역 주민과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하미 학살과 함께 진행 중이던 평정 노력을 훼손했다.[7]

이 지역의 남베트남 및 미국 지휘관들은 한국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며, 라트본 M. 톰킨스 장군과 로버트 E. 쿠시먼 주니어 장군은 한국군이 비협조적이고 보안에 참여하려 하지 않으면서 잔학 행위를 저지르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들을 해당 구역으로 이전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잔학 행위는 ARVN/미군 지휘관들에 의해 보고되었고 사이공으로 전달되었다.[7]

2000년 11월 11일, 채명신은 미국 육군 참모총장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여러 차례 조사를 요구했다고 인정했다.[10] 그러나 채명신은 여전히 두 마을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작전 경로에 없었다고 주장하며, 베트콩이 한국 해병대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비난했다.[10]

도랑에 버려진 어린이 시신들


이 사건은 구수정이 하노이의 기록 보관소를 조사하면서 발견되어 한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11] 한국 시민 단체들과 학살 생존자들은 한국 지도자들에게 이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12][13] 위안부 피에타 조각상을 디자인한 김서경 & 김은성은 학살 현장에 평화비와 유사한 기념 조각상을 세웠다.[14]

2023년 2월, 학살 생존자가 한국 지방 법원에서 소송에서 승소하여 당시 박정희 정부가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정부에 보상을 명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현재 이 사건에 대해 항소 중이다.[15]

4. 1. 국제 사회의 반응과 진상 규명 노력

CAP 델타-2 소속 병력과 병원 생존자들의 증언은 대한민국 국군이 사건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지목했고, 이로 인해 CAP 지휘관과 주월 미군 사령관은 전쟁 범죄 조사를 요구했다. 이들은 모두 대한민국 국군 사령관 채명신 중장에게 직접 조사를 요구했다. 1968년 4월 16일, 제3해병사단(III MAF)은 이 사건을 주월 미군 사령부(MACV)에 보고했다. 황쩌우(Hoang Chau) 마을, 푸억미(Phuoc My), 탄푸(Thanh Phu) 및 호아폰(Hoa Phon)에서도 총 5건의 다른 마을 학살 사건이 조사되었다.[4] 1968년 4월 29일, MACV는 채명신 장군에게 보고서를 전달했다.[4]

1968년 6월 4일, 채명신 장군은 MACV에 이 사건을 조사했으며, 대한민국 해병대가 퐁니(Phong Nhị)에 간 적이 없으며 작전은 퐁녓(Phong Nhất)으로 제한되었다고 밝혔다. 채명신은 한국군을 폄하하기 위해 한국식 위장복을 입은 베트콩(VC)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트콩이 한국 해병대가 착용한 오리 사냥꾼 위장 패턴을 사용하여 잘못된 행위를 저질러 여론을 악화시킨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한 채명신은 대한민국 해병대 부사령관이 학살에 대해 사과했다는 것을 부인했으며, 쌀 포대는 사과가 아니라 일반적인 난민 지원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4]

베트콩의 비밀 보고서에서는 이 학살에 대해 논하며, 명백히 한국군이 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비난하고, 주민들을 GVN/USMC 평정 노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들의 대의에 동참시키기 위한 보복을 논의했다.[9]

1968년 2월 12일, 퐁니·퐁넛 마을을 방문한 대한민국 해병대 제2해병여단(청룡부대) 제1대대는 부녀자들을 모아 근거리에서 총살하고 불을 지르고 떠났다. 그런데 그날 미국 해병대원 4명, 남베트남군 26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현장에 도착했다.[22] 미국·베트남 군은 생존자에게 응급 처치를 하고 병원으로 이송했다.[22][35] J. 본하사에 의해 사건 현장 촬영이 이루어졌다.[22] 사건 이후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희생자의 시신을 국도 1호선에 늘어놓고 항의했다.

사건을 계기로 미국 육군 참모총장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대장이 한국군에 조사 보고를 반복해서 요구하자,[25] 한국군은 대한민국 해병대 군복을 입은 베트콩에 의한 음모였다고 미군에 보고했다.[25] 퐁니·퐁넛 학살 당시 한국에서는 문경 학살 사건, 보도 연맹 사건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학살 사건을 은폐하는 데 성공했다.[26][27] 한국군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미군은 미군 감찰관 로버트 모어헤드 쿡대령에 의한 조사가 이루어져 1970년 1월 10일에 대한민국 해병대에 의한 학살 사건이었음을 밝힌 보고서를 제출했다.[16] 채명신은 한겨레신문 인터뷰(2000년 11월)에서 미국인은 게릴라전에 무지했기 때문에 한국 측과 대립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미군은 한국군의 전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했다.[25]

미군 내부에서는 한국군을 완전한 후방 부대로 하거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어 누구를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 지역으로 배치 전환해야 한다는 검토가 이루어졌다.[29] 한국군은 잔혹한 방식으로 여성을 강간한 후 살해하는 경우가 많았고, 안린 군의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한국군은 특히 여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30] 1969년 2월에는 사건 유족들이 남베트남 의회에 배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22]

4. 2. 한국 사회의 대응

1969년, 피해자 가족 중 한 명이 남베트남 국회 의장에게 보상 청원을 했다.[8] 지역 남베트남 민간인들은 이 학살이 대한민국 군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에 특히 충격을 받았다.[9]

이 사건은 구수정이 하노이의 기록 보관소를 조사하면서 발견되어 한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11] 한국 시민 단체들은 한국 지도자들에게 이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해 왔다.[12] 학살 생존자들도 마찬가지로 사과를 요구했다.[13] 위안부 피에타 조각상을 디자인한 김서경 & 김은성은 학살 현장에 비슷한 기념 조각상을 세웠다.[14]

2000년 11월 11일, 채명신은 미국 육군 참모총장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여러 차례 조사를 요구했다고 인정했다.[10] 그러나 채명신은 여전히 두 마을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작전 경로에 없었다고 주장하며, 베트콩이 한국 해병대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비난했다.[10]

2013년 8월, 권기현 대한민국 국방부 대변인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인 학살·여성 유린을 부정했다.[31]

2018년 4월, 국내 변호사 단체와 베트남 우호 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베트남 시민 평화 법정이 열렸다.[32] 퐁니·퐁넛 학살의 생존자였던 응우옌 티 탄 등이 원고가 되어 대한민국 정부를 제소했고, 판결에서는 "중대한 인권 침해이며, 전쟁 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이 인정되었다.[33]

2021년 3월 25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국가정보원이 가지고 있는 퐁니·퐁넛 마을 학살과 관련한 정보를 공개하라고 판결하였고 국가정보원은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정보를 공개하기로 결정하였다.[75] 그러나 실제 공개된 내용은 당시 조사를 받았던 군인 3명의 이름 뿐이었다. 소송을 진행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추가적인 정보 공개를 다시 요구하였다.[76]

2023년 2월, 이 학살의 생존자는 한국 지방 법원에서 소송에서 승소하여 당시 박정희 정부가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정부에 보상을 명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현재 이 사건에 대해 항소 중이다.[15]

4. 3. 시민평화법정

2018년 4월, 국내 변호사 단체와 베트남 우호 단체 등은 베트남 시민 평화 법정을 열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다.[32] 퐁니·퐁넛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 등이 원고가 되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정은 이 사건을 "중대한 인권 침해이며, 전쟁 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 규정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33]

5. 사법 절차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생존자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배상 요구 소송이 있었다. 이 소송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하여 한국을 상대로 한 최초의 민사 소송이었다. 2023년 2월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첫 판결을 내렸다.[77] 법원은 피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3000.0099999999998만의 지급을 명령했으며, 소멸 시효와 정부 간 합의에 따른 개인 청구권 소멸 주장은 인정되지 않았다.[37]

5. 1. 피해배상 요구 소송

2020년, 생존자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하여 한국을 상대로 한 최초의 민사 소송이었다.

2023년 2월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피해자 응우옌 티탄의 피해배상 청구에 대해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하고 청구 금액 3100만 전액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77]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집단적으로 수행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서울지방법원은 원고의 증언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여 3000.0099999999998만의 지급을 명령했다. 소멸 시효와 정부 간 합의에 따른 개인 청구권 소멸이 쟁점이 되었으나,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장애 사유와 정부 간 합의의 구속력 부재를 인정하여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37]

6. 류진성의 폭로

2017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류진성은 익명 인터뷰를 통해 "끔찍했던 장면이 생생하다. 언제 생을 마칠지 모르니 꼭 알려야겠다"며 50년 전 베트남 전쟁에서 경험했던 민간인 학살을 증언했다.[78] 그는 "우리 해병이 민간인으로 알고 죽인 건 없었고 베트콩으로 오인해서 죽이는 일은 작전 때마다 있었다"며 "죄악이다.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하나 싶다"라고 밝혔다.[78]

2018년 4월, 시민평화법정에서 류진성의 익명 인터뷰 영상이 증거로 제출되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1968년 2월 디엔반현 퐁니·퐁넛마을에서 1대대 1중대 2소대 소속 첨병으로 작전에 참여했던 경험을 증언했다.[79]

2021년 7월, 류진성은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며 국회에서 민간인 학살을 추가 폭로했다. 그는 "피신하지 못한 부녀자, 노인들을 전부 끌어내서 논바닥 가운데 전부 집결을 시켜놓고 그 과정에 현장에서 사살한 민간인도 있다"며 "우리 소대에서도 노인 한 분을 사살했다"고 증언했다.[80] 또한 "'잡아놓은 민간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물었더니 중대장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는 말을 3소대 애들에게 들었다"며 "모여있는 양민을 전부 사살한 것"이라고 말했다.[80]

류진성은 1968년 2월 작전 중 민간인 시신 100구 정도를 목격했다고 증언하며, 이는 잊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군이 베트콩으로 오인하여 민간인을 학살했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베트콩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81] 그는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고 사과하고 보상하고 미래를 위해 좋은 파트너가 되도록, 판결 이전에 정부가 그런 정책을 솔선수범 해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81]

7. 베트남 정부의 태도

1990년대 이후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사과를 제안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우리 국민이 마음의 빚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1992년 한국과 수교할 당시부터 승전국 입장에서 굳이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문재인 정부가 사과 의사를 타진하자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82]

참조

[1] 뉴스 미국의 관심은 '학살은폐 책임' 최초공개된 미국 비밀보고서의 의미… 정부는 참전군인의 명예를 위해서 진상조사에 나서라 http://h21.hani.co.k[...] 2000-11-15
[2] 서적 After the massacre: commemoration and consolation in Ha My and My Lai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 뉴스 편견인가, 꿰뚫어 본 것인가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의 보고서 "쿠앙남성 주둔 한국군은 무능·부패·잔혹" http://h21.hani.co.k[...] 2000-11-15
[4] 웹사이트 Alleged atrocity committed by ROK Marines on 12 February 1968 http://vietnamvoices[...] Adjutant General's Office 2020-09-17
[5] 뉴스 특집 "그날의 주검을 어찌 잊으랴" 베트남전 종전 26돌, 퐁니·퐁넛촌의 참화를 전하는 사진을 들고 현장에 가다 http://h21.hani.co.k[...] 2001-01-24
[6] 뉴스 여기 한 충격적인 보고서가 있다 미국이 기록한 한국군의 베트남 학살 보고서 발견 http://www.ohmynews.[...]
[7] 서적 U.S. Marines in Vietnam: 1968, the Defining Year https://www.usmcu.ed[...] History and Museums Division, USMC
[8] 뉴스 끝없이 벗겨지는 '제2의 밀라이' http://h21.hani.co.k[...] 2011-07-25
[9] 웹사이트 Anatomy of US and South Korean Massacres in the Vietnamese Year of the Monkey, 1968 {{!}}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 https://apjjf.org/-H[...] 2018-06-07
[10] 뉴스 "한국군도 많이 당했다"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총사령관 인터뷰… 남베트남군 사령관 만나 사과한 적도 http://h21.hani.co.k[...] 2000-11-15
[11] 웹사이트 Reckoning with Korea's role in Vietnam War massacres http://koreajoongang[...] 2018-06-15
[12] 뉴스 'Time to apologize for Korea's own war crimes in Vietnam' http://www.koreahera[...] 2018-06-15
[13] 뉴스 "[Newsmaker] Vietnam massacre victims demand Korean government's apology" http://heraldk.com/e[...] 2018-06-15
[14] 뉴스 Sculptor to make symbol of Vietnam massacres https://www.koreatim[...] 2017-06-22
[15] 뉴스 The biggest Vietnam War story that Americans don't talk about https://www.bostongl[...] 2024-10-29
[16] 뉴스 잠자던 진실, 30년만에 깨어나다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무엇을 했는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비밀해제 보고서•사진 최초공개 http://h21.hani.co.k[...] 2000-11-15
[17] 문서 p47 Di Heonik Kwon
[18] 문서 「韓国のベトナム大虐殺を告発する」 月刊正論 2014年7月号 pp.64-81
[19] 뉴스 미국의 관심은 ‘학살은폐 책임’ 최초공개된 미국 비밀보고서의 의미… 정부는 참전군인의 명예를 위해서 진상조사에 나서라 http://h21.hani.co.k[...] 2000-11-15
[20] 뉴스 「韓国軍がベトナム戦争で民間人虐殺」、ソウル教育庁の教育資料が物議 http://www.chosunonl[...] 2020-06-30
[21] 서적 知られざる歴史の真実 世界史編 インターナショナル・ラグジュアリー・メディア
[22] 뉴스 ‘끝없이 벗겨지는 ‘제2의 밀라이’미군 보고서로 다시 입증된 <한겨레21>의 퐁니·퐁넛사건 보도… 남은 건 ‘누가 쏘았는가’ http://www.hani.co.k[...] 2000-11-15
[23] 서적 After the massacre: commemoration and consolation in Ha My and My Lai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4] 문서 Kwon, p. 1.
[25] 뉴스 “한국군도 많이 당했다”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총사령관 인터뷰… 남베트남군 사령관 만나 사과한 적도 http://h21.hani.co.k[...] 2000-11-15
[26] 뉴스 South Korea owns up to brutal past http://www.smh.com.a[...] 2008-11-05
[27] 뉴스 '문경학살사건' 유족 항소심도 패소('聞慶虐殺事件' 遺族抗訴審も敗訴) http://www.chosun.co[...] 2009-08-06
[28] 웹사이트 The Cold Warrior http://www.newsweek.[...] Newsweek 2011-09-23
[29] 뉴스 편견인가, 꿰뚫어 본 것인가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의 보고서 “쿠앙남성 주둔 한국군은 무능·부패·잔혹” http://h21.hani.co.k[...] 2000-11-15
[30] 문서 WORLD AFFAIRS 証言 Apocalypse Then 「私の村は地獄になった」ニューズウィーク日本版 2000年4月12日号 P.24
[31] 뉴스 Battle of the dueling war crimes http://www.globalpos[...] グローバル・ポスト 2013-08-16
[32] 웹사이트 「ベトナム民間人虐殺市民平和法廷」ソウルで開かれる http://japan.hani.co[...] 2019-07-07
[33] 웹사이트 “미투도 김영란법도 ‘노’라고 말할 권리 위한 것” http://www.hani.co.k[...] 2019-07-07
[34] 뉴스 특집 “그날의 주검을 어찌 잊으랴” 베트남전 종전 26돌, 퐁니·퐁넛촌의 참화를 전하는 사진을 들고 현장에 가다 http://h21.hani.co.k[...] 2001-04-24
[35] 뉴스 여기 한 충격적인 보고서가 있다 미국이 기록한 한국군의 베트남 학살 보고서 발견 http://www.ohmynews.[...] 2000-11-14
[36] 뉴스 미군 보고서로 다시 입증된 <한겨레21>의 퐁니•퐁넛사건 보도… 남은 건 ‘누가 쏘았는가’ http://h21.hani.co.k[...] 2000-11-23
[37] 웹사이트 ベトナム戦争で民間人虐殺 政府の賠償責任初認定=韓国地裁 https://jp.yna.co.kr[...] 聯合ニュース 2023-02-09
[38] 뉴스인용 ‘표지이야기’ 잠자던 진실, 30년만에 깨어나다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무엇을 했는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비밀해제 보고서·사진 최초공개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00-11-15
[39] 뉴스 역사발굴/단명의 길, 디엔반의 비명 http://legacy.h21.ha[...] 한겨레21 1999-10-28
[40] 뉴스 양민학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했다 http://legacy.h21.ha[...] 한겨레21
[41] 뉴스 1대대 1중대 2소대 3분대원의 증언 http://legacy.h21.ha[...] 한겨레21 2000-06-01
[42] 뉴스 베트남전 양민학살 의혹 美보고서' 공개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0-11-14
[43] 뉴스 베트남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 추모비 세운다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04-06-17
[44] 웹사이트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음해자해 행위와 퐁니퐁넛 진실 http://www.vvak.kr/b[...]
[45] 웹사이트 "The History Place — Vietnam War 1945–1960" http://www.historypl[...] 2012-11-14
[46] 서적 학살, 그 이후 Archive 2012
[47] 서적 미국의 베트남 전쟁 책갈피 2004
[48] 서적 미안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49] 서적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책갈피
[50] 서적 대한민국 해병대 살림 2006
[51] 서적
[5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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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서적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한겨레출판
[55] 뉴스 여기 한 충격적인 보고서가 있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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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뉴스 청룡여단서 양민학살 조작은폐 http://legacy.h21.ha[...] 한겨레21
[5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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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뉴스 편견인가, 꿰뚫어 본 것인가 http://legacy.h21.ha[...]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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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뉴스 고경태의 1968년 그날 ⑬ 사진을 찍은 자와 찍힌 자, 20대 미군과 10대 베트남 소녀의 이야기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14-03-31
[65] 뉴스 그날의 주검을 어찌 잊으랴 http://legacy.h21.ha[...] 한겨레21
[66] 웹사이트 Battle of the dueling war crimes http://www.globalpos[...] Global Post
[67] 뉴스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 방한…고엽제전우회 "종북" 반발 "위안부 문제와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다르지 않아" http://m.pressian.co[...] 프레시안 2015-04-07
[68] 뉴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 “사과있어야 용서도 가능”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8-04-19
[69] 블로그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https://blog.naver.c[...]
[70] 블로그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판결 https://blog.naver.c[...] 2018-04-22
[71] 뉴스 시민평화법정 대한민국, 베트남학살 책임인정·배상하라 https://www.lawtimes[...] 법률신문 2018-04-23
[72] 뉴스 정식재판 땐 소멸시효 난관…“특별법 추진” http://www.hani.co.k[...] 한겨레 2018-04-23
[73] 뉴스 베트남 민간인 학살 어렵게 입 뗀 생존자 “참상 알려져서 다행”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18-04-26
[74] 뉴스 국정원 또 “베트남 민간인학살 정보 비공개”…법원 판단도 무력화 http://www.hani.co.k[...] 한겨레 2018-12-26
[75] 뉴스 국정원 “대법 판결 따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자료 공개하겠다” https://www.hani.co.[...] 한겨레 2021-03-21
[76] 뉴스 4년 소송으로 받은 ‘15글자’…정부의 ‘베트남전 학살 기록’ 보유 확인 http://www.hani.co.k[...] 한겨레 2021-04-09
[77] 뉴스 한국 ‘베트남 민간인 학살’ 첫 배상책임…법원 “한국군이 총살” https://www.hani.co.[...] 한겨레 2023-02-07
[78] 뉴스 참전군 폭로 "베트콩 구별안돼 민간인 총살했다" https://www.nocutnew[...] 노컷뉴스 2017-12-26
[79] 뉴스 베트남학살 참전군 "살려달라던 노인, 선임병이 쐈다" https://www.nocutnew[...] 노컷뉴스 2018-04-21
[80] 뉴스 베트남 참전군 "논바닥에 모아놓고 민간인 사살" https://m.nocutnews.[...] 노컷뉴스 2021-07-07
[81] 뉴스 "비무장 민간인 학살을 무용담처럼"…베트남 참전 해병대원의 고백 https://www.news1.kr[...] 뉴스1 2023-02-09
[82] 뉴스 김대중 “미안” 노무현 “마음 빚”…한국 대통령 세번째 ‘사과’ 경향신문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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