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 안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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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라 안젤리코는 14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화가로, 본명은 귀도 디 피에트로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에 입회하여 프라 조반니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피에솔레의 산 도메니코 수도원에서 책 삽화가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 프레스코화, 바티칸의 니콜리나 예배당 벽화 등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을 주로 그렸으며, 단순하고 차분한 색채와 경건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1982년 시복되었으며, 가톨릭 예술가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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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안젤리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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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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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귀도 디 피에트로 |
출생일 | 1395년경 |
출생지 |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무젤로 지역 루페카니나 |
사망일 | 1455년 2월 18일 (약 59세)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국적 | 이탈리아 |
분야 | 회화, 프레스코 |
후원자 | 코시모 데 메디치 교황 에우제니오 4세 교황 니콜라오 5세 |
사조 | 초기 르네상스 |
주요 작품 | 코르토나의 수태고지 피에솔레 제단화 산 마르코 제단화 예수 강하 니콜리네 예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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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정보 | |
기타 정보 | |
다른 이름 | 프라 안젤리코, 베아토 안젤리코 |
2. 생애
프라 안젤리코는 14세기 후반, 피렌체 근처 무젤로 지역의 피에솔레 가까이에 있는 비키오 디 무젤로의 루페카니나 마을에서 귀도 디 피에트로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7]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귀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어린 시절에는 당시 이탈리아 풍습에 따라 귀돌리노("작은 귀도")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프라 안젤리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17년 10월 17일, 귀도 디 피에트로라는 이름으로 카르미네 교회, 즉 성모승천 성당에 있는 종교적 동업조합이나 길드에 가입했을 때의 기록이다.[8] 이 기록은 그가 이미 화가였음을 보여주는데, 1418년 1월과 2월에 산토 스테파노 델 폰테 교회에서 한 작업에 대한 귀도 디 피에트로에게 지불된 두 건의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8]
1423년,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면서 프라 조반니(Fra Giovanni, 요한 형제)로 불리기 시작했다.[9] ''프라''(Fra)는 '형제'를 뜻하는 라틴어 ''frater''의 축약어로, 탁발 수사의 관례적인 칭호이다. 그는 피에솔레의 산 도메니코 수도원 소속이었다.
바사리에 따르면, 프라 안젤리코는 처음에는 책 삽화가로서 훈련을 받았는데, 아마도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이었던 그의 형 베네데토와 함께 일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국립 박물관이 된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는 그의 손으로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2] 화가 로렌초 모나코가 그의 예술적 훈련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시에나 화파의 영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밀라노에서 바리코 화가에게서도 교육을 받았다.
1408년부터 1418년까지 프라 안젤리코는 코르토나의 산 도메니코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원에 있었는데, 거기서 도미니크 교회에 프레스코화를 그렸지만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는 게라르도 스타르니나의 조수였거나 그의 추종자였을 가능성이 있다.[10] 1418년부터 1436년까지 그는 피에솔레로 돌아와 교회와 피에솔레 제단화를 위해 여러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훼손되었지만 이후 복원되었다. 제단화의 전면부는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런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영광 속의 그리스도와 축복받은 도미니크 수도회원을 포함한 250명이 넘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의 걸작 중 일부를 그렸는데, 그중에는 ''겸손의 성모'' 버전 (티센-보르네미사 박물관 소장,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에 대여)과 마드리드의 수태고지, 프라도 미술관의 ''석류의 성모''가 있다.
2. 1. 초기 생애 (1395년 ~ 1436년)
프라 안젤리코는 14세기 후반, 피렌체 근처 무젤로 지역의 피에솔레 가까이에 있는 비키오 디 무젤로의 루페카니나 마을에서 귀도 디 피에트로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7]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귀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어린 시절에는 당시 이탈리아 풍습에 따라 귀돌리노("작은 귀도")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프라 안젤리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17년 10월 17일, 귀도 디 피에트로라는 이름으로 카르미네 교회, 즉 성모승천 성당에 있는 종교적 동업조합이나 길드에 가입했을 때의 기록이다.[8] 이 기록은 그가 이미 화가였음을 보여주는데, 1418년 1월과 2월에 산토 스테파노 델 폰테 교회에서 한 작업에 대한 귀도 디 피에트로에게 지불된 두 건의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8]1423년,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면서 프라 조반니(Fra Giovanni, 요한 형제)로 불리기 시작했다.[9] ''프라''(Fra)는 '형제'를 뜻하는 라틴어 ''frater''의 축약어로, 탁발 수사의 관례적인 칭호이다. 그는 피에솔레의 산 도메니코 수도원 소속이었다.
바사리에 따르면, 프라 안젤리코는 처음에는 책 삽화가로서 훈련을 받았는데, 아마도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이었던 그의 형 베네데토와 함께 일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국립 박물관이 된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는 그의 손으로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2] 화가 로렌초 모나코가 그의 예술적 훈련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시에나 화파의 영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밀라노에서 바리코 화가에게서도 교육을 받았다.
1408년부터 1418년까지 프라 안젤리코는 코르토나의 산 도메니코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원에 있었는데, 거기서 도미니크 교회에 프레스코화를 그렸지만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는 게라르도 스타르니나의 조수였거나 그의 추종자였을 가능성이 있다.[10] 1418년부터 1436년까지 그는 피에솔레로 돌아와 교회와 피에솔레 제단화를 위해 여러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훼손되었지만 이후 복원되었다. 제단화의 전면부는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런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영광 속의 그리스도와 축복받은 도미니크 수도회원을 포함한 250명이 넘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의 걸작 중 일부를 그렸는데, 그중에는 ''겸손의 성모'' 버전 (티센-보르네미사 박물관 소장,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에 대여)과 마드리드의 수태고지, 프라도 미술관의 ''석류의 성모''가 있다.
2. 2.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1436년 ~ 1445년)
1436년, 프라 안젤리코는 피에솔레 수도원의 여러 수사들과 함께 피렌체에 새로 지어진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이주했다. 이 이주는 그를 지역 예술 생활의 중심에 위치하게 하였고,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33] 코시모는 수도원에 자신을 위한 방을 마련하여 세상으로부터 "물러날" 수 있도록 했다.[33]바사리에 따르면, 코시모의 권유로 프라 안젤리코는 수도원 장식 작업을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장엄한 회의실 프레스코화,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 꼭대기에 있는 수태고지[28], 성인들과 함께 있는 마에스타(또는 성모 승천)(9호실) 등이 포함된다.[2] 각 방은 옆에 있는 단일 둥근 머리 창문과 크기와 모양이 일치하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프레스코화는 명상적인 목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이며, 희미하고, 고요하며, 세상 밖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11]

1439년 프라 안젤리코는 플로렌스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산 마르코 제단화''를 완성했다.[11] 성모와 아기 예수를 성인들이 둘러싼 이미지는 드물지 않았지만, ''산 마르코 제단화''에서 성인들은 공간 안에 단단히 서 있으며, 마치 영광스러운 성모를 목격한 공유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룹화되어 있다.[11] 이 새로운 장르인 신성한 대화는 조반니 벨리니, 페루지노, 라파엘로의 주요 의뢰 작품의 기반이 되었다.[34]





산 마르코 미술관(피렌체)
옥좌에 앉은 성모자와 주위를 둘러싼 성 코스마스, 성 다미아노, 성 요한 등의 성인들이 그려져 있다.
산 마르코 수도원의 프레스코화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 제대화 -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아노와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 도미니크, 성 베드로, 성 프란체스코, 성 마르코, 성 요한 복음사가, 성 스테파노가 함께 있다.
- 제대화 - 12명의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자(실물 크기); 우피치 미술관
- 제대화 - 수태고지
- 두 가지 버전의 성 도미니크와 함께 있는 십자가 처형; 회랑에 있음
- 매우 큰 성모와 20명의 성인과 함께 있는 십자가 처형; 장원에 있음
- 수태고지; 기숙사 계단 꼭대기에 있음.
- 네 명의 성인과 함께 즉위한 성모; 기숙사 통로에 있음
- 동방박사 경배
- 변용
- 나를 만지지 마라
- 무덤에 있는 세 마리아
- 엠마오로 가는 길, 두 명의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가 제자로 나옴
- 그리스도의 조롱
- 여러 버전의 십자가 처형
2. 3. 로마와 바티칸 (1445년 ~ 1455년)
1445년 유제니우스 4세 교황은 프라 안젤리코를 로마로 불러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사의 예배당) 벽화를 그리도록 했다. 이 예배당은 나중에 파울루스 3세 교황에 의해 철거되었다.[35] 바사리(Vasari)는 프라 안젤리코가 니콜라우스 5세 교황으로부터 피렌체 대주교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다른 수도사를 추천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부 사항은 일치하지 않는다. 1445년 교황은 유제니우스 4세였고, 니콜라우스는 1447년 3월 6일 이전까지 선출되지 않았다. 1446년에서 1459년 사이에 해당 대주교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안토니누스 (안토니오 피에로치)였으며, 아드리아누스 6세 교황에 의해 1523년 시성되었다.[36] 1447년 프라 안젤리코는 제자 베노초 고쫄리와 함께 오르비에토에서 대성당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의 다른 제자들로는 자노비 스트로치가 있다.[12][37]
바티칸 궁전 니콜라우스 5세 예배당(바티칸)
1447년부터 1449년까지 프라 안젤리코는 바티칸으로 돌아와 니콜라우스 5세를 위해 니콜리나 예배당의 벽화를 디자인했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두 순교한 부제인 성 스테파누스와 성 로렌초의 삶을 묘사한 장면들은 보조자들에 의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예배당은 밝게 채색된 벽과 금박 장식으로 인해 보석 상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2][14][28][38]
베노초 고쪼리(Benozzo Gozzoli)의 도움을 받아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카펠라 누오바(Cappella Nuova) 천장의 세 부분(''영광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사도들'')을 장식하였다.
바티칸 시국에 있는 니콜라스 5세 교황의 니콜리노 예배당은 아마도 베노초 고쪼리(Benozzo Gozzoli)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의 많은 도움을 받아 ''성 스테파노의 생애'', ''성 로렌스의 생애'', ''복음사가 4인''을 주제로 그려졌을 것이다. 벽과 천장 전체 표면이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테두리와 장식에는 금박이 많이 사용되었고, 청금석으로 만든 밝은 파란색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2. 4. 죽음과 시복
프라 안젤리코는 1455년 로마의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사망했으며,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교회에 매장되었다.[2][14][13] 그의 묘비에는 "내 능력을 아펠레스의 재능에 비유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고 말하십시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2] 주 제단 근처에는 대리석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당시 예술가에게는 매우 특별한 영예였다.[28]윌리엄 마이클 로세티는 프라 안젤리코에 대해 "그는 도미니크 수도사로서 독실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 항상 온화했다. 그의 많은 그림들은 모두 신성한 주제였으며, ... 그는 그리스도의 행위를 묘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라고 평가했다.[14]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2년 10월 3일 프라 안젤리코를 시복했고, 1984년 그를 가톨릭 예술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5] 요한 바오로 2세는 "안젤리코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 그에게 '복되신 안젤리코'라는 칭호를 얻게 해 주었다."라고 언급했다.
3. 주요 작품
프라 안젤리코는 산 마르코 수도원의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을 위해 일련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이 작품들은 마사초가 이룩한 회화 기법의 발전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11] 부유한 후원자의 제약이나 패널 회화의 한계에서 벗어나, 프라 안젤리코는 자신의 깊은 신앙심과 인류에 대한 지식, 그리고 사랑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수도원 각 방에 그려진 명상적인 프레스코화들은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그림들은 단순한 색채를 사용하여 소박하게 그려졌다. 붉은색보다는 보랏빛이 도는 분홍색이 더 많이 사용되었고, 값비싼 파란색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칙칙한 녹색과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의 검은색과 흰색 옷이 사용되었다.[11] 프레스코화에 묘사된 소박한 사람들의 영적인 경험을 방해하는 사치스러운 요소는 전혀 없으며, 각 그림은 그리스도의 삶의 한 장면을 보는 이의 눈앞에 가져다 놓는 듯한 효과를 준다.[11]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 작품들을 보고 감명을 받아 프라 안젤리코에게 많은 성인들이 등장하는 큰 십자가에 못 박힘 장면을 회의장을 위해 그리도록 의뢰했다.[2] 마사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사실적으로 그려진 벽감을 통해 원근법을 회화에 도입했다. 프라 안젤리코 역시 선원근법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었는데,[11] 특히 산 마르코 수도원과 그 앞 광장에 미켈로초와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아케이드를 묘사한 수태고지 그림에서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11]
각 방은 옆에 있는 둥근 머리 모양의 창문과 크기와 모양이 일치하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는 명상을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다.[11] 프라 안젤리코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 중 많은 수가 바로 이 곳에 있다.[11] 특히 안쪽 줄의 방에는 상대적으로 영감이 덜 느껴지는, 반복적인 주제의 그림들이 있는데, 이는 조수에 의해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 많은 그림에는 오란디가 묘사한 9가지 전통적인 기도 자세 중 하나로 장면에 등장하는 도미니크회 성인들이 포함되어 있다.[11]
산 마르코 수도원의 프레스코화 중 주요 작품으로는 《동방박사 경배》, 《변용》, 《나를 만지지 마라》, 《무덤에 있는 세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길》, 《그리스도의 조롱》, 그리고 여러 버전의 《십자가에 못 박힘》 등이 있다.
3. 1. 산 마르코 수도원 프레스코화
프라 안젤리코는 산 마르코 수도원의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을 위해 그린 일련의 프레스코화에서 마사초가 이룩한 발전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11] 부유한 고객의 제약이나 패널 회화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깊은 신앙심, 인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표현하였다. 수도원 방에 있는 명상적인 프레스코화는 칙칙한 녹색과 도미니크 수도사의 검은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11] 프레스코화에 묘사된 소박한 사람들의 영적인 경험을 방해하는 사치스러운 요소는 없으며, 각 그림은 그리스도의 삶의 한 장면을 보는 이의 눈앞에 가져다 놓는 효과를 지닌다.[11]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 작품들에 감명을 받아 프라 안젤리코에게 많은 성인들과 함께 큰 십자가에 못 박힘 장면을 회의장을 위해 그리도록 영감을 주었다.[2] 마사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사실적으로 그린 벽감을 만들면서 원근법을 시도했고, 프라 안젤리코는 선원근법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었다.[11] 특히 산 마르코와 그 앞 광장에 미켈로초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아케이드 안에 있는 수태고지 그림에서 두드러진다.[11]
각 방은 옆에 있는 단일 둥근 머리 창문과 크기와 모양이 일치하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명상적인 목적으로 그려졌다.[11] 프라 안젤리코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 중 많은 수가 그곳에 있다.[11] 특히 안쪽 줄의 방에는 영감을 덜 주는 품질과 더 반복적인 주제의 그림들이 있는데, 조수에 의해 완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1] 많은 그림에는 오란디 방식에 묘사된 9가지 전통적인 기도 자세 중 하나로 장면의 목격자로 도미니크회 성인들이 포함되어 있다.[11]
주요 작품으로는 《동방박사 경배》, 《변용》, 《나를 만지지 마라》, 《무덤에 있는 세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길》, 《그리스도의 조롱》, 여러 버전의 《십자가 처형》 등이 있다.
4. 예술적 특징과 영향
프라 안젤리코는 회화 양식이 변화하는 시대에 활동했다. 이러한 변화는 1세기 전 조토와 그의 동시대인들, 특히 Giusto de' Menabuoi영어의 작품들로 시작되었다. 두 사람 모두 파도바에서 주요 작품들을 제작했지만, 조토는 고딕 양식 화가 치마부에에게 피렌체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는 산타 크로체 성당의 바르디 예배당에 성 프란체스코의 프레스코화 연작을 그렸다. 조토는 열렬한 추종자들을 많이 두었고, 그들은 그의 스타일을 프레스코화에서 모방했다. 그들 중 일부, 특히 피에트로 로렌체티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11]
수도원이 아닌 경우, 후원자는 대개 교회의 기부금의 일부로 부유한 가문이었다. 이러한 (부)를 최대한 과시하기 위해 종교적 헌신이 가장 집중되는 주제, 예를 들어 제단화가 선호되었다. 후원자가 부유할수록, 당시 유행하던 자유롭고 세련된 화풍과 비교하여 더욱 구식 스타일로 보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의뢰받은 그림이 후원자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금박을 더 많이 사용할수록 더 큰 명성을 얻었다. 그림에 사용된 다른 귀금속 재료로는 청금석과 주사가 있었다. 이러한 색깔의 안료는 색조 처리에 적합하지 않았다. 청금석 가루로 만든 청색은 평평하게 칠해야 했다. 금박과 마찬가지로, 후원자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은 색깔의 깊이와 광채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반적인 스타일을 이전 세대의 스타일로 제한했다. 따라서 제단화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프레스코화에서 얻을 수 있는 인상보다 더 보수적이이었다. 반면 프레스코화는 종종 거의 실물 크기의 인물이이었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 화려하지만 구식인 장식에 의존하는 대신 최신 무대 장치의 질을 활용할 수 있었다.[15]
산 마르코 미술관(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교회의 의뢰로 그려진 다련제단화의 상부 패널
프라 안젤리코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젠틸레의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1423년, 우피치 미술관)는 국제 고딕 양식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 그림이 그려지던 당시, 마사초라는 또 다른 젊은 예술가가 카르미네 교회의 브란카치 예배당 벽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사초는 조토의 예술이 함축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피렌체의 몇 안 되는 화가들은 그의 튼튼하고 생생하며 감정적인 인물들을 보고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작업 파트너는 프라 안젤리코와 같은 세대의 나이 든 화가 마솔리노였다. 마사초는 27세의 나이에 사망하여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겼다.[11]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 베노초 고졸리의 정교한 초상화 기법과 프레스코화 기술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연결되며, 기를란다요는 다시 피렌체의 부유한 후원자들을 위해 대규모 작품을 제작했고, 그의 제자 미켈란젤로와 고르네상스로 이어진다.
겸손한 사제였던 프라 안젤리코와 그의 아름다운 마리아상과 시대를 초월한 예수의 수난 그림이 미켈란젤로의 역동적이고 실제보다 큰 작품들과 연결되는 부분은 표면적으로는 거의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두 예술가 모두 가장 중요한 의뢰를 바티칸이라는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후원자로부터 받았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제작을 의뢰 받았을때, 그는 이미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장식된 공간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벽에는 그의 스승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 보티첼리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가들이 그린 '그리스도의 생애'와 '모세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규모 작품이었고, 바티칸의 의뢰에서 기대할 수 있는 호화로운 취급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었다.[34] 이 작품들 위에는 화려한 직물과 금관을 쓴 교황들의 초상화가 나란히 있었다. 율리우스 2세 교황에게 사도들의 옷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장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미켈란젤로는 그들은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었다고 대답했다.[34]
산 마르코 수도원의 작은 방들에서 프라 안젤리코는 회화 기술과 예술가의 개인적인 해석만으로도 파란색과 금색의 값비싼 장식 없이 기억에 남는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34] 장식이 없는 프레스코 기법, 맑고 밝은 파스텔 색상, 몇몇 중요한 인물의 신중한 배치, 표정, 움직임, 제스처의 능숙한 사용을 통해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프라 안젤리코의 예술적 후계자임을 보여주었다.[34] 프레데릭 하트(Frederick Hartt)는 프라 안젤리코를 렘브란트, 엘 그레코, 수르바란과 같은 화가들의 "신비주의를 예언한" 인물로 묘사한다.[34]
4. 1. 양식
프라 안젤리코가 활동하던 시기는 회화에 큰 변혁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약 100년 전 이탈리아 화가 조토 디 본도네의 작품을 기원으로 하여, 주스토 데 메나부오이(en:Giusto de' Menabuoi) 등 프라 안젤리코와 거의 동시대의 예술가들이 이러한 큰 변혁을 추진해 나갔다.[41] 조토와 데 메나부오이는 모두 파도바에서 중요한 작품을 제작했고, 조토는 고딕 양식 수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산타 크로체 성당의 발디 예배당에 그린 성 프란체스코의 프레스코화는 그 이전의 고딕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조토의 화풍에는 많은 열광적인 추종자들이 나타났고,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모방한 화가들 중에는 피에트로 로렌체티처럼 큰 성공을 거둔 사람도 있었다.[34]4. 2. 영향
프라 안젤리코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젠틸레의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1423년, 우피치 미술관)는 국제 고딕 양식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11] 당시 마사초는 카르미네 교회의 브란카치 예배당 벽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조토의 예술을 이해하고 있었고, 피렌체의 몇몇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11] 마사초는 27세의 나이에 사망하여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겼다.[11]프라 안젤리코의 제자 베노초 고졸리의 정교한 초상화 기법과 프레스코화 기술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연결되며, 기를란다요는 다시 피렌체의 부유한 후원자들을 위해 대규모 작품을 제작했고, 그의 제자 미켈란젤로와 고르네상스로 이어진다.[11]
겸손한 사제였던 프라 안젤리코와 그의 아름다운 마리아상과 시대를 초월한 예수의 수난 그림이 미켈란젤로의 역동적이고 실제보다 큰 작품들과 연결되는 부분은 표면적으로는 거의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두 예술가 모두 가장 중요한 의뢰를 바티칸이라는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후원자로부터 받았다.[11]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제작을 의뢰 받았을때, 그는 이미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장식된 공간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벽에는 그의 스승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 보티첼리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가들이 그린 '그리스도의 생애'와 '모세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규모 작품이었고, 바티칸의 의뢰에서 기대할 수 있는 호화로운 취급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었다.[34] 이 작품들 위에는 화려한 직물과 금관을 쓴 교황들의 초상화가 나란히 있었다. 율리우스 2세 교황에게 사도들의 옷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장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미켈란젤로는 그들은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었다고 대답했다.[34]
산 마르코 수도원의 작은 방들에서 프라 안젤리코는 회화 기술과 예술가의 개인적인 해석만으로도 파란색과 금색의 값비싼 장식 없이 기억에 남는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34] 장식이 없는 프레스코 기법, 맑고 밝은 파스텔 색상, 몇몇 중요한 인물의 신중한 배치, 표정, 움직임, 제스처의 능숙한 사용을 통해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프라 안젤리코의 예술적 후계자임을 보여주었다.[34] 프레데릭 하트(Frederick Hartt)는 프라 안젤리코를 렘브란트, 엘 그레코, 수르바란과 같은 화가들의 "신비주의를 예언한" 인물로 묘사한다.[34]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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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身地や愛称を取り入れて通称とすることは中世やルネサンス期には普通のことで、例としてレオナルド・ダ・ヴィンチやロレンツォ・イル・マニーフィコなどがあげ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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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ンドレア・デル・サルト:アンジェリコと同時代のラファエロやミケランジェロたちは全員ベアート・アンジェリコと呼んでおり、これは画家の才能は神からの特別な贈り物であると見なされていたため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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