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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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태국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영토 분쟁을 배경으로 태국이 과거 프랑스에 할양했던 영토 반환을 요구하며 발발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고 일본의 인도차이나 진주가 임박하자 태국은 옛 영토 회복을 위한 행동을 시작했고, 1941년 1월 육상 및 해상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어, 태국은 캄보디아와 라오스 일부 지역을 할양받았지만, 이후 일본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전쟁 결과, 태국은 영토를 획득했으나, 이후 1946년 프랑스에 반환했고, 전쟁의 진정한 수혜자는 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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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쟁의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 프랑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안전을 위해 태국에 불가침 조약 체결을 요청했고, 1940년 6월 12일 방콕에서 프랑스-태국 상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22]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고 독불 휴전 이전에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가 임박해지자, 태국은 옛 영토 회복을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23]
태국의 피분 정권은 비시 정부에 1893년 프랑스-태국 전쟁(Franco-Siamese War영어)에서 프랑스에 할양했던 메콩 강 서안의 프랑스 보호령 라오스(Protectorat français du Laos프랑스어) 영토와 주권, 프랑스 보호령 캄보디아의 바탐방, 시엠레압 반환을 요구했으나, 프랑스는 이를 거부했다.
일본과 우호 관계였던 태국은 일본군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진주할 경우 영토 요구가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다. 태국 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9월경부터 국경 부근에서 양군 간의 소규모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23]
2. 1.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 프랑스는 태국 왕국에 불가침 조약 체결을 요청했다. 이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듬해 1940년 6월 12일 방콕에서 프랑스-태국 상호 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다.[22]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 것, 독불 휴전 이전에 프랑스가 불가침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던 것,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가 임박했던 등의 상황으로 인해 태국은 옛 영토 회복을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23]태국의 피분 정권은 새롭게 발족한 프랑스의 비시 정부에 1893년의 Franco-Siamese War영어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압력으로 할양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내부의 메콩 강 서안까지의 Protectorat français du Laos프랑스어의 영토와 주권, 그리고 프랑스 보호령 캄보디아의 바탐방, 시엠레압 두 주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에 의한 프랑스 본토 점령과 친독 성향의 비시 정부 수립을 계기로 일본군이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했기 때문에, 일본과 우호 관계에 있던 태국으로서는 일본군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진주하게 되면 영토 요구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생겼다. 당시 태국 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고, 9월경부터 국경 부근에서 양군 간의 작은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23]
2. 2.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태국의 입장
1939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프랑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안전을 위해 태국 왕국에 불가침 조약 체결을 요청했고, 이듬해 1940년 6월 12일 방콕에서 프랑스-태국 상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22]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고 독불 휴전(1940년 6월 17일) 이전에 프랑스가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가 임박해지자, 태국은 옛 영토 회복을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23]태국의 피분 정권은 프랑스의 비시 정부에 1893년 프랑스-태국 전쟁 당시 프랑스에 할양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내부 메콩 강 서안의 영토와 주권, 프랑스 보호령 캄보디아의 바탐방, 시엠레압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프랑스는 이를 거부했다.
일본군이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하면서, 일본과 우호 관계였던 태국은 일본군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진주할 경우 영토 요구가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다. 태국 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9월경부터 국경 부근에서 양군 간의 소규모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23]
3. 양측의 군사력
프랑스와 태국 양측은 이 전쟁에서 각자 다른 강점과 약점을 가진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장비 면에서는 태국군에 비해 열세였다. 특히 장갑 전차의 수가 부족하여, 태국군의 전차 부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반면, 태국군은 프랑스군보다 현대적인 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공군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해군력은 양측 모두 제한적이었지만, 태국 해군은 프랑스 해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3. 1. 프랑스군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약 5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1만 2천 명이 프랑스인이었다. 이들은 41개의 보병 대대, 2개의 포병 연대, 그리고 공병 대대 1개로 편성되었다.[10] 비시 프랑스 육군은 장갑 전차가 부족하여, 약 100대에 달하는 태국 왕국 육군 장갑차에 맞서 겨우 20대의 르노 FT 전차만을 운용할 수 있었다.[10] 태국 국경 근처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대부분은 3e régiment de tirailleurs tonkinois|제3 톤킨 저격병 연대프랑스어와 4e régiment de tirailleurs tonkinois|제4 톤킨 저격병 연대프랑스어(톤킨 저격병)의 인도차이나 군을 주력으로, Montagnard (Vietnam)|몽타뉴족영어 대대, Troupes coloniales|식민지 보병 연대영어 대대, 프랑스 외인부대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11]비시 프랑스 해군은 인도차이나에 경순양함 ''라모트-피케'' 1척과 통보함 Dumont d'Urville (aviso colonial)|뒤몽 뒤르빌프랑스어, Amiral Charner (aviso colonial)|아미랄 샤르네프랑스어, Tahure (aviso)|타위르프랑스어, 마른 4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시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은 약 1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약 60대가 전선에서 사용될 수 있는 기종이었다. 여기에는 포테 25 TOE 정찰기/전투폭격기 30대, 파르망 221 중폭격기 4대, 포테 542 폭격기 6대, 모란-솔니에 M.S.406 전투기 9대, 루아르 130 정찰/폭격 수상기 8대가 포함되었다.[12]
3. 2. 태국군
태국군은 프랑스군보다 규모가 약간 크고 비교적 잘 장비된 군대였다.[13] 6만 명으로 구성된 태국군은 4개의 야전군으로 편성되었다. 가장 큰 부대는 5개 사단으로 구성된 부라파 군(Burapha Army)과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이산 군(Isan Army)이었다. 육군 최고 사령부의 직접 통제하에 있는 독립 부대는 기계화 기병 대대 2개, 포병 대대 1개, 통신 대대 1개, 공병 대대 1개, 기갑 연대 1개를 포함했다.포병은 크루프 포와 현대식 보포스 40mm 기관포, 곡사포가 혼합되어 있었고, 60대의 카든 로이드 소형전차와 30대의 빅커스 6톤 전차가 군의 전차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태국 왕립 해군은 톤부리급 해안 방어함 2척, 어뢰정 12척, 일본제 잠수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다.[14] 태국 왕립 해군은 동남아시아의 프랑스 해군보다 열세였지만, 태국 왕립 공군은 현지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 부대보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14] 태국 왕립 공군의 1선 전력을 구성하는 140대의 항공기 중에는 미쓰비시 Ki-30 경폭격기 24대, 미쓰비시 Ki-21 중폭격기 9대, 커티스 호크 75N 전투기 25대, 마틴 B-10 중폭격기 6대, 보트 O2U 콜세어 정찰/공격기 70대가 있었다.[15]
개전 후 10월, 태국군은 사령부 직할 부대 외에 다음과 같은 2개 군을 편성했다.[24]
육군 최고사령부 직속 |
---|
부라파 군 (동부군) | 이산 군 |
---|---|
포병 부대는 19세기 이후의 Krupp gun|크룹포영어와 현대적인 보포스 40mm 기관포, Bofors 75 mm Model 1929|보포스 75mm 기관포영어와 곡사포의 혼성이었다. 전차 부대는 카든 로이드 소형전차 60대, 빅커스 6톤 전차 30대 등 총 100대였다.
공군은 약 500명의 조종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Vought O2U Corsair|보트 O2U 콜세어영어 70대, Curtiss BF2C Goshawk|커티스 호크Ⅲ영어 24대, B-10 6대 외에도 1940년 11월까지 M103 "나고야"라는 이름으로 구입한 97식 경폭격기 24대[25], 97식 중폭격기 9대를 포함한 100~150대의 전투용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해군은 2척의 해방전함(톤부리, 스리 아유타야), 어뢰정 12척(9척의 이탈리아제 트라다급 어뢰정 외 3척), 잠수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다.[26]
4. 전쟁의 경과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폭격하면서 양국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1941년 1월, 태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1941년 1월 5일, 태국 부라파군과 이산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태국군은 라오스를 빠르게 점령했지만,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17]
1월 16일, 프랑스군은 태국군이 점령한 마을에 대규모 반격을 가했으나, 정보 부족과 태국군의 방어로 인해 작전은 중단되었다.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려던 태국군 역시 프랑스 외인부대 포병에 의해 저지되었다.
육상에서의 상황이 악화되자, 프랑스 데쿠 제독은 해군력을 투입했다. 1월 17일, 프랑스 해군 함대는 코 창 섬 앞바다에서 태국 해군 부대를 기습하여 코 창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 해전에서 태국 해군은 어뢰정 2척과 해안 방어함 1척을 잃었지만, 프랑스 해군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18]
1월 24일, 태국 폭격기가 시엠레압 근처 앙코르의 프랑스 비행장을 급습하면서 마지막 공중전이 벌어졌다. 1월 28일, 태국군의 마지막 공습이 시소폰에서 이루어졌다.[15][12]
4. 1. 개전과 초기 공중전 (1940년 11월)
1940년 11월 23일, 양국 간의 외교 관계가 결렬되면서 태국 공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폭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태국은 6기의 마틴 B-10 폭격기를 동원하여 주간 폭격을 실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의 기지 시설을 파괴하고 포테즈 542 등 여러 항공기를 지상에서 격파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모란 솔니에 MS.406 요격기가 태국 공군 폭격기 2기를 격추했다.[15]이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은 4기의 팔만 F.221과 6기의 포테즈 542 등 총 10기의 항공기로 야간 폭격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태국 공군의 전투기와 폭격기에 피해를 입혔지만, 태국군의 전투기와 고사포 부대가 프랑스군의 MS406 전투기 2기와 F221 폭격기 1기를 격추했다.[12]
방콕에서 반프랑스 시위와 민족주의 시위가 격화되는 동안, 메콩강 국경 지역에서는 여러 차례 국경 충돌이 발생했다. 우세한 태국 왕립 공군은 비엔티안, 프놈펜, 시소폰, 바탐방의 군사 목표물에 대해 주간 폭격을 실시했다. 프랑스는 자체 공습으로 보복했지만, 피해는 태국보다 적었다. 태국의 공군 활동, 특히 급강하 폭격은 프랑스 인도차이나 총독 장 데쿠(Jean Decoux) 제독으로 하여금 태국 전투기 조종사들이 상당한 전쟁 경험을 가진 것 같다고 언급하게 만들었다.[16][14]
4. 2. 지상전의 전개 (1941년 1월)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약 5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1만 2천 명이 프랑스인이었다. 이들은 41개의 보병 대대, 2개의 포병 연대, 그리고 공병 대대 1개로 편성되었다.[10] 비시 프랑스 육군은 장갑 전차가 부족하여, 약 100대에 달하는 태국 왕국 육군 장갑차에 맞서 겨우 20대의 르노 FT 전차만을 운용할 수 있었다.[11] 태국 국경 근처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대부분은 3연대와 4연대의 톤킨 총병( ''Tirailleurs Tonkinois'') 인도차이나 보병, 몽타뉴(베트남 고지대 원주민) 대대 1개, 식민지 부대 정규군, 그리고 프랑스 외인부대 부대였다.[11]비시 프랑스 공군( ''Armée de l'Air'')은 약 1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약 60대가 전선에서 사용될 수 있는 기종이었다. 여기에는 포테 25 TOE 정찰기/전투폭격기 30대, 파르망 221 중폭격기 4대, 포테 542 폭격기 6대, 모란-솔니에 M.S.406 전투기 9대, 루아르 130 정찰/폭격 수상기 8대가 포함되었다.[12]
태국군은 프랑스군보다 약간 규모가 크고 비교적 잘 장비된 군대였다.[13] 6만 명으로 구성된 태국군은 4개의 야전군으로 편성되었다. 가장 큰 부대는 5개 사단으로 구성된 부라파 군(Burapha Army)과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이산 군(Isan Army)이었다. 육군 최고 사령부의 직접 통제하에 있는 독립 부대는 기계화 기병 대대 2개, 포병 대대 1개, 통신 대대 1개, 공병 대대 1개, 기갑 연대 1개를 포함했다. 포병은 크루프(Krupp) 포와 현대식 보포스(Bofors) 40mm 자동포와 곡사포가 혼합되어 있었고, 60대의 카든 로이드(Carden Loyd) 경전차와 30대의 빅커스(Vickers) 6톤 전차가 군의 전차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태국 왕립 공군은 현지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 부대보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14] 태국 왕립 공군의 1선 전력을 구성하는 140대의 항공기 중에는 미쓰비시 Ki-30 경폭격기 24대, 미쓰비시 Ki-21 중폭격기 9대, 커티스 호크(Curtiss Hawk) 75N 전투기 25대, 마틴(Martin) B-10 중폭격기 6대, 보트(Vought) O2U 콜세어(Corsair) 정찰/공격기 70대가 있었다.[15]
방콕에서 반프랑스 시위와 민족주의 시위가 열리는 동안 메콩강 국경 지역에서 여러 차례 국경 충돌이 발생했다. 우월한 태국 왕립 공군은 비엔티안, 프놈펜, 시소폰, 바탐방의 군사 목표물에 대한 주간 폭격을 거침없이 실시했다. 프랑스는 자체 공습으로 보복했지만, 그들이 입힌 피해는 태국보다 적었다. 특히 급강하 폭격 분야에서 태국의 공군 활동[14]은 프랑스 인도차이나 총독 장 데쿠(Jean Decoux) 제독으로 하여금 태국 전투기 조종사들이 상당한 전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인 것 같다고 마지못해 언급하게 만들었다.[16]
1941년 1월 5일, 프랑스군이 태국 국경 도시 아란야프라텟을 공격했다는 보고에 따라 태국 부라파군과 이산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프랑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지만, 많은 부대가 장비가 더 우수한 태국군에 의해 쉽게 제압당했다. 태국군은 라오스를 신속하게 점령했지만, 캄보디아의 프랑스군은 결집하여 더 강력한 저항을 했다.[17]
1941년 1월 16일 새벽, 프랑스군은 태국이 점령한 양당쿰과 품프레아브 마을에 대규모 반격을 가하여 이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견고하게 방어 태세를 갖춘 태국군에 대한 부족한 조정과 정보 부족으로 프랑스의 작전은 중단되었고, 프랑스군의 지역 철수로 전투가 끝났다. 그러나 태국군은 전진 배치된 전차가 프랑스 외인부대 포병의 포격에 억제되었기 때문에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할 수 없었다.
태국 육군의 움직임은 느렸다. 1940년 11월 23일 캄보디아 영토에 진입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대와 교전했지만, 다음 날 태국 영토로 철수했다.[30] 1941년 1월 6일, 태국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토 내 루앙프라방 지역(현 라오스)과 밧탐방 지역(현 캄보디아)에 20개 대대를 투입하여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맞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대는 10개 대대로, 중화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태국군에 압도되어 패배를 거듭하며 많은 사상자와 실종자를 내고 철수하는 등 태국군이 승리했다.
이 패배를 계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대는 베트남 병사의 전시 동원을 실시하여 태국군을 영토 깊숙이 유인한 후 반격하는 전략을 세웠고, 1월 16일 캄보디아 밧탐방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태국군은 빅커스 6톤 전차를 장비한 2개 전차 중대 규모의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대를 밀어붙였지만, 지원에 나선 프랑스 외인부대( 오치키스 25mm 대전차포 2문·Canon de 75 M(montagne) modele 1919 Schneider|슈나이더 75mm 곡사포영어 1문 장비)의 공격으로 6톤 전차 3대가 격파되면서 태국군의 공세는 멈췄다.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대는 태국군을 일시적으로 밀어냈지만, 물량에서 우세한 태국군은 프랑스군에 대한 추가 공격을 가했고, 본국이 점령당하여 병력 증원이 어려운 프랑스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4. 3. 코 창 해전 (1941년 1월 17일)
1941년 1월 16일 새벽, 프랑스군은 태국이 점령한 양당쿰과 품프레아브 마을에 대규모 반격을 가하여 이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견고하게 방어 태세를 갖춘 태국군에 대한 부족한 조정과 정보 부족으로 프랑스의 작전은 중단되었고, 프랑스군의 지역 철수로 전투가 끝났다. 태국군은 전진 배치된 전차가 프랑스 프랑스 외인부대 포병의 포격에 억제되었기 때문에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할 수 없었다.[18]육지에서 프랑스군의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됨에 따라 데쿠 제독은 이용 가능한 모든 프랑스 해군력을 작전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1월 17일 이른 아침, 프랑스 해군 함대는 코 창 섬 앞 해상에 정박 중이던 태국 해군 부대를 기습했다. 그 후 일어난 코 창 해전은 프랑스의 전술적 승리였으며, 태국 어뢰정 2척이 침몰하고 해안 방어함 1척이 무력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프랑스는 피해가 없었다.[18]
1941년 1월, 시암 만(태국 만)에서도 태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교전했다. 프랑스 해군은 경순양함 ''라 모트 피케''를 기함으로 하는 함대가 안개 속에서 기습을 감행하여, 규모가 더 컸던 프랑스 해군이 승리했다. 태국 해군의 기함인 해방전함 ''톤부리''가 격침되는 등 프랑스 함대가 승리하였다.
4. 4. 공중전의 지속
방콕에서 반프랑스 시위와 민족주의 시위가 열리는 동안 메콩강 국경 지역에서 여러 차례 국경 충돌이 발생했다. 우월한 태국 왕립 공군은 비엔티안, 프놈펜, 시소폰, 바탐방의 군사 목표물에 대한 주간 폭격을 거침없이 실시했다. 프랑스는 자체 공습으로 보복했지만, 그들이 입힌 피해는 태국보다 적었다. 특히 급강하 폭격 분야에서 태국의 공군 활동[14]은 프랑스 인도차이나 총독 장 드쿠 제독으로 하여금 태국 전투기 조종사들이 상당한 전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인 것 같다고 마지못해 언급하게 만들었다.[16]1941년 1월 24일, 태국 폭격기가 시엠레압 근처 앙코르의 프랑스 비행장을 급습하면서 마지막 공중전이 벌어졌다. 프놈펜에 대한 마지막 태국 공습은 1월 28일 07시 10분에 제50 폭격대대의 마틴 폭격기가 제60 전투대대의 13대의 커티스 P-36 호크(Hawk 75N)의 호위를 받으며 시소폰을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15][12]
캄보디아 상공에서는 태국 공군의 커티스 P-36 호크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의 MS406 전투기 간의 공중전이 벌어졌고, P-36 전투기 2대가 MS406에 격추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측도 태국 공군의 공습으로 MS406 전투기 2대와 폭격기 팔만 F211 1대를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5. 일본의 중재와 종전
일본의 중재로 1941년 5월 9일 도쿄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태국 전쟁은 종결되었다.[13][14]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분쟁 지역을 태국에 할양해야 했다.
전쟁의 결과는 태국에게는 승리였고, 피분송크람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켰다. 반면, 프랑스에게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패배와 고립을 상기시키는 사건이었다.
이 전쟁의 진정한 수혜자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태국과 인도차이나 모두에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일본은 나중에 영국령 버마와 영국령 말레이를 침략하기 위한 군사 기지로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이용하고자 했다. 일본은 피분으로부터 말레이와 버마 공격을 지원하겠다는 비밀 구두 약속을 받아냈으나, 피분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19]
이후 일본과 태국의 관계는 긴장되었고, 피분은 임박한 일본 침략으로 여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미국에 구애하기 시작했다.[20]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태국을 침공했고, 동시에 일본의 말레이 침공도 시작했다. 진주만 공격은 말레이와 태국이 공격받은 지 1시간 반 후에 일어났다. 일본군과 태국군 간의 전투는 5시간 만에 휴전으로 끝났다. 태국은 1945년까지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전쟁 후인 1946년 10월, 메콩 강 태국 쪽에 있는 캄보디아 북서부 지역과 라오스의 두 개 점유지가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가 태국의 국제 연합 가입을 거부하겠다고 위협하자 프랑스의 주권으로 돌아갔다.[21] 이는 1946년 프랑스-시암 협정 조약의 체결로 이어져 문제를 해결하고 두 국가 간의 외교 관계 회복의 길을 열었다.
5. 1. 일본의 중재 개입
일본은 프랑스-태국 전쟁 중재에 개입했다. 1941년 1월 28일 10시에 일반적인 휴전이 발효될 예정이었고, 일본이 주도한 "적대 행위 중지 회의"가 사이공에서 열렸다. 필리프 페탱 원수의 비시 프랑스 정부와 태국 왕국 간의 휴전에 대한 예비 문서가 1941년 1월 31일 순양함 ''나토리''에서 서명되었다.[13][14]전투가 확대되어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본은 아시아에서 우방국인 태국과 프랑스 간의 전투로 양국의 국력이 쇠퇴하는 것을 우려하여 평화 중재에 나섰다. 1941년 1월 21일, 니미 겐고 주태국 공사는 태국으로부터 공식적인 중재 요청 문서를 받았다. 1월 24일에 프랑스 측이 비공식적으로 중재를 수락했고, 1월 28일에 양군은 휴전했다.[31] 휴전 협상 회의는 1월 29일부터 호치민(사이공)에 정박한 일본 해군의 나토리 경순양함에서 열렸고, 1월 31일에 정식 조인되었다.[32]
2월 2일부터 도쿄에서 국경선 획정을 포함한 중재 회의가 열렸지만, 양국의 대립으로 난항을 겪었다.[33] 태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전토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이는 협상을 위한 요구였다.[34] 전황을 유리하게 진행하고 있던 프랑스는 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35]
2월 24일, 일본으로부터 중재 최종안이 제시되었다.[33] 프랑스는 이 최종안을 거부했지만, 일본 측의 강력한 압력으로 몇 가지 유보 조건을 붙인 채 3월 11일에 중재가 성립되었다.[33] 같은 날, 태국에 중재 종료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관공서, 학교, 공장 등의 사이렌, 사찰의 범종을 울려 승리를 축하했다.[36]
이후,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삼국 간에 계속되어 5월 9일에 태국과 프랑스가 도쿄 조약에 서명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분쟁 중인 국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다음과 같은 주들을 태국에 할양했다.[13][14]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태국 |
---|---|
바탐방과 파일린 | 프라 타봉 주 |
씨엠립, 반떼이민체이 및 오다르민체이 | 피분송크람 |
프레아비헤아, 라오스의 짬파삭 주 일부와 빡세 맞은편 지역 | 나콘 짬파삭 주 |
사이냐불리 (루앙프라방 주의 일부 포함) | 란창 주 |
태국은 1904년에 프랑스에 할양한 메콩강 우안의 루앙프라방 대안과 잠파삭 지방, 그리고 1907년에 할양한 캄보디아 북서부의 쁘레아비헤아와 시엠레아프 두 주를 돌려받았다.[37] 단, 시엠레아프 시와 앙코르와트 주변의 유적군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38]
태국 정부는 할양된 지역에 나콘 짬파삭, 피분송크람 및 프라타봉 주를 설치했다. 이 전쟁은 태국의 요구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측이 거의 수용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어, 태국에서는 이 승리를 기념하여 전승기념탑이 방콕에 건립되었다.[39]
5. 2. 도쿄 회의와 평화 조약 체결
일본이 분쟁 중재에 개입하여, 1941년 1월 28일 10시에 일반적인 휴전이 발효될 예정이었다. 일본 주도로 "적대 행위 중지 회의"가 사이공에서 열렸고, 필리프 페탱 원수의 비시 프랑스 정부와 태국 왕국 간의 휴전에 대한 예비 문서는 1941년 1월 31일 순양함 ''나토리''에서 서명되었다.1941년 5월 9일, 도쿄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13][14] 일본의 강압으로 프랑스는 분쟁 중인 국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다음과 같은 주들을 태국에 할양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태국 |
---|---|
바탐방과 파일린 | 프라 타봉 주로 재편성됨 |
씨엠립, 반떼이민체이 및 오다르민체이 | 피분송크람 주로 재편성됨 |
프레아비헤아, 라오스의 짬파삭 주 일부와 빡세 맞은편 지역 | 나콘 짬파삭 주로 재편성됨 |
사이냐불리 (루앙프라방 주의 일부 포함) | 란창 주로 개명됨 |
프랑스-태국 전쟁의 해결은 태국 국민들로부터 널리 환영받았으며, 피분(Phibun)의 개인적인 승리로 여겨졌다. 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열강(비록 약화된 열강이었지만)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냈다. 프랑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인들에게 이 전쟁은 프랑스 함락 이후 그들의 고립을 뼈아프게 상기시키는 사건이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피분은 방콕에 승전 기념탑을 세웠다. 태국은 일본과 독일을 초청하여 기념탑 건립을 축하했다.
일본은 비시 프랑스와의 협력 관계와 현상 유지를 모두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태국은 프랑스로부터 얻은 영토의 4분의 1만을 받아들이고, 프랑스에 피아스트르 600만 개를 양보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5. 3.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태국 국경 확정 위원회
1941년 6월, 도쿄 조약 합의에 따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태국 간 국경 확정 위원회가 설치되었다.[40] 일본, 프랑스, 태국 각국에서 위원 5명, 보조원 5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임명되었다.[40] 일본 대표인 야노 마코토(矢野眞) 위원장을 의장으로 하여, 8월 21일 사이공(사이공)에서 첫 회합이 개최되었다.일본 측 위원은 위원장 야노를 비롯하여 이노우에 고우(井上豪) 총영사, 마나기 요시노부(馬奈木敬信)(육군 대좌), 이와하시 카즈오(岩橋一男)(육군 중좌), 이케다 진(池田人)(해군 대좌)이었다.[41] 이 외에도 보조 위원, 측량 기술자, 사무원 등 총 89명이 일본에서 파견되어, 처음에는 호텔 콘티넨탈(Hotel Continental), 그 후 테스타르 거리를 거점으로 활동했다.[41] 위원회는 현지 조사와 측량을 하면서 회의를 거듭하여, 이듬해 7월에 새로운 국경을 확정하고, 1943년 8월 7일에 폐회했다.[41]
일본 측 보고서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태국 국경 획정 위원회 사업 수행에 관한 일본 위원부 보고서」이다.[42]
일본 대표는 표면적으로는 양국 간 분쟁 조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몇 달 후 시작될 남방 침략을 위한 자료 및 정보 수집이 목적이었다.[43] 위원회 첫 회합이 열리기 전달인 7월 28일에는 이이다 쇼지로(飯田祥二郎)(중장)가 이끄는 제25군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해 있었다.
야노, 이노우에, 이케다는 1943년 8월 7일 해산될 때까지 위원회에 재임했지만, 마나기는 첫 회합 불과 3개월 후인 11월 8일에 이임하여 제25군 참모부장에 취임하여 야마시타 겐분(山下奉文) 휘하에서 말레이-싱가포르 침공에 관여했다. 이와하시도 개전 직후인 12월 10일에 위원을 이임하여, 테라우치 주이치(寺内寿一)의 남방군(南方軍) 참모(교통)에 취임했다.
6. 전쟁의 결과
1941년 1월, 아시아에서 소수의 독립국이자 우방국이었던 태국과 프랑스 간의 분쟁이 격화되자, 일본은 양국의 국력 쇠퇴를 우려하여 중재에 나섰다. 일본의 중재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고, 2월 2일부터 도쿄에서 국경선 획정 회의가 열렸지만 양측의 대립으로 난항을 겪었다.[33] 태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전역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이는 협상용이었고, 전황에서 유리했던 프랑스는 이를 거부했다.[34][35]
결국 일본의 강력한 압력으로 1941년 3월 11일 중재안이 성립되었고, 태국 국민들은 사이렌과 범종을 울리며 승리를 축하했다.[36] 이후 5월 9일, 도쿄 조약이 체결되어 태국은 1904년과 1907년에 프랑스에 할양했던 메콩 강 서안의 루앙프라방 대안과 잠파삭 지방, 캄보디아 북서부의 쁘레아비헤아와 시엠레아프 주를 되찾았다.[37] 다만, 시엠레아프 시와 앙코르와트 주변 유적군은 반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38]
태국 정부는 획득한 지역에 나콘 짬파삭, 피분송크람, 프라타봉 주를 설치했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방콕에 전승기념탑이 건립되었다.[39]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태국은 일본의 동맹국으로 참전했지만, 1945년 8월 16일 선전포고 무효를 선언하여 패전국 지위를 피했다.[44] 그러나 프랑스는 1941년의 영토 할양을 무효로 주장하며 반환을 요구했고, 태국은 이를 거부했다.[45] 1946년 5월, 프랑스군이 태국 영토를 공격하자 태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했지만, 프랑스가 태국의 유엔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할 태도를 보이자, 국제사회 복귀를 우선시한 태국은 결국 영토를 프랑스에 반환했다.[45]
이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해당 지역은 독립한 캄보디아 왕국과 라오스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6. 1. 태국의 영토 획득
일본의 중재로 1941년 5월 9일 도쿄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13][14] 프랑스는 분쟁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다음과 같은 주들을 태국에 할양했다.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 태국령으로 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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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탐방과 파일린 | 프라 타봉 |
씨엠립, 반떼이민체이 및 오다르민체이 | 피분송크람 |
프레아비헤아, 라오스의 짬파삭 주 일부와 빡세 맞은편 지역 | 나콘 짬파삭 |
사이냐불리 (루앙프라방 주의 일부 포함) | 란창 주 |
태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방콕에 전승기념탑이 건립되어 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을 위령했다.[39]
6. 2. 전쟁의 영향
일본이 분쟁 중재에 개입하여 1941년 1월 28일 10시에 일반적인 휴전이 발효되었다. 일본이 주도한 "적대 행위 중지 회의"가 사이공에서 열렸고, 필리프 페탱 원수의 비시 프랑스 정부와 태국 왕국 간의 휴전에 대한 예비 문서가 1941년 1월 31일 순양함 ''나토리''에서 서명되었다. 1941년 5월 9일, 도쿄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13][14] 일본의 강압으로 프랑스는 분쟁 중인 국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다음과 같은 주들을 태국에 할양했다.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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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탐방과 파일린 | 프라 타봉 주로 재편성됨 |
씨엠립, 반떼이민체이 및 오다르민체이 | 피분송크람로 재편성됨 |
프레아비헤아, 라오스의 짬파삭 주 일부와 빡세 맞은편 지역 | 나콘 짬파삭 주로 재편성됨 |
사이냐불리 (루앙프라방 주의 일부 포함) | 란창 주로 개명됨 |
프랑스-태국 전쟁의 해결은 태국 국민들로부터 널리 환영받았으며, 피분(Phibun)의 개인적인 승리로 여겨졌다. 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열강(비록 약화된 열강이었지만)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냈다. 프랑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인들에게 이 전쟁은 프랑스 함락 이후 그들의 고립을 뼈아프게 상기시키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야심 찬 이웃 국가가 약화된 본국으로부터 고립된 먼 식민지를 이용했다고 느꼈다.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지속적인 저항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피분은 방콕에 승전 기념탑을 세웠다.
일본은 비시 프랑스와의 협력 관계와 현상 유지를 모두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태국은 프랑스로부터 얻은 영토의 4분의 1만을 받아들이고, 프랑스에 피아스트르 600만 개를 양보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진정한 수혜자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태국과 인도차이나 모두에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일본은 나중에 영국령 버마와 영국령 말레이를 침략하기 위한 군사 기지로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 후 일본과 태국의 관계는 긴장되었고, 실망한 피분은 임박한 일본 침략으로 여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미국에 구애하기 시작했다.[20]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태국을 침공했고, 동시에 일본의 말레이 침공도 시작했다. 태국은 1945년까지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전쟁 후인 1946년 10월, 메콩 강 태국 쪽에 있는 캄보디아 북서부 지역과 라오스의 두 개 점유지가 프랑스 임시 정부가 태국의 국제 연합 가입을 거부하겠다고 위협하자 프랑스의 주권으로 돌아갔다.[21] 이는 1946년 프랑스-시암 협정 조약의 체결로 이어져 문제를 해결하고 두 국가 간의 외교 관계 회복의 길을 열었다.
6. 3. 전후 처리
이후 일본이 분쟁 중재에 개입했다. 1941년 1월 28일 10시에 일반적인 휴전이 발효될 예정이었고, 일본이 주도한 "적대 행위 중지 회의"가 사이공에서 열렸다. 필리프 페탱 원수의 비시 프랑스 정부와 태국 왕국 간의 휴전에 대한 예비 문서가 1941년 1월 31일 순양함 ''나토리''에서 서명되었다.[13][14] 1941년 5월 9일, 도쿄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13][14] 일본의 강압으로 프랑스는 분쟁 중인 국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다음과 같은 주들을 태국에 할양했다.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 태국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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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탐방과 파일린 | 프라 타봉 |
씨엠립, 반떼이민체이 및 오다르민체이 | 피분송크람 |
프레아비헤아, 라오스의 짬파삭 주의 일부와 빡세 맞은편 지역 | 나콘 짬파삭 |
사이냐불리 (루앙프라방 주의 일부 포함) | 란창 |
프랑스-태국 전쟁의 해결은 태국 국민들로부터 널리 환영받았으며, 피분(Phibun)의 개인적인 승리로 여겨졌다. 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열강(비록 약화된 열강이었지만)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냈다. 프랑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인들에게 이 전쟁은 프랑스 함락 이후 그들의 고립을 뼈아프게 상기시키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야심 찬 이웃 국가가 약화된 본국으로부터 고립된 먼 식민지를 이용했다고 느꼈다.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지속적인 저항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피분은 방콕에 승전 기념탑을 세웠다.
일본은 비시 프랑스와의 협력 관계와 현상 유지를 모두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태국은 프랑스로부터 얻은 영토의 4분의 1만을 받아들이고, 프랑스에 피아스트르 를 양보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진정한 수혜자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태국과 인도차이나 모두에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일본은 나중에 영국령 버마와 영국령 말레이를 침략하기 위한 군사 기지로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이용하고자 했다. 일본은 피분으로부터 말레이와 버마 공격을 지원하겠다는 비밀 구두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 일본과 태국의 관계는 긴장되었고, 실망한 피분은 임박한 일본 침략으로 여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미국에 구애하기 시작했다.[20]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태국을 침공했고, 동시에 일본의 말레이 침공도 시작했다. 태국은 1945년까지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전쟁 후인 1946년 10월, 메콩 강 태국 쪽에 있는 캄보디아 북서부 지역과 라오스의 두 개의 점유지가 프랑스 임시 정부가 태국의 국제 연합 가입을 거부하겠다고 위협하자 프랑스의 주권으로 돌아갔다.[21] 이는 1946년 프랑스-시암 협정 조약의 체결로 이어져 문제를 해결하고 두 국가 간의 외교 관계 회복의 길을 열었다.
7. 인명 피해
프랑스-태국 전쟁에서 양측의 인명 피해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군은 총 321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장교는 15명이었다. 1월 28일 이후 장교 6명, 부사관 14명, 병 158명 등 총 178명이 실종[13]되었고, 북아프리카인 17명, 프랑스인 80명, 인도차이나인 125명 등 총 222명이 태국군의 포로[15]가 되었다.
태국군은 전사 54명, 부상 307명[7]의 피해를 입었다. 코창 해전에서 태국 해군과 해병대원 41명이 사망하고 67명이 부상당했다. 이 해전에서 HTMS ''톤부리'' 소속 20명, HTMS ''송클라'' 소속 14명, HTMS ''촌부리'' 소속 2명이 사망했다. 태국 공군은 13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힌 태국 군인은 21명이었다.
7. 1. 프랑스군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약 5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1만 2천 명이 프랑스인이었다. 이들은 41개 보병 대대, 2개 포병 연대, 공병 대대 1개로 편성되었다.[10] 비시 프랑스 육군은 장갑 전차가 부족하여, 약 100대에 달하는 태국 왕국 육군 장갑차에 맞서 겨우 20대의 르노 FT 전차만을 운용할 수 있었다. 태국 국경 근처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대부분은 3연대와 4연대의 톤킨 총병(인도차이나 보병), 몽타뉴(베트남 고지대 원주민) 대대 1개, 식민지 부대 정규군, 프랑스 외인부대 부대였다.[11]비시 프랑스 해군은 인도차이나에 경순양함 ''라모트-피케'' 1척과 구축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시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은 약 1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약 60대가 전선에서 사용될 수 있는 기종이었다. 여기에는 포테 25 TOE 정찰기/전투폭격기 30대, 파르망 221 중폭격기 4대, 포테 542 폭격기 6대, 모란-솔니에 M.S.406 전투기 9대, 루아르 130 정찰/폭격 수상기 8대가 포함되었다.[12]
프랑스군은 총 321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15명이 장교였다. 1월 28일 이후 행방불명자는 총 178명(장교 6명, 부사관 14명, 병 158명)이었다.[13] 태국군은 222명(북아프리카인 17명, 프랑스인 80명, 인도차이나인 125명)을 포로로 잡았다.[15]
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 항공기의 약 30%가 사용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는데, 일부는 공습으로 인한 경미한 손상이 수리되지 않은 결과였다.[14] 프랑스 공군은 지상에서 파르망 F221 1대와 모란-솔니에 M.S.406 2대가 파괴된 것을 인정했지만, 실제 손실은 더 컸다.[12]
7. 2. 태국군
태국군은 프랑스군보다 병력 규모가 약간 크고 장비도 비교적 잘 갖춰져 있었다.[13] 태국 육군은 6만 명 규모로, 4개의 야전군으로 편성되었다. 가장 큰 부대는 5개 사단으로 구성된 부라파 군과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이산 군이었다. 육군 최고 사령부 직할 독립 부대로는 기계화 기병 대대 2개, 포병 대대 1개, 통신 대대 1개, 공병 대대 1개, 기갑 연대 1개가 있었다. 포병은 크루프(Krupp) 포, 현대식 보포스(Bofors) 40mm 자동포와 곡사포 등으로 구성되었고, 카든 로이드(Carden Loyd) 경전차 60대와 빅커스(Vickers) 6톤 전차 30대가 주력 전차 전력이었다.태국 왕립 해군은 톤부리급 해안 방어함 2척, 어뢰정 12척, 일본제 잠수함 4척을 보유하고 있었다.[14] 태국 해군은 동남아시아의 프랑스 해군보다 열세였지만, 태국 왕립 공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둔 프랑스 공군(Armée de l'Air)보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위에 있었다.[14] 태국 공군의 1선 전력은 140대의 항공기로 구성되었는데, 미쓰비시 Ki-30 경폭격기 24대, 미쓰비시 Ki-21 중폭격기 9대, 커티스 호크 75N 전투기 25대, 마틴 B-10 중폭격기 6대, 보트 O2U 콜세어 정찰/공격기 70대 등이었다.[15]
태국군은 전사 54명, 부상 307명의 피해를 보았다.[7] 해군에서는 선원과 해병대원 41명이 사망하고 67명이 부상당했다. 코창 해전에서는 36명이 사망했는데, HTMS 톤부리에서 20명, HTMS 송클라에서 14명, HTMS 촌부리에서 2명이 사망했다. 태국 공군은 13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힌 태국 군인은 21명이었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항공기 5대를 격추하고 17대를 지상에서 파괴했다고 주장했지만, 태국 공군도 공중에서 3대, 프랑스군의 태국 비행장 공습으로 5~10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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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35]
서적
2007
[36]
뉴스
バンコク、戦勝に沸く
東京日日新聞
1941-03-12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비디오
日本ニュース第65号
https://www2.nhk.or.[...]
[41]
비디오
日本ニュース第74号
https://www2.nhk.or.[...]
[42]
아카이브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43]
서적
情報なき戦争指導
原書房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간행물
The History of the Air Force in the Conflict with French Indochina
Royal Thai Air Fo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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